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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516일 수요예배

하나님이 내시는 길을 보라 13

크리스천 예절 지키기

(에베소서 429~32)

 

1.   크리스천 예절의 중요성

 

어느 나라이건 그 사회가 존중하는 매너 또는 예절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신발을 벗고 들어오고 미국에 살아도 우리 한국 사람들은 집 안에 신발을 벗고 들어오는데, 미국에서는 집 안에 신발을 그냥 신고 들어옵니다. 문화가 다릅니다. 미국에서는 길을 가다 실수로 다른 사람과 부딪치거나 앞서 가야 할 때는 “Excuse me”라고 하며 양해를 구하는데, 한국에서는 아무 말 없이 그냥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서구 사람들이 그런 한국 사람들의 태도를 아주 무례하게 생각합니다. 뉴욕 같이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곳에서도 미국 사람들은 다 “Excuse me”를 합니다. 안 하는 사람들을 보면 다 외국인들입니다.

 

우리는 친한 사람들끼리 반말하고 왁자지껄하게 모이지만, 일본 사람들은 서로 깍듯이 존댓말을 쓰고 목소리도 조근 조근 작게 말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이 예의는 바르지만 차갑고 정이 없으며 속내를 알 수 없다고 생각하고, 일본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이 무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세계화 시대가 될수록 오히려 각 나라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해주는 매너가 더욱 중요합니다. 그것을 모르고 아무 생각 없이 말하며 행동하다가는 중요한 일을 망쳐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각 나라별로 존중해야 할 문화와 예절이 있듯이, 크리스천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성경적 예절이 있습니다. 이것이 생각보다 중요합니다. 교회가 시험에 들거나 갈라질 때 보면, 무슨 교리 싸움이나 신학적 문제 때문이 아니라, 대부분 서로에게 무례하게 굴고 함부로 대함으로 주고받은 상처들이 쌓였다가 폭발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에서 열심히 섬기고 확실한 성경 지식과 교리를 가진 사람이라도 무례하게 말하고 행동할 때 교회에서 문제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의 편지들을 보면 서로 사랑하라. 서로 친절하게 여기고 불쌍히 여기라.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는다.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비판하지 말라. 겸손히 서로를 배려하라.”와 같이 크리스천 예절에 대한 내용이 아주 많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이 예절의 문제를 중요하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천 예절은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행동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진심으로 변화된 태도로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이 성령 충만하여 맺는 열매입니다. 예수님을 정말로 믿고 따르는 크리스천이라면 다른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을 믿었다고 하면서 어떻게 다른 형제자매들에게 무례하게 굴 수 있고 차갑게 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게 어떻게 사랑의 예수님을 모신 크리스천의 태도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크리스천 예절은 우리 영성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단순히 예법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입니다. 이것은 교회를 세우는 중요한 요소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지키는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사회에서 크리스천들이 예절을 지키지 않고 무례하게 굴며 거칠게 행동하면, 안 믿는 사람들이 볼 때 저런 사람들이 믿는 예수를 왜 믿고 싶겠습니까? 정말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제자로 자라가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성경적 크리스천 예절을 심각하게 고민하며 실천해야만 합니다.

 

오래 전 한국의 어떤 전통 보수 신학교 학장님이 LA를 방문했는데, 아주 전통 보수 교단이고 정통 신학을 가진 신학교였습니다. 그런데 점심때가 되어 어느 한국 식당에 가서 냉면을 시켰는데, 주문한 음식이 조금 늦게 나오니까 이분이 너무나 무례한 태도로 아주 심한 폭언을 하며 웨이터와 식당 주인을 야단쳤습니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목사님들은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그때까지 캘빈이나 버코프 같은 정통 신학자들의 신학을 강의하고 성경적 세계관을 가르치시던 신학자이자 목회자들을 길러내는 신학교의 학장인 분이, 실제 생활에서는 크리스천답지 못하고 그렇게 무례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답답하고 한심하게 느낄 수 있지만,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말아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지기 힘든 무거운 짐을 묶어서 남의 어깨에 지우지만, 자기들은 그 짐을 나르는 데에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23:3-4, )

 

그들은 바리새인들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가리키며 제자들에게 그들의 말은 본받아야 하지만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말은 잘하는데 행동이 없다는 겁니다. 신앙적으로 훌륭한 말은 많이 하는데 실제 삶에서는 그렇게 무례한 경우가 없는지 돌아보며 살아야겠습니다.

 

 

2.   크리스천이 지켜야 할 예절

 

성경 말씀을 많이 말로 나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제 삶 속에서 그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차할 때, 식당에서 음식을 먹을 때, 다른 데 가서 뭔가를 할 때 크리스천으로서 예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가끔 안타까운 것은 야외 공원에 가서 모일 때, 공원마다 규칙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모임인데도 그것을 어기면서 적당히 해도 된다고 하는 것을 보면 답답합니다. 단순히 좋은 행동을 해야 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사랑이 그 삶 속에서 당연히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슬쩍 버리면 나에게는 편하지만 그것을 치우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곤욕입니까? 또 자연을 훼손하는 것도 되고 일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힘들게 만드는 일입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들을 배려할 줄 아고 법을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그 안에 예수님을 모신 사람이 어떻게 남에게 해를 끼치고 무례하게 행동할 수가 있겠습니까? 믿는다고 하면서도 무례한 행동을 하고 법을 어기는 사람들을 보면 예수님을 정말 믿는 건가 의심마저 들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우리 크리스천들이 특히 지켜야 할 예절 몇 가지가 있습니다.

 

1)  비판하며 가르치려 들지 않기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7:1-2)

 

요즘 아주 유행하는 말 중에 내로남불이 있습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입니다. 똑같은 행동을 했는데 자기가 한 것은 굉장히 관대하게 대하며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라고 하고, 남이 하면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 있냐고 하며 비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3자가 볼 때는 똑같습니다. 자기가 남을 비판한 기준으로 똑같이 비판을 받는 겁니다.

 

다른 사람을 쉽게 비판하는 사람의 특징은 꼭 남을 가르치려고 든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순수하게 상대방의 문제를 고쳐주려고 하는 것이라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그 과정에서 진짜 붙들어야 할 인생의 본질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실 사람이 자신의 전공이나 전문분야나 관심사에 따라 다른 사람의 문제가 눈에 빨리 들어옵니다.

 

예를 들어, 패션(fashion)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다른 사람이 촌스럽게 옷 입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옷이 촌스럽다는 이유 하나로 그 사람을 낮게 보고 들어갑니다. 그 사람이 어떤 믿음이나 인품인지를 보기 전에 일단 낮추어 평가합니다. 또 아주 깔끔하고 문서 정리를 아주 잘하는 사람이 다른 지역에 가서 교회를 방문했을 때 주보에 오자가 나거나 디자인이 이상하면, 그것에 신경을 쓰느라 제대로 예배를 못 드립니다.

 

문제는, 그런 데에 신경을 쓰다가 정작 진짜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항상 다른 사람들을 율법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가르치려 들면서 정작 율법의 핵심인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는 버렸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이 손 마른 사람을 고치는 기적을 행하셨을 때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3:2, 5-6)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단지 예수가 안식일 규례를 범했다는 것만 보였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범하는지 아닌지, 그것만 보고 있습니다. 손이 마른 불쌍한 사람은 보이지도 않습니다. 신경도 안 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고쳐주니까 나가서 예수를 죽이려고 의논을 합니다. 그것도 바리새인들이 평소에 로마의 앞잡이라고 비난하며 증오하던 헤롯 당원들과 하나가 되어서 예수를 죽이기 위해 모의를 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 손 마른 사람이 자기 가족이었더라도 그렇게 했을까요? 한 사람의 절망이 소망으로 바뀌는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는데, 그들의 눈에는 오직 안식일 규정만 들어왔습니다. 그것도 안식일의 본뜻은 놓쳤습니다.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기 전에 그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3:4, )

 

안식일에 자기들의 짐승이 구덩이에 빠지면 다 건져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지금까지 손이 말라서 아주 고생하고 괴로웠던 사람인데,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주었다고 나가서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의논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본뜻은 선한 일을 하는 것이고 목숨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선입관과 자기 의에 사로잡힌 채 문제의 핵심을 놓쳐버렸습니다. 게다가 자기들이 얼마나 무례한지, 얼마나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지도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율법의 문자는 알면서 율법의 핵심인 이웃 사랑과 사람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모르고 있던 그들의 완악함에 분노하셨습니다.

 

굳이 문제 삼지 않아도 되는 것은 문제 삼지 않아도 됩니다. 특히 그것이 다른 사람의 약점을 고쳐야 하는 문제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다가 오히려 문제의 핵심을 놓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이 정의를 주장하다가 오히려 내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잘 분별하고 절제하는 것이 크리스천 예절입니다.

 

또한 자기 생각을 남에게 함부로 강요하는 것도 조심해야겠습니다. 상대방이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우리 부모들도 자녀를 대할 때 막 무례하게 강압적으로 가르쳐서는 안 되겠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많이 하며 성경공부나 제자훈련을 많이 할수록 더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딴에는 자기가 가진 지식을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어서 일방적으로 말하다가, 오히려 자기의 선입관을 강요해서 상대방의 마음을 닫아버릴 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가르쳐야 할 상황이 되면 두 가지를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먼저, 상대방으로부터 나의 인격과 실력에 대해 존경과 신뢰를 받는 상태가 아니라면 너무 성급하게 가르치려고 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쪽은 나를 인정하지도 않고 신뢰하지도 못하는데 대뜸 가르치려고 하면 오히려 반감만 생깁니다.

 

요즘 시대가 바뀌어서 그런지, 안 믿는 분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노방전도가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길에서 전도지를 나눠주고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 믿는 분들이 부담스러워하고 싫어하는 것은 자기를 알지도 못하면서 일방적으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특히 관계 전도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관계를 세우고 목장에 데려와서 마음을 연 다음에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인격적인 관계와 신뢰의 관계가 된 다음에 말씀의 씨앗을 뿌리려는 것입니다.

 

둘째로, 평소에 내가 충분한 칭찬과 격려를 해주며 관계가 세워진 사람이 아니라면 함부로 가르치지 않는 게 좋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방은 저 사람은 한 번도 내 일에 관심을 가진 적도 없고 격려를 해준 적도 없는데 왜 이렇게 가르치려고만 하나?’라고 생각하며 상처를 받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게 됩니다.

 

오래 전 목장을 할 때 그런 경우가 가끔 있었습니다. 어느 목장식구가 제가 지난주 고민이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나누면, 보통은 힘드셨겠네요.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우리 함께 기도해요.’라고 합니다. 그런데 누가 한마디만 하면 이건 이렇게 해요. 저건 저렇게 해요.’ 하니까,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직 신뢰의 관계도 아니고 서로 잘 모르는 상태인데 이래라 저래라 하니까 마음의 문이 닫혀버린 경우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런 부분을 조심해야겠습니다. 아예 가르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를 세우고, 그러면서 주님의 말씀을 나누자는 것입니다.

 

 

2)  약점을 용서하고 덮어주기

 

누구에게나 약점이 있고 또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는데, 그것을 꼭 드러내서 지적하고 보여주는 무례를 범하지 않아야겠습니다. 특히 가까운 사이일수록 상대방의 약점을 함부로 지적하는 무례를 범하지 않아야 합니다.

 

어떤 가정에서 자녀들 중에 미국 사람과 결혼한 경우가 있어서 가족들이 다 모일 때는 한국 사람들과 미국 사람들이 같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아이들, 특히 십대 청소년들은 미국 친척들을 더 좋아한다는 겁니다. 미국 친척들을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한국 친척들을 싫어하고 꺼려한다는 겁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한국 친척들은 만나기만 하면 주로 이런 말을 합니다. “, 너 왜 이렇게 뚱뚱하니? 살 좀 빼라.” “너는 너무 말랐다. 편식 하는구나. 밥 좀 많이 먹어야겠다.” “너는 눈이 작으니까 쌍꺼풀 수술을 해야겠다.” “학교에서 공부는 몇 등 하니? 대학은 어디로 갈 거야?” 하는 식으로 사춘기 아이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예민한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막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 친척들은 아이들에게 한두 가지씩 꼭 칭찬을 해주고, 요즘 자기가 즐거웠던 일이나 힘들었던 일들에 대해 아주 솔직하고 털털하게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입니다. 한국 친척들은 너무 무례한데 미국 친척들은 너무 친절하고 따뜻하니까 미국 친척들을 더 좋아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29)

 

더러운 말이 꼭 욕하는 것뿐 아니라 덕을 세우지 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라고 합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듣는 자들에게은혜를 끼치라는 것입니다. 말하는 사람이 자기에게 은혜가 된다고 막 하는 게 아니라, 듣는 사람에게 은혜가 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지방 출신 청년들이 명절에 고향 집에 내려가기를 싫어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고 합니다. 가족들과 친척들이 모일 때 친하니까 한 마디씩 툭툭 던지는 말들이 너무 무례하고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너 시집은 언제 가니? 노처녀인데 어떡하니?” “너는 유학씩이나 갔다 와서 아직도 놀고 있니?” “너도 이제 제대로 된 회사 좀 다녀야지 그렇게 작은 데를 다녀서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그래?” 이런 무례한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턱턱 한다는 겁니다.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냥 한 것이지만, 열 명이 한마디씩 하면 열마디가 됩니다. 그래서 가족 친척들이 오랜만에 모이면 오히려 감정이 서로 상해서 헤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만 친해지면 서로에게 너무 무례하게, 서로의 약점을 별 생각 없이 툭툭 말해버리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집사님, 머리 숯이 없어서 가발 쓰신 거죠? 안 어울려요.” “어휴, 권사님, 안 보는 사이에 살이 너무 찌셨네요.” “요즘 사업이 형편없다면서요? 망하게 됐으니 문 닫으셔야겠네요.” 또 어떤 사역을 맡은 사람이 열심히 노력해서 준비를 해놓았는데, 그을 보면서 아무것도 안 한 사람이 와서 에이,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되죠. 이게 뭐에요?”라고 할 때도 있습니다.

 

아무리 사실이라고 해도 전혀 말할 필요가 없는, 굉장히 무례한 말들입니다. 입장을 바꾸어놓고 생각해보면 듣는 사람은 아주 깊은 상처를 받을 수도 있는 말들입니다. 별 생각 없이 툭 던진 말이 상처가 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더라도, 무심코 툭 던진 말이 무례하게 들리고 상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도 자신이 알지 못하는 약점들이 많이 있지만, 남들이 참아주고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자기는 완벽한 것처럼 마구 말을 합니다. 그리고 막 비판을 하고 지적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너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남에게 말하기를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줄 테니 가만히 있거라할 수 있겠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 눈이 잘 보여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 줄 수 있을 것이다.” (7:3-5, )

 

우리는 물론 진리를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무엇을말하느냐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떻게말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혜롭고 부드럽게, 때에 맞게 말해야 합니다. 말의 기술은 상대방을 생각하며 하는 겁니다. 내 편에서 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을 감안해서 말하는 겁니다. 아무리 진리를 말한다고 해도, 사랑으로 말하지 않으면 상처를 주고, 가정이나 교회나 목장을 분열시킬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님을 근심하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0)

 

29절에서 더러운 말을 하지 말고 선한 말을 한 다음에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오겠습니까? 말로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말을 해야겠습니다.

 

 

3)  약자를 배려하기

 

특히 힘이 있다고 약자를 누르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배려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세상에서는 강자에게 약하고 비굴하게 굴면서 약자에게 아주 위세를 떠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약한 사람을 돌봐주는 게 예절입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31-32)

 

요즘 대기업들이 자기들이 가진 위치를 이용해서 하청업체들에게 소위 갑질을 하는 것이 종종 뉴스에 보도되는 것을 봅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기업들이 하청업체에서 물건을 받고 몇 달씩 대금 결제를 안 해주거나 억지로 단가를 낮추기 때문에 작은 회사들이 굉장히 고통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갑질을 하는 회사들 중에 사장이 교회 다니는 경우도 많다는 것입니다. 교회 출석도 잘하고 헌금도 많이 하며, 기독교 신우회가 있는 곳도 많습니다. 그런 것들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은 그 백성이 사업을 할 때에도 약자를 배려하는 크리스천 예절과 섬김을 보여주기를 원하십니다. 정말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3.   크리스천 예절을 지킬 수 있는 방법

 

몇 년 전 뉴저지에 있는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주제로 하여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가지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먼저 신학생들에게 왜 신학을 공부해서 목회자가 되려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목회자가 되려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에게 각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본문을 가지고 짧은 설교를 준비해서 캠퍼스 내의 한 건물 안에 있는 지정된 방으로 가서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그 설교를 하라는 과제를 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심리학자들은 연극배우 한 명을 고용해서 학생들이 가는 길에 누워 있게 했습니다. 아주 가난하고 병약해 보이는 모습으로 누워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들릴 만큼 신음 소리를 내게 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선한 사마리아인 본문으로 설교를 준비한 신학생들이 대부분 중간에서 멈추고 그 병약한 사람을 도와줄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실험에 한 가지 변수가 있었는데, 설교하러 가려는 학생들 중 한 그룹에게는 당신은 늦었습니다. 지금 빨리 가지 않으면 시간에 못 맞출 겁니다.”라고 말했고, 다른 그룹에게는 아직 시간이 넉넉하니까, 지금 출발해서 여유 있게 가도 될 겁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 결과, 늦었으니 빨리 가야 한다고 말해준 신학생들 중에는 겨우 10%만 도중에 병약한 사람을 돕기 위해 멈춰 섰는데, 심지어 어떤 학생들은 길에 누워 있던 그 연극배우를 거의 밟고 넘어갈 정도로 급하게 달려갔다고 합니다. 그에 비해, 시간이 넉넉하다는 말을 듣고 출발한 신학생들은 63%나 멈춰 섰다고 합니다.

 

이 실험을 통해 내린 심리학자들의 결론은, 아무리 남을 돕겠다는 의도로 신학을 공부하고 있는 목회자 후보생들이라고 해도, 또 아무리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로 설교를 준비할 정도로 그 내용을 잘 알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실제 삶의 실천으로 반드시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천을 하느냐 안 하느냐의 차이를 만들어낸 것은 무슨 엄청난 영적인 것이 아니라 시간의 여유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분주함과 조급함이 우리의 신앙을 좀 먹고 따뜻한 사랑을 막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의외로 무슨 엄청나게 큰 것이나 영적이고 신령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분주함과 거기에서 오는 조급함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함은 우리 안의 사랑과 따뜻함을 소멸시켜 버립니다.


아무리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도, 내가 바쁘고 조급하면 마음이 무감각해지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제대로 반응할 여유가 없어집니다저도 실제로 그런 것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바쁘고 급하면 다른 것을 돌아볼 여유가 없습니다. 그럴 때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보면 얼굴이 시커멓게 굳어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자꾸 굳어지고 남들을 향해 무례하게 함부로 대한다고 느껴지면, 다른 것을 할 게 아니라 일단 삶의 속도를 늦추는 것이 필요합니다. 스케줄을 짤 때도 너무 급하기 몰아붙이지 말고 넉넉한 여유를 두어야 합니다. 아무리 동기가 좋아도 여유가 없으면 크리스천 예절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자신의 몸 상태가 안 좋을 때, 또 너무 바쁘고 분주해서 정신적으로 피곤할 때는, 다른 때보다 더욱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 특히 가까운 성도들이나 매일 같이 사는 가족들에게 본의 아니게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부부간에도 한참 피곤하고 짜증이 날 때는 너무 급하게 문제를 대화로 풀려고 하기보다는, 일단 잘 먹고 잘 쉰 다음에 여유를 가지고 기도하면서 대화하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고 지쳐서 예민해진 마음 상태인데 바로 대화를 하면, 평생 후회할 만큼 거친 말들을 쏟아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상태가 안 좋을 때 충동적으로 직장을 바꾸거나, 사업을 그만두거나, 그냥 결혼해버리거나, 홧김에 이혼하거나, 교회를 떠나버리거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지 말아야 될 말들을 마구 뱉어버리곤 합니다. 피곤하고 지친 상태는 시간이 좀 지나면 회복이 되겠지만, 상태가 안 좋았을 때 쏟아 부은 말과 행동은 다시 주워 담을 수가 없는 겁니다. 안 좋은 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남들에게 무례를 범할 수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무례한 말과 행동을 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만 합니다.

 

특히 스케줄이 너무 바쁘고 힘들어서 몸과 마음이 극도로 지쳐 있을 때에는 중요한 일을 결정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럴 때는 되도록 사람들도 많이 만나지 않는 게 좋습니다. 특히 그럴 때는 배우자나 자녀들, 또 가까운 친구들과 대화하는 것조차 조심해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함부로 말하며 무례를 범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는 잠깐 쉬든지, 기분을 전환하면서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고 돌아와서 하는 것이 좋습니다.

 

 

4.   새 시대의 경쟁력

 

2년 전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인 알파고가 한국의 이세돌 9단과의 대국에서 이긴 후, 앞으로 인공지능 때문에 기존의 많은 일자리들이 사라질 거라는 두려움이 번졌습니다. 지금은 더욱 그렇습니다. 요즘 과학계에서 가장 뜨거운 분야가 AI(Artificial Intelligence, 인공지능)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갈수록 오히려 사람을 배려하는 예절이 최고의 경쟁력이 될 것입니다. 수많은 글로벌 기업들의 자문을 지냈으며 포춘(Forture) 매거진 편집장인 제프리 콜빈(Geoffrey Colvin)은 시대의 변화에 너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정말 최고의 인재는 인간성을 가진 인재가 될 것이다. 이전에는 기계 같은 기능을 하는 사람, 정확하고 합리적인 사람이 우수하다고 평가되었는데, 이제 그런 일들은 인공지능이 훨씬 더 잘해낼 것이다. 그렇지만 인공지능에는 휴먼 터치가 없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울어주고, 누가 다치면 내가 아픈 것처럼 함께 아파해주고, 누가 기뻐할 때 함께 등을 두드려주며 웃어줄 수 있는 사람, 그렇게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 앞으로는 가장 뛰어난 인재가 될 것이다.”

 

기계는 사람들과 함께 울어주고 웃어주는 공감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게 프로그래밍을 해서 할 수는 있어도 그건 진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 가장 뛰어난 인재로 평가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미 전 세계의 기업들은 공감할 줄 아는 사람들을 찾고 있습니다.

 

최고의 컨설팅 회사인 맥킨지(McKinsey), 유명한 투자은행인 바클리스 캐피탈(Barclays Capital), 세계적인 제약회사인 화이저(Pfizer) 같은 유명 회사들은 억대 연봉 이상의 임원급 직원들을 구할 때 그 사람에게 공감 능력이 있는가, 즉 다른 사람의 아픔과 기쁨에 공감할 수 있는가를 가장 먼저 본다고 합니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American Express)도 직원을 채용할 때 단순히 일류대학 출신이 아니라 고객과 공감하고 인간관계를 잘하는 사람들을 뽑아서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인공지능은 다른 사람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사람을 배려하는 능력을 대처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가장 인간다운 것이 가장 경쟁력 있는 실력이 되는 시대이고,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공감할 줄 아는 능력이야말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는 최고 인재의 덕목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게 바로 우리가 목장에서 하는 것 아닙니까? 누군가가 힘들어하면 같이 아파해주고 기도해줍니다. 누구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같이 기뻐해줍니다. 이것이 목장에서 훈련이 됩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이제는 정말 크리스천 예절이 경쟁력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따뜻함과 배려심이 몸에 밴 사람들은 어디 가도 환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크리스천 예절의 핵심은 단순히 다른 사람들과 공감하고 따뜻하게 대해주며 배려해주는 정도가 아닙니다. 결국 크리스천 예절의 핵심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11:29, )

 

예수님께서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분을 닮아서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도록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인간적으로 따뜻한 사람이 되자고 하거나 도덕적으로 착한 사람이 되자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셨으니까 우리도 그분을 믿는 사람들로서 그렇게 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에 쉼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을 얻고 평안을 얻습니다. 그런 사람은 누구를 만나도 함께 울 줄 알고 웃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본받아 서로를 배려하고 섬겨주는 크리스천 예절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여 하나님께 쓰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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