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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 31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38 ✦
“전혀 다른 삶의 기준을 가진 사람들”
(마가복음 10장 32~45절)
[들어가는 말]
저희가 소속된 미국장로교 내 언약대회(Covenant Synod)의 한인장로교협의회(KPC: Korean Presbyterian Council)가 있습니다. 매년 목회자들이 수련회로 같이 모입니다. 몇 년 전 그 수련회에서 어떤 목사님을 만났는데 인사를 할 때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어디선가 뵌 것 같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글쎄요, 처음 뵌 것 같은데요?”라고 했더니, “아, 생각났다! 안토니오 이노키를 닮으셨네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 텐데, 제가 어렸을 적 TV에서 ‘세기의 대결’이라고 하는 무하마드 알리와 안토니오 이노키의 대결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 경기가 비상한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말이 안 되는 게임이었습니다. 무슨 권투 선수와 레슬링 선수가 경기를 하겠습니까? 그런데 1982년쯤 영화 <Rocky 3>에서도 주인공이 권투선수인데 레슬링 챔피언과 대결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그런 식으로 서로 다른 스포츠 종목의 선수 또는 팀들이 동시에 대결을 펼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도저히 말이 안 되는 경기입니다. 요즘 올림픽도 시작되는데, 축구팀과 야구팀이 서로 경기를 한다면 말이 됩니까? 무슨 룰을 가지고 하겠습니까?
최근에 클리블랜드(Cleveland Cavaliers) 팀이 농구 NBA 우승을 했고, 올해 풋볼 수퍼보울(Super Bowl)은 덴버(Denver Broncos) 팀이 우승을 했습니다. 그러면 풋볼 우승팀과 농구 우승팀에게 같이 경기를 하라고 하면 말이 되겠습니까? 농구를 풋볼처럼 하면 퇴장당할 것이고, 풋볼을 농구처럼 하면 퇴장을 당합니다. 규칙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아예 경기가 안 됩니다.
그런데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마가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의 모습이 마치 그런 것과 너무 비슷하다고 느낍니다. 지금 제자들은 마치 찬란한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으로 들어가는 선수들과 비슷합니다. 그 모습이 아주 멋지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제 하려고 하는 경기는 축구인데, 야구 유니폼을 입고 축구공을 향해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며 야구 글러브로 축구공을 잡겠다고 하는 것과 같다고 느껴집니다.
1. 죽음과 부활에 관한 세 번째 예언 (32-34절)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기 바로 얼마 전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 세 번을 예고하십니다. 조금 어려운 말로 ‘수난 예고’라고 하는데, 예수님이 그렇게 하실 때마다 제자들은 좀 이상하고 엉뚱한 행동을 합니다.
첫 번째로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8:29-38) 예수님이 질문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신 다음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고백을 들으신 후에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뭘 하는 사람인지에 대해, 처음으로 자신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의하며 꾸짖었고 말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꾸짖으시면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8:33)라고 야단을 치셨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8:34)
그 후 9장에서 높은 산에 올라가 찬란한 영광의 모습으로 변화되셨습니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오셨더니 귀신 들린 아이와 그의 아버지가 와서 고쳐달라고 했지만 제자들이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 다음 두 번째로 고난을 말씀하셨습니다.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신 후 제자들은 따로 주님께 물었습니다. “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그때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9:29).
이 말씀을 하시고서 다시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 말씀을 하십니다(9:30-31). 처음에는 베드로만 붙어서 야단을 맞았는데, 이번에는 제자들 전원이 바보 같은 짓을 합니다. 분명히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고 죽을 것을 말씀하셨는데도, 제자들은 길을 가면서 서로 누가 크냐고 하며 다투었습니다(9:33-34).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 심각한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들은 ‘예, 예’ 하면서 돌아서서는 서로 누가 크냐고 싸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불러서 모든 사람의 종이 될 것을 가르치십니다.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9:35)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세 번째로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33-34절)
이 말씀은 앞선 두 번의 예고보다 훨씬 더 구체적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할 것이고, 이방인(로마사람)들이 그 일을 집행할 것이며, 예수님이 능욕과 침 뱉음과 채찍질을 당할 것이며, 결국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반복해서 자신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사역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향해 자발적으로 나아가고 계신데, 그것은 인류의 죄를 대속함으로 사망에 매여 있는 자들, 영원히 죽음으로 갈 수밖에 없는 자들을 풀어주시고 마귀를 멸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영광의 부활에 이르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자신이 어떤 고난을 당할지 너무나 잘 알고 계셨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십자가의 길을 향하여 당당하게 나아가고 계십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 (32절)
이것을 보면,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던 상황이 이랬습니다. 예수님은 앞에서 인도하고 가시고, 제자들은 놀라고, 나머지 따르는 사람들은 두려워했습니다. 왜 놀라고 왜 두려워합니까? 예수님의 말씀이나 행동이 뭔가 범상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앞서 나아가시는 것을 보면서 무엇인가 심각하고 특별한 일이 그분의 마음속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행동이나 생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한 경우에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이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 이야기하시는데,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다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 믿으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잘됩니까? 오래 전에는 한국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예수 믿으면 정말로 복을 받습니다. 하늘의 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땅의 복을 받는가? 받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이 세상에서 사업이 잘되고, 직장에서 승진이 잘되고, 높은 위치에 올라가고, 일류 학교에 가고, 돈 많이 벌고 그렇게 되는가?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는데, 사실 예수님을 제대로 믿으면 그렇지 못할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고난을 당하고 완전히 망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으면 돈 못 번대”라는 것을 알고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시겠습니까? 내 입맛에 안 맞아도 계속 믿으시겠습니까? 이게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잘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니까 제자들처럼 놀라고 사람들처럼 두려우십니까? 그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저분을 따라가면 잘될 줄 알았는데 고난과 죽음이 있다니까 놀라고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그 다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부활이 있다는 것! 이 땅에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은 당연히 힘들고 당연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능히 감당하도록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 길이 고난과 죽음의 길이고 할지라도 주님을 따라가겠다고 갈 때에, 이 세상이 전혀 경험할 수도 없고 맛볼 수도 없는 부활의 기쁨과 새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부활을 아무나 경험합니까? 예수님 외에는 부활을 한 사람이 이때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예수님처럼 부활을 경험하게 되는데, 아무나 경험하는 게 아닙니다. 비록 이 땅에서 고난과 죽음이 있을지라도 주님을 따를 때, 이 세상 사람들이 전혀 알지 못하고 경험할 수도 없는 부활의 기쁨과 영광과 평안을 맛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부활을 맛보기 위해서는 먼저 고난과 죽음이 옵니다.
2. 제자들의 야망 (35-40절)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세 번째로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세 번이나 말씀을 하시는 것이고, 또 더 자세하게 얼마나 비참한 고난을 당할 것인지 설명도 하시지만, 이때 이렇게 설명을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예수님께 와서 완전히 엉뚱한 한 가지 부탁을 합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5절)
이 태도가 너무 당당합니다. 예수님은 고난, 침 뱉음, 채찍질, 죽음, 사흘 만에 살아날 것 등 심각한 말씀을 하셨는데, 그들은 와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세요.”라고 합니다. 어떻게 제자이면서 자기 선생님의 말씀을 이렇게 듣지를 않습니까? 예수님이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시니까 이들이 그때 뭐라고 합니까?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6-37절)
예수님이 넘버원이시니까 우리 한 명은 No. 2, 다른 한 명은 No. 3 되게 해달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20장에는 자기들의 엄마까지 데려와서 청탁을 합니다. 이것을 소위 치맛바람의 원조라고 합니다. 거기서는 그들의 어머니가 이야기했다고 되어 있는데, 여기 마가복음에는 두 사람이 말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세 명이 다 말을 한 겁니다. 마가는 이 두 사람에게 초점을 두고 기록했고, 마태는 그들의 어머니에게 초점을 두고 기록을 했습니다. 아마도 마태는 열두 제자 중 하나였기 때문에 더 분했던 것 같습니다. ‘저것들이 엄마까지 데려다 난리를 치네?’ 분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셔서 왕이 되시는 줄 알고, 가장 좋은 자리를 미리 청탁을 하는 겁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곧 고난과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도, 그들은 믿지를 않습니다. 대충 듣습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합니다. 그들은 영광 이전에 고난이 와야 한다는 말씀을 아직 이해하고 있지 못합니다. 이러한 엉뚱하고 이기적인 요청에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야, 이것들아. 내 말을 그렇게 못 알아듣느냐?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고 하십니까? 아닙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38-39절)
예수님이 “너희가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라고 물으시는데, 이들은 그것이 뭔가 굉장히 좋은 것인 줄 알고 “할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굉장히 엉뚱한 사람들입니다. 완전히 잘못 이해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된 말이라도 넘기시면서 핵심을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마시는 잔”과 “세례”가 영광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잘못 이해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잔”은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도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세례”는 세상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시는 것을 뜻합니다.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40절)
예수님은 영광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기대를 깨뜨리고 계십니다. 동시에, 그들도 주님을 따라 고난의 길을 가게 될 것을 미리 암시해주십니다. 분명히 39절에서 그들이 할 수 있다고 하니까 “너희가 나의 잔을 마시고 내가 받은 세례를 받을 것이다.”라고 미리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때까지도 주님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야, 우리 받는대!”라고 하며 좋아하는 겁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기적인 유익을 구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일단 받아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자신이 걸어가고 있는 길, 즉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길을 그들도 나중에 걸을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계십니다.
실제로 교회 역사를 볼 때 야고보와 요한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교회 전체의 첫 번째 순교자는 소위 일곱 집사 중의 하나인 스데반이었지만, 열두 사도 중 가장 먼저 순교한 사람은 바로 이 야고보입니다(행 12장). 그는 칼로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는데,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히 전하다가 잡혀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야고보는 그리스도의 길, 즉 고난과 죽음의 길을 따라갔고, 지금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을 것입니다.
요한은 어떻습니까? 그는 순교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하셨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교회의 기록을 보면 요한은 마리아를 돌봤습니다. 그 후부터 사역을 하다가 그는 유배를 가서 요한복음, 요한1서, 2서, 3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요한도 역시 엄청난 고난과 박해를 당했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고 끝까지 주님의 신실한 제자로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자신들에게 장차 어떤 일이 닥칠지 알지 못하고 잘못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과 교회 역사에 의하면, 그들이 예수님께 요청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에 대해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찬송가 부르실 때 신중하게 부르셔야 합니다. “어디든지 가오리다.” “아골 골짜기도 가리이다.” 진짜입니까? ‘가서 죽어’라고 하시면 어떡하려고 그것을 부릅니까? 기도도 잘 모르고 기도했는데 이렇게 응답이 될 수가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영광의 자리입니다.
3. 진정한 제자의 길 (41-45절)
다른 열 명의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자기들의 친구인 야고보와 요한이 이런 식으로 부탁을 하니까 너무 행복해합니까? 그 반대입니다. 그들은 모두 분개합니다.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41절)
여러분, 이것을 잘 보십시오. ‘야고보와 요한에게’가 아니라 그들에 “대하여” 화를 냈다고 되어 있습니다. 앞에서 못하고 뒤에서 한 겁니다. 우리도 보통 앞에서 하지 못하고 뒤에서 분개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들도 똑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왜 화를 냅니까? 자기들도 똑같은 것, 즉 영광과 좋은 자리를 원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운동경기로 예를 들자면,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축구를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농구를 하자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축구는 발로 하는 경기입니다. 그런데 농구처럼 자꾸 손으로 잡아서 골을 넣으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일단 경고를 받고 계속 그렇게 하면 레드카드 받고 퇴장당합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당연히 퇴장감이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이 아직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을 보시면서 그들을 그냥 퇴장시키시기보다는 새로운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그게 아니다. 여기의 룰은 이거다. 너희들은 그 룰로 하면 안 된다. 이 룰로 해야 한다.”라고 차근차근 가르쳐주십니다. 저 같으면 그냥 “퇴장!”이라고 할 텐데, 예수님은 다시 불러다 그게 아니라고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은 참된 제자도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한 가지 예를 드십니다.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2절)
이것이 세상 리더십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민족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리더들, 왕들, 높은 사람들이 백성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세도를 부린다는 것입니다. 지배하고 내리 누르는 리더십이 전형적인 세상 리더십입니다. 위에서 군림하려는 리더십, 그렇게 함으로 자신을 높이려는 리더십입니다.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고 하는 리더십입니다. 올라가기 위해서 남들을 밟고 올라가는, 제거하고 올라가는 그런 리더십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 권력자들의 모델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특히 구약시대 같은 때에 고대 근동의 왕들은 자기들을 신격화하며 난폭하게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리스의 통치자들도 그러한 원칙을 도입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시대에도 로마 황제들과 지방 관리들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잔인하고 강압적이었습니다. 자기 말을 안 들으면 가차 없이 제거했습니다.
그러한 배경 속에서, 예수님은 그런 세상의 리더십이 아니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리더십, 세상의 리더십과는 다른 참된 리더십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3-44절)
여러분, 바로 이겁니다. 야고보와 요한만이 아니라 열두 명 전부가 바로 세상의 그 리더십을 원했습니다. ‘나도 좀 높이 올라가고 싶다. 내가 밑에서 그 동안 압제를 받았는데,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그 권세를 힘입어서 좀 떵떵거리며 이 땅에서 군림해보고 싶다. 많은 사람들은 거느리고 다스려보고 싶다. 내가 위에서 좀 해보고 싶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세상의 리더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너희들이 다 안다. 그러나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는 그러면 안 된다. 진짜 리더십은 그런 게 아니다.”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리더십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 밑에 있는가를 봅니다. 나를 섬기는 사람이 몇 명인가? 이것은 삼각형 리더십입니다. 맨 꼭대기에 리더가 있고 밑에 자기를 섬겨주는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계층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들 최고 리더를 밑에서 섬겨줍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리더십은 무엇입니까? 역삼각형입니다. 최고 리더가 맨 밑에 있습니다. 그가 섬기는 사람들이 그 위에 많이 있습니다. 그게 최고의 리더가 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리더십이고 실제로 보여주신 리더십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이런 질문을 하지 않으실 겁니다. “이 세상에서 너를 섬기던 사람이 몇 명이었느냐?” 절대 안 물으십니다. 그럼 뭘 물으시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살 때 네가 섬긴 사람이 몇 명이었느냐?” 이걸 물으실 겁니다.
여러분, 내가 지금 섬기는 사람이 몇 명입니까? 내 밑에 몇 명이 있다고 자랑할 게 아니라, 내가 섬기는 사람이 몇 명입니까? 그것이 최고의 리더십입니다.
결정적으로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왜 왔는지 그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45절)
이 10장 45절이야말로 마가복음 전체의 요약입니다. 1장에서는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이야기했습니다. 2-13장에서는 섬기시는 예수님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14-16장에서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는 예수님을 말씀합니다.
“대속물”이라는 말은 전쟁 포로나 노예나 범죄자가 자유의 몸으로 풀려날 수 있는 권리를 돈 주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즘도 유괴나 납치 사건에서 이런 일들이 생기는 것을 봅니다.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나게 하는 것을 “대속물(ransom)”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자유의 몸으로 풀려나도록 하는 행위 전체를 가리켜 ‘구속(redemption)’이라고 합니다. 직접 가서 포로가 풀려나게 해주는 사람은 ‘구속자(redeemer)’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섬김의 연속이었습니다. 자신의 죽음도 모두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죄의 포로 상태에서 풀려나도록 하기 위한 몸값(대속물, ransom)으로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렇게 죽기까지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것이 최고의 리더십이다. 그것이 정말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리더십이다. 너희들도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하는 그런 리더십이 아니고, 사람들을 섬기는 진짜 리더십을 가져라!”
45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계시지만, 제자들도 그렇게 하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제자들이 예수님처럼 구원자가 되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한 구원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라는 말씀이 아니라, 섬김을 자꾸 받으려 하는 리더십을 생각하지 말고 섬기는 리더십을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 권력자들이 누리고 군림하는 것,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해달라고 하지 말고, 너희가 정말 위대한 사람이 되기 원한다면 가장 낮은 곳에서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라. 그게 나의 제자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권력에 눈이 어두워서 예수님을 이용하여 왕이 되시면 자기도 높은 자리에 올라가 떵떵 거리며 섬김을 받기 원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섬기라고 하십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이 “너희”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기준과 전혀 다른 기준을 가진 사람들이다!”
4.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여러분, 어떻습니까? 지금 나는 무엇을 추구하며 살고 있습니까? ‘나도 한 번 올라가 보자. 나도 한 번 군림해 보자. 예수 믿는 게 여기에 도움이 되나 보나. 한 번 믿어보자.’ 이렇게 되고 있습니까? “예수님, 나를 우편에, 아니면 좌편에 앉혀 주십시오.”라고 합니까?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지금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고 있느냐?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성공하기를 원치 않으십니까? 우리가 가난하고 찌들어 살고 천하게 사는 것을 원하십니까? 돈을 많이 벌기를 원치 않으십니까? 그런 말이 아닙니다. 성공하고 돈 많이 벌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하는 것과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공하는 것도 좋은데 거기에서 끝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끝나면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다는 겁니다. 거기서 끝나지 말고 더 나아가라고 하십니다.
단지 내 자녀가 좋은 학교 나오고 좋은 직장 잡고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돈 많이 벌고 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에서의 성공은 진정한 삶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 사용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목적이 되면 인생이 비참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이웃을 섬기는 데에 목적을 두게 되면 그 모든 것들은 너무나 놀라운 도구가 됩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보여주셨고, 사도 바울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데에 도구가 됩니다. 섬김의 삶, 다른 사람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삶을 사는 길,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길입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 인정을 많이 받았는데 하나님께 인정을 못 받으면 이게 무슨 허무한 일입니까? 이 땅에서는 길어야 100년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끝나면 100년, 200년, 아니 몇 백만 년도 아니고 셀 수도 없는 영원한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어디에 초점을 두어야겠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얼마나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루었는가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의 성공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을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제자의 길이며 진정으로 위대한 삶입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께서 직접 사셨던 삶입니다. 죽기까지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도, 또 우리들도 똑같은 길을 가기를 원하시며 그 길로 초청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드디어 이해한 한 제자가 이런 말을 썼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일 3:16)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일 4:11)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는 이런 내용은 누가 한 말입니까? 바로 오늘 본문에서 자기 형 야고보와 같이 헛된 영광을 구하던 요한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고보와 요한은 이때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헛된 야망을 구했지만, 결국 나중에 진정한 제자의 길을 깨닫고 주님의 길을 따라 감으로써 진정으로 위대한 것이 무엇인가를 몸소 경험했고 지금은 영광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여러분과 저를 향한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이 땅에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것처럼,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해 대속물로 희생하신 것처럼, 우리도 섬김과 희생의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나는 섬기러 왔다’라고 하시거나 ‘나는 인류를 구원하러 왔다’라고 하시면 되는데, 왜 굳이 “나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즉 구원하려고 왔다”라고 섬김과 구원 두 가지를 다 말씀하셨을까요? 섬기고 또 구원하러 왔다고 왜 동시에 말씀하십니까?
섬김 안에 구원이 있다는 말입니다. 섬기면 구원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 구원받은 그 감격과 기쁨을 정말 이해하기 위해서는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섬기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섬기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신앙생활을 몇 십 년 해도 이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처럼 섬김의 자리에 가서 다른 사람들을 섬길 때 어떻게 됩니까? 섬김이 낭만적인 게 아닙니다. 굉장히 어렵습니다. 섬기면 고난이 옵니다. 비난을 받습니다. 섬기면 눈물도 흘리고, 배신도 당합니다. 나는 이렇게 잘해줬는데 돌아오는 것은 엉뚱하고 이상한 반응입니다. 마음이 아픕니다. 마음이 무너집니다. 상처를 받습니다. 그게 섬김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런 섬김을 하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러 오셨습니다.
결국 구원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가 그러한 배신과 고난과 고통과 비난과 아픔과 상처를 경험하는 가운데 ‘아, 이것이 정말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구나. 이것이 예수님이 가셨던 길이구나. 정말 예수 믿는 길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 저를 구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며 구원의 감격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다가 가장 힘든 것 중 하나가 뭔가 하면, 섬겼는데 보상이 별로 없거나 굉장히 느리게 온다는 점입니다. 노력한 만큼의 대가가 쉽게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섬기다가 잘 안 되니까 중간에 좌절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섬기는 자의 영광을 예수님이 분명히 약속해주고 계십니다.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40)
실제로 야고보와 요한은 그 영광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이 길을 똑같이 걷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분명히 같은 영광을 주십니다. 여러분,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보상이라는 것은 스스로의 섬김의 결과에 따라 하나님께서 알아서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할 일은 묵묵히 그 어려움과 고난을 견디며 그래도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먼저 섬겨주셨습니다. 고난을 당하면서까지 섬기셨고, 죽으면서까지 섬기셨고, 그 후 부활과 승천의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영광을 바라본다면, 원한다면, 먼저 할 일은 섬김 그리고 희생입니다. 고난이 와도 그냥 당하는 겁니다. 힘들어도 그냥 섬기는 겁니다. 왜냐하면 고난 후에 영광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섬기는 자에게, 희생하는 자에게, 고난 후에 반드시 영광이 주어집니다.
이 땅에 섬김을 받으러가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목숨까지 내어주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이 예수님처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할수록 더욱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또 직분을 맡을수록 더 낮아지고 더 많은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바로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한 놀라운 신앙생활 가운데 고난과 어려움을 이겨내고 주님 주시는 영광에 들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