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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5일 주일예배
✦ 회복하시는 은혜 28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요한복음 14장 1~11절)
[들어가는 말]
교회에서 많이 부르는 곡 중에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다 아실 줄로 압니다. 이 곡은 교회를 안 다니는 사람들도 많이 알 정도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우리 삶을 보면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은 고통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제목이 더 어울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고통을 경험합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는 순간 사람들(의료진)이 기다리고 있다가 엉덩이를 찰싹 때립니다. 아니, 태어나자마자 왜 때립니까? 그래서 고통을 받습니다. 그런데 안 울면 더 때립니다. 그리고 아파서 울면 어떻게 합니까? ‘이제 됐다’ 하고 자기들끼리 막 웃으며 좋아합니다. 이것만 보아도, 인생에는 험한 고통의 길이 펼쳐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살다보면 근심하고 염려할 만한 일들이 수시로 생깁니다. 갑자기 건강 문제가 생기기도 하고, 가정 문제가 생기기도 하고, 자녀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괜찮았다가도 관계 문제가 생기고, 진로 문제, 재정 문제 등이 벌어집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세상에 살면서 크고 작은 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거의 매일 크든 작든 어려움을 경험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특히 약간 큰 어려움을 당하면 내가 원하는 대로 삶이 진행되지 않기 때문에 근심하고 염려하게 됩니다.
우리는 성공하고 싶은데 자꾸 실패를 반복하고, 강해지고 싶은데 약할 때가 많습니다. 용기 있게 살고 싶은데 두려움에 떨며 살아가고, 주변 사람들과 좋은 관계 속에서 살고 싶은데 오히려 관계가 불편해질 때가 많습니다. 또한 주님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고 싶은데 자꾸 올라오는 것은 추한 욕망이나 생각이고, 영적으로 성장하고 싶은데 도리어 퇴보합니다.
정말 근심하고 염려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우리는 매일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게다가 요즘은 세계 어디를 가도 코로나의 위험이 있습니다. 미국도 백신 접종이 많이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오히려 더 많은 감염자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안전한 나라로 생각되는 곳에도 테러의 위험이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같은 나라에만 테러가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 상황인데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근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과연 우리가 근심하지 않을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1. 근심하지 말고 예수님을 믿으라 (1-3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1절)
예수님은 오늘 본문을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근심할 만한 이유가 전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근심할 만한 일들이 우리 삶에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근심하지 않을 수 있는 더 큰 이유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 다음으로 예수님은 “나를 믿으라”라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제대로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때 가룟 유다는 이미 떠났으니까 이 말씀은 열한 명의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근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폭탄선언 때문입니다. 13장 21절에 보면 예수님은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즉 배반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그들은 지난 3년 동안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다니고 모든 것을 나누며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들 중 한 사람이 주님을 팔고 배반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주님을 위해 목숨도 버리겠다고 외치는 베드로에게(13:37)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13:38)
‘목숨을 바치기는커녕 닭 울기 전, 즉 불과 몇 시간 후 네가 나를 부인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정말 충격적이고 당황스러운 말씀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주님을 배반하고 한 사람은 주님을 부인할 것이라니, 그것도 베드로 같은 사람이 그런다는 것은 정말 믿기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왜 그들이 근심하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이 자신들을 떠날 것이라고 하셨고 그래서 이제는 자신들이 주님 없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그래도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그때 그 자리에 있던 제자들은 주님의 이러한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근심하지 말고 자신을 믿으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또 하늘로 가신 후 성령이 오셔서 성령으로 충만해졌을 때 그들은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고 그래서 담대히 나아가 주님의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때는 아직 이해가 안 가는 겁니다.
우리 인생에도 전혀 이해되지 않는 사건들이 있습니다. 끔찍하고 슬픈 일들도 일어납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문제가 터지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 외칩니다. ‘주님,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왜 제게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십니까? 어떻게 제 삶에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까? 주님, 도대체 지금 무엇을 하고 계세요? 빨리 뭘 해주셔야지 이게 뭡니까?’
지난 4월 급작스럽게 이갈렙 선교사님이 돌아가신 소식을 듣고 쓴 목회편지 제목이 “하나님,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4/25)였습니다. 정말 이해가 안 갔습니다.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사역하시던 분, 아직 50세 밖에 되지 않은 분, 또 자녀가 아직 어린 분인데... 악한 사람을 데려가시지 왜 이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을 데려가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하나님이 왜 이러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도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게 뭔가를 우리가 잘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근심 속에 있던 제자들에게만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우리에게는 눈앞의 일들만 보이지만, 하나님은 뒤에 가려진 일들까지 다 보고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뉴스에 나온 것만 보고 흥분하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하고 좋아하기도 하지만, 뒤에 있는 내막은 모릅니다. 사실은 뒤에 가려진 게 훨씬 더 많은데,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유일한 심판주가 되시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만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보십니다. 우리는 일시적인 것만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영원한 것을 생각하십니다. 우리는 당장 편한 것만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불편하더라도 우리의 변화와 유익에 관심을 두십니다. 하나님께 우리 각자는 엄청나게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소중한 존재인 우리를 하나님은 아무렇게나 살도록 놓아두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이 땅에서 풍성한 삶을 살도록 해주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때로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고통을 허락하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가끔 살다 보면 ‘결혼했더니 사람이 변했다. 속았다.’라는 말을 합니다. 결혼 전에는 잘해주었는데 결혼 후에는 사람이 변했고 속았다고 합니다.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자녀가 착하게 잘 자랐는데 나중에 보니까 내 기대를 만족시켜주지 못하고 실망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속고 왜 실망합니까? 기대를 했기 때문입니다. 믿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해주겠지’ 하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믿을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듯 사람을 믿으면 실망과 분노 밖에 남지 않습니다. 사람은 사랑할 대상입니다. 우리는 정말 믿을 대상을 믿어야 합니다. 그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여러분, 지금 삶에 어떤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까? 그 문제 때문에 지금 스트레스를 받거나 마음이 불안과 근심과 염려로 가득 차 있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근심하지 말라고 하셨는데도 왜 우리는 근심합니까? 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염려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안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정말 믿고 신뢰한다면, 그렇게 근심하고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결국 어디로 가게 될 것인지를 기억하면 근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2-3절)
예수님은 우리의 거처를 마련하시기 위해 아버지의 집으로 간다고 하십니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우리는 상상하기가 힘듭니다. 하지만 우리가 상상하는 어떤 것보다도 훨씬 더 아름다운 곳이라고 생각하면 맞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보신 곳 중에 가장 아름다운 곳이 어디였습니까? 저절로 정말 아름답다고 탄성을 지를 정도로 아름다웠던 곳이 어디였습니까? 미국의 국립공원들에 가보면 입이 쩍 벌어지며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Yellowstone National Park, Grand Canyon National Park이 있고, Washington 주에 가면 Olympic National Park, Mt. Rainer National Park 등이 있습니다. 하와이도 사진을 보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리고 Florida의 바다를 보면 에머럴드 빛으로 정말 아름답습니다. 스위스 알프스 산맥의 눈 덮인 산들 속으로 들어가 보면 정말 웅장합니다. 인간이 만든 곳 중에도 뉴욕에 가보면 높은 빌딩들이 장관을 이룹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본 어떤 아름다운 곳보다도 아버지 집(천국)은 수백 배, 수천 배도 아니고 수백만 배, 아니 계산이 안 될 정도로 훨씬 더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면 맞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언어로 표현이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세히 설명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좋은 곳이라는 정도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와 주인으로 믿으십니까?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라고, 주님이라고 진심으로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오늘 밤 세상을 떠나도 천국에 들어갑니다. 죽는 즉시 구주이시며 왕이신 그분 앞에 서게 될 것이며 영생에 들어갑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에게는 죽음이 결코 나쁜 일이 아닙니다. 사실 주님을 믿고 돌아가신 분들은 자신에게는 행복한 일입니다. 지금 고통도 눈물도 없는 곳에서 영원히 살고 있으니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우리 남은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정말 나쁜 일은 오히려 사람이 죽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원히 죽지 않으면 좋을 것 같으십니까? 괴로운 이 세상에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면 그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이 또 없습니다. 가끔 그런 것을 보지 않습니까? 심한 병에 걸려서 극심한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이 자기를 죽여 달라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죽지 않고 이 땅에서 영원히 살아 보십시오. 얼마나 고통입니까? 그러나 감사하게도, 우리는 언젠가 다 죽습니다. 언젠가는 다 이 땅을 떠납니다. 그래서 죽음은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정말 최악의 상황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없이 죽는 겁니다. 그것처럼 두려운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와 주인으로 모셔 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영원에 대해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많은 것을 준비합니다. 노후대책도 세웁니다. 그런데 노후 다음에 대해서는 별로 준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2. 모든 문제의 해답이신 예수님 (4-6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작별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자 제자들은 모두 깜짝 놀랍니다. 마치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을 겁니다. 폭탄이라도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그들의 가슴이 쓰리기 시작했고 염려가 밀려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근심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이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4절)
사실 제자들은 그 길을 모릅니다. 이때 제자들은 ‘예예, 알죠... 훌륭한 데죠...’라고 이 정도로 모르면서 대충 이야기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때 도마가 용감하고 솔직하게 질문을 합니다.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5절)
도마는 참 솔직한 사람입니다. 나중에 20장을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오셨는데 마침 도마가 없었을 때 왔다 가셨습니다. 그래서 도마는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만났다고 할 때 자기는 보아야 믿겠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그것이 믿음이 없다고 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솔직하게 표현한 겁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보면 당돌하게 질문한 도마를 꾸짖지도 않으시고 화를 내지도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질문 때문에 아주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6절)
이 말씀을 읽는 순간 크리스천들은 ‘아멘’ 할 겁니다. 그런데 이 말씀처런 안 믿는 분들에게 거부감을 주는 말씀도 없을 겁니다. ‘아니, 자기가 뭔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고, 자기가 아니면 아버지(천국)께 갈 자가 없다고 하는 게 말이 되는가? 너무 배타적이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모든 두려움과 근심과 불안과 염려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십니다. 해답이십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의 선포이며 약속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그러니까 인간으로부터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끊어졌는데 예수님을 통해 열렸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는 길이다. I am the Way.”라는 말씀에 대해 두 가지를 덧붙여 설명하십니다. 또한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진리’이시라는 점에서 그분은 길이 되시고, ‘생명’이시라는 점에서 길이 되십니다. 진리이신 예수님과 생명이신 예수님은 요한복음 전체를 통해 계속 강조되어 온 예수님의 정체입니다.
거짓과 속임수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예수님은 참 진리이시기에 그분은 길이 되십니다. 폭력과 차별과 죽음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우리를 살리시고, 또 인간답게 생명을 누리며 살다가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시는 예수님은 길이십니다. 다른 길은 없다는 겁니다. 다른 진리가 없고, 다른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많은 사람들, 특히 기독교에 적대적인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배타적인가? 산꼭대기는 하나이지만 산꼭대기로 올라가는 길은 많은데, 어떻게 자기가 가는 길만이 유일하게 꼭대기에 오를 수 있는 길이라고 하는가? 너무나 배타적이다.’라고 하며 거부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산꼭대기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개가 있다.’라고 하는 말이 사실은 더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산꼭대기에 오르는 길이 여러 개가 있다고 하는데, 그걸 어떻게 압니까? 다 가보았습니까? 그것은 모든 길은 다 가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이 길로 가보았는데 올라갔다. 저 길도 가보았는데 올라갔다. 수천 개를 다 올라가보았는데 다 올라가게 되더라.’라고 진짜 올라가보아야 할 수 있는 말이지, 한두 개 가보고는 ‘이것 봐라. 길은 많고 꼭대기에 올라가는 길은 여러 갈래다.’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말이 안 됩니다. 가보아야 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에 더 배타적인 말인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잘 보아야 할 것은, 기독교라는 종교만이 구원의 길이고 다른 종교는 안 된다고 하시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때 예수님 당시는 기독교도 없었습니다. ‘나(예수)를 제외하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라고 하십니다. 그것도 ‘천국’이라고 안 하시고 ‘아버지’라고 하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큰 차이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기독교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성경도 없고, 교회도 없고,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지역이 많습니다. 많이 줄었는데 아직도 그런 종족들이 있어서 소위 그들을 ‘미전도종족’(Unreached People Group)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그런 곳에 살았던 사람들이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길이 아예 막혀버린 겁니까? 또 예수님에 대해 전혀 들어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우리 조상님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분명한 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이전 시대의 사람들이나 예수님에 대해 전혀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무조건 지옥에 갑니까? 그게 성경의 가르침입니까? 그러나 성경은 그것에 대해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우리가 모른다고 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대답입니다.
그런데 전혀 기회가 없어서 들어본 적도 없고 예수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또 예수보다 한참 전에 살았는데 예수를 안 믿는다고 무조건 지옥으로 보내는 하나님도 성경에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데, 그런 하나님은 성경에 안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공의의 하나님(Righteous God)이 되시려면 완벽하게 공정하고 공평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이 알아서 그 문제를 잘 처리하셨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에 대해 성경은 자세히 이야기해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야기하지 않는 것을 자꾸 자기 나름대로 풀어보려고 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이단으로 빠지는 겁니다. 성경에서 말해주지 않으면 우리는 거기서 멈추면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에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뭡니까?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게 중요합니다. ‘내가 기독교인이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설문조사에서 종교 란에 기독교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표시는 하고서는 전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 교회에서 자랐으니까 거기에 체크를 합니다.
또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 교회를 찾아와 예배를 드리기도 하지만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아니, 실제로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인’이 구원받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인’, 즉 예수님을 정말 믿는 사람이 구원을 받습니다.
실제로 예수 없는 교회도 있고 예수 없는 예배도 있습니다. 예수 없는 사랑, 예수 없는 축복, 예수 없는 선교 등 가짜들이 많습니다. 교회사를 보아도 그런 사람들이 교회를 망가뜨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땅에 떨어뜨렸습니다. 십자군 같은 것도 진짜 크리스천들이 아닙니다.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기독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가 중요한 겁니다. 우리가 그분과 얼마나 상관있는 사람으로 살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얼마나 예수 같은 사람으로 변화되고 있습니까? 그게 중요합니다.
더디더라도 그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다면 우리도 도마처럼 길을 모르는 채 걸어가는 게 됩니다. 목적지를 알지 못하며 달려가는 자들이 되고 맙니다. 도마는 물론이고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그러니 목적지인 아버지 하나님의 집도 알 리가 없었습니다.
3.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보라 (7-11절)
6절에서 ‘길’을 말씀하신 예수님은 7절에서 ‘목적지’를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7절)
예수님을 제대로 알았더라면 그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대답할 수 있었을 겁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이시기에, 즉 하나님을 완전히 드러내신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아들을 아는 사람은 아버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 보고 듣는 것이 하나님께 보고 듣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예수님에 대한 이해와 기대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잘못 알았다. 이제 바꿔야겠다.’라고 했다가는, 지난 3년 반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그 밑에서 한자리 차지하겠다는 욕망을 포기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이 믿고 따르던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정말 구주이시고 주인이신 분이 아니라, 마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도 섬기고 부족한 것 같으니까 바알이나 아세라 같은 우상들도 섬겼던 것과도 같습니다. 그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 그들이 만들어 낸 황금 송아지 우상과 같은 하나님입니다.
자기들에게도 거절과 배척과 멸시와 수치, 심지어 죽음의 십자가를 따르라고 요구하시는 예수님은 결코 자기들의 하나님이 되실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 하나님은 따를 수가 없는 겁니다. 죽는 길로 가라고 하시는데 갈 수가 없는 겁니다.
제자들은 자기들 앞에 계신 예수님이 메시야(구원자)이시라고 믿고 따라왔지만, 그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안에서 자기들의 우상만 쌓아 온 겁니다. 빌립의 요구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8절)
빌립은 예수님이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라고 하시니까 ‘그럼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라고 간구합니다.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간구합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숱한 표적을 보고도 또 다시 예수님께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한 것과 똑같은 불신앙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무엇을 해달라고 하는 것인가 하면, 어떤 엄청나고 신비로운 깜짝쇼를 해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그런 초자연적인 현상을 경험해야 ‘그리하면 (만)족하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런 엄청난 깜짝쇼를 해주시면 ‘족하겠다’, 즉 만족하겠다는 겁니다. 충분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직 충분하지 않고 만족하지 않는데 그런 것을 해주시면 만족하겠다는 겁니다. 제자들은 그 동안 초라한 인간의 몸을 입고 있는 예수님을 통해서는 영광의 하나님을 못 보고 있다는 겁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돌아가실 예수로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우리도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데, 혹시라도 빌립의 이런 말처럼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주님, 이걸 해주십시오. 그리하면 (만)족하겠습니다. 지금 만족이 안 되는데, 이런 걸 해주시면 내가 하나님을 더 잘 믿고 만족하겠습니다.’라는 모습은 없는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뭘 나에게 해주셔야 내가 만족하겠습니까? 신앙생활에서 약간 부족함이 느껴진다면 뭘 해주셔야 만족하겠는지 한 번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눈으로 볼 수 있는 어떤 신비적인 현상, 이 세상이 우러러 보는 물질적인 축복, 또는 높이 올라가는 성공 같은 것을 보여주신다면 만족하겠습니까?
놀랍게도 하나님이 그런 것을 보여주셨더니 타락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높아졌더니 하나님을 떠나버리고, 돈을 많이 버니까 신앙을 떠나버리고, 신비로운 것을 체험하게 해주셨더니 이단으로 빠지는 사람들이 대다수입니다.
바로 그런 것이 사탄의 속삭임입니다. 그런데 교회도 거기에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그래서 안타깝습니다. 흔히 이런 것들입니다. 교인 숫자가 몇 명이냐, 재정이 얼마나 되느냐를 따지고, 또 엄청난 건물을 세우며 자랑합니다. 그런 것들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을 일차적으로 자랑할 때 문제가 됩니다. 그러는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우상으로 전락시키게 됩니다.
교회에서 직분자를 뽑는 기준에 있어서도, 기본적으로 물론 신앙이 있고 봉사를 열심히 하는 분이지만, 비슷한 분들이 있을 때 우선순위를 두는 것은 ‘이분이 돈이 얼마나 있는가? 헌금을 얼마나 많이 하는가?(제대로가 아니라 많이) 세상에서 지위가 어떤가? 학벌은 어떤가?’ 등을 따져서 직분자를 선출한다면 바로 그런 유혹에 교회가 넘어가버린 겁니다. 목회자 선택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잘난 사람, 유명한 사람을 따져서 한다면 교회가 유혹에 넘어가버린 겁니다.
세상이 눈에 보이는 물질적이고 웅장한 하나님을 요구할 때 교회와 우리 믿는 사람들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십자가의 예수님은 창피한 겁니다. 로마의 참혹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창피하니까 ‘우리 교회에도 이런 게 있다!’ 하고 자랑하고 ‘우리도 할 수 있다.’라고 하며 건물과 돈을 자랑하니까 타락했습니다. 중세 이후에 교회가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중세의 유명한 교부였고 신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런 식으로 한탄했습니다. “초대교회는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외쳤는데, 이제는 ‘우리는 예수는 없으나 돈은 있다.’ 하며 자랑한다.” 하고 한탄했다는 겁니다.
성도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눈에 보이게 해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으로서 무엇이 참다운 진리이고, 무엇이 진정으로 예수의 생명을 가진 존재의 모습인지를 보여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까? 저번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것입니다. 서로 뜨겁게 사랑하며 섬기는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힘을 모아서 주님이 명령하신 ‘대 사명’인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드는 일’에 집중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빌립의 엉뚱한 요구를 들으신 예수님은 마음으로 탄식하시며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9절)
제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신 것도,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정작 예수님을 진짜로 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있었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으며, 그분이 하시는 일을 직접 바로 앞에서 보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들었을 뿐입니다.
제자들은 높아지기 위해서 그분을 열심히 따랐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를 정도였는데, 사실은 자기가 높아지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에게 예수님은 자기가 높아지기 위한 욕망과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우상’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우상의 특징이 뭡니까? 자기를 위해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곳에 모셔 놓고 자기가 필요할 때만 가서 섬깁니다. 그게 우상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예수님을 따른 것은 마치 우상을 섬기는 것처럼 믿은 겁니다.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님께 온 겁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데 소용이 없어졌다고 생각되니까 다 도망가는 겁니다. 그럼으로써 결국 인격으로서의 예수님, 진짜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었고, 그래서 예수님이 목적이 아니라 그분을 통해서 얻고 싶은 다른 것이 있었습니다. 그게 그들의 우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이 시키시는 일을 하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따른 것입니다.
요즘에도 그런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신앙생활을 하면 불행해집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내가 이루어드리고자 신앙생활을 할 때 기뻐집니다. 비슷해 보이지만 완전히 다릅니다.
빌립처럼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쁘지도 않습니다. 우리도 예수 믿어서 돈이 생기고, 건강하고, 기도한 대로 다 이루어지고,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보다 높아지고, 사회에서 높이 올라가고, 많이 가져야 만족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까? 혹시 그게 안 되면 ‘믿어보아야 소용 없네.’ 하면서 신앙을 떠나버리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한 우리에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빌립아’ 대신에 자기 이름을 넣어 보십시오.
‘OO아(야),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신앙생활을 그렇게 오래했는데 너는 나를 그렇게도 모르느냐? 교회에 그렇게 오래 다녔으면서도 아직도 어려움을 당하면 그렇게 행동하느냐? 직분을 받은 지 그렇게 오래되었는데 아직도 나한테 기도하는 법도 모르고, 교회를 사랑하는 법이나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법도 모르느냐? 아직도 남들이 알아주어야 만족하고, 인정받아야 좋아하고, 이름이 드러나야 기뻐하느냐? 아직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으로 우리에게 그렇게 묻고 계실지 모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짜로 따르는 진짜 제자가 되는 것 외에는 세상이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볼 길이 없습니다. 요즘 교회가 조롱을 당해서 안타까운데, 진짜 예수님을 보여주면 영광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분들은 우리 크리스천들을 보면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궁금해질 것입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잘못하면 하나님이 욕을 먹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자신 안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0절)
예수님은 빌립에게 “네가”라고 말씀하시다가 “너희에게”라고 하시며 대상을 제자들 전체로 바꾸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보여달라는 것은 빌립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제자들 전체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고, 아버지 하나님 안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사실은 제자들도 믿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참 제자입니까?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의 하시는 일을 통해서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을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진짜 영광이 뭡니까? 그것은 어떤 찬란하고 신비로운 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할 수 있으시지만 꼭 필요할 때 그렇게 하시는 것이고, 보통 때는 찬란하고 신비로운 것으로 나타나시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에게서 나타날 때 진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제자들은 몰랐습니다. 세상에서 높아져야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은 ‘네가 믿는다고 믿었지만 그 믿음은 사실 참되고 온전한 믿음이 아니었다.’라는 말씀과도 같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이 물으십니다. ‘네가 믿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왜 너는 네 교회에서, 네 지체 안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느냐? 왜 작은 섬김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려고 하지 않느냐? 왜 자꾸 큰 것이나 높아지는 것만 추구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1절)
이것은 10절을 다른 각도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10절에서는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라고 질문하셨는데, 이번에는 “믿으라” 하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은 두 번이나 “나를 믿으라” 하십니다. 1절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라고 두 번이나 강조하셨던 것을 여기서도 반복하십니다. “믿으라!”
이미 제자들이 잘 믿고 있었다면 이런 명령을 하지 않으셨을 것이고, 제자들은 마음에 근심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못 믿으니까 믿으라고 강력히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믿는다는 게 뭡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믿는 겁니까? 물론 그것도 믿는 것인데 일부입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서 충분히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만족할 만큼 충분히 교회를 통해서 일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이 증거가 됩니다. 내가 변하고, 우리가 변했습니다. 이렇게 연약하고 죄악 된 사람이 목회자로, 설교자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계산하지 말고 사랑하기를 원하는 겁니다. 용서하기를 원하는 겁니다. 예수님처럼 서로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기다려주고, 이해해주고, 함께 힘을 보아서 섬기는 그것이 “나를 믿으라”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어디서 봅니까? 매일이 똑같지 않습니까? 코로나 상황에서 다를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별 볼 일 없는 일상생활에서, 별로 대단할 것 없는 교회에서, 전혀 유명하지도 훌륭하지도 않은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들에게서, 그다지 존경할 만한 게 많지 않은 배우자에게서, 또 언제 철이 들지 알 수 없는 안타까운 모습의 자녀에게서, 바로 거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는 겁니다.
정말 형편없는데 거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혹시 모두가 인격적으로 성숙하고 모두가 신앙 수준이 높은 데라야 제대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거나, 자식들을 다 키우고 난 다음에 신앙생활을 잘 해보겠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 없이 내가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믿음이 없다는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던 빌립과 다를 바 없습니다.
[나가는 말]
오늘 우리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느냐?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고, 그러면 너희가 근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오래 나와 함께 있었으면서도 나를 알지 못하느냐?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화려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초라하신 예수님 안에 나타나신 하나님을 볼 수 있기 바랍니다. 많은 재정이나 화려한 건물이나 많은 교인 수나 어떤 외적인 영광이 아니라, 인격적인 사랑과 헌신과 섬김, 특히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며 섬길 때 임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며 또 경험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뭔가 부족하다고 하면서 근심하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근심과 염려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바로 ‘믿음’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바로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정말로 믿고 따르는 것은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진리와 생명이 넘치는 우리 자신과 교회가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주님의 교회가 되며,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참 제자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