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HOME > 설교와칼럼 > 주일설교방송
설교 동영상: https://www.youtube.com/live/ff19m9betKQ?si=JFDyMUGgo3Sy4Nr7&t=101
2023년 12월 24일 성탄주일 연합예배
✦ 성탄절 메시지 ✦
작은 베들레헴에서 나올 위대한 통치자
(미가 5장 2~6절)
[들어가는 말]
하나님을 믿는 주님의 백성도 때로는 살아가면서 어려움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약간의 어려움이 아니라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을 만나면 그럴 때 우리는 고통 가운데 질문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왜 이렇게 하시는가?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인가? 내게는 미래가 없는 것인가?’
오래전 미가 선지자가 한 질문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셨는가? 이제 이스라엘에게는 더 이상 미래가 없는 것인가?’
미가가 주님의 말씀을 기록했을 때는 요나,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같은 예언자들도 같이 활동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때는 앗수르(역사의 앗시리아)가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BC 8세기 말입니다.
미가는 북이스라엘이 망한 것이 하나님의 심판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끊임없이 그들에게 돌아오라고 하셨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주님께 불순종하고 반역하며 악한 길로 갔습니다. 그 결과 북이스라엘은 멸망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BC 722년의 일입니다. 그래서 미가는 그것을 지켜보며 무거운 마음으로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해 질문한 것입니다.
1. 작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그리스도
성탄절에는 보통 신약 성경의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을 보통 살펴보는데, 그중 마태복음 2장을 보면 예수님이 태어나실 당시 동방에서 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에게 경배하러 왔다고 하면서 그분이 어디 계시냐고 헤롯왕에게 물었습니다(마 2:2).
헤롯왕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모아서 그리스도가 어디서 난다고 되어 있냐고 하자 그들은 금방 찾았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인 미가서 5장 2절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가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아주 쉽게 대답했습니다. 너무 잘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곳으로 왕께 경배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2절)
예수님을 잉태한 당시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요셉은 나사렛에 살고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바로 이 미가서 5장이 말씀하고 있는 ‘다스릴 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역사를 보면 로마제국의 첫 번째 황제인 아구스도(아우구스투스)가 유대인들에게 각자 고향에 가서 호적을 하라고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는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호적하고 갔다가 거기서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을 우리가 누가복음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단지 아기로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이라고 합니다. 즉, 그분의 기원은 아득한 옛날, 태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당시 유대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미가의 예언이 장차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으로 오시는 메시아에 대한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구절을 금방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왕께 경배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의 형제 가운데에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 (3절)
메시아가 오시면 남은 자들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돌아오게 하실 것인데, 그분은 단지 이스라엘만의 왕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스도는 왕의 왕, 주의 주로 오셔서 이스라엘에서만 아니라 땅끝까지 그 위대함이 미치게 된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모든 세상의 구주로 오셨다는 말입니다.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하니 그들이 거주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끝까지 미치리라” (4절)
2절에서는 베들레헴의 초라함에 비해 거기에서 태어나실 분의 위대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베들레헴은 유다 지파에서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는 마을이 아니었습니다. 시골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메시아를 이곳에서 불러내시기로 정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나오고, 다윗이 바로 이 베들레헴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다윗의 후손 차원으로만 본다면 본문의 핵심을 놓치게 됩니다. 이 구절이 알려주려고 하는 것은, 베들레헴이 위대한 다윗의 고향이기 때문에 위대하다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영웅 다윗의 고향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작고 미약한 곳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처럼 작고 초라한 곳을 택하셔서 역사를 완전히 바꾸시는 엄청난 일을 이루신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다스리심 안에서 사람이 자기 공로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하셨다는 그분의 영광만이 나타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은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랑만 하고 자기 잘난 맛에 살게 되면 결국 그 인생은 무너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셨다고 하며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그 인생은 올바로 서게 됩니다. 이것을 깨달은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27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28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29 이리하여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고전 1:27-29, 새번역)
놀랍게도 하나님은 강한 자가 아니라 약한 자들을 택하셨습니다. 베들레헴이 작고 초라하고 하찮은 곳이라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를 베푸심에 있어서 그 근거를 사람이 이룬 것에 두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위대하거나 어떤 장소가 특별해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소위 ‘성지순례’를 가면 유명한 사건이 있었던 곳마다 성당이나 교회가 서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일들이 일어났던 곳들에 그렇게 세워놓고 특별한 곳이라고 기념하는데, 그곳이 특별한 게 아니라 특별하신 하나님이 특별하신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루신 것이기 때문에 그곳이 특별한 것입니다. 장소 자체가 거룩한 게 절대 아닙니다. 그냥 똑같은 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평범하고 초라한 그곳에서 위대한 일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위대한 일이 일어났거나 유명한 데만 쫓아다니는 게 별로 그렇게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가봐야 사실 지금은 아무것도 없고 그냥 기념하는 기억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곳에서 하나님이 놀라운 일을 이루셨다고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값없는 은혜를 베푸시며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기쁨의 찬송을 부르며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중에 세계적인 인물이 혹시 계십니까? 세계의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은 나라는 인간이 여기에 존재하는 것도 알지 못합니다. 콜럼버스 지역에서도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우리끼리나 알지, 누가 알아줍니까? 작고 보잘것없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인생이 대부분입니다. 물론 자기가 있는 곳, 즉 직장, 사업체, 가정, 교회에서는 서로 알지만, 절대 다수는 내가 여기 있는 줄도 모릅니다.
그래서 ‘내 인생은 이게 뭔가? 겨우 여기서 끝나나?’ 하고 한탄하십니까? ‘이왕이면 미국에서도 뉴욕이나 엘에이처럼 큰물에서 놀다가 끝나면 좋지 않을까?’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도 그런 ‘큰물’에 좀 가봤는데 별것 없습니다.
‘내가 겨우 여기서 끝나나?’라고 한탄하신다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내가 위대하다고 쓰시고 별 볼 일 없다고 안 쓰시는 게 아닙니다. 내가 가진 게 많으면 데려다 쓰시고, 가진 게 없으면 버리시는 게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나의 능력이나 재물이나 가진 것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어디 사느냐에 달려 있지도 않습니다. 많이 가졌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많이 가졌든 적게 가졌든 상관없이, 아주 출중한 능력을 가졌든 능력이 하나도 없든 상관없이, 하나님께 겸손히 순종하느냐만 보십니다. 겸손히 순종하며 따르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성경을 보면 아주 뛰어난 인물들도 많았고 초라하거나 평범한 인물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님께 절대 순종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하나님께 자기를 내어드린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통해 영광 받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능력이나 어떤 소유가 아니라 순종입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있는 곳에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대로 살고 있는가를 점검해야겠습니다.
2. 하나님의 평화이신 그리스도
베들레헴에서 나셔서 그의 양 떼를 먹이실 분이 오신다는 말씀에 대해, 당시 유대인들은 다윗 왕과 또 메시아로 오실 그의 후손을 떠올렸습니다. 다윗이 베들레헴 출신인데, ‘베들레헴’이라는 말이 원어로 ‘레헴’은 ‘빵’이고 ‘베트’는 ‘집’입니다.
그러니까 베들레헴은 빵집이라는 뜻인데, 그곳 출신이었고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 사람으로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였던 사람이 다윗입니다. 소년 시절 목동이었고 나중에는 이스라엘의 목자라고 불렸습니다(시 78:21).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러한 다윗의 후손으로 그리스도가 오시고 그 나라를 견고하게 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것은, 이 약속을 주신 때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강하고 부흥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북이스라엘은 이미 망했고 남 유다도 멸망의 위기가 닥친 때라는 사실입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상황은 멸망이고 심판입니다. 소망이 안 보입니다. 전부 절망뿐인 상황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왕의 왕이시며 주의 주이신 그리스도(메시아)에 대한 약속을 주십니다.
“4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하니 그들이 거주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5 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궁들을 밟을 때에는 우리가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을 일으켜 그를 치리니 6 그들이 칼로 앗수르 땅을 황폐하게 하며 니므롯 땅 어귀를 황폐하게 하리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지경을 밟을 때에는 그가 우리를 그에게서 건져내리라” (4-6절)
미가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평강을 가져다주실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미가는 그리스도에 대해 몇 가지를 알려줍니다.
첫째, 그분은 ‘서서’, 즉 일어서는 분이십니다(4). 그저 섬김을 받으려고 가만히 상석에 앉아 있거나 누워서 섬김을 받는 분이 아니라, 일어나서 자신을 의지하는 자들을 위해 목자로서 움직이며 보호해 주는 분이십니다.
둘째, 그분은 그의 양 떼를 먹이는 목자가 되십니다(4). 우리를 그저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셋째, 그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이 지닌 그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양 떼를 돌보아 주십니다(4). 우리가 그리스도를 신뢰하면 그분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합니다. 또 정결과 기쁨으로 영원히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가 능력이 없어서 고민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을 의지할 때 능력을 주십니다.
넷째, 그의 창대함이 땅끝까지 미칩니다(4). 그래서 그 누구도, 어떤 어려움도 당신의 백성인 우리를 위협하지 못하게 됩니다. 모든 무릎이 그분의 발 앞에 꿇게 될 것이며, 온 세계는 그분의 영광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다섯째, 그분은 우리의 평강(평화)이 되십니다(5). 그래서 그분은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십니다. 이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른 평화, 훨씬 더 깊은 의미의 참된 평화입니다. 영원한 평화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불안해하는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요 14:27, 새번역)
자동차를 사거나 비싼 전자제품을 살 때 파는 직원이 뭐라고 합니까? 다 사기로 결정하면 그다음에 워런티(warranty)를 소개합니다. 그 사람들은 기술이 있습니다. 그 기술이 뭐냐 하면 손님을 불안하게 만드는 기술입니다. 쓰다 보면 이렇게 될 수도 있고 저렇게 될 수도 있고 그럴 땐 바로 이 워런티가 필요하다고 친절하게 설명합니다. 아주 장사를 잘합니다.
저도 오래전 어떤 전자제품을 샀을 때 3년짜리 워런티를 살까 말까 하다가 결국 사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하자마자 그때 저에게 그것을 팔던 직원이 저를 보고 “Oh, you have peace of mind now.”라고 했습니다. ‘너를 보니까 이제 평화를 얻었구나.’라는 겁니다. 그러나 그 평화는 3년짜리 평화입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 완벽하게 커버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지속적인 평화, 영원한 평화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를 가져다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크리스마스에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평화입니다. 미가는 이 평화가 우리에게 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는 이 주님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평화를 누리는 것이 정상입니다. 만약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두려워 벌벌 떨고 있다면 자기 믿음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미가가 선포한 이 평화를 깨달은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롬 5:1, 새번역)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의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죄의 세력은 모두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평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주시는 평화는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엡 2:14, 새번역)
여러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던 담을 무너뜨리셔서 평화를 주신 것뿐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막혀 있는 담도 허물고 평화를 주셨다는 겁니다. 그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내가 그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혹시 원수가 있으십니까? ‘철천지원수는 없습니다.’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미워하는 사람, 껄끄러운 사람, 불편한 관계가 있는 사람, 같은 교회에 다니지만 멀리 떨어져 앉고 싶은 사람, 그런 사람이 원수입니다.
사도 바울 당시 유대인과 이방인은 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완전히 서로 적대시하며 원수로 여겼습니다. 살인의 마음을 품을 정도였습니다. 서로 인간 취급도 안 했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그런 관계였고, 또 이방 사람들을 향해서도 유대인들이 그렇게 보았으며, 로마 사람들이나 헬라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상에 평화로 오셔서 그렇게 갈라진 것을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실제로 이 복음 때문에 바울이 가서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또 다른 사도들이 전하는 곳마다 거기에는 유대인도 있고 헬라 사람도 있고 로마 사람도 있고 아프리카 사람도 있고 인종이 굉장히 다양했는데, 그런 사람들이 복음으로 하나가 되어서 한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물론 그래서 문제도 많았습니다. 고린도전서와 후서를 읽어 보면 고린도 교회 같은 데는 정말 문제가 많았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다양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복음 때문에 그것을 극복하며 나아가는 교회들이었습니다.
우리 사이에 담을 쳐 놓은 것을 무너뜨리신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순종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과 진정으로 평화를 이룬 사람이 할 일은 이웃과의 평화를 이루며 사는 것입니다. 자꾸 회피하고 멀리하고 담을 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 담을 무너뜨리셨는데 왜 자꾸 다른 사람과의 사이에 담을 세우려 하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과 평화를 이루고 있지 못하다면 진정한 성탄절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이 평화를 누리며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진정으로 이룬다면, 이웃과의 평화도 누리며 살게 됩니다. 그렇게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이룬 사람들로서 우리는 서로에게 이렇게 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눅 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