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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0mOHQA0wQ7Y

 

 

2022124일 주일예배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40

왕의 귀환을 맞이하는 사람들

(사무엘하 1916~30)

 

[들어가는 말]

 

오늘 말씀을 준비하다가 갑자기 이전에 있었던 일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오래전 제가 청소년 사역을 담당할 때였는데, 그때 청소년 예배를 위한 찬양팀이 있었고 당시 청소년 교사를 하던 영어권 청년 한 명이 리더를 맡아서 찬양팀을 이끌었습니다.

 

하루는 그 청년이 찾아와서 찬양팀의 한 아이가 교회 주차장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을 몇몇 아이들이 보고 자기에게 이야기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찬양팀에서 나가게 해야겠다고 했습니다. 어쩌다 호기심에 담배를 피울 수는 있지만 찬양팀은 유스그룹 리더인데 리더로서 전혀 모범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아주 열심히 하던 10학년 여학생이었는데, 착한 아이였기 때문에 그것을 듣고 약간 놀랐지만 일단 내가 확실히 알아볼 테니 조금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사이 유스 찬양팀 안에서 언쟁이 벌어지면서 결국 그 청년 리더가 담배 피운 아이를 찬양팀에서 나가도록 했습니다.

 

얼마 후 그것을 알게 된 그 아이의 부모님이 화가 나서 저에게 찾아와 우리 아이가 그랬을 리가 없다. 뭔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 하시며 엄청난 분노를 쏟아냈습니다. 그러나 다른 아이들도 보았다고 하고 또 담배를 피운 것이 확실하게 되니까, 그 부모님은 아이가 호기심에 실수를 할 수도 있지, 어떻게 리더가 되어서 어린아이를 감싸주지는 못하고 그냥 무참하게 쫓아내 버리는가? 아이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겠는가? 저렇게 사랑이 없는 사람이 무슨 교회 리더인가? 당장 쫓아내라. 저 사람은 자격이 없다.’ 하고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살면서 제 바로 앞에서 그토록 분노하며 크게 소리를 지르는 경우를 그때 외에 또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후에는 누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모기가 날아가나?’라고 느낄 정도일 정도로 정말 대단했습니다. 눈에서는 살기가 나왔습니다. 당시 30대 초반이었는데 속으로 겁이 나면서 이러다 이분이 한 대 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까지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찬양팀 리더 청년은 청소년 교사이자 찬양팀 리더였을 뿐만 아니라, 영어예배에서도 찬양 리더를 하고 있던, 아주 건실하고 열심히 섬기는 올바른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모님은 그 청년을 지목하면서 ‘3주를 주겠다. 저 사람을 그때까지 내보내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나는 책임지지 못한다. 내가 들어가서 멱살을 잡고 끌어내 올 수도 있다.’라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때 저는 정말 고민이 되었습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리더 청년을 쫓아내는 것은 말이 안 되고, 그렇다고 계속 리더로 놓아두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다 잘 해결되었습니다. 그 후 그 부모님은 마음을 잘 진정시키고 교회의 귀한 사역자와 직분자가 되어 잘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도 잘 성장하여 지금 서부에서 잘 산다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그 어머니에게서 들었습니다. 잘 해결되었으니 그렇게 된 겁니다. 그 리더 청년도 얼마 후 직장이 다른 곳에 되어서 자연스럽게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그때 어떻게 해결된 것입니까? 궁금하십니까? 조금만 기다려보십시오.

 

그때 그런 일을 겪으면서 젊은 목회자로서 절실히 깨달은 게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완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어떤 상황이 생기면 자기가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며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그렇습니다. 그 담배 피운 여학생의 부모님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리더 청년도 학생을 내보내는 과정에서 너무 성급하게 행동했고 또 훨씬 나이가 많았으면서도 어린 학생과 다투기도 했습니다. 조금만 성숙하게 행동했더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그때 있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지, 상대방이 옳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우리도 다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우리 자신이 어떻게 항상 100% 옳고 전부 다 맞겠습니까?

 

성경을 봐도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 제목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합한) 사람인데, 하나님께서 다윗을 가리켜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다.’라고 하셨지만, 성경을 보면 볼수록 실망스러운 모습이 많이 보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런 모습이 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다.’라고 하시며 그를 사용하셨는데,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는지 그것을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다윗의 귀환을 두려워하는 시므이와 시바 (16~23)

 

압살롬의 반역이 실패로 돌아가고 다윗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복귀한다는 소식은 다윗 주변 인물들의 서로 다른 반응을 이끌어 냅니다. 특히 다윗이 돌아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떠날 때 그를 욕하며 저주했던 사람들이나 그를 속였던 사람은 큰 두려움으로 그를 맞이하게 되고, 그가 예루살렘을 떠나는 것을 슬퍼하며 그에게 충성을 다한 사람들은 큰 기쁨과 감사로 그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경찰차가 보이면 뭔가 죄가 있는 사람은 뜨끔하면서 피하고 싶고 두려워지는데, 어려움을 당한 사람은 경찰차가 너무 반갑습니다. 그것과 얼마나 비슷합니까?

 

바후림에 있는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급히 유다 사람과 함께 다윗 왕을 맞으러 내려올 때에” (16)

 

유다 지파가 다윗을 예루살렘으로 모셔오기로 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가장 먼저 반응을 나타낸 사람은 돌을 던지면서 다윗을 저주하고 욕했던 시므이였습니다(16:5-13). 돌을 던지고 먼지를 날리며 온갖 저주를 퍼부어댔습니다.

 

그러던 그가 다윗의 승리와 복귀 소식을 듣자 자신이 살아남는 유일한 길은 다윗에게로 빨리 나아가 용서를 비는 길밖에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시므이는 급히 유다 지파와 함께 다윗에게로 갑니다. 시므이의 이러한 태도는 모든 사람의 기회주의적이고 간교한 모습을 대표합니다. 우리도 사실 다 이런 모습이 있지 않습니까?

 

“17 베냐민 사람 천 명이 그와 함께 하고 사울 집안의 종 시바도 그의 아들 열다섯과 종 스무 명과 더불어 그와 함께 하여 요단 강을 밟고 건너 왕 앞으로 나아오니라 18 왕의 가족을 건너가게 하며 왕이 좋게 여기는 대로 쓰게 하려 하여 나룻배로 건너가니 왕이 요단을 건너가게 할 때에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왕 앞에 엎드려” (17-18)

 

다윗을 맞이하는 유다 지파 무리 가운데로 베냐민 지파인 시므이가 왔고, 혼자 온 게 아니라 자기와 함께하는 베냐민 사람 천 명도 데리고 옵니다. 베냐민 지파 사람을 천 명이나 데리고 온 걸 보면, 시므이는 베냐민 지파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던 것이 확실합니다.

 

이것이 사실은 다윗에게 압력을 가하는 것도 됩니다. 혼자 오거나 측근만 데리고 오지 않고 천 명이나 데리고 왔다는 게 뭡니까? ‘내가 이렇게 세력이 있는 사람이다. 나를 건드리면 잘못될 수 있다.’ 하는 것을 은근히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 사람이니까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도망갈 때 베냐민 지파 사람들을 대표하여 목숨을 걸고 나와서 다윗을 저주하는 일을 했던 겁니다. 비록 다윗이 도망가던 처지이지만, 그에게 나와서 저주하면 다윗의 장수들이 단칼에 목을 벨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까? 그런데 결국 다윗이 가게 두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혼자 개인으로 나온 게 아니라 자기 뒤에 배후 세력이 있다는 것을 과시하며 그렇게 한 겁니다. 배우에는 사울의 남은 세력 또는 베냐민 지파 중 다윗을 대적하는 세력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유다 지파인데 왕이 되었고, 첫 번째 왕 사울은 베냐민 지파인데, 그의 아들이 되지 못하고 다윗이 왕이 되었으니까 다윗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시므이는 자기가 그런 세력을 엎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하면서, 그들 중 천 명을 데리고 온 겁니다.

 

그 베냐민 사람들 가운데 다윗의 복귀를 두려워하는 또 다른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바로 므비보셋의 종인 시바입니다. 그는 다윗이 예루살렘을 떠날 때 자기 주인 므비보셋을 다윗 앞에서 모함하면서 다윗에게 아첨함으로써 므비보셋의 전 재산을 얻는 데 성공했던 인물입니다(16:1-4).

 

그 때문에 다윗이 돌아와서 정말로 그런 것인지 사실을 확인하기 전에 다윗에게 잘 보이고자 가족과 종들을 데리고 마중을 나옵니다. 먼저 선수를 치는 겁니다. 그는 사실을 말하고 제가 거짓말을 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하고 용서를 구하는 대신, 또다시 아첨하는 방법을 택합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예루살렘을 떠날 때 시바는 시므이와는 달리 어려움에 처한 다윗과 그 부하들에게 나귀와 음식을 제공한 바 있습니다. 다윗이 쫓기던 중 시바가 그렇게 해주니 얼마나 고마웠겠습니까? 그런 가운데 그의 말을 들으니 므비보셋의 재산을 다 가지라고 한 겁니다. 이번에도 온 집안(아들 15명과 종 20)을 데리고 와서 다윗의 가족들이 요단강을 건너는 일을 도우며 다윗의 마음에 들 만한 일들을 합니다.

 

다윗 왕을 가장 먼저 마중 나온 이들은 사실 다윗 왕을 가장 반대하던 자들이었습니다. 아니면 다윗을 이용해서 자기 이득을 챙기는 자였습니다. 시므이와 시바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왕권이 회복되자마자 이들은 다윗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애를 씁니다. 이 얼마나 기회주의적인 모습입니까?

 

그런데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막 뭐라고 하다가 상황이 바뀌면 그쪽에 붙는 경우를 얼마나 많이 봅니까? 그런데 우리 안에도 그런 것이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슬픈 현실입니다.

 

“19 왕께 아뢰되 내 주여 원하건대 내게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시오며 왕의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 20 왕의 종 내가 범죄한 줄 아옵기에 오늘 요셉의 온 족속 중 내가 먼저 내려와서 내 주 왕을 영접하나이다 하니” (19-20)

 

시므이의 태도는 다윗 왕이 망명을 떠날 때와 돌아올 때가 완전히 다릅니다. 16장에서 다윗이 도망갈 때는 다윗을 향해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라고 저주를 퍼부으면서 돌을 던지고 먼지를 뿌리던 자가(16:7), 이제는 다윗을 내 주 왕이여라고 부르고 자기를 왕의 종이라고 부르면서 용서를 구합니다. ‘내가 잘못했으니 용서해주십시오.’라고 하는데, 얼마나 비굴하고 기회주의적입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막 뭐라고 하다가 이렇게 상황이 바뀌면 돌변하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가 이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저런 경우는 많습니다. 누군가와 다른 사람의 험담을 마구 하다가 그 사람 앞에 가면 전혀 그런 말을 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오히려 띄워주거나 친근한 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모습들이 다 우리 삶 가운데 많습니다. 특정한 사람만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다윗이 힘을 가지고 있을 때만 복종하는 척하는 시므이의 비열한 태도는 누구에게나 있지만, 특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의 모습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시므이는 잘못했다고 하며 용서해달라고 왔습니다. 온 건 잘한 겁니다.

 

시므이는 자기가 죄를 지은 줄 알기 때문에 요셉의 온 족속 중 먼저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베냐민 지파이고 요셉 지파는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인데, 그가 요셉의 온 족속중 먼저 왔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자기는 요셉이 아닌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유다 지파를 제외한 나머지 이스라엘 열한 지파들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단지 요셉만 아니라 북쪽의 열한 지파를 다 포함한 표현입니다. 시므이는 모든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자신이 가장 먼저 마중 나왔다고 말하는 겁니다. 어떻게든 다윗 왕에게 잘 보여서 이전에 잘못한 것에 대한 벌을 피하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처절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때 청천벽력 같은 목소리가 그에게 들려옵니다.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대답하여 이르되 시므이가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를 저주하였으니 그로 말미암아 죽어야 마땅하지 아니하니이까 하니라” (21)

 

스루야(다윗의 누나로 추정)의 아들 아비새, 즉 다윗의 조카가 다윗 앞에 나아와 용서를 구하는 시므이를 보고 죽이자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시바가 자기 아들들과 종들을 데리고 와서 다윗을 돕는 장면이 굳이 여기 성경에 기록된 이유는, 시므이가 그만큼 정치적으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 , 시므이를 지금 용서하고 받아들이면 시바와 같이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종도 같이 얻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암시해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 다윗은 자기 앞에 급히 찾아와서 엎드리며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공개적으로 사죄하면서 충성을 맹세하는 시므이를 그대로 처단해버리기가 힘든 상황입니다. 게다가 시므이는 요셉의 온 족속즉 모든 이스라엘 지파들을 대표하여 와서 충성을 맹세한다고 하는데, 그의 뒤에 있는 이스라엘 지파들을 생각하면 그를 그냥 죽여버릴 때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비새는 시므이가 공개 사죄하고 충성을 맹세한다고 하여 그를 살려 두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아비새는 굉장히 충성스러운 사람이었지만 폭력적이고 과격한 인물임을 봅니다. 형 요압이 아주 정치적이고 교활한 인물이라면, 아비새는 정치를 모르는 우직한 군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그는 형 요압에게 이용당하지만, 다윗 왕에 대한 충성심은 한결같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아비새의 성격상 다윗 왕을 모욕한 시므이를 살려 둘 수 없는 겁니다.

 

무엇보다 아비새는 결정적인 이유를 댑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를 저주하였으니.” 시므이가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왕 다윗을 저주했다는 겁니다. 다윗은 이전에 자기를 시기해서 죽이려던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두 번 있었습니다.

 

그때 왜 사울을 안 죽였습니까? 옆에서 부하들은 하나님이 드디어 원수를 갚을 기회를 주셨습니다. 빨리 죽입시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가 아니면 어떻게 이럴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이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우신 자를 자기 손으로 절대 죽일 수 없다고 하여 살려주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왕을 죽인 자를 사형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시므이가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자를 죽인 적은 없지만, 아비새가 보기에 그를 저주한 것도 마찬가지로 심각한 범죄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아비새는 다윗에게 정의를 위해 시므이를 지금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지금 아주 곤란한 상황에 빠진 겁니다. 시므이가 용서해달라고 찾아왔는데 그를 죽이자니 베냐민 지파를 비롯하여 이스라엘 열한 지파들이 자기에게서 등을 돌릴 것 같고, 또 시므이를 살리자니 공개적으로 하나님의 정의를 실천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이때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22 다윗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너희가 오늘 나의 원수가 되느냐 오늘 어찌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사람을 죽이겠느냐 내가 오늘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을 내가 알지 못하리요 하고 23 왕이 시므이에게 이르되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고 그에게 맹세하니라” (22-23)

 

여기서 다윗이 스루야의 아들들아하고 복수로 말한 것을 보면, 그의 대답은 아비새 뿐 아니라 그의 형인 요압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요압과 아비새의 폭력성과 과격함 때문에 그들의 왕에 대한 충성 행위가 오히려 점점 왕인 다윗 자신을 대적하는 행위처럼 되어 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더 이상 그들에게 휘둘리기를 원하지 않고 있습니다.

 

나아가 아비새가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를 저주했기 때문에 시므이의 처형을 요구할 때, 아비새는 다윗이 왕인데 마치 자기가 왕인 것처럼 판결을 내리는 것처럼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의 왕권을 풍자적으로 강조하면서 말합니다. “내가 오늘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을 내가 알지 못하리요?”(22) ‘판결을 내릴 사람은 네가 아니라 나다. 내가 왕이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다윗이 참 지혜롭습니다. 하나님이 지혜를 주신 것 같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에서 오늘 어찌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사람을 죽이겠느냐?”라고 합니다. 오늘 같이 기쁜 날 왜 사람을 죽여서 피비린내가 나게 하겠느냐는 겁니다. 그러면서 시므이에게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라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사실 시므이에 대한 다윗의 이러한 용서는 정치적인 것입니다. 물론 용서했으니까 이렇게 말했겠지만, 정치적인 면이 강하게 담겨 있습니다. 왜냐하면 후에 다윗이 솔로몬에게 시므이를 처리하라고 유언하기 때문입니다(왕상 2:8-9). 그러니까 다윗이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라고 선언했지만, 사실 여기서 한 단어가 생략되어 있는 겁니다. “네가 (오늘은) 죽지 아니하리라.” 이날은 기쁜 날이기 때문에 사형을 시키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나중에 계속 죄를 짓는데도 안 죽이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날은 안 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후에는 처형될 수가 있다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폼고 있습니다.

 

시므이는 베냐민 지파의 실력자로서 다윗을 반대하는 세력의 대표격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오늘 시므이를 용서해 주면, 자신을 대적하고 반대하는 자들이 그것을 보며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다윗 왕이 시므이 같은 사람도 용서해 주는구나. 그럼 우리도 용서해 주겠구나.’ 하면서 다윗에게로 돌아올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다윗은 자기가 다시 왕이 되면서 그동안 압살롬에게 갔던 사람들이 돌아오도록 왕권을 강화시켜야 할 필요가 있는데, 그래서 시므이를 용서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것을 통해 전 나라를 다시 하나로 묶는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시므이를 용서하는 것은 분명히 정치적인 이유가 있지만, 꼭 정치적인 것이라고만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정치적으로만 움직이겠습니까? 그러면 숨이 막혀 죽습니다. 그러나 감정적으로 얼마나 그를 처단하고 싶겠습니까? 단칼에 베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수라기보다 당연한 처벌입니다. 그러나 그를 용서합니다.

 

그러니까 거기에는 분명히 정치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신앙적 결단이 없이는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는 정말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때로는 다윗이 아주 정치적으로 움직이고 때로는 아주 계산적으로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다윗은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시편을 통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만 보면 다윗도 계산적이고 정치적인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시편을 보면 그런 상황 속에서 다윗이 얼마나 처절하게 하나님을 찾으며 나아갔는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자기의 온 마음을 쏟아놓으며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배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윗이 이렇게 왕으로서 정치적으로 또 계산적으로 행동할 때도 있었지만, 자신의 기본적인 마음은 항상 하나님께로 가 있었다는 겁니다. 자기가 잘못한 것을 깨달을 때마다 바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돌아왔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를 가리켜 내 마음에 맞는(합한) 사람이다.’라고 하신 이유입니다.

 

다윗은 결코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엄청난 죄도 지었습니다. 그는 정치적으로 계산하고 머리도 굴립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전심으로 나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감정과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가운데 이런 용서가 가능했고, 그래서 전 나라를 하나로 만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정치적으로만 했으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단칼에 시므이를 처리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명을 생각한 겁니다. 왜 정치적으로 이런 결정을 하느냐 하면 사명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은 뭡니까?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입니다. 이미 왕이 되었지만 쫓겨났다가 다시 돌아옵니다. 이 상황에서 전 나라를 하나로 묶어서 전 나라의 왕이 되는 것이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입니다.

 

그걸 위해서 자기의 감정으로는 좋지 않고 처단하고 싶지만 그래도 용서하는 게 필요한 겁니다. 그래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베냐민 지파와 나머지 다른 지파들이 어떻게 자기에게 돌아오겠습니까? 그러니까 꼭 자기의 정치적인 입지만을 위해서 그런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비록 힘들지만 용서했던 것입니다.

 

사실 인간관계에서 용서는 가장 자주 해야 하는 것이지만 가장 하기 힘든 것입니다.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용서가 힘듭니다. 특별한 이유 없이 누군가에게 비난을 들었을 때 그것을 용서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다윗을 저주했던 시므이는 다윗이 권력을 되찾자 그에게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러나 시므이 같이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 꿇고 용서를 빌어도 아비새처럼 칼로 보복해 버리고 싶은 것이 인간의 솔직한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대부분의 경우 잘못한 사람이 용서를 구하는 일조차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잘못한 사람이 용서를 구하지 않는 상황에서 용서해야 하기 때문에 용서가 어려운 겁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하면 그래도 용서할 수 있는데, 전혀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상황에서 용서해야 한다니 얼마나 힘듭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용서는 상대방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서 하는 게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르치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직접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향해, 자신을 향해 조롱과 모욕을 퍼붓는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23:34) 하고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그걸 듣고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달린 두 강도 중 한 명이 변화된 겁니다. 둘 다 욕하고 있었는데 한 명은 예수님을 옹호하는 쪽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용서의 선언을 듣고 바뀐 겁니다.

 

그런데 용서는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해서 마음에 상처와 미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평생 자신을 감옥에 가두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은 온갖 종류의 더러운 오물이 모여 있는 곳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의 마음에는 다른 사람의 악한 행위보다 더 악한 자기의 미움과 분노와 정죄와 보복 같은 마음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어쩌면 이런 죄악에 익숙해져 타인을 더 용서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죄악의 감옥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라도 용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용서하는 게 아니라 그냥 용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사람들이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 죄송합니다.’라고 한 게 아니라 계속 욕하고 조롱하는데도 저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처럼 그렇게 용서하는 겁니다.

 

 

2.   다윗의 귀환을 기뻐하는 므비보셋 (24~30)

 

다윗의 왕위 복귀를 두려움으로 맞는 사람만 있던 것은 아닙니다. 큰 기쁨과 즐거움으로 맞이한 사람들도 있는데, 그중에는 다윗으로부터 은혜를 입었던 므비보셋이 있습니다.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이 내려와 왕을 맞으니 그는 왕이 떠난 날부터 평안히 돌아오는 날까지 그의 발을 맵시 내지 아니하며 그의 수염을 깎지 아니하며 옷을 빨지 아니하였더라” (24)

 

므비보셋은 사울의 손자이자 다윗의 친한 친구였던 요나단의 아들로서 사울 집안의 왕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울 집안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다윗의 환난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는 다윗이 예루살렘을 떠난 후로 수염을 깎지 않고 옷을 빨지 않음으로 자신의 슬픔을 나타냈습니다. 그것이 고대사회에서 슬픔을 나타내는 방법이었습니다.

 

이전에 피난길을 떠나는 다윗에게 나온 시바는 므비보셋이 다윗을 배반하고 자기가 왕이 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모함했습니다(16:3). 그러나 므비보셋은 다윗이 돌아올 때까지 마치 부모의 장례를 당한 사람이 애곡하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지내다가 다윗이 돌아오니까 바로 그런 모습으로 나왔습니다. 이것은 다윗을 향한 충성심을 보이고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혹시 다윗이 그것을 보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내가 돌아왔는데 기쁘지 않은가?’

 

예루살렘에서 와서 왕을 맞을 때에 왕이 그에게 물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더냐 하니” (25)

 

다윗은 시바가 므비보셋을 모함한 말 때문에 므비보셋의 충성심을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므비보셋이 나타난 모습을 보니까 뭔가 자기가 잘못 안 것 같다고 느낀 것 같은데, 그와 동시에 그동안 저렇게 있었더라도 내가 왔으니 깨끗하게 하고 나왔어야 하는데 왜 저런 모습으로 나왔나? 내가 돌아온 게 싫은가?’ 하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질문하고, 그는 솔직히 대답합니다.

 

“26 대답하되 내 주 왕이여 왕의 종인 나는 다리를 절므로 내 나귀에 안장을 지워 그 위에 타고 왕과 함께 가려 하였더니 내 종이 나를 속이고 27 종인 나를 내 주 왕께 모함하였나이다 내 주 왕께서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으시니 왕의 처분대로 하옵소서” (26-27)

 

므비보셋은 자기 종 시바가 자기를 속여 다윗 왕을 따라가지 못하게 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두 다리를 모두 저는 장애인이기 때문에 그의 대답은 진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므비보셋은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시바가 자신을 속였다, 모함했다하고 두 번 언급합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을 향해 하나님의 사자’(천사)와 같다고 하는데, 이 말은 다윗이 모든 것을 공정하고 정확하게 판결할 것을 기대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가 빼앗긴 재산을 되찾고 싶은 욕심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자기가 다윗 왕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았다는 결백함을 보이고 싶다는 것입니다. 뒤에 봐도 그는 재산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무죄가 입증되면 감사하고 그러지 않아도 감사하다는 태도였습니다.

 

내 아버지의 온 집이 내 주 왕 앞에서는 다만 죽을 사람이 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나 종을 왕의 상에서 음식 먹는 자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내게 아직 무슨 공의가 있어서 다시 왕께 부르짖을 수 있사오리이까 하니라” (28)

 

다윗의 적이었던 사울의 직계 후손인 므비보셋은 당시의 관습대로라면 새로운 왕인 다윗에게 처음부터 죽임을 당하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요나단과의 언약을 기억하고 지키면서 그의 아들 므비보셋을 자기 자녀들과 똑같이 대우해주며 왕의 상에서 먹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므비보셋은 자기가 어떤 처분을 받더라도 지금까지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감사할 수밖에 없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참 귀한 사람입니다.

 

이제 므비보셋은 단지 누명을 벗기를 원하며, 그 결정을 모두 다윗에게 맡깁니다. 원래 자기는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는데 다윗이 자비와 은혜를 베풀어주어 지금까지 살아왔으니, 왕이 이제 어떤 판단을 하더라도 원망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결단을 보입니다.

 

“29 왕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또 네 일을 말하느냐 내가 이르노니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누라 하니 30 므비보셋이 왕께 아뢰되 내 주 왕께서 평안히 왕궁에 돌아오시게 되었으니 그로 그 전부를 차지하게 하옵소서 하니라” (29-30)

 

다윗은 므비보셋의 말에서 그의 진심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멋쩍은 상황입니다. 자기는 의심하고 시바에게 재산을 다 넘겨주었는데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네가 어찌하여 또 네 일을 말하느냐?”라고 합니다. 할 말이 없으니까 아이, 됐어, 됐어.’라고 하는 식입니다.

 

그런데 밭을 시바와 나누라고 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은 판결이 아닙니까? 공정하게 하려면 빼앗겼던 것을 다 므비보셋에게 돌려줘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비록 시바가 므비보셋에 대해 거짓말을 하긴 했지만, 다윗은 피난길에 오른 자신에게 베풀었던 시바의 도움을 무시할 수도 없었습니다. 시바 뒤에는 시므이가 있습니다. 동시에 자기를 배반하지 않고 충성심을 지킨 므비보셋을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다윗은 두 사람에게 공정하게 재산을 나누도록 명령합니다. 그러나 므비보셋은 재산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사실 이것도 어느 정도 정치적인 결정 아닙니까? 공의대로만 하면 모든 재산을 므비보셋에게 주는 게 마땅하지만 시바의 공을 무시할 수 없고, 또 지금 므비보셋 일만 처리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타협안을 제시한 겁니다.

 

이렇게 다윗은 정치적으로 결정할 때가 많습니다. 이익을 따라 움직일 때도 많습니다. 머리를 굴려 계산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그렇게 연약한 죄인인 다윗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이고, 하나님은 이런 다윗을 사용하시며 심지어 내 마음에 맞는(합한)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완벽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을 다 지켜서가 아닙니다. 그렇게 현실 속에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에, 아니 그런 중에도 늘 하나님을 예배하는 참된 예배자로 살기 위해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나가는 말]

 

제가 아까 앞부분에서 말씀드렸던 일이 있는데, 그때 새벽마다 나가서 정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저도 솔직히 처음에는 그 여학생의 부모님에 대해 화가 났습니다. ‘아니, 자기 자식이 잘못했는데 미안하다고 하지는 못할망정 어떻게 저런 귀한 젊은이를 욕하고 비난하며 쫓아내라고 요구하는가?’ 그런데 새벽에 기도할 때 하나님이 같이 만나라는 생각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여학생 부모님과 그 리더 청년을 교회로 불러서 만났습니다. 그리고 서로 솔직한 마음을 나누자고 했는데, 당연히 서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다 자기가 옳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그때 결국 그 아버지가 고백했습니다. ‘내 아이가 잘못한 걸 나도 안다. 솔직히 내가 조금 자존심을 부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교회 리더가 아이를 감싸줘야 하는 거 아니냐?’ 하며 눈물이 글썽거리면서 자기 딸이 상처를 받고 괴로워하는 것에 대해 아빠로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그 형제는 집으로 보내자고 하여 보내고 제가 그분들에게 사과했습니다. ‘제가 청소년을 담당하는 목사로서 잘못했습니다. 저 청년 잘못이 아닙니다. 제가 제대로 지도하지 못한 잘못입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런데 제가 그렇게 한 것은 그저 입 발린 소리로 한 게 아니고, 그 아버지의 말을 들었을 때 딸이 잘못했지만 상처를 받고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서 괴로워하는 아빠의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의 겉모습만 보고 안 좋았는데 그분들의 마음을 느끼게 되니까 제 마음에 그게 와 닿은 겁니다. 그러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compassion)이 올라왔습니다. ‘, 내가 저분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구나.’라는 마음이 들면서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은 그분들에게 사과한 것이라기보다는, 제가 그렇게까지 이해하지 못한 것에 대해 사과한 겁니다. 제가 그렇게 솔직히 나누니까 그분들도 미안했다고 하면서 그냥 해결이 된 겁니다. 눈에서 불이 나던 것이 꺼진 것을 느꼈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사랑이구나.’

 

물론 교회에서는 교단 헌법도 있고 교회 내규도 있어서 정확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어물쩍 대충 넘어가면 안 됩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사랑과 용서와 섬김이 바탕이 되어 법이 집행되는 것이지 무조건 법대로만 해야 하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법을 어기자는 말이 아닙니다. 당연히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이 법만 집행한다면 세상의 기관과 뭐가 다를 게 있겠습니까?

 

미움은 다툼을 일으키지만,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어 준다.” (10:12, 새번역)

 

베드로 사도도 그와 비슷한 말씀을 했습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는다.’ 정말 허물을 덮는 큰 사랑이 교회 안에 더 많이 필요합니다. 우리 안에 필요합니다. 결국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정치적인 방법도 아니고, 머리 굴려 계산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반짝거리는 아이디어도 아니고, 말 잘하는 달변도 아니고, 어떤 논리도 아닙니다. 해결책은 사랑입니다. 사랑!

 

우리가 부족하지만, 기회주의적이지만, 때로는 머리를 굴리지만, 때로는 자기 이익을 따라 움직이지만, 그런 가운데도 빨리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나오며, 늘 하나님을 붙들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살아갈까?’ 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해 애쓰며 나아갈 때,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를 사용하시고 심지어 우리를 가리키시면서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다.’라고 이야기해주십니다.

 

이런 역사가 우리 삶에 가득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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