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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18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32 ✦
“압살롬의 보복 살인”
(사무엘하 13장 23~39절)
[들어가는 말]
며칠 전인 지난 14일 서울 지하철 신당역에서 너무나 슬프고 끔찍한 살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지하철 여자 화장실을 순찰하던 28세 여성 역무원을 같은 직장 입사 동기였던 31세 남성이 흉기로 찔러 살해한 사건입니다. 이런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슬프고 안타까운데, 이 여성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있었는데도 그것을 놓친 바람에 이렇게 되었다는 점이 더 안타깝습니다.
가해자는 3년 전부터 입사 동기인 피해자에게 수백 개의 문자를 보내거나 따라다니면서 지속적으로 스토킹해왔습니다. 그래서 피해자는 불법 촬영과 스토킹 명목으로 가해자를 2번 고소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그렇게 쫓아다닌다고 그게 무슨 대수인가?’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쫓김을 당하는 입장에서는 공포 그 자체입니다. 어두운 데서 갑자기 나타날 때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공포에 질려서 일도 제대로 못하고 생활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스토킹입니다.
그러나 법원은 경찰이 청구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는데, 그 이유가 너무 기가 막힙니다. 공인회계사 자격증이 있고 주거가 일정하며 도망갈 가능성이 없다고 해서 구속영장을 기각했습니다. 경찰과 검찰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계속 접근하는데도 그것을 미리 막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이날은 가해자가 불구속 상태로 재판받던 중 이미 검찰로부터 9년을 구형받은 상태에서 1심 선고가 나오기 하루 전이었습니다. 경찰이 청구한 구속영장을 법원에서 도주의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기각하지 않고 구속하기만 했어도 피해자의 소중한 목숨을 살릴 수 있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시민들이 분개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가해자는 작년에 불법 촬영 혐의로 고소된 후 직장에서 해고되었지만, 여전히 직장 컴퓨터 내부망을 통해서 피해자가 14일 오후 6시부터 야간근무를 한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스토킹으로 기소되어 해고된 사람이더라도, 재판이 끝나고 징계 절차가 시작되어야 비로소 서울교통공사 내부망 사용 권한이 박탈되어 그때부터 그 사람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법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가해자가 재판으로 형이 확정되고 징계 절차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얼마든지 내부망에 접속해서 피해자의 개인 연락처, 근무지 정보, 근무 형태, 담당 업무, 어디서 몇 시에 뭘 하는지 등을 다 확인하는 것이 법적으로 가능하다니까, 정말 이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경찰은 동료 여성을 살해한 혐의를 받는 가해자에게 원래 살인 혐의를 적용했는데, 살인죄보다 형량이 무거운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특가법)상 ‘보복살인’으로 변경했다고 어제 밝혔습니다. 그가 흉기를 미리 준비한 점, 한 시간 넘게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점, 위생모를 쓰고 현장에 머리카락 등 체모를 남기지 않으려 했던 점 등이 범죄를 미리 계획한 정황이 되기 때문입니다. 특가법상 보복살인은 사형, 무기징역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게 되어 있어, 최소 징역 5년 이상인 살인죄보다 형이 무겁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압살롬이 저지른 살인이 바로 이 보복 살인입니다. 일반 살인보다 죄질이 좋지 않습니다. 그는 계획적인 범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요즘에도 살인보다 보복 살인을 한 피의자에게 더 무거운 형을 내리는데, 그렇다면 압살롬은 2년 동안이나 준비해서 보복 살인을 실행한 것에 대해 어떤 심판을 받습니까? 그것을 오늘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압살롬의 복수 (23~29절)
다윗에게 여러 아들들이 있었는데, 압살롬은 다윗의 셋째 아들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스라엘 북쪽의 그술이라는 나라의 왕 달매의 딸 즉 공주 마아가였고, 그는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 왕이 된 후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장남 암논과 둘째 길르압은 다윗이 도망자 시절에 광야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왕의 아들인 왕자로 태어난 첫 번째 아들이 바로 압살롬입니다. 그러니까 태어날 때부터 큰형과 작은형과는 자란 배경부터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첫째 암논은 계획 나오지만, 둘째 길르압은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의 아들로서, 일찍 죽었거나 아니면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 안 나오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압살롬은 자연스럽게 일찍부터 암논 다음으로 왕위 계승 서열 2위였습니다. 이러한 압살롬에게 왕권에 대한 야심이 하나도 없었을 리가 없습니다. 맏아들인 암논만 제거한다면 압살롬이 왕위를 이어받을 가능성이 아주 커집니다.
그런 상황에서 압살롬이 암논을 제거할 좋은 명분이 생겼습니다. 바로 자기 누이동생 다말이 암논에게 성폭행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버지 다윗은 거기에 대해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따라서 압살롬 스스로 복수를 책임지고자 하는 마음을 키워가게 된 것입니다.
학자들이 볼 때, 자기 누이동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랬다고 보기도 하지만, 어떤 학자들은 압살롬이 왕이 되고자 하는 야심 때문에 자기 누이동생 다말을 이용한 게 아닌가 하고 보기도 합니다. 충분히 설득력 있는 이야기입니다. 비록 다말이 성폭행을 당했더라도 그렇게 한 사람을 사형시키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를 죽이려 한 것을 보면 왕권에 대한 야심이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암논의 세력이 강하고, 다말 사건 때문에 압살롬에 대해 암논이 경계하고 있는 상황에서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아주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사극을 보면 얼마나 급박하게 상황이 돌아갑니까? 왕자들 사이에서 누가 권력을 차지할 것이냐 하며, 이쪽 왕자에게 붙은 신하들과 저쪽 왕자에게 붙은 신하들 사이에서 파가 갈라져서 치열하게 싸웁니다. 밤에도 움직이고 새벽에도 움직이며 자기 쪽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런데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저쪽에서 군사를 동원할 수 있으니까 조심하며 몰래 만나는 모습 등이 나옵니다. 그런 것은 우리 조선시대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그보다 훨씬 오래전인 고대사회 이스라엘에도 다 있었습니다. 어느 인간 사회에도 그런 게 다 있는 겁니다.
압살롬은 암논에게 다말에 대하여 아무 문제 제기를 하지 않고, 오히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암논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압살롬이 양털을 깎는 날 축제에 암논을 초대했을 때, 사이가 나빴거나 압살롬이 자기를 벼르고 있다고 느꼈다면 암논이 거기 갔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 이 년 후에 에브라임 곁 바알하솔에서 압살롬이 양털을 깎는 일이 있으매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을 청하고” (23절)
이제 2년의 세월이 흘렀고, 압살롬은 2년 동안이나 침묵하며 조용히 암논에 대한 복수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말 사건을 결코 잊지 않고 있던 압살롬은 이제 암논을 죽일 기회만 노리고 있습니다. 사실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려는 동기는 이중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누이동생 다말에 대한 복수와 함께, 왕권에 대한 야심이 동시에 있었던 겁니다. 그건 분명합니다.
지금도 정치인들이 뭔가를 실행할 때 보면, 먼저 대의명분이 필요하고 동시에 자기를 위한 정치적 이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움직입니다. 대의명분은 있는데 정치적 이득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고, 이득은 있는데 대의명분이 약하면 쉽게 움직이기 힘듭니다. 압살롬에게 대의명분은 누이동생 다말이 암논에게 성폭행 당한 것에 대한 복수이고, 정치적 이득은 왕권입니다.
바알하솔은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약 15마일 떨어진 산 위의 고지로, 목축하기에 적합한 곳이었습니다. 압살롬은 그곳에서 양을 길렀는데, 고대 이스라엘에서 양털 깎기는 곡식을 수확할 때처럼 1년에 한 번 이뤄지는 큰 축제의 시간이었습니다.
압살롬이 거기서 양을 쳤지만, 예루살렘에서 15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바알하솔에서 축제를 벌인 것도 암살 계획과 다 연관이 있습니다. 긴급한 상황이 발생할 때 예루살렘에서 지원군이 오더라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만한 거리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차로 가니까 15마일은 가깝지만, 그 당시 말로 달리거나 걸어 가면 15마일은 상당한 거리입니다. 그래서 이곳은 왕이나 중요 직책에 있는 사람들이 가기에는 위험 부담이 따르는 거리입니다.
압살롬은 치밀하고 철저하게 복수를 계획했고, 그 첫 단계로 모든 왕자들을 초청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암논을 살해하고자 하는 의도를 숨긴 채 실행하려는 것입니다. 사실 양털 깎기 축제에 참석하느라 모든 왕자들이 예루살렘 궁을 떠나 거기로부터 꽤 거리가 있는 저 북쪽의 바알하솔에서 축제를 벌이며 며칠을 머문다는 것은 왕의 허락이 있어야 하는 일입니다.
“압살롬이 왕께 나아가 말하되 이제 종에게 양 털 깎는 일이 있사오니 청하건대 왕은 신하들을 데리시고 당신의 종과 함께 가사이다 하니” (24절)
첫째 단계로는 왕자들을 초청했고, 두 번째 단계로는 왕과 신하들을 다 초청합니다. 그는 자신의 양털 깎는 축제일을 암논 살해의 디데이로 정하고, 그것을 숨길 목적으로 다윗의 모든 아들들을 잔치에 초청한 다음 다윗과 그의 신하들까지 다 초청합니다. 그때 다윗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왕이 압살롬에게 이르되 아니라 내 아들아 이제 우리가 다 갈 것 없다 네게 누를 끼칠까 하노라 하니라 압살롬이 그에게 간청하였으나 그가 가지 아니하고 그에게 복을 비는지라” (25절)
다윗은 분명한 거절 의사를 밝힙니다. 하지만 압살롬이 실망하지 않도록 “내 아들아”라고 부릅니다. 가지 않겠다는 표면적인 이유가 뭡니까? “네게 누를 끼칠까 하노라.” 즉, 자기가 왕이니까 수많은 수행원들과 경호원들을 데리고 가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압살롬이 축제를 벌이면서 그 많은 사람을 호스트해야 하니까 비용이 많이 들어갑니다. 특히 왕의 일행이니까 얼마나 잘해줘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경제적 부담을 줄 수 있으니 안 가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진짜 이유가 아닙니다. 물론 압살롬이 왕위 계승 서열 2위로 높지만, 왕자 한 명이 주최하는 양털 깎기 축제에 왕과 신하들과 왕자들이 다 같이 참석하기 위해 수도를 비우고 15마일이나 떨어진 곳으로 간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그때 적이 쳐들어올 수도 있고 반역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의 요청은 사실 무리한 것입니다. 그는 다윗이 거절할 것을 예상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수가 상당히 높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지만 얼마나 서먹한 관계입니까? 다윗이 거절할 것을 압살롬은 미리 다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압살롬도 그게 진짜 이유가 아닙니다. 이제 왕에게 찾아온 진짜 목적을 말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왕이 못 가시면 형 암논을 대신 보내주십시오.’라는 겁니다.
“26 압살롬이 이르되 그렇게 하지 아니하시려거든 청하건대 내 형 암논이 우리와 함께 가게 하옵소서 왕이 그에게 이르되 그가 너와 함께 갈 것이 무엇이냐 하되 27 압살롬이 간청하매 왕이 암논과 왕의 모든 아들을 그와 함께 그에게 보내니라” (26-27절)
암논은 다윗의 장남으로서 왕위 승계 서열 제1순위입니다. 압살롬이 다윗 왕의 거절로 인하여 대신 암논을 초청한 것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왕이 못 가면 그 다음인 왕위 계승 서열 1위가 간다는 것이 얼마나 자연스럽습니까? 그러니까 압살롬과 다윗과 신하들을 다 초청한 것은 진짜로 초청해서 다 오시라는 게 아니라, 못 올 것을 다 알고 암논을 대신 보내주도록 요청하기 위함이었다는 겁니다. 얼마나 머리들이 잘 돕니까?
하지만 암논을 보내달라는 압살롬의 요구에 다윗은 무엇인가 수상한 기미를 느꼈던 것 같습니다. 암논이 다말을 성폭행한 사건이 있었던 후 2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압살롬과 암논이 서로 불편한 관계라는 것을 다윗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다윗은 압살롬의 요구를 들어줍니다. 다윗은 이전에 암논이 다말을 자신의 집에 보내 달라고 요청했을 때 의심 없이 그것을 들어준 것과 같은 실수를 반복한 겁니다. 자기가 안 가겠다고 거절했기 때문에 암논까지 못 보내겠다고 하면 너무 미안합니다. 그리고 암논의 요청을 들어서 압살롬의 누이동생 다말을 보내주었다가 이런 사건이 벌어졌는데, 그에 대해 굉장히 미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정확히 압살롬의 의도를 파악하지도 못한 채 그의 요구를 들어주고 맙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다윗은 암논의 범죄에 간접적으로 참여한데 이어, 이제는 압살롬의 범죄에도 협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갈수록 다윗의 머리가 떨어집니다. 머리가 잘 안 돌고 있습니다. 다윗이 굉장히 총명한 사람이고 믿음의 사람인데, 점점 나이도 들 뿐 아니라 엄청난 죄의 사건 이후 회개했지만, 그것이 그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면서 확실하게 머리가 돌지 않도록 방해하고 있는 겁니다.
“28 압살롬이 이미 그의 종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제 암논의 마음이 술로 즐거워할 때를 자세히 보다가 내가 너희에게 암논을 치라 하거든 그를 죽이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너희는 담대히 용기를 내라 한지라 29 압살롬의 종들이 압살롬의 명령대로 암논에게 행하매 왕의 모든 아들들이 일어나 각기 노새를 타고 도망하니라” (28-29절)
압살롬은 자기 악한 계획을 따라 부하들로 하여금 암논을 죽이게 합니다. 그러나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암논을 죽이는 것은 반역에 해당하는 범죄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암논을 죽이라는 압살롬의 명령을 듣고도 그의 종들은 매우 두려워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는 뭐라고 합니까?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이 말은 ‘내가 다 책임지겠다. 너희에게 책임이 돌아가지 않게 하겠다. 이건 다 내 책임이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담대히 용기를 내라!”라고 하는데, 즉 그들이 할 일은 주저하지 말고 암논을 쳐 죽이는 것이며 자기가 다 책임지겠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담대히 용기를 내라’라고 했는데, 이것을 히브리어로 보면 ‘대인이 되어라’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용기를 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대인’이라는 말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이상적 남자를 가리키는 단어인데, 그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너는 이렇게 하면 대인이 될 수 있다. 누구나 우러러볼 수 있는 이상적인 남자가 될 수 있다.’라고 하며 자기의 명령이 잘못된 게 아니라 정의로운 명령임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암논이 벌을 안 받았는데, 이제 우리가 정의를 집행하는 것이다.’라고 하며 살인을 정당화하는 겁니다.
압살롬은 암논에 대한 개인적인 분노 때문에 그를 계획적으로 살해합니다. 우발적인 살인보다 이런 보복 살인은,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에도 더욱 악한 행위입니다.
그런데 성폭행 가해자인 암논과 살인을 저지른 압살롬의 모습이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너무 똑같습니다. 자기 의도를 감추기 위해 거짓말을 하거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점이 아주 유사합니다. 또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종들에게 대신 시킨 것도 너무나 똑같습니다.
두 사람이 왜 이렇게 비슷합니까? 그들의 내면이 닮았기 때문입니다. 즉, 성폭행을 저지르게 된 암논의 음욕이나 살인을 저지른 압살롬의 미움과 분노는 자신의 이익과 만족만 생각하는 빗나간 자기애의 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암논이나 압살롬의 이런 악한 행동은 전부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생각하기보다 자기만족만 위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내가 뭘 느끼냐, 내가 만족하냐’에만 관심이 있지, 다른 사람은 고통을 당하든 말든, 피해를 입든 말든 아무 상관을 하지 않습니다. 이런 악한 마음이 두 사람 다 똑같습니다.
이처럼 악한 행동의 모든 이면에는 잘못된 자기애(자기 사랑)의 죄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도 똑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고 해도 그 안에 옛 속성이 남아 있습니다.
이번 컨퍼런스에 가서 <확신의 삶> 과정을 세 번째 들었는데, 우리에게는 두 가지 속성이 있다는 것을 다시금 배웠습니다. ‘옛 속성’이 있고 ‘새 속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의 옛 속성과, 예수님을 믿고 나서 새롭게 된 속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후 예수님을 따라서 사랑과 용서와 헌신의 삶을 살지만, 불쑥불쑥 옛날 모습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옛날 모습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이것을 착각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천사처럼 변하고 죄를 절대 짓지 않는 게 아닙니다. 죄를 안 짓는 게 아니라, 죄를 짓는 옛 속성이 남아 있지만, 그것을 새로운 속성으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없애는 게 아니라 다스리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없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의 이런 죄악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 중심으로 사는 모습으로 변하려면,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가 있어야 하고 그 아래 철저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죄악을 철저히 인정하고, 그런 모습이 보일 때마다 즉시 또 온전히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 안에 계속 거하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믿는 사람도 은혜에서 멀어지면 죄의 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만, 은혜의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지 않으면 죄의 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옛 속성 때문입니다. 죄를 이기는 길은 내 힘으로 죄와 맞서는 게 아닙니다. 죄를 이기는 길은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빠져들고 젖어 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나 자신을 은혜의 자리에 계속 갖다 놓는 겁니다.
이런 예배의 자리에 오고,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삶 공부를 하고, 목장에 가고, 가서 나누고, 사랑하고 섬기고 봉사하고, 전도하는 등,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나를 계속 붙여 놓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죄의 길로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한눈을 팔고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도 넘어졌는데 우리라고 안 그러겠습니까? 우리는 훨씬 더 연약한 사람들인데 안 그러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예배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애쓰며 나아갈 때 이길 수 있습니다.
사실 다윗이 조금만 더 민감했더라면, 조금만 더 신경을 썼더라면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 겁니다. 결국 이것은 암논의 죄를 보고도 징계하지 않았고, 압살롬의 수상한 움직임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지도 않았던 다윗 때문에 일어난 결과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다윗이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방조했습니다. 간접적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내 주변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 민감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건 내 일이 아니니까 나는 상관없어.’라고 할 게 아닙니다. 그렇게 할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그 죄에 동조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제하여 버릴 것은 제하고, 품을 것은 품고, 상처받은 사람에 대해서는 서운하지 않도록 품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동시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결코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미리 결단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으면 시원하고 통쾌할 것 같아도, 결국은 멸망으로 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 악을 징계할 수 있는 분이신데 그냥 당하셨습니다. 오히려 악을 선으로 갚으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이를 구원하셨습니다.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조차 구원하기를 원하셨고 용서하셨습니다. 그런 것이 생명의 길이고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나를 한 대 때리면 나도 한 대 때리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한 대 맞으면 두 대, 세 대를 때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맞으면 용서해주는 것이 우리의 길이라는 겁니다. 그럴 때 고리를 끊을 수 있습니다. 전쟁이나 테러를 보십시오. 이쪽에서 저쪽을 가서 정복하니까 끝났습니까? 아닙니다. 억눌린 쪽에서 테러 공격을 하고 죽입니다. 그러면 이쪽에서 또 가서 죽이고, 그러면 저쪽에서도 또 공격하고 암살하고 테러 공격을 합니다. 이 악의 고리가 끝나지 않습니다. 이 악의 고리는 선으로만, 용서와 사랑으로만 끊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하셨고,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우리도 그렇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2. 암논의 죽음에 대한 다윗의 슬픔과 압살롬에 대한 그리움
1) 간교한 요나답의 거짓 위로 (30-33)
“30 그들이 길에 있을 때에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들을 죽이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다는 소문이 다윗에게 이르매 31 왕이 곧 일어나서 자기의 옷을 찢고 땅에 드러눕고 그의 신하들도 다 옷을 찢고 모셔 선지라” (30-31절)
바알하솔에서 암논이 압살롬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은 그것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다윗의 모든 아들들이 다 살해당했다고 잘못 부풀려져서 보고됩니다. 암논의 죽음을 목격하고 도망친 사람들은 압살롬이 모든 왕자들을 다 죽였을 것이라고 추측해서 알렸고, 왕자들이 다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큰 충격과 슬픔에 빠집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 소식을 듣고서 자기 옷을 찢고 드러눕습니다. 신하들도 옷을 찢고 그의 앞에 섭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죽음 소식에는 어땠습니까?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다 죽인다.”라고 하며 아주 냉정했는데, 아들들이 죽었다니까 옷을 찢으며 난리를 피웁니다. 너무나 대조가 됩니다. 그러나 다윗과 신하들의 절망을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이 있는데 그는 요나답입니다. 그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 암논만 죽었을 것이라는 말로 다윗을 위로합니다.
“32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 요나답이 아뢰어 이르되 내 주여 젊은 왕자들이 다 죽임을 당한 줄로 생각하지 마옵소서 오직 암논만 죽었으리이다 그가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욕되게 한 날부터 압살롬이 결심한 것이니이다 33 그러하온즉 내 주 왕이여 왕자들이 다 죽은 줄로 생각하여 상심하지 마옵소서 오직 암논만 죽었으리이다 하니라” (32-33절)
요나답은 이전에 암논을 충동질해서 다말을 암논이 성폭행하도록 만들었던 장본인입니다. 물론 가서 성폭행하라고 조언한 것은 아니고, 다말로 하여금 왕이 명령해서 아픈 암논을 도와주도록 요청하라고 아이디어를 낸 사람입니다. 그런데 암논이 더 나아가서 다말을 범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압살롬이 그의 양털 깎는 잔치를 이용하여 암논을 죽이려는 계획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자기가 알고 있었다는 것을 여기서 밝힙니다. 아니, 그것을 진작 이야기하지 왜 다 끝나고 이야기합니까? 그는 그 사실을 진작 다윗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곁에 서서 자기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다윗을 위로합니다. 그러나 요나답은 진작 다윗에게 이 모든 것을 알렸어야 했습니다. 그랬으면 이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그는 알면서도 악을 방치했습니다.
요나답은 ‘간교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살인이 벌어진 현장에 직접 있지는 않았지만, 지금 어떤 상황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분명 그는 이전에 자기 꾀로 인해 벌어진 암논의 다말 성폭행 사건에 대해 압살롬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잘 살폈을 것입니다. 또 그가 두 번(32, 33)이나 반복해서 암논만 죽었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그가 그것을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요나답이 이런 모든 것을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정보원이 있습니까? 요나답은 분명히 암논의 마음을 부추겨 다말로 하여금 음식을 만들도록 다윗 왕에게 요청하라고 암논에게 조언했는데, 암논에게 조언해준 사람이 이제는 그 암논이 살해당하는 일에 있어서 압살롬에게 협력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것이 ‘간교한 자’입니다. 이쪽에 붙었다, 저쪽에 붙었다 합니다. 자기 유리한 대로 행동합니다. 지금은 이쪽이 유리한 것 같아서 붙었는데, 암논이 그렇게 한 것에 대해 실망했을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은 왕의 그릇이 못 된다.’라고 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압살롬 쪽으로 붙었을 수도 있지만, 성경은 그를 향해 분명히 ‘간교한 자’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는 자기의 유익에 따라 이쪽에 붙었다, 저쪽에 붙었다 했다는 겁니다. 다 알면서도 이야기를 안 했다는 겁니다.
2) 다윗의 눈물 (34-36)
“이에 압살롬은 도망하니라 파수하는 청년이 눈을 들어 보니 보아라 뒷산 언덕길로 여러 사람이 오는도다” (34절)
이제 압살롬은 자신의 행위가 다윗에게 분노를 살 것을 생각하여 도망합니다. 한편 다윗의 다른 아들들은 압살롬의 칼을 피해서 다윗에게로 도망해 옵니다. 그 과정에 요나답이 어떤 모습을 보입니까?
“요나답이 왕께 아뢰되 보소서 왕자들이 오나이다 당신의 종이 말한 대로 되었나이다 하고” (35절)
지금 요나답은 다윗 집안의 큰 고통과 슬픔에 동참하기는커녕, 자기가 한 말이 그대로 이루어져서 다윗의 다른 아들들이 다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우쭐합니다. 자기의 말이 맞았다고 자랑하는 겁니다.
사실 요나답은 이미 압살롬에게 암논을 죽일 계획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건이 다 벌어지고 난 다음에야 자기가 예상한 것을 자랑하듯이 이야기합니다. 이런 것이 간교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볼 때, 요나답은 이런 것을 어떻게 다 알고 있습니까? 그런데 요나답이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다들 옷을 찢고 슬퍼하는데 오직 암논만 죽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상심하지 마옵소서. 암논만 죽었으리이다.”(33)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옷을 찢으며 괴로워하고 슬퍼한 것의 가장 큰 원인은 암논의 죽음입니다. 장자이며 왕위 계승을 할 암논이 죽은 것이 가장 슬픈 일인데, 다른 왕자들은 살았으니까, 암논만 죽었으니까 그것으로 인하여 슬퍼하지 말라고 합니다. 말이 안 되는 소리를 그가 하고 있습니다. 전혀 다윗의 슬픔에 동참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되는 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암논의 죽음에 대해서 요나답은 아무런 슬픔을 보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분명히 암논에게 조언을 해준 사람이고 암논의 측근이었는데, 암논만 죽었으니까 슬퍼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얼마나 비인간적입니까?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합니다. 이 사람은 나중에 배신하고 결국 압살롬의 조력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압살롬의 계획을 다 알고 있었던 겁니다.
암논도 그렇고 압살롬도 그렇고, 요나답을 자기 밑에 두고 자기가 다스린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를 자기 편의에 따라 자기 종으로 부리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암논과 압살롬 둘 다 요나답에게 조종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요나답이 오히려 더 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요나답의 꾀에 암논도 압살롬도 다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요나답은 이후에 나오지 않습니다. 다윗에게 상심하지 말라고 했는데, 나중에 왕자들이 왔을 때 심히 통곡합니다. 왕자들도 울고 다윗과 신하들도 울고 다 웁니다(36). 상심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말을 안 듣고 다 슬퍼하며 울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요나답이 아무리 자기 꾀로 암논을 주무르고 또 압살롬을 주무르고, 정치적인 입장에 따라서 여기서 유익을 취하고 저기서 이득을 취하고, 그래서 어디가 자기에게 유리한지 살피며 굉장히 성공한 것처럼 보여도, 더 이상 요나답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시각입니다.
세상에서 자기 이득을 따라 살고, 성공하고, 높이 올라가고, 어디가 자기에게 더 유리한가에 따라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며, 굉장히 똑똑한 것 같고, 굉장히 잘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악한 자, 간교한 자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성경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윗도 그의 말을 듣지 않고 통곡합니다.
“말을 마치자 왕자들이 이르러 소리를 높여 통곡하니 왕과 그의 모든 신하들도 심히 통곡하니라” (36절)
자기들의 눈앞에서 큰형이 작은형에게 살해당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왕자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고 공포심을 느꼈을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자기 눈앞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지면 누가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두려움에 떨며 정신없이 도망쳐 아버지 앞에 이르러서야 그들은 긴장감이 풀리면서 감정적으로 무너져 통곡을 하는 겁니다. 왕과 모든 신하들도 심히 통곡했는데, 다른 모든 왕자들이 무사히 돌아온 것에 대한 기쁨과 함께 암논이 죽은 것에 대한 슬픔의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요나답은 상심하지 말라고 했지만, 이것이 다윗에게는 큰 슬픔이었습니다.
3) 압살롬의 도피와 다윗의 그리움 (37-39)
“압살롬은 도망하여 그술 왕 암미훌의 아들 달매에게로 갔고 다윗은 날마다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슬퍼하니라” (37절)
압살롬이 도망한 곳은 그술인데, 그곳은 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한 아람의 작은 나라였고, 그 나라의 왕 달매는 압살롬의 어머니인 마아가의 아버지였습니다(3:3). 다윗은 압살롬이 도망한 후 매일 죽은 아들 암논 때문에 슬퍼합니다. 여기 “그의 아들로 말미암이 슬퍼”했다는 것이 암논 때문에 슬퍼했다는 말입니다.
압살롬은 자신의 범죄가 이스라엘에서는 보호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도망갔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스스로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두려워하거나 회개하지 않습니다.
다윗과 다른 점이 바로 이겁니다. 다윗이 왜 위대한 믿음의 사람입니까? 죄를 안 지어서? 아닙니다. 사실 압살롬이나 다윗이나 끔찍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즉시 회개했습니다. 그게 다른 점입니다. 압살롬은 하나님의 백성이 거하는 곳을 벗어나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심판을 면해보고자 자기 어머니 나라로 도망한 것입니다.
“38 압살롬이 도망하여 그술로 가서 거기에 산 지 삼 년이라 39 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을 향하여 간절하니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 (38-39절)
압살롬의 어머니 고향인 그술은 이방인의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우상들을 섬기는 이방 땅인데, 그가 거기서 3년을 거합니다. 그러니까 압살롬이 그술 땅에 도망가 있던 3년 동안 한 일은 우상숭배의 문화에 빠진 겁니다. 신앙교육을 열심히 해도 될까 말까인데, 우상숭배를 하는 곳에 가서 3년을 살았습니다.
다윗의 분노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사라졌고, 분노가 사라지니까 압살롬을 보고 싶은 그의 마음이 간절해지기 시작합니다. 막 분노하다가도 세월이 지나면서 그리워지는 겁니다.
우리가 죄를 범할 때 하나님의 눈을 피해 도망갈 수 있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비록 이 땅에서 심판을 면한다고 할지라도, 죽음을 넘어 하나님을 대면하게 될 때 그 죗값을 피할 길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참 성도라면 자신의 죄를 피하기보다 스스로 자복하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와 자비와 은혜가 우리를 감싸게 됩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할 게 있습니다. 암논과 압살롬에 대한 다윗의 태도입니다. 이것은 정말 잘못된 부모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첫째로, 다윗 가정에 벌어진 비극은 다윗이 그냥 자녀들을 방임하며 놓아두었기 때문입니다. 암논이 이복누이 다말을 성폭행한 사건에 대해 다윗이 엄하고 공정하게 저리했더라면, 암논의 죽음과 압살롬의 살인 그리고 반역 같은 비극적인 사건들을 미리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녀의 잘못에 대해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덮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덮어서는 아무 문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둘째로, 다윗은 자녀에게 자신의 신앙을 잘 전수하고 가르치는 데 실패했습니다. 우리가 <부모의 삶> 공부도 하지만, 이것은 참 쉽지 않습니다. 우리 신앙을 자녀에게 전수한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자기는 너무나 신앙이 좋고, 늘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이자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이었지만, 자녀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윗의 아내들이 믿음의 여인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암논과 압살롬의 행동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신앙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부모로서 자신의 신앙을 자녀에게 잘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시가 되는데, 사실 다윗처럼 바쁜 사람이 어떻게 자녀들을 일일이 신앙교육을 하고 가르칠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도 그렇지만 특히 고대사회에서는 자녀 교육에 있어 어머니의 역할이 아주 중요합니다. 다윗의 아내들은 믿음의 여인들이 아니었고, 따라서 그 자녀들도 믿음의 사람들이 되지 못했습니다.
셋째, 다윗은 두 아들을 조건 때문에 사랑했습니다. 암논은 맏아들이었기 때문에 사랑했고, 압살롬은 너무나 잘 생겼기 때문에 사랑했습니다. 즉, 어떤 조건 때문에 자녀를 사랑한 것이 자녀들 사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입니다.
부모는 훈계와 함께하는 사랑, 바른 신앙교육, 조건 없는 사랑으로 자녀를 건강하고 인격적으로 키워내야만 합니다. 자녀는 부모의 거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부모는 자녀가 잘되면 자신이 잘된 것보다 더 기뻐합니다. 그리고 자녀가 실패하면 자기가 더 큰 아픔을 겪습니다.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양육하지 않으면 암논이나 압살롬처럼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되기 쉽기 때문에, 사도 바울의 권면처럼 자녀를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겠습니다(엡 6:4). 하기 싫어하면 ‘그래, 그래, 편히 쉬어라.’라고 하는 게 아니라,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인지의 기준으로 자녀를 훈계해야 한다는 겁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믿음의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나 죄를 짓습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 삶에서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죄를 안 짓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다 죄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죄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죄를 범할 때 어떻게 하느냐입니다. 다윗처럼 돌이키느냐, 아니면 암논이나 압살롬처럼 죄를 덮으며 악의 길로 가느냐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시편 51편에서 회개하며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시 51:17).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마음을 찢으며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죄의 길에 빠지지 않기 위해 매일 몸부림치며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가운데 말씀에 순종하고자 매달리는 사람입니다. 부모가 그렇게 나아갈 때 자녀는 말로 가르치지 않아도 그것을 보고 배우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 가정이, 우리 자녀가 이렇게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으며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