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HOME > 설교와칼럼 > 주일설교방송
설교 동영상: https://youtu.be/_fyniNxMyH8?t=225
2022년 12월 11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41 ✦
“다윗의 복귀에 얽힌 지파 간의 갈등”
(사무엘하 19장 31~43절)
[들어가는 말]
오래전 제가 미국에 이민을 왔을 때 주변에서 저를 도와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중 특히 두 명이 가장 생각나는데, 둘 다 저보다 7~8살 많아서 ‘형’이라고 불렀습니다. 한 명은 미스터 조였는데 당시 석사과정 대학원생이었고, 다른 사람은 미스터 박이었는데 미국 공군이었습니다. 두 분 모두 제가 금방 미국에 와서 영어도 못하고 아무것도 모를 때 저를 차에 태우고 이리저리 다니면서 구경도 시켜주고 많은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이민 온지 10개월 정도 지나서 드디어 제가 그곳 대학교에 편입하게 되었는데, 그때까지 미스터 조 형이 정말 많이 도와줬습니다. 학교 관계자도 알아봐 주고, 만남도 주선해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말 고마웠습니다. 어느 정도 미국 생활에 적응하고 학교에도 들어간 후 영어도 약간 하게 되니까 더 고마움이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 형이 해 준 말 중에 사실이 아닌 것이 있었습니다. 1년만 지나면 영어가 술술 나온다고 했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그 형이 제게 한 말이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저를 이렇게 많이 도와줘서 정말 감사합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도와주세요?”라고 했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야. 나도 처음에 이렇게 도움을 많이 받았어. 그러니까 너도 다음에 너처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면 도와줘. 그러면 돼. 나를 도와준 사람들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은 후에 나를 도와줬고, 나는 그분들에게 도움을 받아서 너에게 도움을 줬고, 이제 너는 나에게 도움을 받았으니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면 돼. 미국에서는 다 그렇게 사는 거야.”
그 말이 마음에 많이 남았습니다. 미스터 박 형도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자기도 도움을 많이 받아서 지금에 이를 수 있었으니 저에게도 다른 사람들, 특히 처음 온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라고 했습니다. 정말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저도 어느 정도 정착한 후 누군가가 이민이나 유학을 오면 많이 도와주게 되었습니다.
다른 때도 그렇지만, 내가 힘들 때 아무 대가도 없이 순수하게 도와준 사람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다윗도 그렇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자기가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쫓겨갈 때 나와서 도와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친절과 사랑을 두고두고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1. 바르실래의 충성 (31~39절)
우리가 지난번에 살펴본 것처럼, 시므이와 시바는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다시 복귀하는 것을 두려워했지만,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은 그를 환영하며 나왔는데, 다윗의 복귀를 크게 기뻐한 사람이 또 한 명 있었습니다. 그는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였고, 바로 그가 어려움에 처했던 다윗을 이전에 도왔던 사람입니다.
“31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왕이 요단을 건너가게 하려고 로글림에서 내려와 함께 요단에 이르니 32 바르실래는 매우 늙어 나이가 팔십 세라 그는 큰 부자이므로 왕이 마하나임에 머물 때에 그가 왕을 공궤하였더라” (31-32절)
바르실래는 다윗이 쫓겨가면서 마하나임으로 피난 왔을 때 지치고 피곤한 그와 일행을 위해서 많은 음식과 필요한 물품들을 공급하며 섬겼던, 요단강 동편의 큰 부자입니다(17:27-29). 그는 이제 다윗이 왕권을 회복하게 되니까 그것을 축하하기 위해 나이 많은 몸이었지만 먼 거리까지 배웅을 나옵니다.
압살롬을 피해 도망하던 다윗을 도왔던 바르실래의 섬김은 사실 목숨을 건 충성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상황에서는 압살롬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았는데, 실제로 압살롬이 승리했다면 바르실래는 자신의 목숨과 전 재산을 압살롬에 의해 빼앗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죽고 전 재산은 몰수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위험을 개의치 않을 만큼 다윗을 사랑하여 도왔고, 다윗이 이제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요단강 나루터까지 배웅을 나온 것입니다.
“왕이 바르실래에게 이르되 너는 나와 함께 건너가자 예루살렘에서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 (33절)
‘공궤’라는 말이 쉽지 않은 단어인데 섬기겠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바르실래가 자신과 일행에게 보여 주었던 호의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자신의 왕위 재즉위 잔치에 함께 참석하기 위해 요단강을 같이 건너가자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바르실래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34 바르실래가 왕께 아뢰되 내 생명의 날이 얼마나 있사옵겠기에 어찌 왕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리이까 35 내 나이가 이제 팔십 세라 어떻게 좋고 흉한 것을 분간할 수 있사오며 음식의 맛을 알 수 있사오리이까 이 종이 어떻게 다시 노래하는 남자나 여인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사오리이까 어찌하여 종이 내 주 왕께 아직도 누를 끼치리이까 36 당신의 종은 왕을 모시고 요단을 건너려는 것뿐이거늘 왕께서 어찌하여 이같은 상으로 내게 갚으려 하시나이까” (34-36절)
바르실래는 다윗의 친절하고 좋은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합니다. 이것은 자기가 다윗에게 폐를 끼치게 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많은 자기의 현실을 설명하며 겸손히 뒤로 물러갑니다.
그런데 자꾸 바르실래가 자기 나이가 80세라는 것을 본문에서 강조하니까 80이 넘으신 분들이나 80이 가까운 분들은 약간 불편함을 느끼실 수도 있습니다. “매우 늙어 나이가 팔십 세라”(32)라고 하니까 ‘매우 늙어?’라고 불편할 수 있습니다.
또 “내 나이가 이제 팔십 세라 어떻게 좋고 흉한 것을 분간할 수 있사오며 음식의 맛을 알 수 있사오리이까”(35)라고 하는데, ‘아니, 나는 80이 넘었어도 좋은 것 나쁜 것을 분간할 수 있고 음식도 꿀맛인데 이게 무슨 소리인가? 기분 나쁘게.’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종이 어떻게 다시 노래하는 남자나 여인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사오리이까”(35)라고 하니까, ‘아니, 나는 다 알아듣는데. 유명한 가수들뿐 아니라 심지어 최신 아이돌 그룹 노래도 좋아하는데 무슨 소리인가?’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뜻이 아닙니다. 당시 평균 수명이 대략 50~60세 정도였던 시대에 80세였다면, 요즘으로 계산할 때 최소 100세가 넘은 나이가 됩니다. 그리고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별할 수 없다는 말과 노래하는 남자나 여인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은 단순히 음식 맛을 잘 모르고 음악 공연도 듣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국가 운영에 대한 것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사실은 다윗이 은근히 바르실래가 자기와 같이 예루살렘에 가서 국정 운영에 참여해주었으면 하면서 초청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정국 운영 능력이 없고 건강 상태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며 정중히 거절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핵심은 마지막 부분입니다. “어찌하여 종이 내 주 왕께 아직도 누를 끼치리이까.” 자기가 연약한 몸이고 나이도 많기 때문에 누를 끼칠까 봐 미안해서 같이 못 가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바르실래가 다윗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것은, 나중에 다윗이 다시 잘될 때 뭔가를 얻기 위해 미리 보험(?)을 들어놓은 것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으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전에 한국 대통령 선거가 있을 때마다 후보들이 나오면 어느 쪽이 이길 가능성이 높은가에 따라 기업들이 거기에 줄을 섰습니다. 그래서 그쪽에 정치자금을 대거나 줄을 서는 일이 많았습니다. 어느 후보가 당선될지 정말로 알지 못할 경우에는 유력 후보들 모두에게 자금을 대면서 소위 보험(?)을 들어놓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르실래는 다윗에게도 잘해주고 몰래 뒤로는 압살롬에게도 자금을 대 주면서 어느 쪽이든 승리하는 쪽에 붙겠다고 줄을 서는 일을 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순수하게 다윗을 도왔습니다. 바르실래는 자신의 이익 때문에 다윗을 후대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다윗이 잘되기를 바라며 그의 왕권이 제대로 서기를 바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기름 부어 세우시고 그의 후손 대대로 그렇게 이어가게 하시는 것을 신앙적으로 받아들이고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르실래는 나이가 많고 몸도 좋지 않았지만, 언제나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바르실래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아름다운 본을 보여 줍니다.
그는 자기가 곧 세상을 떠나 영원한 저 하늘나라로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관심은 이 세상의 즐거움이나 성공에 있지 않았습니다. 얼마 안 남았는데 더 성공해보았자 무슨 소용입니까? 그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서 살았습니다.
“37 청하건대 당신의 종을 돌려보내옵소서 내가 내 고향 부모의 묘 곁에서 죽으려 하나이다 그러나 왕의 종 김함이 여기 있사오니 청하건대 그가 내 주 왕과 함께 건너가게 하시옵고 왕의 처분대로 그에게 베푸소서 하니라 38 왕이 대답하되 김함이 나와 함께 건너가리니 나는 네가 좋아하는 대로 그에게 베풀겠고 또 네가 내게 구하는 것은 다 너를 위하여 시행하리라 하니라” (37-38절)
바르실래는 자신의 공을 내세우거나 다윗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서 권력을 누리는 게 아니라, 자신의 남은 인생을 고향에서 편하게 지내며 죽음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보내기를 원합니다. 대신 김함을 다윗에게 추천하는데, 그는 바르실래의 아들 아니면 손자로 보이는 사람입니다. 아들이라면 아주 젊은 아들인데, 손자보다 아들로 보는 학자들이 더 많습니다. 이에 다윗은 바르실래가 베푼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 김함을 예루살렘으로 데려갑니다.
예레미야를 읽어보면, 그의 인생이 파란만장합니다. 예레미야가 우여곡절 끝에 이집트로 가는 사람들에 의하여 그리로 가게 되는데, 같이 가다가 그들이 베들레헴 근처에 있는 ‘게롯김함’(렘 41:17)이라는 곳에서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게롯김함’은 ‘김함에게 베푼 친절’이라는 뜻도 되고, ‘김함의 여관’이라는 뜻되 됩니다.
그런 장소가 거기 있는 것으로 볼 때, 예루살렘에 왕으로 복귀한 다윗이 자기 고향 베들레헴 근처에 있는 땅을 김함에게 준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은 바르실래의 순수한 호의와 사랑에 감사하여, 바르실래의 아들 김함에게 그를 대신하여 보답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백성이 다 요단을 건너매 왕도 건너가서 왕이 바르실래에게 입을 맞추고 그에게 복을 비니 그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39절)
이제 다윗은 바르실래와 입 맞추고 그에게 복을 빌어주며 축복해준 다음에 요단강을 건너갑니다. 다윗이 예루살렘 왕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 사람들이 여러 명 있습니다. 그중 유일하게 바르실래만이 다윗에게 순수한 사랑을 베푼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뭔가 목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바르실래와의 이 만남과 대화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바르실래는 ‘길르앗 사람’이고 그가 살던 마을의 이름은 ‘로글림’입니다(31). 길르앗은 요단강 동편 북쪽에 있는 지역 이름입니다. 길르앗이 있는 곳은 므낫세 반 지파와 갓 지파가 있는 곳인데, 이 사람은 어느 지파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다윗을 맞이했던 사람들은 유다 지파 아니면 이스라엘 다른 지파 사람이었습니다. 북쪽 지파들은 요단강 서쪽에 있는 지파들로 에브라임을 중심으로 연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길르앗은 요단강 동쪽이고 그곳은 약간 소외된 곳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단강 동쪽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는 유다도 아니고 이스라엘도 아니고 그 두 그룹에 속하지 않는 중립적인 인물을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그러한 바르실래를 간절히 예루살렘으로 데려가려 했던 이유는 단순히 자기가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것도 있었지만 유다와 이스라엘로 갈라진 나라에 바르실래와 같은 중립적 인재가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르실래는 야심 없는 중립적 인물이고 존경받는 사람이기 때문에, 유다 지파와 이스라엘 지파들 사이에 분열의 골이 깊은 현 정국을 치유할 수 있는 적임자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를 데려가려 했다고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상당히 일리가 있는 해석입니다.
다윗이 바르실래에게 그의 생활을 책임질 테니 함께 요단강을 건너가자고 말할 때, 실질적으로는 바르실래에게 자신의 국정 운영 파트너가 되어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영입 제안이라는 겁니다. 요즘도 어떤 원로가 있을 때 한 정치 세력이 가서 도와달라고 하며 영입하려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바르실래는 다윗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맞추어서 아주 정중하게 사양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르실래가 다윗의 제의를 거절하고 권력의 중심인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자기 고향(예루살렘에서 북동쪽)에 돌아가서 여생을 보내기를 원한 것은, 그가 전혀 권력에 집착하는 사람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특히 그는 언제 은퇴해야 하는지를 잘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는 실질적으로 할 수도 없고 하고 싶은 마음도 없는데, 대신 자기의 젊은 아들 김함을 보내서 다윗을 돕게 함으로써, 지금 중립적인 세력이 필요한 다윗에게 힘을 보태주는 일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인간은 누구나 권력을 탐하는 존재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다 높이 올라가고 성공하기를 원하지, 누가 실패하기를 원하겠습니까? ‘이 땅에서 아주 형편없는 비천한 삶을 살고 싶다. 밑바닥으로 내려가고 싶다.’라고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다 올라가고 싶고 남들보다 성공하고 싶어 하며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이 권력을 놓아야 할 때 놓는 용기와 지혜가 없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은 죽어야 권력을 놓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바르실래와 같을 수만 있다면 어떤 공동체이든 분열과 갈등이 아니라 사랑과 연합으로 하나 되어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될 텐데, 그러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아서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바르실래의 태도를 본받아야겠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고 사랑으로 섬기고 어려운 사람을 도왔으면 거기에서 끝나는 겁니다. 그것을 공으로 내세우면서 ‘내가 이전에 도와주었는데 나를 안 알아준다.’라고 하면 곤란합니다. 그렇게 하니까 서운해지고 관계가 멀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조금 베풀어주고서 그 사람이 잘되면 굉장히 생색을 내며 어떻게든 거기서 이익을 뽑아 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우리까지 그렇게 해야겠습니까? 예수 믿는 우리가 그렇게 되어야겠습니까?
우리는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지 않도록 주님 앞에서 겸손히 살아야겠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조용히 뒤로 물러가는 자세가 참된 겸손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자기가 누군가를 도왔는데 좋은 결과가 나타날 때, 그런 상황을 통해 나보다 다른 사람에게 복이 가도록 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 자신의 이기적인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참된 복을 나누어주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대로 진정한 복의 근원 된 삶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떠한지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만일 내가 무엇인가 이기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라면, 나는 다윗 주변의 많은 무리 중 한 명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라면 예수님이 베푸신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면서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믿으면 뭔가 유익이 있거나 교회를 다니면 뭔가 이득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에 순수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오늘도 찾고 계십니다.
2. 이스라엘과 유다의 갈등 (40~43절)
“40 왕이 길갈로 건너오고 김함도 함께 건너오니 온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의 절반이나 왕과 함께 건너니라 41 온 이스라엘 사람이 왕께 나아와 왕께 아뢰되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이 어찌 왕을 도둑하여 왕과 왕의 집안과 왕을 따르는 모든 사람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가게 하였나이까 하매” (40-41절)
다윗이 김함과 함께 유다 지파와 이스라엘 백성 절반의 도움으로 요단을 건너 길갈로 돌아올 때, 거기에는 온 이스라엘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같이 건너간 사람은 이스라엘의 절반이고, 건너가 보니 이스라엘 전부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윗을 환영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지파들은 유다 지파에 대해 강한 불만을 드러냅니다. 다윗을 예루살렘으로 다시 모셔 오는 일에 자신들과 충분한 협의 없이 유다 지파가 독단적으로 결정하고 시행한 것에 기분이 상한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왕의 자리로 복귀하는 다윗에게 자신들의 불만을 터뜨립니다.
사실 그들의 이러한 반응은 이제 그들의 마음이 다윗을 향해 어느 정도 돌아왔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다윗을 다시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다윗이 다시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닌데, 그렇게 함에 있어 유다 지파가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자기들은 거기서 소외된 데 대한 불만을 터뜨리는 것입니다.
사사 시대 때부터 남쪽의 유다 지파와 북쪽의 나머지 지파들 사이에는 항상 분열이 있는 것을 성경에서 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유다 지파를 다른 지파들과 분리해서 기록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항상 ‘유다와 이스라엘’이라는 식으로 표현합니다.
이번 일에도 유다 지파가 다른 지파들에게 알리지 않고 다윗 왕의 왕위 복귀 환영 행사를 마련한 것에 대하여 다른 지파들이 크게 불평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것이 밥그릇 싸움입니다. 다윗의 복귀를 주도적으로 추진한 유다 지파가 나중에 자기들보다 더 많은 혜택을 누릴까 봐 그것을 염려하기 때문에 나와서 불평을 터뜨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북쪽 지파들이 진정으로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고 그가 높아지기를 바라면서 그를 모셨다면, 유다 지파의 그러한 행동에 분을 낼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바로 얼마 전까지 다윗을 배반하고 압살롬 편에 붙어서 반역을 저질렀던 일을 먼저 뉘우쳐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반역자는 사형인데, 다 용서하고 용납하며 다윗이 다시 받아들여 주는 것을 감사하면서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다시 충성하겠습니다.’라고 해야 마땅합니다. 유다가 실수로 그랬을 수도 있고 의도적으로 그랬을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한 것에 대해 용납하면서 ‘우리도 함께합시다.’라고 하며 다윗의 복귀를 즐거워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윗 왕을 보좌에서 내어 몰고 압살롬을 왕으로 추대하며 따랐던 일과 심지어 다윗을 죽이려는 데에 가담했던 자기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직 자기들이 다윗으로부터 차별 대우를 받아서 앞으로 불이익을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얼마나 이기적입니까?
“모든 유다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대답하되 왕은 우리의 종친인 까닭이라 너희가 어찌 이 일에 대하여 분 내느냐 우리가 왕의 것을 조금이라도 얻어 먹었느냐 왕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 있느냐” (42절)
온 이스라엘 지파들의 불만에 대해서 유다 지파의 태도는 훨씬 강경합니다. 유다 지파는 다윗도 유다 지파이니까 자신들이 다윗 왕의 혈육이라는 점과, 자신들이 왕을 모셔 옴으로써 다른 이스라엘 지파들보다 예외적인 축복을 왕에게 받은 일이 없다고 하며 자신들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다 지파의 이런 말도 반쪽짜리 진실입니다. 유다 지파는 다윗의 귀환에 주도권을 가짐으로써 자기들의 일부도 사실은 압살롬 편에 붙었었는데, 그 과거 흑역사를 빨리 청산하고 다른 지파들보다 다윗 왕의 호의를 더 많이 받고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 말이 뭡니까? ‘우리 고향 사람이야!’입니다. 혈육을 강조합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유다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는 왕에 대하여 열 몫을 가졌으니 다윗에게 대하여 너희보다 더욱 관계가 있거늘 너희가 어찌 우리를 멸시하여 우리 왕을 모셔 오는 일에 먼저 우리와 의논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나 유다 사람의 말이 이스라엘 사람의 말보다 더 강경하였더라” (43절)
지금 유다의 자기변호에 대해서 이스라엘 나머지 지파들은 자기들이 유다 지파보다 수적으로 훨씬 많다고 말합니다. 저쪽에서 ‘우리 고향 사람이야! 우리 가족이고 친척이야!’라고 하니까 ‘우리 수가 훨씬 많아. 열 배 많아.’라고 합니다. 참 어린아이 같이 싸웁니다.
그런데 유다 지파에 대한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런 책망은 사실 옳은 것입니다. 이미 이스라엘 지파들은 다윗의 귀환을 놓고 이미 의논 중이었기 때문에, 유다 지파가 단독으로 이 일을 추진한 것은 잘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유다 지파 역시 자기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하게 반박합니다.
정말 너무나 우리와 비슷합니다. 누군가가 잘못했을 때 ‘왜 그렇게 하느냐?’라고 하면 ‘뭐 어떠냐?’ 하거나 ‘너희는 안 그랬냐?’라고 합니다. ‘미안합니다. 잘못했습니다.’가 아니라 ‘뭐 어떠냐? 너희는 안 그랬냐?’라고 합니다. 서로 평행선을 그립니다. 인간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똑같습니다.
그런데 왕을 모시면서 이처럼 싸우는 것이 옳습니까? 뭔가를 얻어내겠다고 서로 싸우는데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어쨌든 이제는 함께 잘 모시며 함께 협력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까? 같은 왕을 모시면서도 이처럼 분열되는 것은 다윗에게도 좋지 않고 나라에도 좋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면, 이스라엘에 뿌리 깊은 지역감정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본문에 나타나는 유다 지파는 권력 지향적이며 자기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교만한 모습을 보입니다.
다윗의 도망자 시절 ‘다윗이 여기 있습니다.’라고 다윗을 죽이려 쫓아오는 사울에게 고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십’이라는 성의 사람들이 다윗을 사울에게 고발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십 사람들이 다윗과 같은 유다 지파였습니다. 그런 걸 보면, 유다 지파 내에도 분열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 지파는 자기들 내에서도 분열되어 있었고, 다른 지파들과도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역사적으로 계속된 분열은 나중에 최악의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을 성경과 역사를 통해 봅니다. 다윗을 이어서 왕이 된 그의 아들 솔로몬은 그가 죽은 뒤에 나라가 남과 북 둘로 갈라지게 되는 것을 봅니다. 그 분열이 직접적으로는 솔로몬의 우상숭배와 몇몇 잘못된 정책에 원인이 있지만, 그것은 결코 몇 년 사이 갑자기 벌어진 일이 아니라 이처럼 수백 년 동안 쌓여 온 지역감정의 결과입니다.
여러 삶 공부가 있는데 필수과목 중 <생명의 삶> 다음에 하는 <새로운 삶> 공부가 있습니다. 그것을 공부할 때 ‘영적 도해’라는 것을 하는데, 지도를 보면 어떤 특정 지역에 특히 강하게 역사하는 악한 영들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살펴보니까 진짜 그렇습니다. 어떤 곳을 보면 물질만능주의가 다른 데보다 강한 곳이 있습니다. 어떤 곳은 음란의 영이 강합니다. 어떤 곳은 탐욕의 영이 강합니다. 어떤 곳은 권력욕이 강합니다.
나라별로 그러기도 하고 지역별로도 그런데, 한국은 어떤 영이 강한 것 같으십니까? 수업 시간에 이 질문을 하면 ‘술 취함의 영’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분열의 영이 가장 강합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중국 사람들이나 일본 사람들은 나름대로 단결을 잘하는데, 한국 사람들은 단결을 못 합니다. 여기도 한인회가 유명무실하게 된 지가 10년이 넘었습니다.
한국도 이스라엘 역사처럼 남한과 북한이 나뉘어 서로 대적한 지 어느덧 77년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남한 사람들끼리도 연합되지 않고 수없이 분열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보수와 진보, 정부와 시민, 회사와 노조, 교사와 학생, 경찰과 시위대,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부모와 자녀, 심지어 요즘은 남자와 여자까지 분열되어 있는데, 아주 심각합니다.
제가 이번에 한국에 갔을 때 친한 친구들을 만났는데, 그때 하필 친구 중 한 명의 장모님이 돌아가셔서 조문을 갔습니다. 그 친구는 자녀가 둘인데 남녀 쌍둥이입니다. 같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같이 하는데 “내 아들이 잘못된 생각을 해서 좀 답답하다.”라고 했습니다. 쌍둥이 중 남자아이가 여자아이를 보면서 “너는 좋겠다, 여자라서. 요즘 남자들이 얼마나 차별을 받는지 아느냐?”라고 하고 여자아이도 아니라고 하며 서로 그렇게 싸운다는 겁니다.
둘 다 대학생인데, 제 친구 말로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처우가 좋아진 게 사실 얼마 안 되었고 아직도 멀었는데, 아들아이가 한 면만 보고 안 좋게 될 조짐이 보여서 걱정이라고 했습니다. 요즘 특히 20대에서 남녀 갈등까지 벌어진다는 게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정치에서 다른 당과 싸울 때가 많지만 같은 당 안에서도 계파 간의 갈등이 있어 서로 다툽니다. 그런데 분열은 왜 생깁니까? 분열이란 교만과 시기와 질투와 욕심의 결과물입니다. 분열된 곳을 보십시오. 아름다운 곳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온갖 종류의 죄악으로 가득합니다. 교회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하고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가장 큰 계명’, 그리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새 계명’을 주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민족의 분열의 현실을 놓고 눈물로 기도해야겠습니다. 미국도 얼마나 분열되어 있습니까?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분열을 조장하는 세력이 있으면, 거기에 가담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 각자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하고 시기하고 분열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그것은 결코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또 왕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세례를 받았고, 한 믿음을 가졌으며, 한 성령님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가 되기에 힘써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에서 ‘하나가 되기를 힘쓰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 됨은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되는 게 아니라, 아주 애를 써야만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유다와 나머지 이스라엘 지파들은 같은 민족이었지만 결국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서로 용납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자기주장만 하면 그런 비극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거듭 강조하신 것처럼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고 서로 사랑하며 섬기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가운데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바르실래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누가 먼저냐를 따지며 다투는 유다 지파와 이스라엘 지파들 같은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들과 같은 모습이 아니라, 상대방을 잘되게 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자기는 겸손히 뒤로 물러나며 다른 사람을 세워주는 바르실래 같은 성도들이 넘쳐날 때, 그런 교회는 이 땅에 있지만 천국을 맛보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바로 이런 바르실래와 같은 성도들로 가득하여 우리 모두 천국을 경험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천국을 보여 주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