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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9 11 주일예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43

자비로운 포도원 주인과 악한 농부들

(마가복음 12 1~12)


[들어가는 ]


지난주일 예배 말씀을 마치는 순간 많은 분들이 당혹감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평소보다 너무 짧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교회의 어린이주일학교에서 어린이 예배를 드릴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자, 이제 설교 시간이 되었어요. 설교는 하는 시간이지요? 그랬더니 아이들이 대답을 합니다. “참아주는 시간이요. “지겨운 시간이요. “사탕 주는 시간이요. 그러자 선생님이 질문을 합니다. “어린이 여러분, 성경 안에는 뭐가 들어 있나요? 그랬더니 아이가 즉시 손을 번쩍 들고 대답합니다. “제 성경 안에는 로봇 스티커가 들어 있고요, 우리 성경에는 여자 친구 사진이 들어 있어요! 어린이다운 대답입니다.


영원한 베스트셀러인 성경은 가장 많이 있는 책이면서도 가장 읽는 책이기도 합니다. 가정에 성경이 종류별로 권씩은 있지 않습니까? 성경은 가장 많으면서도 가장 읽는 책입니다. 가장 익숙한 책이면서도 가장 생소한 책이 아닌가 합니다.


요즘 <말씀의 > 1기를 하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숙제는 하나입니다. 써오는 것도 없고, 그냥 성경을 읽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양이 아주 많습니다. 13 안에 성경 전체를 읽어야 하기 때문에, 하루에 적게는 7-8장에서 많게는 장씩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느끼는 것은, 성경을 동안 읽은 것은 시간이 없거나 바빠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우선순위를 거기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읽은 것입니다. 숙제이기 때문에라도 성경을 하루에 7-8장내지 이상 읽어야 하는데, 다들 읽고 계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정말 거기에 우선순위를 두고 읽으려고만 했다면 이전에도 얼마든지 읽을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는 성경을 빠르게 그냥 읽기만 해서는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성경 안에는 정말로 뭐가 들어 있습니까? 두꺼운 성경이지만 내용을 단어로 요약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관계’입니다. 성경은 관계에 대한 책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웃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알려주는 책이 성경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깨어졌고, 따라서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도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이토록 수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성경은 바로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책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1.   하나님은 열매를 원하신다 (1)


이렇게 오신 예수님이 동안 사역을 하시다가 예루살렘에서 잡혀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오늘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사시던 당시 상황을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내용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당시에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던 일이라는 것입니다.


멀리 타국으로 여행을 떠난 주인과 그가 고용한 농부들의 관계가 당시 많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요단 북쪽의 땅과 갈릴리 산지의 대부분을 외국인들이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외국인 주인들과 그들 밑에서 일하는 유대인 소작인들 간에 많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들 사이의 갈등은 어쩌다 가끔씩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거의 매일 일어나는 아주 흔한 일이었습니다. 인간들이 서로 다투는 가장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돈입니다. 당시에도 문제 때문에 서로 다투었던 겁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배경 위에서 오늘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본문을 보면, 사람이 나오는데, 그는 포도원을 일구고 울타리를 칩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1)


이렇게 울타리를 치는 것은 여우와 멧돼지 같은 들짐승들로부터 포도원을 보호하고, 포도나무 가지들이 자기 땅에서 남의 땅으로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것입니다. 주인은 포도원 안에 포도즙을 짜는 틀을 만들고, 망도 보고 안에 거할 수도 있는 망대도 지어서 세웁니다. 그리고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세를 주고 타국으로 갑니다.


당시 주인이 새로운 포도원을 만들고 소작인 농부들에게 맡기고 가는 것은 상당한 모험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포도원을 만들었다고 당장 이익을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열매를 얻으려면 최소한 4년은 기다려야 하고 5년째가 되어서야 수확을 기대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포도원을 만들어 세를 주고 떠난 주인의 행동들을 보면, 자신의 포도원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거둘 것이라는 그의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실이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물론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열매를 찾으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여기서 배웁니다. 마가복음 12장에서 말씀하시는 비유를 ‘악한 농부의 비유’라고 보통 알고 있는데, 사실은 주인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포도원 주인의 비유’라고 있는데, 비유는 이사야 5장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사야 5장에 보면, 소위 ‘포도원 노래’라는 것이 나옵니다. 주인이신 하나님이 포도원을 만두시고, 땅을 파서 돌을 없애고 극상품, 최고로 좋은 포도나무를 심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과 같이 망대도 세우고 술틀도 만듭니다. 이상 잘해줄 없을 정도로 최고의 환경을 갖추어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당연히 좋은 포도열매를 맺기를 기대하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정성을 들였는데도 불구하고, 포도원은 좋은 포도가 아니라 포도를 맺습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 5:7)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좋은 열매 맺기를 기대하셨지만, 그들은 그러한 주님의 기대와는 달리 아주 악한 짓만 일삼다가 결국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땅에 보내셔서 그를 통해 새로운 백성을 부르시고 그들로부터 좋은 열매를 기대하십니다.


하나님은 열매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바리새인들처럼 겉으로는 멋지고 거룩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안에 더러운 것으로 가득 있는 것을 하나님은 굉장히 싫어하십니다. 아주 가증하게 여기십니다.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예수님이 그것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지내면서 ‘저 사람은 좋다’라고 느끼고 ‘저 사람은 별로다’라고 느낍니다. 그런데 별로인 정도가 아니라 ‘저 사람은 정말 싫다’라고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종류의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자신을 보니까 제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가 하면, 앞에서 화를 내는 사람은 아닙니다. 화는 수도 있는 것이고, 화를 내더라도 속에 있는 것을 이야기하면 나중에 대화가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대하기 힘든 경우가 뭔가 하면, 요즘 말로 ‘꼼수를 쓰는 사람’입니다. 바로 바리새인들 같은 사람입니다. 앞에서는 이렇게 하고 뒤에서는 저렇게 하는 사람입니다. 아닌데 그런 , 그런데 아닌 척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대하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특히 남을 조종하거나 조작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이 그렇습니다.


요즘 말로 그런 것을 ‘정치한다’고 하는데, 국회나 백악관이나 청와대에만 정치가 있는 아니라 교회에도 있습니다. 원래 ‘정치’라는 말은 좋은 것인데, 이것이 잘못된 의미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뒤에서 꼼수를 쓰고 조작하고 조종하는 것을 ‘저거 정치하네’라고 하는 말이 되어 버렸습니다. ‘설교하다’라는 말도 좋은 것인데, 아이들에게 뭐라고 하면 ‘설교하지 마’라고 합니다. 잔소리하는 것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정치라는 말도 자기의 이익을 이루기 위해 조작하고 조종하는 것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것을 계속 지적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잎은 무성하지만 정작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좋은 열매를 맺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열매를 맺길 원하고 계십니까? 당연히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영역’을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천국(장소)만이 아니라, 땅에서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열매라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말합니다. 생각에 좋은 열매나 내가 원하는 열매, 이익을 따라 나아가는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열매가 좋은 열매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어떤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는 어떤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할 열매입니까? 그것을 우리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19세기에 아주 유명한 목사님이 계셨는데, 그분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비석을 세우면서 묘비에 자기 어머니를 생각하며 성경 구절을 하나 새겼는데 마태복음 15 28절을 새겼습니다. “여자여, 믿음이 크도다!” 목사인 아들이 어머니가 돌아가신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세울 , 자기 어머니를 생각하면서과연 나의 어머니는 믿음이 크신 어머니였다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것을 가장 표현할 있는 말씀이 무엇인가 생각하다가, 두로와 시돈 지방에 오신 예수님께 나아와 귀신 들린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간절히 구했던 가나안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자여, 믿음이 크도다! Woman, you have great faith!”


돌아가신 부모님의 인생을 돌아보며 자녀의 입에서 바로 이런 말이 나온다면 인생은 정말 성공한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나의 아버지/어머니는 믿음의 사람이셨다.”라고 자녀들이 인정할 정도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자녀가 나를 나를 뭐라고 평가할 같으십니까? 우리의 부모님을 생각할 한마디로 어떤 분으로 표현하시겠습니까? 자녀의 눈은 속일 수가 없습니다. 저도 아들의 눈이 가장 무섭습니다. 아무리 밖에서 뭐라고 외쳐도 아들의 눈에 보이는 모습이 진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자녀들에게 유산을 물려주기를 원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좋은 집을 남겨 주기도 하고, 돈을 많이 모아서 남겨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것은, 그런 유산은 얼마나 오래 갈지 없는 것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오래 가야 년입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남겨줄 불멸의 유산이 무엇입니까? 해가 갈수록 없어지지 않고 더욱 복의 근원이 유산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부모의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유산을 우리 자손에게 남겨준다면, 유산은 우리 가정과 자녀와 대대손손 같이 하면서 우리의 후손들에게 축복이 것입니다. 믿음의 유산이라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물론 믿음의 유산이라는 내가 원한다고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부모가 훌륭해도 자녀가 믿을 수도 있습니다. 부모가 믿지 않아도 자녀는 굉장히 훌륭한 신앙인이 수도 있습니다. 요즘 우리가 수요예배 열왕기서나 역대기를 살펴보면서 배우는 바로 그겁니다. 아버지는 아주 훌륭했는데 아들은 아주 악한 왕이 되고, 아버지는 아주 악한 왕이었는데 아들은 아주 훌륭한 왕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각자가 결단해야 하는 것이 믿음의 문제입니다. 믿음의 유산이 유전되어 내려가는 아닙니다. 그런데 믿음의 분위기,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부모가 있을 , 자녀도 믿음으로 결단하고 믿음의 길을 가게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가 연구를 해보자고 하며, 책을 읽고 그리스 철학, 동양철학을 살펴보고, 사랑이 무엇인지 분석하며 결론을 내는 것도 좋지만, 몸이 불편한 사람에게 떠주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입니다. 뛰어난 음악 실력으로 아름답게 찬양을 부르는 것도 좋지만, 주님의 은혜가 마음에 사무치고 너무 감격스럽고 감사해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노래하는 것이 열매입니다.


전도도, 선교도,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자고 하고, 기도에 대해 연구하고, 신앙서적을 읽고, 세미나하고 공부하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면 된다는 겁니다. 그냥 단순히 지금 힘들어하는 지체를 위해서 초라도, 1분이라도 기도하는 , 나아가 어떤 사정이 있는 지체를 위해 하루 끼라도 금식하며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는 것이 열매가 아니겠습니까?


‘섬김’을 외치며 강조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피곤한 가운데 단순히 자기 가정을 오픈하여 목장 모임을 갖는 , 믿는 VIP 가정을 초대하여 따뜻한 대접하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내가 좋아하는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로부터 열매를 찾고 계십니다. 이스라엘로부터 그런 열매를 기대하셨는데 악한 열매만 맺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부터 좋은 열매를 찾으십니다.

 


2.   하나님은 때가 되면 심판하신다 (2-9)


포도원을 꾸민 다음 농부들에게 그것을 맡기고 여행을 떠난 주인은, 이제 열매를 거둘 때가 되어 종들을 보내서 농부들에게 자신의 열매를 달라고 말합니다. 당시 주인에게는 얼마든지 그렇게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주인의 요구에 대해 농부들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종을 보내니, 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2-4)


농부들은 주인이 보낸 종들을 잡아서 심히 때리고 보내거나 상처를 내며 능욕합니다. 이러한 악한 행위는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들은 세를 얻어서 일하는 농부로서 당연히 주인에게 속한 열매를 바쳐야 했지만, 하나도 바치고 싶지 않은 겁니다. 마치 자기 것을 주인에게 주는 것처럼 아까운 겁니다. 전부 자기들이 갖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포도원이 마치 자기들 것인 행동합니다.


주인이 보통 사람이었다면 당장에 강한 군사들을 풀어서 악한 농부들을 쓸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인내를 가지고 다른 종들을 많이 보냅니다.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 (5)


사실 이렇게 자기 종들이 능욕을 당하고 얻어맞고 왔을 주인이 다른 종을 보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물론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내하며 다른 종들을 보냅니다. 그런데 악한 농부들은 이번에도 똑같이 행하며, 때리고 살인까지 합니다. 그러자 주인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진멸해 버립니까?


이제 사람이 남았으니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자 그러면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 (6-8)


주인은 마침내 자신의 아들을 보내며, 그들이 자기 아들은 존경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주인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악한 농부들은 주인의 아들을 잡아 죽입니다. 그들은 주인의 아들을 보자, 아들을 보낸 것을 보니 주인이 죽은 아닌가 하고 짐작을 합니다. 땅을 물려받을 유일한 상속인이 아들인데, 그를 죽이면 땅이 자기들의 것이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머리로 아주 계산이 빠릅니다. 그래서 아들을 죽입니다. 미워서 죽인 아니라,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죽였습니다.


당시의 법은, 상속인이 없는 땅은 임자 없는 땅이라고 명시해서 어느 일정 기간 동안 아무도 찾지 않으면 땅은 누구든지 먼저 차지한 사람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배경 속에서 농부들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주인의 아들을 죽인 것입니다.


그런데 7절을 보면 그들이 “이는 상속자니 죽이자 그러면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라고 하는 것을 보면, 그들은 땅이 분명히 주인의 땅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면서도 반역과 살인을 저지른 것입니다. 악한 농부들의 악한 행동에 대해 말씀하신 예수님은 가지 질문을 하십니다.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9)


세를 얻은 농부들이 마땅히 해야 일은 주인에게 열매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비유에 나오는 농부들은 주인에게 반역하여 열매를 주지 않았고, 심지어 주인이 보낸 종들을 때리고 죽이며 최후에는 그의 아들까지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인의 심판을 면하지 못하게 되고, 포도원은 다른 사람들이 새로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읽으시면서 가장 은혜가 되는 무엇입니까? 저는 “다른 사람들”이라는 말이 마음에 닿았습니다. 바로 내가 ‘다른 사람들’ 가운데 들어가다니 너무 감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유대인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였던 것처럼, 이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을 죽이게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이 계속 자신을 거부하고 나중에 죽이기까지 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결코 면하지 못할 것임을 그들에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6절에서 주인이 자기 아들을 보낸 것이 마지막이었듯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시는 마지막 메신저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말도 이런 되는 악행과 반역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당신의 종인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구약의 예언서들이 있는데, 발음도 힘든 수많은 예언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망하기 전에 죄만 짓고 그러니까,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계속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그들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인내는 우리 상상을 초월하는 풍성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내가 끝이 때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분명히 오래 참으시지만 영원히 참지는 않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내가 바닥나거나 너무 화가 나서가 아니라, 공의를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와 악함과 실수를 참아주고 계십니다. 기다려주십니다. 인내하십니다. 저도 그것을 너무 많이 느낍니다. 내가 하나님이 당연히 기뻐하지 않으실 만한 일을 하고 있는데, 오히려 죄를 짓고 남을 속이고 거짓말을 하고 그러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죄를 지어도 사고가 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괜찮은 알고 계속 죄를 짓는다면,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거나 모르시거나 감아주셔서 그런 겁니까? 그런 아니라 기다려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얘야, 빨리 마음을 돌이켜라. 빨리 돌이켜라. 하고 기다려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무조건 죽이고 따르지 않으면 멸망시키는 하나님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 보면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죄인이 돌이켜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이 잔인하게 죽이라고 하셨다고 잘못 아는데, 사실은 잘못된 우상을 숭배하던 자들에 대해 참고 참고 참으시다가 이스라엘을 사용하셔서 그들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여리고 이야기만 읽어보셔도, 기생 라합과 집을 살려주셨습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믿음으로 나아온 라합은 기생이었고 창녀였습니다. 가장 밑바닥 인생, 아주 더러운 인생, 누가 봐도 죄인인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우상을 섬기는 속에서 난잡한 일을 벌이는 직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도 하나님께 믿음으로 나아오니까 오히려 유일하게 거기서 살아남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아무리 극악무도한 죄인이라도 돌이켜 회개하고 주님께 나아오기만 하면 구원해주십니다. 그런데 마침내 때가 되면 참고 참고 참으시다가 결국 하나님은 세상을 행위대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겠습니까? 먼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주님의 뜻대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나뿐 아니라 주변에 믿지 않는 가족, 친구, 이웃을 주님께 인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천국에 갔을 나는 예수님 믿고 구원받아서 가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거기에 없고 지옥에 있다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누리며 아무리 훌륭하고 높고 존경받는 삶을 살았다 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땅에서는 아무리 길어봐야 100 정도입니다. 그것은 ‘영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 년도 아니고, 우리가 상상할 없을 정도로 기간입니다. 엄청나게 기간 동안 멸망에 있고 땅에서만 반짝하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와 함께 구원받아 천국에 가서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영원을 누릴 있도록, 우리가 섬기고 기도하며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에 영원이 달려 있다 (10-12)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10-11절)

 

이 말씀은 시편 118편 22-23절의 인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때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며칠 전인 고난주간이었습니다. 그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유대인의 큰 명절 중 하나인 유월절(Passover)을 지키기 위해 이곳저곳에서 예루살렘으로 와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시편 118편을 유월절마다 노래했기 때문에 여기서 인용하신 이 구절은 그들이 너무 잘 아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건물에서 가장 중요한 머릿돌이 된 것처럼, 유대인들이 메시야로 온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을 끝까지 거부하지만, 자신은 결국 하나님의 구원의 중심이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에서 자신에게 선택권이 없는데 대해 불공평하다고 말합니다. 혹시 여러분은 ‘나는 왜 한국 사람으로 태어났지?’ 하고 불평한 적이 있으십니까? ‘나는 왜 저런 시골에서 태어났지?’ ‘나는 왜 저런 부모님 밑에서 태어났지? 내 부모님도 저 친구의 부모님처럼 좋은 분이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우리 집안은 왜 이렇지?’ 이런 생각들을 해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선택권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물론 그것조차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내가 선택했는데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마 21:44)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을 끝까지 거부하는 것은 자신을 가루로 만들도록 내버려두는 어리석은 행위라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따르느냐 아니면 거부하느냐 하는 것은 영원한 미래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각 개인이 믿음으로 결단해야 하는 일입니다. 남이 강요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부모님이 잘 믿는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내가 결정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는 손주가 없다. 하나님께는 자녀만 있다.’

 

영원에 대한 이 한 가지 바른 선택을 하기만 한다면, 혹시 그 동안 수백 가지, 수천 가지 잘못된 선택을 했더라도, 그 동안 자기 마음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더라도, 이것만 제대로 된다면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만 제대로 된다면, 이전의 모든 불행한 과거의 일들이 다 하나님 안에서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아, 그때 이래서 그렇게 된 것이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른 선택을 한 사람에게는 영원히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이 되는 선물이 주어집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이 선물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때 ‘감사합니다’ 하고 받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잘못 선택을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다면, 결국 깨어지고 가루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을 원망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결정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4.   종들과 아들의 죽음이 주는 의미가 있다


오늘 비유에 나오는 종들은 선지자들이고 주인의 아들은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종들 중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보냄을 받은 사람이 세례 요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허무하게 죽임을 당한 것처럼 보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이 비유에 대해 한 가지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왜 종들은 주인이 가라고 했을 때, 이전에 갔던 종들이 불구가 되거나 죽어서 시체로 온 것을 보았는데 왜 갑니까? 왜 자기가 다치거나 불구가 되거나 아니면 죽을 것을 알고도 갑니까? 왜 바보 같이, 고지식하게 가서 죽임을 당합니까?

 

그 모든 것은 사명 때문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그들의 죽음은 쓸 데 없이 허무하게 죽임을 당한 것처럼 보입니다. 안 죽어도 되는데, 괜히 가서 죽임을 당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들의 죽음을 헛되이 보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가리켜 ‘여자의 태에서 나온 자 중 가장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죽기까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다 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모든 사람이 그와 같다고도 하셨습니다. 결국 사명을 다하여 하나님 나라에 함께 온 모든 사람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하나님의 종들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시각으로 볼 때 그들의 죽음은 실패인 것 같고, 헛된 것 같고, 바보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 그들의 죽음은 하나님 나라 복음을 위한 헌신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보다 더 참혹한 고난을 당하시고

비참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너무나 무기력하게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높여주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주님의 복음을 위해 죽기까지 순종하며 헌신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결코 그냥 두지 않으시고 높여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어쩌면 너무 바보 같이 보일 수 있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면 고난을 당하게 되고 죽음의 길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기 때문에 순종하고 그 길을 걷는 사람을, 하나님은 결코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나중에 이 비밀을 깨달은 사도 베드로는, 날 때부터 다리를 못 쓰던 사람을 성전에서 일어서게 한 다음에 공회에게 잡혀갑니다. 공회는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 자들입니다. 그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자기를 죽이려 하는 상황에서 베드로가 뭐라고 고백합니까?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행 4:10-12)

 

놀랍게도 시편 118편을 인용하여 예수님이 하셨던 그 말씀을, 베드로가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 앞에서 담대히 인용하며 선포했습니다. 그 말씀이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나중에 자신이 기록한 베드로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아라, 내가 골라낸 귀한 모퉁이 돌 하나를 시온에 둔다. 그를 믿는 사람은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돌은 믿는 사람들인 여러분에게는 귀한 것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집 짓는 자들이 버렸으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돌’이요, 또한 ‘걸리는 돌과 넘어지게 하는 바위’입니다. 그들이 걸려서 넘어지는 것은 말씀을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그렇게 되도록 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벧전 2:6-8, 새)

 

그렇습니다. 이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잇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이십니다. 그분이 죽으셨다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고난은 우리를 위한 고난이었고, 그분의 부활은 우리를 위한 부활이었습니다. 그분이 다시 사셨으므로 우리도 살아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새로운 생명을 주셨으므로, 우리는 고난의 골짜기 같은 인생 가운데서도 승리의 기쁨을 누리며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럼 우리는 지금 이 복음을 어떻게 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아가 이 구원의 복음을 내가 나누는 사람이 내 삶에 지금 있습니까? 우리 목장에는 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섬기면서 주님의 구원의 복음을 나누는 VIP 지체들이 있습니까?

 

우리가 사랑으로 섬기고 또 입을 열어 예수님을 증거 할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물론 예수님을 전하다가 무시당할 수도 있고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 영혼의 구원이라는 것을 깨닫고, 우리가 한 영혼이라도 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애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대해, 너무 힘들지만, 창피를 당할 수도 있지만, 순종하고 헌신하며 나아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기대감을 가지십시오.

 

그런데 혹시 우리가 그렇게 하다가 손해를 보더라도, 혹시 정말 다치거나 죽임을 당하는 일까지 생기더라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붙들어주시고 높여주십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순간 이 예수님을 따라가며 그분의 제자답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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