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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 6 주일예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50

아름다운 허비

(마가복음 14 1~11)

[들어가는 ]

 

어느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가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 출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갈 시간이 되어 가는데도 아내가 계속 화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아내를 보고 남편이 말했습니다. “여보, 괜히 시간 낭비나 화장품 낭비하지 말고 빨리 나갑시다. 말을 들은 아내가 서둘러 현관으로 나갑니다. 그런데 이번엔 남편이 거울을 보며 자기 옷매무새를 다듬습니다. 그것을 아내가 말합니다. “여보, 그렇게 들여다봐요? 시간 낭비하지 말고 빨리 나갑시다.

 

여기서 퀴즈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아내는 꾸며도 차이가 정도로 아름답지 않은 여성일까요, 아니면 절세의 미모를 가진 미인일까요? 남편은 멋진 옷을 입어도 티가 나게 좋지 않은 외모의 소유자일까요, 아니면 요즘 말로 잘생긴 ‘훈남’일까요?

 

그냥 얼핏 이야기를 생각하면 당연히 외모가 좋으니까 화장을 해도 시간 낭비, 화장품 낭비니까 빨리 나가자는 말로 들립니다. 그런데 조금 생각해보면, 매우 아름다운 여성이나 잘생긴 남성이 자꾸 화장을 고치고 하거나 옷을 다듬는 역시 필요가 없는 사람이 하는 것이니까 ‘낭비’라고 여겨질 있습니다.

 

여기 계신 성도님들은 전혀 낭비하지 않는 분들로 보입니다. 칭찬입니까, 욕입니까? 있습니다. 그래서 문맥을 봐야 합니다. 대개 ‘낭비’ 또는 ‘허비’라는 것은 좋지 않은 개념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낭비가 미덕이 있고 허비가 좋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평소에 절약하며 아주 검소하게 살아온 부부가 있는데, 어느 아내의 생일이 됩니다. 남편이 생각해 보니, 자기를 위해 수고하고 고생한 아내에게 고맙고 미안합니다. 그래서 아내를 기쁘게 해주고자 오랜만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근사한 레스토랑에 가서 로맨틱한 식사를 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이 낭비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한평생 아주 절약하며 살아온 사람이, 자신의 직장에서 은퇴하면서, 동안 직장에서 신세졌던 사람들, 고마웠던 이웃들, 친한 친구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며 그들에게 일일이 감사의 마음을 표시했다면, 그것이 허비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굳이 이런 것을 낭비나 허비라고 한다면 이것을 이렇게 표현할 있겠습니다. ‘아름다운 허비(낭비)’다.

 

 

1.   위험한 상황 가운데 벌어진 사건

 

바로 이러한 사건이 오늘 본문에서 벌어졌습니다. 사건이 언제 벌어졌는가?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1-2)

 

이스라엘의 최대 명절이 유월절인데, 유월절을 앞두고 이스라엘의 정치지도자들과 종교지도자들(바리새인들, 제사장들, 서기관들) 모여서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2절에 보면 민란이 날까봐 명절에는 하지 말자고 합니다. 굉장한 인기를 끄는 예수를 잡아간다면 민란이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은 엄청난 인기를 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런 예수를 체포하면 백성들이 난리를 일으킬 것이니까 명절이 끝난 후에 하자는 겁니다. 그들은 종교지도자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자기들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자들이었습니다. 소위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음모가 꾸미고 예수를 죽이려고 하던 바로 그때, 이름도 나오지 않는 여인이 예수님께 귀한 것을 바친 아름다운 사건이 일어납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1)식사하실 때에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순전한 나드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3)

 

사건이 일어난 도시는 베다니로서,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도시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일주일 동안 예루살렘에 가셨다가 매일 저녁이면 베다니로 나가셔서 주무셨습니다.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고, 중에도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었습니다. 이때도 나병환자는 아니고, 이전에 나병에 걸렸다가 예수님이 고쳐주신 사람이라고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말합니다. 그게 너무 감사해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를 벌인 것입니다.

 

당시 나병이라는 것은 지금의 AIDS 이상으로 완전히 절망입니다. 고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들과 같이 수도 없습니다. 따로 격리되어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엄청난 병을 고침 받고 그게 너무 감사해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를 벌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간에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옥합을 가지고 와서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께 붓습니다. 이것은 인도나 히말라야 산맥 쪽에서 나는 아주 귀한 향유입니다. 실크로드 등을 통해 전해진 비싼 수입품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와서 그것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는 겁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복음서에 나오는데, 동일한 사건이 마태복음 26장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7장에도 비슷한 사건이 나오는데 그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 확실합니다. 비슷한 경우가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동일한 사건을 다르게 기록했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건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건이라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에는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고 하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유월절 엿새 전”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시기도 다르고, 장소도 다릅니다. 요한복음에는 나사로의 집에서 벌어지는데, 여기서는 시몬의 집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는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고, 여기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 여인입니다. 또한 요한복음 12장에서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는데, 오늘 본문에는 여자가 예수님의 머리에 붓습니다.

 

그러니까 사건은 별개의 사건이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건인지 아닌지가 핵심이 아니라, 의미가 중요합니다. 그렇게 다른 점들이 있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향유를 허비하는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있었겠도다 하며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4-5)

 

사람들이 여인이 일을 보고 화를 내며 향유를 허비하느냐고 합니다. 이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줄 있었다고 하며 그녀를 책망합니다. 사실 당시 평범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데나리온이니까, 300데나리온은 300일에 해당되고 1 연봉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1 연봉을 3 , 4 , 5 정도라고 있습니다. 2 불이라고 해도 엄청난 돈입니다. 그걸 한꺼번에 쏟아 부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돈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할 있었다는 말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음의 밑바닥에 숨겨진 의도를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즉시 칭찬하지도 않으시고, 편에 서지도 않으시고, 반대하는 것도 아니십니다. 오히려 여인의 편에 서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6)

 

예수님은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했다고 하십니다. 우리말에는 ‘좋은 일’이라고 되어 있는데, 원문을 보면 ‘아름다운 일’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허비했다’고 하는데, 예수님은 ‘아름다운 일을 했다’고 하십니다. 겉으로 보면 여인이 일은 낭비이고 허비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여인이 아름다운 일을 했다고 하십니다

 

 

2.   아름다운 허비가 원인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까?

 

1)  진정한 사랑

 

먼저, 여인에게는 진정한 사랑의 동기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보신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계산을 초월하여 움직입니다. 사랑에 빠진 젊은 남녀를 보십시오. 정말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물론 자기가 더해주고 싶은데 더해주지 못할 안타까워서 계산을 합니다. 그런데 ‘저건 너무 비싼데’ 하면서 계산하지 않습니다. 만약 사랑한다고 하면서 계산하고 있다면 그것은 사랑하지 않는 증거입니다.

 

여러분도 이전에 사랑에 빠졌던 적을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말고, 그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던 시간이 아까우셨습니까? 같이 시간씩 보내고, 조금만 , 조금만 , 그러다가 밤이 늦어져 집에 가야 하기에 헤어지는데, 집에 오자마자 전화를 합니다. 아니, 그렇게 오래 있어 놓고는 무슨 얘기가 있다고 전화를 합니까? 그런데 그런 사랑입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시간을, 돈을 아까워하거나 낭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낭비라고 한다면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할 모든 것을 줘도 아깝지 않습니다. 사고가 났을 엄마가 아기를 안아서 아기는 살아나고 엄마는 죽는 일이 종종 일어납니다. 사랑은 자신의 생명까지도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람을 눈멀게 합니다. 사랑은 사람만 보게 합니다. 사랑은 인간을 맹목적으로 만들고 대가를 초월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여인을 비난한 사람들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이라고 되어 있는데, 어린아이들이 주님께 오는 것을 막은 제자들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람들은 여자가 향유를 허비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으면 좋았겠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는 가룟 유다가 그런 말을 합니다.

 

그런데 유다가 세리 마태를 제치고 회계를 맡을 정도로 아주 돈에 밝은 사람이었는데, 요한에 의하면 사람이 알고 보니까 도둑이었습니다. 공금 횡령을 했습니다. 그래서 했나 보니까 부동산 투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땅을 사놓았습니다. 요즘 돌아가는 것과 얼마나 비슷합니까?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의 본성은 시대와 문화를 초월해서 똑같습니다.

 

사람들도 비슷한 심정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마음속에 있는 이기적인 동기가 있었습니다. 자기들은 못하면서 여자는 하니까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고, 실제로 못마땅하게 있었습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해서 헌신하고 시간과 물질을 드려가며 섬기는 헌신된 그리스도인들, 주님의 제자들이 많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그런 분들을 마음이 따뜻해지고 감동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좀 적당히 해라. ‘믿어도 적당히 믿어라. ‘뭐 그렇게 시간과 물질을 써가며 하냐? 적당히 해라. 완전히 하지 말라고는 하지만 적당히 하라고 합니다

 

여기도 뭐라고 합니까? 아예 하지 말라는 아니라, 그렇게 하면 가난한 사람들을 돕지 여기에 쏟아 붓느냐고 합니다. 차이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주님을 정말 사랑하면 아깝지 않습니다. 물론 형편에 따라 해야 하지만, 드릴 시간과 물질이 아깝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를 이렇게 써주시다니. 돈을 써주신다니. 하면서 감격하며 감사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마음의 중심인데, 특히 사랑이 있는가를 보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장 계명이 뭡니까?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사랑하라.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사랑입니다. 사랑 때문에 일을 하는가? 그런데 만약 옥합도 깨고 엄청난 것을 했지만 사랑 때문이 아니라 보이려고 했다면, 주님은 그것도 아십니다. 거기에 별로 감동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여인에게 잘했다고, 아름다운 일을 했다고 하십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여기 주님을 따라온 제자들 중에 아무도 여자와 같이 예수님을 사랑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예수님을 통해 뭔가 얻어 볼까, 자리 차지할까 하며 뭔가 이익이 있으니까 따라왔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이렇게 하면 완전히 손해입니다. 자기가 평생 결혼자금으로 모아놓았을 텐데 이렇게 한꺼번에 부어 버리면 자기에게 뭐가 남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상관이 없는 겁니다. 사랑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시고 “그가 내게 아름다운 일을 했다.”라고 칭찬하십니다.

 

 

2)  기회를 놓치지 않음

 

또한 여인은 아름다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았습니다. 이것이 주님께 사랑을 표현할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정확히 모릅니다. 하지만 주변의 분위기를 보니까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것이 느껴집니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모릅니다. 위기의식과 절박함 가운데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 사랑을 표현할 있는 마지막 기회가 수도 있음을 느끼고 와서 표현했습니다. 예수님도 사실을 인정하십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몸에 향유를 부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7-8)

 

이것은 예수님이 가난한 사람들보다 자신이 중요하다고 하시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 사람들의 마음의 중심을 간파하고 계십니다. 사실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마음이 없습니다. 말로만 그러고 있습니다. 여자가 이렇게 하니까 말이 없어서 가난한 사람을 돕지 않느냐고 합니다. 정말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원했다면 이때 이런 말을 아니고, 전부터 해왔어야 됩니다. 그렇게 하던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인정을 받지만, 전혀 그렇지 않던 사람이 이런 말을 하고 주장하며 나오면 의아하게 생각됩니다.

 

제가 오래 전부터 알던 영어권 목사님이 있는데 아주 친합니다. 독립된 영어권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원래 그러던 분이 아닌데, 언제부터인가 인종 차별을 반대하는 운동을 열심히 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의아했습니다. 이분이 전에는 전혀 그런 쪽이 아니었는데 갑자기 인종적 갈등 문제를 들고 나오며 힘을 쓰는지 의아했고 진짜인지 의심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분이 뭔가 계기가 있어서 그렇게 바뀌었고 지금껏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로만 그렇게 하고 아무 행동이 없으면 누가 인정해주겠습니까?

 

본문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말로는 가난한 사람들이 어쩌고저쩌고 했지만 전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말로만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사랑하며 따르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이 또한 자신의 장례를 준비한 것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정말 성령의 인도하심이었다고 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여인이 그것을 알고 했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것이 그녀가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것이라고 해석해 주십니다. 여인은 그냥 사랑을 표현한 것인데 예수님은 자신의 장례를 준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진짜 일어난 사실보다 중요한 해석입니다. 우리가 뭔가 두려워한다면, 실제 일어난 일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내가 큰일 났다고 해석해서 두려워하는 겁니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여인의 일을 “내 장례를 준비한 것이다.”라고 해석해주셨습니다

 

우리도 주님께 나는 생각 없이 있습니다. 지난 몽골단기봉사선교 때나 지난주 김요엘 선교사님이 오셨을 마음에 감동을 주셔서 ‘나도 동참을 해야되겠다.’라고 하며 생각 없이 그냥 드렸는데, 주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내 장례를 미리 준비했다. 네가 천국을 확장시켰다.”라고 하시며 해석을 해주시는 겁니다. 나는 아닌 것을 했는데 주님은 엄청나게 봐주십니다. “네가 일이 세계 복음화를 이룬 것이다.”라고 엄청난 것으로 봐주신다는 겁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마음에 감동을 주실 해야 합니다. ‘내가 헌신해야 되겠다. 동안 별로 했는데 사역에 헌신해야겠다.’라고 결단하며 ‘제가 이제 하겠습니다.’라고 했는데,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 ‘에이, 하긴 ? 그냥 살던 대로 살지. 하고 흐지부지되면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헌신은 감동을 주실 해야 합니다.

 

이전에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교회에 사회에서 아주 높은 고위 관료였던 분이 있었는데, 그분이 중풍에 걸려 몸의 반이 마비되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병원에 찾아갔는데, 그분이 목사님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고백했습니다. “목사님, 지금 소원은 가지입니다. 교회에 번만 나가서 예배드리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봉사하고 죽으면 여한이 없겠습니다.

 

그분이 건강하고 잘나갈 예배에 매주 나오시라고, 같이 봉사하자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바빠서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기회를 잃어버리고 나니까 후회가 되는 겁니다. 이제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고 봉사하면 좋겠다고 하지만 이제는 수가 없습니다. 너무 안타깝습니다. 우리의 봉사, 우리의 섬김, 우리의 헌신은 있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실 즉시 하는 겁니다.

 

이런 것도 책에서 읽었는데, 어느 교회에서 부흥회가 있을 강사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봉사하자고 하면 ‘차차 봉사하겠습니다.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헌신하자고 하면 ‘차차 헌신하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옥이 어떤 곳인지 아십니까? ‘차차 믿죠. 차차 봉사하죠. 차차 헌신하죠.’라고 했던 사람들이 ‘아차차’ 하는 곳이 지옥입니다.

 

정말 기회를 놓치면 됩니다. 지금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어떻게 압니까? 기회를 주실 해야 합니다.

 

오래 그리스의 동상에는 어깨와 발에 날개가 있고, 앞머리에는 머리카락이 무성한데, 뒤는 머리숱이 별로 없는 대머리인 이상한 사람 모양의 동상이 있었습니다. 동상 밑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누가 그대를 만들었는가? 그대는 날개를 어깨뿐만이 아니라 발에도 달았는가? 빨리빨리 날아다니기 위해. 그대의 앞머리는 무성한가? 그대가 사람들이 쉽게 붙잡을 있도록. 그대의 뒷머리는 대머리인가? 지나가면 다시는 붙잡을 없기 때문에.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기회!

 

기회는 오지만 지나갑니다. 우리가 봉사할 있는 기회, 섬길 있는 기회, 예배할 있는 기회, 헌신할 있는 기회는 분명히 오는데 지나갑니다. 그래서 있을 한다는 것이 축복입니다. 나중에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성령님이 주신 기회를 여인은 놓치지 않았습니다. 갈등이 되었겠습니까? 이게 보통 액수입니까? 엄청난 돈입니다. ‘이걸 내가 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얼마나 갈등했겠습니까? 그런데 성령께서 자꾸 마음에 감동을 주시는 겁니다. ‘네가 부어라, 드려라, 사랑을 표현해라. 그랬을 결단하고 ‘그래, 다음에는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하고 가서 부었습니다

 

그녀는 아름다운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것을 보시고 “아름다운 일을 했다.”라고 하셨습니다. 단지 엄청난 액수의 향유를 부어서 아름답다고 하신 아니라, 주님을 향해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아서 아름답다고 하셨습니다.

 

3)  최선을 다한 섬김

 

예수님이 여인을 칭찬하신 이유가 있는데, 아름다운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릴까? 돈으로 선물을 하면 될까? 말로 기쁘게 해드릴까? 하고 생각만 하다 끝난 아니라 행동을 했습니다. 생각을 하다 보니까 자신이 깊이 감춰둔 옥합이 생각난 것입니다. 도둑이 들어 훔쳐가면 되니까 얼마나 귀중하게 깊이 숨겨두었겠습니까?

 

그런 향유는 당시 여인들이 결혼 준비를 위해 평생 모아두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중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깨뜨렸습니다. 와서도 향유를 조금만 뿌릴 수도 있었는데, 여인은 아예 가운데를 깨뜨려서 부었습니다. 전체를 아낌없이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이분에게 쓰는 것이 가장 가치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깨뜨리면 다시는 사용할 없고 끝난 겁니다. 그런데 ‘나는 오직 예수님에게만 나의 가장 귀한 것을 사용하겠다. 하며 드린 겁니다

 

사랑하는 예수님께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린 여인의 헌신의 마음이 이해가 되십니까? 아니면 그래도 허비가 아닌가 하고 생각되십니까? 그것은 그녀의 모든 것이고 최선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최선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적당히 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최선을, 모든 것을 드리고 싶었습니다주님은 헌신의 의미를 알아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힘을 다하여”(8)라고 하셨습니다. 그녀가 있는 최선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십니다. 얼마나 희생이 거기에 들어가 있는지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아십니다. 우리가 적당히 해도 아시고, 최선을 다하는 것도 아십니다. 적당히 그것을 안타까워하시지만 그래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내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힘을 다해 드리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런데 “힘을 다하여”, 이상을 요구하신 아닙니다. ‘왜 500데나리온은 ? 200데나리온 꿔다가 하지 ?’라고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있는 무엇인지, 안에서 최선을 다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지금 주님께 드릴 있는 무엇입니까? 나의 최선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드리는 겁니다. 주님이 아시는데, 적당히 숨기지 말고 솔직하면 됩니다. “주님, 제가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써야 합니다. 저의 최선은 이것인데, 이것을 제가 드립니다.”라고 ‘야, 웃기지 마’라고 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네가 최선을 다하는구나.”라고 하십니다.

 

그런 것 중에 교회에 십일조 헌금이 있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율법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는데, 십일조가 지금도 율법이라서 안 하면 죄가 되고 그런 건 아닙니다. 십일조는 나의 수입의 1/10을 드리는 것인데, 그러면 꼭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tax 전으로 해야 하는지, tax를 낸 후에 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그건 알아서 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십일조라는 것은 딱 1/10만 드리는 게 아닙니다. 십일조를 왜 하라고 하셨는가 하면, “너의 것은 너의 것이 아니고 내가 준 선물이다.” 이것을 인정하는 표시로 하라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은, 내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인데 1/10을 드리면서 나의 전부가 주님의 것이라는 믿음을 표현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이 아니라 내가 주님의 소유라는 표시입니다. 그런데 십일조를 드리지 못한다는 것은 아직 내가 나의 주인으로 행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일조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라는 사실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일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똑같습니다. 일주일의 그 많은 시간 중에 한 시간 정도 예배를 드립니다. 옛날 보수적인 교회들은 ‘주일성수’라고 해서 주일에는 차도 안 타고 샤핑도 안 하고 먹을 것도 안 사먹었습니다. 그것이 약간 율법주의적인 면이 있지만, 그래도 그 정신은 귀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주일을 전심으로 주님께 드린다고 하고 나머지 6일은 내 맘대로 하겠다는 태도입니다.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주일에 와서 한 시간 정도 예배를 드리는 게 무엇을 표현하는가 하면, 이 한 시간만 주님의 것이고 나머지는 내 것으로 내가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모든 시간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 이때 나와서 하나님께 다른 주님의 백성들과 같이 주님의 이름으로 예배를 드림으로써 ‘나는 주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내 삶은 주님의 것입니다.’ 하고 표현하는 것이 주일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일주일에 1/7을 주님께 드리는 게 아닙니다. 한 시간만 딱 드리는 게 아닙니다. 예배를 드렸으면, 나머지 6일을 나가서 내 삶이 주님의 것으로 사는 겁니다. 내 삶의 모든 시간은 다 하나님의 것며 주인은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며 사는 겁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 어떻게 사기 치겠습니까? 내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가서 거짓말하고 남을 속이고 욕하고, 어떻게 그러겠습니까?

 

그래서 로마서 12:1에서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합니다. 몸으로 하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 합당한 예배라는 것입니다.

 

 

3.   아름다운 헌신 vs. 추한 욕심

 

그런데 이 여인이 이렇게 아름다운 일을 한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결정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9절)

 

실제로 이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 본문을 다루면서 이 여자가 한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다 기억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이라고 하신 이 말씀이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이미 하신 말씀에 대한 대답이기도 합니다. 지난 번 13장에서 예수님이 “깨어 있으라” 하시면서 온갖 징조를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다 무너질 것이고, 말세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다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 뭐라고 하셨습니까?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13:10)

 

복음이 만국에 전파되고 그 후에야 예수님이 다시 오십니다. 14:9 말씀을 하시면서 온 천하에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기억될 것이니까, 지금 당장 예수님이 오시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복음이 많이 전파가 되어야 합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파가 되어야 합니다. 그제야 다시 오십니다.

 

그런데 사랑의 주님께서 사실은 자신의 옥합을 깨뜨릴 준비를 하신 것입니다. 자신의 죽음이 바로 자신의 옥합을 깨뜨리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일이 벌어지고 있던 바로 그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10-11절)

 

요한복음 12장에 의하면 가룟 유다는 공금을 횡령하는 도둑이었고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배신한 것은 예수님에게 실망한 탓도 있지만, 실제로 돈도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을 보십시오. 지금 이 여인은 자기의 전 재산을 모은 것, 그 가장 귀한 것을 예수님을 위해 한 번에 깨서 다 부어 드렸습니다.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뭐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이용하여 돈을 긁어모을까를 생각합니다.

 

이 여인은 ‘어떻게 하면 내 것을 드릴까?’ 그런데 유다는 ‘어떻게 하면 예수를 이용해서 돈을 벌까?’를 생각합니다. 얼마나 대조가 됩니까? 이 여인은 ‘어떻게 하면 내가 주님께 내 모든 것을 드릴까?’ 그런데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은 ‘어떻게 하면 저 예수를 죽일까?’를 생각합니다.

 

이 아름다운 일 주변에 이런 음모와 악함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그가 내게 아름다운 일을 했다. 좋은 일을 했다.”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허비라면 “아름다운 허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의 옥합을 깨뜨릴 것이 무엇입니까? 나의 옥합은 무엇입니까? 내가 깨뜨리기를 주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감동을 주셨는데 아직 하지 못하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시간의 옥합을 깨뜨려 주님 앞에 드리시기 바랍니다. 나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되던 물질의 옥합을 깨뜨려, 사랑하는 주님 앞에 드리시기 바랍니다.

 

내 육신, 내 야망, 내 인생의 목표를 위해서만 달려왔던 나의 인생을 이제 주님 앞에 온전히 드리면서 “내 인생의 매순간이 주님의 것입니다.”라고 나의 옥합을 깨뜨리며 나아갈 때, “네가 나에게 좋은 일, 아름다운 일을 했다.”라고 칭찬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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