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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2s7KxpVREAI?t=1892

 

 

202174일 주일예배

회복하시는 은혜 20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요한복음 1117~27)

 

[들어가는 말: 행복과 불행을 판단하는 기준]

 

유명한 말 중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는 말이고, 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그에 대한 원인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면서 보면 인생에서 그렇지 않은 경우, 즉 콩 심은 데 팥이 나고 팥 심은 데 콩이 나는 일들이 종종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아니, 많습니다.

 

또한 인생에서는 우리의 생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일이 전개되는 적도 많습니다. 좋은 일이 생겨서 좋아했는데 바로 그것 때문에 불행이 오기도 하고, 나쁜 일이 생겨서 괴로워했는데 바로 그것 때문에 오히려 일이 잘 풀리는 경우가 일어납니다. 유명한 중국 격언인 인생사 새옹지마처럼, 오늘의 불행이 내일의 행복이 되고 오늘의 행복이 내일의 불행이 되는 일도 많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만일 내가 그때 OO했더라면 더 행복했을 텐데...’ 그런 적이 없으십니까? 아마 다 있으실 겁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아침에 일어나서 옆에 있는 사람을 보면서 만일 내가 그때 이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과 결혼했더라면...’ 만일 내가 그때 이 직장이 아니라 그 직장을 선택했더라면...’ ‘만일 내가 그때 이 학교가 아니라 다른 학교로 갔었더라면...’ ‘만일 내가 그때 이 회사 주식이 아니라 저 회사 주식을 선택했더라면...’ ‘요즘 비트코인이 유행하는데 그때 샀더라면(또는 팔았더라면)...’

 

그러나 그건 자기 생각이지, 그렇게 다른 선택을 했다고 자기 인생이 더 행복해졌을 것이라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확신을 누가 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주어진 일에 감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렇게 했으면 참 행복했을 텐데’, ‘저렇게 했었으면 내게 더 나았을 텐데라고 했던 그것이 오히려 나에게 불행을 가져다주었을 수도 있고, 또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던 좋지 않은 과거의 괴로움 때문에 오히려 지금의 행복이 가능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보통 내 인생’(my life)라고 하는데, 내 인생을 내가 살고 있지만 결코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겸손히 인정해야 합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데 어떻게 내가 주인이 됩니까? 내 인생에 일어나는 일들을 다 컨트롤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내 인생이다.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한다.’라고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따라갈 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자녀인 우리가 불행해지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어느 부모가 자녀의 불행을 원하겠습니까? 성경은 그것을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때로 하나님이 우리를 불행하게 몰아가시거나 전혀 도와주지 않으시고 괴로움 가운데 그냥 내버려두시며 방치해두시는 것과 같은 일들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아니,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날 수 있는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하나님이 그냥 놓아두실 수가 있단 말인가? 어떻게 이런 악한 일들이 세상에 일어나도록 두신다는 말인가?’ 하고 의심할 때가 있고 원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반드시 이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서 그렇게 느낄 때 과연 그럴까?’ 하고 물어보십시오. ‘내가 이렇게 안 하고 저렇게 했으면 행복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으면 이 질문을 꼭 해보십시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여러분, 과연 지금 내 인생에 일어나는 어떤 불행한 일이 정말 불행일까요? 과연 내 인생에 일어나는 행복이 정말 행복일까요? 우리는 행복과 불행의 정의를 주님 안에서 확실하게 갖고 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진짜 행복인지 진짜 불행인지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 나라에 유익이 되는가 하는 겁니다.

 

나에게 어떤 안 좋은 일이 벌어졌을 때,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볼 때 이것이 정말 안 좋은 일인가 봐야 합니다. 다들 안 됐다고 할 때 과연 그럴까?’ 하며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보는 겁니다.

 

아쉽게도 5주 동안 오하이오에서 100만 불을 주는 Vax-A-Million이 끝났습니다. 그런데 또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Kroger에서 백신 맞은 사람들을 위해서 500만 불을 또 준다고 합니다. 만약 내가 100만 불에 당첨된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정말 좋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이걸 잘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복권 당첨되고 망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과 불행의 정의를 주님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관점을 잘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인생에 어떤 일이 벌어지든지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믿음을 떠나버리는 어리석고 안타까운 결정을 하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지금 인생에 불어 닥친 비극의 폭풍 앞에서 주님의 사랑과 현실의 괴로움 사이의 간격이 있어서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지 괴로워하는 한 가정이 있습니다. 바로 마르다와 마리아 가정입니다.

 

예수님은 죽을병에 걸린 나사로뿐 아니라 그의 누이들인 마르다와 마리아를 사랑하셨지만, 그런데도 도움을 주러 즉시 가지 않으셨습니다. 그 사이 나사로는 죽었는데, 과연 여기에 무슨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다는 말입니까? 바로 이 비밀을 여는 열쇠가 나사로 사건에 숨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계속해서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1.   단순한 기적이 아닌 예수님을 가리키는 표적임을 기억하라 (17~18)

 

목숨이 위험한데도 유대로 올라가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이제 혁명의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도마는 우리 스승님 혼자 가시도록 두면 안 된다.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고 외쳤습니다(16). 그러나 와서 보니 상황은 훨씬 절망적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7)

 

베다니에 도착하신 예수님을 기다린 것은 무덤에 있는 나사로의 시체였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가 죽었으니까 조문하러 오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람들도 다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곳은 곡소리가 가득한 슬픔의 자리였습니다. 더 절망적인 것은 이미 매장한 지 나흘째나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3일이 지났습니다. 왜 예수님은 사흘이 지나고 나흘째에 오신 것입니까?

 

저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마르다와 마리아가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께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습니다.’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바로 옆에 있는 유대 베다니에서 예수님이 머물고 계시던 요단강 동편 베다니까지는 하룻길이었으니까, 오는 데에 하루가 걸렸고, 예수님이 이틀을 더 머무셨고, 오시는 데에 또 하루가 걸렸으니까 나흘이 맞습니다.

 

그런데 왜 나흘인가? 후대 랍비들의 기록을 보면,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3일 동안 떠나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사흘 후 시신의 얼굴색이 변하고 썩기 시작하면 더 이상 살아날 희망이 없고 영혼이 몸에서 떠났다고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사람들이 하루, 이틀, 사흘까지는 그래도 혹시, 혹시하고 기대하며 희망을 갖고 있었던 사흘의 기간이 끝난 후, 이제는 완전히 가망이 없고 썩은 냄새도 나며 시체가 부패하고 살아날 가능성이 없는, 사람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되는 바로 그때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충 하다 보니까 길에서 일을 보다가 오셔서 그런 게 아니라, 일부러 그렇게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 다음에 뜬금없는 이야기를 합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8)

 

사실 7절에서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라고 한 다음에 19절에서 많은 사람들이 와서 위로했다는 말씀으로 이어지는 게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베다니가 예루살렘에서 오 리쯤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오 리는 3킬로미터 즉 2마일이 조금 안 되는 거리입니다. 굉장히 가까운 거리입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 갑자기 예루살렘이 베다니와 가깝다고 하면서 예루살렘을 언급하는 것입니까? 사실 예루살렘은 여기서 전혀 등장할 필요가 없는 지명인데, 이 말이 뭡니까? 요한복음에서 의도하는 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러 베다니로 오신 것이지만, 사실은 나사로를 살리러 오신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최종 목적지는 이곳 베다니가 아니라 예루살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사로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사건이 예수님이 이제 예루살렘에 가셔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사건을 미리 예고하는 성격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전에 다른 데로 이사 가신 교우님이 계신데, <생명의 삶>을 할 때 요한복음을 요약하면서 굉장히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질문을 했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다 살아난 것이 얼마나 엄청난 사건입니까? 사람이 죽었다 살아난 것이 보통 일입니까? 그런데 왜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요한복음에만 있을까요?

 

이것은 아주 심플한 질문인 동시에 어려운 질문입니다. 어떻게 알겠습니까? 다른 복음서 저자들(마태, 마가, 누가)은 왜 이렇게 사람이 죽었다 살아나는 중요한 사건을 기록하지 않고 요한만 기록했겠습니까? 사실 정확한 답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요한복음에 이 사건을 기록한 것에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사람이 죽었다 살아난 사건이 세 번 나와 있습니다. 다른 두 번은 가버나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예수님이 살리신 사건,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사건(7:11-17)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신 경우가 그렇게 나오는데, 나사로 사건은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에서는 기록하지 않고 요한복음에만 나와 있습니다.

 

사실 다른 데에서 사람이 죽었다 살아난 것도 보통 사건입니까? 그런데 그것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엄청나게 변화되었다든지, 이것이 엄청난 영향력 있는 사건이었다든지, 그 일대 사람들이 다 변화되었다든지 하는 것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냥 그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아는 사람이 죽었다 살아난 것을 아무리 보았어도 , 놀랍다. 저분이 정말 대단하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라고 하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그뿐이라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다른 복음서 저자들도 나사로 사건을 알았겠지만, 특히 마태 같은 사람은 열두 제자 중 한 명이니까 당연히 알았을 것이지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 자체로는 대단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왜 이 사건을 유독 기록하고 길게 다루는가 하면, 다른 여섯 번의 기적 사건과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사람이 죽었다 살아나는 기적을 일으키셨다는 것이나,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을 일으키셨다고 하는 기적 자체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기적을 봤다고 사람이 변화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심지어 자기가 죽었다 살아났다고 해도 크게 변함이 없다는 겁니다.

 

그럼 뭡니까? 예수님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계속 강조하는 것은, 기적만 보지 말고 기적을 일으키신 그분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적이라는 말 대신 표적’(sign)이라는 말을 씁니다. 예수님을 가리키는 사인이라는 겁니다.

 

Stop sign이나 신호등 같은 사인들이 있고 그것들이 가리키는 게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기적들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표적(사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발견하라. 그리고 그 예수님과 관계를 세워라.’ 하는 것이 요한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에 나사로 사건을 이렇게 기록한 것입니다.

 

 

2.   불행하다고 또는 행복하다고 느낄 때 과연 그럴까를 질문하라 (19~22)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19)

 

조문객들을 보면 생전에 고인이 어떤 사람이었고 그 집안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조문객들이 찾아와서 며칠째 묵으며 시끄럽게 떠들고 곡하면서 유족들을 위로하는 것이 풍습이었고, 특히 전문으로 곡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을 불러다가 울고 통곡하는 일을 하게 했습니다. 이때 오라비를 잃은 마르다와 마리아에게는 큰 위로가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을 믿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위로를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믿는 사람이라도 당연히 슬퍼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믿음의 조상이지만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울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우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차원이 절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소망이 없는 사람들처럼 흐느끼고 무너지지는 않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믿었지만 위로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진정으로 이들의 슬픔을 위로해줄 수 있겠습니까? 죽음 앞에서 어떤 것이 참된 위로가 될 수 있겠습니까?

 

많이 밀려드는 조문객들을 맞이하던 집안 주인 마르다에게 반가운 소식이 전해집니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도착하셨다는 소식입니다.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0)

 

요한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나사로의 집안과 예수님은 아주 일찍부터 가까이 지냈던 것으로 보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마르다는 예수님과 그 일행을 대접하기 위해 분주히 음식을 만들며 일하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듣는 장면이 나옵니다(10:38-42).

 

여기서도 비슷합니다. 마르다는 성격이 급했던 것 같은데, 예수님이 마을 입구에 오셨다는 소식을 들으니까 자기 동생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오셨다. 빨리 나와.’라고 하지도 않고 너무 급해서 혼자 나가 예수님을 만난 겁니다.

 

반면 마리아는 차분한 성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도 마리아는 조용히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마르다는 분주히 일을 했습니다. 나중에 12장에서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사건이 나오는데, 그때도 마르다는 일을 하고 있고 마리아는 향유를 예수님께 붓습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집에 머물면서 차분하게 조문객들을 맞이하고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때 마르다가 예수님께 뭐라고 합니까?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1)

 

이것은 불평이나 원망이라기보다는 짙은 아쉬움입니다. 사람을 보내자마자 나사로가 죽었으니까, 예수님이 오시지 않은 것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 전에라도 예수님이 이곳에 계셨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물론 예수님이 바쁘셔서 이곳저곳 다니시는 것을 압니다. 또 얼마 전 유대에서 험한 일을 당하고 지금 피해 계신 것도 압니다. ‘그래도 여기 계셨더라면 오라버니의 병을 고치실 수 있었을 텐데...’ 하는 깊은 아쉬움을 표현한 것입니다.

 

지금 마르다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만약 OO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라고 우리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게 아니라 저랬으면 더 좋았을 텐데라고 합니다. ‘만일 예수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텐데. 만일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불행하지 않고 행복할 텐데. 오라버니가 살아 있을 때 예수님이 오셔서 고쳐주셨더라면 지금쯤 우리가 행복하게 살고 있을 텐데. 우리 여동생들에게 정말 잘해주던 오빠가 죽지 않았더라면 내 인생과 마리아의 인생이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할 텐데.’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서 슬픔을 달래는 겁니다.

 

얼마나 우리와 똑같습니까? 바로 이런 생각이 들 때 해야 할 질문이 뭐라고 했습니까? ‘과연 그럴까?’ 정말 그럴까요? 만일 나사로가 지금도 살아 있다면 정말 더 행복할까요? 나사로가 죽었기 때문에 정말 불행해진 걸까요? 지금 예수님이 무엇을 생각하시는지, 또 무엇을 하시려는지를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온통 불행하다. 괴롭다.’ 하는 마음이 자신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것을 정말 잘 생각해야 합니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나의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면, 어떤 일 때문에 너무 행복하고 어떤 일 때문에 너무 불행하다고 한다면, 그때 내가 정말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인가를 심각하게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불행한데 , 좋다.’라고 하라는 게 아닙니다. 또 행복한데 일부러 괴로운 척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행복과 불행의 원인이 어디서 오는가를 정말 점검해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다음 순간 나를 불행으로 이끌 수도 있습니다. 또 내가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다음 순간 나를 행복으로 이끌 수도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압니까?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저 직장만 되면 정말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꿈의 직장(dream job)이 있습니다. 몇 개 오픈된 곳들이 있는데 자기가 정말 가고 싶은 곳이 탁 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것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해서 함께 기도도 했을 때 그렇게 탁 이루어지면 얼마나 행복합니까? 정말 좋고 감사합니다. 그런데 가보았더니 내가 알지 못하던 이상한 것이 있는 겁니다. 내 신앙을 타협해야 하는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그게 정말 행복한 일일 수 있겠습니까? 또 정말 괴롭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새로운 길이 열리는 통로가 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은 상황 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때 그것이 인생을 이끌어가는 게 아닙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 때 그 일이나 상황이 나를 이끌고 가는 게 아니라, 어떠한 상황이라도 그 안에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이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지금 깨달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죽은 사건에서 그가 죽었으니까 다 슬픕니다. 다 불행합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을 못 보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도 만약 당장의 고통과 괴로움에만 집중하며 그것만 본다면, 그리고 그저 슬픔의 자리에만 앉아 있다면, 우리에게는 와서 위로한다고 해도 그때뿐인 위로 밖에 아무것도 남을 것이 없습니다.

 

사실 수많은 조문객들이 와서 아무리 위로해도 위로가 되겠습니까? 마르다는 예수님이 자신과 남은 가족인 마리아를 참으로 위로해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부탁합니까?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2)

 

지금 마르다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얼마나 친밀한 관계에 있으신지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뜻과 맞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시는 것도 잘 압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이 자신과 남은 가족을 위해 기도하실 때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위로와 소망을 줄 수 있으시다고 믿었습니다.

 

그 위로와 소망이 무엇입니까? 이때 마르다에게 그 위로와 소망이 되는 것은 바로 죽은 나사로의 영혼을 하나님이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해달라는 마음으로 이 말을 한 것입니다. 사실 그것처럼 유족에게 큰 위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거기까지 밖에 못 봅니다. 그러니까 나사로가 죽었으니까 그 영혼을 하나님이 잘 받아주시도록 간구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거기까지입니다.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것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르다는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압니다.”라고 했지만, 그녀가 말한 무엇이든지에 나사로가 살아나는 것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마르다는 분명히 예수님을 알았고 믿었으며 하나님의 능력도 의심하지 않았지만, 마르다의 지식과 믿음은 아주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내용을 보십시오. 사실 기도에 뭐 그렇게 틀린 기도가 있겠습니까? 육신의 정욕으로 잘못 구하면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그 내용을 바꾸어주십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내용을 보면,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아는 만큼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많이 알수록 정말 기도가 풍성해집니다. 그런데 하나니을 모를수록 할 말이 없습니다. ‘저는 5분만 기도하면 기도할 게 없는데요.’라는 분들은 생각해보십시오. 왜 기도할 게 없습니까?

 

결혼 전 연애할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나가서 데이트를 하고 각자 집에 왔는데 집에 가서 또 전화를 합니다. 방금 몇 시간을 만나고 왔는데 또 집에 와서 한 시간, 두 시간 전화를 합니다.

 

오래 전 제가 한국에 교환학생으로 갔을 때 신학교에서 선교관에 방을 하나 줘서 거기 있었습니다. 선교관에는 제3세계에서 온 목회자들과 신학생들이 있었습니다. 필리핀, 인도네시아, 케냐, 나이지리아, 브라질 등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각자 방 하나씩 받아서 살고 있는데, 전화는 공용으로 한 대였습니다.

 

하루는 제가 방금 전 데이트를 하고 와서 또 전화를 했습니다. 그때 필리핀 목사님이 필리핀 집에 전화를 해야 했던 모양인데, 보니까 제가 전화를 해서 그냥 돌아갔습니다. 조금 후 다시 왔는데도 계속 전화를 하고 있으니까 약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세 번째 나왔는데도 제가 계속 전화를 하고 있으니까 이번에는 그만 좀 하라고 했습니다. 이분이 한국말을 조금 하는 분이었는데 제게 말했습니다. “내가 조금 들어보니까 별 내용도 없던데 뭐 그렇게 오래 전화를 하느냐?”

 

솔직히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별 내용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오래 합니까? 왜 끊고 싶지 않습니까? 기도가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알면 별 할 말이 없어도 그냥 계속 하나님과 대화하는 겁니다. 그게 기도입니다. 풍성해집니다. 남들이 보면 내용이 별로 시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정말 좋은 겁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대화가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만큼 풍성하게 기도할 수 있고, 사랑하는 만큼 기도할 수 있습니다. 더 사랑할수록 더 많이 맡길 수 있고, 놀라운 상상력으로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 알면 알수록 기도의 내용이 더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코로나 기간 중 한국의 어떤 유명한 목사님이 성경공부를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성경공부를 두 시간 정도 인도하시고 마지막에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그분은 꼭 통성기도를 하는 게 아니라 혼자 기도를 하며 마무리하시는데, 마무리기도를 10분 이상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 내용을 들으니까 저와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어떻게 저분은 저런 기도를 할까?’ 하고 너무 놀라운 겁니다. ‘저분은 정말 하나님을 잘 아는구나. 저분은 정말 하나님과의 관계가 대단하구나.’ 하고 느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사회를 잘 알고 나라와 민족을 정말 사랑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더 많이 알수록 더 풍성하게 기도하게 됩니다. 그런데 알고 있는 것과 실제로 그렇다고 믿는 것이 같은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는 것을 안 믿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 다 믿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안 믿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 다 믿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의 문제를 전적으로 주님께 맡기거나 그분을 신뢰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3.   상황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라 (23~27)

 

마르다는 예수님이 무엇이든지다 하실 수 있고 하나님이 다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믿는다고 고백했으면서도, 정작 자기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하나님도 못하시는 일이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기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는 다 믿는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도 못하시는 일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마르다가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는 고백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마르다가 자신도 모르게 하고 있는 이 완벽한 고백을 곧 실제로 성취시켜 주시게 됩니다. 그래서 이 가족에게 정말로 필요한 위로, 즉 나사로를 살아나게 해주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3)

 

이 말씀을 들은 마르다가 전혀 놀라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하셨으면 정말이요? , 감사합니다!’라고 감격할 것 같은데 조용하고 차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 당장 살아날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4)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장례식을 천국환송예배라고 부르면서 우리는 곧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서로 위로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그런 식으로 자신을 위로하신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 당시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인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마지막 날 부활을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지금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만일 OO했더라면 좋았을 텐데...’라고 하며 안타까워하는 마르다의 슬픔을 진정으로 위로해줄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날에 부활한다는 것이 지금 무슨 위로가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당장 사건을 일으키고 새로운 생명을 창조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창조주이십니다.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요즘 교회가 위기인데, 미국보다도 한국이 심각한 것 같습니다. 코로나 상황 속에서 집단감염이 일어날 때 미디어는 교회를 부각시킵니다. 실제로 교회가 좋지 못한 모습들을 많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교회의 위기나 개인 신앙의 위기의 원인은 결코 성경 지식이 부족하거나 신학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지금 어느 때보다 지식과 정보의 양이 많고 신학도 얼마나 책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사실 진짜 원인은 하나님이 능력으로 일으키실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기대가 없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될 것이다. 어쩌다가 될 것이다.’가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은 성취된다.’라고 믿는 믿음이 우리 자신을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자녀를 살리고 교회를 살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정말 자신이 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5-26)

 

만일 OO했더라면...’이라고 말하는 우리에게 진정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는 OO이다.”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대답입니다. 물 위를 걸어서 오실 때 제자들이 두려워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전에 나는 선한목자다.”라고도 하시고,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도 하셨습니다. “내니 두려워 말라.”라고 하신 것은 뭡니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즉 하나님이라고 하신 겁니다. 여기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하십니다.

 

바로 이 대답, 나는 OO이다.”라고 하시는 주님의 대답이 해결책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닥치는 불행이 무엇이든지 간에, 어떤 불행이 오든지 간에, 어떤 안 좋은 일이 생기든지 간에, 그 속에서 참된 위로와 소망을 얻을 수 있는 길이 무엇입니까? 바로 오직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아는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우리가 불행의 이유를 안다고 해서 곧장 위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사로가 왜 이렇게 이른 나이에 죽어야 했는가, 많이들 궁금했을 것입니다. ‘왜 이 젊은 나이에 죽어야 하는가? 지금 나이 많은 사람들도 살아 있는데 왜 이 젊은 사람이 죽어야 하는가?’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알면서도 그냥 두신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요한복음에서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은 계속해서 단순히 기적만 일으키시는 것이 아니라, 그 기적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게 하시고 또 예수님과의 관계를 세우도록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적이 아니라 표적’, 즉 예수님을 가리키는 sign인 것입니다. ‘기적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기적을 일으키신 분을 바라보아라.’ 하고 가리키는 사인이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여섯 번의 표적을 통해 일관되게 자신을 계시하신 내용이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시고, 믿는 자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죽음은 더 이상 우리로 하여금 영원히 절망에 빠지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육신의 죽음은 더 이상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죽어도 살겠고”. 그렇습니다. 우리는 죽어도 살 것입니다. 이것을 정말 믿으십니까? 바로 그게 조건입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제 와이프가 믿습니다.’ ‘제 남편이 믿는데요.’ ‘우리 애가 믿습니다.’ ‘우리 부모님이 그걸 믿으시죠.’ 아닙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정확히 물어보십니다. 우리도 믿을 때 바로 나의 것이 됩니다. 믿을 때 우리에게도 죽은 자가 살아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마르다에게는 이 말씀도 별로 놀라운 게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식으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는 마르다가 와달라고 했는데 예수님이 안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수님이 오셨는데도 마르다는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영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르다가 예수님과 자꾸 그렇게 어긋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어긋남과 엇갈림의 순간이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는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새로운 눈을 열어주는 지점이 됩니다.

 

그런데 마르다가 이것을 잘 모르니까 아주 태연하게 대답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잘 모르니까 아주 쉽게 대답을 합니다.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27)

 

이 고백 역시 겉으로 볼 때 얼마나 위대한 고백입니까? 정말 대단한 고백, 완벽한 고백입니다. 요한복음 2031절에서 요한복음을 쓴 목적이 바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하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의 목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 그래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간쯤에 나오는 마르다의 이 고백은 맨 앞에 나오는 나다나엘의 고백 즉 하나님의 아들”(1:49)이라고 한 것과, 맨 마지막에 도마가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20:28)이라고 고백한 것과 함께, 아주 이상적인 고백, 위대한 고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마르다의 고백은 너무 쉽게 나온 것인데, 마르다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구원자로 오셨다고 하니까 이 얼마나 대단한 고백입니까? 그런데 그것이 자기 삶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혀 기대가 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 중에 누구도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육신을 입고 메시아, 즉 그리스도로 오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분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마르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 친했고 잘 지냈지만 진짜로 알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로 위대한 고백을 했다고 위대한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진심으로 고백할 때 역사를 일으킨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나가는 말]

 

우리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우리가 성경 말씀을 통해 배우는 하나님과 삶 속에서 경험하는 하나님, 그러니까 성경책 속에서의 하나님과 우리 삶 속에서의 하나님, 또 과거의 하나님과 현재의 하나님, 하늘의 하나님과 땅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과 우리의 하나님 간의 차이를 점점 좁혀가는 과정입니다.

 

성경 말씀에서는 하나님이 분명히 위대한 분이시고 사랑의 하나님이신데, 내 삶을 보면 그 하나님은 별로 힘을 못 쓰시는 분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간격을 점점 메워가는 것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고 신앙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내 삶에 일어나는 일들을 죽 보십시오. 그래서 나는 참 행복하다.’ 아니면 나는 참 불행하다.’라고 할 때 어떤 기준으로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까? 행복하다고 느낄 때 과연 그럴까?’ 또 불행하다고 느낄 때 과연 그럴까?’ 하면서,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즉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것이 정말 행복한 일인지 불행한 일인지 보는 눈을 길러야겠습니다.

 

마르다의 완벽한 지식과 고백으로 보이는 이 위대한 고백이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사실은 그 자신의 삶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이것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지는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시라도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하나님, 내가 갖고 있는 성경의 지식을 머리로는 다 알고 이해하는 것 같은데, 실제로 우리 삶에 어떤 일이 벌어질 때 그것이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돌아보기 원합니다.

 

그러할 때 항상 모든 것을 내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면서, 행복이든 불행이든 어떠한 일이 벌어지든 하나님의 관점으로 볼 때 결국 하나님이 하실 일들을 기대하게 되고, 그 기대를 통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우리의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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