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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15일 주일예배
✦ 예수와의 만남 8 ✦
“예수님에게 손을 댄 믿음”
(누가복음 8장 40~48절)
[들어가는 말]
여러분 사시면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든 내가 보이지 않고 숨었으면 좋겠다 하는 상황이 있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소위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녔다고 하는 모태 신앙인입니다. 크리스천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사실 주일예배를 빠진 적이 없는데 한 번 빠진 기억이 납니다.
한국에서 대학교에 다닐 때 하루는 토요일에 그렇게 특별한 것을 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피곤했는지 늦잠을 잤습니다. 그래서 일어나 보니까 집에 아무도 없고, 심지어 5살 밑인 동생도 이미 교회 가고 저만 혼자 있는 겁니다. 그러다 조금 후에 외할머니가 교회를 다녀오셨는데, 할머니는 제가 벌써 교회 갔다 온 줄 아셨습니다. 그래서 아무 말을 안 하셨습니다.
제가 그때 허겁지겁 달려가니 이미 예배는 거의 끝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당시 다니던 대학부에 반드시 가야만 했습니다. 제가 찬양 인도자였기 때문입니다. 주일예배는 빠졌어도 찬양을 인도해야 하니까 대학부를 가야 했던 겁니다.
교회에 도착했을 때는 예배가 아직 안 끝났지만, 많은 교인들이 앉아 있는 본당에 차마 들어갈 수가 없었고, 게다가 거기에는 대학부 친구들과 선후배들이 다 있어서 못 들어가고 조금 떨어진 데서 어슬렁 거리다 예배가 끝나고 사람들이 나올 때 사람들 틈에 슬쩍 끼어서 마치 예배에 참석한 것처럼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날 하루 종일 얼마나 창피하고 양심에 찔려서 너무 괴로웠습니다. 행여 누가 봤을까 봐 굉장히 신경 쓰면서 그 사실을 숨기느라 노력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심정, 즉 남들 앞에 있지만 드러나고 싶지 않은 마음, 앞에 나오지 못하고 뒤에 숨어 서성이는 심정을 겪으셨는지 모르겠지만, 그럴 만한 짓은 미리 안 하는 게 좋습니다. 그 기분이 아주 안 좋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저의 마음보다 훨씬 더 불편한 심정으로 사람들 앞에 드러나기를 원하지 않았던 사람이 오늘 본문에 등장합니다. 그 사람은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았던 여인입니다.
1. 혈루증으로 앓는 여인의 절박한 상황 (40~43절)
지난주 본문에서 이방인 지역인 데가볼리에 속한 거라사(갈릴리 동쪽)에서 군대 귀신 들렸던 사람을 고쳐주신 예수님은 다시 갈릴리로 돌아오십니다.
“예수께서 돌아오시매 무리가 환영하니 이는 다 기다렸음이러라” (40절)
여기 보면, 그곳에는 이미 수많은 무리가 나와 예수님을 벌써부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중 한 유력한 사람이 거기서 예수님을 아주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41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42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된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밀려들더라” (41-42절)
예수님이 도착하시자마자 회당장인 야이로라는 사람이 와서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자기 집으로 와 주시기를 요청합니다. 12살인 무남독녀 외동딸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따라 그의 집으로 가시는데,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에 가시는 중에 발생한 사건입니다.
42절 뒷부분을 보면,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으로 가실 때 “무리가 밀려들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개역개정에서는 “밀려들더라”라고 하니까 훨씬 이해가 쉽습니다. 이것은 수많은 사람이 그분의 주변에 같이 가면서 밀고 당기며 난리를 쳤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한국이 요즘은 그래도 많이 좋아졌는데, 오래전 지하철에 심지어 ‘푸시맨’까지 있던 시절 만원 지하철 출퇴근 시간. 사실 지금도 출퇴근 시간은 사람이 많습니다. 거기 사람이 꽉 차 있는 상태에서 자기가 내려야 할 역이 되어서 나가야 하는데 사람이 너무 밀려서 못 나가고 한 정거장을 더 간 경험이 있는 분들이 있으실 겁니다.
그렇게 사람이 꽉 차서 서로 밀고 당기고 갔다는 겁니다. 그토록 많은 무리 가운데 한 여인이 있습니다. 이 여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43절)
이 여자는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입니다. 이것이 참 기가 막힌 일입니다. 왜냐하면 야이로의 딸이 집에서 죽어 가는데 12살입니다. 12년 동안 애지중지 얼마나 귀했겠습니까? 그런데 죽어가고 있고, 또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았던 한 여인은 야이로의 딸이 자라서 참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았던 그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고 고침을 받지 못하는 괴로움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게 여기서 우연처럼 보이지만 성경이 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이 병은 자궁에 이상이 있어서 매일 하혈하는 부인병이었습니다. 제가 오래전에 신학교에 가서 처음 전도사가 됐는데, 교육 전도사가 되어서 유스 아이들을 가르치며 성경 공부를 했습니다. 그때 이와 같은 내용이 나온 마가복음 본문을 공부하는데, 10학년, 11학년, 12학년 학생들이 저한테 질문을 하는 겁니다. 당시 그 고등학생들은 저와 나이 차이도 그렇게 많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혈루증이란 것이 영어 성경에는 hemorrhage라고 나와 있는데, 여자는 그 병에 유전적으로 안 걸린다고 하면서 이의를 제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급당황하면서 “야, 조용히 하고, 어쨌든 성경에서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라고 하면서 슬쩍 넘어갔던 기억이 아직도 납니다.
이 병은 자궁에 이상이 생겨 매일 하혈하는 부인병 계통이었습니다. 그런데 1~2년도 아닌 12년이나 이 병으로 고생했고, 게다가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했다는 겁니다. 여기 “아무에게도”에 달린 주를 보면, “어떤 사본에는, 의사들에게 그 가산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에게도”라고 되어 있습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가복음 5장에도 이 여인이 가진 재산을 다 사용해서 많은 의사들을 찾아갔지만, 이 병은 전혀 낫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조금 아파도 가진 것이 있고, 또 사랑하는 가족들이 함께 있으면서 위로해주면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아픈 데다 가진 것도 다 날렸다면 참으로 괴롭고 절망적인 상황이 아닙니까? 이 여인은 자기가 가진 것을 다 썼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병은 병대로 안 낫고, 가진 것은 다 날린 상황입니다.
이 여인은 매일 피를 흘렸기 때문에 어땠겠습니까? 피가 모자랐을 것이고, 그로 인해 빈혈 증세가 있어서 항상 어지럽고 피부도 까칠까칠하고 거무틱틱하며 반점이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빈혈을 겪어본 적이 전혀 없어서 잘 모르는데, 빈혈이 있는 분들 말로는 가만히 있는데도 누군가가 뒤에서 잡아당기는 것과 같이 느껴진다고 합니다.
더구나 이 여인은 위생 시설이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게 형편없었던 1세기 유대 땅에서 옷을 매일 어떻게 잘 빨았겠습니까? 혹시 매일 빨았어도 몸에서 항상 비릿한 피 냄새가 났을 것입니다. 12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이 병 때문에 길을 가다가 혹시라도 남들이 자기 병을 눈치챌까 봐 굉장히 조심하며 살아야 했을 것이고, 그래서 항상 조심했기 때문에 항상 긴장되고 항상 피곤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이 여인에게 혈루증은 굉장한 괴로움과 불편함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혈루증보다 더 고통스러운 게 있습니다. 진짜로 고통스러웠던 것은 율법이 자기 같은 사람을 부정한 사람으로 정죄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25 어떤 여자가 자기 몸이 월경 기간이 아닌데도, 여러 날 동안 줄곧 피를 흘리거나, 월경 기간이 끝났는데도, 줄곧 피를 흘리면, 피가 흐르는 그 기간 동안 그 여자는 부정하다. 몸이 불결한 때와 같이, 이 기간에도 그 여자는 부정하다. 26 그 여자가 피를 흘리는 동안 눕는 잠자리는 모두, 월경 기간에 눕는 잠자리와 마찬가지로 부정하고, 그 여자가 앉는 자리도, 월경 기간에 앉는 자리가 부정하듯이, 모두 부정하다. 27 누구나 이런 것들에 닿으면 부정하다. 그는 옷을 빨고 물로 목욕을 하여야 한다. 그는 저녁때까지 부정하다.” (레 15:25-27, 새번역)
이 여인은 12년 동안 항상 피를 흘렸기 때문에 부정한 사람입니다. 그녀가 만지는 것들도 다 부정하게 되었고, 또 그녀를 만지는 사람도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당시 유대의 율법적인 사회에 속할 수 없는 불쌍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부정하다는 말은 같이 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저야 교회를 하루 빠진 것 때문에 괴로웠어도 그때뿐 아닙니까? 그런데 이 여인은 장장 12년 동안 괴로움 가운데 살았고, 그것을 어떻게든 사람들 앞에 숨겨야 했으니 얼마나 피곤한 삶을 살았겠습니까? 또 어디를 가려면 항상 다른 사람 눈치를 보면서 아닌 척하느라 굉장히 피곤한 삶을 12년 동안 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것은 아니라도 혹시 남들이 눈치채면 안 되는 어떤 비밀이나 어떤 죄가 있어서 그것을 숨기느라고 그렇지 않은 척하느라 피곤하십니까? 사실은 아닌 척하면 티가 납니다. 사람이 이상한 게, 숨길 게 있으면 요즘 말로 ‘오버’하게 됩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남들이 모르는데, 괜히 남들이 눈치챌까 봐 미리 걱정을 해서 아닌 척하는 말이나 행동을 하느라 오히려 더 부자연스럽습니다. 그럼 오히려 ‘이 사람이 왜 이러지?’ 하며 남들이 눈치채게 됩니다.
죄가 아니라고 해도, 겉으로 보이는 자기 모습과 진짜 자기 모습이 다를 때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행여 알까 봐 불안해하며 살는 모습은 없는지 한 번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혹시라도 그런 마음으로 사신다면,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 사람도 얼마든지 받아주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다고 뭐가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 나오시면 됩니다. 오늘 말씀을 대하며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2. 여인의 믿음 (44절)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44절)
이 여인은 그러한 상황 속에 예수님께 와서 이 무리 가운데 섞여 가다가, 예수님의 뒤로 와서 당시 유대인 남자들이 입는 긴 겉옷의 끝자락에 살짝 손을 댔습니다. 그 결과 혈루증이 즉시 그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어떻게 예수님을 믿고 이 자리까지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막 5:27-28)
이 여인은 처음에 누군가로부터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분의 능력에 대한 소문, ‘예수라는 분이 나사렛에서 오셨는데 이런 사람도 고치고 저런 사람도 고치고 죽은 사람도 살리고 엄청나.’ 이런 소문을 들은 겁니다. 그래서 ‘그래? 그럼 나도 고칠 수 있겠네!’라고 하면서 여기까지 따라온 겁니다.
로마서 10장에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듣지 않았는데 어떻게 믿겠느냐고 사도 바울이 기록합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에 대해 듣고 왔는데, 어떻게 들었겠습니까? 누군가 말한 사람이 있으니까 들은 겁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예수님에 대해서 전했기 때문에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에 대해서 전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전한 사람이 예수님을 완벽하게 알아서 ‘그분이 정말 구원자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고 하는 걸 다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예수라는 분이 굉장한 능력이 있어.’라고 그냥 이야기한 것뿐입니다. 그런데도 그 말을 듣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완벽하게 아는 게 아니더라도 그냥 내가 아는 예수님, 내가 경험한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마 실제로 고침을 받은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이 이야기한 말을 들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자기가 직접 고침을 받았기 때문에 ‘야, 그 예수라는 분이 정말 내게 손을 턱 대니까 그냥 병이 싹 났어. 일어나지 못하던 내가 그냥 확 일어났어.’ 이러면서 막 흥분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이 여인이 지나가다 듣고 ‘아, 예수라는 분이 대단하구나. 나도 희망이었다.’ 이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지 않는 분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교회로 그냥 데려오는 게 필요합니다. 목장으로 초청하고, 교회로 초청하고, 데려올 수 있으면 무조건 그냥 데려오는 겁니다.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우리가 기회를 주는 겁니다. 특히 이 여인의 심정과 같이 뭔가를 들킬까 봐 불안해하고 피곤한 사람들을 보면, 더더욱 우리가 그런 분들에게 예수님을 알려야 합니다.
혹시 그런 사람이 어쩌다 교회에 왔다가 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데서 조는 것보다 여기 교회에 와서 조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혹시 다른 목적을 갖고 오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사업에 도움을 받고자 오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데이트할 사람을 찾으러 올 수도 있습니다. 아니며 정말로 사람을 만나러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 하시는 도구가 될지 누가 압니까? 혹시라도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온 사람이라도 우리는 거부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상한 생각으로 왔다가 실제로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경우가 꽤 많이 있습니다. 어떤 믿지 않는 남편의 아내가 전도를 받아서 먼저 교회에 갔는데, 교회에 간 자기 아내를 찾으러 교회에 갔다 믿게 된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남학생이 저 교회에는 예쁜 여학생들이 많다고 그래서 왔다가, 실제로는 별로 없었지만, 거기서 믿음 좋은 자매를 만나서 결혼한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또 누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그냥 그들에게 주님을 소개하는 겁니다. ‘그냥 와 보세요. 예수님이 좋습니다. 나에게 이렇게 해주셨습니다.’ 이런 것을 그냥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리고 오신 분들을 따뜻하게 환영하는 겁니다.
이 열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자가 예수님께 왔지만, 거기에는 두 가지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 주변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외적 장애물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이 여인은 이렇게 수많은 무리 가운데 끼어들 수 없는 부정한 존재입니다. 사실은 오면 안 됩니다.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알았으면 돌에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면서도 왔을 만큼 이 여인의 마음은 절박합니다. 정말 간절합니다.
이 여인은 아픈 병자입니다. 약하고 말랐습니다. 매일 피를 흘려서 기력도 없습니다. 이렇게 약한 병자인 여자가 수많은 사람들, 그것도 남자들이 가득한 그곳에서 그 사이를 뚫고 예수님께로 간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둘째, 이 여인에게는 내적인 장애물도 있습니다. 수많은 병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치유를 받았는데, 지금까지 치유 받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병자는 다 예수님께 나아와 자기의 병든 곳을 보이면서 고침을 받지 않았습니까?
맹인은 눈이 안 보이는데 예수님이 만지시거나 심지어 진흙을 만들어서 눈에 붙여 주시거나 하는 식으로 보이게 눈을 고침 받았습니다. 다리를 못 쓰던 사람은 그 다리를 보이고 벌떡 일어났습니다. 또 귀가 안 들리는 사람에게는 귀에 손을 대시면서 치유해 주시고, 열병 걸린 사람도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병은 수치스러운 것이었고, 율법에 의해 부정한 병이었으며, 남들에게 보일 수 있는 병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 여인은 여러 차례 시도한 끝에 마침내 예수님께 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으로는 도저히 올 수가 없어, 뒤로 와서 그 옷 가를 살짝 손으로 만집니다(44). 저분의 옷 가만 만져도 병이 나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12년 동안이나 피를 흘리고 아무도 못 고치던 증상이 즉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도대체 이 여인은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가졌을까? 어떻게 ‘저분의 옷 가만 만져도 나을 수 있다.’라는 믿음을 가졌느냐는 겁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그런 분이시라면 내 병도 고치실 수 있다는 비전과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말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태복음 9장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여자는 속으로 말하기를 ‘내가 그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텐데!’ 했던 것이다.” (마 9:21, 새번역)
누가복음에서는 이 부분을 생략했지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그것이 나옵니다. 이 여자가 ‘내가 저분의 옷에 손만 대어도 나을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 나아가기 전에 이 여인이 뭘 한 겁니까? 속으로 생각한 것, 즉 자기 자신과 대화한 겁니다. 마음의 대화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절망과 좌절의 순간에 많은 사람들이 바로 포기해 버립니다. 포기는 먼저 마음에서 나옵니다. 마음으로 포기하면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그러나 반대로, 마음에 소망을 가질 때 버틸 수 있고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멘탈이 강하다’, 아니면 ‘멘탈이 약하다. 무너졌다.’라는 표현을 쓰는데, 멘탈이 바로 마음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강하게 먹고 있으면 괜찮은데, 마음이 무너지면 그 인생이 무너집니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는 자신을 격려하고 소망을 넣어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바로 이 혈루증을 앓던 여자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 여자가 무엇을 속으로 생각한 겁니까?
‘저 예수님은 정말 대단한 분이셔. 내가 가서 옷만 만져도 나을 수 있을 거야. 포기하지 말고 조금만 더 버티자. 지금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분께 갈 수도 없고 저들을 뚫고 가기에는 내가 너무 약하지만 그래도 포기해서는 안 돼. 야, 포기하지 마.’ 지금 남에게 이야기합니까? 자기한테 이야기하는 겁니다. ‘조그만 틈이라도 보이면 그리로 들어가야지. 길이 없는 게 아니야. 틈을 잘 봐.’ 누구에게 지시합니까? 자기에게 그러는 겁니다. ‘나는 율법으로 부정한 사람이지만 그래도 괜찮을 거야. 저분의 뒤로 가서 옷만 만져도 나을 수 있을 거야. 그렇게 하자. 포기하지 마, 포기하지 마.’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자기암시가 아니냐고 하고 무슨 심리학적 수법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겠는데, 아닙니다. 놀랍게도 이런 식으로 자기 영혼을 향해 권면과 격려를 한 내용들이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 42:5, 11; 43:5)
전에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살펴봤는데, 그 부자도 똑같이 자기에게 말합니다. 자기가 자기와 대화했습니다. ‘내 영혼아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라고 자기를 위해서 살자고 하면서, 자기가 자기에게 대화했습니다. 그런데 시편 42편에서는 “내 영혼아”라고 하는데, 자기가 자기에게 말하는 겁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시 62:5)
남에게 말하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의식하든지 못하든지,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과 대화를 나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제가 어제도 바빠서 컨퍼펀스에 다녀온 데다 오늘 영어예배까지 인도하느라 너무 바빠서 준비하며 뭐라고 중얼중얼 하는데 보니까, 제가 저한테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야야, 자자, 이다음에 이걸 하고, 그다음은 이걸 하고. 괜찮아, 할 수 있어. 어, 그래, 너는 할 수 있어.” 누구한테 얘기하는 겁니까? 저한테. 끊임없이 자기와 대화하는 것을 제가 발견했습니다. 여러분도 똑같습니다. 항상 자기와 대화합니다. 잘 보십시오.
그리고 사람은 자기와의 대화를 통해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야야, 저 사람 별로야.’ 누가 누구에게 얘기합니까? 자기가 자기에게 하는 겁니다. ‘저 사람 훌륭해.’ 자기가 자기에게 대화하며, 나와의 대화를 통해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평가하고 일어난 사건들을 해석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과의 대화가 그토록 중요합니다. 사건을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정말로 힘들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정말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어려운 문제가 생기거나 힘든 상황이 닥친 게 아닙니다. 또 누군가가 나를 어렵게 하고 불편하게 해도 그 사람이 문제가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뭐냐 하면, 바로 나의 잘못된 해석입니다. 내가 이 상황을 잘못 해석하는 게 진짜 문제입니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이 우리에게 고통이 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축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상황이 똑같아도 사람마다 다른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가난한 사람은 다 실패한다. 부잣집에서 부유하게 자란 아이는 다 성공한다.’ 이 말이 맞습니까, 틀립니까? 당연히 틀립니다. 잘못된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수도 없이 아주 어려운 환경에서 훌륭한 인물이 된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런 사람이 역사 속에 얼마나 많습니까? 또 그렇게 환경이 좋은데도 형편없는 인생으로 마감한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습니까?
똑같이 부유한 집에서 자랐는데도, 왜 한 사람은 너무나 훌륭하게 되고 또 한 사람은 망가진 인생이 됩니까? 왜 그렇습니까? 그 원인은 어떤 문제 자체 아니면 어떤 환경 자체에 있는 게 아닙니다. 그 문제와 상황에 대한 해석 때문입니다. 어떻게 지금 이것을 해석하느냐? 이것이 차이를 만듭니다.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문제도 아니고 상황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고, 나의 해석입니다. 나의 해석! 어떻게 이 상황을 보느냐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 상황을 보는 나의 시각,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왜 이 해석이 그토록 중요합니까? 우리가 해석을 통해 이 상황에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해석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성공의 길로 가는 것이고, 또 해석을 잘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상황이 좋아도 망가지는 인생으로 가는 겁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떤 사람을 만날 때 가정 먼저 그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 사람의 외모, 대화, 태도, 지위, 소문 등을 통해 그 사람을 평가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데 어떻게 판단하느냐입니다. 판단하기는 하는데 어떻게 판단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제대로 판단하는 사람은 제대로 된 길을 가는 것이고, 판단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은 잘못된 길로 가는 겁니다.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볼 것이냐, 겉모습만 보고 선입관으로 판단할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이 이 사람을 보시는 눈으로 볼 것이냐, 이것을 우리가 잘 결정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해서 해석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해 해석을 내리는 순간, 우리는 그 사람에게 내가 내린 해석에 따라 반응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마음에 들면서 ‘저 사람 괜찮네. 마음에 드네.’라고 해석하면 자기도 모르게 그 사람에게 호의적인 반응이 나갑니다. 그런데 ‘저 사람 이상하게 좀 마음에 안 들고 별로야.’라고 해석이 되면 그냥 대충 지나치는 정도로 대하거나, 정말 마음에 안 드는 경우는 그냥 무시하거나, 또 그것을 넘어서는 경우는 분노하고 미워하기까지 하는 반응을 보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 사람에 대해 나 자신과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가에 따라 그 사람에 대한 해석이 내려집니다. 내 마음속으로는 끊임없이 나 자신과 저 사람에 대해서 지금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저 사람 괜찮은데?’ 누가 누구에게 얘기합니까? 자기가 자기에게 합니다. 그 해석에 따라 그 사람에 대한 반응이 결정됩니다. ‘저 사람 별론데.’라고 생각하면 별로인 반응이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 자신과 어떤 대화를 나누느냐를 잘 살펴야 합니다.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내가 나와 무슨 대화를 하나 한번 잘 살펴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너무나 놀라운 생각들을 합니다. 끊임없이 긍정적이고 소망에 가득 찬 대화를 계속 자기 자신과 나눕니다. 굉장히 인격이 훌륭합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부정적인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인격이 좋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무슨 일이 닥치고 무슨 사람을 만나도 부정적이고 비관적으로만 해석하고 부정적으로 반응하는데, 속에서 자기와 그런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긍정적인 사람도 역시 속에서 그런 말을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전에 재밌게 읽었던 이야기가 있는데 <달과 6펜스>라는 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중학교 때 그 <달과 6펜스>가 필독 도서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읽지도 않고 독후감을 써내는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달과 6펜스>의 작가는 서머셋 모옴(W. Somerset Maugham)입니다. 아주 유명한 작가입니다. 무명시절 때 서머셋 모옴이 책을 출판했지만, 출판사는 책이 안 팔린다는 이유로 광고를 내지 않았습니다. 오랜 노력 끝에 간신히 쓴 책인데도 팔릴 기회조차 없어진 것을 본 그는 크게 실망하며 괴로워했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낸 그는 책을 팔기 위해 자비로 광고를 내야겠다고 결심했는데, 그런 그에게는 적은 돈으로도 효과적인 광고를 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필요했습니다. 고민고민 끝에 드디어 이거다 하는 생각이 나서 신문사를 찾아가 광고 문구를 적어 신문사 직원에게 전달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광고가 실렸습니다.
“음악과 스포츠를 좋아하고 성격이 부드럽고 젊은 백만장자가, 마음 착하고 훌륭한 여성을 찾습니다. 제가 바라는 여성은 최근에 나온 서머셋 모옴의 소설 주인공과 모든 점에서 닮은 여성입니다. 자신이 서머셋 모옴의 소설 주인공과 닮았다고 생각되는 여성 분은 지체하지 마시고 즉시 연락을 주십시오.”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광고가 난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의 책은 모두 팔렸습니다. 어느 서점에서도 그의 책을 찾을 수 없었고, 이것을 계기로 그는 점차 유명한 작가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발한 아이디어입니까?
서머셋 모옴은 멋진 아이디어로 실패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만일 그가 자기 책이 팔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비관만 하고 있었다면, 그저 ‘세상은 더럽고, 부자만 좋아하고, 1등만 기억한다.’라고 했으면 그는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재치 있는 몇 마디 말을 생각해 내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그냥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자기를 격려했고, 그 상황을 다르게 해석했습니다. 따라서 아주 재치 있는 반응을 보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똑같은 상황이라도 똑같은 반응이 나오는 게 아닙니다. 여기 우리는 각기 다른 사람들인데, 만약 똑같이 어려운 상황이 올 때 왜 어떤 사람은 잘되고 어떤 사람은 잘 안 됩니까? 교회에서 똑같이 어려운 사역을 맡아도 어떤 사람은 사역에 열매가 있는데 또 어떤 사람은 왜 열매가 없습니까? 해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해석은 자기 자신과의 대화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자신과의 대화 내용이 뭔가를 잘 살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해석과 반응을 결정하고, 결국 우리 인생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바르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뭡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큐티’입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이 자기 자신과의 올바른 대화를 하도록 이끌어 주고, 올바른 해석과 반응으로 이끌어 줍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기를 비추어보고 자기를 가꾸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서머셋 모옴은 자기 스스로의 재치로 그렇게 해서 성공했지만, 우리에겐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져 있습니다. 어떤 사건이 닥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날 때, 말씀의 기초 위에서 자기와의 대화가 나눠지고 또 거기에서 해석과 반응이 잘 나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밤 주무시기 전에 당장 자신과의 대화 내용을 점검하는 시간을 가져보십시오. 매일매일 그렇게 해보십시오. ‘오늘 나는 속으로 나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가?’ 하나님과 아름다운 대화의 시간을 가지면 자기 자신과도 굉장히 아름다운 대화의 시간으로 이어질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건을 만날 때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반응하는지 잘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요즘은 너무 할 게 많고 볼 게 많은 시대이기 때문에 솔직히 우리가 생각을 별로 하지 않으면서 삽니다. 그래서 소위 ‘무뇌충’이라는 사람들이 왜 많아졌냐 하면, 생각을 별로 안 하고 그냥 자극적인 것만 쫓아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면 부정적인 해석과 반응을 보이면서, 그러한 자기를 발견하고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지면 자기와의 대화, 자기를 격려하는 대화에 예수님을 포함하게 됩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바로 그렇게 한 겁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자신과의 대화에 그분을 포함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분 앞에 가면 나을 거야. 저분 앞에 가면 나을 거야. 저분에게 가자. 저분에게 가자.’ 계속 자기에게 이야기해 준 겁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포함해서 자기와 대화할 때, 예수님의 생각을 따라 대화하게 되고 성경적인 관점을 가지고 대화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사건이나 사람을 만나도 성경적으로 해석하고 반응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도와주는 과정이 바로 기도이고 말씀이고 이런 예배입니다. 우리가 기도와 말씀과 예배에 힘써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3. 예수님의 반응 (45~4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무리가 밀려들어 미나이다” (45절)
이 여인의 병이 나은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하는데, 예수님은 아시고 물으셨습니다.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그런데 여기에서 재미있는 반응이 나옵니다. “다 아니라 할 때에”.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라고 하시니까 거기 있는 모든 사람 “저 아닌데요.”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사실 거기 있던 사람들 전부 다 예수님을 붙들며 밀고 당기고 만졌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이 “누가 나에게 손을 댔어?”라고 하시니까 짜증 나서 혼내시는 줄 알고 다들 아니라고 부인한 겁니다.
그때 베드로는 그래도 조금 솔직합니다. 기가 막힌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여 무리가 밀려들어 미나이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아니 주님, 지금 이렇게 많은 사람이 밀고 당기고 하는 판에 누가 손을 대었느냐고요? 보세요. 여기 있는 사람 전부 다 손을 댔습니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랬더니 주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46절)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누가 손을 대었는지 정말 모르고 질하셨을까요, 아니면 알고도 질문하셨을까요? 만일 모르셨다면, 예수님은 그것도 모르는 능력이 부족한 분이 됩니다. 그러나 아셨다면, 도대체 왜 이 질문을 하신 겁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이 여인이 자신을 만지고 병이 나았다는 것을 아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예수님 주위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다 붙들고 밀고 당기고 하는데, 왜 다른 사람들은 치유를 못 받고 이 여인만 받았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여기 병자가 이 여인 한 명이었겠습니까? 병고침 받겠다고 온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만 고침을 받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는 당연히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구세주이십니다. 그런데 그 능력을 체험한 사람은 이 여자 한 사람이었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 중 다수가 예수님 곁에서 그분을 만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병을 고치는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입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예수님을 만지고 다해도 믿음으로 만지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주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똑같이 기도하고 말씀 읽고 예배드리고 봉사하고 다 해도, 믿음으로 하지 않으면 주님의 능력을 맛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여자가 주님의 옷을 만졌는지, 치유를 받았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당연히 모두 만졌는데 이 여자가 만졌는지 안 만졌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리고 이제 치유를 받은 여자는 조용히 사라지려고 하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자가 도망가지 못하고 사람들 앞에 나오게 “누가 내게 손을 댔느냐?”라고 물어보십니다. 그러니까 나오라고 요구하시는 겁니다. ‘도망가지 말고 나와라.’ 하십니다. 왜 그러십니까?
예수님은 지금 이 여인이 병만 살짝 낫고 가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자신과의 개인적인 만남을 통해 인격적인 믿음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만일 병만 낫고 그냥 가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인격적인 믿음을 가질 수 없게 됩니다.
나중에 다른 병이든 이 병이든 또 걸리면 어떻게 됩니까? 또 소망이 없어집니다. 그때 예수님을 어떻게 또 찾아 나오겠습니까? 예수님은 3년이면 다 사역을 마치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가시는데, 어떻게 예수님을 또 만나겠습니까? 또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육체적 질병의 치유만이 아니고 진정한 의미의 구원을 깨닫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47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니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47-48절)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때가 30세쯤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 3년 반 정도 활동을 하셨는데, 이 여자를 향해서 “딸아”라고 하십니다. 30대 초반 청년이 한 여자를 향해 “딸아”라고 하는데, 만약 이 여자가 40대, 50대 중년 여성이었는데 30대 청년이 “딸아”라고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 여자는 굉장히 젊은 여자였다는 겁니다. 젊었는데 이런 병에 걸려서 12년 동안이나 고생했습니다. 아마도 10대 때부터 고생한 것 같습니다. 얼마나 불쌍한 인생입니까?
그런데 이 여인이 이제 고침을 받고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떨면서 나아와 엎드립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듣는 데서 모든 사실을 다 고백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라고 하십니다. 이때 억양이 어땠겠습니까? 막 짜증스럽게 화내면서 하신 게 절대 아니고, 너무나 부드럽게,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했던 따뜻한 음성으로 말씀하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어떤 믿음이기에 자기를 구원했다고 하십니까? 단순하면서도 실제적인 믿음이었습니다. ‘저분께 오면 분명히 고침을 받을 것이다.’ 하는 것을 믿고 수많은 사람들을 뚫고 온 것입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병을 고칠 수 있다고 믿었을 겁니다. 그런데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아니면 나와서 예수님을 만지면서도 그 고침의 능력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가만히 손을 대어도 나을 것이라고 믿었고, 또 나은 다음에 예수님이 자기를 부르실 때 도망가지 않고 떨리면서도 용기 있게 반응하여 여기 나온 것, 그리고 숨기지 않고 사실대로 다 이야기한 것, 이것을 다 포함한 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녀의 믿음입니다.
[나가는 말]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믿음이 어떤 것이겠습니까? 무슨 엄청난 것이 아닙니다. 단순한 믿음,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 그러나 확고한 믿음, 또 인격적 믿음입니다. 혹시 지금 내가 너무 힘들어서 포기해야겠다. 그만해야겠다고 하는 상황이 있습니까? 남들에게 드러낼 수 없는 어떤 부분이 있어서 그것을 가리려고 열심히 애쓰느라 너무 피곤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상황이 어떻든 간에 그것 때문에 좌절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 대한 소문을 듣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믿음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의 말씀 위에 기초해서 속으로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그에 따라 말씀대로 사건을 해석하고, 또 말씀대로 상황에 반응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삶에 여러 어려움이 닥칠지라도 주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상황을 보며 좌절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 위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며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초로 자신과의 대화를 나누고, 거기에서 나오는 말씀 중심의 해석과 말씀 중심의 반응을 보이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될 때, 주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