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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927일 수요예배

예수신경 27

예수님과 함께하기(3)

산 위에서

(누가복음 928~36)

 

 

1.   변화 산 위에서 예수님과 함께하기

 

우리가 살면서 불안해하는 것 중 하나는, 갑자기 어떤 사고나 재난이 일어나서 그것을 통해 비극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크게 다치거나, 허리케인이나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로 인해 목숨을 잃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게다가 요즘은 유명한 여행지에조차 테러의 위험도 있습니다.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은 너무나 괴롭고 비극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런 비극이 우리의 삶을 극적으로 바꾸어놓기도 합니다. 2001911일에 일어난 테러 공격이 좋은 예가 됩니다. 그때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슬픔과 괴로움을 겪었지만, 그것을 통해 오히려 새로운 용기를 얻고 삶이 변화되었다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우리 모두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특히 비극적인 죽음은 인간의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들며 우리에게 ?’라는 질문을 하게 만듭니다. 비극은 피상적인 대답을 넘어 생명의 신비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도록 우리를 몰아갑니다. 그럴 때 우리는 두 가지 선택이 우리 앞에 놓여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는 소망에 마음의 닻을 내리고 비극의 거센 바람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소망에 등을 돌린 채 거센 바람에 휩쓸려 절망의 늪에 빠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비극과 죽음이라는 거친 바람에 정면으로 맞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무언가를 우리에게 제공해주십니다. 무언가는 우리가 죽음에 도전할 수 있고 비극에 정면으로 맞설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지금 깨닫는 것 이상의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길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과 우리의 죽을 몸을 뛰어넘는 삶이 분명히 존재하며, 아바 아버지와 함께 하는 영원한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곳과는 차원이 다른 놀라운 세계에서 영원히 살고 있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우리가 느끼는 고통이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슬픔을 끌어안고 소망 가운데 살게 해줍니다.

 

예수님은 그 다른 세계영원한 세계를 설명하시며 또 보여주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반대의 움직임이 점차 강해지고 있다는 것과, 자신이 곧 죽게 될 것이며 또한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을 가장 가까운 제자들에게 설명하십니다.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22)

 

그런데 바로 그러한 삶, 즉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경험하게 될 삶이라는 사실도 이야기하십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23-24)

 

그때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 몇 명을 산으로 데려가셔서 더 많은 것, 곧 영원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그래서 산 위로 올라가신 후 제자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예수님의 몸이 변화됩니다.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29)

 

마가복음에 보면 세상에서 빨래하는 사람이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하얗게 되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되었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이 변화가 예수님의 부활을 미리 보여주는 영광스러운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27)

 

하나님의 나라를 본다는 것이 여기서 예수님이 변형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게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변형되심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변형은 영광의 부활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고, 그 부활은 십자가 위에서의 비극적 죽음에 대한 답변이 됩니다.

 

예수님이 산 위에서 용모가 변화되셨을 때 거기에는 죽음의 분위기가 둘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통치자들의 손에 의해 죽을 것임을 말씀하셨고, 또한 제자들 역시 그렇게 죽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변형의 와중에 토라(율법)를 대표하는 모세와 예언자를 대표하는 엘리야가 그 자리에 나타납니다.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30-31)

 

여기서 별세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엑스 호도스(ex hodos)’입니다. 그러니까 엑소더스(Exodus)’입니다. , 출애굽과 같은 단어입니다. 밖을 향해 길을 떠난다는 뜻의 이 단어는, 예수님의 죽음이 곧 지금 이 세상의 삶을 넘어서 다른 세계로 떠나가신다는 사실을 암시해줍니다.

 

그런데 지금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대화하는 것은 결혼식에 와서 장례예배를 드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영광의 모습으로 변화되신 순간에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변화 산의 변형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대답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 부활이 있다는 것에 대한 증거를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변형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28)

 

예수님이 왜 산에 올라가셨습니까?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기도하실 때 변형이 되셨습니다. 이 구절이 예수님이 변형된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기 위해 하나님을 체험하실 필요가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신비로운 체험을 갖기 위해 산 속으로 들어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에게 영원한 생명을 알려주시기 위해 변형이 되셨습니다. 기도하다 변형되셨습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이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변형은 예수님 자신이 아니라 제자들과 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변형되신 예수님은 제자들의 손을 잡아 그들이 그 길을 한두 걸음 걷도록 이끄셨고, 그 길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미리 그들이 보게끔 해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을 인도하셔서, 지금 너무나 좁은 세상의 시각에 갇혀서 사는 제자들에게 저 광대한 영원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미리 엿보게 해주셨습니다.

 

이때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예수님의 현재의 모습을 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장차 어떤 모습이 되실지 믿음의 눈을 통하여 살짝 엿본 것입니다. 여기서의 영광은 그저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모세와 엘리야도 영광중에 나타났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13:43)

 

제자들이 산 위에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의 모습 가운데 본 것은 그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던 영광입니다(31). 제자들은 영광스럽게 된 이 세 사람의 몸에서 죽음을 뛰어넘은 자신들의 모습 또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들도 이 세 사람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을 미리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변화 산 위의 예수님께로 나아가, 그분의 제자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의 무리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역시 그들처럼 언젠가 영광스럽게 변화되어 빛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자리에 예수님과 함께 서는 것은 삶에 대해 변화된 관점을 가져옵니다.

 

 

2.   오늘의 변화된 관점

 

우리가 예수님의 변형 가운데서 보는 것은 그분의 신성이 아니라 영화된 그분의 인성인데, 바로 그것이 우리가 그렇게 될 것을 미리 보여주시는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이 정말 우둔하고 지루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장래 모습을 미리 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 놀라운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 서로를 보십시오. 우리는 다 특별할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평범합니다. 그런데 장래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거하는 그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될 모습을 생각해본다면, 정말 너무나 놀라운 사람인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말해주십시오. ‘나는 정말 특별한 사람이다. 영광스런 사람이다.’

 

씨에스 루이스(C. S. Lewis)<영광의 무게>라는 자신의 책에서 바로 이 점에 대해 말하면서, 결국 이 땅에 평범한 사람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죽음은 마지막이 아니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가 함께 할 정도로 인간은 놀라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죽음이 있지만, 결국은 죽음이 인생의 영광을 빼앗지 못합니다.

 

이러한 관점을 가진다면, 우리가 서로를 보는 눈도 바뀌어야 합니다. 특히 우리가 주님 안에서의 형제자매들을 볼 때의 눈이 바뀌어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정말 거룩한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 안에는 거룩하신 영광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지체 안에는 그 사람을 영광스럽게 하는 분이시며 영광 자체인 분께서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다른 형제자매를 우습게 여기거나 미워하면, 곧 그 사람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습게 여기거나 미워하는 것과 똑같은 일이 됩니다. 하지만 내가 다른 형제자매를 귀하게 여기고 사랑한다면, 그것은 곧 그 사람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영광스런 존재이기는 하지만, 이 땅에서 살다 보면 정말 괴롭고 슬픈 일이 벌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거기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시도합니다. 그러면서 그 상황에 대한 가장 정직하고 진실한 답변인 왜 이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라고 하는 말보다, 뭔가 그 상황을 정당화하려는 답변을 더 선호합니다.

 

예를 들어, ‘내 잘못 때문에 이 일이 일어났어.’라고 자책하든지, ‘너 때문이야또는 저 사람 때문이야라고 남 탓을 하거나, 환경을 탓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또는 진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여기엔 분명히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어.’라고 자기합리화를 시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욥의 친구들처럼 고통의 순간 부적절한 답변이 반복되는 이유입니다. 욥의 세 친구들이 욥에게 찾아와서 한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네가 뭔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게 아니냐? 빨리 회개해라.’ 그러나 욥이 특별히 어떤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모든 재앙이 일어난 게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병에 걸리거나 젊은 나이에 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날 때, 우리는 왜 이런 일이 우리 삶에 일어나는지 묻습니다. 그러면서 너무나 빨리 그 일에 대해 결론을 내어 버립니다. ‘내 탓이다.’ ‘네 탓이다.’ ‘부모 탓이다.’ ‘저 사람 탓이다.’ ‘부조리한 사회 때문이다.’ 더 안 좋은 것은 믿음의 사람은 슬퍼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데려가셨다. 기뻐하라.’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 대해 정확한 답변이 존재합니까? 때로는 우리가 답을 알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재앙에 대한 답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 슬프고 우울해지며,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떠날 것까지도 심각하게 고려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유를 알 수 없는 희귀병에 걸린 아내를 둔 어느 신학자가 그런 고통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답을 알지 못한 채로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한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비극이 우리 삶에 일어난다 할지라도, 믿음 안에서 걸어야 합니다. 비록 그것이 고통 가운데 걷는 길이라 할지라도 믿음 안에서 걸어가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하나님을 떠나 우리 자신에게는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이유를 알고 답을 안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도 없고 소망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분은 아무 잘못 없이 고난을 당하셨고 죽으셨으며, 또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바로 그분의 그 죽음과 부활이 우리의 소망의 유일한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우리에게 다른 소망이 없습니다. 다른 것을 따라가면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것을 따라가면 잠깐은 위로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 괴로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인생의 문제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보면서 그분을 신뢰하며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산 위에서 배운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은 영광을 보았지만 이제 곧 산 위에서 산 밑의 현실로 내려갈 것이며, 세상에 살면서 믿음의 길을 걷도록 명령을 받습니다.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35)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제자들이 할 일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을 때 제자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32-33)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부활의 영광중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 제자들은 깊이 졸고 있었습니다. 졸다가 일어나서 찬란한 모습으로 변형되신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또 모세와 엘리야를 보았고, 그들이 떠나려 하니까 베드로가 횡설수설하며 초막 셋을 짓자고 했습니다. 심지어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게 횡설수설했습니까? 깊이 졸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졸면 횡설수설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영적으로 똑같습니다. 우리가 서로 다투고 충돌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영적으로 깊이 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깨어나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하다가 변화되셨습니까? 기도하실 때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으니까 깊이 졸았습니다.

 

정말 기도 외에는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제자들이 기도하고 있었으면 괜찮았을 텐데, 그러지 않으니까 깊이 졸다가 일어나 횡설수설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너무 피곤해서 잤습니다. 그래서 시험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슨 일을 해도 기도로 해야 합니다. 교회에는 회의보다 기도 모임이 많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기도회가 되어야 합니다. 제가 올랜도 비전교회의 김인기 목사님으로부터 큰 도전을 받은 게, 그 교회는 무엇을 해도 다 기도회로 한다고 합니다. 당회도 기도회, 제직회도 제직 기도회, 공동의회도 기도회로 한다고 합니다. 정말 기도를 먼저 하면서 뭐든지 해나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본 제자들이 이제 할 일은 초막 셋을 짓고 산 위에서 사는 게 아니라, 산 밑으로 내려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말씀은 뭡니까? ‘너희도 나처럼 고난당하고 죽으며 또 부활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제자들이 할 일입니다.

 

 

3.   영광의 주님을 바라보라

 

이 세상에서 어린 나이에 요절하거나 젊은 나이에 단명하는 경우들이 가끔 있는데, 그렇게 갑작스런 죽음을 볼 때, 또는 암과 같이 심각한 병에 걸릴 때,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럴 때 자꾸 다른 답을 찾으려고 하기보다는, 그냥 솔직하게 왜 그런지 알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인생의 슬픔과 고통을 상대하는 아주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산 위에서 변형되신 이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곳에서 우리 모두가 이 세상과는 차원이 다른 저 영원한 세계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며, 우리는 결국 그곳으로 갈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변형되신 그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그 영원한 세계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영원한 세계가 우리에게 소망을 줍니다. 이 땅은 소망을 주지 못합니다. 그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살 때 소망을 얻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산 위에 있던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세 제자들 사이에 함께 서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시선을 오직 예수님께 두어야 합니다.

 

나중에 이것을 깨달은 베드로가 이 땅에서의 생애가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을 느끼면서 이 소망에 대해 자신의 두 번째 편지에서 마치 유언과 같이 이렇게 썼습니다.

 

“10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더욱 더 힘써서,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은 것과 택하심을 받은 것을 굳게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11 또한 여러분은,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충분히 갖출 것입니다. 12 그러므로 비록 여러분이 이런 것들을 알고 있고, 또 받은 진리에 굳게 서 있지만, 나는 언제나 이런 것들을 두고서 여러분을 일깨우려 합니다. 13 나는, 이 육신의 장막에 사는 동안, 여러분의 기억을 일깨워서 분발하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보여주신 대로, 내가 육신의 장막을 벗을 때가 멀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5 그리고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언제든지 여러분이 이런 일들을 기억할 수 있게 하려고 힘을 쓰고 있습니다. 16 우리가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을 알려 드린 것은, 교묘하게 꾸민 신화를 따라서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의 위엄을 눈으로 본 사람들입니다. 17 더없이 영광스러운 분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좋아하는 아들이다하실 때에, 그는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존귀와 영광을 받았습니다. 18 우리가 그 거룩한 산에서 그분과 함께 있을 때에 우리는 이 말소리가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벧후 1:10-18, )

 

바로 그때를 회상하며 베드로가 죽기 얼마 전에 이렇게 쓴 것입니다. 바로 그 나라를 바라보면서, 그때 자기가 경험했던 그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면서, 그렇게 살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지금 어떤 고통스런 일이 인생 가운데 있습니까? 슬픈 일이 있습니까?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려움이 닥쳤습니까? 큰일이 아니더라도 뭔가 불편함이 있습니까? 저 산 위에서 영광스럽게 변화되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도 언젠가 그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영광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영원히 거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 영원한 날에 갈 것을 바라보며 거꾸로 이 땅을 내려다보면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충분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그 날을 바라보고 주님께만 소망을 두면서 지금의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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