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HOME > 설교와칼럼 > 수요예배/특별예배
마태: 경멸의 대상에서 존경의 대상이 된 사도 (마 9:9-13) -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킨 열두 사도 8 (9/02/20)
설교 동영상: https://youtu.be/EnAM54k_WLE?t=1901
2020년 9월 2일 수요예배
✦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킨 열두 사도 8 ✦
“마태: 경멸의 대상에서 존경의 대상이 된 사도”
(마태복음 9장 9~13절)
1. 마태의 이름과 직업
마태에게 별명을 붙인다면 ‘경멸을 존경으로 바꾼 사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실제로 ‘경멸의 대상에서 존경의 대상이 된 사도’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세리와 창기는 사회적으로 가장 큰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신약성경의 첫 번째 책이 마태복음이고, 이 마태복음을 기록한 사람이 바로 ‘마태’입니다.
마태는 세리였는데, 예수님이 제자가 되었고 또 성경을 쓴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회적 경멸을 받던 세리였던 사람이 신약성경 첫 번째 책의 기록자가 된 것입니다.
먼저, 그의 직업은 세리였습니다. 마태복음은 마태가 기록한 복음서인데, 그는 스스로의 이름을 ‘마태’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굉장한 의미가 있습니다. 다른 공관복음서인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마태가 아닌 ‘레위’라고 기록하기 때문입니다.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막 2:14)
누가복음(5:27 이하)에도 역시 ‘레위’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마태복음에서 자신의 이름을 레위가 아닌 마태라고 기록했습니다. 아마도 레위가 그의 본명이었을 것입니다. 레위 하면 생각나는 것이 ‘레위 지파’인데, 이름이 레위라면 그는 레위 지파였을 것입니다.
레위 지파 중 아론의 후손들은 제사장이 되었고, 나머지 레위인들도 성전에서 일하거나 각 도시에서 영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마도 그의 아버지는 자식의 이름을 레위라고 지으면서, ‘너는 꼭 우리 조상 같은 훌륭한 레위인이 되어 우리 레위 지파의 명예를 빛내다오!’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이름에 어울리는 경건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제가 오래 전 이민 와서 대학을 다닐 때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과 교제했는데, 대학원 박사과정 유학생들은 주로 30대였고 자녀가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그 중 한 분의 아들 이름이 ‘고’였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성이 ‘최’ 씨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아이의 이름은 ‘최고’였습니다. 그건 좋은데, 그 아이가 자라면서 최고가 아닐 때가 많았을 텐데, 그럼 얼마나 마음이 안 좋았을지 염려가 됩니다.
마태는 레위인 수업을 받으며 열심히 공부하다가 어떤 변화를 경험하고 인생의 방향을 세리로 바꾸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세리가 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세리가 되려면 우선 계산을 잘해야 합니다. 돈을 다루니 계산을 잘해야 하고, 장부 정리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어쨌든 그는 레위인보다 돈을 버는 세리의 길을 가겠다고 실리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세리가 자기 민족인 유대인들에게는 대단한 미움을 받는 직업이었지만,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던 그 당시에 세리가 되어 로마 정부와 연결되면 돈을 많이 번다는 실리적인 계산 때문에 세리라는 인생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세리가 창기와 함께 유대인들에게 가장 지탄받는 대상이었던 두 가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세리는 로마 정부를 위해 일하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그들은 매국노였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친일파들이 일본 사람들의 앞잡이 노릇을 할 때 매국노로 배척받으며 일본 사람보다 더 미움을 받았던 것처럼, 로마 사람도 밉지만 세리들은 더 미웠고 사람들이 심하게 경멸했습니다.
또 다른 이유로, 당시 세리들은 백성을 크게 착취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세리 마태는 가버나움 출신입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여행을 시작하면 북쪽으로 올라가 가버나움을 거쳐 갈릴리 호수를 통과해서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 도달하게 되고, 반대로 시리아로부터 예루살렘을 향해 남쪽으로 내려올 때에도 반드시 가버나움을 통과하게 됩니다. 무슨 말입니까? 무역을 하는 상인들이 그 길을 지나려면 반드시 세관을 통과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마태의 고향 가버나움은 동서남북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세금을 징수하기 위한 국립세관이 있었고, 바로 거기서 마태는 세리로 일했던 겁니다. 당시 세관에 근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동족들이 사용했던 아람어나 히브리어는 물론, 당시 공용어인 헬라어와 로마사람들의 언어인 라틴어를 구사할 줄 알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장부를 기록하고 정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니까 마태는 상당한 지식인이었고 유능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리들은 로마에서 정해준 액수보다 백성들에게 세금을 더 많이 걷어서 로마에 내고 남은 액수를 개인적으로 챙겼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원성을 받고 경멸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악한 세리들은 개인에 따라 최고 12%까지 세금을 매겼다고 합니다. 또 세관 검사를 하는 도중 밀수품을 찾기 위해 긴 꼬챙이 같은 것을 가지고 아주 비웃는 표정으로 짐들을 쿡쿡 찔러 보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엄청난 혐오감을 일으켰습니다.
정리해보면, 당시 세리들은 사회적인 혐오의 대상이었고, 누구나 치를 떨며 피하는 증오의 대상이었으며, 동족에게서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세리는 법정에서 신뢰할 만한 증인으로 서지도 못했습니다. 거짓말하고 사기 치는, 한마디로 믿을 수 없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유대인들은 회당에 창기와 함께 세리의 출입을 금지시켰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당시 세리와 창기의 종교적, 사회적 위치였습니다.
2. 마태의 회심과 변화
성경을 그냥 읽으면, 어느 날 갑자기 마태가 예수님을 만나 급작스런 결단을 통하여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예수님이 부르셨을 때 반응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9절)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 하시니까 마태는 바로 일어나 예수님을 따릅니다. ‘일어나 따랐다’는 것은 세리의 직업을 ‘버렸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줍니까? 평소에 그의 마음속에 있던 변화에 대한 깊은 열망이 그로 하여금 예수님을 즉시 따라가는 결단을 하게 해준 것입니다. 마태가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결단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 급격한 결단의 뒤에는 오랜 시간의 고민과 갈등, 또 주변 사람들의 좋은 영향이 있었습니다.
마태가 세리가 된 것이, 비록 사람들의 눈총을 받는다고 해도 재물만 있으면 모든 것이 보상된다고 생각하는 현실주의자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였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자기 인생이 자기가 생각했던 대로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자기 직업에 큰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면, 마태는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따르기는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무슨 말입니까? 레위인이었던 그가 레위인의 삶을 버리고 선택하여 그토록 의지했던 돈이 그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마태는 세리로 있으면서 돈은 많이 벌었을지 몰라도, 민족의 반역자이고 짐승만도 못한 존재로 늘 경멸을 받으며 엄청난 갈등 속에 살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있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마태는 철저히 종교적인 사람이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전체를 살펴보면, 다른 복음서들에 비해 구약을 많이 인용합니다. 사실 나머지 세 복음서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이 구약성경을 인용합니다. 뿐만 아니라 마태는 구약과 직접 연관된 99번의 인용 외에도, 히브리 성경을 형성했던 모든 기록들을 인용하여, 예수님의 탄생에서부터 부활에 이르기까지 모든 역사에 끊임없이 구약성경을 언급하면서 예수님이 바로 그 메시아라는 사실과 왕이시라는 것을 증언합니다.
그가 비록 같은 시대의 사람들에게 변절자이고 매국노로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완전히 떠난 사람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다른 모든 제자들보다 더 많이 구약의 자료들을 연구했고, 엄밀한 의미에서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비록 세관에 앉아 있었으나,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수많은 소문들을 들었고, 그 중에도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이미 듣고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구약성경 말씀에 통달했던 그가 들어보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일들과 그분이 가르치시는 말씀은 결코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도 그분을 만나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자기 같은 세리가 어떻게 그런 거룩한 분을 만날 수 있겠는가 하고 자포자기 상태로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긴 말 없이 그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르라.” 예수님이 그냥 지나가는데 어쩌다 그를 보시게 된 것이 아닙니다. 계속 그를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러다 이제 그의 마음에 갈등과 열망이 막 올라왔을 때 “나를 따르라” 초청하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간단했지만, 이 말씀이 마태의 마음속에 엄청난 불꽃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율을 쫙 느낀 겁니다. 그러면서 마치 마비된 것처럼 주체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려 즉시 자기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때 옆에 있던 다른 세리가 ‘어이, 마태, 왜 그래?’라고 했을 것이고, 그는 ‘아, 이제 이거 안 해. 난 이제 관둔다.’ 하며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0절)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한 그날, 마태는 스스로 잔치를 열어서 예수님을 초청합니다. 자기와 같은 민족의 반역자를 거리낌 없이 제자로 불러주신 예수님께 너무나 감사해서 자기 집에 예수님을 초청하여 잔치를 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 동료 세리와 죄인들도 불렀습니다. ‘죄인들’이라고 되어 있는 사람들은 유대인이지만 전혀 율법을 따라 살지 않고 율법에 의하면 죄만 짓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기쁨을 혼자만 가지고 있을 수 없어서 동료 세리들과 죄인들을 부르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맞아들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그때 이것을 본 바리새인들이 질문을 던집니다.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1절)
바리새인들은 극도로 혐오하던 세리의 집에 예수와 그 제자들이 초대를 받아 참석하고 있고, 게다가 세리와 죄인들로만 가득한 잔치 자리를 보면서, 명색이 그리스도라고 자처하는 자가 이 무슨 꼴이냐고 비난한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12-13절)
바로 이 유명한 말씀이 마태의 집에서 열린 잔치에서 선포되었습니다. 이 잔치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선, 이것은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마태의 제자 선언식과도 같습니다. 자기가 이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모든 동네 사람들에게 알리면서 구체적으로 선포하는 의식인 것입니다. 동시에 그는 다른 세리들도 자기처럼 예수님을 믿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그들을 이 자리에 초청하여 예수님과 만나게 해주었습니다.
가장 효과적인 전도의 상황이 바로 식사 자리입니다. 요즘 이것이 안 되어 안타깝습니다. 누군가를 전도하고 싶다면, 일단 함께 식사하며 시작하는 게 중요합니다. 사람은 대개 먹을 때 무장해제가 됩니다. 지금은 집에서 하기 힘드니까 야외에서라도 그런 기회를 만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생각해서 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잔치에 또 하나의 의미가 있는데, 이 자리는 자신의 회심과 변화를 자축하는 축하의 파티였을뿐 아니라, 옛 생활을 작별하는 이별식도 됩니다. ‘이제 나는 세리로서의 삶과 완전한 작별을 선언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우리가 전도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게 되면 축하를 해줍니다. 끝나고 같이 식사도 하며 축하하는데, 파티를 열어서 마음껏 기뻐하면서 축하해주는 겁니다. 그렇게 축하하며 잔치를 벌이다가, 언젠가 저 영원한 하늘나라의 잔치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3. 마태의 사역
마태가 한 일 중 가장 위대한 사역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마태복음을 기록한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신약성경을 펼치자마자 제일 먼저 나오는 책을 써서 하나님 나라에 드린 사람이 바로 사도 마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마태로 하여금 마태복음을 기록하게 하신 데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마태’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태는 스스로를 칭할 때 레위가 아니라 마태라고 기록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옛날의 습관대로 레위라고 불렀을지 모르지만, 자신은 이제 하나님의 선물로 새로 태어난 인생이 되었다는 간증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새 이름이었을 것입니다.
마태는 레위인으로서 유대 종교교육을 받았고, 또 세리로서의 교육도 받았습니다. 늘 장부와 문서를 정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돈을 계산하던 손으로 자신의 인생을 변화시켜주신 주님을 증언하는 내용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성령의 붙잡힘을 받아 마태복음을 기록할 때, 그는 아마 감동과 감격으로 전율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마 1:1)
이 부분을 기록하면서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자기는 여기 들 수도 없는 죄인이었는데 이런 말씀을 쓸 수 있다니 말입니다. 그리고 마태 자신이 바로 그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 아닙니까? 마태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마태복음을 기록했습니다. 자신과 같은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원했습니다. 레위인다운 생각입니다. 자기를 세리라고 경멸하며 비웃던 동족들에게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전하는 전도자로 변화된 것입니다.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마태는 15년 동안은 예루살렘에 머물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아마도 자기 동족 이스라엘 유대인들에게 전도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당시 여러 사도들은 각지로 흩어진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 복음을 전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들로 인하여 주님을 알게 되고 교회가 세워진다는 좋은 소식들이 들려왔습니다. 거기에 용기를 얻은 마태도 마침내 복음을 들고 길을 떠났습니다.
마태는 아람어로 마태복음을 기록했고, 당시 북부 사람들은 아람어를 잘 이해했습니다. 후에 그는 히브리어로 많은 사본을 만들어서, 자기가 다니는 곳마다 복음의 소식을 나눠주었다고 합니다. 마태가 히브리어로 된 복음을 가지고 사역을 함으로써 이방인들보다도 유대인들을 더욱 많이 믿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마태도 후에는 유대인들의 공격과 박해를 받았고, 결국 그의 발길은 들을 귀를 가진 이방인들에게로 향했습니다. 마태는 학식 있는 사람이었고 주님을 따르기 이전에 세리였기 때문에, 그의 학식과 경험을 가지고 여러 왕들과 고위 관리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전승들이 많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 말년에는 에티오피아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에티오피아에서 돌아오는 길에 창을 맞아 순교했다고 합니다.
4. 마태의 교훈
마태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면서 남긴 교훈이 무엇입니까?
1) 희생적인 결단
예수님이 그를 만나 처음으로 주셨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나를 따르라!” 그리고 마태의 반응을 성경은 어떻게 기록합니까? “일어나 따르니라.” 우리는 이것을 너무나도 쉬운 결단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 기록된 내용을 마태복음과 비교해보십시오.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눅 5:27-28)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세리로서 마태가 모든 사람들의 경멸을 받으면서도 결코 놓을 수 없었던 것, 계속해서 집착하고 꿈꾸었던 것, 낮에도 밤에도 일했던 목적이 무엇입니까? 돈입니다. 그러던 그가 놀랍게도 자신의 생명과 같은 돈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이 얼마나 존귀하신 분인지를 깨달은 마태는, 이제 돈을 위해 사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사는 인생, 자신을 바꾸고 변화시켜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새로운 인생을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2) 그의 전인적인 변화
마태는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과거에 했던 일을 안 하게 됐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도둑이 도둑질을 그만두었다는 것은 아직 불완전한 변화입니다. 도둑질을 그만두었다는 것은 언제 또다시 시작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저 도둑질을 잠시 중단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것은 완전한 변화가 아닙니다.
하지만 도둑질하던 그 손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고 구제하기 시작했다면, 더 이상 도둑이 아니며 완전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서는 도둑질하는 사람에게 도둑질하지 말고 구제하라고 말씀합니다.
마태가 그의 손으로 복음을 기록하는 펜을 들고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장면을 보십시오. 이것은 전인적인 변화입니다. 경멸받던 사람이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3) 은사적인 헌신의 삶
마태는 자신의 은사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했습니다.
마태와 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이 있는데, 무디의 찬양 사역자였던 생키(Sankey)입니다. 그는 본래 세무사였습니다. 한때 그는 세무국의 최고 책임자, 곧 세무서장 정도 되는 높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찬양을 좋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찬양을 부르면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16세에 회심했지만 그저 그런 그리스도인으로 30세까지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생키가 찬양을 인도하는 것을 본 무디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 동안 어디에 있었습니까? 나는 지난 18년 동안 당신 같은 사람을 기다리며 찾고 있었습니다.” 그날부터 생키는 무디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그가 복음을 전하는 전 유럽을 순회하면서 함께 찬양 사역으로 헌신하고 쓰임을 받았습니다.
이 세상은 지금 또 다른 마태를, 또 다른 생키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인생을 주 앞에 드릴 준비가 되어 있다면, 마태를 쓰신 주님께서 우리 또한 쓰실 것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