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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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28일 주일예배
✦ 예수님의 비유 3 ✦
“곡식에 섞여 있는 가라지 처리법”
(마태복음 13장 24~30절, 36~43절)
[들어가는 말]
요즘 이 세상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이 세상이 너무나 악하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이번 2월이면 2년이 됩니다. 거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집을 잃고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삶의 터전을 잃고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하는지 모릅니다. 또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으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오래전부터 끊임없이 서로 싸우면서 죽고 죽이는 것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또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지금도 여기저기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미국 내에서는 총기 사건이 계속 발생합니다. 작년(2023년) 한 해만 해도 총기 난사 사건이 500건 이상 발생했습니다. 사망자만 4만 2천 명이 넘었습니다. 수년 전 아프리카 르완다나 동유럽 코소보에서 민족 간의 갈등이 일어나 인종 청소가 벌어졌습니다. 무자비하게 다른 민족을 살해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또한 역사를 봐도 아주 악하고 비참한 사건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났습니다. 태평양 전쟁 때 일본군이 사람을 잡아다가 마루타 생체 실험을 벌였습니다. 최근 그와 관련한 드라마도 나왔습니다. 베트남 전쟁에서도 얼마나 잔인한 살육이 벌어졌는지 모릅니다. 그냥 싸우다가 죽고 다치고 한 것뿐만 아니라 무자비하게 그 막 살육을 저지른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베트콩뿐만 아니라 미군이나 한국군에 의해서도 그런 일들이 많이 저질러졌다는 겁니다.
이런 일들뿐 아니라 지금도 온갖 범죄가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보면, 이 세상에는 악의 세력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비참하고 잔인한 사건들에서만 악이 존재합니까? 연쇄살인사건이나 치를 떨게 할 정도로 악한 일들에서만 악이 존재합니까? 바로 우리 주변만 봐도, 아니 내 삶만 봐도 악이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악의 문제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무엇보다 분통이 터지는 것은, 악한 사람은 벌받고 착한 사람은 상을 받으면 좋은데, 그런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악한 사람은 잘되고 선한 사람은 잘 안 풀리거나 재앙이 닥치는 경우가 꽤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신가? 신이 있는가? 하나님은 살아 계신가?’ 그렇게 의심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바로 이 악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알려주십니다.
1. 곡식과 가라지 비유의 배경
오늘 비유는 소위 '곡식과 가라지 비유'라고 불리는데, 예수님이 도덕적인 교훈을 주시기 위해 억지로 지어내신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일상생활에서 늘 일어나는 일이었고, 또 실제로 사람들의 삶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그 당시 다른 사람에 대한 모욕과 공격의 목적으로 상대방 소유의 밭에 들어가 해로운 가라지 씨를 뿌리는 일들이 종종 일어났습니다. 못된 짓을 하는 사람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이나 서나 항상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확인한 제자들은 아마도 염려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이스라엘이 세계를 다스리도록 해주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인류, 흠이 없고 정결한 인류를 만들어 주실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그리스도, 구원자)가 정치적으로 강력한 힘으로 로마를 물리치는 동시에 세상을 도덕적으로 개혁해 줄 것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을 식민지로 삼고 있는 로마를 물리치고 정신 개조해서 도덕적으로 세상을 개혁해 줄 것, 악한 자들을 다 쓸어버리고 선한 사람들의 세상으로 만들어 줄 것, 의인의 세상으로 만들어 줄 것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 밑에 뭐가 깔려 있습니까? ‘나는 의인이다. 악한 자들을 다 쓸어버리시고 나 같은 의인을 이제 높여 주실 것이다.’ 이렇게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런 메시아 상이 사실이었다면 자기도 다 쓸려가게 됩니다. 자기도 거기 들어가는 사람인데 그것을 모르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메시아는 도덕적, 윤리적으로 흠이 없고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분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메시아인가 아닌가?’ 하는 상황에서 보니까 예수님 주변에는 늘 비정상적이고 이상한 사람들만 가득한 겁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매국노로 생각하며 상종도 하지 않는 세리들이 있고, 창녀가 있고, 병자가 있고, 귀신 들린 자가 있고, 부정한 자가 있고, 죄인들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신을 따르는 사람 중에서 가라지와 같은 자들을 다 가려내어 뽑아내 버리시고 곡식 같은 자들과만 있으시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라지 자들을 쫓아내 버리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제자들도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가장 많이 비판하고 지적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며 교제하는 것이었습니다(9:11). 자기들은 그런 종류의 부정한 인간들과는 상종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옷깃도 닿지 않도록 조심하는데, 예수님은 거침없이 그런 사람들과 같이 지내는 것을 보며 그들은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같은 저런 사람은 절대로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가 될 수 없다.’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한 제자들의 마음,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마음속에 있던 이러한 적대적이고 비판적인 생각을 잘 아시는 예수님은 그것을 염두에 두고 오늘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 세력
“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4-26절)
이 비유는 이 세상에 곡식 같은 사람과 가라지 같은 사람이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 나오는 ‘곡식’과 ‘가라지’는 무엇을 의미한다고 하십니까?
“37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38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37-38절)
곡식은 예수님께서 뿌리신 좋은 씨를 가리키고(37), 가라지는 사탄이 뿌린 나쁜 씨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천국의 아들들’(38)을 통해 일하시는 것과 같이, 사탄은 자기에게 속한 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여 일합니다. 오늘 비유를 통해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와 마귀 사이의 싸움은 이 세상 끝 날까지 계속될 것이고, 곡식과 가라지는 세상 끝까지 함께 섞여 있게 될 것을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27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7-28절)
자기 밭에 가라지가 뿌려졌다는 소식을 들은 밭의 주인은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원수가 이렇게 했다고 말합니다. 이 원수가 누구입니까?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39절)
이 원수는 마귀이며, 마귀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입니다. 마귀, 사탄, 악마 모두 같은 존재를 다르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영어로 Devil이라고도 하고 Satan이라고도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하고자 하시는 핵심은 악이나 마귀가 어디서 생겼는지, 언제 생겼는지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세상에 사람들을 괴롭히는 악의 세력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러한 세상에서 안전하게 사는 길은 혼자서 인생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집에 함께 거하는 것임을 알려주십니다.
우리가 그냥 봐도 이 세상에는 분명히 악의 세력이 존재합니다. 영적으로 악한 세력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 우두머리를 마귀(사탄, 악마)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마귀 하면 벌벌 떨며 두려워합니다. 옳지 않은 자세입니다. 또 반대로, 어떤 사람은 21세기에 무슨 귀신이 있느냐고 하며 믿지 않습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귀신이 없으면 성경에서 예수님이 그토록 많은 귀신을 쫓아내십니까? 옛날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고 한다면, 어디에 그런 말이 쓰여 있습니까?
저번에 언급한 씨 에스 루이스(C. S. Lewis)의 책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삼촌 악마가 조카 악마에게 가르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에는 자기들을 크게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자기들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데, 둘 다 자기들의 밥이라고 가르칩니다.
이 점에 대해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른 자세는, 사탄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이미 완전한 승리를 거두셨다는 것, 그리고 그분을 믿고 따르는 우리도 주님과 함께 결국 승리할 것을 믿는 태도입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와 마귀가 세상 끝 날까지 계속 싸운다고 하니까 마치 동등한 능력을 가지고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는데, 전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노르만디(Normandy) 상륙 작전으로 그 전세는 이미 기울었고 연합군의 승리는 이제 확실합니다. 이제 독일군은 지는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싸우긴 싸우고, 전쟁이 아직 완전히 끝난 건 아닙니다. 총알도 날아다니고 포탄이 날아다니기에 거기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세는 이제 더 이상 바뀌지 않습니다. 연합군의 승리가 거의 확실합니다.
바로 그것과 비슷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승리를 주셨고 우리가 승리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이제는 지지 않습니다. 완전히 승리했습니다. 다만 이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게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 사탄의 세력은 지는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착각하면 안 되는 게 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나 미디어에 우리가 너무 많이 노출되어서 사탄 하면 뭐가 생각나십니까? 머리에 뿔이 두 개 있는데 그것도 큰 염소 뿔 같은 것이 달려 있고, 옷도 빨간색이고, 뒤에 뾰족한 꼬리가 달려 있고, 또 삼지창을 들고 있는 그런 모습이 마귀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나타나면 금방 알고 피하지, 누가 모르겠습니까?
사탄은 우리가 보기에 에덴동산에 있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처럼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창 3:6)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는 겁니다. 아주 매력적이고 달콤한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를 유혹합니다. 왜 유혹합니까? 우리가 실패하게 만들고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그렇습니다.
때로는 아주 중요하거나 급한 일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사실은 중요한 게 아닌데 중요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이렇게 주일날 교회에 와서 예배드려야 하는데, 다른 중요해 보이는 일을 만들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못 하게 만듭니다. 실제로 그게 중요한가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매일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데, 삶에 바쁜 일을 만들어서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이런 것들이 다 마귀의 유혹입니다. 마귀는 결코 나빠 보이는 것들로 유혹하지 않습니다. 만약 죄를 지을 때마다 엄청난 고통이 온다면, 예를 들어 슬쩍 거짓말을 할 때마다 혀에 엄청난 고통이 오고 혀가 잘릴 것 같으면 누가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면 쉽사리 죄를 지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짓는 것이 아주 달콤하고 기분 좋게 다가오기 때문에 죄를 범하게 됩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나 좋은 것으로 유혹합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가장 중요한 것, 가장 좋은 것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우리는 best를 하며 살아야 하는데 good 정도에 만족하게 합니다. 또 하긴 하되, 지금 하지 말고 나중에 하라고 속삭입니다. 오늘 하지 말고 내일, 내일 하지 말고 모레, 이번 주가 아니라 다음 주, 다음 달, 내년에 하라고 하며 뒤로 미루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예배를 꾸준해 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왜 기도해야 하고, 왜 말씀을 묵상하고 읽고 삶 공부해야 하고, 왜 예배도 드려야 합니까? 왜 목장 모임으로 모이고, 왜 자꾸 사랑을 나누며 실천하라고 합니까? ‘아유, 귀찮은데 뭘 자꾸 하라고 하나?’ 그게 아닙니다. 귀찮은 게 아닙니다. 그게 귀찮아서 안 하면 내가 넘어집니다. 내가 무너집니다. 오히려 우리를 막아 주시고 보호해 주시려고 그런 것을 하게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가운데 늘 깨어 기도하고 말씀을 붙들며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안 하면 그 시간이 뭘 합니까?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을 그 시간에 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개인적으로 자기 삶 속에서 매일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을 의도적으로 열심히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너무 힘들어서, 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교회를 주셨습니다. 교회는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이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 안에 거하며 함께 예배하고 함께 교제하고 함께 봉사하고 함께 훈련하는 것이 나 자신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자꾸 안 가고 안 하고 자꾸 빠지고 그러면 누가 손해입니까? 저쪽에서 모이는 사람들이 손해 봅니까? 아무도 손해를 안 봅니다. 가지 않는 자기가 손해 보는 것입니다.
지금 혹시 유혹이 다가온다면 주님의 이름을 불러보십시오. 뭔가가 자꾸 자기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 같으면 “예수 이름으로 악한 세력은 물러가라!” 해보십시오. 찬송하는 것도 좋습니다. 직접 자기가 노래하기 힘들면 다른 사람들이 부르는 것을 틀어놓아도 좋습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의 능력을 받아 승리할 수 있게 됩니다.
요즘 인터넷에 얼마나 좋은 것들이 많습니까? 최근에 제가 좋은 곡을 배워서 어제 그 곡을 틀어놓았습니다. 어느 찬양 팀이 부르고 있는 것을 틀어놓고 듣는데, 계속 듣고 있으면서 엄청난 은혜가 임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다른 사람이 부르는 것을 틀어놓아도 큰 도움이 됩니다.
3. 자기 힘으로 가라지를 뽑지 말라
28절에 보면, 가라지를 발견한 종들은 자기들이 가서 그것을 뽑기를 원하는지 주인에게 묻습니다. 그러자 그가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29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29-30절)
가라지는 초기에 그 모양이 알곡과 아주 흡사해서 알아보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자라고 있는 중간에는 가라지나 곡식이나 그 모양이 아주 비슷합니다. 그런데 싹이 나고 이삭이 나와 결실할 때가 되면 모양이 분명하게 차이가 납니다(26). 그래서 이것은 곡식이고 이것은 가라지라고 알게 됩니다.
그러면 그때 뽑아버리면 되지 않느냐고 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곡식과 가라지의 뿌리들이 땅속에서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히는 일이 생긴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주인은 종들에게 가라지를 뽑지 말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40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41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42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40-42절)
그냥 두라고 하시는 이 말씀을 보면서 악의 세력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하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곤란합니다. 이것은 세상에 있는 불의와 악이 보여도 그냥 신경 쓰지 말고 자기 일만 충실히 하며 무관심하게 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지금 밖에서 악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나는 상관없다. 우리 교회만 잘되면 된다. 우리 집만, 우리 가정만 잘되면 된다.’라는 식으로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종들에게 모든 가라지를 다 골라서 뽑아낼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뽑을까요?” “그냥 둬라.” 무관심하게 살라는 말씀이 아니고 ‘제대로 뽑아낼 능력이 너희에게는 없다. 그러니까 그냥 둬라.’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괜히 가라지를 뽑겠다고 하다가 득보다는 오히려 해를 끼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여기서 지적하시는 핵심은 인간의 한계입니다. 우리 사람에게는 선과 악을 완벽하게 구분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자기에게는 좋은데 남에게는 나쁘고, 자기에게는 유익한데 남에게는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나에게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해가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전기차를 산 분들이 계시는데, 전기차의 장점은 친환경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누가 그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전기차 자체는 친환경일 수 있는데, 전기차가 가게 하는 배터리를 만드는 데에 환경 오염이 발생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게 다 아이러니합니다. 이것은 좋은데 또 거기에 이렇게 안 좋은 점이 있습니다.
오늘 아침 뉴스에 보셨는지 모르겠는데, 얼마 전에 제가 다녀왔던 파리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 그림에다 두 명의 여성 환경 운동가들이 수프를 갖다가 막 뿌리면서 ‘예술이 중요하냐, 식량이 중요하냐?’라고 하면서, 이런 것은 중요하지 않고 지금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식량에 대한 권리를 주어서 누구나 잘 먹을 수 있는 세상이 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그냥 들으면 그게 서로 무슨 상관인가 할 수 있는데,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일을 한 겁니다. 지금 사람들이 여기(예술품)에만 관심을 가지고 지금 저렇게 굶어 죽어가는 사람에겐 관심도 없으니까 이런 걸 통해서 좀 관심을 끌려고 그렇게 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엄청난 인류 문화유산을 훼손하는 일이 되니까, 다 명과 암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훼손되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앞에 방탄유리로 해놨기 때문에, 총을 쏴도 사실 망가지지 않습니다. 수프를 뿌려봐야 더러워지기만 하지 훼손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나름대로는 불합리한 것을 해결하려고 하는데, 동시에 수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 의도는 사실 이해가 가는데 안타까운 일입니다.
한국에도 가끔 지하철 시위가 벌어지지 않습니까? 한 장애인 단체에서 지하철 시위를 벌입니다. 그들의 아픔과 어려움이 사실 이해가 갑니다.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장애인으로 한국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힘들기에 ‘오죽 하면 저렇게 할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면서도, 수많은 평범한 시민들이 이용하는 지하철에서 그 바쁜 출퇴근 시간에 시위를 벌이니까 지하철이 제대로 가질 못해서 많은 사람들이 지각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그 의도는 알겠는데 동시에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고통을 당하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나에게 참 좋은 일이라고 하는데, 다른 사람에게는 해를 끼치는 이런 안타까운 일들이 세상에 참 많습니다. 지금 뭐가 좋다 나쁘다 얘기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나에게는 좋은데 다른 사람에게는 안 좋고 다른 사람에게 좋은데 나에게 안 좋은 일들이 세상에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같은 사건을 놓고도 입장에 따라 해석이 달라집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철저히 자기 위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완전히 절대적으로 옳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상대적입니다. 다 자기 위주로 생각합니다.
편견과 선입관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심판은 사람이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법을 잘 만들어 놓아도 거기에 허점이 있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재판받고 상소하고 대법원 판결까지 내려졌어도 억울하다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오늘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말씀하기를 원하십니까? 심판은 마지막 날에 행해지는 것이며, 또한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만 행해질 수 있다는 점을 가르쳐주십니다. 판자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최후의 심판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도 내가 판단하는 것은 100% 옳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옳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남들의 사정을 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가끔 뉴스에 보면 ‘야, 저렇게 악한 사람이 있나? 저게 무슨 인간인가?’라고 하며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얼마나 악한 사람들이 많습니까? 그리고 또 우리가 보기에 아주 선한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저 사람은 진짜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묻고 싶습니다, 24시간을 따라다니며 봤냐고. ‘악한 사람도 선한 사람도, 24시간을 따라다니면서 그 사람의 삶이 어떤지를 봤냐? 일주일 내내 따라다니면서 봤냐? 그 사람 마음속을 들여다봤냐?’ 우리가 그 마음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 대해서, 악한 사람이든 선한 사람이든, 그 사람의 아주 일부분의 일을 보고서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 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을 100% 아는 게 아닙니다. 아주 적은 부분만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마음까지 꿰뚫어 보시기 때문에 100% 우리를 파악하고 계십니다. 심지어 내가 나를 모르는 것도 다 알고 계십니다. 나는 나를 오히려 모르는데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심판이 가능하십니다. 우리는 심판이 불가능합니다. 지극히 일부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다른 교회에서 부목사로 섬길 때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에 대해 상당히 안 좋은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저는 ‘야, 저 B라는 사람은 참 나쁜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B로부터 얘기를 들어보니까 그게 아니었습니다. 완전히 반대였던 겁니다. 물론 각자 자기 입장에서 말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로 한쪽 말만 듣고 같이 흥분하거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반드시 양쪽 말을 다 들어봐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자기를 변호하고 포장하려 합니다. 조금 안 좋은 것은 가리고, 또 별것 아닌 것은 막 증폭해서 말하는 경향이 다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조금 잘한 것은 엄청나게 잘한 것처럼 부풀리고, 자기가 잘못한 것은 아주 최소화해서 거의 말을 안 하는 식으로 하기 때문에, 한쪽 말만 듣고서 판단하는 건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반드시 양쪽 말을 다 들어봐야 합니다. 사실 양쪽 말을 다 들었어도 판단이 쉽지 않습니다.
그 일 이후로 저는 되도록 양쪽 말을 다 들어보고 나서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습관이 들었습니다. 제가 그동안 노회 일을 하다 보니까,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우리 한국 사람의 특징은 내가 친한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 ‘저 사람 나쁜 사람이네.’ 하며 같이 흥분하고, 미국 사람은 그래도 양쪽 말을 다 들어보고 판단하려 애를 쓴다는 차이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만약에 한 사람이 나에게 와서 다른 사람에 대해 막 성토하고 비난하고 욕하면 지금 그 말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혹시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하고 의심하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입장에서 말합니다. 자기 입장에서 보면 다 맞습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면 대부분 옳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똑같은 기준으로 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유일한 심판주가 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절대적입니다. 완벽히 공평하게 판단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로 그 하나님의 눈을 가져보자고, 배우자고 해 나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공부하고, 이렇게 예배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전혀 엉뚱한 시각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안 믿는 사람과 똑같은, 아니면 더 나쁜 시각을 갖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악한 자들에 의해 엄청난 악이 자행될 때 무엇을 느낍니까? 대표적으로 지난 2001년 9월 11일 엄청난 테러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보셨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저도 보면서 ‘어떻게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며 전율을 느끼는 동시에, 그런 일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을 죽게 만든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분노가 끓어올랐습니다. 그런 자들을 보면 가라지를 뽑아버리고자 하는 욕구가 올라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반대의 일들도 많이 벌어집니다. 오래전 플로리다의 펜사콜라(Pensacola, Florida)에서 낙태 클리닉이 폭파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네 명의 독실한 크리스천들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낙태를 미워하신다는 확신으로 세 곳의 낙태 클리닉(Abortion Clinic)을 폭파시켜버린 것입니다. 심지어 낙태 시술 의사를 죽인 사건도 있었습니다. 아이다호에서 게이 남성을 살인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에서 어떤 공통점을 발견합니까? 그것을 일으킨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엄청난 혐오감과 미움과 증오입니다. 사실 9-11 테러도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증오와 미움 때문에 일어났고, 그 이전과 이후의 모든 테러 사건도 똑같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스스로 가라지를 뽑아버리겠다는 열심으로 활활 타올라, 실제로 가서 가라지를 뽑아 태우는 일을 행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가라지가 잘 뽑히고 문제가 다 해결됐습니까? 오히려 엄청난 슬픔과 재앙을 가져오고 후폭풍을 몰고 왔으며, 이쪽에서 당하니까 저쪽에 보복하고 그러니까 또 보복하는 등, 아직도 보복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며 정의감에 불타서 한 일이라도 그것은 결국 자기 입장에서 나온 편협한 생각입니다. 자기 입장에서만 옳은 것입니다. 정의를 외치며 싸운 사람들이 권력을 잡은 후에는 자기들이 싸우던 대상들과 비슷한, 아니면 더 못한 모습을 보여서 비난받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내로남불’이라는 말도 나왔습니다.
이 세상을 볼 때, 놀라운 일도 많지만 잔인함과 폭력으로 얼룩진 사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뉴스를 보면 이 세상에 악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보며 한탄하게 됩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가정들을 보십시오. 어떻습니까? 기쁨도 주지만 슬픔과 고통도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 간에, 부모와 자녀 간에, 시어머니와 며느리 간에 서로 사랑도 나누지만, 또 얼마나 많은 상처를 서로 주고받습니까?
교회는 어떻습니까? 선한 모습이 당연히 많지만 좋지 못한 모습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교회는 우리가 주님을 예배하고 말씀으로 자라고 또 서로 사랑하며 섬기는 곳이 아닙니까? 그러나 너무나 많은 경우에 좋지 못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우리 교회는 그래도 평안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어서 감사하지만, 그렇지 못한 교회들도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 안타까움을 느끼며 기도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나쁜 일들을 볼 때 우리는 외칩니다.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내가 가서 뽑아버리겠나이다!’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싸움과 다툼과 미움과 분쟁과 분열로 서로 찢고 찢기며 상처를 주고받습니까? 갈라지지는 않았다고 해도, 서로 분쟁하고 다투는 가운데 너무나 많은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그 와중에서 가장 큰 상처를 받는 존재가 바로 자녀들입니다.
제가 실제로 아주 오래전에 경험한 일입니다. 어떤 2세 전도사님(오래전에 목사가 됐지만)을 그분이 신학생 때 만났는데, 제가 있던 곳의 어느 교회 목사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분란이 일어나면서 굉장히 안 좋게 분열되었고 그 목사님이 결국 교회를 떠나셔야 했습니다. 이분이 지금은 40대가 됐을 텐데, 그때 고등학생 때니까 아주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을 제가 직접 들었습니다.
“저는 교회가 사랑과 따뜻함으로 가득한 곳인 줄 알았습니다. 교회는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해 주는 좋은 곳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가장 나쁜 일이 일어나고 가장 나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교회라는 것을 내가 알게 되었습니다.”
그 분쟁을 겪으면서 엄청난 상처를 받고 자기가 한동안 교회를 안 나갔다는 겁니다. 목사님 아들인데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대학생 때 기독교 단체를 통해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고, 그러면서 자기가 목사가 되겠다고 또 결단하고서 신학교에 들어와서 나중에 졸업하고 목회자가 되어서 목회를 잘했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정도로 심하게 싸우는 것은 아니더라도,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 험담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 뒤에서 말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자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여러분, 만약 내가 지금 어떤 사람에 대해서 막 험담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비디오에 다 찍혀서 여기 스크린에 나오게 되면 괜찮으시겠습니까? 험담을 떠나서, 내가 어제 한 행동과 말들, 아무도 없을 때 했던 것들이 다 찍혀서 지금 여기에 방송하면 괜찮으시겠습니까? 어떠십니까?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43절)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은 의인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사람이 의인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사는 사람이 의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가라지를 확 뽑아버리고 싶은 마음을 느낄 때가 없다면 거짓말일 것입니다. 다 그런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교회에서도 제대로 신앙생활을 안 하는 사람, 말만 뻔지르르 한 사람,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 겉으로는 착한 척하면서 뒤에서는 다른 사람 욕을 하고 다니는 사람 등등, 그러한 사람들을 볼 때, 가슴이 답답하고 분노가 활활 타오르며 가서 확 뭐라고 해 주고 싶고 가르쳐주고 싶고 쏘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구기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다른 형제자매를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완전하다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완전합니까? 아닙니다. 그러므로 남을 심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알지만 왜 그런 일을 하게 되었는지, 동기가 어떤지, 어떤 사정이 있어서 저렇게 됐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그냥 내 눈에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그 사람을 완전히 매도해 버린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우리도 원래 악한 존재였는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의롭다고 해 주신 사람들입니다. 원래 하나님 보시기에 악했는데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심으로써 우리를 의인으로 봐주시게 된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악에 대해 상관하지 말고 소극적으로 대처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사탄의 세력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매일 치열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심판주이신 하나님의 그 다스리심을 믿으며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이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그날에는 악의 존재가 영원히 멸망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가라지를 보고 답답해도 그냥 두는 것도 믿음입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심판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올바르게 판단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100%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것은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내 눈에 보이며 내가 직접 경험한 일만 가지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보며 ‘이것은 내가 볼 때 잘못되었습니다.’라고 하는 겁니다. ‘이 사람이 잘못됐다.’가 아니라, ‘이 사람이 이 일을 했는데 이 일이 잘못되었습니다.’ 아니면 ‘이 일이 참 좋습니다. 잘했습니다.’라고 그 일에 대해서 우리가 평가하는 것이지, 그 사람에 대해서 우리는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완전하게 올바른 심판을 내릴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할 일은 ‘이 사람은 곡식이고, 이 사람은 가라지다. 이 사람은 그냥 지옥에 들어갈 사람이고, 이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고 예수 안 믿어도 천국에 갈 사람이다.’라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심판을 하나님께 맡긴 채 열심과 정성을 다해 매일 좋은 씨를 이 땅에 뿌리는 것입니다. 가라지가 아니라 곡식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더 많은 곡식을 거두기 위해 매일 눈물과 땀으로 열심히 좋은 씨를 뿌리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여기 주인의 종이 바로 우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주인이 뭐라고 했습니까? “가만두라.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그럼 그냥 두고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겁니까? 종으로서의 할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가라지를 뽑는 데 신경 쓰지 말고,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테니까, 너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맡기신 사명을 다해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의인이며, 그런 사람은 천국에서 해와 같이 빛나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의인의 삶을 살아 하나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는 고귀한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