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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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22일 주일예배
✦ 제자의 삶 – 산상수훈 27 ✦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
(마태복음 7장 21~23절)
[들어가는 말]
제가 목회를 시작한 것을 돌아보니, 풀타임으로 사역한 것이 어느덧 28년이 넘었습니다. 신학대학원에 들어가면서 파트타임 교육전도사를 한 것까지 포함하면 33년이 넘었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은 것만 따져도 25년이 넘었습니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목회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났겠습니까? 그런데 그중 잘 믿는 것 같다가 지금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 온 것이 19년 차인데, 제가 부임한 2005년 3월부터 많은 사람이 우리 교회를 거쳐 갔습니다. 왔다가 다른 데로 떠난 사람도 있고, 여기 있지만 나오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중에는 다른 교회에 다니는 사람도 있지만, 아예 교회를 안 나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교회를 안 다니는 정도가 아니라, 주님을 믿는 모습이 거의 안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된 것인지 의아할 때가 많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을 구주와 주인으로 영접하고 믿으면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며 천국에 들어간다고 성경에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믿다가 안 믿은 사람의 경우는 어떻게 되느냐는 의문이 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믿었는데 중간에 마음이 바뀌어서 더 이상 교회에 다니지 않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까, 못 받습니까? 예수님을 영접하고 열심히 교회를 다니며 삶 공부도 하고 목장도 다니고 봉사도 많이 했는데,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 가더니 더 이상 교회에 다니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천국에 들어갑니까, 못 들어갑니까?
사실 누군가가 구원받았는지, 못 받았는지는 다른 사람이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저 사람은 구원받았다. 못 받았다.’ 하고 함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지난번 본문에서 열매로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알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좋은 나무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고 하십니다.
어떤 열매를 맺는가를 보면 어떤 나무인지 알 수 있습니다. 사과가 있으면 사과나무인 것을, 복숭아가 있으면 복숭아나무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같은 사과나무나 복숭아나무라도 좋은 나무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진짜 신앙인인지 아닌지는 삶 속의 열매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 앞에 서는 날에는 진짜인 줄 알았는데 가짜였다는 경우가 많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무서워 떠는 게 아니라 진짜가 되는 것입니다. 진짜가 되면 간단합니다. 진짜로 믿으면 아무 문제가 없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진짜로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믿은 줄 알았는데 사실은 진짜 믿은 것이 아니라면 얼마나 낭패입니까?
1. 참된 믿음에서 나오는 삶의 열매
1) 진짜 믿음에서 삶의 열매가 나온다
오늘 본문은 짧은데, 굉장히 어렵고 중요하면서도 많은 논란이 되는 내용입니다. 이 본문은 전체 맥락을 보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의 큰 흐름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을 걸으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길은 큰 길이 아니라 좁은 길입니다. 그런데 생명의 길입니다. 하지만 거짓 선지자들이 그 길로 가는 우리를 가로막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게 유혹합니다.
거짓 선지자는 속은 이리이지만 겉으로는 양의 옷을 입고 나오기 때문에 누가 참 선생이고 누가 거짓 선생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주님은 거짓 선지자를 식별하기 위해 그들의 가르침과 삶의 열매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가르치는 내용만 아니라 삶을 보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은 또 다른 기준을 하나 더 제시합니다. 그 사람이 거짓 선지자인지는 열매를 보면 아는데, 열매 같아 보이는 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여, 주여” 하는 신앙고백입니다. 겉보기에는 아주 멀쩡하게 정통 신앙을 고백해도 그게 진짜 열매가 아닐 수 있는 겁니다. 심지어 설교하고, 예언하고, 방언하고, 엄청난 능력을 행하고, 귀신을 내쫓고, 기적을 행하는데,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열매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한다고 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열매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가르치는 진짜 열매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를 봐도 성경이 말하는 열매는 ‘삶’입니다. 그런데 무슨 삶입니까? 종교 행위, 예배에 참석하는 것, 종교활동을 하는 것, 은사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실과 삶이 열매라고 성경이 말해주고 있음을 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전체 흐름과 함께 살펴봐야 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1절)
여러분은 기도하거나 찬양할 때 하나님을 향해 ‘주여, 주여’ 하십니까? 이 구절 때문에 한국 교회에서는 ‘주여’를 1번 하거나 3번 합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라고 두 번 하면 안 된다고 하셨으니까, “주여”라고 한 번 하거나, “주여 3창하고 기도합시다.”라고 하며 “주여, 주여, 주여!”라고 외칩니다. 괜히 “주여 주여” 두 번 했다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번 했다고 천국에 못 들어가고 한 번이나 세 번 했다고 들어간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 본문을 따로 끄집어내어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 아니라 행위다. 야고보서를 봐라. ‘믿음만 아니라 행위로 구원받는다.’라고 하지 않느냐? 기독교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진리나 교리가 아니라 결국은 어떻게 사는가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문맥을 무시한 해석이고, 성경 전체의 문맥을 놓치는 일입니다.
우리가 앞에서도 보았지만, 포도나무가 포도 열매를 맺고 좋은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습니다. 믿음과 행위는 분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정말 믿는 사람이라면 그 믿음이 행동으로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라는 것이 야고보서의 내용입니다. 야고보서가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선한 행동을 하면 그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게 아닙니다. ‘진짜로 믿는 사람이라면 이론에 그칠 수 없고, 나는 믿는다고 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삶 속에서 행동으로 나오게 되어 있다. 그것이 진짜 믿는 것이다.’라고 야고보서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어찌 되든 행위만 좋으면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담아내는 행위가 중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행위는 믿음을 드러내는 통로가 됩니다. 열매를 보면 어떤 나무인지를 아는 것처럼, 행위를 통해 진짜 믿음인지,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을 걷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는 겁니다.
기독교 신앙은 ‘믿음은 어떻든 상관없이 그냥 착하게 살면 된다. 윤리적, 도덕적으로 남을 해코지하지 않고 선하게 살면 된다.’라고 가르치는 게 절대 아닙니다. 바르게 깨달은 진리에서 빚어진 삶의 열매가 의미 있는 겁니다. 진짜 믿는 믿음에서 결과로 나오는 행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 행동이 나오지 않는다면 진짜 믿는 것인지를 점검해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과 행위가 반드시 같이 간다고 말씀합니다. 진짜 예수님을 믿었다면 선한 행위가 나오지 않을 수 없고, 반면 선한 행위만 한다고 진짜 믿는다는 것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선한 행위란 윤리적으로 착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선행입니다.
2) 스스로를 속이는 위선을 주의하라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로 갈 때 그리로 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세력이 많습니다. 거짓 선생과 거짓 선지자가 우리를 속이는 것이 큰 어려움입니다. 이단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 교회에서도 올바른 것 같이 보여도 실제로는 잘못된 것을 가르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강단에 섭니다. 아무렇게 말해서 잘못된 것을 가르치면 큰일 아닙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방해물이 밖에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안에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를 가지고 태어난 죄인입니다. ‘내가 왜 죄인인가?’라고 할 수 있지만, 어떻게 죄인인지가 설명이 안 된더라도 분명한 사실은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죄인이기에 죄가 나옵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된 게 아니라, 이미 죄인이기에 죄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가르쳐주지 않아도 아이들이 나쁜 짓을 하는 것을 보십시오. 어릴 때 좋은 것은 가르쳐도 잘 안 하는데, 나쁜 것은 가르치지 않아도 잘합니다. 그래서 이상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합니다. 남을 속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를 속이는 일이 일어납니다.
성경은 단순히 교회를 다니는 사람을 성도라고 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다니면 교인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진짜 성도, 그리스도인, 예수님의 제자인지 잘 살펴야 합니다. 주일이 되어 교회당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봉사하고 삶 공부도 하고 목장에도 참여하면 성도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성도가 아닐 수 있다는 겁니다. 참 무서운 일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대부분 사람들이 알아보았습니까?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세상의 구주와 주인으로 오셨는데도 사람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대적하며 미워했습니다.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오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냥 돌려보내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자기 것을 다 버리고서야 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오히려 어렵게 대하신 것은, 그들이 주님을 따르는 것의 의미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정말 믿고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따르겠다 하니까 제동을 거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기독교를 편의상 ‘종교’라고 구분하지만, 사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종교는 인간이 신을 찾는 것을 체계로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인간이 신을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니라 신이 인간으로 오셨기에 종교라고 할 수가 없고, 계시이며 사실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길이 하나밖에 없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이 안에 들어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스스로 속지 않도록 자기를 늘 돌아보라고 하며, 그 믿음이 올바른지 잘 살피라고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고, 신앙생활하고, 기도하고, 성경도 좀 읽으며 살면, 사실은 아닌데 자기가 신앙인인 줄 착각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끊임없이 점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누구나 차별 없이 다 받아주셨습니다. 죄인이라고 차별하신 게 아니라, 오히려 죄인일수록 더 다가가시고 그들을 변화시키려 하셨습니다. 또 많은 좋은 일을 행하시고 기적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실 때 보면 항상 불쌍히 여겨서 그러셨습니다. 자기가 멋지게 보이려고, 능력을 과시하려고 하신 게 아니라 불쌍히 여기셔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대표적인 기적이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수만 명을 먹이신 기적을 왜 일으키셨습니까? 그들이 굶어서 쓰러질까 봐 그러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항상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도와주시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직 한 부류의 사람은 굉장히 대적하시고 질책하시고 아주 심한 말까지 하셨습니다. 그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가장 큰 문제가 위선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닌데 겉으로는 그런 척하는 것, 또는 그런데 아닌 척하는 게 위선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살짝 위선적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스스로도 속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들은 진짜 신앙인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신앙인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 당시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바리새인들처럼 거룩하고 경건한 사람들이 없습니다. 자기들은 율법대로 못 사는데 저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다 지키며 사니 거룩하고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으로 볼 때 그들은 진짜 신앙인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맞겠습니까, 사람들이 맞겠습니까? 당연히 예수님이 맞으십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의 외식(위선)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좁은 길을 가라고 하셨는데, 좁은 문이 아니라 넓은 문을 택하여 가면서도 ‘나는 신앙인이다. 나는 신자다.’라고 한다면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예수님이 하라고 하신 길은 하나도 가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면서, 단지 교회에 나와 예배에 참석했다고 ‘나는 믿는 사람이다. 구원받았다.’라고 한다면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그래서 신앙생활에는 대충 하는 게 없습니다. ‘모 아니면 도’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는 것이나 안 하는 것, 둘 중 하나이지 중간에서 적당히 하는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죽고 사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죽고 사는 문제에 대충 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죽든지 살든지 둘 중 하나이지, 적당히 해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속이게 되면 위험하기 때문에, 늘 내가 바른 믿음 위에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은 ‘내가 분명히 예수님을 믿었는데, 믿었지만 또 구원을 못 받을 수가 있나?’ 하며 불안에 떨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을 구주와 주인으로 모신 사람은 구원을 잃었을까 봐 두려워 떨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도 스스로 속는 것이 됩니다.
2. 구원의 증거가 아닌 것들
그런데 그 반대편이 더 많기 때문에, 예수님은 크게 네 가지 대표적인 잘못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1) 정통 신앙고백을 하는 것이 구원의 증거는 아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1절)
주님이 말씀하시는 첫 번째 속는 일은 “주여, 주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부를 때 “주여, 주여” 하는 것이 옳습니까, 틀립니까? 당연히 맞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 그렇게 부르지 않으면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 12:3)
우리가 예수님을 향해 ‘나의 구주이시며 주인이십니다. 나를 죄에서 구원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저의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자기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자기 안에 계시다는 증거가 됩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분에게 물어보십시오. ‘예수님이 주님이십니까?’라고 물으면 ‘아니요. 아닌데요.’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그 간단한 말을 고백하지 못합니다. 거짓말로, 가짜로 할 수는 있겠지만, 진심으로 고백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예수님을 향해 “주님!”이라고 마음을 담아 부르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주여, 주여” 하고 부르는 것은 중요하고도 필요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잘 보시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 중에 천국에 들어갈 자도 있고 들어가지 못할 자도 있다.”라고 하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다 들어가는 게 아니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여, 주여’라고 진심으로 부르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고, 진심이 아닌 사람은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주여” 하고 부르는 것은 분명히 옳고 바른 신앙고백입니다. 한 번도 아니고 “주여, 주여” 두 번 부른다는 것은 열정적으로 주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른 정통 신앙고백을 한다고 해서, 열심이 있다고 해서, 천국에 다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참 어려운 말씀입니다. 정통 신앙고백을 해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입술로 하는 신앙고백이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며 바른 길과 좁은 길로 가고 있다는 직접적 증거가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입술로는 바른 신앙고백을 하지만, 전 인격을 담지 않은 위선적이고 형식적이며 명색뿐인 말에 그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단이 아닌 정통 신앙고백을 하는 것은 참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 자체가 천국 백성으로 구원받은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슷한 내용의 말씀으로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눅 6:46)
예수님을 향해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예수님이 주님이시면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예수님의 종입니다. 종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럼 이렇게 해라.’라고 하시는데 안 한다는 겁니다. ‘주여, 주여 하면서 왜 안 하느냐? 그럼 내가 진짜 주인이 아닌 게 아니냐?’라고 하십니다.
‘주여, 주여’ 하고 부르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 된 증거가 아니고, 그렇게 한다 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주여, 주여’라고 한다면 주인의 말에 순종하고 따라야 마땅한데, 말씀대로 행하지는 않으면서 ‘주여, 주여’ 부르기만 해서는 소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롬 2:13)
듣기는 들었는데 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고, 들었으면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한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것을 마음에 정말 받아들여 실천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진짜로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거기에 동의하면서 ‘그래, 맞는 말씀이지.’라고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과 진짜 믿는 것은 다릅니다. 동의하는 것과 진짜 믿는 것이 어떻게 다릅니까? 행동이 있느냐 없느냐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진짜로 믿은 사람은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아, 주님이 이것을 정말 원하시니까 내가 이것을 해야겠구나.’라고 합니다. 또는 ‘내가 하는 일 중에 이것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구나. 그럼 이제 끊어야 되겠구나.’라는 행동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진짜로 믿었으면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머리로만 ‘어, 맞는 말이지. 맞아, 맞아, 그렇게 살아야지.’라고 동의만 한 사람은 행동이 나오지 않습니다. 행동이 나오느냐, 안 나오느냐가 진짜로 믿었느냐, 안 믿었느냐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를 보고 판단하면 안 되고, 나 자신을 볼 때 그렇다는 겁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인데 나중에 변화되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쓴 야고보서 2장에서 이런 말씀을 합니다.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약 2:19-20)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은 귀신들도 믿고 떤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으니까 벌벌 떱니다. 그런데 귀신들이 구원받습니까? 못 받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대로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약 2:26)
죽은 믿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행동이 나오지 않는 믿음은 진짜 믿은 게 아니라는 것을 마음 깊이 새겨야겠습니다. 정말 믿었으면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해 보면 압니다. 내가 누군가를 정말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행동하지 않겠습니까?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아무 행동은 하지 않고 말로만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라고 한다면 그게 사랑입니까? 진짜 사랑하는 겁니까? 아닌 것을 다 압니다. 사랑하면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부모가 아이를 정말 사랑하면 아이에게 좋은 것을 해주려고 합니다. 아이가 자기에게 해가 되는 것을 달라고 하면 주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면 이렇게 행동으로 나옵니다. 또한 필요한 것은 해줍니다.
1980~90년대에 청년으로 신앙생활을 하셨던 분들은, 특히 1980년대에 선교 단체들이 많이 활동해서 그들을 통해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라는 말씀을 많이 배웠습니다. 그래서 입으로 고백하는 것을 굉장히 강조하는데, 그 말씀을 정확히 읽으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음으로 믿고 그 믿는 바를 입으로 고백해야 한다는 겁니다. 믿지는 않으면서 고백만 해도 안 되고, 진짜 믿었는데 고백하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입니다. 진짜 믿은 사람은 고백하면서 행동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입으로만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마음으로 믿고 진정한 인격적 변화가 있으며, 그 믿은 것이 입술의 고백과 삶의 행동으로 나오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삶입니다.
‘주여, 주여’만 하는 사람들이 주님께 책망받는 것은, 입술로는 정통 신앙을 고백하지만 마음은 전혀 새로워지지 않았고 아무 행동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형식적으로 입으로 시인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성경에 없습니다. 진짜 믿어 입으로 고백했으면 행동으로 나오며 삶이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었다고 갑자기 다 바뀐다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평생의 작업입니다. 평생 예수님을 닮기 위해 애쓰며 ‘받는 구원’의 삶을 살아나가는 것입니다. 방향이 그리로 향해야 합니다. 그러나 입으로는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산다면, 진짜로 믿은 것인지를 심각하게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2) 주님의 이름으로 사역하고 능력을 행하는 것도 구원의 증거가 아니다
둘째로는 더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2절)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라는 것을 요즘 말로 하면 설교했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통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고, 마치 천사의 말처럼 하며, 너무 말씀이 좋다고 극찬을 받는 것과 같은 일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했음에도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믿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정말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을 우리 식으로 바꾸어 표현하면, 목사이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이고, 선교사이고,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신학자인데,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없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계에서 인정받고 존경받는 설교자이거나 타고난 신학자로 신학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라도 주님과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할 때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 권능을 행하고, 기적을 행하고, 귀신을 내쫓습니다. 사실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입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성령의 은사를 주실 때 가능하지만,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어려운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은 사람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사실 권능이 나타나고, 예언하고, 병 고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소문나니까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그래서 병 고침을 받고 고마우니까 헌금도 합니다. 처음에는 순수했는데 이것이 돈벌이처럼 되어 넓은 길을 가도록 변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회개하고 돌아오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의 경우는 처음부터 주님의 능력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겁니다.
그렇게 엄청난 일을 한 것 같은 사람도 주님의 생명과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면, 나는 정말 주님과 생명의 관계에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그렇게 하라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성경이 분명히 약속해 주는 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정말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으면, 나는 능력이 없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이 엄청나기 때문에 그 어느 것도 주님의 손에서 우리를 빼앗아 갈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요 10:28). 어떤 것도 주님의 손에서 우리를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우리는 주님의 것이고, 천국 백성으로 영원히 살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은 것이 진짜였는가, 그것을 점검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택하신 자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구원받았으면 그 구원이 취소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영원한 구원 안에 들어와 있다고 해도 내가 주님 안에서 좁은 길을 잘 걷고 있는지 잘 살펴야 합니다.
<거지 왕자>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한 거지 소년이 있는데 왕이 자기 아들과 너무 비슷하게 생겨서 불쌍히 여겨 데려다가 자기 양자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가 거지였는데 졸지에 왕자가 된 겁니다. 그런데 거지의 습관을 버리지 못합니다. 계속 “한 푼 줍쇼.” 하고 있고, 자꾸 더러운 것만 좋아합니다. 왕자가 입는 옷도 입고 매너도 좋게 배워야 하는데 자꾸 안 하려고 하고, 자꾸 옛날에 하던 더러운 짓만 하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신분이 취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 아이가 정말 올바른 아이라면 ‘왕께서 나 같은 거지를 이렇게 아들로 삼아 주시다니, 이게 어떻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라고 할 것입니다. 정상적이라면 ‘너무 감사해서 안 되겠다. 내가 거지였지만 이제는 열심히 노력해서 왕의 아들답게 왕자다운 모습으로 바뀌어야겠다.’ 하면서 열심히 노력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법도 배우고, 옷도 잘 입고, 왕자로서 여러 가지 해야 하는 것들을 잘 배우고, 지식도 쌓고, 공부도 해서 정말 훌륭한 왕자가 되어 가는 것이 올바른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아이가 ‘내가 왕자가 됐지만 이건 나에게 어울리지 않으니 안 되겠어. 나는 그냥 옛날 방식이 좋아.’라고 하며 옛날식으로 계속 산다면, 이미 왕자로 삼아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왕자가 되지 못하고 계속 거지의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정말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은 자녀가 될까? 내가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어떻게 하면 기쁨을 드리는 자녀가 될까?’를 생각하면서 그 길로 나아가는 게 바른 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진짜 구원받은 표시가 됩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고 ‘나는 이제 예수 믿었으니까 구원받았네. 천국에 가네. 아유, 잘됐다. 그럼 이제는 내가 맘대로 살아야지.’라고 하며 전혀 하나님의 뜻과 관계 없이 살아간다면 진짜로 믿은 것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겁니다. 우리가 그런 생각을 잘 점검해야 합니다.
좋은 교회에 다닌다고 자기가 좋은 신자가 되는 게 아닙니다. 착각하면 안 됩니다. 엄청나게 커서 교인이 몇만 명이고, 엄청나게 유명하고 존경받는 목회자가 계신 교회에 다니더라도, 자기가 자동으로 훌륭한 성도가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데 속으면 안 됩니다. 나의 멤버십이 나의 수준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물론 교회를 사랑하며 충성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그것이 곧 주님의 백성이라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는 겁니다.
결국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 성도, 그리스도인, 예수님의 제자가 된 증거와 열매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어떤 행위입니까? ‘사랑의 행위’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21)라고 하셨는데,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나중에 22장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크고 중요한 계명이고, 둘째도 똑같이 중요한데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를 믿는 사람, 정말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바로 그 사랑의 행위가 나올 때 진짜로 믿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을 잘 깨달은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우리가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을 볼 때 구원받은 것을 확신할 수 있다.’라고 썼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사랑으로 섬길 때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믿지 않으면서 사랑을 조금 베푼다고 그것이 곧 구원의 길로 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말 믿은 사람이라면 열매가 나오는데, 그 열매는 행위이고 그 행위는 사랑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권능과 기적도 구원의 증표가 아닙니다. 요즘도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치유 집회 등을 하는 것이 그것인데,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정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닌지를 잘 분별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그리스도들이 많이 나오고 그들도 엄청난 능력을 행한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타종교에도 기적이 일어납니다. 불교에서 치유 기적이 일어나고 이슬람교에도 일어납니다. 기를 모아서 치유하는 것도 어느 정도 가능합니다. 기독교에만 기적이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기적 자체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3. 구원의 증거는 관계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23절)
여기 보십시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관계라는 겁니다. ‘주여, 주여’라고 하는 것이 사실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며 말씀을 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도 행하고, 아픈 사람도 고치고, 다리 못 쓰는 사람을 일으키고,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이런 엄청난 기적을 행하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좋은 일입니까?
그런데 그렇게 한 사람들에게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주님과의 관계가 없이 자기 마음대로 알아서 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관계가 핵심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주님의 이름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병을 고치고 선지자 노릇을 했는데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너희는 나와 관계가 없다.”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정말 알고 계십니까, 아니면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우리는 오바마 대통령, 트럼프 대통령, 바이든 대통령을 다 압니다. 뉴스에 그분들의 소식이 많이 나와서 압니다. 이 사람이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다 압니다. 문제는 그 사람이 나를 아느냐입니다. 그 사람은 나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이 사람들의 문제는 ‘우리는 주님을 압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고 다 했습니다.’라고 하지만 정작 주님은 그들을 모르신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과 관계가 없습니다. 대통령들의 자녀들과 배우자들은 그들을 잘 아는 관계입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이 나를 아시고 나도 주님을 아는 관계로서 주님과 가족이 될 때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일 때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가 원하는 것을 해주고 싶어집니다. 사랑하면 그 사람에게 맞춰주고 싶어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주님을 정말 사랑하게 되면 그분을 닮고 싶어지고 주님이 원하시는 게 뭘까를 생각하며 그것을 자꾸 해보려고 애쓰면서 나아가게 됩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위해 뭔가를 해주려고 애쓸 때 그것이 어설프고 완전하지 않고 잘 안 되더라도 얼마나 귀하게 보입니까? ‘나를 위해 저렇게 마음을 써주고 애를 쓰는구나.’ 주님도 우리를 보실 때 우리가 너무 불완전하고 당연히 제대로 하지 못하지만, 주님을 사랑하기에 우리가 뭔가 주님을 위해서 해보겠다고 애쓰며 나아갈 때 그 모습을 보시며 기특해하시고 기뻐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서 원하시는 열매는 바로 그것입니다. 관계입니다. 사랑의 관계입니다. 종교가 아닙니다. 무슨 선행을 해봐야 얼마나 하겠습니까? 어떤 종교 활동 같은 게 아닙니다. 관계입니다. 나는 지금 주님과 사랑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정말로 내 아버지이십니까?
저번에 한 번 언급했지만 하나님이 그냥 내 아저씨인 수준인 아닌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친척 아저씨도 있지만, 보통 일하는 사람을 ‘아저씨’라고 부릅니다. ‘아저씨, 이리 와서 이것 좀 해줘요. 아저씨, 저거 좀 해요.’라고 막 부리는 그런 사람처럼, ‘하나님, 와서 이거 좀 해주세요. 하나님, 나 이거 필요한데 이거 좀 주세요.’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막 부리는 아저씨처럼 취급하는 건 아닙니까?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신 것을 우리가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정말 ‘주여’라고 부르며 신앙을 고백하는 참 신앙인입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을 가는 사람입니까?
이것을 우리가 살펴보며 주님 앞에서 구원받을 만한 믿음으로 매일 살고 있는지 자신을 객관적으로 점검하고, 참된 믿음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고 좋아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늘 분별하며,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 참 성도, 참 그리스도인임을 증거하는 아름다운 열매를 많이 맺음으로써 이 땅에 천국의 기쁨과 은혜와 위로를 흘려보낼 수 있는 참된 신앙인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