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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4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30 ✦
“아이의 죽음과 솔로몬의 출생”
(사무엘하 12장 15~31절)
[들어가는 말]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한국에 교환학생으로 간 적이 있습니다. 아주 정확하게 30년 전 이맘때입니다. 그때 1년 동안 교환학생으로 나갔는데, 신학대학원에 다니기만 하는 것보다 좋은 교회에서 배우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온누리교회에 알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오라고 하며 협력전도사로 받아주어서 파트타임이었지만 많이 배웠습니다.
처음 가니까 미국에서 왔다고 영어예배 사역을 도우라고 하셨고, 평양에서 태어나신 미국인 선교사님이 맡아서 하고 계셨습니다. 조금 후에는 청년부에서 섭외가 와서, 저와 같이 미국에서 온 다른 전도사님과 저에게 선교사 지망 청년들을 위한 영어회화반을 인도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중급반을 맡고 저는 초급반을 맡았습니다.
또 대학부 담당 목사님이 대학부에 와서 사역을 보고 배우라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까 옆에서 보기만 하지 별로 할 일이 없어서 뭘 할까 생각하다가, 대학생들이 영어에 관심이 많으니까 ‘영어 성경 읽기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열 명쯤 되는 대학생들이 왔는데, 처음 시작하면서 대화할 때 영어로 해보자고 하며 각자 자기 이름이 있지만 영어 이름을 하나씩 지어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학생들이 이름을 지어왔습니다. Paul, Timothy, David, Caleb, Esther, Priscilla, Jennifer 등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학생들 중 군대 다녀온 복학생으로 최고참인 형제가 있었습니다. 나이도 저와 거의 비슷했는데, 성경 지식이 아주 해박하고 사람이 좋아서 모든 대학부 학생들에게 사랑받고 인정받는 형제였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목사가 되어서 지금 미국 동부에서 목회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은 전혀 들어보지 못한 이름을 지어온 겁니다. 그 이름은 바로 ‘제디다이아( Jedidiah)’였습니다. 그래서 다들 그 이름을 처음 듣고서 그게 뭔가 했고, <스타워즈> 영화에 나오는 제다이(Jedi)인 줄 알았습니다. 저도 처음 들었을 때는 ‘Jedidiah가 누구지?’ 그랬는데, 그것이 바로 솔로몬의 다른 이름 여디디야입니다.
다윗이 간음을 통해 밧세바와의 사이에 낳은 아이가 죽은 뒤에 하나님은 두 사람 사이에 솔로몬을 허락하셨고, 또 ‘여디디야’라는 이름까지 직접 주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1. 아이의 죽음 (15~23절)
“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15절)
성경은 여전히 밧세바라는 이름이 아니고 ‘우리아의 아내’라고 부릅니다. 다윗이 다른 사람(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자기 아내로 취했음을 계속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는데, 하나님의 징계가 임하여서 아이가 중병에 걸리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때 다윗은 아기를 위해 하나님께 금식하며 간구합니다.
“16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다윗이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17 그 집의 늙은 자들이 그 곁에 서서 다윗을 땅에서 일으키려 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과 더불어 먹지도 아니하더라” (16-17절)
다윗이 금식하면서 안에 들어가서 밤새 엎드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서 ‘인큐베이션’이라고 부르는데 그 당시 이런 관습이 있었습니다. 어떤 슬픔을 당했을 때 금식하면서 침상 위가 아니라 땅에서 자는 겁니다. 얇은 겉옷 같은 것을 펼쳐놓고 그렇게 했습니다.
가끔 보면 목사님들이나 믿음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분들이 교회당에 와서 땅바닥에 엎드려 기도하다가 밤에도 철야를 하겠다고 땅에 엎어져 기도하다가 잠도 땅에서 자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것이 바로 이런 데서 나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왕의 침상이 얼마나 화려하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거기서 잠을 안 자고 땅에 엎드려 밤에도 계속 거기 있었다는 겁니다. 그만큼 절실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다윗의 모습을 봅니다. 이러한 다윗을 보며 이 아이를 향한 아버지로서의 깊은 사랑을 보게 됩니다. 다윗이 이 아기를 위해 특별한 애정을 쏟는 이유는, 바로 그가 자신의 죄로 인해 태어난 아이였고, 따라서 이 아이의 고통은 곧 자기의 죗값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마음은 차라리 하나님이 이 고통을 아이가 아니라 자기에게 쏟으시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이 아이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저에게 징계를 내려주십시오.’ 그런데 아이가 앓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모든 일을 멈추고 금식하며 밤낮으로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지금 다윗에게 아들이 없어서, 이 아들이 유일한 아들인데 죽으면 안 되니까 이러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은 아들들이 많았습니다. 이미 여러 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매달립니다.
바로 이런 점이 다윗의 위대함을 보여줍니다. 아무리 자기가 잘못했고 징계가 임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왕이 땅바닥에 엎드려 금식하고 기도하는 게 쉬운 일입니까? 우리가 그렇게 하려고 해도 쉬운 일이 아닌데, 환경이 훨씬 좋지 않았던 고대사회에 왕이 이렇게 했다는 것, 그것도 평민이면 몰라도 왕으로서 이렇게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다윗은 그가 완벽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맞는) 사람이었던 게 아닙니다. 그는 전혀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가 완벽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동안 얼마나 많이 살펴보았습니까? 특히 밧세바와의 사건을 통해 그는 죄인 중의 죄인임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렇게 늘 자신의 죄를 바로 깨닫고 하나님 앞에 자기 마음을 쏟아놓는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위대함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위대한 믿음의 사람,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이러한 진실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완벽함을 기대하시겠습니까?
제가 아까 아침에 이를 닦고 샤워하고 나와서 ‘가만, 내가 이를 닦았나, 안 닦았나?’ 헷갈리는 겁니다. 여러분, 그런 적이 없으십니까? 방에 있다가 거실로 나왔는데 ‘내가 왜 나왔지?’ 그런 적이 한 번도 없는 분은 제게 이야기해주십시오.
우리는 얼마나 실수를 많이 합니까? 얼마나 잘못을 많이 합니까? 얼마나 죄를 많이 짓습니까? 여러분, 이렇게 우리는 불완전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사랑해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뭘 잘해서가 아닙니다. 잘나서가 아닙니다. 그게 하나님의 은혜이고 자비입니다. 전혀 불쌍히 여겨주실 필요가 없는데 불쌍히 여겨주시고, 잘해주실 이유가 없는데 잘해주십니다.
솔직히 우리가 하는 것 하나하나 따져서 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판단하셔서 벌을 주시거나 상을 주시거나 하면, 상이 많겠습니까, 아니면 벌이 많겠습니까? 이건 비교가 안 됩니다. 우리가 상을 받을 것은 솔직히 몇 개 안 됩니다. 전부 벌을 받아야 마땅한 것들인데도 벌을 면해주시는 것이 자비입니다. 불쌍히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은 바로 그것을 깨닫고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불쌍히 여겨주시는구나.’라고 하며 회개하고, 또 하나님께 나오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다윗이 아픈 아이를 위해 금식하며 기도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이레 만에 그 아이가 죽으니라 그러나 다윗의 신하들이 아이가 죽은 것을 왕에게 아뢰기를 두려워하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아이가 살았을 때에 우리가 그에게 말하여도 왕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셨나니 어떻게 그 아이가 죽은 것을 그에게 아뢸 수 있으랴 왕이 상심하시리로다 함이라” (18절)
그러한 확신과 간절한 기도와 금식과 땅에서 잔 것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는 7일 만에 죽습니다. 그렇게 기도했는데 죽은 겁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8일째 되는 날 할례를 받아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이 됩니다. 이것은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재확인하실 때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으라고 명령하신 데서 시작된 것입니다. 또한 할례를 받고 난 다음에 이름을 받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가 7일 만에 죽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아이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보지도 못한 채 죽은 비극이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아이의 이름을 아직 안 지었으니까 이름이 없이 그냥 ‘아이’라고 나오는 겁니다.
신하들은 두려워하며 다윗에게 아이의 죽음 소식을 전하기를 꺼립니다. 아이가 살아 있을 때도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금식하며 식음을 전폐했는데, 이제 아이가 죽은 것을 알면 왕이 ‘나도 죽겠다’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신하들이 밖에서 그런 식으로 웅성거리는 소리를 통해 오히려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다윗이 그의 신하들이 서로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 그 아이가 죽은 줄을 다윗이 깨닫고 그의 신하들에게 묻되 아이가 죽었느냐 하니 대답하되 죽었나이다 하는지라” (19절)
이것이 얼마나 아이러니입니까? 왕이 아이가 죽은 것을 아시면 큰일 난다고 하며 소식을 알리기를 꺼리고 있는데, 오히려 자기들이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다윗이 그것을 알았으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보십시오. 걱정하는 것은 다 쓸데없는 겁니다.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걱정은 다 쓸데없는 겁니다. 오히려 염려하기 때문에 상황이 더 악화될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웅성웅성하지 않았으면 다윗이 몰랐을 텐데, ‘왕이 아시면 안 되는데...’라고 하다가 오히려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아이가 죽었음을 확인한 다윗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은지라” (20절)
다윗은 아이의 죽음을 확인하자마자 지체하지 않고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옷을 갈아입은 후에 여호와의 전에 나아가 경배하고 돌아와 음식을 먹습니다. ‘여호와의 전’은 성전을 가리키는데, 당시 성전은 없었습니다. 나중에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짓게 되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법궤가 있는 곳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아이가 죽은 것을 알고 난 다음에 신하들이 염려한 것과는 반대로 행동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심판이 이루어지자 곧바로 그것을 겸손하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다윗의 행동을 의아하게 여긴 신하들이 질문합니다.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그를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이 일이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 (21절)
신하들이 보기에 다윗의 행동은 이상했습니다. 다윗이 아이의 병이 낫기를 위해서는 슬픈 마음으로 금식하며 땅에 엎드려 기도했는데, 아이가 죽고 나니까 오히려 기운을 차렸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간절히 기도하다가 아이가 죽으면 더욱 낙담하며 슬퍼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의아해하는 신하들의 질문에 대해 다윗은 매우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대답을 합니다.
“22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23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22-23절)
다윗은 자기가 금식한 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입어 아기의 생명을 회복해주실까 하는 마음으로 한 것이고, 금식을 중단한 것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졌으므로 그것 때문에 계속 근심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고 합니다. 그나마 아이가 살아 있을 때는 혹시라도 하나님이 자비를 베풀어주시지 않을까 하여 그것을 구하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아이가 죽고 난 다음에는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이미 다 끝났다는 겁니다.
다윗은 주님의 자비에 대한 확신뿐 아니라, 어떤 일이 벌어져도 거기에는 주님의 선한 뜻이 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참 신앙인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언제 매달려야 하고 언제 포기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신앙인으로서 바로 이런 것을 잘해야 합니다. 언제 간절히 매달려야 하는지, 언제 중단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이 이것을 거꾸로 합니다. 간절히 매달려야 할 때는 별로 기도하지 않고, 그만해야 할 때는 간절히 해보려고 하는 겁니다. 그것은 참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영적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영적 분별력이 어떻게 오겠습니까? 급한 일이 생길 때만 기도한다고 해서 오는 게 아닙니다. 다윗이 어려움 속에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비록 그가 큰 죄를 범하기는 했지만 평소에 늘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시로 표현하는 예배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평소에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지, 갑자기 무슨 일이 터졌을 때 하는 것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또 갑자기 하면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과 동행할 때 영적 분별력을 주십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도 받아들이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회개한 뒤에 간절히 금식하고 기도하며, 그 후에는 어떤 결과가 나와도 받아들이고 그런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는, 다윗과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따라가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떻습니까?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 그런가 보다 하는 것이지, 만약 내가 이 상황이라면 어떻겠습니까? 간절히 금식하며 ‘제발 아이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살려주십시오.’라고 기도했는데 죽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좀 너무하시네. 아니, 내가 이렇게까지 기도했는데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는가?’라는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내가 어떤 기도 제목을 중보기도실에 내놓고, 나도 새벽에 기도하고 금식하며 기도하고 철야하며 기도했는데도 안 됐습니다. 오히려 안 되는 길로 되고 막히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향해 어떤 마음이 드시겠습니까? 다윗처럼 이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으십니까?
서운함과 섭섭함이 들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슬그머니 교회에 안 나옵니다. 누군가가 연락해서 왜 안 나왔느냐고 하면, 몸이 좀 안 좋아서, 바빠서, 일이 있어서 그랬다고 핑계를 댑니다.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께 대해 서운한 겁니다. 그래서 성경도 잘 읽히고, 기도도 안 되고, 그러다 겉돌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참 안타까운 경우입니다.
내 뜻대로 안 되면 그것이 잘못입니까?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원하는 대로 기도가 이뤄지지 않으면 잘못된 것입니까? 누가 봐도 이것은 아니라는 상황도 있지만, ‘왜 하나님이 안 들어주시는가? 이건 틀림없이 되어야 하는 것인데 왜 하나님이 안 해주시는가?’라고 할 때조차 그 뒤에 우리가 모르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벌어진 일들과 지금 내 눈앞에 벌어지는 일밖에 알지 못합니다. 아니, 그것도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를 하나의 점과 같이 한 번에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전 세계를 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일이 돌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좋은지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되었다고 그게 틀린 것이나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선한 길로 인도해주시려는 뜻일 수 있습니다.
이전에 그런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대통령 선거에 있어서 이전이나 지금이나 아주 비슷합니다. 자기가 누구를 지지했는데 다른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라가 망했다.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버리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그 전과 다른 쪽 사람이 자기가 지지하는 후보가 안 되고 다른 후보가 되었을 때 똑같이 합니다. ‘나라가 망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런 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까? 그것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건 당장 눈앞에 벌어지는 일과 이전에 일어났던 일 중 아주 일부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지 못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100이라고 하면 우리가 그중 얼마나 알고 있겠습니까? 아마 10도 채 알지 못할 겁니다. 하나님은 100이면 100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나? 그렇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도 왜 안 해주시나?’ 그런데 그게 오히려 우리에게 선한 뜻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믿는 것이 신앙인입니다. ‘비록 내 뜻대로 되지 않았더라도 분명히 여기에는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다. 분명히 내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비밀이 있다. 그래서 이렇게 하신 것이다.’라고 하며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럼 하나님은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실까?’ 하며 그것을 찾고 더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이 신앙인이고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입니다.
참된 기도의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기도하시며 뭐라고 하셨습니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가져가 주십시오.” 그런데 그다음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나의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뤄지기를 원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참된 믿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 이것을 해주십시오.’라고 솔직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안 되었을 때 거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고 하며 그것을 찾아 나가는 사람입니다. 자기 뜻대로 안 된다고 다 관두겠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다윗은 자기 뜻대로 안 되었다고 해서 삐져서 금식 기도를 중단한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며 순종했기 때문에 ‘이제 내가 정상적인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겠다.’라고 한 겁니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후회하거나 여전히 과거를 돌아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왜 그렇습니까? 깊이 들어가 보면,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루어지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간절함으로 기도해야 하겠지만, 이미 이루어진 과거의 일에 계속 매달리는 것은 잘못된 태도임을 기억하고, 오히려 이 상황에서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인도하실지를 찾아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여러분, 혹시 과거에 일어난 일 때문에 그것에 대해 후회하며 계속 생각하면서 사는 것이 있습니까? ‘그때 이렇게 되었어야 했는데, 하나님이 너무하시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라고
이미 끝났는데도 계속 생각하고 거기에 매여서 제대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을 빨리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 하나님께 여쭤보며 찾아 나가는 다윗과 같은 태도가 필요합니다.
2. 회복된 하나님의 사랑 (24~25절)
다윗을 중심으로 한 이 모든 사건은 다윗뿐 아니라 그의 아내가 된 밧세바에게도 엄청난 충격과 고통을 가져다주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평안하던 과거의 가정은 깨졌습니다. 충직한 남편 우리아는 전쟁터에서 죽었습니다. 이제 다윗과의 삶에서 왕비가 되어 행복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자신이 낳은 아이마저 하나님의 심판으로 잃고 말았습니다. 밧세바의 이러한 고통스러운 마음을 잘 알고 있던 다윗은 그녀에게 들어가 위로합니다.
“24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25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 (24-25절)
여기서 처음으로 밧세바가 ‘다윗의 아내’로 불립니다. 이제는 바뀝니다. 하나님은 다윗과의 언약을 잊지 않으시고, 성실함으로 계속해서 자비와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래서 밧세바는 아이를 가지고 아들을 낳아서 이름을 솔로몬이라고 합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평화’라는 뜻입니다. ‘평화’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바로 ‘샬롬’입니다. 솔로몬은 샬롬과 같은 어원입니다. 솔로몬을 정확히 발음하면 ‘숄롬온’입니다.
누가 솔로몬이라고 지었는지 정확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했을 수도 있고 밧세바가 했을 수도 있는데, 가장 타당한 것은 둘이 같이 지은 것입니다. 밧세바의 의견이 분명히 들어간 겁니다. 밧세바는 이때 그 어느 것보다 하나님의 평화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사극 좋아하시는 분들은, 사극을 보면 궁중에서 벌어지는 암투가 항상 나오지 않습니까? 왕이 있고 중전이 있고 후궁들이 있는데, 중전은 아이가 없고 후궁이 아이를 낳았다가 늦게 중전이 아들을 낳으니까, 왕자들 사이에서 다음 왕은 누가 될 것이냐, 세자는 누가 될 것이냐 하고 치열한 암투가 벌어집니다.
그런 것이 조선시대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도 다 있었습니다. 다윗에게 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나중에 열왕기서에 보면 누가 차기 왕이 될 것이냐에 대해 암투가 벌어집니다. 그런 상황에서 밧세바가 다윗의 아내로 들어온 겁니다.
지금 이미 다른 아내들도 있고 아들들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죽었습니다. 누가 좋아했겠습니까? 다른 아내들과 아들들입니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은근히 좋아하는 겁니다. 자기는 슬퍼하는데 남들은 좋아하고 있습니다. 티를 안 내려 하지만 다 느껴집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제 또 다른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면 최소한 1년이 또 지난 게 아닙니까? 그 사이 궁중에서 2년 정도를 보낸 때인데, 밧세바가 정확히 어떤 성격이었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그런 암투가 벌어지는 왕궁 안에서 얼마나 마음이 힘들었겠습니까?
자기 아이는 죽었고, 새로 아이를 낳았는데 주변에서 잡아먹지 못해 눈을 번뜩이는 정적들로 가득합니다. 후궁들뿐 아니라 그들의 아들들도 그렇고, 또 그들을 지지하는 신하들도 그렇고, 얼마나 무서운 곳입니까? 결코 아름답고 낭만적인 곳이 아닙니다.
그때 자기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평화입니다. 그것도 그냥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평화입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의 평화가 필요하다.’라고 해서 솔로몬이라고 이름을 지은 겁니다. 그냥 지은 게 아닙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나단을 보내셔서 ‘여디디야’라는 이름을 직접 지어주십니다. 성경의 주를 보면, 여디디야는 ‘여호와께 사랑을 입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디디야는 하나님께서 직접 지어주신 이름임에도 불구하고 이후에 다시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금 전 궁중 암투의 시각에서 정치적 해석을 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내려주신 이름이기 때문에, 다른 왕자들은 그렇지 않았는데 솔로몬에게는 여디디야라는 이름을 하나님이 직접 주셨으니 얼마나 시기와 질투를 받았겠습니까? 그래서 이후에는 이 이름을 쓰지 않았다는 겁니다. 실제로 여디디야는 여기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여디디야는 ‘여호와께 사랑을 입음’ 또는 ‘여호와가 사랑하는 자’라는 뜻인데, 놀랍게도 이 이름은 ‘다윗’과 거의 같은 뜻입니다. 다윗도 ‘사랑받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여디디야는 다윗의 개정판인 셈입니다.
여디디야라는 이름은 다윗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처럼, 솔로몬이 여러 아들들 중에서 다윗의 후계자로 왕위를 이어갈 것을 암시해주는 표시가 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다윗을 징계하셨지만 영원히 그를 버리신 것이 아니며, 솔로몬을 다윗의 왕권을 이을 ‘또 다른 다윗’으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그 이름을 통해 암시해주고 있는 겁니다.
놀라운 복선이 여기 깔려 있습니다. 성경이 아무렇게나 기록된 게 아닙니다. 굉장히 치밀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결코 우리보다 무식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굉장히 똑똑한 사람들입니다.
이전에 태어난 아이는 죽었는데, 똑같은 사람들인 다윗과 밧세바에게서 두 번째로 태어난 솔로몬은 하나님이 사랑해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다윗의 자세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께 온전한 회개와 애통하는 심령이 있었기에 회복되었고, 하나님은 이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저번에도 잠깐 언급했지만, 왜 부모가 잘못했는데 아이가 죽습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말이 있고 여기서 다루기에 적절하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아이가 죽은 것이 결코 아이에 대한 징계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부모에 대한 징계였는데, 왜 그랬는지는 우리가 알 수가 없습니다. 나중에 하나님께 여쭤봐야 알 수 있는 것인데, 여기서는 그것이 핵심이 아닙니다. 다윗의 진실한 회개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부분적으로 회복시킨 게 아니라 완전히 회복시켰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번 같이 읽으며 기도했던 시편 51편을 통해 다윗이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해달라’고 기도한 것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다윗의 기도에 대한 응답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루시는 과정입니다. 우리 인간의 죄와 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의 선한 뜻을 이루어가신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기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다윗처럼 간절한 기도와 진실한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를 체험하게 되고, 그런 과정에서 하나님의 선한 뜻이 결국 이루어지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진실하게 기도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도구로 계속해서 쓰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다윗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3. 암몬 점령 (26~31절)
이제 이야기가 갑자기 바뀝니다.
“요압이 암몬 자손의 랍바를 쳐서 그 왕성을 점령하매” (26절)
본문은 계속해서 11장 이후의 사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1장에서 암몬과 전쟁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것의 계속입니다. 요압은 여전히 암몬의 수도 랍바를 정복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아의 죽음과 다윗의 흔들림, 그리고 다윗이 낳은 아이의 죽음 등으로 인해 전쟁에 소홀한 탓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솔로몬이 태어난 다음의 이야기인지 아니면 그냥 이어진 이야기를 여기에 넣어 놓은 것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아가 죽은 후 밧세바가 아기를 낳고, 그 아기가 죽고 솔로몬이 태어난 것의 기간을 생각해보면, 암몬과의 전쟁은 1년 이상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싸우다 드디어 요압이 랍바를 점령하게 됩니다. 이로써 10장 이후 다윗이 보낸 조문객을 모욕함으로 발생한 암몬과의 전쟁은 다윗과 이스라엘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것은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또 다른 은혜입니다.
“27 요압이 전령을 다윗에게 보내 이르되 내가 랍바 곧 물들의 성읍을 쳐서 점령하였으니 28 이제 왕은 그 백성의 남은 군사를 모아 그 성에 맞서 진 치고 이 성읍을 쳐서 점령하소서 내가 이 성읍을 점령하면 이 성읍이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을까 두려워하나이다 하니” (27-28절)
예루살렘에서 랍바까지는 44-45마일 정도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다윗이 거기까지 군대를 이끌고 가는 데에는 며칠 걸리게 됩니다. 그런데 26절에서는 ‘왕성’이라고 되어 있고, 27절에는 ‘물들의 성읍’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랍바는 수원지를 지키는 ‘물들의 성읍’과 왕궁을 지키는 ‘왕의 성읍’이라는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압은 도시에 물을 공급하는 수원지를 점령했기 때문에 이제 도시 전체가 함락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정복하기 위한 공격을 하기 직전에 그 영광을 자기가 차지하지 않고 왕인 다윗이 차지하도록 전령을 다윗에게 보내어 최후의 일격을 가하시라고 요청한 겁니다.
“29 다윗이 모든 군사를 모아 랍바로 가서 그 곳을 쳐서 점령하고 30 그 왕의 머리에서 보석 박힌 왕관을 가져오니 그 중량이 금 한 달란트라 다윗이 자기의 머리에 쓰니라 다윗이 또 그 성읍에서 노략한 물건을 무수히 내오고 31 그 안에 있는 백성들을 끌어내어 2)톱질과 써레질과 철도끼질과 벽돌구이를 그들에게 하게 하니라 암몬 자손의 모든 성읍을 이같이 하고 다윗과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라” (29-31절)
다윗이 금방 왔는데, '왕의 머리'에 있는 보석 박힌 왕관을 썼다고 되어 있습니다(30). ‘왕의 머리’는 실제 왕의 머리를 가리킬 수도 있지만, 우상의 머리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암몬 자손이 섬기던 신이 ‘밀곰’(몰렉)인데, 가장 큰 특징은 자기 자식을 불태워 몰렉에게 바치는 인신 제사를 했다는 겁니다. 그것이 암몬 자손의 악함이었습니다.
밀곰(몰렉) 우상 머리에 씌워놓은 것을 ‘왕의 머리’라고 한 것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왕관의 중량이 금 한 달란트인데, 그것이 약 75파운드 정도가 됩니다. 웬만한 큰 아이 무게에 해당하는데, 그것을 누가 머리에 늘 쓰고 있겠습니까? 말이 안 됩니다. 다윗도 상징적으로 잠깐 썼다 벗은 것이지, 계속 썼다가는 목에 디스크가 생겼을 겁니다. 다윗은 암몬 왕도 잠깐 썼다 벗고 평소에는 주로 밀곰(몰렉) 우상의 머리에 씌워놓던 왕관을 자기가 대신 취함으로써 ‘이제는 내가 암몬 자손을 다스리는 왕이다.’ 하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31절의 ‘톱질과 써레질과 철도끼질과 벽돌구이’는 랍바 성읍을 정복한 다윗이 암몬 백성들을 끌어내 힘든 노역을 시킨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다른 때와 상당히 다릅니다. 다른 데를 정복했을 때는 이런 식으로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유독 암몬 자손에게 혹독하게 대합니다.
물론 이것은 그들이 악하게 나왔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다윗이 밧세바와의 사건과 우리아의 죽음 등을 겪으면서 비록 회개하고 용서받고 솔로몬도 낳았지만, 마음이 상당히 상한 상태였다는 겁니다. 마음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당히 강퍅해져 있다는 것을 암시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죄를 지었습니다. 회개했습니다. 용서받았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죽었지만 또 다른 아들 솔로몬을 받으며 위로를 받았습니다. 또 전쟁에서 승리를 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상한 것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 감정의 부분이 무서운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을 소위 ‘혼의 구원’ 또는 ‘받는 구원’이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으면, 그 후에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을 살다가, 세상을 떠날 때 완전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바로 이 ‘혼의 구원’에서 ‘혼’ 즉 ‘인격’이 무엇입니까? ‘지정의’입니다. 아는 것, 느끼는 것,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히 죄를 범할 경우에는 감정이 많이 상합니다. 사탄이 우리를 가장 많이 공격하는 통로가 감정입니다.
지금 다윗은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이미 용서받고 위로도 받았지만, 그러나 여전히 감정의 상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것이 암몬을 대할 때 다른 곳에 비해서 이렇게 혹독하게 대하는 것으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다윗은 계속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에 잘 유지하는 가운데 생을 마감할 수 있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다윗도 진작에 무너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은혜 한두 번 받았다고, 삶 공부 몇 개 했다고 쉽게 변화되는 게 아닙니다. 목장에 나가서 열심히 하고 교회에서 섬긴다고 확 변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을 꾸준히 해야 하는 겁니다. 꾸준한 신앙생활을 해야만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다윗의 이런 모습이 아니라 더 악한 모습, 남들을 향해 더 혹독한 모습으로 상처를 주는 것이 계속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이렇게 잘못도 많고 불완전한 사람이었지만,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얼마나 부족하고 불완전합니까? 그러나 매일매일 하나님과 끊임없이 동행함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