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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8 7 주일예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39

보기를 원하나이다

(마가복음 10 46-52)


 

[들어가는 ]


덴마크 철학자이자 크리스천이었던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다. 살면서 우리를 지탱해주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중에서도 빼놓을 없는 것이 바로 미래에 대한 희망입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소망을 가지고 있으면 기회가 있습니다.


유명한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소망이다. 그런데 말을 뒤집어 생각해보면, 땅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소망을 잃어버리는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사람에게 소망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냥 무너지고 폐인이 수도 있지만, 놀랍게도 소망이 없으면 숙명론 또는 운명론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절망의 순간에만 운명론이라는 증상이 찾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살다보니 삶이 고단하고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을 , 웃는 날보다 인상 쓰고 가슴 졸이는 날이 많을 , 지금은 문제가 없지만 너무 편해서 불안할 , 혹시라도 내게 무슨 일이 닥치지는 않을까 하고 불안해질 , 운명이나 숙명 탓을 하게 됩니다. 소위 이것을 전문용어(?) ‘팔자타령’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운명론이나 이런 팔자타령이 은근히 스며들 있습니다. 예를 들어, 좋은 일이 일어나든지 나쁜 일이 일어나든지, 보통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물론 믿는 이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이 미리 정해놓으셨다고 잘못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우리 장로교의 효시라고 있는 캘빈(John Calvin) 이야기한 ‘예정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 운명을 하나님이 미리 예정해놓으셨으니까 이렇게 되는 것이 어쩔 없다고 체념한다면, 그것은 바른 신앙도 아니고, 바른 예정론도 아니고, 종교적 운명론일 뿐입니다. 예정론의 핵심은 그게 아니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천국) 들어가게 예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소망을 버리는 것은 삶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살아 있다, 힘을 내어 살아간다는 것은 뭔가 소망을 갖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지금의 어려운 현실은 어쩔 없는 운명이겠지 하고 사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디매오라는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1.   바디매오는 누구인가?


오늘 본문의 배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에 여리고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여리고는 작년 이스라엘 방문 가보았습니다. 아주 황량한 광야길에 아름다운 도시가 하고 나타납니다. 아름다운 곳입니다. 예루살렘 동쪽으로 18마일에 위치한 도시로서, 예루살렘으로 사람들이 순례의 길을 가는 길목에 위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가실 어떤 장면이 벌어집니까?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가에 앉았다가” (46)


이것은 예수님이 여리고에서 나가실 벌어진 사건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디매오’에서 ‘바’는 ‘아들’이고 디매오는 사람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바디매오’는 여기 나와 있는 그대로 ‘디매오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원래 베드로가 시몬인데, 예수님은 베드로를 부르실 “바요나 시몬”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시몬이 이름이고 ‘바요나’라는 것은 ‘요나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이름이 아닙니다. 원래 베드로를 Simon Peter라고 부르는데, 베드로의 원래 이름을 영어로 표현하면 ‘바요나 시몬’이 ‘요한의 아들 시몬’이고 요한의 아들은 John's son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이름은 Simon Johnson입니다.


바디매오 사람의 진짜 이름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냥 별명입니다. 그는 디매오라는 사람의 아들인데, 그의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 아무도 관심이 없습니다. 아무도 그를 쳐다보지 않는 그런 존재입니다. 여기 보면, 바디매오는 “맹인”일 아니라 “거지”였습니다. “맹인” 앞을 본다는 것은 바디매오의 신체적인 상황을 나타내고, “거지”라는 단어는 그의 현재 삶의 비참한 상황을 보여줍니다. 부모에게서도 버림받고 그저 남들에게 동냥해서 얻어먹고 사는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맹인들이 생계유지를 위해 있는 것이라곤 구걸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복잡한 길에 나와서 구걸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을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순례의 길을 가던 길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여리고를 지나가는, 최고의 대목이었습니다.


사람에게는 희망이라는 것을 가질 없는 상황이고, 그저 절망하거나 아니면 운명에 의지하면서 모든 것을 체념한 ‘이런 인생인가 보다’ 하고 살아가야 하는 환경입니다. ‘이것이 나의 운명이구나’ 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사실 맹인이 것이 굉장히 힘든 일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그가 ‘다시 보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때부터 시각장애인이었던 아니라, 언젠가 사고나 병으로 인해서 보게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상실감이 큽니다.


그렇게 맹인이 것도 슬프고 괴로운데, 사람들은 자기의 가슴을 찌르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아니, 거지 . 아침부터 거지를 그것도 맹인을 보다니 재수도 없네. 이런 말을 듣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멸시를 당하고 조롱을 받습니다. 이런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그렇게 방법이 없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에게 벌을 받고 저주를 받아서 눈이 멀었다고 이야기를 함부로 합니다. 그는 이러한 비참하고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그냥 그렇게 하루하루 살다가, 지금은 여리고의 바쁜 길가에서 유월절 대목을 노리고 구걸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아무 소망도 없이, 그저 어쩔 없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가난하고 소외되었다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부자와 유명한 사람들이라고 그런 것도 아닙니다. 사실 선진국들이 가난한 나라보다 수면제 복용이 훨씬 많습니다. 부자 나라가 자살하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그렇습니까? 삶의 목적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살아가야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소망이 없기 때문에 그냥 죽는 겁니다.


오늘 ‘목회편지’에도 썼지만, 마이클 펠프스(Michael Phelps)처럼 역사상 올림픽에서 가장 많은 금메달과 메달을 사람이 이루고 나서 느낀 것은 만족감과 기쁨이 아니라 허무, 괴로움, 외로움, 자살 충동 같은 것이었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아무리 땅에서 많은 것을 이루었다고 그것들이 우리를 채워주는 아닙니다. 이렇게 많은 것들을 이루었어도 삶의 이유를 모르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모르고 사는 사람은 숨만 쉬고 있는 (breathing)이지 진짜로 사는 (living)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을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 1:21)


내가 감옥에 갇혀서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기 때문에 나는 언제 죽어도 상관없고 오히려 유익하다.’라고 담대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은 뭐라고 고백합니까? 사도 바울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 있으면서도내게 사는 것이 돈이니, 권력이니, 명예니, 학위니, 자녀니, 죽으면 되느니라.’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이 자기 삶에서 사라지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삶의 의미를 상실하게 됩니다.


요즘 같이 변화가 심하고 디지털화 되어 가는 세상일수록, 하이텍(high tech) 사회일수록, 하이 터치(high touch) 고도의 감성 터치가 필요합니다. 얼마 전에도 ‘세기의 대결’이라고 해서 컴퓨터 알파고(Alpha Go) 이세돌 9단이 바둑으로 붙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점점 인공지능에서 직장을 빼앗길 같다고 전망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공지능에게 절대 빼앗길 직장 하나가 바로 목사입니다.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목사보다 은혜로운 설교를 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온갖 데이터를 수집해서 사람들이 언제 웃고 언제 울고 언제 감동을 받는지를 파악하고 은혜로운(?) 설교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컴퓨터나 과학 기술이 발전할수록, 사람들의 마음은 공허해집니다. 그리고 점점 바보가 됩니다. 스마트폰을 요즘 많이 쓰는데, 거기에 전화번호를 넣어둡니다. 그래서 전화기를 두고 오면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못해서 전화를 겁니다. 점점 바보가 되어 가는 겁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전자기기를 많이 쓰는 것이 천재라서 잘하는 아닙니다. 오히려 감성을 죽입니다.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을 감동시켜줄 것을 찾습니다. 젊은이들일수록 그렇습니다. 뭐가 나왔다 하면 열광하고, 아이돌 그룹에게 열광하고 그럽니다. 자기들을 만족시켜줄 뭔가를 찾는 겁니다.


가끔 운동경기를 보다가 감동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선수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서로 하나가 되어서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얼마 클리블랜드(Cleveland Cavaliers) 농구 팀이 하나가 되어 우승할 때의 모습을 보니까 감동을 받았습니다. 시대의 사람들은 감동을 원합니다. 패배한 사람들도 뒷이야기를 들어보면 감동적인 스토리들이 많습니다.


교회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있어야 하겠는데, 교회가 운동보다도 감동을 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감동을 받기 위해서 교회에 오는 사람은 없습니다. 감동을 받으려면 영화를 보든지 스포츠, 음악, 예술 등으로 가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언제 감동을 받는가 하면, 맞는 말만 감동을 받지 않습니다. 잘못한 것을 비판하고 지적하면 맞는다고 끄덕끄덕은 하지만 전혀 감동을 받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기분이 나빠집니다. 감동은 자기가 잘못한 것을 아는데 ‘너 잘못했다. 그러느냐?’고 때가 아니라, ‘괜찮다. 실수를 한다. 우리도 똑같다. 잘하면 된다.’라고 하며 사랑하고 용납하고 격려하고 용서할 감동을 받습니다. 마음이 열립니다. 틀렸다고 지적할 때가 아닙니다.


친한 사람만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과만 친하게 지낼 때가 아니라, 도저히 사랑할 없는 자를 사랑하고, 어울릴 없는 같은 사람과 어울리고, 죄인을 용서하며 끌어안을 감동을 받습니다. 마음이 열립니다. 우리 예수님이 바로 그런 삶을 사셨습니다. 감동을 주기 위해 그렇게 사신 아니라, 사랑의 삶을 사시니까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변화되었습니다.

 


2.   예수님 밖에 없다고 외치는 믿음 (47-49)


그렇게 절망 속에서 살아가던 바디매오가 어느 순간 이전에는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소망을 품게 됩니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7)


거지 바디매오가 평소에 하던 말이 어떤 것이겠습니까? “나으리, 줍쇼.”입니다. 그런데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것을 듣더니 갑자기 소리를 지르면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것은, 그가 분명히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신다고 들었는데, ‘나사렛 예수여’라고 아니라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이전에 분명히 예수님에 대해 들었던 것입니다. 이전에도 보던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셨다는 것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드디어 여기 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나사렛 예수여’가 아니라 “다윗의 자손 예수여”, 자기 민족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던 ‘그 구원자, 메시야 예수여’라고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8)


지금 바디매오는 상식을 초월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외쳤을 많은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그를 꾸짖었습니다. “잠잠하라! 이것은 굉장히 점잖은 표현입니다. 야단치며 그에게 소리를 지른 겁니다. 그런데도 그는 더욱 크게 소리 지르며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합니다.


보통 같으면 바디매오는 조용히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는 지금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자기를 고쳐 달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렇게 지금까지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 체념하면서 ‘이게 운명이겠거니’ 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라는 분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더니 갑자기 엄청난 소망을 가지며 외칩니다.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일입니까? “야, 더러운 거지야, 시끄럽다! 조용히 !”라는 말을 들었고 누군가가 때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멋쩍어서라도 뒤로 물러가는 것이 정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오히려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합니다.


여기 47절에 나오는 번째 외침과 48절에 나오는 번째 외침은 다른 외침입니다. 번째로 외친 것은 그냥 주의를 끌기 위해 소리를 지른 보통 외침입니다. 그런데 48절에서 ‘더욱 크게 소리 질렀다’는 것은, 마치 미친 사람이 발광을 하는 것처럼, 비명을 지르듯이 절규하며 외치는 것입니다. 이게 아니면 된다고 하는, 아무도 말릴 없는 강력한 외침입니다. 조용히 하라고 했던 사람들이 놀라며 움찔하며 뒤로 물러갈 정도로 강력한 외침을 겁니다. 그것을 들으신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49)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번째 외침을 들으시고 머물러 서십니다. 그리고 그를 부르라고 하십니다. 조금 전에 사람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야, 시끄럽다. 거지야, 조용해라. 이러던 사람들이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 눈에 들기 위해 굉장히 노력하는 느껴집니다. 시끄럽다고 하면 예수님이 좋아하실 알았는데, 그를 부르라고 하시니까 그에게 안심하라고 합니다. 사람이 이렇게 간사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하여 점들이 가지 있습니다. 바디매오가 번째로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친 것을 예수님이 들으셨을까요 아니면 들으셨을까요? 아니면 들으셨지만 시간도 없고 길이 바쁘니까 그냥 가려고 하셨던 겁니까?


그의 번째 외치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웠고 거의 발광의 수준이니까, 저러다 혹시 어떻게 될까봐 어쩔 없이 멈추어 서서 그를 부르라고 하신 겁니까? 나중에 예수님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라고 하시는데, 조용히 하라고 해도 포기하지 않고 이렇게 발광한 것이 믿음입니까? 그럼 우리는 빨리 자리에서 내려와 발광을 해야 믿음이 아닙니까. 하지만 우리는 지금 너무 조용합니다.


사실 자리에 예수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명이었겠습니까? 바디매오 명이었겠습니까? 지금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따라갑니까? 예루살렘에 가서 왕이 되시는 것을 보기 위해 따라갑니다. 그러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뭔가를 얻기 위해서 따라가고 있습니다. 수없이 많은 병자들도 거기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독 맹인 바디매오의 이야기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물론 누가복음에 보면 바로 같은 때에 삭개오가 구원받은 사건도 일어납니다.


그런데 유독 바디매오만 나온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거기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했겠지만, 제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꾸짖고 예수님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시니까 그냥 그러다 말았다는 것입니다. ‘도와주세요’라고 했다고 관심을 보이니까 ‘안 도와주려면 말고’라고 하며 끝냈다는 겁니다.


그들에게 끈질김이 없었다기보다는, ‘저 예수야말로 유일하게 나를 고칠 있는 분이시다. 주님이시다.’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이 아니더라도 다른 데서 도움을 얻을 있겠지. 다음에 기회가 있겠지. 고침을 받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 이런 태도를 가졌던 것입니다.


지금 아니면 된다, 예수 아니면 된다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정말로 신뢰하고 그분만이 나를 고치실 있다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자신을 고치실 있다면, 이분이 유일하시다면, 지금 밖에 기회가 없다고 했다면, 금방 포기를 하겠습니까? 이분 외에는 길이 없다고 느꼈으면 한두 외치다가 반응이 없다고 금방 그만 수가 없습니다. 끝까지 따라 붙어야 합니다.


그런데 유독 바디매오에게 바로 그런 절박한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5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12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자도 이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졌습니다. 그런데 옷가에만 살짝 손을 여자만 치유를 받았습니다. ?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분 아니면 된다’고 하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바디매오도 사람들이 꾸짖으며 조용히 하라고 야단을 , 알았다고 미안하다고 하며 뒤로 물러난 것이 아니라,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것을 오해하시면 됩니다. 그가 여기서 혈기를 부리고 오기를 부리고 반항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자기를 도와줄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분 아니면 된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보기를 원하셨던 진짜 믿음입니다. 믿음은 완벽한 믿음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이 하실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저 밑져야 본전 정도로 생각하고 도와줄 있으면 도와달라고 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신뢰하는 믿음, 예수님이 아니면 된다는 간절한 믿음입니다. 그것을 보기 원하셨고 그것을 바디매오에게서 보셨습니다.


그러니까 바디매오의 외침에 예수님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신 것은, 차가운 거절의 표시가 아니라 오히려 ‘네가 믿음을 가지고 나에게 나오고 있느냐? 정말 내가 너를 도와줄 것을 믿느냐? 그렇다면 그것을 보여 다오.’라고 믿음의 결단을 촉구하시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도전 앞에 바디매오는 크게 소리침으로써 믿음의 결단을 나타낸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너희들은 개다.”라는 모욕적인 말씀을 들었는데, “맞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아래에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라고 했을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개라고 믿음이 아니라, 주님만이 하실 있다는 믿음을 고백한 겁니다.


예수님을 한번 믿어보려고 하면 그렇게 방해가 많이 생깁니까? 어떤 때에는 믿어보려고 하는 그때부터 일이 풀립니다. 하나님이 사정을 모르시는 같습니다. 여러분, 그럴 때도 주님 앞에 나올 있으시겠습니까? 주님을 믿어보려고 하는 바로 그때부터 일이 풀린다면 대부분 관둘 겁니다. 그러나 그럴 때도 ‘아니다, 이게 진짜다’ 하며 주님께 나아오는 것이 믿음입니다.


주님을 믿어보려고 방해가 생깁니까? 물론 사탄의 방해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때에는 기도를 해도 아무 응답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40 작정하고 하루 끼씩 금식하며 기도하고, 매일 새벽에 나와서 기도하고, 철야로 기도를 해도 아무 응답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기도해보았자 소용없다.’라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로 물러가지 말고 믿음의 결단을 해라. 네가 정말 나만이 해결해줄 있다는 것을 믿느냐? 믿음을 다시 바로 세워라.’라고 하시는 믿음에의 초청입니다. 어려움이 생깁니까? 아무 응답이 없습니까? ‘네가 정말 나를 신뢰하느냐, 정말 내가 너를 도와줄 있다고 믿느냐?’라고 물으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믿음의 결단을 보이며 제대로 믿음으로 나아가도록 해주시는 주님의 기회입니다. 기회를 놓치지 않기 바랍니다.

 


3.   필요한 것을 구할 아는 믿음 (50-52)


 

바디매오는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절망과 체념, 그리고 운명론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아무 소망도 미래도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앉아 절망만을 노래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바디매오가 지금까지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예수님을 만나니까 이전에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은 숙명론이나 운명론에 사로잡혀서 ‘내 팔자가 이러니까’라고 그대로 안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은 팔자가 바뀝니다. 진짜입니다. 이건 점쟁이들이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점쟁이에게 갈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 잘 믿으면 됩니다. 그런데 그게 충분한 것 같지 않으니까 자꾸 여기저기 찾아갑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체념하고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나은 상황이라도 더욱 크게 소리 지르며 나아오라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이고 그것이 참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 말씀처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나옵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거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해보다 안 되면 ‘아님 말지’라고 금방 그만두는 그런 정도가 믿음이 아닙니다.

 

바디매오를 보십시오. 조용히 하라고 꾸짖으니까 더 크게 소리를 지릅니다. 이건 발광하며 비명을 지르는 겁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가 더욱 크게 소리 지르며 주님만 의지하고 나오기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바디매오가 더 크게 소리 지르며 나아오니까 그를 부르셨고, 예수님이 부르시자 그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0절)

 

보십시오. 지금 겉옷을 내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뛰어서 일어나 갑니다. ‘내어 버리다’, ‘뛰어 일어나다’, 이런 단어들을 보면 바디매오가 얼마나 절박한가, 얼마나 간절한가를 보여줍니다. ‘저 예수께 가면 나을 수 있다. 예수라면 나를 완전케 할 수 있다.’라는 믿음이 바디매오로 하여금 예수께 뛰어 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한 믿음이 운명론의 굴레와 족쇄와 팔자의 쇠사슬을 끊어버렸습니다.

 

겉옷을 버렸다는 것은 당시 자신의 전 재산을 보렸다는 말입니다. 겉옷을 버렸으면 누가 가져가도 알 수가 없고, 다시 찾을 가능성이 없습니다. 겉옷은 당시 유대인 남자들에게 전 재산이고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버리고 예수님 앞에 뛰어온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분에게 나아가면 겉옷(전 재산)이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한 바디매오에게 예수님이 질문하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1절)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도대체 이게 무슨 질문입니까? 당연히 안 보이는 맹인이 보기를 원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럼 그냥 고쳐주시면 되지 왜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어보십니까? 그런데 사실은 이 질문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보기를 원하지 않고 다른 것을 원할 수도 있었습니다.

 

‘주여, 죽을 때까지 편안하게 살면 좋겠습니다. 부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 저 지금 겉옷 버렸거든요? 그러니 더 좋은 겉옷을 주세요.’ 또는 ‘지금까지 저를 무시한 사람들이 누구누구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혼내주십시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야고보와 요한이 구했던 것처럼 ‘주의 영광 중에 우편에 앉혀주십시오. 그런데 우편이 좀 너무하다 싶으면 좌편에, 아니면 어디든지 앉혀 주십시오. 그래서 나를 조롱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통쾌한 복수를 하게 해주십시오. 아주 그냥 본때를 보여주게 해주십시오.’라고 할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나아온 야고보와 요한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36).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해 달라는 것을 받지 못했는데, 오늘 본문의 바디매오는 볼 수 있기를 요청했고 예수님은 그의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무엇이 이 차이를 만들었습니까?

 

인생을 살다간 수많은 위인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꿈을 위해서 운명처럼 자기 앞길을 막아서는 장애물들을 극복한 사람들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닥친 어려움을 운명이라고 이름 붙이면서 그 앞에서 넘어지고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간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신앙이 없었던 사람들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전능하신 하나님,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우리가 좌절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운명이라는 단어, 숙명이라는 단어를 우리 사전에서 빼 버려야 합니다. 모두가 절망을 이야기할 때도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소망이 어떤 소망인가 하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바란다고 해서 모두가 올바른 소망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는 소망을 가장한 나의 야망, 욕망, 욕심, 탐욕 등이 뒤범벅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마가복음에 예수님이 자신의 십자가 고난을 예고하시는 장면이 세 번 나왔습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가서 많은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이다. 그리고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이다.” 그렇게 엄청난 예고를 하신 때를 보면 제자들은 항상 이상한 행동을 했습니다. ‘누가 크냐?’하고 싸우거나, ‘한 명은 오른편에 또 한 명은 왼편에 앉게 해주세요.’라고 엄마까지 데려와서 청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정말로 자신들이 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그냥 구했다는 말입니다. 눈을 뜨고 있는 정상인이었지만 영적으로는 맹인이었습니다. 죽으러 가는 예수님에게 왕궁의 대신 자리나 요구하는 그들의 바람이 어떻게 올바른 소망이나 비전이 되겠습니까? 진정한 소망은, 그렇게 남이 죽든 말든 나만 잘살면 된다는 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소망이 아니고 욕망, 욕심, 야망, 야심입니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이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눈을 뜨고 있었지만 사실은 영적 맹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눈을 뜨게 해 달라고 간구했어야 했는데, 이기적인 야망을 구했습니다. 반면에 바디매오는 자신의 욕심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것도 아니라 가장 필요한 것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았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능력을 믿지 않았다면 여기 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시력의 회복을 구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야단맞았을 때 더 크게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믿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그는 자신의 기도에 응답을 받았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52절)

 

바로 이것이 그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여기서 말씀하신 “네 믿음”이 바로 그런 믿음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하는 기도의 내용이 뭔가를 잘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기도를 합니까? 야고보와 요한 같은 잘못된 기도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바디매오처럼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을 구하며,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기도하고 있습니까?

 

생각해보면 내가 기도하는 것은 전부 다 ‘나’입니다. 내 소원, 내 계획, 내 사업, 내 직장, 내 가족, 내 자녀, 내 돈 등등 전부 ‘나’입니다. I, my, mine, me입니다. 영어로 죄가 sin입니다. 죄의 중심에 뭐가 있습니까? ‘I’입니다. 그렇습니다. I, 즉 ‘나’가 문제입니다. 나 중심으로 가는 것이 죄입니다. 그러므로 이기적인 기도가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반드시 필요한 것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믿음입니다.

 

 

[나가는 말]

 

찬송가를 보면 패니 크로스비(Fanny Jane Crosby)라는 이름을 자주 발견하게 됩니다. 그분이 작사한 찬송가가 <21세기 새 찬송가>에 22곡이 실려 있습니다. 그 중 우리가 많이 부르는 잘 알려진 곡들이 이런 것입니다.

 

31장 “찬양하라 복되신 구세주 예수”, 40장 “찬송으로 보답할 수 없는 그 사랑”, 176장 “주 어느 때 다시 오실는지”, 255장 “너희 죄 흉악하나”, 279장 “인애하신 구세주여”, 288장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380장 “나의 생명 되신 주”, 384장 “나의 갈 길 다가도록”, 391장 “오 놀라운 구세주 내 주 예수”, 435장 “나의 영원하신 기업”, 439장 “십자가로 가까이”, 498장 “저 죽어가는 자 다 구원하고”, 540장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615장 “그 큰일을 행하신”.

 

이렇듯 우리가 좋아하는 찬송가들을 많이 지은 분이 바로 패니 크로스비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태어난 지 6주부터 시각장애인이 되었습니다. 돌팔이 의사의 잘못된 약물 치료를 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어린 딸이 맹인이 된 사실을 알고 통곡을 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매우 영리했기 때문에 시를 아름답게 지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노래도 잘 불렀지만, 맹인이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고 그 가정도 가난했습니다. 한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11살 되었을 패니를 누구보다 가장 사랑했던 할머니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무력함에 시달리며 긴 어둠의 세월을 보내던 30세 때의 어느 날, 뉴욕의 전도 집회에 참석했다가 거기서 다 같이 부른 찬송가의 가사가 패니 크로스비의 마음을 찔렀습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그 찬송을 부르는데 갑자기 눈물이 흘러내리며, 주님이 날 위해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믿어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영의 눈이 열리고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녀의 눈에 흐른 눈물은 그의 어두운 과거를 씻어 버리는 눈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찬송가 맨 끝에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라는 부분을 부르다가 이런 질문을 주님께 기도로 하게 되었습니다. “주님, 저 같은 사람도 주님을 위해 일할 수 있나요?” 그때 주님은 크로스비에게 이런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재능을 주지 않았느냐. 너는 시를 쓰고 노래를 만들 수 있지 않느냐.” 이에 그녀는 “그렇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위해서 시를 짓고 노래를 만들겠습니다. 이 몸 바칩니다.”라고 응답했습니다. 그 후 95세까지 살면서 무려 8,000곡 이상의 찬송가를 작사했습니다. 60세 이후에 남들은 다 은퇴하고 쉴 시기에 왕성한 활동을 했습니다.

 

패니 크로스비가 사람들이 볼 때는 불행의 조건을 가지고 있었지만 주님 안에서 참으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92세 생일 때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 손 들어보세요.”라고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열정과 에너지도 넘쳤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육신의 눈은 그대로 안 보였지만, 영적인 눈이 열리며 구원을 체험했고 또 자신의 사명을 발견했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노래를 만들고 주님을 찬양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다음부터 주님께 쓰임 받는 위대한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이런, 주님께 쓰임 받는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디매오 같은 예수님 앞에서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자기만 생각하는 야망이 아니라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는 믿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데 아무 애로 사항이 없는 정상적인 믿음입니다. 어려움이 없는 인생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운명이나 숙명을 이길 수 있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시라면 이 일을 이루어주실 것이라는 믿음,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믿음, 또 그렇게 간청할 때 한 점 부끄러울 것이 없는 믿음입니다.


그러한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믿음의 열매를 맺게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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