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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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1) https://www.youtube.com/live/0a7c59w3yLY?si=GTDsjm99ddmNSFco&t=199
2) https://www.youtube.com/live/UMNE_poK2BM?si=7h3BS-sCqPPl10QP
(설교 녹화 중 인터넷 연결이 끊어지는 현상이 발생함에 따라 설교 영상이 2개가 되었고, 내용 중 많은 부분이 누락되었습니다. 양해를 구합니다.)
2023년 12월 31일 새해맞이 감사예배
✦ 영원을 준비하는 인생 5 ✦
“양인가, 염소인가”
(마태복음 25장 31~46절)
[들어가는 말]
오래전 한국에서 교회 고등부를 아주 즐겁게 다녔는데, 그때의 추억 중에서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몇 가지 일들이 있습니다. 특히 연말이 되면 친구들, 선후배들과 함께 ‘문학의 밤’(참 즐거운 밤)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뮤지컬을 했는데, 제목이 <갓스펠(Godspell)>이었고 마태복음을 기초로 한 내용이었습니다. 1971년에 나왔는데 무려 50년 넘게 지금까지도 공연이 되고 있으니 대단합니다.
그 뮤지컬은 정말 재미있고 감동적인 내용이었는데, 지금도 그 장면들이 떠오릅니다. 저는 그 뮤지컬에는 참여하지 않고 다른 것을 했는데, 그 뮤지컬 배역 중 몽골의 허에스더 선교사님도 있었고, 특히 그때 주인공을 맡았던 선배는 실제로 배우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무명이다가 나중에는 조연으로 안 나온 데가 없을 정도로 많이 출연했습니다. 영화 <건축학 개론>, <관상>, <암살>, <내부자들>, <부산행>, <극한직업>, <서울의 봄>, 그리고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W>, <미스터 선샤인>, <모범택시> 등에 나왔습니다(주로 악역 전문). 안타까운 것은 그 선배가 원래 종교가 개신교로 되어 있었는데, 천주교로 되었다가 이제는 무종교(심지어 무신론)라는 점입니다.
뮤지컬 <갓스펠>은 제가 신학교 다닐 때 교회음악 교수님의 지도로 미국 친구들과 같이 공연하게 되어서 감회가 새로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는 연기가 아니라 그때 기타를 담당했습니다. <갓스펠>의 주요 장면 중 하나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날의 심판에 대해 가르치시던 바로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그 뮤지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시는데, 하나는 양이고 다른 하나는 염소입니다. 주님께서 양들을 칭찬하시는 것을 본 염소들이 자기들도 칭찬해 주실 것을 기대했는데 오히려 자기들을 야단치시니까, 염소들이 깜짝 놀라고 당황합니다. 그때 염소 중 하나가 몰래 양들이 있는 곳으로 옮겨가다가 걸려서 되돌아가는 코믹한 장면도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 너무나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세상의 종말은 반드시 올 것이며, 우리는 그것이 언제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를 가르치신 예수님은 그 후 더 이상 비유로 가르치지 않으시게 됩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기를 원하셨던 최후의 메시지였습니다.
1. ‘양과 염소 비유’의 문화적 배경 (31~33절)
예수님 당시 목자들은 양과 염소를 함께 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낮에는 양과 염소가 같이 풀을 뜯게 하다가 밤에는 보통 두 짐승을 따로 떼어 놓았는데, 염소들은 실내를 좋아했던 반면, 양들은 확 트인 곳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목자들에게는 양이 염소보다 더 가치 있는 동물이었습니다. 대개 양들은 목자의 말을 듣는 편이지만, 염소들은 잘 안 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양과 염소를 구분할 때,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는 이유는, 오른편은 선한 쪽을 의미하고 왼편은 나쁜 쪽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누구나 이해할 수 있었던 양과 염소 구분 작업을 통해서 예수님은 마지막 날 심판 때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십니다. 지금은 모든 민족이 함께 섞여서 살고 있지만,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처럼 마지막 심판 날이 되면 구분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1-33절)
이것은,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중에 모든 천사와 함께 오실 때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것이고,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아 각각 심판하실 것을 보여줍니다. 마지막 날이 되면 모든 민족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고, 거기에는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심심해서 게임을 하기 위해 재미로 편을 가르는 정도가 아니라, 영벌과 영생을 가르는 영원한 구분입니다.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영원하고 영구적이기 때문에, 일단 최후의 심판이 임한 다음에는 또 다른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지금 이 땅에서는 기회가 계속 주어지지만, 일단 마지막 날이 오면 더 이상 기회는 없습니다.
그런데 종교 다원주의에서는 이런 식으로 주장합니다. “모든 종교는 근본적으로 같고 똑같은 산의 정상을 향해 가는 것인데, 각자 가는 길이 다를 뿐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들을 그 끔찍한 지옥으로 보내시겠는가?”
이것은 관용적이고 포용적이어서 매력적으로 들리기 때문에 신앙인 중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 심판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시면서, 그날에는 양과 염소가 분명히 구분될 것이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뉘는 것은 영구적입니다. 결코 다시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 중간도 없습니다. 단지 양이냐 아니면 염소냐, 둘밖에 없습니다. 둘을 섞어서 ‘얌소’나 ‘염양’ 같은 것은 없습니다.
2.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기준 (34~46절)
1) 무슨 기준으로 나누는가?
양과 염소를 나누실 것은 분명한데, 그렇다면 그들을 구별하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누가 양의 편에 들어가고, 누가 염소의 편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입니까?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4절)
31절에서 예수님이 ‘인자’라고 표현되는데, 34절에서는 ‘임금’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24장과 25장에서 종말에 대해 가르치실 때 ‘인자’라는 표현을 많이 쓰시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31절에서 인자가 영광중에 와서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는다고 하니까, 인자가 곧 임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통 ‘인자’라고 하면 이것이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이니까 예수님의 인성을 말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자’라는 말은 예수님의 신성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다니엘 7장을 보면 이것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다니엘은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분’, 즉 하나님에게 나아가 그 앞에 서서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는 환상을 봅니다. 이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심판을 주관하시는 왕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인자’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아니라 신성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양과 염소를 나누실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기준으로 나누시겠습니까?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5-36절)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1-43절)
본문을 통해 양(오른편에 있는 자들)과 염소(왼편에 있는 자들)를 비교해 보면 이렇습니다.
*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35) /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42)
*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35) /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42)
*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35) / 영접하지 아니하였고(43)
*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36) /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43)
*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36) /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43)
*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36) /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43)
이렇게 보면, 양과 염소를 구분하시는 기준은 사랑과 자비를 베풀었느냐 안 베풀었느냐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장로교는 ‘Matthew 25 Movement’(마태복음 25장 운동)을 펼치며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사회에서 억눌리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25장의 핵심이 아니므로 여전히 아쉬움이 있습니다.
왼편에 있던 자들이 영원한 벌을 받게 된 것은 무슨 악하고 끔찍한 일을 저질러서가 아니라, 선을 행하지 않고 사랑을 베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누구를 죽여서, 도둑질해서, 간음해서, 사기를 쳐서가 아니라, 단순히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지 않아서 영벌에 처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즉, 그들의 죄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범한 죄가 아니라,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은 죄입니다. 이것은 오늘 아침 주일예배 때의 본문인 ‘달란트 비유’와 똑같은 교훈을 줍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이 악하고 게으르다는 책망을 들은 것은 그가 무슨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거나 악을 행해서가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새가족반>을 인도할 때나 복음을 전할 때 질문하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 오늘이라도 세상을 떠난다면 천국에 들어갈 확신이 있으십니까? 둘째, 천국 문에 다다랐는데 하나님께서 ‘내가 나의 나라에 너를 들여보내 주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라고 물으신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이 질문들에 대해 많은 사람이 이런 식으로 대답합니다. “내가 무슨 악한 일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누구를 해코지한 적도 없고, 살인을 저지르거나 도둑질하거나 사기 친 적이 없으니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말은 곧 ‘내가 정말 나쁜 짓은 한 적이 없으니 괜찮겠지. 혹시 천국에는 못 들어갈지 몰라도, 지옥에는 안 가겠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그런 생각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물론 단지 사랑을 베풀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로 영벌에 들어가게 하는 것은 너무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왼편에 있던 자들은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4절)
맞는 말 같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언제 그런 환경에 처한 적이 있으셨다고, 그들이 그런 주님을 돌아보지 않았다고 지적하시며 영벌에 들어가라고 하신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여기에서 예수님이 강조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45-46절)
그러므로 왼편에 있는 자들은 그들이 모르는 것에 대해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알고도 행하지 않은 죄에 대해 벌을 받는 것입니다. 즉, 사랑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때까지 여러 번에 걸쳐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을 베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사랑과 선행이 구원의 조건인가?
그렇다면 여기서 또다시 따라 나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양과 염소를 나누는 기준이 사랑을 베푸는 것이라면, 그렇게 사랑을 실천하고 선을 행함으로써 구원을 받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전체 내용을 봐도 그렇고, 성경 전체를 봐도 그렇고, 사랑을 베풀고 선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해 줍니다. 단지 불쌍하고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4절)
여기서 예수님은 ‘오른편에 있는 자들’을 가리켜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라고 하시면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언급하십니다. 물론 직접적으로는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현이지만, 그들에게 분명히 “상속받으라.”라고 하시면서 그들이 상속자라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오른편에 있는 자(양)들이 ‘그들을 위하여 예비된 나라’ 즉 천국을 받는 것은 자기들이 선을 행하고 사랑을 베풀어서 그에 대한 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녀가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상속받는 개념이라는 의미입니다.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라는 말씀은, 하나님 나라가 인간의 노력으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님을 분명히 알려줍니다. 오히려 자녀가 아버지에게서 유산을 물려받듯이, 그렇게 상속받는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유산 상속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노력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출생으로 맺어진 혈연관계, 또는 혼인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재벌 기업에 사원으로 들어가서 열심히 일하며 노력하면 언젠가 회장의 재산을 상속받는 게 아닙니다. 당시에도 종이 아무리 열심히 일하더라도 양자가 되지 않는 한 주인의 유산을 상속받지 못합니다. 오직 자녀만이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상속받습니다.
그러면 선행은 결코 구원받는 조건이 될 수가 없는데, 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임금(예수님)은 사랑을 베푸느냐 안 베푸느냐에 따라 영생과 영벌을 결정하는 것입니까? 그게 아닙니다. 선을 행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증거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돌봄으로써 영생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은 사람이기에 그렇게 사랑을 베풀고 선을 행하며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선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것, 즉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았고 영생을 얻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정말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라면 그 삶에 이런 사랑이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나오지 않는다면 정말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것인지를 점검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라야 진짜 선을 행하고 사랑을 베풀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선’이라는 것은 윤리 도덕적인 선이나 불쌍한 사람을 조금 도와주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어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선을 말합니다.
여기서 임금이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핵심은, 사랑을 베푼다는 것은 주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임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겁니다.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사랑하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0절)
주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은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형제자매들과도 관계를 맺고 사랑하며 섬긴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형제자매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은, 그들의 아픔과 고통 가운데 그들과 함께하시는 주님을 믿는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기준은 선행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정말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사랑이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 사랑이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4세기 때의 군인이며 성자인 투르(Tours)의 마틴(Martin)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한 추운 겨울날 걸어서 도시로 들어갈 때 한 거지가 구걸하고 있었지만 마틴은 아무것도 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이 거지는 얼굴이 파랗게 될 정도로 지독한 추위에 떨고 있었고, 그냥 두면 위험해질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마틴은 자기가 입고 있던 낡은 군인의 겉옷을 둘로 잘라서 반을 거지에게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거지는 마틴에게 감사하다고 하며 그를 축복하고 떠났습니다.
그날 밤 마틴이 꿈을 꾸는데 천국이 보이고 천군천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계시는데, 놀랍게도 아까 자기가 거지에게 주었던 낡고 더러운 겉옷의 반쪽을 걸치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한 천사가 주님께 질문합니다. “주님, 왜 이렇게 낡고 더러운 것을 입고 계십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내가 지극히 사랑하는 나의 종 마틴이 준 것이기 때문이다.”
3)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는 누구를 말하는가?
사랑을 베푸는 것이 영생과 직결되어 있다면, 예수님께서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40)라고 부르는 사람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도 될 수 있겠지만, 더 구체적으로 보면 고통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그리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고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나의 어머니와 나의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마 12:49-50)
예수님은 10장에서 제자들을 전도 여행으로 내보내시면서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40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요,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42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 제자라고 해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마 10:40, 42, 새번역)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행하는 것이 곧 예수님에게 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형제자매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은 곧 예수님께 사랑을 베푸는 것이 됩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도 실패 의식에 사로잡힌 베드로가 다시 물고기를 잡겠다고 하며 갈릴리로 갑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곳에 나타나셔서 그를 회복시켜 주시는데, 뭐라고 하십니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을 물어보십니다. 베드로가 매번 그렇다고 하자 또 말씀하십니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그렇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양 떼를 사랑으로 돌보고 섬깁니다. 주님을 사랑하니까 주님의 양 떼인 형제자매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믿는 사람들을 미워한다면 그것은 곧 예수님을 미워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바울이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교회를 핍박할 때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가 핍박하는 것이 예수님 자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 9:4-5).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주님,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분명히 사울은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것이 곧 자신을 핍박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혔을 때, 그러한 사람을 돌보는 것은 곧 주님께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자매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을 대하는 방식이 곧 예수님을 대하는 방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뜨겁게 사랑하며 돌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다른 믿음의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작아 보이는 사람이라도 섬길 수밖에 없게 됩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시는 고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아주 무서운 말도 됩니다. 우리가 다른 형제자매에게 하는 것이 곧 주님께 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지체를 미워하거나 뒤에서 비난한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얘야, 너는 왜 나를 욕하느냐?” “제가요? 아닌데요.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저 형제, 자매를 욕하고 미워하는 것이 곧 나를 욕하고 미워하는 것이다.”
[나가는 말]
여러분, 내가 나를 볼 때 과연 주님께서 사랑하실 만한 사람입니까? 솔직히 말해서 그렇지 못합니다. 사실 어느 누가 주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랑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죄인을, 주님은 받아주시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그 사랑을 받은 우리도 주님을 본받아 사랑을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고 싶은 사람만 사랑하지 말고, 사랑하지 못할 만한 사람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지난번 주일에 계속 살펴보았던 ‘산상수훈’에서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의 사랑과 선행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며 회복된다면, 그에 대한 모든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져야 합니다. 이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양들도 염소들도, 즉 의인들도 악인들도 모두 자기들이 한 행위를 몰랐습니다.
의인들은 자기들이 주님께 사랑을 베풀고 돌봐드렸다는 것을 몰랐습니다(37-39). 악인들도 자기들이 주님께 전혀 사랑을 베풀지 않았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44). 다시 말해, 사랑을 베풀면서 자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를 정도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탈리아에 시에나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 시에나의 성 카타린(14세기)에게 하루는 어떤 수녀가 찾아와 한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제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은총을 제가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모든 자비와 긍휼과 관대하심에 대해서 제가 무엇으로 영광을 돌려드려야 할까요?”
그때 성 카타린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고해성사를 더 많이 해보았자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큰 교회를 짓는 것도 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온 세계가 하나님의 지성소이니까요. 기도로 조용한 시간을 더 많이 가지는 것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비를 참으로 갚을 수 있는 길을 한 가지 말씀드리지요. 당신만큼 사랑스럽지 못한 사람을 발견해서 그 사람에게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주십시오.”
나처럼 사랑스럽지 못한 사람을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자세로 나처럼 사랑스럽지 못한 사람을 사랑하는 삶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할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양의 길이고, 영생을 얻은 사람이 살아가야 할 길입니다.
오늘 2023년을 마감하고 2024년 새해를 시작하는 이 시점에 스스로 질문해 보기 원합니다. ‘나는 양인가, 염소인가?’ ‘혹시 나는 염소 같은 양인가, 아니면 정말 양다운 양인가?’ 생명을 내어주신 그 사랑으로 영생을 얻은 사람답게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