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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26일 주일예배
✦ 회복하시는 은혜 31 ✦
“열매를 많이 맺는 삶의 비결”
(요한복음 15장 1~8절)
[들어가는 말]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오래 전 한국에서 어느 크리스천 미술가가 전시회를 열었는데, 여러 작품들 중에서 <사흘 후>라는 작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머리를 상징하는 똑같은 크기의 금속 조형물 두 개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왼쪽은 심하게 녹슬어 있을 뿐 아니라 그 위 끝에는 철사로 가시관이 엮여져 있고, 오른쪽에 있는 것은 반짝반짝 윤이 나면서 아름답게 잘 다듬어져 있었습니다.
그 작가는 이것을 통해 어떤 고난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반드시 찬란한 부활의 열매로 거두어진다는 것을 나타내기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작품을 본 관객들 중에서 크리스천들은 보자마자 왼쪽의 녹슨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의미하고 오른쪽의 아름다운 것은 그분의 부활을 의미하며, <사흘 후>라는 제목은 곧 부활을 뜻한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안 믿는 관객 하나가 전시 순서를 거꾸로 들어가서 윤이 나고 잘 다듬어진 조형물을 먼저 보고, 그 다음에 녹슬고 철사로 엮인 조형물을 보고 나서 이렇게 해석했다고 합니다. “인생이 아름다운 것 같아도 막상 사흘만 지내보면 이처럼 녹슬고 형편없음을 알게 된다는 의미구나.”
정말 정반대의 해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해석에 의미가 있다고 보입니다. 물론 거꾸로 본 것이지만 깨달음이 있습니다. 인생이 아무리 아름다워 보여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금방 녹슬고 쓸모없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권력을 잡거나 돈을 벌어 성공하는 것을 따져보면, 한 번 부자는 죽을 때까지 부자이고 권력을 잡은 사람은 죽을 때까지 권력을 잡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많이 보고 있습니다. 물론 많은 부자들이 평생 많은 돈을 가지고 살지만, 따지고 보면 그게 그렇게 오랜 시간이 아닙니다. 30년, 40년, 길어야 50년입니다. 역사로 보면 50년, 60년이라는 것은 짧진 않지만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닙니다. 후딱 지나갑니다. 30년 전을 생각해보면 기억이 생생합니다. 금방 지나가 버립니다. 인생이 아름다운 것 같은데 사실 금방 녹슬어 버리는 것을 우리가 다 알지 않습니까?
결혼하신 분들은 결혼할 때 백마 타고 온 왕자 같던 그분은 어디 있습니까? 백설 공주 같아 보이던 착하고 아름다운 그분은 지금 또 어디에 있습니까? 자식만 낳으면 행복이 보장될 것 같았는데 그 자식 때문에 얼마나 속상한 일이 많았습니까?
돈만 있으면 화려한 인생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래서 이를 악물고 열심히 돈을 벌어보니 어떻습니까? 특히 미국에 와서 남의 나라에 사는 게 쉽지 않은데 열심히 돈을 벌어서 잘 살아보려고 애를 썼지만 그 돈을 버느라 그 사이 놓쳐버린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녀와의 관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건강 등 많은 것들을 놓쳐버렸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워 보이는 것도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그리스도 없이는, 단 사흘 만에 녹슬고 썩어 버리고 만다는 것은 확실히 진리입니다. 예수님 없는 인생은 아무리 화려해 보이고 성공한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허무하며 실패일 수밖에 없습니다. 곧 시들고 녹슬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인생은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우리도 녹이 슬고 시들 수는 있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1.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1)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 (1절)
그래서 예수님은 ‘어떻게 가는가, 얼마나 빨리 가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어디로 가는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천 길 낭떠러지를 향해 남들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달려가면 무슨 소용입니까? 남들보다 먼저 떨어져 죽을 뿐입니다. 그래서 어디로 가는가가 더욱 중요합니다. ‘어떻게 믿는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누구를 믿는가‘입니다.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잘못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4장 마지막 부분에서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14:31)라고 하셨습니다. 장소를 옮기자는 말도 되지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라고 하셨습니다. 좁지만 생명의 길로 초청하신 것입니다.
이제 15-16장은 예수님의 두 번째 고별 설교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첫 번째 고별 설교에서 다루셨던 주제를 발전시켜서 한 번 더 이야기하십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1절)
요한복음에는 “나는 OO이다”라는 예수님의 자기소개가 7회 나옵니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등 많이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그 중 마지막 자기소개입니다.
그 동안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을 주는 분으로 소개하셨고, 따라서 사람들에게 자신에게 와서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미 자신에게로 와 있고 믿고 있는 제자들을 대상으로 마지막 자기소개인 “나는 참 포도나무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해서 이제 십자가의 길에 동행하고 있는 11명의 제자들이 자신과 더욱 친밀하게 하나가 되고 자신의 생명을 공유하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이들은 다 실패하고 맙니다. 몇 시간 되지 않아서 다 도망가고 실패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성령을 받고 변화되어 예수님이 원하셨던 일을 다 감당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나는 참 포도나무”라고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포도나무’ 혹은 ‘포도원’은 예수님 당시는 물론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제 자기가 포도나무이고, 하나님 아버지는 농부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그냥 포도나무가 아니라 ‘참’ 포도나무라고 하십니다. 자신이 ‘참 이스라엘’이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성전을 중심으로 한 유대인들 특히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도리어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것을 지금까지 요한복음이 죽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을 통해 그들 스스로 자신들이 참 포도나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구약에서 포도나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았지만 하나님이 기대하셨던 열매를 맺지 못하고 들포도를 맺었습니다(사 5:1-7). 들포도를 맺은 포도나무가 바로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최상품을 심으셨는데 들포도가 나서 실망하시고 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도(렘 2:21), 또 에스겔을 통해서도(겔 15:2-8), 포도나무 이스라엘을 향한 실망감을 표현하셨습니다. 이제 땔감으로 말고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열매 없는 포도나무, 범죄하는 이스라엘을 보시며 탄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는 참포도나무’라고 하신 것은 ‘내가 참 이스라엘이다. 새로운 이스라엘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붙어 있는 자들, 그분 안에 있는 자들만이 참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분 안에서만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고, 그분만이 참 생명의 양식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중요한데, 우리는 소위 ‘안 믿는다’라고 하며 신자와 비신자를 구분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세상에 안 믿는 사람, ‘비신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안 믿는 게 아니고 뭔가 다른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불교도들은 부처의 가르침을 믿는 것이고, 이슬람교도도 알라 신을 믿고, 다 나름대로 믿는 바가 있습니다. 종교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뭔가 자신만의 종교가 있습니다. 그것이 돈일 수도 있고, 성공일 수도 있고, 자녀일 수도 있고, 자동차일 수도 있고... 많습니다.
그러니까 종교를 안 믿는다는 말은 사실 자기가 믿는 것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엄격한 의미에서 이 세상에 비신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 뭔가를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믿는가가 중요합니다. 믿기는 믿는데 헛된 것을 믿으면 헛된 삶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계속해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으라고 합니다. 참된 것을 믿으라는 겁니다. 헛된 것을 믿지 말고 참된 것을 믿으라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것을 믿지 말고, 끝난 후에도 계속 함께 하시는 분을 믿으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참 포도나무가 되시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농부로 두고 계시기 때문에 참 포도나무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계속 혼자 온 게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셔서 왔다고 하십니다. 자기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가 하라고 하신 대로 한다고 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습니다.
이스라엘과 달리, 예수님은 자기가 원하는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는 포도나무이셨기에 참 포도나무가 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먼저 챙기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셨기에 참 포도나무이십니다. 그래서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인 포도나무들과 달리 하나님께 한결같이 신실하시기에 참 포도나무이십니다.
2) 제거해버리는 가지와 깨끗하게 하는 가지 (2절)
예수님은 우리가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임을 전제하시면서 가지인 우리에게 농부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는지를 말씀하십니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2절)
여기서 두 종류의 가지를 말씀하시는데, 열매 맺는 가지와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입니다. 그리고 각각의 가지에 따라 농부이신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도 달라진다는 겁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제거해버리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깨끗하게 가지치기를 하십니다.
이스라엘과 중동에서 포도나무는 두 번의 가지치기를 합니다. 먼저 개화기인 봄에 순 끝을 잘라서 너무 빨리 자라지 못하게 하거나 일부 꽃이나 포도송이를 제거해 남은 부분이 더 많고 더 나은 열매를 맺도록 하는 가지치기입니다. 두 번째 가지치기는 가을에 하는데, 포도 수확을 마친 후에 다음 번 계절에 열매를 맺을 가망이 없는 가지를 제거해버립니다.
이러한 배경 아래 예수님은 제거하는 가지와 깨끗하게 하는 가지를 말씀하시는 겁니다. 첫 번째 가지는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입니다. 그런 가지는 당연히 하나님이 제거하십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데 열매를 맺지 못합니까? 이것이 가능합니까?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나 믿는 척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제자들입니다.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열두 제자뿐 아니라 수만 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는데, 그들 중 대다수는 돌아섰고 마음을 접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열두 제자에 들었지만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3년 반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다른 제자들과 똑같이 둘씩 짝지어 나가서 귀신을 쫓아내고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능력도 행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루시려는 하나님 나라가 세속적인 영광으로 높아지고 로마를 물리치고 최고가 되는 나라, 돈과 명예가 보장되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가룟 유다는 깨달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떨어져서(?) 그것을 깨닫지 못했지만 가룟 유다는 너무 똑똑해서 그것을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런 자들은 참 포도나무와 달리 거짓 포도나무 이스라엘과 같은 자들입니다. 가룟 유다도 그들 중 하나였습니다. 겉으로는 열매를 맺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아니라 다른 열매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설교(마태복음 5-7장)에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주 무서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1)
무서운 말씀이 아닙니까? 심지어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마 7:23)
아니, 그렇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놀라운 사역을 한 사람들을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하십니까? 그것은 나쁜 열매였기 때문입니다. ‘불법’이 뭡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불법’은 ‘무법’인데, ‘무법’은 법이 없는 게 아니라 자기가 법인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불법’이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농부)의 뜻대로 행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맺는 열매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못된 열매를 맺는다는 겁니다. 그들을 향해 주님은 “내게서 떠나가라” 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가지치기에서 ‘제거하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 가지는 열매를 맺는 가지입니다. 농부이신 하나님은 열매를 맺는 가지가 더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깨끗하게 가지치기를 하신다는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열매’는 그 동안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신 맥락으로 볼 때, 주님의 새 계명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특히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열매는 사랑입니다. 열매는 관계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푹 젖어 그 사랑이 나를 채우고 흘러 넘쳐서 이웃에게로, 형제자매에게로 흘러 나가는 그런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열매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신앙생활은 그냥 예배에 살짝 참석하고 가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혼자 기도하고 혼자 말씀 보는 것이 신앙생활의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도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 읽고 묵상하며 예배해야 합니다. 그런데 함께 예배하고, 함께 말씀을 공부하고, 함께 만나서 교제하며 서로를 섬기는 이 세 가지가 다 필요합니다. 그렇게 될 때 그것이 진짜 신앙생활이고 제자훈련입니다.
보통 교회들이 제자훈련이라고 하면 책상에 앉아서 열심히 말씀을 공부하고 숙제를 많이 해오는 것을 생각하는데, 물론 그것도 제자훈련의 일부이지만 그렇게 공부하는 게 곧 제자훈련이 아닙니다. 공부한 것이 삶에서 실천되도록 하는 것까지 나아갈 때 제자훈련입니다. 그것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공부만 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말씀 공부도 하고, 이렇게 같이 예배도 드려야 합니다.
왜 자꾸 같이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같은 교회 안에서도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어도 주님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랑하라” 하는 말씀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나와서 그래도 얼굴을 보고 인사하고 악수도 하고 잘 있었느냐고 안부도 묻고, 더 나아가 용납하고 용서하고 또 사랑하고 섬기기까지 하는 것이 제자훈련입니다.
그래서 자꾸 만나야 하고, 자꾸 예배도 같이 드려야 하고, 특히 목장에서 만나 이야기도 하고 기도도 하는 게 필요합니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매주 만나보십시오. 별로 안 좋아질 수가 있습니다. ‘어휴, 저 사람이 왜 저런 말을 하지?’라고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도 용납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을 연습하는 겁니다.
이 연습이 없이는 절대 제자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말씀 공부만 막 하고 기도만 하는 게 제자훈련이 아니라, 그 토대 위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애를 써보고 훈련하고 연습하는 가운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을 닮아가는 제자가 되는 겁니다.
신앙생활과 제자가 되는 것은 결코 이론이 아닙니다. 실제입니다. 그런데 실제 부분이 너무 약하기 때문에, 그냥 모여서 잠깐 예배했다가 흩어지고 혼자 말씀 읽고 기도하는 방향으로만 나아갔기 때문에, 한국 교회가 약해지고 사회에서 지탄을 받게 된 큰 원인이 되었습니다. 사랑을 연습하는 게 부족합니다.
교회가 가족인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교회는 조직이나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인데, 가족인 것을 잊어버리니까 자꾸 예배 모임 중심, 집회 중심으로 가고 개인 영성만 강조하다 보니까 사랑 실천이 많이 약해졌고, 그러다 보니까 주님의 제자로 사는 게 많이 부족한 겁니다. 그래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겁니다.
이것은 거창한 게 아니라 아주 간단한 겁니다. 예를 들어, 예배가 끝나고 나갈 때 저쪽에 누가 오면 먼저 나가시라고 양보하는 것부터가 사랑의 실천입니다. 문을 열어드리는 것, 짐을 들어드리는 것부터 우리가 시작을 해보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단순한 친절이 아니라 주님이 명령하셨으니까 사랑을 실천해보기 위해 자꾸 애를 쓰는 겁니다. 그래서 삶 공부들이 그것을 실천하도록 디자인이 되어 있는 겁니다.
3) 말씀으로 깨끗해진 가지 (3절)
그런데 농부 하나님이 열매를 맺는 가지를 깨끗하게 하시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더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시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3절)
제자들은 ‘이미 깨끗해진’ 자들입니다. 13장에서 깨끗해진 사람들은 발만 씻으면 된다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내가 일러준 말’, 즉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써 깨끗해졌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을 더 알고 관계가 더 깊어지는 방법은 많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깨끗해질 수도 있고, 큰 은혜를 경험한 후 신앙이 깊어질 수도 있습니다. 부흥회를 참석했다 그렇게 될 수도 있고, 컨퍼런스에 참석해서 은혜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가장 강조하시는 것이 바로 ‘말씀’입니다. 신앙의 성패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실질적인 교제를 나누고, 그 말씀을 통해 말씀대로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더 간단히 말하면, 진짜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렇게 말씀과 기도와 예배로 교제한 것이 삶에서 형제자매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없으면 진짜 신앙이 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농부들은 봄에 가지치기를 할 때 꽃이나 열매가 너무 많으면 그런 것들을 잘라냅니다. 그래야 더 맛이 좋은 포도송이가 맺히기 때문입니다. 더 맛있는 포도가 맺히게 하기 위해 가지치기를 한다는 것은 포기한다는 말입니다. 더 좋은 것을 얻기 위해 어떤 것들을 포기하고 잘라낸다는 겁니다.
보통 소유가 많으면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려고 하고, 돈이 많은 사람도 조금만 더 벌겠다고 하는데, 헛된 행복을 위해 쌓고 또 쌓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눔을 통해서 잘라내라고 하실 때 순종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목표를 두고 쫓아가면 사실은 거기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돈을 벌려고 따라가면 오히려 돈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모든 것의 기준이 돈이 되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도 돈이 기준이 되는데, 정말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려면 그런 것을 잘라내고 포기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내가 좋아하지만 그런 것을 잃어버리는 아픔을 경험하더라도 잘라낼 때 오히려 더 풍성한 열매, 정말 좋은 열매를 우리가 맺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못하면 정말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제자들도 말씀 안에 거하고 말씀대로 살수록 더욱 깨끗해지고 더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2. 예수님 안에 거할 때 맺는 풍성한 열매
1)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삶 (4-5절)
예수님이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의 과정을 통해 아버지께 가셔야 되는 이유는, 그래야 성령이 오시고 성령을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백성으로 우리를 새롭게 빚으시고 인도하시기 위함입니다.
성령님이 지금 우리를 직접 인도해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예수님을 믿을 때 보내주신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그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서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내 힘이 아니라 성령님의 힘으로 가능한데, 그래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4절)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를 깨끗하게 하도록 그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을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라고 표현하십니다. 이 말씀의 헬라어를 직역하면 “내 안에 거하라 그리고 나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우리에게 있는 겁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도 우리 안에 거하신다면, 누가 누구 안에 있는 겁니까? 이런 표현이 나오면 하나가 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나와 주님이 하나가 된 거구나.’ 하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우리의 결정에 달려 있다는 겁니다. 물론 주님의 은혜로 도와주심으로 가능하지만,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도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물론 아무리 주님이 원하셔도 가룟 유다처럼 끝까지 거부하면 그것을 존중해주십니다. 요한의 다른 편지인 요한계시록에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신 말씀과도 같습니다.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계 3:20, 새번역)
마음 문을 두드리는데 문을 부수고 들어오지는 않으십니다. 우리의 인격을 존중해주십니다. 스스로 열 때까지 기다려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우리가 한 번 마음 문을 열고 들어오시게 한 후에도 계속 주님이 거하시도록 우리는 계속 마음 문을 열어드려야 합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은 가지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스스로 열매 맺는 가지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지, 가지가 떨어져나갔는데 어떻게 열매를 맺겠습니까? 너무나 상식적인 일입니다. 이 분명한 자연의 원리가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에도 적용된다는 겁니다.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즉 ‘내 안에 있지 않으면, 나와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을 받은 후에도 끊임없이 예수님 안에 거할 때, 즉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갈 때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5절)
같은 말씀을 또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경고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기억해야 할 말씀이고, 또 이 땅에 교회가 존재하는 한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크리스천들이 ‘예수님을 떠나서도 나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라고 하면서 예수님 없이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가리키는 책도 나왔습니다. <Christian Atheist>라는 미국 책이 오래 전에 나왔습니다. ‘크리스천 무신론자’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분명히 예수님을 믿기는 믿는데, 매일의 삶을 보면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무신론자처럼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떠나서 사는 그런 삶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 마음대로 사는 게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것이 아까도 말씀드린 ‘불법’(무법), 즉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삶이며 위험한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매일 자신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시 나는 주님을 떠나 사는 건 아닌가? 내 안에 정말 예수님이 계신가? 이 결정이 예수님께서 좋아하실 만한 결정인가?’ 이것을 매일 물어야겠습니다.
2)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는 자가 받는 심판 (6절)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는 자,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 그분을 사랑하지 않고 의지하지 않는 자, 예수님과 상관없이 자신의 권력과 야망과 욕망을 위해서 사는 자의 결말이 어떻게 됩니까?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6절)
여기는 너무나 생생한 그림언어로 말씀하십니다. 여기 다섯 가지 동사가 나오는데, ‘밖에 버려지다’, ‘마르다’, ‘모으다’, ‘던지다’, ‘불로 사르다’입니다. 이렇게 동사를 다섯 개나 연속으로 사용하신 것은, 그 장면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느껴지도록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런 대표적인 사람이 가룟 유다 아닙니까? 그에게 일어난 일이 우리 중 누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말니다. 어려울 때는 주님을 찾다가 살 만하면 주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이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경고를 하십니다.
물론 이 말씀은 최후의 심판 때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꼭 최후의 심판이나 미래의 일만이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은 이미 심판 아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열매 없는 인생이 되어서 그 자체가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3) 열매를 통해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 (7-8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7-8절)
20여 년 전에 미국의 어느 유명한 잡지사에서 미국인들이 얼마나 정직한가를 알아보는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먼저 120개의 지갑을 준비한 다음 그 속에 10달러짜리 지폐 세 장과 20달러짜리 한 장, 총 50달러의 현금을 넣었습니다. 지갑 주인의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 가족사진, 메모, 상품권도 함께 넣었습니다.
그 다음 미국 전역에 걸쳐 대도시 세 곳, 대도시 교외지역(suburb) 세 곳, 중도시 세 곳, 소도시 세 곳 해서, 도합 열두 군데에 각각 10개씩 모두 120개의 지갑을 길에 놓았습니다. 그 다음 지갑을 누가 들고 가는지 숨어서 지켜보았습니다. 120개 중에 몇 개나 주인에게 돌아왔을 것 같으십니까? 그 결과는 이랬습니다.
첫째, 놀랍게도 무려 67퍼센트(2/3)에 해당하는 80개의 지갑이 온전하게 돌아 왔다고 합니다. 2/3나 되는 미국인들이 정직하게 처신했다는 것은 정말 놀랍습니다. 그 실험에서 가장 낮은 회수율을 기록한 곳이 라스베이거스였다고 하는데, 환락과 도박의 도시로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10개 중 5개나 되돌아왔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상황 속에서 임자 없는 돈을 주워 정직하게 처신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바르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런 지갑을 갑자기 주웠다면 정직하게 돌려주시겠습니까? 저는 그러실 줄 믿습니다(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도 있지만...).
둘째, 미국 남자들에 비해 여자들이 더 정직하게 행동하였습니다. 신기하게도 120개의 지갑 중 정확히 반인 60개를 남자가, 나머지 60개를 여자가 주웠는데, 여자는 72퍼센트인 43명이 지갑을 되돌려주었고, 남자는 62퍼센트인 37명이었습니다.
셋째, 이 실험을 한 사람들은 실험하기 이전에 청소년들이 타락해서 돌려주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었는데, 놀랍게도 지갑을 주운 청소년들 가운데 2/3가 돌려주었다는 겁니다.
넷째, 지갑을 되돌려준 사람들 중 압도적으로 다수가 정직하게 행동하는 것을 부모님에게서 물려받았다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도 부모가 정직한 삶을 살면 자녀도 정직하게 살게 된다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것은, 지갑을 되돌려준 거의 모든 사람들이 크리스천들이었다는 겁니다. 그 중에는 물론 규칙적으로 교회에 안 나가는 사람도 있었지만, 크리스천 가르침이 도덕적 자극제 구실을 한다고 믿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피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런 겁니다. 당연히 우리가 이렇게 예배를 열심히 드리고 말씀을 열심히 읽고 기도도 열심히 해야만, 그것이 정직한 삶으로 나오는 겁니다.
왜 정직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정직하게 행하는 겁니다. 그 열매가 정직한 삶을 통해 드러나고, 정직한 삶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서 나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임을 늘 기억하면서, 지금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 늘 거하며 그분에게 꼭 붙어 있음으로 풍성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많이 맺고 하나님께 칭찬받는 고귀한 인생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