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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8일 주일예배
✦ 예수와의 만남 7 ✦
“철저히 버려진 인생을 찾아오신 주님”
(누가복음 8장 26~10절)
[들어가는 말]
한국에는 귀신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처녀 귀신, 달걀귀신, 우물귀신, 저승사자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여러분은 귀신의 존재를 믿으십니까? 깜깜한 데 들어가면 갑자기 뭐가 확 나올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으십니까? 결론부터 말하면, 귀신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성경에서 분명히 귀신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도 여러 차례 귀신을 쫓아내신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래전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유명한 이단이 있는데, 거기서는 사람이 죽어서 귀신이 된다고 가르칩니다. 안 믿는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했더니, 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다 귀신에게 “넌 누구냐?” 했더니 “나는 얘의 할아버지 영이다.”라고 얘기했다는 겁니다. 아니, 귀신의 말을 듣고 ‘아,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되는구나.’라고 알았다니까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에 거짓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할 것은, 안 믿고 죽은 사람이나 특히 원한을 품고 죽은 사람이 귀신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미디어에서 사람이 원한을 품고 죽고서 영혼이 떠돌아다니는 것을 많이 봐서 그런 줄 아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가르쳐주는 귀신은 한마디로 ‘사탄의 졸개들’입니다. 악한 사력의 최고 우두머리가 사탄 또는 마귀(Devil)라고 할 수 있고 그 졸개들이 바로 귀신들인데, 이들은 죽은 사람의 영혼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사탄의 영향 아래 있는 존재입니다.
귀신의 존재에 대해 사람들 사이에는 크게 두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첫째는 ‘귀신? 그런 게 어디 있냐? 그건 겁쟁이들이 만들어낸 상상에 불과하다.’라는 식으로 귀신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다른 의견은 ‘귀신은 분명히 있다. 너무 강한 존재다. 나는 너무 무섭다. 아이고, 무서워.’라고 하며 벌벌 떠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이 두 가지 극단 사이 어딘가에 존재합니다.
우리 교회 도서실에도 있는 유명한 현대 고전인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 책을 쓴 씨 에스 루이스(C. S. Lewis)가 여러 책을 썼는데, 그중 하나가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라는 책입니다. 스크루테이프라는 것은 무슨 카세트테이프(?)가 아니라 악한 영의 이름인데, 스크루테이프가 자기 조카에게 사람들을 어떻게 유혹해서 넘어뜨리면 된다는 것을 전수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상상력을 동원해서 쓴 겁니다.
거기에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우리를 전혀 믿지 않고, 우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우리의 밥이다. 둘째로, 또 다른 부류는 우리를 너무 무서워하고 벌벌 떤다. 이들은 더욱더 우리의 밥이다.” 이런 식으로 가르치는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사실 이 둘 중 어느 것에도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귀신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성경에 많이 등장합니다. 예수님도 수없이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에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는 말씀처럼, 귀신들은 영적 존재로서 한 명이라도 더 인간들을 망가뜨리고 괴롭히기 위해 노력하는 악한 존재입니다. 심지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하는데,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의 구원을 취소시킬 수가 없으니까, 이 땅에서 풍성한 삶을 살지 못하게 하려고 얼마나 공격하고 방해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할 것은, 우리가 귀신을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승리하신 예수님 이름으로 우리도 승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약하지만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으로 우리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캄캄한 데 가서 ‘아, 귀신이 오는 것 아니야?’ 하며 무서운 마음이 혹시라도 드시면 그냥 간단히 ‘예수!’ 해보십시오. 평안이 옵니다. 놀랍습니다.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유럽에서 그 유명한 노르망디 상륙 작전으로 전세가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그래서 그전까지 수세에 있던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에 승리를 확정지은 거나 마찬가지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연합군이 아무리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더라도 결국은 승리하는 전쟁을 싸우는 것이고, 또 나치 독일군이 아무리 이기는 것 같이 보여도 더 이상 이길 수 없고 전세를 바꿀 수 없으며 패배가 확정된 전쟁, 연합군에게는 승리가 확정된 전쟁이 되었습니다.
지금 이 땅에서 귀신이 아무리 날뛰며 강한 것처럼 보여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강함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우리에게는 승리가 주어졌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괴로울 때도 있고 힘들 때도 있지만, 결국 우리는 승리하는 전쟁을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악한 영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도록 경계하고 깨어 기도하며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함으로 훈련해야 합니다. 그러면 능히 이길 수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 군대 귀신 들린 자와의 만남 (26~30절)
“그들이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26절)
예수님과 제자들은 갈릴리 지역에서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 그 반대편인 거라사인의 지방으로 건너오는데, 이 지역이 어디였느냐에 대해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가다라’라고 하고,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거라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거라사라고 하는 곳이 두 군데였습니다. 그래서 그곳이 정확히 어느 곳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곳이 어디였는지 관계없이 이 지역이 ‘데가볼리’였다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이 전혀 다른 문화권이었습니다. 갈릴리 서쪽은 유대인 중에도 가장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했던 갈릴리 사람들이 살았고, 갈릴리 동쪽은 데가볼리 지방으로서 옛날부터 이방인 지역이었고 또 그리스-로마 문화가 지배하는 이방인 지역이었습니다.
데가볼리에서 ‘데가’라는 말은 Deca, 즉 10을 뜻하는 말이고, ‘볼리’라는 말은 Polis, 즉 그리스 도시국가인 폴리스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미국에도 인디애나폴리스가 있고 미네아폴리스가 있는데, ‘폴리스’가 도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데가볼리는 10개의 폴리스(도시국가)라는 지역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지리적으로 10개의 폴리스(도시국가)가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헬라)의 폴리스라는 개념은 유명한 철학자 플라톤이 말한 도시국가 개념으로서 각각 독립된 도시국가인데,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각 폴리스마다 자기들의 필요에 의해서 그리스와 로마의 수많은 신들을 섬기는 공동체가 바로 폴리스(도시국가)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이 데가볼리에는 수많은 그리스와 로마 신들이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 이곳은 그리스 신화와 로마 신화에 나오는 여러 신들을 섬기던 이방인 지역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여기는 이방인의 땅에 예수님이 일부러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27절)
이제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에서 내리자마자 귀신 들린 사람 하나가 나아옵니다. 이 사람은 악한 귀신에 들린 아주 부정한 사람입니다. 또 무덤과 같이 아주 부정한 죽음의 장소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 시체를 만진 사람은 부정하게 되는데, 이곳은 무덤이니까 전부 시체만 있는 곳입니다. 또 그는 이곳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무덤을 파고 시체를 만지며 지내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이 도착하신 이곳은 번듯한 도시국가가 아니라 변두리의 무덤 있는 곳에 도착하셨는데, 그곳은 사람도 장소도 다 부정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이곳에 오셨습니다. 그것도 갈릴리 호수를 건너올 때 큰 폭풍이 불었고, 그렇게 위험한 폭풍을 뚫고서 오셨다는 것입니다(22-25).
지금 이 사람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아주 처참한 인생입니다. 최악입니다. 이 사람이 언제 어떻게 귀신에 들렸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이 도시 출신이었습니다(27). 그러니까 이 도시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던 사람인데, 언제부턴가 귀신에 들려서 이렇게 되었고, 게다가 이러한 상태가 오래되었습니다.
그는 옷도 입지 않고 사는데, 집에서 살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없는, 짐승과도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철저히 버려진 인생이고, 완전한 실패자(loser)이며, 사회로부터 따돌림받고 격리된 사람입니다. 그러면서도 초인간적인 힘을 지니고 있어서 쇠사슬과 고랑도 끊어 버리고 도망을 가는 사람입니다.
“28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하니 29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그 사람을 붙잡으므로 그를 쇠사슬과 고랑에 매어 지켰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28-29절)
여기를 보면, 예수님이 이미 더러운 귀신에게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는데도 아직 귀신이 안 나왔다고 하니, 예수님의 능력이 좀 약한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런 말이 아니라 예수님이 귀신을 이 사람에게서 나오게 하는 것이 자신의 뜻이라는 것을 이미 알려주셨다는 것입니다. 아직 귀신을 쫓아내는 말을 하신 게 아닙니다.
이 사건이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다 기록되어 있는데, 마가복음에 보면 이 사람은 돌로 자기 몸을 막 긁으며 자해하는 사람입니다. 게다가 밤낮으로 무덤과 언덕에서 소리를 지르는 사람인데, 앉아서 자기 몸을 상하면서 피가 줄줄 흐르고 우우 외치면 사람들이 멀리서만 봐도 얼마나 공포스럽겠습니까?
혹시 이런 사람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마 거의 없으실 겁니다. 이 사람의 모습이 어땠을지를 상상해 보십시오. 자기가 돌로 몸을 긁으니까 온몸에 피가 흐릅니다. 또 목욕을 안 해서 온몸에 땟국물이 흐릅니다. 머리는 온통 헝클어져 있습니다. 입에는 흰 거품을 물고 짐승처럼 울어댑니다. 눈은 제멋대로 돌아가고, 살기가 있는 무서운 눈빛입니다. 독기가 서린 모습입니다.
여기 싱글 자매님들 중 이런 사람과 사귀거나 결혼하고 싶으신 분? 딸을 가지신 부모님들 중 이런 남자와 내 딸이 사귀도록 허락하실 분? 아무도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무시무시하고 제정신이 아닌 사람과는 전혀 엮이고 싶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이곳에 온 제자들은 아마 이렇게 느꼈을 겁니다. ‘이거 완전히 잘못 왔구나. 선생님이 장소를 잘못 택하신 게 아닐까?’ 이렇게 의심했을 것이고, 그래서 되도록 빨리 그곳을 떠나고 싶었을 겁니다. 한마디로 말해, 이 사람은 스스로 이런 삶을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가 없어서 괴롭게 소리를 지르며 비정상적이고 비참하게 살고 있습니다. 정말 죽지 못해 사는 인생입니다.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이르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30절)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이때 제자들은 너무 두려워 벌벌 떨면서 빨리 갔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예수님은 태연하게 얼굴 표정 하나 안 바뀌시면서 “네 이름이 뭐냐?”라고 하십니다. 지금 제자들이 얼마나 무섭고 떨리고 답답했겠습니까? ‘빨리 가야 되는데 이름은 왜 물어보시나?’
이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이름이 뭐냐고 물으시니까, 그는 군대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군대라는 말은 로마군의 ‘레기온’을 말합니다. 이 부대는 5천에서 6천 명 정도의 군인으로 된 조직으로 로마 군대의 핵심을 이루었던 부대입니다. 이 말은, 이 사람이 엄청나게 많은 귀신들에게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네 이름이 뭐냐?” 하시니까 “군대입니다.”라고 하는데, 지금 혼자 대답한 게 아닙니다. 갑자기 5천 개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낮고 굵은 목소리로 “군대입니다”라고 하는 동시에 또 다른 목소리는 높고 가는 톤으로 “군대입니다.”라고 합니다. 이런 게 5천 개가 쫙 나와 보십시오. 완전히 소름끼칩니다. 지금 목소리가 하나만 들려도 너무 놀라서 기절할 텐데, 5천 개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게 상상이 가십니까? 지금 이런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표정 하나 안 변하십니다.
여기서 의아한 점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누구도 피하고 싶은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예수님은 일부러 이곳에 와서 이 사람과 만나셨느냐는 것입니다. 굳이 그렇게 하실 필요가 전혀 없었는데도 왜 이곳에 오셨습니까?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도 아무도 예수님을 비난하거나 뒤에서 욕할 사람은 없습니다. 또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실패하고 새로 뭘 좀 해보려고 이곳에 오신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의 명성은 날로 높아가고, 사람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왜 이런 곳에 오셔서 이런 사람을 만나십니까? 그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다른 것은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아무도 가까이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오히려 꺼려하는 이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 잃어버린 한 영혼 때문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불쌍한 영혼이 있다는 것을 아시고 일부러 이곳에 오셨습니다.
지금 수만 명의 사람들이 그분의 말씀을 듣고 열광하며 병 고침을 받으려고 왔지만, 이 귀신 들린 사람은 아무리 자기가 원해도 결코 주님께로 올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데려올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이 철저히 버려진 인생을 위해서 주님이 친히 일부러 찾아오셨습니다. 그것도 그 위험한 폭풍을 뚫고 이 한 사람을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예수님은 이처럼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서 사셨습니다. 특히 아무 가치 없고, 쓸모없고, 망가진 인생들, 아주 흉악하고 못된 죄인들을 돌보셨습니다.
오래전에 제가 아주 감명 깊게 읽고 적어 놓은 책의 문구가 있는데, 목사이자 리더십 전문가인 존 맥스웰(John Maxwell)의 초기 저서 <당신 주위에 있는 사람을 키워라>입니다. 거기에서 제가 아주 감명 깊게 읽은 문구를 적어놓았습니다.
“관심과 헌신은 다르다. 당신이 어떤 일을 하는데 관심이 있다면 당신이 편리한 때에만 그 일을 할 것이다. 당신이 어떤 일에 헌신하고 있다면, 그 일이 당신에게 편리하지 않을 때라도 이유를 대지 않고 그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아주 멋진 말이 아닙니까? 우리가 관심 있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관심이 있어도 내가 좀 불편하거나 다른 일이 있거나 하면 하지 않아도 그만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헌신되어 있다면 불편하고 다른 일이 생겨도 그 일을 하는 것, 그것이 헌신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이런 사람을 누가 만나고 싶어 합니까? 이런 사람을 왜 찾아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왜냐하면 영혼 구원에 헌신되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데 헌신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혹시 우리 주변에 세상에 떠밀리고 이리저리 치여서 주님께 나오고 싶어도 못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면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마음으로는 한번 믿어보고 싶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잘되지 않고, 안타까움은 있지만 늘 불안해하고 염려하며 소망 없이 사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마음을 주님은 잘 아십니다. 그 사정을 다 아시고 직접 찾아와주십니다. 치유해 주기를 원하십니다.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여 어쩔 줄을 모르면서 괴로워할 때, 따뜻하게 위로하시며 도와주시는 분, 바로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여기 우리와 함께 살아계시지 않고 저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대신 이 땅에 두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 대신 그 일을 하라고 맡겨주신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더 이상 안 계시지만, 교회를 통해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계속 이어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건물이 아니라 바로 믿는 우리들입니다. 믿는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바로 이 일을 지금도 계속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 귀신 들린 사람처럼 이전에 방황하다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똑같은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다가가기까지 사람들은 결코 우리에게 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사실 어디를 가더라도 교회를 찾아갑니다. 우리가 여기서 살다가 이사를 가면 또 교회를 찾아 나가지 않습니까? 저라도 당연히 그렇게 할 것입니다. 제가 다른 데 여행을 갔을 때 주일이 끼면 거기 있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립니다. 또 누군가 어디로 이사를 가면 교회를 찾아 새로 거기 교인이 되고 계속 신앙생활을 이어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제 발로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100만분의 1 정도 어쩌다 한번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나오는 사람도 누군가가 교회에 한번 와 보라고 했거나, ‘우리는 언제든지 오픈돼 있으니까 항상 환영한다.’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오는 것이지, 전혀 말을 안 하는데 오는 사람은 사실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오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도 마태복음 28장에서 소위 ‘대사명’ 또는 ‘지상 대명령’(The Great Commission)을 주시면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제자를 만들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가서 제자 삼아라”라고 하셨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제자 만드는 게 아니라, 가서 데려와서 믿게 하고 데려와서 제자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가만히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초청하는 겁니다. 사실 초청도 가는 겁니다. 가서 ‘와보세요.’라고 하는 겁니다.
저도 사실은 모태신앙, 즉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닌 사람이기 때문에 안 믿는 분들의 심리를 잘 몰랐습니다. 우리가 가정교회를 하면서 제가 많이 배우는데, 한국에서 전혀 교회 다니지 않다가 이곳에 와서 어 예수님을 믿게 된 그런 분들 하고 얘기해 보면 이전에 특히 한국에 있을 때 “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절대 엮이면 안 되는 사람들이다.”라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지금 이 제자들이 이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보는 그런 정도로 혐오하고 절대 가까이 가서는 안 되는 존재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봤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제일 가기 싫은 데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런 분들이 제일 만나기 싫어하는 사람이 목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전도할 때 보통 뭐라고 합니까? 안 믿는 친구에게 “우리 교회 좀 와 봐. 교회가 얼마나 좋은데. 우리 교회에 와서 우리 목사님을 만나봐. 얼마나 좋은 분인데.”라고 합니다. 제일 가기 싫은 곳에 와서 제일 만나기 싫은 사람을 만나라고 하는데 누가 오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교회 모임인데 그냥 밥 먹고 얘기한다고, 한번 와 보라고, 부담 없이 오라고, 아무 때나 오라고 해서 와봤더니 거기가 목장인 겁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목장에 오라고 했더니 진짜 부츠 신고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온 분도 진짜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소는 어디 있어요? 양은 어디 있어요?”라고 물어봤습니다.
그런 목장은 아니지만, 목장 모임에 와서 식사하고 교제하며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때 마음이 열리고, 그러다 보니까 교회에도 한 번 와 보라 할 때 주일에 나오고, 또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생명의 삶> 공부가 있는데 해보시겠어요? 이왕 교회에 다니는데 한번 뭘 믿는지 알아보면 좋죠.” 그랬더니 들어보겠다고 하다가 복음을 듣고 결단해서 “제가 예수님을 믿겠습니다.” 하며 세례받은 분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참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목장으로 초대하는 게 중요한 겁니다. 초대도 우리가 가서 데려오는 겁니다.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이렇게 먼저 다가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주님이 사람들의 영혼을 향해 가지셨던 그 헌신의 마음, 관심 정도가 아니라 헌신의 마음을 우리도 가질 수만 있다면, 우리 삶에 아주 놀라운 역사가 분명히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2. 돼지 떼의 몰사와 사람들의 반응 (31~37절)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31절)
그 앞에 보면 예수님이 폭풍을 뚫고 오실 때 제자들이 뭐라고 했냐 하면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니 순종하는가?” 즉,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귀신들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라고 하며 금방 알아봅니다.
그리고 여기서 예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귀신이 기도도 합니다. 멸망 당하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습니까? 예수님이 자기들을 멸하실 수 있는 분인 줄 아니까 얼마나 간절합니까? 귀신들보다 간절히 기도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기에서 ‘무저갱’이란 곳은 영적 세력, 죽은 자들, 믿지 않은 영들이 가는 곳인데, 최종적으로 사탄이 갇히게 될 감옥입니다(계 20:3). 예수님의 파워는 이처럼 귀신들이 마구 날뛰며 마음대로 활개 치는 곳에서조차 결코 흔들림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 앞에서 귀신들은 벌벌 떨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귀신 앞에서 떨 필요가 없습니다. 이들이 예수님 앞에서 벌벌 떱니다.
“마침 그곳에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락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락하시니” (32절)
귀신들이 마침 거기 있던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귀신이 짐승에게 들어가는지 하는 것은 우리가 여기서 시간 관계상 다 다룰 수는 없지만,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여기서 보여줍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숫자가 안 나오지만, 마가복음에 보면 돼지 떼가 2천 마리나 되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200마리만 있어도 굉장하고 꿀꿀거리며 소리가 대단할 텐데 2천 마리이니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그런데 이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33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 34 치던 자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마을에 알리니” (33-34절)
2천 마리나 되는 돼지 떼가 비탈길을 뛰어 내려가서 절벽에서 떨어져 물에 빠집니다. 이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영화의 한 장면이라면 정말 굉장한 광경입니다. 이처럼 돼지들이 집단으로 몰살하는 광경을 본 돼지 치던 자들이 마을에 가서 모든 일을 보고합니다. 헐레벌떡 뛰어가 정신없이 외쳤을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돼지 떼를 길렀다는 것은 이곳이 확실하게 이방인 지역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유대인들은 돼지를 가까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세 마리가 물에 빠져도 놀랄 텐데, 한꺼번에 2천 마리가 몰사했다면 이것이 얼마나 충격적인 장면이겠습니까?
“35 사람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36 귀신 들렸던 자가 어떻게 구원받았는지를 본 자들이 그들에게 이르매” (35-36절)
여기 보면 이 사람의 호칭이 ‘귀신 들린 자’였다가, 이제는 ‘귀신 나간 사람’, 또 ‘귀신 들렸던 자’가 됩니다. 귀신이 들렸다가 지금은 귀신이 나간 상태입니다. 동네 사람들이 허겁지겁 와보니까, 그 귀신 들렸던 사람이 멀쩡해진 채로 옷도 입고 예수님의 발아래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처음 보는 광경입니다. 그들은 이 사람이 온전하게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니까 너무나 놀라고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반응합니까?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예수께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새” (37절)
그 땅 모든 백성이 두려워하면서 예수님께 떠나달라고 요청합니다. 이 정도 일을 봤으면 ‘아이고, 어서 오셔서 우리에게도 기적을 일으켜 주십시오.’라고 할 것 같은데 그 반대로 “떠나 주십시오.”라고 합니다. 왜 떠나 달라고 합니까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엄청난 힘을 가진 악한 영들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을 본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사람들은 이 귀신 들렸던 사람이 어디에서 사는지를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항상 보초를 서든지 해서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간과 힘과 돈을 들여가면서 그 사람을 통제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은 쇠사슬과 고랑으로 매어놓았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29). 그러면서 이러한 귀신의 세력을 고립시키기도 하고 부분적으로 통제하기도 하면서 귀신과 거기서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던 것입니다.
자기들이 문제를 해결하진 못했지만, 그 문제와 더불어서 사는 방법을 터득하여 익숙해져 있는데, 이제 예수님이 그 문제를 싹 해결해 주시니까 기쁨이 아니라 오히려 불편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혹시 편안하게 살고 있는 우리들을 어쩌지나 않을까? 우리 삶을 방해하지 않을까? 우리를 막 바꾸려고 하는 게 아닌가? 난 이대로가 좋은데 나를 변화시키려 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된 겁니다.
거라사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엄청난 능력이라 할지라도, 자기들이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파워, 자기들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이끄는 파워는 두렵고 꺼려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떠나 주십시오.”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유는, 경제적인 손실에 대한 우려도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종교 생활과도 연결되는데, 거라사 사람들은 그동안 너무나 비참한 삶을 살던 한 인간이 치유 받은 이 놀라운 기적 사건을 직접 자기들의 눈으로 봤습니다. 그러고도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 일을 통해 발생한 경제적 손해를 계산하고 그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기 동네에 있었던 큰 문제를 해결해 주신 예수님께 어떻게 해야 했습니까? 당연히 ‘이 문제를 해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능력을 행하신 예수님에 대해 놀라며 자기들과 이제 함께 해달라고 요청했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 대신에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께 자기들을 떠나달라고 요청합니다.
이 사람들 눈에는 지금 무엇만 보입니까? 돼지 떼를 잃은 것만 보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저런 인간 말종, 저런 쓰레기는 진작 죽었어야 했는데 괜히 살려서 아까 우리 돼지만 죽었잖아.’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지금 이 사람이 구원받았지만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들의 구원에도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돼지만을 원합니다. 그들은 귀신들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보다도 돼지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기도 혹시 돼지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는데, 우리 한국 사람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삼겹살입니다. ‘야, 2천 마리면 삼겹살이 도대체 몇인 분인 거냐? 너무 아깝다.’라고 하십니까? 그런 이유가 당연히 아닙니다. 이 사람들이 왜 돼지를 지키고 싶어 했는가?
지금 여기는 그리스-로마 문화권입니다. 그러니까 제우스를 비롯한 그리스-로마의 수많은 신들에게 바쳐질 제물이 바로 이 돼지들이었습니다. 이 돼지들을 잡아서 신들에게 바쳐야 하는데 지금 바칠 제물이 없어져서 분노하고 있는 겁니다. 제물이 없어지니까 신들에게 제사를 못 드리고, 신들에게 제사를 못 드리면 괜히 신들이 자기들을 해코지할 수도 있고, 그러니까 지금 굉장히 불안하고 불쾌한 겁니다. ‘왜 쓸데없는 일을 벌였느냐?’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지금 이 사람이 구원받은 것은 별로 반갑지 않습니다. 지금 돼지들이 다 없어진 것이 큰일났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도 자기들의 신을 섬기는 게 지금 더 중요한 겁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직접 보고도 그분을 거부하면서 계속 자기들의 헛된 신들만 섬길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요즘도 사람의 가치가 얼마나 많은 돈을 버느냐,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느냐, 얼마나 높은 지위에 올라갔느냐 등으로 대부분 결정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피 값을 지불하고 사신 고귀한 생명이 그보다 훨씬 중요하지 않은 물질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돈 때문에 사람이 죽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돈 때문에 살인합니다. 돈 때문에 매장당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탄의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한 영혼보다 돈이 더 귀합니다.
사탄은 ‘그 많은 돼지를 죽이면서까지 한 영혼을 구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 돼지들이 신들에게 바쳐져야 하는데 저 한 사람 구하자고 이렇게 하는 건 말이 안 된다.’라고 그들의 귀에 속삭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너희들의 신들을 섬겨야 하지 않느냐? 지금 너희 신들을 섬기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제물이 다 없어졌으니 어떻게 하냐?’라고 속삭이면서 그들을 부추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이러한 잘못된 생각과 가치관을 바꿔주길 원하셨습니다. 물론 돼지 2천 마리라면 그 값을 따질 때 엄청나게 비쌌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2천 마리의 돼지, 특히 돼지 그 자체라기보다는 헛된 신들에게 받쳐질 제물보다 불쌍하고 잃어버린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더 중요함을 여기서 보여주십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관심은 사람보다, 한 영혼보다 오직 이런 돼지에게 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히려 2천 명의 사람들을 희생해서라도 한두 마리의 돼지를 살리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돼지가 몇 마리만 죽어도 호들갑을 떨며, 이 세상의 종말이 온 것처럼 떠들어대는 경우가 많습니다. 돼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정말로 중요한가를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 사이에 굉장한 혼동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을 중요하지 않다고 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중요하다고 하는 세상입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도 이런 혼동된 가치관 때문에, 한 영혼보다 이런 돼지에 속한 것들이 더 우대받는 현상이 벌어지지 않습니까?
돈이나 학벌이나 지식이나 세상의 지위가 있으면 교회 내에도 더 목소리를 내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 직분자를 우리도 오늘 선출하게 되지만, 뭔가가 조금 있는 사람이 장로가 되고 안수집사가 되고 권사가 돼야 한다는 생각은 한 영혼보다 돼지가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완전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교회를 평가하는 기준도 교인 수가 얼마냐, 예산이 얼마냐, 건물이 얼마나 크냐, 이런 것을 먼저 따진다면 그것도 역시 잘못된 생각입니다.
돼지를 소유하고 키우는 것이 무조건 다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아닌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거기에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교회들이 이미 교회이기를 포기하고, 크리스천들은 크리스천으로서의 자세를 포기한 채 원래 주신 목적과 사명에 따라 살지 않고 자기들의 욕망을 따라 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것이 이 시대 교회와 크리스천의 위기입니다.
거라사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떠나달라고 한 이유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왜 싫어했습니까? 자기들의 일상생활이 예수님에 의해서 깨졌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중요하게 여기던 것을 예수님 때문에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이 ‘돼지’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한 영혼보다, 주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우리의 ‘돼지’입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잃어버린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 너의 모든 돼지를 다 포기하라.”라고 하신다면, “예, 주님,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혹시 거라사 사람들처럼 예수님께 “이제 떠나주십시오.”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분이십니다. 변화시키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바꾸시며 도전해 들어오십니다. 문제를 살짝 덮어놓고 그저 편안하고 안락하게 사는 태도를 깨버리시고, 문제를 근본부터 해결하길 원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주님의 뜻에 믿음으로 반응하며 나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이 제발 상관하지 말고 떠나주시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3. 치유 후의 변화 (38~39절)
“38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그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39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38-39절)
치유 받은 후에 이 귀신 들렸던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기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서 가족들에게 하나님이 자기에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셨는지 증거하라고 하십니다.
왜 예수님은 이 사람이 자신과 함께 있지 못하게 하시고 집으로 돌려보내십니까? 예수님은 그를 이전에 자신이 속해 있던 사회에 다시 돌아가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는 분명히 이 동네 출신인데, 그동안 귀신에 들려 따돌림당하고 고립되었던 이 사람이 다시 사회에 복귀하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하나님이 자신에게 한 일을 증거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집이란 어떤 곳입니까? 물론 편하게 쉴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곳입니다. 동시에 자신만이 유일하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 곳입니다. 자기 집에서 이 사람 혼자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크리스천들과만 같이 지내고자 하는 유혹을 받습니다. 사실 주 안에서 형제자매들과 참된 교제를 갖는 것은 신앙생활에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만 머물러선 안 됩니다. 오래 믿을수록 주변에 믿는 사람만 있게 되는데, 주님은 세상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삶의 현장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그곳이 직장이든, 사업체이든, 사무실이든, 학교이든, 어떤 친목 단체이든, 아니면 실제로 자기 가정이든, 그리스도인이 없는 곳으로 갈 것을 명령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 때문에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다른 이들에게 선포하길 원하십니다.
[나가는 말]
자기 동네 사람들은 그를 문제아이자 구제 불능인 인간이라고 매도했습니다. 자기들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는 철저히 버려진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보지 않으시고 그를 불쌍한 하나의 잃어버린 영혼으로 보셨습니다. 그리고 일부러 찾아오셔서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헛된 신들에게 바쳐질 수많은 돼지 떼의 희생을 무릅쓰고도 그를 치유하셨습니다. 한 생명일지라도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더 귀중한 것임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심지어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것일지라도, 그것이 결코 인간의 생명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 사람을 한 불쌍한 영혼으로 보신 것뿐만 아니라, 주님의 증인으로 보셨습니다. 이런 말도 있습니다. “한 그루의 나무에 달린 열매의 수는 셀 수 있다. 그러나 한 개의 씨에 담긴 열매의 수는 셀 수가 없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 대해 가지신 관점이었고, 또한 제자들을 향해 가지신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를 보시는 눈이기도 합니다.
이제 치유함을 받은 우리를 향해, 주님은 여기에만 머물지 말고 가서 다른 사람들을 치유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소망의 메시지를 전파하라고 하십니다. 먼저는 이러한 치유의 역사가 우리에게 일어나길 바랍니다. 그리고 치유함을 받은 뒤에는 다른 사람들을 치유하는 데 사용되는 놀라운 역사가 우리 각자의 삶과 가정과 목장과 우리 교회 가운데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