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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8일 수요예배

예수신경 29

예수님과 함께하기(5)

십자가에서

(누가복음 2326~46)

 

 

1.   괴기한(grotesque) 십자가의 의미

 

15세기 영성가였던 토마스 아켐피스(Thomas a Kempis)는 유명한 저서인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분의 기적에 열광하지만, 그분의 십자가를 따르는 사람은 드물다.”

 

참 맞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 당시 수만 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십자가에 달리실 때 끝까지 따랐던 사람들은 아주 적었습니다. 사실 이해도 됩니다. 예수님 당시 십자가 처형은 아주 잔인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가 얼마나 잔혹한지, 범죄를 단념시키게 할 정도의 형벌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는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여겨졌습니다.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21:22-23)

 

나무에 단 채로 밤새 두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땅을 더럽히는 것이라고 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당시 로마 시민에게는 십자가 처형을 언도하지 않을 정도로 무서운 것이 십자가였습니다. 그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모진 구타와 함께 온갖 잔인한 일을 당합니다


처형당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조롱하는 사람들 앞에서 나무에 매달리는데, 일단 옷이 다 벌거벗겨집니다. 예수님 달리신 성화들을 보면 옷가지를 조금 걸치고 계시지만, 사실은 다 발가벗겨서 아주 수치를 당하도로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또 피 흘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달려 있다 죽게 됩니다. 십자가에 발판이 있어서 다리로 버텨 몸을 끌어 올려야 숨을 쉴 수 있습니다. 다리에 힘이 빠져서 몸이 쳐지면 숨이 막혀서 질식하여 죽게 됩니다. 죽는 순간까지 기절했다 깨어났다 하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죽게 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가장 큰 고통을 가장 오래 맛보고 천천히 죽게 하는 것이 십자가라서, 목을 잘라 죽이는 참수형이 오히려 은혜로운 처형방법이라고 했습니다. 또 그렇게 나무에 달려 죽게 되면 맹수들이 와서 살을 뜯어 먹고, 나머지 부분은 굶주린 개들을 위해 좁은 무덤에 던져지게 됩니다. 그런 것이 끔찍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이 되어서 지금은 십자가 목걸이를 많이들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단두대나 사형을 위한 전기의자 모형의 목걸이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너무나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영어 단어에 ‘grotesque’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괴기한, 괴물 같은, 기괴한등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단어가 십자가에 딱 맞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괴기한모습으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모든 다른 방법을 놓아두고 굳이 괴기스럽고 엽기적인 십자가 처형 방법을 선택하신 것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는 모두 저주를 받은 자이다하였기 때문입니다.” (3:13, )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선택하신 진정한 의미는 바로 그것입니다. 십자가는 그 괴기한 모습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를 들려주며, 우리가 십자가에 있는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그분의 삶과 죽음에 동참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시작되고 믿음생활이 시작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믿음의 성장 역시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받아들이면서 구원을 받고, 그 예수님의 삶에 동참하면서 믿음이 자라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5:30-31)

 

예수님은 자신의 신경을 완벽하게 실천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요단 강에서 우리를 위해 대신 회개의 세례를 받으셨고,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 하나님 아버지를 신실하게 사랑하셨고, 변화 산에서 이 땅의 비극을 영원한 영광으로 변형시키셨고, 최후의 만찬에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우리를 위해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예수신경을 실천하신 것 또한 십자가를 설명해줍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그분을 갈릴리로부터 골고다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2.   괴기한 십자가를 통한 계획

 

하나님은 골고다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 당신의 사랑 이야기를 듣도록 우리 모두를 초대하십니다. 우리는 거기서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됩니까? 하나님은 골고다에 괴기스러운 십자가를 세우시고 거기서 외아들이 죽게 하심으로써, 이 땅에 속한 우리의 아픔을 육체적으로 공감하고 이해하신다는 것,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하신다는 것, 그리고 삶의 변화가 이루어질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셨습니다.

 

1)  육체적으로 공감하시며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골고다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겟세마네로부터 골고다까지 예수님이 당하신 육체적 고난을 아주 생생하게 보여주는 영화가 바로 멜 깁슨의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십자가와 관련하여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놓치고 있는 한 가지를 설명하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고통을 동정하고 이해하기 위해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천사들을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점에서 형제자매들과 같아지셔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비롭고 성실한 대제사장이 되심으로써, 백성의 죄를 대신 갚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는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을 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 (2:16-18, )

 

예수님은 정말 극심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당할 수 있는 고통보다 훨씬 큰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사력을 다해 기도하시는 동안 그의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다고 누가는 기록합니다(22:44).

 

예수님은 밤새 심문을 받으시고 새벽부터 그 무지막지한 로마 군인의 채찍에 맞음으로 인하여 극심한 고통을 당하셨고 출혈이 엄청났습니다. 살이 찢어지고 피가 철철 흘렀기에, 그로 인해 극도로 쇠약해지셨습니다. 그래서 그 엄청난 고문을 당하셨기 때문에, 나중에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들보다 빨리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경조직들이 불에 덴 것처럼 얼얼해 있을 때 몇몇 로마 군인들은 가시 면류관을 그분의 머리에 눌러 씌우고 조롱했습니다. 그 후 군병들은 그를 골고다로 끌고 갔고, 관습에 따라 예수님은 자신이 매달릴 십자가를 직접 지고 날라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십자가를 지고 살 힘이 남지 않았고, 제자들 가운데 용기를 내어 그분을 도와줄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때 구레네 출신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지고 남은 거리를 걸었습니다(26).

 

골고다 언덕 위에 도착해서 예수님의 손목과 발목에 굵은 못이 관통하여 박혔습니다. 십자가가 세워졌고, 그분의 손목과 발목은 몸무게를 지탱하는 중에 늘어나고 파열됐습니다. 예수님은 진통제를 제공받았을 때 그것을 거부하셨고, 마지막까지 의식을 잃지 않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셨습니다. 마침내 그분은 숨을 거두셨고, 군병들은 그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창으로 그의 옆구리를 찔렀는데, 물과 피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19:33-34)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처참하게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성경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자세히 묘사한 것은, 우리가 그분의 처절한 고통을 지켜보면서 즐기는 가학적 정신질환자 같은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엽기적이고 괴기한 고통은 우리의 육체적 고난을 공감하시고 이해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소통법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신경이 가르치는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며, 또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 고난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주님은 우리의 고통을 나누어 가지기 위해서 자신의 십자가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육체적 고통 가운데, 우리 삶의 고난 가운데, 학대를 만나는 끔찍한 곳에서, 억울하게 피해를 당하는 현장에서, 억울하게 비난을 받고 조롱을 당하는 그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 해주십니다. 또한 우리가 심각한 병에 걸렸을 때, 미래가 보이지 않고 막다른 골목 같이 느껴질 때, 인생이 끝난 것처럼 여겨질 때,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다.

 

지금 혹시 어떤 어려움을 당하고 계십니까?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무나 괴로워 몸부림치는 그 순간, 예수님은 어디 멀리 계신 게 아니라 바로 나와 함께 그 자리에서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완벽하게 이해해주십니다. 그래서 나의 주님이 되실 수가 있습니다. 그분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혹시 어떤 낙심되는 상황이더라도 힘을 내십시오.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2)  영적 자유를 주시려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님

 

기독교 신앙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바르게 하며 우리에게 새로운 출발을 준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열렸고, 그래서 새로운 출발이 가능해졌습니다. 예수님은 무슨 신학적 이론을 남기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왜 죽었는지에 대해 몇 마디만 남기셨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라고 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10:45)

 

예수님은 섬기러 오셨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섬김과 희생의 사랑은 같이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닮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섬겨보지 않고는 알 수가 없습니다. 섬기지 않고는 예수님의 삶에 동참할 수가 없습니다.

 

섬길 때 그런 고통이 있고 고난이 있고 비난이 있고 죽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섬기고, 섬기고 또 섬기다가 목숨까지 내어주심으로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역사를 예수님이 이루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로서 우리도 섬기다 보면 그런 고난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섬기지 않으면 별로 힘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힘들지 않으려면 안 섬기면 됩니다. 그런데 섬기지 않으면 예수님을 닮을 수 없고 예수님의 삶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크리스천의 삶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줄 정도의 섬김을 해보아야 크리스천의 삶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둘째,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은 떡과 잔이 자신의 몸과 피라고 하셨습니다(22:19-20).

 

셋째, 예수님은 유월절의 희생제물이 도살될 때 죽으셨습니다.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44-46)

 

제 육시 즉 낮 12시쯤에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이 캄캄해졌습니다. 제 구시 즉 오후 3시까지 계속되고 그때 예수님이 돌아가셨는데, 그 시간이 유월절 희생제물들이 도살되던 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성경 본문들은 새로운 이야기가 옛 이야기를 삼켜버리는 십자가를 잘 보여줍니다. 옛 이야기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문에 발라서 장자를 보호하고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옛 이야기는 사람들을 자유하게 하는 양의 피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새 이야기란, 예수님이 새로운 유월절 양으로서 자기 백성을 대신하여 값을 치르고 그들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죽임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문설주에 피를 바르는 대신에 그의 피인 잔을 마시고, 그들을 자유하게 하는 보장이 되는 예수님의 피를 신뢰하고 나가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래서 성만찬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양처럼, 자신의 죽음이 우리를 대신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우리가 원하지 않지만 당해야만 했던 노예생활과 죽음을 몸소 체험하시고 해결하셨습니다. 동시에 우리가 원하지만 누릴 자격이 없는 자유의 삶을 우리에게 누리라고 주셨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받지 않게 해주신 하나님의 자비, 그리고 우리가 당연히 받을 수 없고 자격이 안 되는 자유를 받도록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예수님을 통해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죽음에 동참하면서 그 죽음으로 말미암아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그분의 살을 먹고 죽음의 잔을 자기 자신의 음료수로 마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성만찬이며, 그 의미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새로운 유월절 양이시고 그분의 피가 우리의 죄를 우리로부터 멀리 가져가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할 수 있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만찬에 참여할 때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해주신 일, 즉 몸이 찢기시고 피를 흘려주신 그 일을 지금도 생생하게 체험하는 것이 성만찬입니다. 그래서 평소에도 그렇지만, 특히 성만찬 때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두 가지를 해야 합니다.

 

첫째로, ‘바로 내가 예수님을 죽였다. 내 죄가 그분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했다. 내 죄가 그분의 살을 찢게 만들었고 피를 흘리게 만들었다. 그분을 죽였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 그렇게 해주셨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하셨다. 나를 위해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 죄 때문에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예수님을 죽게 하신 것을 기억하며 고백하는 것이 성만찬의 의미입니다.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5:12-13, )

 

예수님은 이 새 계명을 제자들에게 주셨을 뿐 아니라 그것을 완벽하게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난을 공감하실 뿐 아니라, 우리가 영적으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 사랑으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3)  삶의 변화를 위한 모범인 십자가 위의 예수님

 

그런데 십자가를 향해 마음을 여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베드로가 잘 보여줍니다. 베드로는 우리의 불완전함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됩니다. 베드로는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모범으로서의 십자가를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날 저녁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신 후에 체포되셨습니다. 그리고 심문받기 위해 끌려가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이 거기 계셔서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용감하게 칼을 휘두르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잡혀 가시자 그는 도망가서 당국자들을 피해 외곽으로 몰래 빠져나가 무사히 몸을 숨겼습니다.

 

만일 베드로가 십자가 안에서 삶의 모범을 발견했다면, 예수님이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신 말씀대로, 그는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과 함께 죽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 점에서 그는 실패했습니다. 그는 굉장히 큰소리를 쳤지만 실패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삶의 변화의 모범, 즉 자기 부인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기 부인이 없이 예수님을 멀리서 따라가다 보니까, 자기를 부인하는 게 아니라 자기 목숨을 부지하려고 벌벌 떨며 가다 보니까, 결국 작은 여종의 한마디에도 벌벌 떨다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성령을 받은 다음 베드로는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그때부터는 정말로 십자가를 붙들며 자기 부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작은 여종의 한마디에도 벌벌 떨던 베드로가, 사도행전을 읽어 보면 아주 놀라운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게 옳다.’라고 하며 아주 담대해집니다. 그렇게 그는 늘 십자가를 붙들고 주님과 동행하며 살다가 결국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는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개신교에서는 안 하는데, 천주교 신자들은 성호를 긋습니다. 머리, 가슴, 어깨에 십자가 표시를 하는 겁니다. 일종의 영적 표시입니다. 그 행동은 주후 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 깊은 것입니다. 최초의 신학자 중 하나이자 초개 교회 교부인 터툴리안(Tertullia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모든 걸음과 움직임에서, 모든 출입에서, 우리가 옷을 입고 신을 신을 때, 목욕을 할 때, 식탁에 앉을 때, 등잔에 불을 켤 때, 소파와 자리 위에서, 모든 일상적인 행동 가운데서 우리는 이마 위에 있는 흔적을 찾는다.”

 

그러니까 이마에 있는 주님의 흔적을 삶 속에서 찾는다는 의미입니다. 성호를 긋는 것은 하루 종일 십자가가 자신의 삶의 변화를 위한 모델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를 지고 가는 주님의 십자가, 그리고 우리가 지고 가는 우리 자신의 십자가 없이 참된 기독교 신앙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정말로 우리를 지고 가는 것도 십자가이고, 우리가 날마다 지고 가야 되는 것도 십자가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구원을 주고 영적 자유를 주는 것도 십자가이고, 우리에게 삶의 변화의 모범을 제시해주는 것도 십자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매일의 삶에서 변화되게 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나도 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데서 일어납니다.

 

 

[나가는 말]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매순간 붙들며 살 때 영적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또한 날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때 삶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참으로 괴기한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십자가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은혜의 장소입니다. 그곳은 예수님이 우리와 공감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고난을 받으신 곳입니다. 그곳은 악한 영들이 우리를 공격할 때 우리가 영적으로 보호를 받는 곳입니다. 또 그곳은 삶의 변화를 위한 모델을 발견하는 곳입니다.

 

지금 나는 날마다 나를 구원해주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붙들면서 살고 있습니까?

날마다 바로 그 주님을 따라가면서 내 십자가를 지고 그 주님의 길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그렇게 십자가의 삶을 삶으로써 영적으로 자유를 누릴 뿐 아니라 삶의 변화를 체험하며 하나님께 쓰임 받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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