수요예배/특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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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24일 수요예배
✦ 하나님이 내시는 길을 보라 3 ✦
“진정한 부흥을 일으키는 기도”
(이사야 40장 3~8절)
1. 기도하는 사람이 세상을 바꾼다
이 세상이 잘못되어 있으며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잘못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일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은 똑똑하거나 말을 그럴 듯하게 하거나 돈이 많거나 권력을 쥔 사람들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막 11:17)
구약에서부터 하나님은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그냥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우리끼리가 아니라 모든 민족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당시 이방인들을 포함시킨다는 것은 대단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기도하는 집이 성전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성전이라도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이것은 교회에게도 큰 의미를 줍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한마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도하는 곳입니다. 그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곳저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것입니다. 그들이 기도하며 기도의 불길이 타오르는 곳입니다. 기도 속에서 서로 교제하고 서로 사랑하며, 기도로 함께 문제를 극복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별로 행사가 없는데, 그 중에 몇 안 되는 행사는 모두 특별기도회입니다. 교회가 기도하면 능력이 생긴다는 것을 이번 다니엘 금식기도로 다시 한 번 체험했습니다. 교회가 기도하면 쓸 데 없는 말이 줄어들고 비난과 불평이 사라지며, 은혜가 넘치고 열정과 기쁨이 가득하게 됩니다. 또한 미움과 갈등이 사라지고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기도하고 있지 않을 때에는 그런 일들이 계속 일어나지만, 기도하면 그런 것들이 다 사라집니다. 아니, 기도해도 그런 문제들이 계속 일어날 수 있는데 별로 영향력을 미치지 못합니다.
개인적으로도 똑같습니다. 자기가 주로 어떤 말을 하는지 한 번 살펴보십시오. 쓸 데 없는 말, 비난, 불평, 불만, 원망, 미움과 같은 말을 주로 한다면, 그 주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의 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기도를 오래 하더라도 그런 말들을 한다면, 그 기도는 온전한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함께 모여 기도하면 반드시 부흥이 일어납니다. 기도하면 큰 문제도 작은 문제가 되지만, 기도하지 않으면 별 것 아닌 작은 문제도 굉장히 크게 보입니다.
그래서 옛날이나 지금이나, 교회가 살아나는 길은 오직 기도하는 길뿐입니다. 물론 이것은 성경 말씀을 좀 등한시해도 기도만 하면 다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는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의 능력이 역사하게 하는 통로가 바로 교회의 기도라는 것입니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6-8절)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섭니다. 그래서 말씀 없이 기도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말씀의 능력이 역사하게 하는 통로가 기도라는 말입니다.
혹시 말씀은 등한시하면서 기도만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의 뜻만 구하는 우상 숭배식 기도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말씀 위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반면, 말씀에는 열심을 내지만 기도하지 않는 교회에는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말씀 위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말씀으로 기도하는 교회는 결코 망하지 않으며, 반드시 놀라운 역사를 체험합니다.
교회가 기도할 때 숨겨진 죄들이 드러나고, 회개와 회복 운동이 일어나면서 교회가 정결해지고 거룩해집니다. 거룩함과 정결함이 없는 수적 성장은 교회에 사실 독이 될 뿐입니다. 속으로는 썩어가고 있는데 덩치만 커진다면 건강한 게 아닙니다. 결국 무너지고 맙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교회의 위기는, 많은 교회들이 거룩함과 정결함은 없어도 적당히 타협하며 하다가 수적으로 늘어난다면 그것을 부흥이라고 생각하며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전혀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게 문제입니다. 그런 수적 성장이 이루어지는 교회들은 요즘 대부분 수평 이동으로 이루어집니다. 수평 이동이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진정한 부흥은 아닙니다.
참된 부흥이란, 잃어버린 영혼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모든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로 자라가며, 교회 가운데 회개 운동이 일어나서 거룩함과 정결함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기도할 때 마귀의 세력이 물러갑니다. 교회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해집니다. 이러한 기도의 불길이 우리 교회와 모든 교회들 위에 활활 타오르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각자뿐 아니라 교회의 기도제목이 있고, 또 나라에도 있습니다. 정말 기도하지 않고는 불안해서 살 수 없는 시대입니다. 먼저, 우리 각 사람마다 개인기도의 불이 붙어야 합니다. 집에서, 사무실 책상 앞에서, 사업장에서, 운전하는 자동차 안에서, 또 휴식을 하면서, 산책을 하면서, 언제든지 쉬지 않고 기도하는 습관을 들여야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기도를 즐거워하며, 기도에 재미가 들리면 좋겠습니다. 싫은데 억지로 5분, 10분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기도하는 은혜를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는 동안 우리 육신의 병과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고, 우리가 중보기도를 하는 분들의 병도 낫게 되기를 원합니다. 기도하는 동안 무너진 가정이 회복되고, 갈등에 있던 관계들이 풀리고, 어려움에 빠진 사업과 직장에 새로운 길이 뚫리고, 놀라운 은혜가 넘치기를 원합니다. 기도를 통해 잠자던 사람이 일어나고, 실패할 사람이 성공하게 되며, 망할 사람이 다시 일어서는 역사가 일어나기 원합니다.
2. 지금도 하나님은 끊임없이 일하신다
1) 광야라는 통로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3절)
바로 이 예언의 말씀은 이 말씀이 선포된 지 약 700년 후에 광야에서 예수님이 오실 것을 선포한 세례 요한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됩니다. 세례 요한의 선포는 광야에서 주님이 오실 길을 예비하는 자의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마 3:3)
그런데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라는 말씀은 흥미로운 표현입니다. 왜 하필 광야입니까? 사람들이 많은 예루살렘이나 산이 아니라 광야입니다.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길은 항상 광야에서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 푸른 초장이나 쉴 만한 물가나 아름다운 산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이 황량하고 메마르고 외로운 광야에 하나님의 길이 난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사역을 하던 그 당시 유대의 상황도 광야와 같이 힘든 시대였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압제 아래서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 같은 악한 사람의 통치를 받았고, 종교적으로는 썩어빠진 제사장들과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이 권력을 잡은 때였습니다.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눅 3:2)
원래 한 시대에 대제사장은 한 명이고 그가 죽으면 그 다음 아들이 계승하는 것인데, 이때는 대제사장이 두 명이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종교가 얼마나 타락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안나스와 가야바는 장인과 사위 사이였는데, 가야바가 당시 공식적인 대제사장이었지만 은퇴한 장인 안나스가 보이지 않는 권력을 뒤에서 행사하고 조종하면서 장인과 사위 간에 권력 암투가 심하던 때였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셨을 때도 대제사장 가야바가 아니라 안나스의 집으로 갑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역사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이 아무것도 안 하신 것 같았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말라기를 끝으로 하나님이 400년 동안 침묵하셨는데, 그 400년 동안 유대 땅에 엄청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헬라 제국과 로마 제국, 그 사이의 마카비 왕국을 통해 잠시 독립을 했다가 그 후 또 로마가 밀고 들어오는 등, 복잡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헤롯 대왕과 그 이전 그의 아버지 안티파터가 로마에 줄을 서는 이야기 등, 아주 복잡했습니다.
헬라 제국 후에 프톨레미 왕조와 셀류코스 왕조 등, 아주 복잡한 상황 속에서 유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버리신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고, 오히려 더 열심히 일하고 계셨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선물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실 준비를 보이지 않게 하고 계셨고, 그에 앞서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예비하도록 세례 요한을 보내셨습니다.
지금도 마치 세상이 주인 없는 것처럼, 질서가 없는 것처럼 혼란스럽게 돌아가도 하나님이 역사의 주권자이시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다스리십니다. 우리 눈에 안 보인다고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으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모른다고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일하고 계십니다.
2)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시작되는 부흥의 불길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 중에 아주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 어두운 시대를 뚫고 일어나는 부흥의 불길은 항상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시작됩니다.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 선택받은 세례 요한은 당시 대제사장도 아니었고, 그가 말씀을 선포했던 곳 역시 화려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아니라 황량한 광야였습니다. 대개 사람들이 ‘이 정도 조건과 환경을 갖추어야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던 사람이며 전혀 의외의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광야에 있던 세례 요한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오실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 쓰임 받는 믿음의 사람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전혀 그럴 듯해 보이지 않는 평범한 모습의 사람일지 모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교회도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는 성공하지 못한 것 같고 광야와 같이 척박해 보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의 특징은 세상에서의 높음이나 성공이나 능력이나 재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교회의 특징은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의 화려함이 아닙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광야 같이 볼품없는 사람들을 통해, 광야 같이 아주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들과 교회들을 통해 은혜가 임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환경이 너무 좋아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 중 하나가 19세기 수백만의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한 전도자 드와이트 무디였습니다. 무디는 집안이 가난해서 초등학교 밖에 못 나왔습니다. 구두수선공으로 일하던 그에게 주일학교 교사였던 에드워드 킴볼이 복음을 전했고, 복음을 들은 무디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 가슴에 불이 일어나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시카고의 거리에서 방황하던 아이들, 불량배들, 부두 노동자들, 감옥의 죄수들, 거리의 실업자들, 병원의 환자들처럼 광야 같은 사람들을 찾아가며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남북전쟁 이후 많은 상처를 받았던 미국 사람들에게 무디가 인도한 부흥집회의 영향력은 대단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처럼 무디나 세례 요한 같이,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별 볼 일 없는 것 같은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볼 때 어떤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실 때 어떤가 입니다. 무디와 세례 요한은 하나님이 보실 때 믿고 쓰실 만큼 신실한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을 가리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인기가 날로 높아지고 자신은 낮아질 때 정말 위대한 고백을 했습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는 신랑이 오는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신랑의 음성을 들으면 크게 기뻐한다. 나는 이런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요 3:29-30, 새)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에게 몰려올 정도로 큰 인기를 누리던 사람이 그렇게 자기를 낮춘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흉내만 내는 겸손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거룩한 겸손입니다. 거룩한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알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이러한 겸손으로 가득한 사람이 됩니다.
여기 있는 우리는 저를 포함해서 대부분 교회에서 사역자들입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가져야 할 마음이 바로 이런 세례 요한의 자세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죄인이고, 오직 하나님을 드러내는 통로입니다. 나는 낮아져야 하겠고 예수님은 높아지셔야 합니다. 너무나 부족한 종이지만, 주님께서 나를 통해 이렇게 역사해주시고 주님의 일을 이루어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면서 섬겨야겠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이루어주십니다.
3. 주님이 역사하시도록 마음속에 하이웨이를 만들라
우리가 인생길에서 광야를 지나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바로 그때가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때입니다. 힘들어서 피하고 싶고 벗어나고 싶을 때, 그때가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때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때는 우리의 마음이 가장 열려 있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잘나갈 때는 자기가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광야 속에서 우리 마음에 길을 깔아서 하이웨이를 내십니다. 그런 주님의 하이웨이가 깔려야 왕이신 주님께서 오실 수 있습니다. 광야는 우리의 마음을 낮추고 겸손하게 만들어서 주님의 길을 준비하게 합니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4절)
고대 중동의 길들은 대부분 좁았고 울퉁불퉁했습니다. 그래서 왕이 어딘가로 행차할 때는 먼저 선발대가 파견되어 왕이 온다는 것을 알려주고, 그 지역 사람들과 힘을 합쳐서 왕이 오는 길에 있는 움푹 파인 골짜기를 메우고 튀어나온 언덕들을 깎아서 고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정말 엄청나게 힘든 일이었습니다.
4절에 나오는 지형을 설명하는 단어들을 보십시오. 골짜기, 산, 언덕, 평지와 같은 표현은 사실상 우리의 영적 상태를 상징해주는 단어들입니다.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데 실제적으로 이스라엘에 가서 유대 땅을 부수고 메우는 일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오시기 때문에 우리의 영적 상태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들어올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 밭을 기경해야만 합니다.
1) 열등감의 골짜기 메우기
먼저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라고 하는데, 이것을 우리 마음에 적용해보면 마음의 골짜기가 깊은 상태, 가난하고 연약하여 열등감이 많고 기가 죽어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면 열등감은 어느 정도 다 있게 마련이지만, 열등감이 특히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열등감이 전혀 없을 것 같은 사람들에게도 열등감이 있습니다. 학벌이 부족하다고, 외모가 부족하다고, 가진 재산이 부족하다고 하며 열등감에 시달립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열등감은 상대적입니다. 우리 스스로 끊임없이 계급을 만드는 겁니다. 열등감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헌신하는 데 큰 장애가 됩니다. 열등감 때문에 제대로 헌신하지 못하고 겉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모세가 가나안을 정탐하도록 열두 명을 보냈을 때, 그들은 200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하여 정탐꾼으로 뽑힐 정도로 뛰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각 지파별로 한 명만 뽑아서 그런 지도자 12명을 내보낸 겁니다. 그런데 그들 중 대다수인 10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의 아낙 자손을 보고 돌아와 뭐라고 합니까?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민 13:33)
그들은 열등감을 느낍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가리켜 메뚜기 같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때부터 자기들이 한 말 그대로 메뚜기의 마인드를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기들을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불러주셨는데, 자기들 스스로 메뚜기라고 말하고 믿은 그 순간부터 약속의 땅을 정복할 꿈이 죽어버렸습니다. 40년 광야 생활 동안 그 꿈을 죽인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열등감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의 열등감은 순식간에 모든 백성에게 퍼져 나갔고, 다들 두려움에 사로잡혀 통곡하면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며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열등감은 자기만 시험에 들게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다 시험에 들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우리 마음속에 있는 모든 열등감의 골짜기들을 하나님께서 다 메워주실 것을 믿고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길이 험해도 쓰러지지 않을 것이고, 아무리 적이 강해도 넉넉히 이길 것입니다.
자꾸 나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나를 나로 만드셨지 저 사람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내가 아니라 저 사람이 되려고 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거거에 너무 인생을 낭비합니다. 문제의 크기 때문에 압도될 필요도 없습니다. 그 대신 오직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시키십시오. 주님께서 엄청난 일들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2) 교만의 언덕 깎기
그 다음으로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라고 합니다. 이것은 튀어나온 자아의 교만을 깎는 것이라고 적용해볼 수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건성으로 듣고 참고만 합니다. 예수님을 믿긴 믿는데 전적으로 주님만 의지하지는 않습니다. 자기가 알아서 합니다.
이런 교만을 깨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갈등과 고난을 주십니다. 내 힘으로 어쩔 수가 없는 고난 속에 들어가게 되면, 교만이 부서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마음이 찢어지고 아주 쓰라리게 아픕니다. 자존심과 자아가 깨지는 것처럼 아픈 게 없습니다. 사업이 망해서, 직장에서 해고당하거나 좌천당해서 자존심이 상합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해서,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해서 남에게 상처를 주고 깨지면서 자존심이 아주 상하고 견디기 힘들어집니다.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교만이 깎여 나갑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크고 작은 사건을 통해 우리 마음속의 산과 언덕들을 깎아내십니다. 그럴 때 아주 고통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오히려 그것이 축복의 시작이 됩니다. 교만이 빠져나간 사람에게는 은혜의 눈물이 고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 밭이 주님께서 오셔서 사용하시기에 편한 하나님의 하이웨이가 됩니다.
3) 상처로 울퉁불퉁한 마음 밭을 고르게 하기
또한 4절은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가끔 보면 마음이 항상 꼬여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정적이고, 냉소적이고, 지나치게 예민하고, 상처가 많은 마음의 소유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들 때문에 온전히 주님께 집중하지 못하는 우리의 산만한 마음을 깨끗하게 정리해주십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 밭에 주님께서 오실 길이 준비되는 것입니다.
왜 이런 마음의 치유가 필요합니까? 마음이 건강하지 않으면 성령의 불을 제대로 끌어당길 수 없고, 그렇게 되면 주님의 하이웨이가 깔릴 수 없으며 그러면 주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힘차게 흘러들어올 수가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길이 잘 깔려야 차들이 다닐 수 이듯이, 마음이 건강해야 주님의 은혜를 제대로 흡수할 수 있고, 좋은 마음 밭이 되어야만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잘 심겨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4. 기도로 주님의 길을 예비하라
성령님은 우리가 기도로 마음 밭을 잘 기경하기를 원하십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마음의 길을 잘 준비한 사람은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날마다 체험하게 됩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5절)
5절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라는 것은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구약의 이사야 시대에는 이것이 메시야의 탄생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고 또 나중에 성령이 오셔서 지금 성령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 말씀을 적용한다면, 우리가 보게 될 ‘여호와의 영광’은 우리에게 몰려온 주님의 새로운 은혜와 부흥의 불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역사 2천 년 동안에 엄청난 영적 부흥이 이루어진 시대들이 있었습니다. 20세기 초 3년 동안 100만 명 이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던 영국 웨일즈 지방의 대 부흥은 그 이전에 수많은 사람들의 중보기도로 준비되었습니다.
1859년 이후부터 웨일즈 곳곳에서 크고 작은 부흥의 조짐들이 계속 있었는데, 그러다가 1903년에 접어들면서 4명의 웨일즈 청년들이 매일 밤 자기 나라의 부흥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기도 모임이 점점 커지면서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매일 밤 웨일즈의 부흥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하던 중 마침내 1904년에 엄청난 성령의 불길이 웨일즈 전역을 휩쓸었는데, 그 부흥의 주역은 에반 로버츠(Evan Roberts)라는 26세의 젊은 신학생이었습니다. 그는 웨일즈 부흥이 일어나기 10년 전부터(16세 때부터) 자기 지역의 부흥을 위해 기도했다는 겁니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하나님께서 크고 놀라운 부흥을 일으키고자 하실 때는 먼저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도하게 하십니다. 마음속에 깊은 영적 갈망을 일으켜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 부르짖을 때 하늘 문을 여시고 은혜의 빛줄기를 부어주십니다. 이처럼 합심해서 드리는 우리의 기도가 부흥의 길을 예비한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혼자도 기도해야겠지만, 합심해서 드리는 기도가 너무나 중요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부흥은 단순히 숫자가 많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부흥의 결과로 그렇게 될 수는 있지만, 단지 숫자가 늘어났다고 부흥은 아닙니다. 부흥은 영어로 ‘revival’인데, 그대로 직역하면 ‘to live again’, 즉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숨은 쉬고 있는데 생명력이 없는 크리스천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부흥은 그러던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통해 잃어버린 영혼들이 주님 앞에 나오는 것이 참된 부흥입니다.
부흥의 불길이 임하면 잠자던 성도들의 영혼이 다시 살아납니다. 그리고 주님을 처음 영접했던 때의 그 첫사랑의 감격이 회복됩니다. 부흥의 불길이 임하면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강렬하게 체험되고, 시키지 않아도 자신의 죄를 자복하는 회개의 눈물이 터져 나오게 됩니다. 부흥의 불길이 임하면 성령께서 불처럼 바람처럼 임하시면서 우리 육신과 마음의 병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부흥의 불길이 임하면 의무감으로 마지못해 교회에 나와서 형식적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간신히 봉사하던 신자들의 나태함과 게으름이 산산이 깨어지게 됩니다. 부흥의 불길이 임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마음이 불같이 뜨거워지면서, 감사와 기쁨을 느끼며 새로운 열정이 솟아나 예배가 바뀌고 사역의 태도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진정한 부흥은 교회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부흥을 체험한 개인이 변하면서, 그 가정이 변하고 교회 전체가 변하며, 지역사회가 변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기도제목이 되어야겠습니다. 기도가 단순히 개인이나 교회의 영적 체질을 바꾸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 지역 한인사회를 바꾸고, 이 도시를 바꾸고, 오하이오를 바꾸고, 전 미국을 변화시키는 부흥의 역사로 연결되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이 불확실성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부흥의 불길이 너무나 필요합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이렇게 기도하며 주님이 오실 길을 예비해야겠습니다.
‘주여,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이 땅에 임하여 주시옵소서! 성령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가운데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게 하셔서, 이 땅을 변화시켜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