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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7월 11일 주일예배
✦ 회복하시는 은혜 21 ✦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요한복음 11장 28~44절)
[들어가는 말]
요즘은 한국에서 사람이 돌아가시면 화장을 많이 합니다. 물론 매장도 하지만 요즘은 화장이 대세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시신을 묻을 곳도 점점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화장을 한 후 뼛가루를 함에 넣어서 묻기도 하고 뼛가루를 뿌리기도 합니다.
이전에 보면 간혹 어떤 사람들이 장례식에 와서 본 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야, 여기 장지가 참 좋네. 나도 여기 와야겠다.” 또 어떤 사람들은 병원의 영안실을 보고 “야, 이 병원은 영안실 시설이 너무 좋네. 나도 죽으면 여기 와야겠다.” 그런데 죽은 다음에는 거기에 진짜로 올지 안 올지 보장이 없는데다가, 죽은 다음에 오면 뭐 하겠습니까? 죽은 시체로 아무리 좋은 데에 가보았자 그것이 자기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옛날 사람들, 특히 왕들은 무덤을 어마어마하게 꾸며 놓았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문화재가 발견되는 곳이 그런 왕릉들입니다. 한국 공주에 가면 1971년에 발굴된 무령왕릉이 있습니다. 발굴 당시 무덤에서 거의 3천 점 가까이 되는 엄청난 문화유산인 귀중한 유물이 나왔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유물로 ‘지석’이 꼽힙니다. ‘지석’이란 왕이 지신 즉 땅의 신으로부터 자기 묘지 터를 사들이기 위한 계약 내용을 기록해놓은 돌판입니다.
한자로 기록된 그 지석의 내용을 해독해보니까, 무령왕은 자기 무덤을 위해서 당시 화폐로 1만 문이라는 거금을 지신에게 바치면서, 이 세상 그 어떤 법령도 자신의 무덤에는 해당될 수 없다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무덤이 영원한 자신의 안식처가 될 수 있으리라고 믿었고 소망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듯 그의 무덤은 철저하게 파헤쳐져서 수많은 사람들의 발에 짓밟혔고, 그가 소중히 여기며 함께 묻은 모든 보물들도 그 무덤이 아닌 박물관에 가 있습니다.
중국 명나라 14대 황제 신종은 이 세상 그 누구도 자신의 묘를 발견할 수 없도록 지하 27미터에 요새 같은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고도 안심하지 못해서 지하묘지 입구에서부터 묘실에 이르는 통로에다가 밖에서는 열 수 없도록 설계된 네 개의 큰 돌문을 따로 세웠습니다. 철저히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한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고 그 무덤이 자신에게 영원한 피난처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사람들은 그 깊은 땅 속의 무덤을 기어이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결코 열 수 없을 것이라고 신종이 굳게 믿었던 그 돌문도 활짝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은 이제 값싼 관광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한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무덤도 결코 인간의 영원한 목적지나 안식처나 피난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죽고 나서 무덤을 엄청나게 꾸며놓아도 그곳이 우리의 영원한 피난처나 안식처가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무덤을 웅장하게 꾸며놓았다고 한들 몇 십 년 후에는 자기 후손들, 아니 자기 친자식에게서조차 잊히고 마는 곳이 됩니다. 또 불과 100년도 되지 않아서 이게 누구의 묘인가 할 정도로 연고 없는 무덤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언젠가 그처럼 버려질 무덤이라면 크게 꾸며놓는 것이 별 의미도 없고, 또 무덤이 결코 우리의 안식처나 목적지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무덤이 우리의 종착역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나라가 그렇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 사실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1. 슬퍼하는 마리아와 함께 눈물을 흘리시다 (28~37절)
지난번에 살펴보았듯이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 남매가 살고 있었는데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때 마르다가 ‘믿습니다.’ 하는 위대한 고백을 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주신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8절)
이것은 마르다가 마리아에게 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마르다를 위로하신 다음 이번에는 마리아를 위로하고 싶어 하십니다. 이때 마리아도 곧장 일어나 예수님께로 갑니다.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29절)
마르다가 28절에서 “가만히” 즉 은밀하고 조용히 전했다고 되어 있는데, 예수님이 마리아를 조용히 부르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마을에 들어오시지 않고 마르다를 만나신 곳에 그대로 계셨습니다.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30-31절)
조문을 온 유대인들이 보니까 예수님께 마리아가 가는데 조용히 전했기 때문에 뭔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무덤 앞에 가 곡을 하려다 보다 생각하고 자기들도 따라갑니다. 당시에는 유족들과 함께 곡을 해 주는 것이 조문객들의 일이었고, 조금 부유한 집은 곡하는 사람을 돈으로 사서 곡소리가 크게 들리게 하는 것이 풍습이었습니다. 당시 큰 곡소리가 날수록 그 집안의 명예가 올라가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에게 조용히 전달된 메시지는 죽음의 장소인 무덤으로 나오라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님께 나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마리아에게도 예수님과의 만남은 진한 슬픔과 아쉬움을 호소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마르다와 똑같은 말을 합니다. 울음을 감추지 못하고 감정이 복받쳐서 말합니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2절)
지난주 본문에서 마르다도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21절에서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여기 32절의 마리아 말과 똑같습니다. 마르다나 마리아나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만 했어도 오빠가 안 죽었을 텐데...’
마리아는 예수님을 뵙자마자 오빠 나사로와 언니 마르다와 함께 예수님에게서 말씀을 배우고 또 즐겁게 같이 교제했던 기억이 떠올라서 울음을 주체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는 울음바다가 됩니다. 왜 안 그러겠습니까? 그리고 뒤따라온 조문객들도 그 모습을 보고 같이 웁니다. 예수님도 예외가 아니십니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3절)
예수님은 심령에 비통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여기서 ‘비통히 여기셨다’는 말은 분노가 올라왔다는 말입니다. 분하게 여기시며 울컥하셨다는 말입니다. 감정이 확 올라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은 ‘괴로워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격한 감정이 일어나서 부들부들 떠는 것을 말합니다.
마리아가 울고 유대인들이 따라 우는 모습을 보신 예수님은, 분노하며 괴로우실 정도로 마음이 격해지셨습니다.
그런데 이 분노가 누구를 향한 분노입니까? ‘아니, 저렇게 소망 없이 우나?’ 하며 주님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마리아와 유대인들을 향한 분노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을 향한 분노가 아니라, 인간을 이토록 슬프게 하고 괴롭게 만드는 죽음을 향한 분노입니다. 사망이 이렇게 인간을 괴롭게 만들 수 있는가 하는 분노입니다. 물론 잠시 후에 나사로를 살리실 것이지만, 그래도 죽음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이 땅에서 사람들을 계속 고통스럽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죽음에 대한 분노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비통히 여기시는데 ‘심령에(in spirit) 비통히 여기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19장 30절에 보면, 예수님의 죽음을 가리켜 ‘영을 넘겨주는 것’(handing over his spirit)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개역개정> 성경은 “영혼이 떠나가시니라”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헬라어 원문은 예수님이 능동적으로 ‘자기 영을 넘겨주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단지 감정적인 분노가 아니라 죽음을 향한 영의 분노였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의 영을 자발적으로 넘겨주는 고통스런 순종의 길을 가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신의 영을 넘겨주셔야 할 정도로 죽음의 문제는 심각한 것이지만, 예수님은 능히 죽음을 이길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을 여기서 암시해줍니다. 그래서 그 사랑으로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의 소망을 사람들에게 주셨습니다.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4절)
마리아는 생명의 예수님을 깊은 어둠과 슬픔과 죽음이 있는 자리로 오시라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와서 보옵소서.” 이것이 영어로 “Come and see.”입니다. 예수님이 1장에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와 보라.” 하셨고,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하니까 빌립이 “와 보라.”라고 했습니다. 그와 똑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와서 내가 하는 일을 잘 봐라. 그리고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메시아임을 깨달아라.’라는 뜻으로 ‘와 보라’고 하셨는데, 마리아는 무슨 뜻입니까? “와서 보십시오.”라는 것은 ‘와서 이 죽음의 자리를 보십시오. 아무 소망 없는 이곳을 보십시오.’라는 말이 아닙니까? 삶의 괴로움의 자리로 마리아가 예수님을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것이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주여 와서 보옵소서.” 이 말이 괴로움을 당했을 때 우리가 기도해야 할 내용입니다. “주여 와서 보옵소서.” 물론 예수님은 다 아십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의 괴로움의 자리를 왜 모르시겠습니까? 그런데 ‘주님, 제가 괴롭습니다. 이것 때문에 괴롭습니다. 와서 보십시오.’라고 초대하는 게 필요합니다. 다 아시지만 그 자리로 주님을 초대하는 겁니다. 주님이 모르시니까 아시도록 와서 보시라는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아뢰는 겁니다.
‘주님, 이 끔찍한 모습을 보십시오. 이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저 사람들을 보십시오. 저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저런 끔찍한 일을 당한다는 말입니까?’ 요즘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밤에 자다가 갑자기 건물이 무너져서 사람들이 깔려 죽었습니다. 우리는 왜 그런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 주님을 초대하는 겁니다. ‘주님, 이걸 좀 와서 보십시오.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왜 저 사람들이 이런 슬픔을 당해야 합니까?’
또 악한 사람들이 득세할 때 ‘주님, 왜 저런 악한 자들을 그냥 두십니까? 좀 와서 보십시오. 직접 보시고 뭐라고 설명 좀 해주십시오. 해결 좀 해주십시오.’ 하고 우리도 하소연하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이것을 머리에만 담고 있는 게 아니라 기도로 쏟아내야 합니다. ‘주님, 와서 보십시오. 이것이 왜 이렇습니까?’ 주님이 모르셔서 보시라는 게 아닙니다. 다 아시지만 내 마음을 주님께 아뢰는 겁니다.
그런데 괴로움의 자리로 초대한 것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응답하십니까? 놀랍게도 예수님 역시 우리에게 ‘와 보라’ 하십니다. 어디에 와서 보라는 겁니까? 그 끔찍하고 참혹한 십자가에 와서 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가리키십니다.
괴로움을 당할 때 우리는 외칩니다. ‘내가 고통당할 때 주님은 도대체 어디 계셨습니까?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허락하십니까?’ 이렇게 우리가 외치며 물을 때 주님은 십자가를 보라고 가리키십니다.
그런데 우리 삶의 고통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단지 십자가의 죽음이 아닙니다. ‘내가 너를 위해 이렇게 목숨을 내어주었다.’ 하는 십자가의 죽음에 예수님의 대답이 머물지 않습니다. 그 죽음을 넘어서 영광의 빛이 비치는 ‘부활의 자리’까지 우리를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저 십자가를 보라. 그리고 십자가를 넘어 부활의 영광을 보라.’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극심한 괴로움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주님은 우리를 돌보아주십니다.
나사로의 죽음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제는 아무 소망이 없다는 겁니다. 죽음은 곧 괴로움이고 슬픔이고 절망입니다. 이젠 다 끝났습니다. 죽은 사람에게 뭐가 남아 있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인간의 현실을 예수님의 생명의 능력이 역전시키고 바꾸어버렸습니다. 아무 소망이 없는 절망적인 삶이, 나사로의 살아남으로 소망의 삶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어둠과 절망 속에 있던 우리 인생에 빛이 비치고 영광과 소망으로 가득하게 될 것을 미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이 사건은 예수님 자신의 부활을 미리 암시해주는 사건입니다.
그 첫 번째 증거가 바로 이 34절입니다. 예수님이 여기서 “그를 어디 두었느냐?”라고 하시는데, 예수님이 몰라서 물어보십니까? 죽음의 자리를 가리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을 20장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아침에 똑같이 합니다.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부으러 무덤에 와서 돌을 누가 옮겨줄까 했는데 돌은 벌써 옮겨져 있고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앉아 우는데, 그때 예수님이 나타나시자 마리아는 예수님을 동산지기인 줄 착각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그를 옮겨 놓았거든, 어디에다 두었는지를 내게 말해주세요”(20:15). ‘어디에 두었습니까?’ 하고 질문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이 나사로 사건을 통해서 요한복음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나사로가 죽었다 살아난 것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미리 보여주는 사건이라는 것을 암시해줍니다. 이것은 일종의 연습입니다. 어떤 큰 공연을 할 때 리허설을 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마치 리허설과도 같은 것입니다. 본 공연에 앞서서 하는 리허설이 나사로 사건이고, 본 공연은 당연히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또 다른 증거는 마리아의 눈물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져서 막달라 마리아가 눈물을 흘렸는데(20:15), 여기서 오라버니 나사로의 죽음 앞에 울고 있는 베다니의 마리아의 눈물(33)이 서로 연결되는 겁니다.
또 하나는, 12장에서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붓고 발을 닦아 드리는데(12:3), 이것은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붓기 위해 무덤을 찾아온 막달라 마리아의 역할을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것이 자신의 장사를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향유를 부어 미리 장사를 지내드린 것입니다(12:7).
그래서 요한복음은 마리아가 누군지를 설명할 때, 2절에서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라고 하고 32절에서도 굳이 “그 발 앞에 엎드리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잃어버린 막달라 마리아의 눈물이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함으로 닦아지고 사라진 것처럼, 오빠 나사로를 잃은 마리아의 눈물도 나사로의 살아남으로 인하여 닦아지고 사라집니다.
마리아는 “그를 어디 두었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비통해 하며 무덤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드립니다. 이때 아무 말 못하고 울기만 하는 마리아를 보고 놀랍게도 예수님이 감정을 드러내십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5절)
미국 교회나 영어권에서 성경퀴즈를 할 때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성경에서 가장 짧은 절은 어디인가?’ 그 정답은 바로 이 요한복음 11장 35절입니다. 헬라어 원어도 그렇고 영어로도 그냥 “Jesus wept.”입니다. 그래서 가장 짧습니다.
예수님이 우시는 모습은 사실 보기 드문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의 끝이 기쁨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될 줄로 다 아셨셨지만, 죽음이 만들어놓은 현실은 가혹하고 싸늘하기만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셨다’라는 단어는 헬라어 원어로 단회적인 사건을 나타내는 아오리스트(Aorist) 시제입니다. 과거는 과거인데 한 번을 하고 끝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한 번 울고 끝나셨다는 겁니다. 마리아와 유대인들이 울었다는 것에는 이 시제가 아니라 계속 우는 의미의 시제가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때 한 번 ‘왈칵 눈물을 쏟으셨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울음은 막 소리를 내며 통곡하는 울음이었고, 예수님의 울음은 눈물을 쏟아낸 울음입니다. 흑흑 거리며 절망하는 울음이 아닙니다. 굳이 두 경우에 다른 단어를 쓴 이유는, 예수님이 느끼신 슬픔이 단지 마리아나 유대인들처럼 나사로가 죽어서 소망이 없어졌다고 우는 울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실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뭐 하러 죽었다고 막 슬퍼하며 우시겠습니까? 예수님의 눈물은 인생의 근본적 슬픔의 원인인 죽음이 다스리는 현실에 대한 슬픔을 나타내는 눈물입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백성이 죽음의 영향 아래 놓여서 죄를 짓고 있는 현실을 향한 슬픔입니다. 소망 없는 슬픔이 아닙니다. 그래서 메시아를 나타내는 부분인 이사야 53장에서 말씀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사 53:4a)
우리 인생의 슬픔을 아시고 함께 울어주시는 분, 그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슬픔을 모르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괴로움을 모르시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울음을 지켜본 유대인들에게는 두 가지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첫 번째는 이겁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36절)
그들의 말대로 예수님은 나사로를 아주 사랑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사랑은 단지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정도의 사랑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나사로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요단강 동편의 베다니에서 이틀을 더 지체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빨리 안 오시고 오히려 이틀을 지체하셨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빨리 와야지 왜 지체합니까? 그런 사랑이 있다는 것조차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악한 일들과 고통스런 현실을 볼 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걸 봐라. 이런 일이 일어나는데도 신이 있다고 할 수 있느냐? 신이 있으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 혹시 있더라도 그런 신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느냐?’ 사실 좋은 질문이고 당연한 의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조롱하고 냉소하는 사람들은 이런 주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나사로의 죽음이 기쁨으로 변하게 하실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 몰랐습니다.
지난주에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이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져서 ‘아 참 좋다. 행복하다. 너무 좋은 일이다.’라고 할 때, 또는 ‘너무 불행하다. 너무 괴롭다. 너무 힘들다.’라고 할 때 뭘 질문하라고 했습니까? ‘과연 그럴까?’입니다. 너무 좋을 때 ‘과연 그럴까?’ 너무 나쁠 때도 ‘과연 그럴까?’ 우리가 볼 때는 너무 좋다고 하지만 좋은 게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너무 나쁘고 괴롭다고 하지만 그게 아닐 수 있습니다. 주님의 관점으로는 다를 수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사랑하시면서 왜 저러나? 사랑하지 않으시나 보다.’라고 느껴질 때 ‘과연 그럴까?’ 그게 아닙니다. 그분의 사랑은 자기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주며 희생하면서까지 나사로를 영원히 살게 하실 사랑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당장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만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뭘 보고 계십니까?
사람은 어차피 한 번 죽습니다. 지금 죽으나 나중에 죽으나 죽습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죽은 다음인데, 죽은 다음에 영원한 생명을 얻느냐 못 얻느냐가 중요하지만, 사람들은 지금 당장 죽어서 슬프다는 것만 생각합니다. 사랑하는데 왜 살리지 못하느냐는 것만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랑하시기 때문에 지금 죽은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또 지금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영원히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진짜 사랑을 하면 제일 좋은 것을 줘야지 적당히 좋은 것을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지금 죽었다 살아나는 것은 제일 좋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죽었다 살아도 또 죽습니다. 세월이 지나면 나사로는 또 죽지 않겠습니까? 나사로가 지금까지 살아 있습니까? 이미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죽었다 살리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영원히 사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 영생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게 진짜 사랑이고 그래서 예수님이 그런 사랑을 품고 오신 것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 예수님이 나사로를 이때 살리십니까? 사실 그냥 두셔도 됩니다. 죽었으니까 그냥 두시고 다른 사역을 하셔도 되는데 왜 그를 살리십니까? 이 질문은 사실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는가와 연결이 됩니다. ‘예수님이 왜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아로, 구원자로,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는가?’ 또 ‘예수님이 왜 십자가를 지고 죽음으로 나아가셔야 했는가? 왜 죽으셔야 했는가?’ 그것이 바로 사랑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려주기 원하십니다.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죽음을 이기는 길은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밖에 없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37절)
36절에서는 ‘나사로를 정말 사랑하셨구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야, 저렇게 사랑하셨으면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냐? 맹인의 눈도 뜨게 하는 능력이 있는 분이라면 안 죽게 할 수 있었을 텐데 왜 죽게 내버려두었냐?’ 이게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랑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애초에 슬픔도 없고, 고통도 없고, 굶주림도 없고, 전쟁도 없고, 자연 재해도 없게 해주셨으면 얼마나 좋겠냐? 그래야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시겠냐?’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건 자기 생각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벌어지는 일 밖에 모릅니다. 뒤에 있는 원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철학자처럼 생각이 깊은 사람의 생각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하나님의 생각을 우리가 어떻게 다 이해합니까? 그러면서 어떻게 단정 지으며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앞에 벌어진 일만 보고서 마르다와 마리아가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텐데...’라고 한 것처럼 ‘주님이 역사하셨더라면 이런 비극이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왜 그러셨습니까?’ ‘하나님, 왜 이런 일이 내 삶에 일어나게 내버려두십니까?’라고 괴로워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서도 이렇게 질문해볼 수 있습니다. ‘나사로를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던가?’ 하는 질문과 연결해서,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실 수 없었던가?’ 안 죽으셔도 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지 않으시고는 우리를 사랑하실 수 없었는가?’
여기에 대해 요한복음은 확실한 대답을 줍니다. ‘오직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만, 그분이 인간의 영원한 멸망이라는 운명을 지시고서야 세상을 구원하실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지 않고서는 죽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죽음은 죽음으로만 이길 수 있습니다. 사실은 죽고 부활함으로만 죽음을 물리치는 게 가능합니다. 죽기만 했으면 어떻게 죽음을 이기겠습니까? 그런데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기에 생명을 줄 수 있으십니다.
세상을 보면 미움과 경쟁과 시기와 질투와 욕심과 거짓과 모함과 음란과 폭력과 교만 같은 것들로 가득합니다. 드라마 주제도 그런 것들이고 영화도 그렇습니다. 그런 것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악의 고리를 어떻게 끊습니까?
아프가니스탄에서 20년 전쟁을 마치고 미군이 철수한다고 하는데, 반대도 있지만 그렇게 정부가 추진하고 있습니다. 9-11 사태가 올해로 20주년이 되는데, 그때 이라크 전쟁을 일으켜서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고 승리했습니다. 또 나중에 오사바 빈 라덴도 제거했습니다. 그럼 다 끝났습니까?
그렇게 힘으로 누르면 ‘잘못했습니다. 이제 안 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게 아니라 ‘두고 보자.’라고 하며 이를 갑니다. 그리고 나중에 공격합니다. 그러면 이쪽에서도 공격하고, 그러면 저쪽에서도 또 공격하고, 그러면 이쪽에서도 또 공격하고... 이 고리가 끊어지지 않습니다. 미움과 살상의 고리가 끊어지지를 않습니다.
무엇으로 그걸 끊을 수 있습니까? 자기 생명을 내어주는 희생이 아니고는 이것이 끊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그런 것들을 이기셨습니다.
2. 나사로를 살리시다 (38-44절)
이제 무덤으로 나아가신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속으로 비통히 여기십니다.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8절)
당시 유대인들의 무덤 앞에는 큰 돌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안에서 죽음은 더 이상 우리를 방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죽음은 더 이상 영원한 이별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39절)
놀랍게도 앞서 아주 멋지고 귀한 고백을 했던 마르다가 여기서는 방해하고 있습니다.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사실 나흘째가 되니까 당연히 시체가 썩어 냄새가 납니다.
그런데 이 정도가 마르다가 알고 있는 예수님입니다. 마르다가 아는 예수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는 죽은 자를 먼 미래에는 살릴 수 있는 분이시지만 지금 당장은 살릴 수 없는 분이십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을 더욱 온전히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더 필요했습니다. 그런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야단치지 않으시고 이전에 했던 말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40절)
요한복음에는 그 기록이 나오지 않지만, 이 말씀을 보면 이전에 예수님이 마르다와 대화하시면서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4절에서 미리 말씀하신 대로, 나사로를 통해 하나님과 예수님 자신이 모두 영광을 받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놀랍게도 사람들이 돌을 치웁니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1-42절)
오래 전에 CBS에서 2001년에 나온 <Jesus>라는 미니시리즈가 있었습니다. 거기서는 예수님이 아주 쾌활하고 자주 웃는 분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그것이 예수님의 원래 성격과 가장 가깝다고 생각됩니다. 그 드라마에서 바로 이 장면이 나오는데, 나사로 무덤을 막은 돌을 굴려서 옮기니까 거기 있던 사람들이 다 찡그리면서 코를 급히 막습니다. 썩는 냄새가 났기 때문입니다. 그 장면이 지금까지도 인상 깊게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는 그냥 “돌을 옮겨 놓으니”라고 아주 간단하게 되어 있지만, 이 장면을 상상해보십시오. 시체 썩은 냄새가 얼마나 진동을 하겠습니까? 쓰레기를 치우는 날 그 쓰레기 썩는 냄새를 잘 맡아보십시오. 누가 그걸 맡고 싶습니까? 다 코를 막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시체 썩은 냄새는 더합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예수님은 감사기도를 드리십니다. ‘아버지여, 나사로를 살릴 능력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감사기도를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전에 이미 기도하셨다는 말입니다. 요단강 동편 베다니에서부터 기도를 하고 오신 겁니다. 그래서 이미 기도를 들어주신 것을 감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공개적으로 감사기도를 드리신 이유가 있습니다. 이 무덤가에 모인 사람들이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 자신은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것, 또한 하나님은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당장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사로는 지금 살아나도 언젠가 또 죽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표적에서 중요한 것은, 나사로가 살아난 다음에 그의 믿음이 더욱 강건해져서 자기를 살리신 예수님과의 관계를 더 세워가고 그분을 더 알고 그분이 주신 생명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살리신 저분이 틀림없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이시다. 구원자이시다.’ 하고 전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또 이것을 목격한 사람들도 단순히 기적을 보고 끝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가리키는 ‘표적’으로서의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고 주님과의 관계를 세워감으로써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을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로 이것이 15절에서 예수님이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신 뜻입니다.
인생은 성공과 실패, 또 행복과 불행이 엇갈리는 삶입니다. 성공만 하는 사람도 없고 실패만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행복하기만 한 사람도 없고 불행하기만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 섞여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삶 속에서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행복하기만 할 수 없는데 행복만 추구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오히려 그 가운데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당장 내 손에 쥐어진 것과 놓친 것에 대해서 일희일비하는 삶이 아니라, 좋은 일이 벌어지면 막 좋아하고 나쁜 일이 벌어지면 막 괴로워하는 게 아니라,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상관없이 그 안에서 예수님을 알아가고 ‘여기서 주님의 뜻은 무엇일까?’ 하고 알아가며 주님을 더욱 신뢰하며 나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무덤을 가로막고 있는 큰 돌처럼 지금 우리의 삶을 가로막고 있는 어떤 것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돌이 우리에게 문제가 아니라, 진짜 문제는 영원한 죽음입니다. 단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죽음입니다. 이것을 나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을 여기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3절)
나사로를 불러일으키는 능력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하시니까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44절)
이 모습을 보십시오. 굴속에 죽어서 시신으로 들어갔을 때와 똑같습니다. 손과 발은 베로 동여 있고 얼굴은 수건에 싸여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의 염려와는 달리 썩지 않았고 냄새도 안 납니다.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라고 하십니다. 나사로로 하여금 죽음의 속박에서 놓여 이제 생명의 자유를 누리고,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로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우리 예수님의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뿐만 아니라 죽음을 넘어섭니다. 부활을 줍니다. 죽음이 가져다주는 인생의 현실은 너무나 냉혹하고 차가우며 어떤 사람의 위로로도 위로가 안 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없이 ‘만약 OO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주님이 왜 이렇게 하실까? 왜 나에게 이런 것을 허락하실까?’라고 하며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괴로움이 오히려 기쁨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게 목적이 아니라, 이러한 어려움을 통해 이것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주님을 더욱 붙들며 주님과의 관계를 더욱 세우고 이 땅에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라는 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주님은 연약하고 부족하고 겁이 많아서 세상에 자주 굴복하고 넘어지는 우리를 영원한 천국잔치의 자리까지 데리고 가십니다. 그래서 이것을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우리가 “주님, 정말 믿습니다.”라고 할 때 우리에게 선포하십니다.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