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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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9일 성금요일 예배
✦ 성금요일 메시지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태복음 27장 45~50절)
[들어가는 말]
제가 우리 교회에 부임하고 목회자를 위한 가정교회 세미나를 다녀온 2006년부터 매년 봄가을로 열리는 가정교회 목회자 컨퍼런스에 지금까지 꾸준히 참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맘때만 되면 17년 전인 2007년 4월 샌디에고에서 열린 목회자 컨퍼런스에 참석했던 날이 기억납니다.
그날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중간에 갈아타는 공항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난 것을 티브이에서 계속 보도하고 있었습니다. 영주권자로 한국 국적이었던 조승희라는 23세 청년이 자기가 다니던 Virginia Tech 대학교 캠퍼스에서 무차별 총격을 가해 33명이 죽고 25명이 부상한 최악의 총기 난사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고 있습니다.
범인 조승희의 가족은 가난을 면하려는 희망을 품고 1992년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고 합니다. 처음 그가 미국에 왔을 때는 영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했습니다. 어쩌다 말을 하게 되면 친구들은 그의 어눌한 발음을 놀려대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말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얼마나 큰 스트레스를 받았겠습니까?
그가 그렇게 힘들어할 때 그의 부모는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느라 너무 바빠서 그를 돌봐주지 못했고, 그러는 사이 그는 점점 더 혼자가 되어 갔습니다. 조승희를 지배한 두 가지 단어가 있었는데, 그것은 ‘따돌림’과 ‘외톨이’였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수학 천재라고 인정받기도 했는데, 내성적인 성격과 어눌한 영어 때문에 친구들의 놀림을 받자 더욱더 혼자만의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그와 함께 학교에 다녔던 친구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중고등학교 시절 늘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었고, 너무 외로워 보여서 자기가 다 슬플 정도였다고 합니다. 한 번은 수업 시간에 책을 읽는데 조승희 군이 이상한 소리로 책을 읽자 학생들이 다 웃으면서 “Go back to China(중국으로 돌아가라)!”라고 하며 놀렸다고 합니다. 그들은 조승희 군이 중국 사람인 줄 알았던 겁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한 영혼이 너무 일찍부터 외부 세계로부터 차단되어 외톨이가 되었고, 그 결과 외부 세계를 향해 공격적인 적개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외부를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하고 자신도 스스로 생애를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학교 총격 사건 가해자의 70% 이상이 놀림과 괴롭힘을 당하며 자란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왜곡된 세계관과 극단적으로 공격적인 성향이 되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거부당하고 무시당할 때, 그가 속한 공동체를 파괴할 만큼 심각한 성격 파탄이 일어난다는 것을 봅니다.
1. 예수님의 고독
고독은 이처럼 무서운 것이고, 남들에게 버림받는다는 것은 정말 비참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이러한 외로움과 고독을 치유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아주 고독한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생애의 마지막을 향해 갈수록 더욱 고독해지셨습니다. 점점 더 고난이 다가오는데 제자들은 하나씩 하나씩 주님의 곁을 떠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사랑을 나누며 말씀과 삶을 함께 나누었던 제자들이 주님의 결정적인 고난의 시간에 자신을 떠나가는 것을 보시던 예수님의 마음은 얼마나 고독하셨을까요?
예수님의 삶에 있어서 고독의 클라이맥스가 있다면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곱 마디 말씀을 가리켜 소위 ‘가상칠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가 오전 9시였는데, 12시까지 예수님은 십자가 위헤서 첫 세 마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1언: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눅 23:34, 새번역)
제2언(신앙을 고백하는 옆의 강도를 향해서):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눅 23:43, 새번역)
두 번째로 말씀하신 후에 시간이 약간 흘렀고, 예수님은 그 엄청난 고통을 견디시면서 세 번째로 말씀하십니다. 숨을 쉬기도 너무나 힘든 상황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첫 두 마디의 말씀이 우리의 죄 사함과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면, 세 번째는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제3언: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요한복음 19:26-27)
그 후 칠흑 같은 어두움이 땅에 임합니다.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45절)
제6시(낮 12시)부터 제9시(오후 3시)까지 3시간 동안 천지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어두움이 임합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네 번째로 입을 열어 말씀하십니다.
“제구시 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46절)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라는 외침은 예수님 때로부터 약 천 년 전에 기록된 시편 22편 1절에서 이미 예언되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시 22:1)
이 고독한 절규 속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독한 삶과 죽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유일한 위로자였던 아버지 하나님에게조차 버림을 받아야 하셨던 것입니다. 유명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이것을 놓고 깊은 고민을 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으실 수 있다는 말인가?”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에게서 버림받는 이 장면에 의문을 품었던 것입니다.
엄격히 말하면, 십자가는 예수님 자신의 선택이었습니다. 할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했던 것이 아니라, 그분은 죽음을 의도적이고 자발적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얼마든지 고독하지 않을 수 있으셨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독을 선택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 버림받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분은 고독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왜?
2. 예수께서 고독을 선택하신 이유
1) 우리 죄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이사야 53:6, 새번역)
이사야는 예수님이 오시기 700년 전쯤 활동하던 선지자입니다. 그가 이렇게 오래전에 메시아(그리스도)에 대해 이미 예언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 모두의 죄악을 지셨다는 사실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문자 그대로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이 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분에게 우리 대신으로 죄를 씌우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21, 새번역)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죄인이 되셨습니다. 왜 예수님만이 구원자가 될 수 있습니까? 아무나 십자가에 달려서 ‘내가 인류의 죄를 사한다.’라고 하는 것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리 어떤 사람이 자기가 메시아라고 하며 십자가에 달려도 죄인일 뿐입니다. 그러나 죄가 없으신 유일한 인간이 예수님이십니다.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인류를 구원할 수 있으셨습니다. 죄인은 죄인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죄가 없으시기에 구원할 수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순간 온 세상의 죄가 그분에게 전가된 것입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죄악, 악독하고 잔인한 모든 죄악이, 그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렇게 온 세상의 죄를 지고 달리셨던 그 순간, 거룩하신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단 한 번도 교제가 끊어진 적이 없었던 외아들로부터 고개를 돌리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하나님이 눈을 가리셨다고 표현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를 참고 보지 못하시며 그냥 계시지 못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예수님의 입에서 이 피 맺힌 절규가 토해져 나온 것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은 왜 이 거절과 배신을 경험하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계십니까? 그에 대한 대답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죄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독을 선택하신 이유는 바로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2) 우리 죄에 대한 형벌 때문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 6:23)
성경에서 알려주는 것은, 죄의 삯(결과)이 사망이라는 사실입니다. 죄는 언제나 대가를 요구합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죄를 지으면 죽어야 합니다. 죄가 하나만 있어도 죽어야 합니다. 죄가 하나만 있어도 지옥에 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죄가 하나입니까?
성경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육체의 죽음 이외에 또 다른 죽음이 있다고 말합니다. 죽음 이후의 죽음, 사망 이후의 사망, 그것을 가리켜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요한계시록 21:7-8)
이 둘째 사망이 곧 지옥이며, 주님은 이것을 가리켜서 어두움의 장소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지 3시간이 지난 12시 정오가 되자 오후 3시까지 세 시간 동안 갑자기 어두움이 임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자연 현상의 변화가 아니라 초자연적인 현상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온 세상의 죄를 짊어진 채 하나님의 진노를 견디고 계셨던 그 순간 온 땅에 임했던 이 어두움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진노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감히 바라볼 수 없는 죄인입니다. 죄인은 주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습니다. 보면 죽습니다.
가끔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시죠. 이제 교회 나오시죠.”라고 하면 “하나님을 보여주면 내가 믿겠습니다.”라고 합니다. 큰일 날 소리입니다. 하나님을 보면 죽습니다. 믿기 전에 죽으니까 그런 말은 삼가야 합니다.
여기 전 인류의 죄, 세상의 죄가 십자가 위의 예수님에게 매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기에 당신의 진노를 쏟아부으며 심판하고 계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인류를 향한 진노를 발하시며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입에서 절규가 터져 나왔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예수님은 단순히 어두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침묵 때문에 괴로워하셨습니다. 불러도 응답이 없으신 하나님, 캄캄한 어둠의 침묵, 이 심판의 형벌의 한복판에 버림받고 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마음을 느껴보십시오.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 위에서 사실은 지옥을 견디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해야 할 지옥을 십자가 위에서 대신 당하고 계십니다. 우리 인간의 죄에 대한 형벌, 그 지옥의 형벌을 혼자서 견디고 계십니다. 이 순간이야말로 우리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 값을 대신 치르게 만드는 순간이었습니다. 우리가 당해야 할 형벌로 인해 그분이 절규를 토해내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 죄를 자기의 몸에 몸소 지시고서,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매를 맞아 상함으로 여러분이 나음을 얻었습니다.” (베드로전서 2:24, 새번역)
3) 우리의 구원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세 시간에 걸친 무서운 어둠을 견뎌내시고 마지막 핏방울을 골고다 언덕에 흘리시던 그 순간, 우리 죄의 삯이 치러졌습니다. 우리가 치러야 했던 죄의 값이 치러지고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바로 이 구원의 소망 때문에 예수님은 캄캄한 고독과 그 고통을 견딜 수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심판과 형벌을 한 몸에 지고 그 고통을 견디시면서도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우리는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에 초점을 맞추는데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며 여전히 하나님 아버지를 ‘나의 하나님’으로 부르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하나님이 구원의 하나님이신 것을 아셨습니다.
이제 심판의 시간은 지나갔습니다. 형벌은 끝났고 죄의 값은 치러졌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영혼은 다시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합된 모든 영혼이 이제는 하나님 아버지를 바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상징하는 놀라운 사건이 바로 이 부르짖음 뒤에 나타납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마 27:51a)
예수님이 절규하시던 바로 그 순간,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 하나님이 영광을 계시하시던 지성소 앞을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사람이 찢으려면 아래서부터 찢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휘장은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구약 시대 때 인간은 아무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불완전한 인간은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제사장을 세우고, 그중에도 그 해의 대제사장 딱 한 명이 1년에 딱 한 번 대속죄일(욤 키푸르)에 지성소에 들어갔습니다. 딱 한 명이 1년에 딱 한 번입니다.
내 모든 죄를 다 아시는 분, 내 깊은 곳의 모든 것을 다 꿰뚫어 보시는 분, 아무것도 숨길 수 없는 그분 앞에 노출되어 서 있는 경험은 아주 두려운 경험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하나님 앞에 감히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대제사장이 1년에 딱 한 번 대속죄일에 속죄의 제물을 드리며 그 피를 뿌리고서야 비로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대제사장 혼자 휘장을 열고 지성소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온 세상의 죄를 지시고 보혈을 흘리시던 그 순간, 하나님 앞에 버림받으시며 고통과 형벌의 대가를 지불하신 바로 그 순간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죽 찢어져 버린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제는 누구나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실에 대하여 히브리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서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휘장을 뚫고 우리에게 새로운 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휘장은 곧 그의 육체입니다.” (히브리서 10:19-20, 새번역)
누구도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피를 힘입어 이제 하나님 앞에 누구든지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그 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극심한 고독을 견디시고 고통의 대가를 치르심으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길이며 생명의 길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렸습니다. 죄인에 대한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놀라운 사건을 위해서 주님은 그 참혹한 고독과 고통을 견디셨던 것입니다. 그분이 버림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환영받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이 절대 고독을 견디심으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 안으로 들어가는 놀라운 삶, 풍성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3. 인간의 고독에 대한 해결책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나 고독을 느낍니다. 고독을 느껴보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고독과 외로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합니까?
어떤 사람은 삶의 고독을 극복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사랑에 몰두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사랑하다가 동시에 또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는 일이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쾌락이 고독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보고 쾌락에 몰두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회적 지위가 고독을 해결해줄 것이라고 하며 성공에 몰두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고독의 문제를 해결해줍니까? 사랑이나 쾌락이나 성공에 몰두하는 그 순간에는 고독이 없어지는 것 같지만, 바로 다음 순간 고독과 외로움과 허무함은 더 크게 일어납니다. 그리고 자신을 더욱 고독하고 외롭고 허무한 존재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런 방법으로는 인간의 고독이 해결되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고독을 경험하신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라
고독과 외로움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은, 참으로 고독을 아시는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독을 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2) 고독의 원인을 아시는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라
예수님은 고독의 원인을 아십니다. 그게 뭡니까? 바로 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고독은 우리의 고독과는 다릅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 때문에 고독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죄 때문에 최악의 고독을 경험하지 않아도 되시는 분이 고독을 경험하셨습니다. 인간이 경험하는 고독의 밑바탕에는 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고독의 원인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이 고독의 원인을 해결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이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버림받아 피를 흘리심으로 대신 우리가 하나님 앞에 환영받으며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의지하고 살아가는 새 삶이 가능하도록 우리 대신 버림받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인으로 영접하는 순간 고독은 눈 녹듯 사라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삶의 황홀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나는 예수님을 믿었는데도 왜 아직 고독하고 외롭습니까?’라고 하십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온전히 주인으로 모시고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이제는 죄가 나를 어떻게 하지 못하고 지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매일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야 그 안에 약속된 풍성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놀라운 비밀, 이 기쁨, 이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고독을 견디셨습니다. 혹시라도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영접하고 이 기쁨과 평안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내가 예수님을 이미 믿었지만 왜 나는 계속해서 고독하고 외롭고 이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는가?’라고 하시는 분들은 내가 아직 내 삶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주인의 자리를 예수님께 내어드리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 예수님이 오늘 세상에서 여러 가지 일들로 힘들어하는 우리를 당신 앞으로 초청하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주님의 이 초청에 믿음으로 응답하여 참 평안과 안식을 얻고, 주님 안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며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