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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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25일 수요예배
✦ 예수신경 30 ✦
예수님과 함께하기(6)
“빈 무덤에서”
(누가복음 24장 1~12절)
1. 죽음의 재앙 너머의 삶
예수님은 죽어서 장사되셨습니다. 사실 그것은 제자들에게 비극적인 재앙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주셨고,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셨던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을 만한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예수님이 갑자기 잡혀서 고문을 당한 후 죽임을 당했고, 이제 제자들의 마음에는 온통 실망과 의심과 좌절만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제 소망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인생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불행을 겪습니다. 재정적인 면에서, 인간관계에서, 결혼생활에서, 부모나 자녀와의 관계에서, 또 육체적, 정신적 질병으로 불행을 경험합니다. 그런 힘든 일들은 우리로 하여금 잠을 제대로 못 자게 만들고, 안식을 갖지 못하게 하며, 우리 마음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그런 소위 ‘작은 재앙’들이 있은 후에, 결국에는 모든 사람이 죽음이라는 ‘큰 재앙’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인생의 모든 재앙에 대한 답이 있다고 알려줍니다. 놀랍게도, 인생의 모든 재앙에 대한 답은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재앙과 함께 시작이 됩니다. 복음서들을 보면, 예수님의 죽음을 둘러싸고 여러 작은 재앙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 제자들은 의심으로 가득했습니다. 무덤에 찾아간 여인들은 불안하고 당황하여 할 말을 잊었습니다.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3-4절)
여자들이 안식 후 첫날 새벽 예수님의 무덤에 와서 보고 “근심”했습니다. 왜 근심을 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에 “준비한 향품”(1)을 바르러 갔는데 바를 대상이 없어진 겁니다. 그래서 당황하며 근심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 근심의 원인이 되었습니까?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5절)
바로 이것입니다.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으니까 당연히 발견할 수 없었고, 그렇게 발견하지 못하니까 근심하게 되었습니다. 근심하는 그들에게 두 천사가 말합니다.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6-7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니까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았고, 그런데 못 찾으니까 근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되니까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8-10절)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니까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우리 삶에도 불행한 일들과 재앙들이 닥칠 때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하면서도 확실합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열심으로 하다 보니까 근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겠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런데 그것은 자기 열심이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시체가 아니라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 생각으로, 자기 나름대로 와서 시체에 하려고 하니 실패했습니다. 베드로도 자기 열심으로 나가다가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닭이 울 때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나서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 회복의 지름길입니다. 우리가 살다가 어떤 문제가 있고 어려움을 당할 때 다른 데 길이 있는 게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에 길이 있습니다. 그래서 삶 공부를 할 때 숙제도 열심히 해야 하지만, 암송구절들도 있는데 그것을 열심히 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평소에 살다가 어려움을 당할 때 그 상황에서 암송한 구절이 탁 떠오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 우리의 승리와 회복의 비결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여인들이 이 모든 것을 사도들에게 알리자 그들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11-12절)
여인들이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했을 때 사도들은 ‘할렐루야!’라고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는 여인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들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 제3일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자기들의 상식과 경험과 이성을 주님의 말씀보다 더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들뿐 아니라, 13절부터 보면 절망 속에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있었고, 도마 같은 사람은 예수님이 부활 후 나타나셨는데도 경험주의자가 찾을 만한 증거를 요구하며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요 20장). 사실 그들의 의심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온 선지자로, 많은 기적들을 행하며 천국이 올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다 그분은 결국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이 질러대는 환영 소리와 함께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께서 어느덧 올리브 산의 내리막길에 이르셨을 때에, 제자의 온 무리가 기뻐하며, 자기들이 본 모든 기적을 두고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말하였다.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 하늘에는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는 영광!’ 그런데 무리 가운데 섞여 있는 바리새파 사람 몇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선생님의 제자들을 꾸짖으십시오.’ 그러나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 (눅 19:37-40, 새)
이처럼 바리새인들의 압력에도 예수님이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으셨을 때, 모든 상황이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아주 호의적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재앙의 징조가 나타났습니다. 예수는 체포되었고, 재판을 받았으며, 십자가 사형 선고를 받고, 괴기한 십자가 처형을 당하고 만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불어넣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꿈은 헛것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는 것을 보았고, 그들 중 몇 사람은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 안치되는 것도 지켜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졌고, 그 죽음으로 인하여 그분과 그분의 제자들의 꿈은 산산조각 난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죽음과 재앙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사실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부활을 믿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 역사를 보면 여러 부활에 대한 논증들이 있었고, 예수님은 부활하셨으며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결정적인 단어가 부활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러한 논증들 중 몇 가지는 이런 것입니다.
“빈 무덤에 대한 언급은 다양한 복음서 자료들에서 발견된다. 예수님의 시신은 정말로 부활했거나 도둑을 맞았거나, 둘 중 하나다.”
“만일 무덤이 비어 있지 않았다면, 예루살렘에서 부활을 선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로마와 유대교 지도자들은 부활에 대해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을 반박했지만 시신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무덤이 실제로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증인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여자들이 예수의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증인으로 채택되었다. 부활을 믿게 하려면 부활의 증인으로 높은 사람들을 내세웠어야 하는데도 여자들을 내세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부활은 터무니없는 일이 아니라 결코 피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복음서 기록들은 사건의 순서들, 누가 어디서 무엇을 언제 보았는지와 같이 궁금증을 자아내는 질문거리들을 남겨놓았다. 만일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그야말로 ‘가짜’ 부활을 공모한 것이라면, 이 질문들에는 답이 주어졌어야만 했다.”
“예수를 보았다고 주장하는 증인들의 숫자가 수없이 많다.”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가 부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논증들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So what?’입니다. 예수의 부활이 우리 삶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부활이 우리 삶에 일어나는 재앙에 대해 무엇을 했다는 말입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가 예수님의 이야기를 우리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여 그분의 부활에 동참할 때, 우리는 재앙 속에서도 소망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예수신경’은,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도 여러 가지 재앙이 있고 무엇보다 죽음이 있지만, 우리에게는 죽음 이후의 새로운 삶에 대한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 주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2. 불행에서 새로운 삶으로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 이후의 영광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땅에서도 우리가 새롭고 놀라운 삶을 살도록 인도해줍니다. 그것을 여러 제자들의 삶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1) 베드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예수님과 친구로 지내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잡히셨을 때 세 번이나 노골적으로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임을 당하고 부활할 것을 예언하셨고,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할 것도 예언하셨습니다.
“‘31 시몬아, 시몬아, 보아라. 사탄이 밀처럼 너희를 체질하려고 너희를 손아귀에 넣기를 요구하였다. 32 그러나 나는 네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네가 다시 돌아올 때에는, 네 형제를 굳세게 하여라.’ 33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나는 감옥에도, 죽는 자리에도, 주님과 함께 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34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한다.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눅 22:31-34, 새)
여기에 보면, 사탄이 제자들을 넘겨달라고 요구했지만(31),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의 믿음의 꺾이지 않도록 그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32). 그런데 그 다음 말씀이 놀랍습니다. “네가 다시 돌아올 때에는”.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은 베드로가 배반할 것도 아셨지만, 그가 다시 돌아올 것도 아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언대로 베드로는 정말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불행이었으나, 그 불행을 해결한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셨고, 베드로에게 자신의 사명을 다시 위임하셨습니다.
부활 후 갈릴리에서 도로 물고기를 잡던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을 계속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세 번 대답을 들으신 후 예수님은 “내 양 떼를 먹이라(치라).” 하십니다. 세 번 부인한 베드로에게 세 번 사랑의 대답을 하게 하심으로 회복시키신 후에 하나님께 죽음으로 영광 돌릴 것을 말씀하시며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변화된다는 것이 참 쉽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 즉 요한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하셨으면 그냥 따르면 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요한을 보더니 “저 사람은 어떻게 되나요?”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든지 어떻게 되든지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베드로와 요한만 있었지만 소문이 잘못 났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죽지 않는다고 소문이 잘못 난 겁니다.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하셨지만 베드로는 가서 딴 이야기를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한 번에 확 바뀌는 게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봅니다. 하지만 그런 베드로에게도 주님은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2) 막달라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는 다른 여인들과 달리 출신지를 통해서 남들과 구별되었습니다. 그녀는 일곱 귀신에게 사로잡혔다가 벗어났고, 예수님이 이곳저곳 다니실 때 따라다니며 수종을 들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죽음이라는 불행이 닥쳤을 때 십자가 가까이에 있었고(요 19:25),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 안장되는 것도 보았습니다(막 15:47).
부활절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으로 간 것도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그런데 무덤이 빈 것을 보고 마리아는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나타나셨고, 새로운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요 20:16)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불행을 경험한 이후 부활을 통해 새로운 삶을 얻게 되었습니다.
3) 도마
예수님이 정말로 죽은 자들 사이에서 부활하셨다는 다른 제자들의 말을 듣고도 도마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 20:25)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일주일 후 제자들과 함께 있던 그에게 나타나셔서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셨을 때 그는 위대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 20:28)
우리는 보통 도마를 의심한 자(Doubting Thomas)로 알고 있지만, 도마는 신앙을 고백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깊은 의심이라는 불행 이후에 예수님에 대한 확실하고도 위대한 고백이 나온 것입니다.
4) 열한 명의 사도들
가룟 유다가 죽은 이후에 제자들은 하나같이 갈팡질팡했습니다. 그들은 한때 예수님을 통하여 받은 사명에 사로잡혔었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그들의 기대를 불행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갈릴리에서 그분을 다시 만난 그들의 반응이 놀랍습니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마 28:17)
뭘 의심했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이 정말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인지 의심했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분이 맞는지 의심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그때 그분은 우리가 소위 ‘지상 대명령’ 혹은 ‘대사명’이라고 부르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8-20)
이것이 너무나 은혜가 됩니다. 17절과 연결해서 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결코 제자들이 완벽한 믿음을 가진 상태가 된 다음이 아니라, 어떤 순교의 결단을 한 다음이 아니라, 그들이 여전히 의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여전히 부족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대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바로 직전은 아닙니다. 나중에 예루살렘의 감람산에 가셔서 승천하십니다. 사도행전 1장을 보면 부활 후 40일이 지나고 드디어 승천하시는데, 그때 제자들이 또 엉뚱한 질문을 합니다. “나라를 회복해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너희가 알 것 없다.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하고 나서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이때도 역시 제자들이 아직 대단한 결단을 한 상태가 아닙니다.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린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런 사명과 약속을 주시고 가셨습니다. 그것이 은혜가 되는 겁니다.
우리도 믿음이 완벽해진 다음에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부족하지만, 비록 의심도 하지만, 아직도 자기 나름대로 딴 생각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고 우리를 증인으로 사용해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사도들에게 혼란이라는 불행 뒤에 사명이 찾아온 것입니다. 이처럼 죽음 이후에 부활의 새 생명이 있습니다. 불행이 있더라도 그 불행 너머에 예수님이 베푸시는 용서와 임재와 믿음과 사명의 새로운 삶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3. 불행 너머의 새 생명: 존 버니언(John Bunyan)
개인적인 불행 너머에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 사람들 중 하나가 영국의 존 버니언(John Bunyan)입니다. 그는 교회 역사에서 많은 인기를 얻은 책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을 쓴 사람입니다. 요즘에는 드라마들이 워낙 많고 인기를 끌지만, 버니언이 살던 17세기 당시 사람이라면 누구나 버니언이 쓴 크리스천과 그의 아내 크리스티아나의 성화 과정을 다룬 그 책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천로역정>이 쓰인 과정을 보면,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불행의 건너편에서 새로운 삶을 창조하시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버니언은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그 자신도 대장장이로 일하며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입니다. 원래 그는 감정적이고, 불경하고, 신성모독적이고,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으며, 교육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에, 나중에 그가 열정적인 설교자가 되어 마침내 고향인 베드포드에 있는 성 요한 교구의 사제로 취임하게 되었을 때 기존 세력들은 그것을 반대하고 그를 비난했습니다.
당시 영국은 혼란스러웠던 시기였는데, 특히 영국 국교회와 종교의 자유에 호의적인 사람들 사이에 다툼이 있었습니다. 버니언은 영국 국교회의 반대편에 속했다가 투옥되었습니다. 그는 설교를 그만둘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1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교수형에 처하겠다는 협박을 받으며 지냈습니다. 그는 끈을 만들어 생활했고, 항상 자기 아내와 눈이 안 보이는 딸을 걱정했습니다.
그러다 감옥에서 풀려났지만, 곧 다시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투옥이라는 불행도 버니언의 마음속에서 역사하는 부활의 생명의 능력을 억제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두 번째 투옥 기간에 그 유명한 <천로역정>을 썼던 것입니다.
각자 버니언의 입장이 되었다고 상상해보십시오. 감옥에 갇혀서 가족으로부터 격리되었습니다. 더 이상 세상에서 사명을 이룰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버니언의 그러한 고통과 불행을 통해, 그의 시대뿐 아니라 오늘까지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위대한 작품이 탄생한 것입니다. 대다수의 전문가들이 근대 소설의 효시라고 생각하는 <천로역정>은, 삶이 하나의 이야기인 것처럼, 신앙생활도 하나의 이야기, 곧 지상에서 천국까지의 여정이 담긴 이야기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버니언과 같은 사람의 삶을 통해, 또 성경의 인물들을 볼 때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불행한 사람도 변화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불행한 교육도 깨어날 수 있으며, 불행한 투옥도 인생의 여정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여정이 가능한 것은, 하늘로부터 땅으로 그리고 다시 부활을 통해 하늘로 올라가신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여정 때문입니다. 인생에 어떠한 불행을 경험했든지 상관없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불행을 너머 새로운 생명을 얻고 고귀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나가는 말]
이제 예수신경을 마칠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주시는 예수님의 삶은 모두 예수신경에 의해 만들어진 삶입니다. 예수님은 부모로부터 쉐마를 배웠고, 자신의 제자들을 위하여 그것을 보충하여 예수신경으로 만드셨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그것을 삶으로 실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아바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셨고, 이웃을 전심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예수신경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우리는 바로 이러한 예수신경의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만들어갈 수 있는 부활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바로 이러한 예수신경,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설 때 잘했다 칭찬받는 종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