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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0 9 주일예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47

주님께서 보시는

(마가복음 12 35~44)


 

1.   예수님의 질문 (35-37절)


지내다보면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질문을 받는 때가 있습니다. 저런 의도로 이야기하는지, 무슨 생각으로 하는지 뻔하게 보이는 경우, 좋지 않은 의도로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와는 달리, 의도를 숨기고 이야기할 눈치 채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런 우리의 숨겨진 의도를 아십니다. 인간은 속일 있지만 주님은 속일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동안 여러 사람들이 와서 도전하고 꼬투리 잡아서 그것으로 죽음에 이르도록 몰아간 시도들이 있었을 , 예수님이 그들의 생각을 아셨을 텐데 마음이 어떠셨을까 생각해봅니다. 우리도 모를 때는 생각이 없지만, 뻔히 의도가 읽힐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고 화도 나고 그렇습니까? 사람들이 와서 그렇게 예수님은 마음이 답답하시고 안타까우셨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동안 간교한 질문들을 받던 예수님은 이제 거꾸로 질문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주께 이르시되 내가 원수를 아래에 때까지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35-36)


서기관들은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는데, 메시야를 가리켜서 다윗이 “내 주”라고 했다는 겁니다. “주께서 주께 이르시되”라는 것에서, 번째 “주”는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고, 번째 “내 주께”라고 때는 성자 하나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있습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가리켜 “내 주”라고 했는데 메시야가 어떻게 다윗의 자손이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말씀은 시편 110 1절의 인용입니다. 질문의 핵심은 무엇인가? 메시야가 누구인지를 바로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는 단지 다윗의 자손으로 있는 인간이 아니라, 다윗 이전뿐 아니라 창세 이전부터 계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는 다윗의 주님으로서 완전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십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왕권이나 주권이나 권력이나 권세나 없이,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 1:15-16, )


“그분”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는 메시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태복음 22:46 의하면 "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었다)" 합니다. 그들이 대답하지 못한 이유는 예수님이 메시야이신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메시야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도 몰랐습니다. 그저 자기 민족을 정치적으로 구원해줄 사람이 메시야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신성을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많은 내용을 거부합니다. 사실 믿음이 없는 사람이 보면 성경에 믿을 없을만한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도신경만 봐도 믿기 힘든 내용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부분만 보아도,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어떻게 가능합니까?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다’는 것도 상식적으로 말이 됩니다. 죽었다 살았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사도신경의 내용이 믿어지십니까? 이게 믿어진다는 것은 정말 기적입니다. 이런 것이 어떻게 믿어집니까? 사실 믿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것은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창세기 1 1절의 말씀만 믿을 있으면 나머지 믿지 못할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 능력이 있는 분이 처녀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처녀가 아기를 낳게 하는 것을 못하시겠습니까? 사람이 죽었다 살아났다는 것도 못하시겠습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 믿음은 결정입니다. 뭐가 결정인가? 우리가 믿고 있는 것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민족의 시초가 단군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단군을 만나보셨습니까? 단군이 것을 직접 보셨습니까? 단군의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아닌데도 믿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믿기로 결정한 겁니다.


고구려를 세운 고주몽이 있었다는 것도, 그를 만나보셨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아십니까? 신라와 백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오래 전으로 것도 없고, 16세기 후반의 이순신 장군도, 만나보셨습니까? 그런데 그분이 왜군을 물리쳤다는 것을 직접 것도 아닌데 어떻게 믿으십니까? 믿기로 결정을 겁니다. 여러 자료와 학자들의 연구를 ‘이것은 틀림없구나’ 하고 내가 받아들였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알고 있는 겁니다.


성경도 똑같습니다. 믿음은 결정입니다. 이런 황당무계한 것을 어떻게 믿느냐 것이 아니라, 성경도 믿을 만한 증거가 너무 많기 때문에, 100% 아니더라도 60-70% 정도 확실하다는 확신이 있을 때는 이것을 사실로 믿기로 결정하는 겁니다. 내가 믿지 못한다는 말은 믿지 않기로 결정한 겁니다. 믿고 있는 것은 믿기로 결정한 겁니다.


세상의 모든 , 특히 과거의 역사가 그렇습니다. 내가 아닙니다. 내가 겪은 아닙니다. 그런데 믿을 만한 자료들과 사람들이 그렇다고 해주니까 그것을 믿기로 결정해서 사실이라고 내가 받아들인 겁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을 만한 증거가 너무 많습니다. 믿기로 결정해서 받아들이는 겁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듣더라” (37)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신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시라는 것은 우리가 이해할 없는 이야기인데, 성경은 그렇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질문을 하시면서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주님으로서는 완전한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다윗의 자손으로서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신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십니다. 인간, 하나님이 아니라, 100% 하나님이며 100% 인간입니다.


이것은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논리가 아닙니다. 믿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신뢰입니다. 이해가 가지 않지만 믿을 만한 분이 이야기해주니까 내가 그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맹목적으로 무조건 믿으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내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엉터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어떻게 인간이 모든 것을 이해할 있습니까? 모든 지식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PhD이고 학자나 교수라고 해도, 일정한 분야의 전문가인 것이지 모든 지식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내가 모른다고 해서 가짜이거나 엉터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성경도 내가 모르는 것입니다. 연구해보면 이해가 갑니다. 내가 이해를 못했다고 엉터리라고 하며 떠난다면 그것처럼 안타깝고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세상의 일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하나님의 일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분이 하시는 일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하나님이 무엇이든 있는 분이심을 믿고 신뢰한다면,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의 기적을 믿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성경의 하나님이 잔인하시다고 느껴질 때도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성경에 나오지 않는 신앙의 의문들도 하나님이 가장 좋은 방법을 갖고 계실 것임을 신뢰할 있습니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할 , 거기에 모여 있던 수많은 사람들은 즐거워하며 들었습니다(37).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무시를 받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동안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배척받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당당하고 논리가 완벽했던 서기관들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 앞에서 너무 어리석고 바보 같은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통쾌해 했고, 쌤통이라고 느낍니다. 아주 즐겁습니다. 그러나 서기관들은 전혀 즐겁지 않습니다. 오히려 괴로웠고 분노와 시기로 가득 차서 예수를 죽이려고 합니다.


진리를 듣고 받아들이면 즐거움이 넘칩니다. 그러나 진리 때문에 오히려 화를 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진리가 자기들의 마음을 파고들기 때문에 자기 방어와 자기 합리화를 위해서 진리를 거부하며 자신의 모습을 가릴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진리를 들을 즐거워하는가, 아니면 괴로워하며 분을 내는가를 점검해야겠습니다.


이번 부흥사경회도 그렇습니다. 정말 귀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 인간의 말이나 지식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뜻이 선포될 , 마음에 기쁨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래서 자리에는 즐거움과 기쁨이 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갈 때는 얼굴이 환해서 나가게 됩니다. 우리 예배가 바로 그런 예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QT 열심히 하고 성경을 읽을 때도 너무 감격스러워서 자리를 기뻐하며 나가는 모습이 되면 좋겠습니다.


 

2.   서기관들의 외식 (38-40)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는가 하고 질문하신 예수님은, 이어서 서기관들에 대해 아주 통렬하게 꾸짖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38-40)


그들은 가지 점에 있어서 잘못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첫째, 대접받고 인정받기를 좋아합니다.

그들은 멋진 옷을 입고 다니면서 사람들로부터 인사를 받는 것을 즐거원합니다. 언제나 남들이 자기를 인정해 주길 기대하며 그렇게 되도록 행동했습니다. 고귀한 자리에만 가고 아주 고상하게 행동했습니다.


둘째로, 이들은 남을 착취하고 해롭게 하는 자들입니다.

서기관들은 자기 재산을 불리기 위해 가난한 과부들의 집을 반강제로 인수하곤 했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아는 구약의 율법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라고 분명히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율법의 도사인 이들이 오히려 성경의 말씀과 반대가 되는 악한 일을 한다는 겁니다.


셋째, 그들은 외식, 위선하는 자들입니다.

남들 앞에서 멋있게 보이기 위해 기도를 오래 했습니다. 보이는 곳에서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조용하고 은밀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산상설교( 5-7)에서 은밀한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진정한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람에게 멋있게 보이기 위해서 기도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서기관들이 입는 , 시장에서 문안 받는 , 회당에서 높은 자리와 잔치에서 윗자리에 앉는 것은 보통 하는 일이었고, 사람들도 그들이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일들입니다. 악한 일들이라기보다는 당시 서기관이면 당연히 이렇게 한다고 누구나 생각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사람들이 모여서 즐겁게 대화하고 있습니다. 그때 서기관 사람이 옷을 입고 멋진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면 자리가 그대로 얼어붙습니다. 누가 봐도 사람들은 신앙 좋은 사람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 종교적인 사람들, 영적 지도자라고 인정하는데, 사람만 나타나면 자리가 조용해지고 얼어붙고 분위기가 좋아집니다. 이런 진짜 경건이겠습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봐도 이분은 신앙 좋은 , 누가 봐도 이분은 영적인 , 누가 봐도 이분은 성경도 많이 알고 기도도 많이 하고, 누가 봐도 영적인 지도자인데, 사람만 나타나면 얼어붙습니다. 이게 사람 이야기가 아니라 얘기입니다. 다들 웃고 떠드는데 제가 나타나면 조용해집니다. 옆에는 아무도 앉지 않습니다. 모임 옆에 자리가 넓습니다. 약간 개선되고는 있습니다. ^^


나만 나타나면 자리가 얼어붙고 조용해진다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겁니다. 서기관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 길게 기도하는 사람이 가난하고 불쌍한 과부의 재산을 착취할 있습니까? 과부를 착취하는 사람이 어떻게 길게 기도할 수가 있습니까? 이론상으로는 불가능한데 실제로는 그랬고 지금도 이런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믿음과 생활이 따로따로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왔을 때는 너무 경건한데 실제 속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지적하신 것은 이들이 종교적으로 잘못하고 있다는 것보다는, 자기들이 영적인 생활을 하는 것과 실제 삶이 너무 다르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생활 속에 살아서 적용되지 않으면 우리도 얼마든지 이렇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두려워하고 사람 앞에 자기가 어떻게 보이는가에만 신경 쓰게 되면 이렇게 위선적이 되고 외식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여기서는 경건하고 거룩하고 기도와 눈물과 찬양이 있고 너무 좋은데, 실제 삶에만 나가면 전혀 그렇지 않다면, 문제입니다.


지난 본문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과의 사랑의 관계가 나갈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게 믿는 같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누구나 기피하는 인물이 바로 서기관들이었고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것을 지적하셨고, 지금도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게는 혹시라도 이런 위선적인 모습이 없는가? ‘아, 사람’이라고 아니라 내가 그런 사람은 아닌가를 돌아봐야 합니다. ‘저 사람이 그런 사람이야.’가 아니라 ‘내가 그런 사람이구나’ 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과 실생활이 하나가 되는 삶이 되기 위해 애쓰며 나아가야겠습니다.

 


3.   가난한 과부의 헌금 (41-44)


후에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헌금을 하는지를 보셨습니다.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넣는가를 보실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1)


우리도 앞에 들어올 헌금함이 있는데 성전도 그랬습니다. 우리도 넣을 다른 사람들이 본다 해도, 하나님이 보시니까 ‘하나님, 마음을 드립니다. 하며 넣는 겁니다.


가난한 과부는 와서 렙돈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2)


여기 보면 렙돈이 고드란트라고 되어 있습니다. 렙돈과 고드란트가 같은 액수라는 겁니다. 액수가 지금 돈으로 하면 얼마나 되겠습니까? 당시와 지금은 경제 상황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당시 돈을 지금 돈으로 정확히 환산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다른 물건과 비교해보면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있습니다.


렙돈과 고드란트는 서로 다른 화폐였는데, 당시 가장 최소 화폐단위였습니다. 거스름돈 수준의 아주 적은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드란트’라는 말에는 1/4(영어로 quarter)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의 1/4 말하는 것입니까? 로마 화폐법에 따르면, 고드란트는 신약성경에 나오는 ‘앗사리온’의 1/4 의미한다고 있습니다.


참새 마리 앗사리온 팔리지 않느냐” ( 10:29)


참새 다섯 마리 앗사리온 팔리는 것이 아니냐” ( 12:6)


구절에서 표현이 약간 다른 것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마태와 누가의 강조점이 다른 것입니다. 참새 2마리는 1앗사리온인데, 참새 5마리에 2앗사리온입니다.


당시 참새 2마리의 실제 가격은 마태복음에서와 같이 1앗사리온이었다고 보입니다. 그런데 당시 시장에서 참새를 2앗사리온을 내면 대체로 참새 마리를 덤으로 끼워서 5마리를 주었습니다. 누가는 그것을 강조한 겁니다. 참새는 당시 서민들이 흔히 먹는 음식이었는데, 누가는 참새가 그처럼 흔하고 가치 없는 것임을 강조하려고 앗사리온에 마리를 더해 다섯 마리에 팔린다고 것입니다.


앗사리온은 참새 2마리입니다. 2렙돈은 1고드란트이고, 그것은 1/4 앗사리온입니다. 그것은 참새 2마리의 1/4이고, 결국 그것은 참새 마리 값입니다. 결국 본문의 과부가 드린 렙돈은 참새 마리 가격이 됩니다.


오래 한국에서도 참새구이를 팔았는데, 사실 자그마한 참새 마리는 사람이 배부르게 먹을 양에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앗사리온만 내면 마리를 덤으로 끼워주어서 다섯 마리를 있는 흔한 참새를 겨우 마리밖에 없는, 아주 적은 액수인 렙돈( 고드란트) 헌금하는 과부의 모습을 예수님이 보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과부는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43-44)


바로 여기에 예수님의 말씀의 참된 의미가 나타납니다. 성경을 그냥 읽으면 예수님께서 과부의 정성스럽게 드린 헌금을 칭찬하신 사건이라고 그냥 생각하기 쉬운데, 13장과 연결해서 보면 핵심이 그게 아니라는 것을 있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돌들이 어떠하며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건물들을 보느냐 하나도 위에 남지 않고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13 1-2)


과부의 헌금 사건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제자가 성전이 대단하다고 감탄을 합니다. 제자의 감탄에 대해 예수님은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무너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실제로 AD 70년에 로마 군대가 들어와 무너졌습니다. 그것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헌금한 과부의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 당시 상황에 대한 슬픔을 넘어 분노를 느끼셨다는 사실을 있어야 합니다. 어떤 슬픔, 어떤 분노인가?


성전을 출입하는 사람들 중에는 부자들이 많이 있었고 그들은 많은 액수의 헌금을 넣었습니다(41). 그들과 함께 성전을 드나들던 과부가 거기 있었는데, 그저 참새 마리 값으로 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정말 돈이 없고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잘것없는 액수인 생활비마저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너무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드렸는가? 믿음이 좋아서, 하나님을 사랑해서 드린 것도 분명히 있습니다. 40절에 보면 분명히 서기관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사는 자들이었습니다. 서기관들이 어떤 방식으로 과부들의 가산을 삼켰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성전에서 평생을 보낸 안나( 2) 같은 과부들이 있었는데, 당시 과부들의 재산을 서기관들이 맡아서 관리해주었습니다. 그런데 함부로 관리했습니다과부의 재산을 맡아서 슬쩍 빼돌리며 한몫씩 챙기며 자기가 쓰던 서기관들이, 거기에 더해서 ‘당신들은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합니다.’라고 과부들에게 강조를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과부들은 서기관들에게 성전에서의 봉사를 강요당하고 재산도 빼앗기면서 살았다는 말입니다.


사실 과부들의 재산을 반강제로 빼앗아간 건데, 이제 얼마 남지도 않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강요받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부로서 도움을 받기보다 계속 하나님께 봉사하고 바쳐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서기관들은 과부들의 돈을 빼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과부들이 얼마나 비참한 상황이었는가를 있습니다. 빼앗기다시피 맡겨놓고 얼마 되는(참새 마리) 보잘것없는 액수의 돈도 헌금으로 바쳐야만 했던 과부들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마음이 아프셨고 슬픔을 느끼셨고 분노를 느끼셨던 것입니다.


지금 바치라고 이야기를 하시는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보시면 예수님은 과부를 불러서 잘했다고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과부를 보라고 하십니다.


지금 예루살렘에는 그곳을 거룩하게 여기는 수많은 사람들이 거룩한 절기인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모여 있습니다. 그리고 한가운데에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전이 아주 웅장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있습니다. 그래서 다들 입을 쩍쩍 벌리며 감탄하는 건물입니다. 성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며 헌금하고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경건하고 거룩하고 제사가 있는 속에, 고통 받는 자들이 소외되고 멸시를 당하고 있다는 겁니다. 오히려 가난한 자들은 권력 있는 자들에 의해 착취와 압제를 당하고 있습니다.


부자들이 헌금을 넣는 것도 귀한 일이지만, 상상을 해보십시오. 살이 찌고 배도 나오고 너무 먹어서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모습으로 와서 헌금을 냅니다. 그런데 과부는 아주 찌들고 힘든 모습으로 와서 자기의 모든 것을 넣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난한 자들이 아무 도움이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곳이 놀랍게도 거룩한 성전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화려함과 웅장함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나는 예복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부유한 서기관들이 거기에 있었습니다(38-40). 게다가 그들은 과부의 돈을 뜯어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섬겨야 가난한 과부들의 아픔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히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며 자기 이익만 챙기는 악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과부를 보시며 슬퍼하시고, 서기관들을 보시며 분노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과부가 드린 렙돈은 당연히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헌금이었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과부가 자기 재산을 빼앗기고 남아 있는 자기 생활비 전부를 바쳐야 하는 현실, 피눈물 나는 연보를 받아먹으며 화려한 겉모습을 자랑하던 예루살렘 성전, 그리고 악한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 속에서 호의호식하며 부귀영화와 권력을 누리며 살아가던 종교 지도자들을 향하여 주님은 선포하십니다.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40)


동시에 그런 자들이 세력을 떨치고 있는 성전을 향해서도 저주를 선포하십니다.


너는 건물들을 보느냐? 하나도 위에 남지 않고 무너뜨려지리라” (13:2)

 


[나가는 ]


여러분, 우리가 오늘 창립 25주년으로 감사한 주일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무엇을 위해 존재합니까? 우리도 25주년으로 얼마든지 축하하고 성가대도 특별히 많이 하며, 여러 순서를 진행하면서 즐겁게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냥 조용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우리끼리 축하하고 우리끼리 즐거워하는 곳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 안에서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서로를 사랑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끼리 즐거운 공동체는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끼리 즐거운 아니라, 이렇게 어려운 지체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랑의 나눔이 있는 교회, 특별히 이렇게 주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곳에 찾아가서 사랑을 나누는 교회...


창립 기념 주일을 맞이해서 선교 간증과 보고를 해주신 아주 맞았다고 생각됩니다. 선교를 다녀온 분이 시간과 물질을 희생하며 갔다 오셨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희생한 이상으로 받고 왔다고 고백을 하시지 않습니까? 기쁨이 있고 감격이 있습니다.


여기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이라도 우리가 마음을 모으자고 했는데, 여러분이 마음을 모으셔서 보냈더니 재료들을 사는데 귀하게 사용이 겁니다. 우리 아이들도 자기가 조금 좋은 것을 사먹을 있고 조금 자기를 위해 있는데, 그걸 조금 아껴서 불이라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몽골에 가서는 52어의 기적으로 나타난 겁니다. 나를 위해 것을 아껴서 몽골 사람들을 위해서 썼습니다.


오늘 주보를 보시고 숫자가 잘못된 아닌가 분들이 계실 겁니다. 잘못된 아닙니다. 지난주에 어떤 분이 십일조 헌금을 2 불을 했습니다. 이분은 부자가 아닙니다. 사업을 크게 해서 엄청난 돈을 버는 분이 아니라 평범한 분입니다. 엄청난 돈이 생기는 분이 아닌데, 어떻게 그런 돈이 생겨서 하나님의 것이니까 당연히 드리겠다고 하고 헌금한 겁니다.


내게 이런 돈이 들어왔다면 적당히 감사헌금을 하고 끝내도 누가 알겠으며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이것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라고 하며 그냥 드렸습니다. 이게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게 이런 돈이 있었다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가족이 여기저기 다녀도 충분한 , 사는 다운페이로 써도 되는 돈인데, 하나님의 것이라고 드렸습니다.


풍족해서 드린 아닙니다. 아주 가난한 중에는 아니더라도, 있는데 나를 위해 쓰는 아니라 당연히 하나님의 것이라 드렸다는 겁니다. 주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엄청난 액수라서 기뻐하신다는 아닙니다. 이렇게 있는 분이라면 어떤 돈이 들어와도 돈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인생이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런 마음들이 모아지고 점점 퍼져 나가서,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주님이 원하시는 일들만 감당하여 주님이 기뻐 사용하시는 우리 교회로 더욱 힘차게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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