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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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21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28 ✦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한 사람”
(사무엘하 11장 1~27절)
[들어가는 말]
미국 역사를 보면 여러 대통령들이 있는데, 여러분은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을 꼽으라면 누구를 선택하시겠습니까? 너무 많기 때문에 선택하는 데 있어서 고민이 될 수 있습니다. 몇 년 전의 설문조사에 의하면,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이 최고로 뽑혔습니다. 아마 지금도 그럴 겁니다.
링컨은 수많은 좌절과 실패를 경험했지만, 끈질긴 노력과 인내 끝에 미국의 16대 대통령이 되었고, 노예 해방을 이룬 위대한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물론 링컨의 삶을 자세히 살펴보면 여러 가지 잘못을 저지른 적이 있고, 노예 해방도 정치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래도 전쟁을 통해 노예 해방을 이룬 최고의 대통령으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을 꼽으라면 누구를 선택하시겠습니까? 미국 대통령을 선택할 때와 마찬가지로 똑같이 고민이 될 겁니다. 뽑을 사람이 너무 없어서 그렇습니다. 사실 숫자도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잡혀 들어가든지 비참하게 죽는 등 비극적인 일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최고의 대통령이었는지 꼽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역대 최고의 왕은 아주 쉽습니다. 다윗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국기의 가운데 있는 별도 ‘다윗의 별’입니다. 다윗은 실제로 굉장히 위대한 왕이었고 또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맞는(합한) 사람이다.”라고까지 칭찬하시면서 기뻐하신 사람입니다.
그는 수많은 시편을 썼고 항상 기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사무엘상과 사무엘하를 살펴볼 때 항상 뭔가를 하기 전에 하나님께 여쭤보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애쓴 사람입니다. 실수할 때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던 사람입니다. 인류의 구원자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도 다윗의 자손 가운데 나게 하실 정도로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오늘 본문에서는 엄청난 죄악을 범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한 사람’이 되는 것을 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유명한 ‘다윗과 밧세바 사건’입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하나님과 항상 동행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던 다윗이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무너지게 되었는지,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함께 찾아보기 원합니다.
1. 다윗의 범죄와 진실 은폐 시도 (1~13절)
1) 다윗의 간음죄 (1-5)
이전에 다윗은 많은 싸움에 직접 나아가서 싸웠습니다. 장군 시절에도 그랬고 왕이 되어서도 그랬습니다. 바로 앞의 10장에서도 다윗은 군대를 이끌고 나가 아람 연합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항상 큰 승리를 거둔 다음이 중요합니다. 항상 뭔가 잘된 다음, 성공한 다음이 중요합니다. 이전에는 다윗이 항상 승리를 거둔 다음에도 잘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됩니다. 그가 무엇을 합니까?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1절)
‘그 해가 돌아와’라고 했는데, 이것은 해가 바뀌어 우기가 지나고 건기인 봄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캘리포니아 특히 LA 쪽은 이스라엘과 기후가 상당히 비슷합니다. 겨울이 우기이고 봄은 건기인데, 여기도 똑같습니다. 건기인 봄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역은 겨울이 비가 내리는 우기이고 봄이 건기가 되기 때문에 전쟁을 주로 봄에 치렀습니다.
이때 이스라엘은 암몬과 전쟁을 합니다. 지난 10장에서 요압 군대에게 패한 암몬 군대가 도망가서 수도인 랍바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나오지 않고 버틴 채 있으니까, 봄이 되어 그곳을 공격해서 섬멸하도록 군대를 보냅니다.
그런데 이 계절이 ‘왕들이 출전할 때’라고 되어 있습니다. 당시에는 큰 나라들이 별로 없고 대부분이 작은 도시국가였기 때문에 왕이 직접 전쟁에 나가서 싸웠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자기는 전쟁에 나가지 않고 요압을 비롯한 부하들을 보내서 나가 싸우게 합니다.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냈다는 것을 보면, 이 전쟁은 굉장히 중요한 전쟁이었습니다. 자기만 전쟁에 나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1절을 히브리어 원문으로 봐도 그렇고, 영어 성경으로 봐도 그렇고, 새번역 성경으로 봐도 그렇고, 다윗이 싸움에 나가지 않았다는 것이 하나의 독립된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새 문장은 ‘그러나’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새번역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랍바를 포위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니까 다윗이 싸움에 나가지 않은 것에 아주 큰 의미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 다윗은 이때 전쟁에 나가지 않았겠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다윗이 그동안 계속된 승리와 영광에 취하여 긴장이 풀린 상태였고, 워낙 계속 승리하다 보니까 ‘이제는 부하들이 충분히 해줄 것이다. 나는 빠져도 된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너무 지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다윗은 예루살렘에 남았고, 바로 그때 유혹이 때를 놓치지 않고 찾아오게 됩니다.
우리도 피곤할 때 쉬고 싶은 마음이 다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오늘 아침 교회 예배에 오시기 전에 어떤 마음이 드셨습니까? ‘와, 오늘 주일이다. 빨리 가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다!’라고 하시는 분이 몇 명이나 계실지 잘 모르겠습니다.
목사도 안 그렇습니다. ‘아, 벌써 주일이 다가오는구나. 큰일이다. 어떻게 준비하지?’ 하며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교인들도 대다수가 ‘아이고, 또 주일이네. 교회를 가야 하네. 바쁘고 할 일도 많은데...’ 이런 마음이 사실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나와서 하나님을 예배하겠다고 이렇게 오신 것이 참 귀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참 귀하게 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평소에 매주 교회 나가다가 ‘오늘은 피곤하니까 하루 정도는 빠져도 괜찮겠지.’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적이 분명히 다 있으시죠? 또 성경 읽고 기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다 하는데, 오늘은 바쁘니 오늘 하루쯤 안 한다고 어떻게 되겠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이제 됐어. 이 정도면 충분해. 내가 그동안 공부도 많이 하고, 성경도 많이 읽고, 기도도 많이 하고, 삶 공부도 웬만한 건 다 했으니 이 정도면 충분해. 이제 좀 쉬어도 돼.’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탄이 그럴 때를 놓치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탄은 쉬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영적으로 느슨해져 있을 때, ‘한 번쯤은 괜찮겠지.’라고 할 때 유혹이 오면 가볍게 이겨내고 승리할 가능성이 높습니까, 아니면 유혹에 넘어가 죄에 빠질 가능성이 높습니까? 당연히 후자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잠깐 쉴 때도 사탄은 절대 쉬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여행을 가서 주일이 낄 때가 있는데, 그럴 때 ‘휴가 중이니까 이번 주는 빠지자.’ 하며 예배를 빠진다면, 바로 그때 사탄은 거기 출장을 가 있습니다. 휴가 가 있는 게 아닙니다. 출장 가서 열심히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일합니다. 왜냐하면 마귀에게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넘어뜨리는 재미가 휴가를 즐기며 쉬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만족과 뿌듯함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탄의 마음을 아주 잘 표현한 책이 씨에스 루이스(C. S. Lewis)가 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입니다. 한번 읽어보시면 악한 세력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영적으로 느슨해져서, 다 잘하다가도 한두 번 예배에 슬쩍 빠지거나, 기도하지 않고 말씀을 묵상하지 않으며 쉬자고 하면, 지금 당장은 편하고 자기에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것 때문에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겠습니다. 실제로 다윗에게 그렇게 되었습니다.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2절)
여기 다윗이 저녁때 침상에서 일어났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을 보면 다윗이 낮잠을 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중동 지방은 낮에 아주 덥기 때문에, 낮잠을 자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한낮 가장 더울 때 낮잠을 자는 것이지, 저녁때가 되어서야 일어났다는 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게다가 지금 전쟁 중입니다. 전쟁 중에 이렇게 오래 잠을 자는 왕은 없습니다. 그런데 전쟁 중에 이토록 오랫동안 낮잠을 잤다는 것을 보면, 그만큼 다윗의 마음이 해이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낮잠을 아주 길게 자고 저녁때 일어나 왕궁 옥상을 걸었습니다. 이스라엘 집들은 지붕에 평평하고 넓은 공간이 있었고, 특히 다윗 왕궁은 예루살렘에서도 가장 높은 데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잠을 깨기 위해 지붕에 올라가서 시원한 바람을 쐬려고 했습니다. 옥상은 그것에 적절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바로 그때 한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보게 되고, 게다가 그의 눈에 이 여인이 심히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이 여인은 자기 집 안마당에 있는 우물이나 샘 곁에서 목욕했을 텐데, 왕궁 옥상이 아주 높은 곳이었기 때문에 내려다보는 것이 가능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의 집, 즉 우리아의 집이 왕궁 근처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밧세바가 의도적으로 유혹한 것이라고 보기도 하는데, 그렇게 보기는 어렵습니다. 사실 밧세바는 평소 하던 대로 한 것입니다. 설마 저 높은 왕궁 옥상에서 왕이 자기를 내려다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른 집에서는 보이지 않고 왕궁에서만 보일 수 있는데, 자기 남편도 전쟁에 나가 있는 이때 왕이 전쟁에 나가지 않은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런데 밧세바의 목욕 장면을 본 다윗의 눈에는 그녀가 심히 아름다워 보이며 마음이 흔들립니다. 다윗은 20대의 황금기 동안 자기를 죽이려던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니면서 괴롭고 고달픈 시절을 겪었고, 유다의 왕으로 7년 반을 다스리다 마침내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러 왔습니다. 싸울 때마다 하나님이 승리를 주셨고, 많은 재물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그것으로 자기 아들이 성전을 지을 재료를 준비해 왔습니다. 나라의 영토도 크게 넓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할수록 이상하게 다윗의 마음속에는 왠지 모를 허전함과 허탈감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뭔가를 위해서 열심히 했는데, 그것을 이루고 나니 허전해지는 겁니다. ‘내가 겨우 이것 때문에 내 인생을 바쳤나?’라고 합니다. 그게 전부인 줄 알고 했는데, 이루고 보니까 겨우 이것 때문에 자기가 일했는지 허탈해지는 겁니다. 특히 남자들이 그렇습니다. 요즘은 여성들도 일을 많이 하고 사회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분들도 많지만, 특히 남자들은 목표를 향해 열심히 하다가 이루고 난 다음에 타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힘들고 괴롭고 고통을 당하고 고난이 올 때는 딴생각을 못 합니다. 이것을 빨리 벗어나야 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이것을 해결할까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런데 다 잘되고, 돈 잘 벌고, 등 따시고, 성공하고, 여유 있고, 애들도 잘되고, 살 만하면, 이상하게 사람의 마음은 나쁜 쪽으로 가게 됩니다. 그런 사람이 다수입니다.
다윗도 그동안 성공을 향해 달려왔습니다. 왕이 되고 승리를 거두었는데 뭔가 허전한 겁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안 나가고 쉬다가 그런 마음으로 왕궁 옥상을 걷는데, 바로 그때를 놓치지 않고 유혹이 온 겁니다.
제가 예루살렘에 갔던 때가 5월 말에서 6월 초였는데, 그때는 날씨가 정말 좋습니다. 구름도 별로 없고 맑으며 너무 아름답습니다. 전문용어(?)로 날씨가 ‘죽여 줍니다’. 여기도 날씨가 굉장히 좋다가 저녁때가 되면 빨간 저녁놀이 드리웁니다. 사람들이 그런 사진을 자기 SNS에 올리기도 합니다. 빨간 저녁놀이 드리우는 것을 봤을 때 다윗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굉장히 로맨틱해지는 겁니다. 뭔가 허전하고 쓸쓸하고 외롭고 그런데, 그때 보니까 저 아래 목욕하는 여인이 있습니다. 달콤한 유혹이 다가오는 겁니다.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보았을 때까지는 죄를 지은 것이 아닙니다. 일부러 본 것도 아니고, 어쩌다 저 아래 보이니까 ‘아유, 내가 못 볼 것을 보았네.’ 하면서 돌리고 가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못 볼 걸 본 게 아니라 볼 걸 보았나?’ 하면서 또 보고 또 보면서 상상이 시작되는 겁니다. 이미 그 여인은 사라졌을 텐데 ‘그 여자가 누구지?’ 하며 아쉽다고 느끼다가 어떻게 됩니까?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 (3절)
2절과 3절 사이에는 별로 시간이 흐르지 않은 것처럼 되어 있지만, 다윗이 이 여인을 처음 봤을 때와 사람을 보내서 알아보라고 지시했을 때까지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생각하면 할수록 그 여자가 생각나고 마음에서 음욕이 솟아올랐습니다. ‘그 여자가 누굴까? 보고 싶다. 또 보고 싶다. 참을 수가 없다.’
사실 다윗에게는 이미 많은 아내들이 있었습니다. 아이들도 많았습니다. 다윗은 중년의 남성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른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의 아내라고 하는데고 그랬습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한 것이 기억납니다. 남자들이 대부분 그럴 겁니다. “어떤 아름다운 여성을 보았을 때 매력을 느꼈다면 그것은 남자로서 당연하다. 하지만 또다시 돌아본다면 두 번째부터는 음욕이다.” 참 맞는 말 같습니다. 어쩌다 봤을 때는 참 아름답다고 느끼고, 사실 어떻게 생겼나 궁금해서 두 번째로 보는 데까지도 괜찮은데, 그 다음 또 보고 또 보면서 마음에 새겨지는 겁니다.
다윗이 부하를 보내어 알아보니까, 그 여인은 자신의 용맹한 장군 중 하나인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였습니다. 우리아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헷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가나안 민족 중 하나인 헷 사람으로서, 다윗의 충성스러운 부하가 된 사람입니다. 다윗이 고생할 때 같이 있던 사람입니다. 게다가 보통 군인도 아닌, 다윗 군대의 37명 중에 들어갑니다(23:39). 지도부를 제외한 30명 특수부대에 용사 중에 들어가는 용맹한 장수입니다. 그런데 그런 충성스러운 부하를 그의 왕인 다윗이 배신하려고 합니다.
“4 다윗이 전령을 보내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그 여자가 그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그 여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5 그 여인이 임신하매 사람을 보내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임신하였나이다 하니라” (4-5절)
다윗은 그 여인이 자기의 충성스러운 부하 우리아의 아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전혀 지체하지 않고 부하들을 보내서 밧세바를 데려와 동침합니다. 이것은 십계명의 제7계명 “간음하지 말라”를 어긴 죄이며, 그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왕의 권력을 이용하여 성폭행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일로 인해 밧세바는 임신하게 되고, 사람을 통해 이것을 다윗에게 알립니다. 사형에 처하는 죄가 되기 때문에 다윗에게 도움을 요청한 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윗의 아이가 분명합니다. ‘부정함을 깨끗하게 했다’는 말이 여자가 생리를 했다는 말이고 그 후에 아기를 가졌기 때문에 이것은 다윗의 아이가 틀림없다는 말입니다.
2) 문제 해결을 위한 잘못된 방법 (6-13)
다윗은 갑작스러운 문제로 인해서 굉장히 당황합니다. 그러다가 한 가지 해결 방법을 생각해 냅니다. 그것은 전쟁터에 있는 우리아를 급히 불러서 특별 휴가를 주고 선물까지 줘 가면서, 우리아가 집에 가서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하도록 하여 그 아이가 우리아의 아이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당시에 무슨 DNA 테스트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하는 겁니다.
“6 다윗이 요압에게 기별하여 헷 사람 우리아를 내게 보내라 하매 요압이 우리아를 다윗에게로 보내니 7 우리아가 다윗에게 이르매 다윗이 요압의 안부와 군사의 안부와 싸움이 어떠했는지를 묻고 8 그가 또 우리아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내려가서 발을 씻으라 하니 우리아가 왕궁에서 나가매 왕의 음식물이 뒤따라 가니라” (6-8절)
이것이 머리 좋은 사람들의 단점입니다. 다윗의 머리가 팍팍 돌아가고 있습니다. 죄로 인하여 문제가 일어나면 회개해야 하는데, 먼저 머리를 굴리며 이 순간을 모면할 방법을 찾는 겁니다.
다윗의 계획은 전쟁터에 나가 있는 우리아에게 포상 휴가를 주어서 선심 쓰는 척하며 집으로 보내 부부관계를 통해 밧세바가 이미 임신한 아이를 마치 우리아의 아이인 것처럼 가장하려는 것입니다. 게다가 푸짐한 음식까지 보내면서 그렇게 합니다. 잔치를 벌이도록 돕는 겁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우리아가 도대체 다윗의 계획대로 움직여주지를 않는 겁니다.
“9 그러나 우리아는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고 왕궁 문에서 그의 주의 모든 부하들과 더불어 잔지라 10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아뢰되 우리아가 그의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였나이다 다윗이 우리아에게 이르되 네가 길 갔다가 돌아온 것이 아니냐 어찌하여 네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9-10절)
전쟁터에서 막 불려온 우리아는 자기의 상관과 동료들을 생각하여 집으로 가지 않고 왕궁 문에서 다윗의 다른 군인들과 같이 잡니다. 다음날 자기의 방법이 실패한 것을 안 다윗은 우리아를 다시 불러서 왜 집에 안 갔느냐고 묻습니다. 그때 우리아는 너무나 충성스러운 대답을 합니다.
“우리아가 다윗에게 아뢰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부하들이 바깥 들에 진 치고 있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기로 왕의 살아 계심과 왕의 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나이다 하니라” (11절)
이 얼마나 충성스러운 신하입니까! 언약궤가 전쟁터에 나가 있다는 것, 즉 하나님의 언약궤를 들고 나갔다는 것은 이 전쟁이 보통 전쟁이 아니라 성전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거룩한 전쟁(성전)이었고, 다른 전쟁도 그렇지만 특히 이런 성전 중에는 군인들이 더 조심하고 철저히 금욕적인 생활을 하면서 싸워야 했습니다.
우리아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해 자신의 책임을 다하려는 태도를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아는 헷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증히 여겨 여호수아 정복 전쟁 때 다 멸하라고 하신 가나안 민족 중의 하나입니다. 즉, 우리아는 가나안 민족 출신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아의 이름은 ‘주님은 나의 빛’이라는 뜻으로, 원래 이름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으며 개종하면서 이름을 바꾼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아는 자신의 왕 다윗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각오가 되어 있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통해 그 동안 하나님에 대해 보고 배웠습니다. ‘아, 하나님을 저렇게 믿는 것이구나.’ 하고 다윗을 통해 배운 사람입니다.
누구보다 주님을 잘 섬겨야 할 이스라엘 왕 다윗은 지금 자기 죄를 숨기려고 또 죄를 범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고 인정받는 사람 다윗은 가나안 출신인 이방인 우리아만도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우리아가 ‘헷 사람’이라는 것을 계속 언급합니다. 여기 7번이나 나옵니다(11:3, 6, 17, 21, 24; 12:9, 10). 일부러 ‘헷 사람 우리아’라고 하며 이방인 출신이라고 강조하는 겁니다.
“12 다윗이 우리아에게 이르되 오늘도 여기 있으라 내일은 내가 너를 보내리라 우리아가 그 날에 예루살렘에 머무니라 이튿날 13 다윗이 그를 불러서 그로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취하게 하니 저녁 때에 그가 나가서 그의 주의 부하들과 더불어 침상에 눕고 그의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니라” (12-13절)
다윗은 거짓말까지 합니다. ‘내일 보내주겠다.’ 해놓고는 그다음 날 불러 먹고 마시고 술에 취하게 합니다. 그런데도 또 집에 가지를 않는 겁니다. 우리아의 충성심은 술도 이기지 못합니다. 술 취한 우리아가 정신이 멀쩡한 다윗보다 더 경건합니다.
다윗은 율법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는 왕이고 하나님을 너무나 잘 아는 신앙의 사람인데, 그는 율법이 없는 자들이나 할 만한 악한 짓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반면, 우리아는 원래 율법 없는 가나안 민족 출신이면서도, 율법을 가진 다윗보다 더 신앙적인 모습을 여기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현실에도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이 시대에 교회와 크리스천이 많이 욕을 먹는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못한 삶을 살기 때문은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
다윗이 우리아가 먹고 마시고 취하게 하여 집에 가서 자기 아내와 자도록 유도한 것인데, 술에 취했음에도 우리아는 끝까지 충성스럽게 집에 가지 않고 군인들과 함께 밤을 지내게 됩니다.
요즘 한국 뉴스를 보니까 툭 하면 술 취하여 범죄를 저지르고 난 다음 “술에 취해서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그런 사람을 가리켜 ‘심신미약’이라고 하며 감형까지 해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술에 취해 모르고 한 일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여기는 술에 취해서 범죄를 저지르면 더 나쁜 것인데 말입니다.
만약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아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술에 취해도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건 죄도 아니고 원래 할 수 있는 일인데도 술 취한 상태에서도 안 했다는 겁니다.
2. 다윗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분노 (14~27절)
1) 다윗의 살인죄 (14-24)
그리하여 다윗은 새로운 계략을 짜는데, 그것은 아예 우리아를 죽여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14 아침이 되매 다윗이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들려 요압에게 보내니 15 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그로 맞아 죽게 하라 하였더라” (14-15절)
더 이상 안 되니까 다음 날 아침 다윗은 우리아를 불러 편지를 주면서 요압에게 갖다주라고 명령합니다. 우리아는 그것이 자기를 죽이라는 내용인지도 모른 채 충성스럽게 요압에게 전달합니다. 이것만 보아도 다윗이 우리아의 충성을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물론 편지에 왕의 인장으로 봉했기 때문에 뜯으면 죄가 됩니다. 하지만 혹시 압니까, 뜯어보고 어디로 도망갈지?
그런데도 우리아를 죽이라는 편지를 우리아에게 맡겼다는 것은 우리아가 뜯어보지 않을 충성스러운 신하라는 것을 다윗이 잘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 충성을 이용하다니, 이게 얼마나 악한 일입니까?
우리아를 집으로 보내어 그 처와 자도록 만들려는 계획이 그의 충섬심 때문에 계속 실패했을 때, 사실 다윗은 또 다른 악한 계략을 행할 게 아니고 회개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죄를 짓지 말라고 경고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시는 기회임을 깨달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죄악 된 마음을 돌이켰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 잘못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살인을 저지르는 데로 나아갑니다. 십계명의 제7계명(“간음하지 말라”)을 어긴데 이어 이제는 제6계명(“살인하지 말라”)도 어기려고 합니다. 직접 죽이는 것은 아니지만, 적군을 통해 죽이려고 하는 살인죄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살인으로 보십니다.
사실은 사울이 다윗을 그렇게 죽이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블레셋과 싸우게 해서 블레셋에게 죽임을 당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블레셋을 다 이겼습니다. 그런데 다윗도 똑같이 암몬 군대를 통해 우리아를 죽이려 하고, 또 실제로 성공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혹시라도 어떤 잘못된 길로 가려고 할 때 생각만큼 일이 잘 진행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죄를 짓지 말라고 막으시는 사인임을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왜 잘 안 되지?’ 하며 계속 나가면 죄에 빠져들게 되는 겁니다. ‘혹시 내가 하려는 이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은 아닐까?’ 하고 질문하며 돌아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죄에 빠지고 맙니다.
“16 요압이 그 성을 살펴 용사들이 있는 것을 아는 그 곳에 우리아를 두니 17 그 성 사람들이 나와서 요압과 더불어 싸울 때에 다윗의 부하 중 몇 사람이 엎드러지고 헷 사람 우리아도 죽으니라 18 요압이 사람을 보내 그 전쟁의 모든 일을 다윗에게 보고할새 19 그 전령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전쟁의 모든 일을 네가 왕께 보고하기를 마친 후에 20 혹시 왕이 노하여 네게 말씀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성에 그처럼 가까이 가서 싸웠느냐 그들이 성 위에서 쏠 줄을 알지 못하였느냐 21 여룹베셋의 아들 아비멜렉을 쳐죽인 자가 누구냐 여인 하나가 성에서 맷돌 위짝을 그 위에 던지매 그가 데벳스에서 죽지 아니하였느냐 어찌하여 성에 가까이 갔더냐 하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왕의 종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나이다 하라” (16-21절)
요압은 다윗의 충견으로 다윗이 명령한 이상으로 행합니다. 맨 앞에 보낼 뿐만 아니라 가장 강력한 용사들이 있는 곳으로 우리아를 보냅니다. 그러면서 요압은 회심의 미소를 분명히 지었을 겁니다. ‘내가 다윗의 약점을 하나 잡았다.’ 우리아를 죽게 하라고 했으니까 약점을 잡았다고 좋아했을 겁니다.
21절에서 요압이 전령에게 한 이야기는 사사기 9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여룹베셋은 여룹바알이라고도 하는 기드온인데, 기드온의 세겜 출신 첩의 아들 아비멜렉은 잔인한 자였습니다. 자기 형제 70명을 한곳에서 다 죽이고, 세겜 망대에서 안에 있던 천 명도 불태워 죽였습니다.
그러다 데벳스에서 또다시 망대 안의 사람들을 불태워 죽이려고 가까이 갔다가 위에서 한 여인이 던진 맷돌 위짝에 맞아서 머리가 깨져 죽었습니다. 여자에게 맞아 죽는 것은 수치였기 때문에, 아비멜렉은 옆에 있는 부하에게 자기를 찌르라고 하여 여인에게 죽은 자가 되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때까지 여자에게 맞아 죽은 자로 기억되는 것을 보면 그 말을 안 들은 것 같습니다. 실제로 다윗이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혹시라도 왕이 뭐라고 하시면 이렇게 이야기하라고 요압이 전령에게 지시한 겁니다.
겉으로 볼 때는 우리아의 죽음이 미련하게 성벽에 가까이 가서 혼자 싸우다가 죽은 것이지만, 진짜 원인은 다윗의 범죄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숨기기 위한 왕으로서의 권력 남용 또는 악용 때문이었습니다. 주연은 다윗이었고 조연은 요압이었습니다.
“22 전령이 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요압이 그를 보낸 모든 일을 다윗에게 아뢰어 23 이르되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우세하여 우리를 향하여 들로 나오므로 우리가 그들을 쳐서 성문 어귀까지 미쳤더니 24 활 쏘는 자들이 성 위에서 왕의 부하들을 향하여 쏘매 왕의 부하 중 몇 사람이 죽고 왕의 종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나이다 하니” (22-24절)
지금 다윗은 다른 말에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아가 죽었나 안 죽었나만 이야기하기를 원하는데 전령이 다른 말만 하고 있으니까 속으로 답답해하며 듣는데 드디어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쾌재를 불렀을 겁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서 발견하는 한 가지 의미 있는 사실은, 11장 전체에서 다윗이 요압이나 우리아나 전령 등 자기 부하들로부터는 ‘왕’이라고 불린다는 것입니다(11, 19, 20, 21, 24절 = 9번). 그러나 사무엘하서 본문에서는 한 번도 왕이 아니라 그냥 ‘다윗’이라 불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1, 2, 3, 4, 5, 6, 7, 10, 11, 12, 13, 14, 17, 18, 22, 25, 27절 = 22번).
그것이 하나님의 시각입니다. 부하들은 ‘왕’이라고 부르지만 성경은 그냥 ‘다윗’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다윗을 왕으로 보지만, 주님은 단지 한 개인인 인간 다윗으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온갖 타이틀이 많습니다. 좋은 것이 많습니다. 교회에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 우리 개인을 보신다는 겁니다. 내가 성취한 어떤 것, 가진 것, 하는 일의 종류, 사회적 위치가 아니라,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을 때, 하나님과 홀로 있을 때 내가 누구냐를 보신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사는 사회 속에는 여러 가지 타이틀이 있습니다. 박사, 의사, 판사, 변호사, 교수, 회장, 사장, 이사 등 많습니다. 교회에도 장로, 집사, 권사, 목사, 전도사, 교단 노회장, 총회장 등 많습니다. 그러나 무슨 직책이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그 직책으로 보시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저를 보실 때 ‘이준원 목사!’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야, 준원아.’라고 하십니다. 개인으로 보시고 개인으로 부르시는 겁니다. 개인으로서 목사라는 사명을 주셨는데 그것을 얼마나 성실하게 감당하고 있나를 보십니다.
우리가 혹시 직책이나 위치로부터 위로받으면서 살고 있습니까? 좋은 위치는 축복입니다. 그것을 잘 사용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사용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 타이틀이 마치 자기 자신인 것처럼 속아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내가 목사, 장로, 집사, 또는 권사라고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 나를 보시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 교회에 오래 다녔다고, 신앙 연륜이 오래되었다고 저절로 거룩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매일매일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누구도 거기에 예외가 없습니다. 다윗이 그것을 오늘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의 눈 (25-27)
“25 다윗이 전령에게 이르되 너는 요압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이 일로 걱정하지 말라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삼키느니라 그 성을 향하여 더욱 힘써 싸워 함락시키라 하여 너는 그를 담대하게 하라 하니라 26 우리아의 아내는 그 남편 우리아가 죽었음을 듣고 그의 남편을 위하여 소리내어 우니라 27 그 장례를 마치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니 그가 그의 아내가 되어 그에게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25-27절)
다윗은 전령으로부터 우리아가 죽었다는 것을 듣고 요압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하라고 하면서 말합니다. “이 일로 걱정하지 말라”(25). 이 일이 악한 일이라고 여기지 말라는 겁니다. 히브리어 원어로 25절의 ‘걱정’(25)이라는 단어가 27절에 나오는 ‘악하다’라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이 일을 악하다고 여기지 말아라.’라고 하는 겁니다.
즉, 다윗은 자기가 행한 것이 악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와의 불륜과 우리아를 죽게 만든 것을 악한 게 아니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러나 27절에서는 분명히 우리에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11장 전체를 통해 ‘여호와’ 즉 하나님이 여기에서 처음으로 언급됩니다. 마치 그동안 다윗이 행하는 모든 과정 속에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이 모르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악이 득세하고 정의가 실종된 것처럼 보였고, 다윗이 행하는 악이 다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속 거기 계시면서 다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다윗은 “내가 한 일은 악한 일이 아니다.”라고 외치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향해 “네가 행한 일은 악한 일이다!”라고 분명히 선포하십니다.
우리아의 죽음에 대해 다윗은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삼키느니라”(25)라고 말하는데, 이런 다윗이 다른 사람들이 죽었을 때는 어땠습니까? 사울이 죽었을 때, 친한 친구 요나단이 죽었을 때, 심지어 자기를 대적해서 이스보셋 정권을 세우고서 실권을 잡고 있던 아브넬이 죽었을 때, 또 이스보셋이 죽었을 때, 다윗은 그들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슬퍼했습니다. 심지어 자기 아들 압살롬이 반역하여 아버지인 자기를 죽이려고까지 했는데 그 압살롬이 죽었을 때도 슬퍼합니다(18:33).
여기 보면, 다윗의 모습은 자신의 악한 목적이 달성되어서 기뻐하는, 전형적인 악인의 태도입니다. 우리아는 ‘이 사람이나 저 사람’(25)에 속한다고 보고, 압살롬이나 다른 사람들은 거기에 속하지 않는다고 보는 겁니다. 바로 이런 것이 요즘 많이 말하는 ‘내로남불’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악한 일 때문에 그의 부하 중 몇 사람도 우리아와 함께 죽게 된 겁니다(17). 원래 안 죽어도 되는 사람들이 다윗의 악함 때문에 죽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중적 태도가 내 안에도 있지 않은지 우리는 늘 돌아보아야 합니다. 다윗도 무너졌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쉽게 무너지겠습니까? 남이 어떤 잘못을 하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라고 하면서, 내가 또는 내 가족이나 좋아하는 사람이 같은 잘못을 하면 “그럴 수도 있지.”라고 하는 것이 이중적인 태도입니다.
이것은 심각한 일에만 있는 게 아니라 간단한 일 중에도 많습니다. Freeway에서 보통 왼쪽은 Passing Lane으로서 빠르게 가는 차가 추월하는 선입니다. 내가 오른쪽으로 가는데 왼쪽으로 가는 차가 나보다 느리면 뭐라고 합니까? “Stupid!” 내가 왼쪽으로 가는데 오른쪽으로 쌩 지나가면 뭐라고 합니까? “Crazy!” 자기가 느리면 빨리 가는 사람은 crazy이고, 자기가 빠른데 느리게 가는 사람은 stupid입니다. 완전히 자기중심입니다.
남이 돈 받으면 뇌물이고, 내가 돈 받으면 사랑의 선물입니다. 유행이 지난 옷을 남이 입으면 촌스럽고, 내가 입으면 복고풍입니다. 남이 다른 사람을 비방하면 잔인한 비난이고, 내가 다른 사람을 비방하면 건설적 비판입니다. 완전히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입니다. 이런 이중적 태도를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우리아의 이름이 본문에서 8번 등장합니다(14, 15, 16, 17, 21, 24, 26에서 2번). 우리아의 죽음 후에도 그의 이름이 큰 영향을 미칩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인 다윗과 결혼하고 나서도 밧세바는 자신의 이름이 아닌 ‘우리아의 아내’(26)라고 나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그녀의 진짜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우리아를 죽이고도 새로 자기의 아내가 된 밧세바의 진정한 정체성을 바꿀 수가 없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시각을 바꿀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에 다른 여인들은 모두 자기 이름으로 나옵니다(다말, 라합, 룻, 마리아). 그런데 유독 이 여인만 밧세바가 아니라 ‘우리아의 아내’로 나옵니다. 사람들 앞에서 그녀는 왕비가 되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전 남편 우리아의 표를 달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처음 다윗을 부르실 때 뭐라고 하셨습니까?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이것이 정말 너무나 중요합니다.
[나가는 말]
왜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다윗이 이토록 무서운 죄를 짓고 실패하게 되었습니까? 실질적으로 사무엘하 11장 이전까지 다윗은 이스라엘의 떠오르는 별이었습니다. 그런데 11장을 계기로 지는 해가 되고 내리막길을 걷게 됩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죄를 범하는 순간 자기가 하나님 앞에 있는 한 인간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사람들 앞에서 위대한 왕이라는 그 정체성만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유혹은 매 순간 찾아옵니다. 우리를 넘어뜨릴 기회를 늘 노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매일매일 하나님과 동행하며 치열한 영적 전쟁을 싸울 때만 우리는 그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아무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우리 각 사람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누구냐? 너는 내 앞에서 누구냐?” 이 하나님의 질문 앞에 믿음으로 “저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고 담대히 믿음으로 대답하며 나아갈 수 있는, 그래서 승리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