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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www.youtube.com/live/-RBgFwTSHAs?si=IO9n4BgMyafP_qyF&t=119
2024년 7월 14일 주일예배
✦ 예수와의 만남 3 ✦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누가복음 5장 17~26절)
[들어가는 말]
요즘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이 현실화되면서 많은 사람이 사용하며 열광하고 있습니다. 저도 요즘 유명하다는 ChatGPT에게 최근 한국의 인기 검색어가 무엇이었는지 물어봤습니다. 어제(2024년 7월 13일) 현재 ‘김연아, 손흥민, 2024 올림픽, 여름휴가, 삼성전자, 강다니엘, BTS, 부동산 시장, 김민재, 여행지 추천’이 나왔습니다.
제가 궁금해서 1년 전인 2023년 7월 13일에는 무엇이 인기였는지도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기후변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초단기 강수 예측, 2022 카타르 월드컵, 이태원 사고, 토트넘 대 케이리그, 수리남(드라마), 우크라이나, 로스트아크(게임), 스승의 날’이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1년 사이에 인기 검색어가 다 바뀌었습니다. 특히 드라마 같은 것은 몇 달만 지나면 인기 있는 것이 다 바뀝니다. 이처럼 지금 관심이 많은 것도 1년만 지나면 대부분 바뀐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년이 아니라 두세 달만 되어도 다 바뀝니다.
아마 오늘 최대 인기 검색어를 찾으면 대부분 ‘트럼프’일 것입니다. 뉴스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어제 오후 6시가 조금 지난 시간 트럼프 전 대통령이 펜실베이니아(Butler, PA)에서 유세하던 도중 총격이 발생하여 총알이 귀를 뚫고 지나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피도 났고 바로 이동하는 일이 있었는데, 범인은 사살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장면이 영상에 그대로 잡혀서 연설하다가 갑자기 귀를 잡고 단상 아래로 숨는 것이 영상에 그대로 잡혔고, 그 후에 일어나서 팔을 펴며 괜찮다는 표시를 하자 사람들이 막 열광했습니다.
하지만 날아온 총알에 한 명이 맞아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그 총을 쏜 사람도 사살되었는데, 스무 살 청년이었다고 하고 오늘 아침에 보니까 이름까지 다 나왔습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전 대통령이자 또 지금 유력한 대통령 후보인데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한 겁니다. 지지를 하든 반대를 하든 상관없이, 이런 일은 있어서 안 되겠습니다. 어쨌든 지금 미디어에서는 전부 이 사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국 뉴스에도 지금 이 사건이 뉴스로 계속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 달만 지나면 다들 이야기하지 않게 될 겁니다.
이런 것을 보면, 요즘 인기나 관심이라는 것이 얼마 못 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기를 좇아 살거나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살면 불행한 삶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디를 가든지 항상 인기가 많으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인기를 좇아 살지 않으셨습니다. 언제나 인기를 초월해서 사셨고, 오히려 자신을 향해 열광하는 사람들을 피해서 그들이 없는 한적한 곳으로 다니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수많은 병자를 치유하며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을 하셨는데, 그러자 구름 떼처럼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기 위해 왔습니다.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해 왔습니다. 또 병 고침을 받기 위해 왔습니다. 그렇게 어디를 가시든지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1. 예수를 믿는 사람들 (17~20절)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17절)
예수님이 시몬 베드로를 비롯한 첫 제자들을 부르시고 또 나병 환자를 고치신 후에, 하루는 갈릴리의 한 집에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같은 내용을 다루는 다른 복음서들을 보면 이곳이 가버나움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가르치실 때 병을 고치는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과 함께합니다. 바로 그때 몇 사람이 한 중풍 병자를 침상에 메고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옵니다.
“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18-19절)
이때 사람들이 워낙 많이 모여있기 때문에, 예수님 앞까지 헤치고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마가복음 2장 2절을 보면, 사람이 너무 많아서 집안은 물론이고 문밖에도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갈릴리에 있던 보통 집은 그 크기가 최대 5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고고학자들이 갈릴리 지역에서 발굴해 낸 집 중에서 가장 큰 집의 폭이 18 feet(약 5.5m)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때는 수백 명이 한꺼번에 몰려왔기 때문에 집안에 사람들이 가득하고 문밖에서도 사람들로 가득 차서 밀고 당기는 상황입니다.
그곳에 중풍 병자를 메고 왔지만 도저히 예수님 앞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게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이 중풍 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은 거기서 ‘아이고, 안 되겠구나. 도저히 갈 수가 없다. 다음에 하자.’라고 하며 돌아가고 포기한 게 아니라, 뭔가 여기서 다른 방법이 없는지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이게 놀랍습니다. 어떻게 거기서 다른 방법을 생각해냅니까?
다급한 마음으로 고심하던 이들은, 마침내 아주 특이하고 창조적인 방법을 하나 생각해 내는데, 그들이 보니까 지붕 위에는 아무도 없는 겁니다. 그래서 지붕을 뜯어서 그곳을 통해 중풍 병자를 위에서 아래로 달아 내리는 것을 생각해낸 것입니다. 정말 창조적인 아이디어입니다. 만약 이 사람들이 지금 살았으면 이 회사 저 회사에서 앞다투어 모셔 갈 정도로 굉장히 창조적인 인재입니다.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위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고 예수님이 가르치고 계시는 바로 그곳으로 중풍 병자를 침상째 달아 내렸습니다. 당시 유대 지방의 집들은 단층으로 되어 있었는데, 사람이 지붕 위로 걸어도 될 정도로 딱딱했습니다. 하지만 대개 나무 기둥을 놓고 그 위에 나뭇가지와 덤불을 얹어서 진흙으로 바른 것이었습니다. 진흙이 굳으면 딱딱하니까 어느 정도 걸어다닐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맘만 먹으면 구멍을 뚫는 것이 가능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19절을 보면, 이러한 유대의 전통적인 집의 모습이 아니라 기와를 벗겼다는 것을 보면 기와가 깔려있는 납작한 모양의 지붕이라는 점을 누가복음이 알려줍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이렇게 묘사되어 있지 않은데 누가복음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는 성경을 쓰신 분들 중 유일하게 유대인이 아닌 사람입니다. 유대인이 아니라 헬라 사람, 즉 그리스 사람입니다. 당시 누가복음을 자기가 쓰고 그것을 읽는 독자들이 주로 자기와 같은 헬라(그리스) 사람들인데, 그들에게는 이 기와지붕이 훨씬 더 익숙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묘사를 여기서 한 것입니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종류의 지붕이었든지 상관없이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엇이 이들에게 이토록 엉뚱하고 무모한 행동을 하게 만들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실 이런 일은 집주인의 입장으로 보면 아주 무례하고 불쾌한 행동입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이 집은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오셔서 사역을 하기 위해 세 들어 살고 계시던 집이었다고 추정합니다. 예수님이 세를 들어 살고 계셨으니까, 주인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집주인 입장에서 지붕을 뜯고 구멍을 낸다는 것은 굉장히 불쾌한 일이고 무리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그것을 몰랐겠습니까? 그들도 다른 사람의 집을 주인 허락도 없이 뜯으면 안 된다는 것, 남의 집 지붕에 이렇게 손상을 입히면 벌을 받을 수 있고 반드시 배상해야 한다는 것, 또한 이런 행동은 정상적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욕하고 비난할 수 있다는 것도 그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장면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지금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우리처럼 이렇게 넓게 앉은 게 아니라 좁은 방에 아주 따닥따닥 붙어 있습니다. 거기서 열심히 가르치고 계시는데 갑자기 이 위에서 뭔가 소리가 나고 흙이 툭툭 떨어지더니 갑자기 구멍이 뻥 나고 위에서 뭐가 내려옵니다. 보니까 딱 봐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그런 환자가 침상에 누운 채 끈이 달려서 침상 채 죽 내려오는 겁니다. 지금 만약 우리가 이러고 있는데 갑자기 위가 뻥 뚫리고 뭐가 내려온다면 얼마나 깜짝 놀라겠습니까?
이런 희한한 광경을 본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생각해보면, 일단 모두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그 집주인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굉장히 열받았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누가 허락도 없이 내 집을 이렇게 뜯었나?’
그럼에도 그들은 아주 이상하게 행동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이 중풍 병자를 깊이 사랑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그들이 이 중풍 병자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행동했겠습니까? 사람이 너무 많아서 집안에 들어갈 수 없음을 알았을 때 바로 포기하면서, ‘우리가 최선을 다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음 기회를 노리자.’라고 말하며 집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이렇게 한 둘째 이유는, 그를 고치실 수 있는 예수님의 능력을 이들이 정말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정말로 이 병을 치유하실 능력이 있다고 믿지 않았더라면, 남들에게 욕을 먹어가면서까지 또 배상을 해가면서까지 이렇게 무리한 행동을 했을 리가 없습니다.
정말 믿었으니까 이렇게 하지, 안 믿었으면 왜 이렇게 했겠습니까? 비난받을 것이 뻔한데 남의 집 지붕까지 뜯어가면서 이런 이상한 행동을 했겠습니까? 아니, 예수님을 믿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중풍 병자를 여기에 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사람들이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믿게 된 것입니까? 그들은 분명히 이전에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것과 수많은 병자를 고치시는 그분의 능력을 직접 목격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 저 정도의 능력이 있는 분이시면 우리가 사랑하는 이 중풍 병자를 충분히 고치실 수 있을 것이다.’라고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보통은 침상에 네 귀퉁이가 있으니까 ‘네 친구’라고 하는데, 이 사람들이 중풍 병자의 친구인지, 가족인지, 아니면 다른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런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들이 이 중풍 병자를 정말로 사랑했다는 것, 또한 자기들이 사랑하는 이 사람을 고치실 수 있는 예수님의 능력을 정말로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면서 하나님을 신뢰할 때 우리에게도 이처럼 놀라운 기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기적이 우리 삶에는 잘 일어나지 않습니까? 여러분, 내가 기도하면 이렇게 불치병에 걸렸던 사람이 갑자기 일어나는 일이 내 눈앞에서 일어난 것을 본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요즘도 그런 기적이 일어나긴 일어나는데,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경우는 참 드뭅니다.
물론 우리가 기도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다 들어주신다는 건 아니지만, 그런 불치병까지 안 가고 어떤 병이라도 우리가 기도할 때 왜 기도 응답이 잘되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 의하면, 주님을 신뢰하지 않은 채 내가 기도해주는 이 사람을 그냥 사랑해서 기도한다고 하거나, 아니면 그 사람을 진짜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채로 그냥 주님을 믿는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둘 다 없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더라도, 주님을 진정으로 믿고 따르지 않는다면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반면에 ‘나는 정말 주님을 잘 믿는다. 나는 기도와 말씀과 예배와 모든 것을 충실히 하고 믿음이 좋다.’라고 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사랑의 실천이라는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인 것입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진정으로 사랑을 실천하게 됩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과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은 언제나 같이 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특히 중보기도의 중요성이 여기 있습니다. 먼저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고, 동시에 내가 사랑하는 형제자매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의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중보기도실 사역도 하고 있고, 또 예배 전에 중보기도 모임도 있는데, 중보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랑과 믿음. 내가 기도하는 대상을 향한 사랑,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사랑과 믿음입니다.
우리가 선교사님들을 위해 기도하고, 또 어려움을 당한 지체를 위해 기도하면서, 우리가 이렇게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분명히 기쁘게 받아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사랑과 믿음으로 기도하니까 기도 응답의 역사가 지금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합심 기도할 때 왜 잘 들어 주시는가? 함께 사랑으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 되어 사랑으로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20절)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언하십니다. 여기서 ‘그들’이라는 말이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중풍 병자까지 다 포함한 말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그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볼 때 이 중풍 병자도 포함한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그런데 중풍 병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아주 오래전 일인데 이제 거의 40년이 다 된 것 같습니다. 제가 이민 오기 전에 다니던 교회 대학부에서 용산 쪽에 있는 어느 봉사 단체를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사역이 있었습니다. 우리 대학부가 하는 사역이니까 저도 시간이 날 때마다 학교 끝나고 자주 갔습니다.
그곳은 집이 없고 병이 들고 갈 곳이 없는 그런 사람들을 받아주고 돌봐주는 곳이었습니다. 가끔 봉사하는 의사분들이나 간호사분들이 와서 도와주기도 하고, 정말 심한 경우에는 병원도 데려가며 돌봐주는 일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교회와 연결이 되어서 저도 거기 자주
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거의 40년이 다 된 지금까지도 제가 아직 잊지 못하는 한 분이 있습니다. 여러 병자들이 있었는데, 사실 다른 분들은 생각이 안 납니다. 하지만 그분은 생각이 나는데, 왜냐하면 그분과 대화를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분이 중풍에 걸려서 몸을 잘 가누지 못하고 계속 누워 있는 분이었습니다. 가끔은 일어나 벽에 기대어 있는데, 말을 해도 어눌하고 또 컨트롤이 안 되니까 침을 자주 흘리는 중년 남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머리는 굉장히 비상해서 아는 게 굉장히 많았고, 또 말이 잘 안 나오기는 해도 계속 더듬더듬 말하며 호소하는데, 자기가 아는 게 많으니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또 이러면 안 된다 저러면 안 된다 하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이 자기를 싫어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를 무시하고, 또 거기 있는 사람 중에도 몸을 잘 움직이는 사람도 있는데 일부러 와서 그냥 툭 치고 가는 등 자기를 괴롭힌다고 하면서 굉장히 서럽다고 호소하던 그 모습이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바로 그런 겁니다. 자기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침을 흘리고, 말도 정확히 하지 못하는 것이 중풍 병자입니다. 같은 내용을 기록한 병행 본문인 마가복음 2장(5절)을 보면 예수님이 이 사람을 향해 “작은 자야(son)”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젊은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예수님이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Son(아들아)” 그러지는 않으셨지 않겠습니까? 자기보다 나이가 적으니까 그러셨던 겁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최대 20대인 사람이었던 겁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또 어떻게 하다가 중풍 병자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젊은 나이에 중풍 병자가 되어 이때까지 인생을 비관적으로 살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자기에게 누가 일거리를 주겠습니까? 이전에는 일을 했겠지만 중풍에 걸린 후에는 할 수가 없습니다. 또 어떤 여자가 자기와 결혼하려고 하겠습니까? 이전에 약혼녀가 있었더라도 파혼당했을 것입니다.
일하기는커녕 스스로 걷거나 화장실에 갈 수도 없고 음식을 먹을 수도 없는 그런 자기를 보면서, 얼마나 자책하고 욕하고 저주하고 분노하며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다른 사람들은 멀쩡한데 왜 나는 이런가? 나도 열심히 살았는데 왜 내 인생은 이런가?’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겠습니까? 당연히 지금까지 그렇게 살았을 것입니다.
몇 년 동안 중풍에 걸려 있는지 모르지만, 그 기간과 상관없이 그는 예수님께 오기 전까지 계속 그런 삶을 산 겁니다. 게다가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자기를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저거 저거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저렇게 된 거야.’라고 수군거립니다. 얼마나 최악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났을 때 ‘저 사람 요즘 신앙생활을 게을리하더니 하나님이 벌주신 것이다.’ 암살 미수 사건이나 테러나 총기 사건이 일어나서 죽거나 토네이도가 불어서 죽은 사람들을 보며 ‘하나님의 벌을 받아서 그런가 보다. 뭔가 숨겨놓은 죄가 있어 그런가 보다.’라고 함부로 얘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만약 내가 ‘저 사람은 뭔가 죄가 있어서 저렇지. 뭔가 벌받을 일을 했나 보다.’라고 말한다면, 그런 말을 하는 나는 죄가 하나도 없습니까? 하나님이 내 죄를 지금 이 앞의 스크린에 비추시면 깨끗할 자신이 있으십니까?
우리가 죄가 없어서 아무 일이 없이 살고 있는 게 아닙니다. 결코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잘살고 있는 겁니다. 지금 내가 잘나서 아무 일 없이 잘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완전히 착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 나쁜 일이 생겼을 때 함부로 그렇게 정죄하고 판단하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이 중풍 병자는 삶의 의미를 잃은 채 그저 빨리 죽고 싶다고 생각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몸이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사실은 스스로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한마디로, 죽지 못해 산다는 표현이 딱 맞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 사람이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장애인을 일으키시고 눈먼 자를 보게 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놀라운 능력이 있는 분이라고 들었을 때 ‘그렇다면 나도 고치실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소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가 보자고 했을 때 거부하지 않고 자기를 예수님께 데리고 가도록 허락한 겁니다.
이 중풍 병자가 예수님 앞에 나왔다는 게 정말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 몸도 가누지 못하고 흐느적거리는 사람입니다. 컨트롤이 안 되니까 침을 질질 흘리는 사람입니다. 게다가 몸 냄새는 얼마나 지독하겠습니까? 지금처럼 좋은 시대도 아니고 2천 년 전 고대 사회 때인데 얼마나 위생이 안 좋았겠습니까? 그렇게 좋지 않고 지저분한 모습으로 지금 수많은 사람 앞에 자기 몸을 보여준다는 게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중풍 병자와 그를 메고 온 사람들은 예수님을 정말 신뢰했습니다. 믿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사람들 앞에서 자기가 바보같이 보이는 것이 싫고 창피했지만, 또한 지붕을 뜯는 것이 비정상적인 것이지만, 이런 모든 창피와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그들에게서 발견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것이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지난 주에 살펴 본 나병 환자도 똑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고치실 능력이 있으신가 없으신가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히 고치실 수 있는데 그분이 자기를 고치실 마음이 있으신가 하는 것이 그의 고민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왔을 때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만져서 고쳐주셨습니다.
여러분, 혹시 내가 자존심 때문에 주님 앞에 나오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이렇게 잘 나오셨지만 혹시라도 살다가 ‘아, 다른 사람들 보기에 창피하네. 아이고, 못 나가겠다.’라고 하며 다른 사람들 눈이 신경 쓰여서 주님 앞에 나오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또 기분이 나빠서 주님 앞에 나오지 않는 일도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앞에 나아오려 할 때 예상하지 못한 장애물들이 우리를 좌절시키려고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에이, 관두지’ 하며 포기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풍 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은 수많은 무리 때문에 집 안에 못 들어갔을 때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뭔가 또 방법이 있을 거야. 찾아 보자.’라고 했습니다. 가려던 길이 장애물로 막혀 있을 때 오히려 주님께로 가는 다른 길을 찾아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못 찾았는데, 이 사람들은 찾았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한 길이 막힐 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일한 소망인 예수님을 어떻게 포기합니까? 조금 전에 부른 찬양곡을 마음으로 불러야 하는데 “나의 유일한 소망이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분명 입으로 고백한 것처럼, 예수님이 정말 나의 유일한 소망이시라면 그분께 어떻게 안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길이 막혀 있으면 다른 길을 반드시 찾아야 하는 겁니다. 단지 무슨 장애물이 있다고 포기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데 마음먹고 주님 앞에 나아오려고 작정하면 이상한 일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교회에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넘어서 모처럼 교회에 열심히 나가려고 하며 이제 막 집을 나서려 하는데 갑자기 전화가 와서 오늘 골프를 치자고 할 수가 있습니다.
또 오랫동안 목장을 빠졌는데 목장 모임에 나가봐야겠다고 마음먹고 나갔는데, 그날따라 평소에 내가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이 하필 그날 오랜만에 나와서 막 떠드는데 영 봐주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관둬야지 하는 마음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나를 괴롭힌다고, 어떤 상황이 나를 괴롭힌다고 해서 나를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능력의 주님 앞에 나가기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주님께로 가는 다른 길을 찾으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그분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는 너무 쉽게 포기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의 끈질김을 보십시오. 그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중풍 병자를 진정으로 사랑했고, 예수님이 그를 고치실 능력이 있으신 분이라는 것을 정말로 믿었습니다. 그분만이 유일한 소망임을 믿는데 어떻게 그분 앞에 나가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조금 해보다가 잘 안되면 포기하는 이유 중 하나는, 주님만이 유일한 소망이시라는 사실을 정말로 믿지 않기 때문은 아닙니까? 여러분, 왜 기도하다가 ‘기도해봤자 소용없네.’라고 하며 포기합니까? 정말로 주님만이 유일한 소망이시라는 것을 안 믿기 때문은 아닙니까? 내 나름대로 또 다른 해결 방법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닙니까? 주님께 나가보다가 안 되어도 ‘그럼 내가 하면 되지’ 하며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닙니까?
만일 주님만이 정말 유일한 해결책이시고 유일한 소망이시라는 것을 정말로 믿는다면, 어떻게 주님 앞에 안 나올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포기할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최고의 방법, 유일한 방법을 놓아두고 다른 시시한 방법을 찾아다니겠습니까? 정말 믿으면 주님께로 갈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살펴볼 것은, 예수님이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20) 하셨을 때 그의 병이 즉시 나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줍니까? 우리 죄가 사하여졌더라도, 우리의 영적인 문제가 해결되었더라도, 우리 삶의 문제는 그대로 있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주님은 우리의 영적, 육체적, 물질적, 정신적, 감정적 문제를 모두 다 해결해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러나 주님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모든 문제를 저절로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주님을 따르기 때문에 더 어려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복음서를 죽 보면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많이 나옵니다.
하지만 죄 사함을 받았다면, 영적인 문제가 해결되었다면, 다른 문제는 없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어렵고 더 힘든 문제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 땅에서 살다가 죽으면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은 사람들은 천국에 가는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을 믿습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이 안 계신 지옥으로 가게 되는데, 이 문제가 해결되었다면 이보다 더 어려운 문제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지금 이 땅에서 다른 문제는 다 해결 받고 지옥에 간다면, 그게 정말 문제 해결이 된 겁니까? 해결된 게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다른 덜 중요한 문제들은 해결되었을지 몰라도, 가장 중요한 문제, 가장 큰 문제는 해결이 안 된 겁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가 해결되었다면, 다른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 속에서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만 주님께 나오는 현세적 믿음에서 벗어나야겠습니다. 기도도 어려울 때나 문제가 생겼을 때만 하는 게 아니라, 문제가 없을 때도, 모든 것이 평안할 때도 나의 구세주이시며 주인이신 예수님께 겸손히 나아오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님 안에서 순종하는 삶을 살 때 다른 문제들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으며, 믿음으로 나아갈 때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를 반드시 인도해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2. 예수를 대적하는 자들 (21~24절)
‘농구 황제’로 불리는 마이클 조던(Michael Jordan)이 있는데, 그는 역사상 최고의 농구선수로 꼽힙니다. 오래전 그가 미국 프로농구 NBA 최고의 선수로서 시카고 불스(Chicago Bulls)팀을 역대 최고의 팀으로 이끌었습니다. 3년 연속 우승을 두 번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 뉴스에서 그와 불스팀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이 실린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야, 마이클 조던 같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를 저렇게 비판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 보니까, 그 내용은 객관적이 아니라 시기와 질투가 섞여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수많은 병자들을 치유하며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구름 떼처럼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기 위해,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해, 또 병 고침을 받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어디를 가시든지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신뢰하여 믿음으로 나온 사람들도 있었던 반면에,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고, 그들은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곳에 앉아서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21절)
이 사람들이 왜 여기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는가에 대해 본문에는 자세히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기 위해 온 것이라기보다는 위대한 선생이라고 하는데 어떤 내용을 가르치는지, 그리고 기적을 행한다는데 정말 그런지 확인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어느 한 지역에서 온 것이 아니라 전 갈릴리와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입니다(17). 그러니까 갈릴리에 여러 마을에서 이곳으로 찾아왔고 또 저 멀리 유대 지역과 또 그 가운데 특히 수도인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도 여기 있었다는 겁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이 사람들이 이렇게 온 것은 사실 그냥 와서 감시만 하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있지만, 그 당시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종교적으로 앙숙이고 라이벌이었기에, 이들은 서로 백성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굉장히 애를 썼습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의 인기를 끄는 예수라는 사람이 여기서 이런 일을 하고 있다고 하고 가르치고 있다고 하니까 자기들도 거기를 가야 하는 겁니다. 가서 감시를 하는 동시에 ‘우리도 여기 왔다.’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백성들의 관심을 계속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여기 와 있는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들이 이렇게 먼 거리를 여행해서 왔다는 겁니다. 먼 거리를 여행해서라도 예수라는 사람을 보기 위해, 또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위해 온 것입니다.
열심 하면 이단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수요예배 때도 이단에 관하여 살펴보고 있는데, 오래전에도 심지어 이단 종파의 하나가 제가 다니던 신학교까지 와서 유인물을 놓고 간 적이 있습니다. 굉장한 열심입니다. 그러나 엄청난 열심을 가졌다고 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교회에서도 이렇게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모여 예배하고 있지만,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마음으로 나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각기 다른 목적과 동기를 가지고 나와 있을 수가 있습니다. 잘못된 목적으로 나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경배하고 높여드리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이기적인 목적이나 잘못된 열심을 가지고 나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항상 경계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하실 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가 신성모독을 했다고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십니다.
“22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22-23절)
“네 죄 사함을 받았다”라고 하는 말이 어렵습니까, 아니면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렵습니까? 둘 다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하면 “신성모독이다. 네가 뭔데 죄를 사하냐?”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밖에 못 하시는 일이니 큰일날 일입니다. 또 “지금 일어나 걸어가라.”라고 하는데 계속 안 일어나고 누워 있다면 이것도 큰일 아닙니까? 이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이처럼 둘 다 어렵습니다. 그래서 인간으로는 사실 불가능한 선언입니다. 어떤 인간도 쉽게 이 두 가지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니시면 죄를 사할 수가 없고,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이 중풍병자를 일으킬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또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셨던 예수님은 죄를 사할 권세도 있으시고 병을 고칠 능력도 있으십니다. 다른 곳에 보면 예수님이 그냥 병만 고쳐주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죄도 사하여 주시고 병도 고쳐주시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24절)
3. 치유의 결과 (25~26절)
예수님이 일어나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시자마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25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25-26절)
중풍 병자는 바로 일어나서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놀랍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자마자 중풍 병자는 자기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느끼고 일어나 기쁨과 감격에 넘쳐 큰 소리로 외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장면을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심히 두려워하면서 오늘 놀라운 일을 봤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건이 일어나면 먼저 놀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 심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공포심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경외심입니다. 하나님을 존중하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그런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일이 일어날 때 그것을 보면서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사건인가 아닌가를 알려면, 누가 영광을 받는가를 보면 됩니다. 하나님이 정말 영광을 받으시는가, 아니면 어느 특정 개인이 영광을 받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이 잘될 때 ‘아마 내가 잘 해서 그런 거다. 내가 워낙 능력이 있으니까 그렇다.’ 하면서 스스로 만족해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교회 사역도 잘될 때,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고 섬기는 방향으로 나아가야지, 어느 특정 개인이나 그룹이 영웅시되고 우리의 관심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꾸 다른 것을 향하게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나가는 말]
오늘 본문에 나오는 중풍 병자는 참으로 복 받은 사람입니다. 자기를 이토록 사랑하고 애쓰며 함께 해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경험한 최대의 복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건입니다.
단순히 병이 나은 것이 축복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정말 만났다는 것,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 즉 영적인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말로 세워졌다는 것이 축복입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그의 삶은 이때부터 완전히 변화되어 살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꿈꾸는 교회가 바로 이런 교회입니다. 이런 사랑의 공동체가 아니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서로 사랑하며 또 서로를 예수님께로 자꾸 데려가 주는 공동체, 누군가가 넘어지면 일으켜주고 다시 주님께로 데려갈 수 있는 그런 공동체, 서로가 서로를 향해 “저를 예수님께로 인도해 주십시오. 저도 당신을 예수님께로 인도해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며 이렇게 서로 도와주는 공동체, 바로 그러한 공동체를 주님이 원하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영적인 생활을 책임져주는 주님이십니다. 또한 우리의 물리적인 삶도 책임져주십니다. 우리가 영적인 삶뿐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풍성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하려면 유일한 소망이신 주님께로 나아와야 합니다.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으로, 또 다른 지체를 내 몸같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아올 때, 우리 각자의 삶 가운데 또 우리 교회 가운데 놀라운 하나님의 사건들이 넘쳐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