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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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4일 주일예배
✦ 예수와의 만남 4 ✦
“의사가 필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누가복음 5장 27~32절)
[들어가는 말]
오래전 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언제나 모든 과목에서 F 학점을 맞는 학생이었는데, 유독 수학만 항상 만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교사들이 모여서 의논할 때 이 학생을 퇴학시키고 싶었지만, 수학 점수가 워낙 좋아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그를 안타깝게 여긴 선생님 한 분이 그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네가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수학에서 너같이 뛰어난 학생을 지금껏 본 적이 없어. 만일 네가 수학에서 하는 것처럼 다른 과목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너는 정말 천재가 될 수 있단다. 나는 네가 그렇게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때부터 이 학생은 큰 용기를 얻고 다른 과목들도 수학처럼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을 받았고, 마침내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우리가 잘 아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입니다. 자칫 잘못했으면 천재가 퇴학당할 뻔했는데, 그런 어린 학생의 작은 가능성을 보고 격려해서 천재가 될 수 있도록 용기를 준 아인슈타인의 선생님이 얼마나 감사하고 대단한 분입니까?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일 제가 그 교사였다면, 아무리 수학을 잘해도 다른 과목은 항상 F 학점이니 ‘얘는 가망이 없어. 얘는 퇴학시키고 다른 학생들을 더 가르치는 게 낫겠다.’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이 학생을 살려낸 선생님의 격려는 참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형편없는 자들, ‘저 사람들은 도저히 구제 불능이다.’라고 할 만한 죄인들을 찾아가셔서 사랑해 주시고 격려해 주심으로 놀라운 변화를 이끌어내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격려에 힘입어 그분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1. 레위를 찾아가 부르신 예수님 (27절)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7절)
‘그 후에’라고 했는데, 이것은 바로 앞에 나오는 본문에서 중풍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이 밖으로 나가셔서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신 것입니다.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를 보셨다는 말은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다가 레위를 보았다는 말이 아니라,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그를 주목해 보셨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이 사람이 마태로 나와 있고,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레위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이름이 두 개입니다. 마태도 되고 레위도 됩니다. 우리가 아는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가 바로 이 사람입니다.
로마 정부는 유대 지역에서 현지인인 유대인들을 세리로 고용하여 세금을 걷었습니다. 그렇게 함에 있어 세리들이 백성들로부터 로마 정부에게 내야 하는 액수보다 더 많이 거둬들이는 행위를 묵인해 주었고, 그래서 세리들은 정해진 세금보다 훨씬 더 많이 걷어서 자기 재산을 불리는 타락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가정의 세금이 1,000달러라면, 5천 달러를 걷어서 천 달러는 로마 정부에 내고 4천 달러는 자기 주머니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세리였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원성을 샀겠습니까? 얼마나 민족의 원수였겠습니까? 지금 로마제국 아래에 있는데, 민족의 원수인 로마 정부를 도와서 자기 민족을 압제하고 돈을 갈취했기 때문에 세리들은 다른 유대인들로부터 증오와 멸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이것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래전 일제강점기 때 친일파가 있어서, 같은 조선 사람인데 일본 사람보다 조선 사람인 친일파가 더 밉습니다. 같은 동족인 세리가 자기들에게 돈을 갈취하니까 로마 사람들보다 세리가 더 미운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민족의 반역자인 세리였던 레위를 일부러 보시고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어떻게 세리를 부르십니까?
다른 세리들과 마찬가지로 레위도 부자였습니다. 그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을 위해 큰 잔치를 벌이며 사람들을 많이 초청한 것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레위는 그렇게 많은 사람이 들어올 수 있을 정도의 큰 집을 가지고 있었고, 그에게는 돈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였고 넉넉한 생활을 하던 세리 레위의 마음이 넉넉하고 행복했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의 마음은 공허함과 죄책감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 정부에 대항해서 독립운동을 벌이던 열심당원들에게 테러를 당하지 않을까, 밤에 누가 자기 집에 들어와 칼로 푹 찔러 죽이지 않을까 늘 불안하고 염려하며 매일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에게도 분명히 가족이 있었을 텐데, 그는 항상 건장한 경호원들을 데리고 다녔을 것이지만 열심당원들이 자기 가족을 노리지 않을까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아무리 돈이 많으면 뭐 합니까? 항상 불안과 염려로 살아가는데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요즘 말로 하면 최고급 자동차를 타고 다니고 엄청나게 큰 저택에 사는 사람입니다. 또한 자기 밑에 부하 직원들도 많았지만, 그는 너무 외로웠고 친구가 없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평안이 없고 영적으로 파산한 상태였습니다. 항상 불안하고 항상 염려합니다. 누구도 자기에게 와서 친근하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도 자기와 친구가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다가가면 멀리하고, 최대한 가까이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레위는 모든 사람이 자기를 미워하고 멸시하며 자기를 배신자로 여기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은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남이 나를 싫어하면 그것을 어느 정도는 느낄 수 있습니다. 또 내가 남을 싫어하면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그것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다 느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레위가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수군거리며 손가락질을 하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자기 앞에서는 잘 보여야 하니까 굽신거리지만, 자기가 지나가자마자 수군거리며 손가락질하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그런 상황을 그가 견디기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레위라고 이런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고 싶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그도 새로운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할 수 있는 힘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제가 요즘은 풋볼(football)을 잘 못 봅니다. 프로 풋볼은 주일 오후에 주로 하고 대학교는 토요일에 하니까, 목사가 토요일에 대학 풋볼만 보고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주일에 교회를 제쳐두고 집으로 가서 프로 풋볼을 볼 수도 없습니다. 오래전 여유가 조금 있을 때는 많이 봤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한 선수가 있습니다. 저랑 연배가 거의 비슷한데, 제가 대학교에 다니던 시절 제가 다니던 대학교와 경기를 했던 팀의 선수였습니다. 그 당시 그 팀은 대학풋볼 전국 랭킹이 2위였고 제가 다니던 대학교는 8위였습니다. 그때 우리 대학교 홈 경기였기 때문에 이길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컸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0대 59로 무참히 패했습니다.
그때 그 패배를 만들어낸 최고의 선수가 수비수였는데, 우리 쪽에서 던졌다 하면 착 빼앗아 터치다운, 또 던졌다 하면 착 빼앗아서 터치다운을 한 그 선수의 이름은 디온 샌더스(Deion Sanders)입니다. 보니까 지금은 콜로라도 대학교 풋볼 팀의 감독입니다. 그런데 그 선수가 얼마나 대단한가 하면, 미국 NFL 프로 풋볼에서도 주전으로 몇 년을 활약한 스타였고, 또한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Major League)에서도 주전으로 뛰었습니다. 하나만 잘하기도 힘든데 두 개의 다른 스포츠에서 주전으로 뛴 엄청난 운동신경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니 돈을 얼마나 많이 벌었겠습니까? 그에게는 돈도 있고 성공도 있고 여자도 있고 명예도 있고, 다 있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교만했겠습니까? 그러나 그가 나중에 크리스천이 되면서 책을 하나 썼는데, 자기 마음이 공허했다고 합니다. 자기가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자동차로 1990년대 중후반에 12만 달러짜리 람보기니 슈퍼카를 사면서 딜러에서 차를 사고 키를 건네받는 순간 바로 1초도 안 되어서 공허함을 느꼈다는 겁니다. 자기 마음이 텅 비어 있는 걸 느꼈다는 겁니다.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차를 드디어 샀는데 그 즉시 공허함을 느꼈습니다. 그것이 그의 마음을 채워 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더 방탕한 생활을 했는데, 그러던 중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교회에 나가게 되고 또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모셔 드리게 됐는데, 그러자 마음이 꽉 차는 것을 경험했다고 고백했습니다.
물론 그가 그 후에 완전한 크리스천의 삶을 살았다는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의 고백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 세상 그 무엇을 우리 마음에 갖다 넣어도 채워 주지 못한다는 겁니다. 우리 마음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하보다 귀한 영혼이라고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천하보다 큰 존재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천하보다 더 큰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보다 더 큰 존재로만 우리 마음이 채워질 수 있는데,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레위도 그와 비슷한 심정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그는 물질적으로 굉장히 풍요로웠지만, 아주 지치고 상한 마음으로 자기의 세관에 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얼마나 경멸의 눈으로 쳐다보고 갔겠습니까? 그러니까 밖을 쳐다보지도 않고 그냥 묵묵히 아래만 쳐다보고 있었을 겁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이 그의 그러한 마음을 잘 아시고 그에게로 오십니다. 레위는 이 예수라는 분의 가르침을 들어보았고 치유하는 기적도 본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놀라우신 분이 지금 자기에게로 다가오는 겁니다.
이때 레위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아유, 드디어 저분이 나에게로 오셔서 내가 저분을 만나네.’ 그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을 것입니다. ‘저분이라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아실 텐데 지금 내게로 오시는구나. 아, 큰일났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이제는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나를 혼내고 벌을 주러 오시는 것이 틀림없다. 그래, 나는 죄인이고 민족의 배신자니까 저분이 오셔서 나를 꾸짖고 혼내신다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정말 나쁜 놈이고 악한 죄인이니까 당연하다.’
그는 예수님이 오고 계시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지만 눈을 들어 쳐다보지 못하고, 아마 안 보는 척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드디어 그분이 자기가 있는 세관까지 오십니다. ‘다른 데로 가시겠지.’ 했는데 자기에게로 오시는 겁니다. 그래서 레위는 고개를 숙인 채 떨면서 그의 말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마도 ‘야, 이 나쁜 놈아, 민족의 반역자야, 당장 이리로 나와 무릎을 꿇지 못할까!’라는 불호령이 떨어지기를 떨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딱 한 마디만 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이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입니다. 너무나 놀라운 사건인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어떤 말투로 말씀하셨을까요? 비꼬는 투로 ‘너 같은 죄인이 감히 나를 따를 수나 있겠니?’라고 하셨을까요? 아니면 화내면서 큰 소리로 정죄하며 ‘야, 너, 그따위 삶을 청산하지 않으면 나한테 죽는다.’라고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다른 어떤 말도 안 하시고, 단 한마디만 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단호하면서도 부드럽게 “나를 따르라.”라고 하십니다. 단순하면서도 권세 있는 말씀, 그러면서도 사랑이 가득한 음성으로 레위를 부르신 것입니다.
“나를 따르라”라는 이 한마디 말에는 죄 용서가 담겨있습니다. 더 이상 과거의 죄를 묻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죄를 지었는데 아무 죄도 묻지 않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레위가 그동안 겪은 그 마음의 고통과 갈등, 그리고 스스로 정말 회개하고 싶어 하는 그 마음, 그런데 스스로 할 수 없었던 그의 그러한 상황을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 말은 이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결단을 촉구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내가 너를 정죄하지는 않지만 이제는 새롭게 살아야 한다.’라고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레위는 그것을 깨닫고 눈물을 흘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동안 자기가 그토록 고민하고 괴로워했어도 떠나지 못하고 머물러 있던 세리의 자리였는데, 예수님께서 부르시며 도와주심으로 드디어 이 자리를 떠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텐데, 왜 예수님은 하필 이처럼 악한 민족의 반역자인 세리를 부르신 겁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레위를 세리라는 직업으로 보신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한 영혼으로 보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악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야, 왜 저런 악한 사람을 하나님이 안 데려가시나?’라고 생각할 때가 있을 겁니다. 또 보면 악한 사람들은 장수합니다. 건강합니다. 돈도 잘 벌고 성공하고 잘 됩니다. ‘저 악한 사람을 왜 하나님이 저렇게 그냥 두시나? 신은 없다. 저런 사람이 잘되는 것을 보니 신은 없다.’라는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보실 때 어떤 직업이나 악함 같은 것으로 보시는 게 아니라, 잃어버린 한 영혼으로 보십니다. 잃어버린 한 영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까? 내가 정말 잘나서, 너무 착한 사람이라서 그렇게 된 겁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일만 번의 악한 죄를 지은 사람이나 한 번 죄를 지은 사람이 똑같이 죄인입니다. 물론 조금 더하고 덜한 건 있겠지만 죄인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죄가 하나만 있어도 죄가 없는 하나님 나라,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천국은 죄가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죄가 다섯 개밖에 없으니까, 저기 10만 개의 죄를 지은 사람과 나는 달라. 난 천국에 갈 수 있고 저 사람은 못 가.’라는 식이 절대 아닙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라고 말씀합니다. 의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즉, 죄를 안 지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 용서를 받아들인 사람들, 그 은혜를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한 영혼, 한 영혼으로 우리를 봐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구원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레위가 세리라는 것을 보신 것도 아니고, 그가 부자라는 것을 보신 것도 아닙니다. ‘얘가 돈이 많으니까 이제 앞으로 내 사역에 큰 도움이 되겠다. 얘가 세리라는 약점을 잡아서 얘한테 돈을 뜯어내며 내가 사역을 잘해야 되겠다.’라고 하신 게 당연히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의 텅 빈 마음을 보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필요한 그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레위의 마음에 있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과 영적 갈증, 외로움, 갈등, 그리고 그러한 것들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 하는 그의 열망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레위 혼자서는 그렇게 하지 못할 것도 아시고 직접 오셔서 죄인의 삶을 청산하고 떠나도록 도와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민을 아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다 보고 계십니다. 죄악 된 삶, 공허한 삶, 의미 없는 삶을 살고 있을 때, 정말로 새로운 삶을 갈망하며 상한 심령으로 주님을 찾을 때 우리에게 직접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이러한 주님의 초청에는 아무 차별이 없습니다. 부자든 가난하든, 남자든 여자든, 어른이든 아이든, 백인이든 흑인이든 아시안이든 히스패닉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어느 나라 사람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변화되려는 갈급한 마음, 상한 심령,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은 그러한 마음으로 애통하며 주님을 찾는 사람을 결코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거기 세리들이 많았을 텐데 왜 레위만 부르십니까? 물론 나중에 누가복음 19장으로 가면 여리고의 세리장이었던 삭개오도 부르십니다. 그는 죄인 중에도 정말 죄인이었습니다. 세리장이니까 얼마나 죄를 많이 지었겠습니까? 죄를 많이 지을수록 높이 올라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도 부르셨습니다.
이때 세리들이 이 두 사람 외에도 많이 있었을 텐데 왜 이 두 사람을 부르신 것만 기록되어 있느냐는 겁니다. 세리들은 많았지만 무조건 세리라고 다 부르신 게 아니라, 그 가운데 정말 텅 빈 마음, 갈급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면서 찾는 사람들, 애통해하며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찾는 그런 사람들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세리 외에도 그런 죄인들이 많이 나오는데, 요한복음에 보면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나옵니다. 사마리아는 유대인들과 원수지간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도 남자가 아니고 여자가 우물에 물을 길으러 12시 정오에 나왔는데, 지나가시다가 일부러 거기를 들르십니다. 그 여자를 만나러 그러신 겁니다.
그런데 그 여자와 대화하다가 자꾸 피하니까 남편을 불러오라고 그랬더니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네 말이 맞다. 이전에 남편이 다섯 명 있었는데, 지금 사는 남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까 남편이 없다고 하는 말이 맞다.”라고 하십니다. 그랬더니 여인이 정말 깜짝 놀랍니다(요즘 말로 ‘깜놀’합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자체가 놀랍습니다. 왜냐하면 ‘야, 너는 왜 이렇게 남자가 많으냐?’라고 하실 수 있었습니다.
요즘도 결혼을 다섯 번 했다가 다 이혼하고 지금 여섯 번째로 누군가와 동거하고 있다면 그게 정상입니까? 요즘도 정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옛날인 2천 년 전에 남편이 다섯 명이 있었고 지금 사는 남자는 남편이 아닌 것은 정상적인 삶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너는 도대체 왜 그렇게 됐냐? 인생이 왜 망가졌냐? 너의 문제는 뭐냐?’ 하시면서 막 파고들어 파헤치질 않으시고, 또 ‘야, 그 다섯 명의 명단을 가져와. 지금 사는 남자는 누구야? 빨리 알려줘. 내가 가서 정죄해야지.’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또 요한복음 7장 마지막 부분에서 8장 앞부분에 보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그때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그랬더니 다 물러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하셨습니다.
그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이 여자에게 해줄 말이 얼마나 많습니까? 내가 예수님이라면 해줄 말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휴, 어쩌다 이 꼴이 됐냐? 야, 너, 그러다 잡히면 죽는 걸 몰라서 지금 이 짓을 해?’라고 하며 야단치시고 “가서 다시는 그러면 안 돼.”라고 할 수도 있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아무 말이 없으십니다. 그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얼마나 심플하면서도 권위 있는 말씀입니까? 만 마디 말보다 더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런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주님은 이렇게 상한 심령을 만져 주십니다. 마구 정죄하고 파헤치고 죄가 어떻다고 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의 갈등하는 마음을 아시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가라고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변화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말씀을 통해서 변화시키십니다. 하나님이 변화시키지 못하실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지 못하실 죄는 없습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죄를 정해서 ‘이건 엄청나게 큰 죄니까 하나님도 용서하시지 못할 죄이고, 나는 작은 죄를 지었으니까 이건 얼마든지 용서받을 수 있는 죄다.’라고 판단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작은 죄든 큰 죄든, 용서하지 못하실 죄가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은혜와 자비의 주님이십니다.
2. 부르심에 대한 레위의 반응 (28~29절)
1) 잘못된 길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레위
그래서 레위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28절)
굉장한 의미가 여기 담겨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부르시자, 레위는 자기가 있던 자리로부터 즉시 일어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즉, 세리의 직업을 버렸다는 겁니다. 세관을 버리고, 자기가 하던 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로 들어섰다는 겁니다.
오랫동안 일해오던 세관의 자리, 돈이 되는 자리에서 단호하게 일어나 이제는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너무나 익숙한 세리로서의 업무를 당장 중단하고 마침내 거기에서 일어나는 결단을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제가 파트타임으로 하겠습니다.’라고 하며 세리를 하면서 예수님이 필요하실 때 가서 제자로 도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사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돈을 버리고 간 겁니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지금 그가 돈을 많이 쌓아 놓았기 때문에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하며 따라간 게 아닙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이분을 따르는 게 좋다는 걸 확신하고 간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기 원한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옛 삶의 방식을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 직업을 다 버리고 전부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레위가 버린 것은 사실 세리라는 직업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죄악 된 삶이었습니다. 세리라는 그 자리가 자기를 자꾸 죄의 길로 몰아가기 때문에 그 세리라는 자리를 버린 것이지, 그 직업을 버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나를 막고 있는 것들을 떨쳐버리고 일어서서 가는 것,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레위에게는 세리라는 직업이 바로 그렇게 하나님께 가는 것을 막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간 겁니다.
여러분, 내 삶에서도 나를 죄악 된 길로 유혹하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는 것으로 무엇이 있습니까? 막 죄를 짓는 길로 가게 하는 것은 많지 않더라도, 내가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나아가며 온전히 하나님을 따르지 못하도록 막는 것들은 우리 삶에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로 뭐가 있습니까? 세상의 즐거움입니까? 운동입니까? 취미생활입니까? 친구입니까? 돈입니까? 명예입니까? 드라마, 영화, 유튜브 등 엔터테인먼트입니까? 아니면 가족이나 자녀입니까?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는 것을 막는 것들은 의외로 나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세리라는 것은 나쁜 것이었지만, 우리를 막는 것은 의외로 나쁜 것이 아닐 수가 있습니다. 아니, 좋은 것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지, 심지어 좋아 보이는 것이라도,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을 막고 방해하는 것이라면 과감히 중단하고 새로운 삶을 소망하며 일어서야만 합니다. 이 모든 것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그것들을 떠나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하나님께로 가는 것을 막는 것, 주님을 더 온전히 따르는 것을 막는 것들을 버리는 것이 먼저이고,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가던 길을 멈추었다면, 잘못된 것을 버렸다면, 이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버리고 따르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두 번째 단계입니다. 버린 것까지는 좋은데,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따라가서는 안 되겠습니다. 레위는 세리라는 직업을 버리고 다른 직업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는 것을 막는 것은 의외로 좋은 것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좋은 것, Good, 그런데 그게 Best는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Best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Best입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크리스천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그걸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내 인생 최고의 것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리스도인, 신앙인입니다.
그런데 좋은 것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사실 우리 삶에 좋은 게 얼마나 많습니까? 절대 나쁜 게 아닙니다. 좋은 것들이 우리 인생에 굉장히 많습니다. 재미있고, 해가 되지 않고, 좋고, 유익합니다. 그런데 베스트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것이 좋은 것인가? 그것을 우리가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 좋은 게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가? 그것이 베스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Good(좋은 것)에 머물 때가 너무 많습니다. Best를 하지 않습니다. 좋은 것에 머물다 보니까 베스트를 추구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게 얼마나 안타까운 인생입니까? 평생 좋은 것만 하다가 최고의 것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난다면 그 얼마나 안타까운 인생입니까?
많은 사람이 자신의 잘못된 삶을 깨닫고 회개하며 주님께 돌아옵니다. 그러나 일시적인 결단에 그치고 말아서, 다시 원래의 잘못된 길로 돌아가거나, 그리로는 안 가더라도 다른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전의 잘못된 삶의 방식을 버렸다면 이제는 예수님을 전심으로 따라가야 하는데, 다른 데로 가는 겁니다.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참 감사한 것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전혀 교회를 안 다니다가 미국에 와서 우리와 만나, 목장에 나가고 교회에 왔다가 또 <생명의 삶> 공부를 통해 복음을 듣고 결단하여 ‘내가 예수님을 믿겠습니다.’ 하고서 세례받는 분이 계속해서 나온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뿐 아니라 여기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다른 데로 이사를 갈 경우 꼭 기억하셔야 할 것은, 내가 따르는 대상은 콜럼버스한인장로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따라가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겁니다. 물론 교회는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만 예수님의 몸이 아니라, 전 세계 어느 교회든지 예수님을 주로 모시는 교회는 다 예수님의 몸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데로 이사 갔을 때 ‘스타일이 안 맞네. 뭐가 좀 다르네.’ 그러면서 교회를 안 나가면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계속하는 것은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지, 우리 교회와 동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걸 꼭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데도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할 때가 많은데 왜 그렇습니까? 아주 단순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인으로서, 왕으로서 내 삶의 보좌에 앉으셔서 나를 다스리셔야 하는데, 아직도 내가 내 삶의 주인 노릇을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다른 데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럼 이제 교회를 정해야 합니다. 누가 정합니까? 내가 정합니다. 과연 주님께서 나를 어느 교회로 인도하실까, 어디로 가야 내가 주님이 기뻐하실 삶을 잘살 수 있고 잘 섬길 수 있을까를 찾기보다는, 어디가 나한테 유리한가를 먼저 찾습니다. 그럼 누가 주인인 겁니까? 내가 주인인 겁니다.
직장이나 사업을 선택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선택하지만, 결국 누가 선택합니까? 하나님이 정말 무엇을 원하실까를 생각하면서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유리한 것을 찾는다면, 결국 자기가 주인인 겁니다.
교회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역을 할까, 저 사역을 할까, 또 하다가 그만두는 것을 누가 하라고 했고 누가 그만하라고 했습니까? 다 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야, 이것 좀 해라.’ 하시면 ‘예, 알겠습니다.’ 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이제 그건 그만 해라.’ 하시면 ‘알겠습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보통 하나님이 그만하라고 하실 때는 ‘그것은 이제 그만하고 다른 것을 해라.’라는 말씀인데, 그것도 누가 결정합니까?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게 아니라 내가 결정합니다. 내가 좋으면 하고, 내가 싫으면 안 합니다. 교회 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결정합니까? 내가 오고 싶으면 오고, 내가 오기 싫으면 안 오고, 내가 결정하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주인인 삶이 되는 겁니다. 아무리 예수님에게 ‘주여, 주여’ 해도, 진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게 아니라 내가 주인인 삶을 사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완전한 존재입니까? 나는 너무나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실수도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불완전한 내가 내 삶을 다스리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니까 넘어지고 실패하며 삶이 꼬이고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주님께 맡기고, 내 뜻이나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 그분의 뜻대로, 그분의 방향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럼 주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어떨 때는 상황을 통해서, 사람을 통해서, 설교나 목장 나눔 등을 통해서 알려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알려 주시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먼저 기도하면서 생각을 주시는 방향으로 잘 나아가면 됩니다. 내 맘대로 하지 말라고 해서 무조건 ‘주여, 주시옵소서.’ 하면 항상 뭔가 영감이 떨어지는 게 아닙니다. 어쩔 때는 그럴 수 있지만, 항상 그런 건 아닙니다. 오히려 안 그럴 때가 훨씬 많습니다. 그럴 땐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확신을 주시는 방향으로 가면 됩니다.
혹시라도 내가 기도하고 했지만 뭔가 잘못했다고 느껴져도, 거기서부터 인생을 다시 써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먼저 주님께 맡기고 기도하며 잘 결정하면서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을 위해 큰 잔치를 벌이는 레위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29절)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이전과는 다른 어떤 변화된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지 않을 때와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면 그것도 문제입니다. 뭔가 달라져야 정상입니다. 소속이 완전히 바뀌었는데, 신분이 바뀌었는데 어떻게 똑같을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 직장을 옮기는 경우 내가 이 직장에서 저 직장으로 옮겼습니다. 그러면 어느 회사의 룰을 따라야 합니까? 당연히 새 회사의 룰을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새 직장에 가서도 ‘이전 회사의 방침은 그게 아닙니다.’ 하고 계속 옛날 것만 주장하면 어떻게 됩니까? 문제가 생깁니다. 그건 말이 안 되는 겁니다. 새 직장에 왔으면 그곳 룰을 따라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다고 하는 것은 그와는 비교도 안 되는 것입니다. 완전히 신분이 바뀐 것인데, 세상에서 하나님 소속으로 바뀐 것인데,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분들이 우리 믿는 사람들의 잘못된 모습을 보고 실망해서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삶에서 그런 경우가 꽤 있는데, ‘아니, 저 사람이 저 교회의 장로야? 저 교회의 집사야? 권사야? 아유, 그럼 난 저 교회에 나가지 말아야지. 절대 저기는 피해야지.’ 이렇게 된다면 얼마나 큰일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표시로서 레위는 주님을 위해 큰 잔치를 벌이고, 다른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을 초대합니다. 그러니까 ‘어? 저 사람이 저 교회에 나가? 그럼 나도 나가고 싶네.’ 이렇게 되어야 하는 것인데, 바로 그것이 레위가 한 일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자기를 따르라고 하셨다고 해서 레위가 이러한 잔치를 벌일 의무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와 같은 참혹한 죄인을 용서하시고 불러주신 예수님께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 들어서 잔치를 베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큰 잔치를 열려면 뭐가 필요합니까? 돈이 필요합니다. 돈이 듭니다. 게다가 자기 집도 오픈해야 합니다. 아마 이전에 자기 집에서 이처럼 흥겨운 잔치가 열린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자기 집에 온 것도 처음일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아는 레위는 주님을 위해 아낌없이 잔치를 연 것입니다.
이 잔치에 세리와 죄인들이 많이 왔는데, ‘죄인’이라는 표현은 예수님 당시 1세기에 율법을 어기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서 회당 출입도 금지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죄인이라고 하면 단지 어떤 특정한 사람들의 의견에 그들의 삶이 죄인이라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다 알 정도로 형편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비록 이것을 잘 아는 레위였지만, 그는 비난을 무릅쓰고 잔치를 베풀어서 예수님께 감사드리고 또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내가 이분을 믿었습니다. 이분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자기와 같은 민족의 배신자이며 형편없는 죄인을 받아주신 예수님을 다른 죄인들과 자기 같은 세리들도 만나길 소망했던 것입니다. ‘저 사람들도 우리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데...’ 이 마음으로 초청한 겁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체험한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있어서 아까운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데 있어서 아까움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나를 용서해 주시고 사랑하시는 주님, 나를 구원해 주시고 영생으로 옮기신 주님, 바로 이 하나님께 대해 너무나 감사하고 그 은혜와 사랑이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주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것이 우리가 피곤하고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라도 함께 모여 주님을 예배하는 이유입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너무 크고 감사해서 예배하고 봉사하고 시간과 물질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지 못하면 결코 주님께 드릴 수 없고 드리기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자기의 모든 것, 심지어 생명까지도 드리길 원하는 것입니다.
사람끼리도 서로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씁니다. 남녀가 서로 사랑하면 사랑하는 자기 애인을 위해서 씁니다. 시간도 돈도 에너지도 다 씁니다. 또 내가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서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씁니다. 그런데 사랑한다고 하면서 ‘아, 아까워. 아, 100불은 너무 비싸. 10불짜리 해야지.’ 이러면 사랑입니까?
여러분, 혹시 누군가와 사귀는 청년들은 잘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상대방을 보라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을 보라는 겁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서 내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쓸 때 ‘아, 좀 아까운데.’라는 생각이 들면 자기를 빨리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하나님께 드려도 아깝지 않고, 하나님께 드릴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친구들을 보면서 ‘아, 저들도 내가 만난 이 주님을 만나면 삶이 바뀔 텐데’ 하는 확신을 가지고 사랑으로 그들을 주님께 초청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지 않는 분들을 우리가 목장으로 또 교회로 이끌려고 하는 그 이유입니다. 이런 자세가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예배이며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입니다.
3.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비난 (30~32절)
예수님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 보길 원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하시는 것은 쇼를 하는 게 아닙니다. 가짜가 아닙니다. 그 당시 식사를 함께한다는 것은 같이 먹는 사람들이 같은 하나의 집단이라는 것을 나타내주었습니다. 이처럼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는 예수님을 향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비난을 퍼붓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들이 예수님이 아닌 그의 제자들을 비방했다는 사실입니다.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0절)
이것은 무엿을 말해줍니까? 장차 우리를 포함해서 주님의 몸 된 교회, 즉 주님의 제자들이 주의 뜻을 감당할 때 세상으로부터 이러한 공격과 비난을 들을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들의 비방에 대해서 예수님은 직접 대답하십니다.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31-32절)
예수님은 여기에서 두 종류의 사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자와 병든 자, 의인과 죄인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기들이 건강한 자, 또 의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죄인들을 비방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이야말로 회개가 필요한 죄인이며, 영적으로 병들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굉장히 의롭고 세리와 죄인들은 형편없는 인간이라고 정죄하지만, 정작 자기들이야말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고 하신 이유는, 이 세상에는 의인이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왕, 다윗 같은 사람, 위대한 선지자들도 아닙니다. 의인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신에게 병이 있는 것을 아는 사람,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사람, 그래서 간절히 주님을 찾는 사람에게 오십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애통하며 울부짖는 자에게 찾아와 주십니다.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은 다 그렇게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상한 마음, 가난한 심령을 가진 자로서 간절히 주님을 찾는 우리가 될 때, 놀라운 주님의 음성이 들리게 됩니다.
우리의 눈을 만드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귀를 만드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우리 삶에서 충만하게 체험하며, 또 이 은혜와 사랑을 우리 주변에서 주님을 모르는 분들에게 전해주는 우리 각자와 온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