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HOME > 설교와칼럼 > 수요예배/특별예배


 

2018425일 수요예배

하나님이 내시는 길을 보라 10

영적 대각성을 통한 승리

(사무엘상 71~14)

 

1.   이스라엘에게 닥친 위기와 고난

 

오늘 본문을 보면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도할 것과, 미스바에서 함께 모여 기도할 것을 선포하는 역사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이 미스바 영적 대각성 집회인데, 이 일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전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1-2)

 

여호와의 궤는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명 돌판이 들어 있는 언약궤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원래는 당시 하나님의 성소가 있던 실로에 있어야 할 언약궤가 왜 이때 기럇여아림에 있게 되었는가? 4장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 배경이 나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강력한 블레셋의 침공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한 번은 블레셋 대군이 쳐들어와서 맞서 싸우러 갔던 이스라엘 군대가 대패하고 4천 명이나 죽습니다(4:2). 그러자 이스라엘 장로들은 실로에 있는 언약궤를 가져와 두 번째 전투에서 이스라엘 군대의 가장 앞에 세우기로 결정합니다(3). 그들은 여호수아 때 하나님의 궤를 앞세우고 나아가 요단강을 건넜고 여리고를 무너뜨렸던 것을 기억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언약궤를 앞세우고 싸웠는데도 이스라엘 군대는 처음보다 더 비참하게 패해서, 이번에는 무려 3만 명이 죽임을 당합니다(10). 게다가 수치스럽게도 블레셋 군대에게 언약궤마저 빼앗기고 맙니다(11). 이때 이스라엘은 큰 충격을 받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메고 나갔는데도 패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예배와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들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려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지도 않은 채 뒤로는 우상숭배를 더 열심히 하고 있고, 죄를 회개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급하니까 살기 위한 수단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언약궤를 마치 부적처럼 미신적으로 이용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함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린 백성에게 하나님의 승리와 보호하심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도 거룩과 순결이 없는 자의 기도나 평소에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고 자기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만 하려는 사람의 예배를 받아주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위기상황에서 기도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동기가 순수해야 하고, 평소에 하나님과 동행하며 기도와 말씀을 통한 교제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평소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쌓인 영적 능력을 가지고 영적전쟁에 나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백전백패입니다.

 

이 전투에서 전사한 3만 명 중에 당시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던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11). 엘리는 아들들이 죽었다는 소식과 언약궤를 빼앗겨 이스라엘 군대가 수치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넘어져 목이 부러져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18). 엘리의 아들들은 도덕적으로 너무 타락하여 영적 권위와 능력을 잃어버린 지 오래 되었고, 엘리 역시 영적인 눈이 어두워져 그들을 제대로 인도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타락한 그들이 아니라 어린 사무엘에게 임하고 있었습니다.

 

언약궤를 빼앗긴 것과 대제사장 엘리와 아들들의 죽음은 영적 리더십의 공백을 가져와 이스라엘을 큰 혼란과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궤의 영광은 하나님 스스로 지키셨습니다. 5장에 보면, 언약궤를 빼앗아간 블레셋 군대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자기들의 신인 다곤의 신전에 언약궤를 갖다 놓습니다. 고대에는 전쟁에서의 승리를 자신들의 신이 상대 민족의 신을 이기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패배한 민족의 신상을 가져다 자기들의 신상 앞에 조롱하듯 전시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블레셋은 그렇게 언약궤를 다곤 신전에 가져다 놓았는데 그 다음날 가보니까 오히려 다곤 신상이 언약궤 앞에 넘어져 있었고(3) 바로 놓았지만 그 다음날은 박살이 나 있었습니다(4). 그것을 시작으로 독한 종기의 재앙과(6) 각종 질병이 블레셋 여러 지역을 번져나갔습니다6장에 보면, 언약궤를 빼앗아 가지고 있던 7개월 동안 블레셋은 아주 끔찍한 재난을 겪게 되고, 마침내 언약궤를 블레셋과 접경지대에 있는 벧세메스 지역으로 돌려보내게 됩니다. 마침내 언약궤가 돌아오자 벧세메스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며 나왔는데, 그만 함부로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보다가 많은 사람들이 죽고 말았습니다(6:19).

 

그들은 잠시라도 들어가서 성소를 보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4:20)

 

이 말씀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씀을 제대로 배운지 너무 오래되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잃어버리고 우상숭배에 더 익숙했던 벧세메스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언약궤를 들여다보다가 그 즉시 70(또는 570)이 하나님의 진노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벧세메스의 축제 분위기는 금방 충격과 슬픔으로 가라앉았고, 이에 언약궤를 기럇여아림으로 보내게 된 것입니다(2).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언약궤를 옮길 때까지 실제로는 약 70년 동안 그곳에 보관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20년 동안 있었다고 한 것은 사무엘이 3절에서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기 시작한 때의 시점까지를 계산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궤가 가럇여아림에 20년이나 머물러 있는 동안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사모했다는 말은 몹시 슬퍼했다. 큰소리로 울부짖었다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앞에 자신들의 비참한 모습을 회개하고 울부짖으며 간절히 매달렸다는 말입니다. 언약궤가 기럇여아림에 있는 동안에도 블레셋은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침공했고, 이스라엘은 이제 주님의 궤를 가지고도 블레셋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 앞에 너무나 두렵고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하나님 앞에 살려달라고 부르짖기 시작한 것입니다.

 

 

2.   사무엘의 미스바 영적 대각성 집회

 

이처럼 우리 힘으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위기상황이 오히려 우리를 간절한 기도의 자리로 내몰 때가 많습니다. 위기가 곧 기회입니다.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패하여 블레셋에 법궤를 빼앗기고, 대제사장 엘리와 그 아들들이 죽어 영적 리더십에 공백이 생기고, 빼앗겼던 법궤가 블레셋에 재앙을 안긴 다음 다시 돌아와 20년을 변두리 도시 기럇여아림에 방치되어 있는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은 계속되는 블레셋의 침략 위협에 시달리며 마음이 가난해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고난과 위기는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을 역사의 전면에 세우시는 도구가 됩니다. 어릴 때부터 성소에서 생활하며 하나님의 종이 되는 준비를 해온 사무엘이 이제 20년의 세월이 흘러 백성들 앞에 서서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로 우뚝 서게 됩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3)

 

여기서 돌아온다는 것은 회개하라는 것이고, ‘전심으로마음의 뿌리까지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삶의 전 영역에 걸쳐 철저히 회개할 각오가 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회개를 하려면 제대로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흐트러진 마음을 한데 모으기 위해 민족적 회개운동을 시작했습니다. 회개의 전제조건은 우상을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이 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려면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라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이방 신들은 바알 신을 가리키는데, 바알은 풍요를 상징하는 신입니다. 가나안의 많은 신들 중에서 바알이 최고의 남신으로 힘과 폭력과 풍요의 신인 반면, 아스다롯은 최고의 여신으로 음란의 신입니다. 가나안에서는 보통 이 두 신들을 같이 숭배하여 제사 의식에 성행위가 필수적으로 포함되었는데, 가나안 땅에 들어와 살던 이스라엘 백성 안에 바로 이 두 신들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문화와 음란한 문화가 들어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면 먼저 이 우상들을 제거해야 했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우상을 제거하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 시대에 우리 크리스천들 안에도 돈과 음란의 우상이 너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세상 문화를 두 개로 요약하면 물질문화와 음란문화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깊이 들어와 있는 우상을 이제 성령께서 드러내고 제거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4)

 

여기서 놀랍게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무엘의 말을 따릅니다. 그 동안 숭배했던 바알과 아스다롯이 상당히 매력적인 우상이었습니다. 풍요도 있지만, 성적인 음란함에서 오는 쾌락을 버리기가 힘든 것입니다. 이미 300년이 넘도록 거기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버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지만, 그들은 과감히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정리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그들이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너무 상황이 힘들어서 이런 것들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안 믿었습니까? 안 믿었던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의 문제의 핵심은,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우상도 같이 섬겼다는 데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문제의 핵심도 똑같습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하고 크리스천이라고 하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을 안 믿는 게 아닌데, 문제는 하나님과 세상을 적당히 섞어서 믿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겉으로 섬기는 형식만 취하며 의무감에서 대충 할 때가 많습니다. 믿는 사람이니까 예배에 참석하고 주일을 지키지만, 억지로 합니다. 그런데 우상숭배는 아주 신나고 즐겁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상숭배가 무슨 음란한 짓을 하고 이상한 짓을 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너무 놀랍게도 우리의 신앙생활이 우상숭배가 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만,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로만 하는 신앙생활이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영혼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아가 주님의 복음을 전해서 영혼 구원하여 제자를 만드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너무 분명하지만, 딱 내가 원하는 만큼만 하는 겁니다. 그것 이상은 안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고 뭐고, 내가 원하는 식의 신앙생활만 합니다. 우리가 예배에 참석하고 기도회에 온다든지 여러 모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저 단순히 예배 모임에 참석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정말 제대로 예배를 드린 것을 가지고 나아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웃 사랑을 전혀 실천하지 않고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합니다. 이 시대에 그런 교인들이 대다수입니다. 예배 참석 중심으로만 하면서 신앙생활을 잘하는 줄로 착각을 합니다. 딱 거기까지만 합니다.

 

바로 그런 태도가 우상숭배와 같은 태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상의 가장 큰 특징은 한 곳에만 있는 겁니다. 만들어서 한 곳에 놓아두고 자기 필요할 때만 와서 하는 게 우상숭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교회당에만 가둬놓고 하나님을 예배한 다음, 나머지 삶의 부분들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태도이기 때문에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이중적인 태도는 우리의 영성을 갉아먹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너무 분명한데도 딱 내가 좋아하는 데까지만 하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주인입니까? 오늘 처음 부른 곡이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을 주님으로 모신다는 것인데, 사실은 내가 주인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싫으면 안 하고 내가 원하면 합니다. 내가 가기 싫으면 안 가고, 내가 가고 싶으면 갑니다. 누가 주인입니까? 내가 주인인 겁니다. 그런데도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착각을 합니다.

 

바로 그런 것이 다름 아닌 혼합주의 신앙입니다. 무슨 이상한 배교적인 것과 합친 게 혼합주의가 아니라, 요즘은 세상과 하나님을 섞어서 적당히 믿는 것이 혼합주의입니다. 그렇게 되면 영적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교회를 다녀도, 아무리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집에 십자가 장식을 해도 능력이 없습니다.

 

언약궤를 들고 나가도 전쟁에서 졌습니다. 부적처럼 들고 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었지만, 경건의 능력은 없었습니다. 영성이 둔해져서 그것도 모르고 있다가, 블레셋에게 비참하게 패한 뒤에야 자기들이 형편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사실은 블레셋이 강했던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영성이 형편없어진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마귀가 갑자기 강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약해진 것입니다. 마귀의 세력은 옛날부터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도 옛날부터 똑같이 강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성이 약해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혼합주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내 방식대로 우상도 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못하고 말씀을 읽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시간이 없고 바쁘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그 바쁜 시간에 내가 좋아하는 것은 다 합니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은 다 갑니다. 사실 시간은 충분합니다. 그런데 그 시간에 다른 것들을 하고 있기 때문에 모자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교회에만 가둬놓고 나머지는 내 마음대로 알아서 하니까 약해졌습니다. 역시 문제는 혼합주의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다른 것도 섬기는 것,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만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계속 살 수 없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결단하고 사무엘의 말을 따라 바알과 아스다롯 우상들을 제거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결단해야 합니다. 그냥 이대로 영적 능력을 잃어버린 채 무기력하게 살기 싫다면, 우리 안의 우상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겨서는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쓰레기를 치우지 않고 바퀴벌레를 없애겠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쓰레기가 있는 한 바퀴벌레는 계속 생깁니다. 쓰레기를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쓰레기를 버리듯 우상을 버려야 합니다. 힘들어도 그래야 합니다. 그때부터 엄청난 자유가 임하고 능력이 회복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들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엎드리니까 예배가 달라졌습니다. 그러자 사무엘은 이제 민족적 대각성 집회의 때가 되었다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백성들을 미스바로 모이게 하여 영적 대부흥 운동의 시작이 되는 기도 집회를 시작합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5-6)

 

사무엘이 먼저 기도의 맨 앞자리에 서는 것을 봅니다. 영적 부흥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영적 지도자들의 중보기도가 먼저 있어야 합니다. 목사로서 저는 책임을 통감합니다. 우리 교회가 영적으로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먼저 담임목사인 저의 책임입니다. 제가 먼저 기도해야만 합니다. 또한 영적 리더인 장로님들이 먼저 기도하셔야만 합니다. 가정에서는 가장이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영적인 불을 붙이는 불쏘시개의 역할을 하는 겁니다. 목장이 진정한 부흥을 맛보려면 목자가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 없이 섬기기만 해서도 안 되고, 기도했으면 몸을 움직여서 또 섬겨야 합니다. 눈물의 기도 위에서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기도는 가장 먼저 금식과 회개의 기도였습니다. 우상을 제거하면서 그들은 처절한 심정으로 죄를 회개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하였습니다.” 특히 그들은 회개하면서 종일 금식을 했는데, 기도가 하나님을 붙잡는 것이라면, 금식은 땅의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먹고 마실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의지하던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금식을 하면 힘이 빠지고 겸손해지면,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을 더욱 뜨거운 간절함으로 붙잡게 됩니다. 사무엘의 인도에 따라,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미스바에서 다 같이 힘을 모아 금식하고 회개하며 뜨겁게 기도했습니다.

 

 

3.   기도를 통해 거둔 승리

 

미스바 영적 대각성 기도집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바꾸셔서 오합지졸을 강한 군대로 변화시키셨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다음에 일어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그들의 방백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온지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듣고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하니” (7-8)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도하려고 미스바에 모인 것인데, 블레셋은 그것을 정치적, 군사적 모임이라고 잘못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왔습니다. 그때 전혀 준비가 안 되어 있던 이스라엘 백성은 사무엘에게 자기들을 위해 하나님께 쉬지 말고 기도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것을 보면 놀랍습니다. 이들이 변한 겁니다. 이제 그들은 오직 기도만이 모든 위기를 뚫고 나갈 수 있는 해결책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 (9-10)

 

사무엘은 백성들의 요청대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고, 즉시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 응답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승리를 미리 알려주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사무엘은 어린 양을 잡아 번제를 드렸습니다. 사무엘이 예배를 드릴 때 블레셋의 대군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때 사무엘은 나가서 싸우지 않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큰 우레를 발하셔서 블레셋 진영을 순식간에 뒤흔드시고 승리를 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도 영적전쟁에서 승리하는 비결이 바로 기도와 예배입니다. 어떤 어려운 문제가 발생했을 때, 특히 사방에서 공격을 당하는 것 같은 상황이 벌어질 때, 솔직히 우리가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을 해결할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해결 방법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특히 사람에게 공격을 당하면 나가서 맞서 싸우지 말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엎드려 기도할 때 하나님이 해결해주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 벧갈 아래에 이르기까지 쳤더라.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11-12)

 

수백 년 동안 블레셋의 위협 아래 항상 벌벌 떨던 이스라엘 백성이 완전히 달라져서 강한 군대가 되어 블레셋 사람들을 격파하고 추격하여 국경 너머까지 몰아붙였습니다. 그들은 기적의 승리를 맛보았고, 너무나 감격하여 승리의 돌탑을 세우며 선포했습니다. “에벤에셀!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이전에 블레셋에 패하여 언약궤까지 빼앗겼던 수치와 패배가 이제는 놀라운 승리로 바뀌었습니다. 미스바의 영적 대각성 운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벤에셀의 역전은 바로 미스바의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골방 기도가 뒷받침될 때 보이는 승리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13-14)

 

한 번만 이긴 게 아니라 블레셋 사람들이 다시는 이스라엘에 들어오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라는 말씀을 주목해 보십시오. 성경에 이런 표현들이 여러 번 나옵니다. “모세가 살아 있는 동안에...”, “여호수아가 살아 있는 동안에...” 그 말은 그들이 죽은 후에 다시 타락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도 사무엘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블레셋이 쳐들어오지도 못하고 이스라엘이 괜찮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무엘이 간 다음에는 이스라엘이 무너졌다는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영적 지도자가 살아 있는 한 어둠의 세력은 그 지역에 들어오지 못하고 그 지도자가 이끄는 백성들을 감히 공격해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리더와 함께 나아간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영적 리더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승리와 부흥의 영광을 주십니다.

 

그래서 걱정도 되고 또 이것이 저의 기도제목입니다. 이런 리더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여기 있는 분들 모두 영적 리더입니다. 교회에서, 목장에서, 가정에서 다 리더입니다. 리더로서 우리의 소망이 바로 이것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마귀의 세력이 감히 우리 가정을, 우리 목장을, 우리 교회를 틈타지 못한다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 되고 기도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님들이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승리와 부흥의 영광을 맛보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바로 기도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우리 각자는 바로 이런 비전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어둠의 세력이 틈타지 못하는 역사를 일으키는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내 가족이 안전하고, 나 때문에 목장식구들이 안전하고, 나 때문에 교회 성도들이 안전하고, 나 때문에 직장 동료들이 안전하고, 나 때문에 내 사업체 손님이 안전하고, 나 때문에 주변이 변화되고 세상이 바뀌는 그런 사람이 되는 비전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기도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기도의 사람이 될 때 가능합니다.

 

 

4.   아름다운 마무리

 

나중에 백성들이 왕을 요구하면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고 물러나는 사무엘이 백성들을 영적으로 다시 한 번 각성시키는 설교를 하는데, 그 설교의 결론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들을 기꺼이 자기의 백성으로 삼아 도와 주시기로 하셨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자기의 귀한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자기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나는 당신들이 잘 되도록 기도할 것입니다. 내가 기도하는 일을 그친다면, 그것은 내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나는, 당신들이 가장 선하고 가장 바른길로 가도록 가르치겠습니다. 당신들은 주님만을 두려워하며, 마음을 다 바쳐서 진실하게 그분만을 섬기십시오. 주님께서 당신들을 생각하시고 얼마나 놀라운 일들을 하셨는가를 기억하십시오.” (삼상 12:22-24, )

 

다른 사람의 영혼을 책임지는 영적 리더라면 사무엘의 말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단순히 살인이나 강도질 같은 것만 죄가 아닙니다. 영적 책임을 맡은 사람이 기도를 쉬는 것, 특히 자신에게 맡겨진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쉬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바른길로 인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안 하면서 바른길로 인도하겠다고 가르치려 드니까 잘 안 되는 겁니다. 그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면서 바른길을 보일 때 그리로 따라오게 됩니다.

 

그런데 기도를 쉬지 않는 것은 사실 자기 자신에게 엄청난 유익이 되는 일입니다. 우리의 영성을 뜨겁게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 바로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바로 그 비밀을 알고 있었던 겁니다. 백성들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할 때 그것이 자신에게 큰 유익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기도하며 나아간 것입니다.

 

우리가 염려와 근심에서 자유할 수 있는 비결도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는 시간을 부담스러워하는데 어떻게 기도가 부담이 안 될 수 있습니까? 어차피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그 시간에 뭘 합니까? 염려하고 걱정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 시간과 염려 시간은 반비례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면 걱정을 안 하게 되고, 기도를 안 하면 걱정만 하게 됩니다. 특히 마귀의 역사를 무력화시키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삶의 틈새를 메워 줍니다.

 

기도를 멈추면 안 되는 것은, 영적 흐름이 한 번 끊기면 회복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어제의 부흥에 취해서 오늘 잠깐 기도의 끈을 놓으면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강력한 여리고 성을 가볍게 무너뜨리고 나서 상대도 안 될 정도로 약한 아이 성에서 비참한 패배를 당한 것이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100년의 영광을 가진 교회라도 한 달만 기도하지 않으면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입니다. 두 주 전 목회자 컨퍼런스 때 열심히 섬겨서 귀한 기쁨과 감사를 맛보았지만, 그것에 취해서 마냥 마음을 놓아버리고 기도하지 않으면 곧바로 무너집니다.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에 큰 일이 생길 때 갑자기 기도할 것이 아니라, 평소에 꾸준히 기도하며 영적 실력을 쌓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잘되고 있을 때, 기도할 만한 특별한 기도제목이 없을 때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상사태가 벌어질 때 자신과 가정과 목장과 교회를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중보기도실 사역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평소에 꾸준히 돌아가며 한 주에 한 시간씩 나와 기도하시는 중보기도자들이 많이 계신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축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평소에 기도하고 있으니 얼마나 귀합니까? 또 주일예배를 위한 중보기도 모임도 그래서 중요합니다. 더 많이 참여하시면 좋겠습니다.

 

사무엘은 태어나기 전부터 어머니 한나의 엄청난 기도 속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평생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엘리가 이스라엘을 이끌던 시대는 영적으로 너무나 암울했던 침체의 시대였습니다. 엘리는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무엘이 사사로, 선지자로 이스라엘을 이끌던 시대는 기도의 시대였습니다. 미스바에서 그가 피워 올린 기도의 불길이 영적인 패배와 침체에 빠져 있던 이스라엘 민족을 살려냈습니다. 그리고 부흥의 시대가 오게 했습니다.

 

결국 교회를 지키고 나라와 민족을 지키는 것은 앞에서 설치는 사람들이 아니라, 골방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권력을 가지고 앞에서 이끄는 사람이 나라를 이끌고 세계를 움직이는 것 같아도, 사실은 골방에 숨어서 기도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세계를 이끌어 나가십니다. 영적 전쟁에서 사탄이 두려워하는 존재는 겉으로 드러난 사울 같은 정치 지도자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기도의 골방을 지키는 사무엘 같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다윗은 기도하며 백성을 이끌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었고 위대한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기도하는 부모를 통해 자녀들에게 승리와 복을 내려주실 줄 믿습니다. 그래서 내 자녀를 위한 기도를 하루 빼먹었다면 내 자녀를 위해 그날 부어질 하늘의 복을 내가 끊어버린 것이 됩니다. 바로 그것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하루 기도하지 않으면 마귀가 우리의 자녀들을, 우리의 목장식구들을, 우리의 성도들을 그날 하루 동안 마음 놓고 공격하는 빈틈이 됩니다. 우리는 기도함으로 그런 빈틈이 생기지 않도록 막아야 하겠습니다.

 

이처럼 매일 쉬지 않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가 항상 체험하며, 늘 살아 있는 신앙인으로 힘차게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58 거절의 상처를 싸매주시는 하나님께 나아가라 (눅 10:38-42) - 치유기도 4 (7/18/18) kpccoh 2018.07.19 1391
157 기질과 성격을 영적으로 이해하라 (창 26:12-22) - 치유기도 3 (7/11/18) kpccoh 2018.07.12 2351
156 언어의 치유 (룻 1:1-5) - 치유기도 2 (7/4/18) 이준원 2018.07.06 902
155 "축복의 문을 여는 생각과 행복을 부르는 말을 하라" (창 31:17-35) - 치유기도 1 (6/27/18) kpccoh 2018.06.28 1703
154 "하나님이 내시는 길을 걷는 축복" (사 55:6-13) - 하나님이 내시는 길을 보라 16 (6/20/18) kpccoh 2018.06.21 2766
153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누리는 축복" (창 5:21-24) - 하나님이 내시는 길을 보라 15 (6/13/18) kpccoh 2018.06.14 1912
152 "하나님은 불의한 일을 잊거나 그냥 넘기지 않으신다” (삿 19:1-30) - 홍영락 전도사 (Steve Hong)(6/06/18) kpccoh 2018.06.07 401
151 "죽음 나누기 (Sharing Death)” (고후 1:3-7) - 홍영락 전도사 (Steve Hong)(5/30/18) kpccoh 2018.05.31 418
150 "찬양으로 승리를 선포하라" (역하 20:13-30) - 하나님이 내시는 길을 보라 14 (5/23/18) kpccoh 2018.05.24 3318
149 "크리스천 예절 지키기" (엡 4:29-32) - 하나님이 내시는 길을 보라 13 (5/16/18) kpccoh 2018.05.17 1946
148 "나라와 민족을 위해 드리는 기도" (신 4:1-8) - 하나님이 내시는 길을 보라 12 (5/09/18) kpccoh 2018.05.10 2549
147 "비상 기도 네트워크 활용하기" (시 20:1-9) - 하나님이 내시는 길을 보라 11 (5/02/18) kpccoh 2018.05.03 1251
» "영적 대각성을 통한 승리" (삼상 7:1-14) - 하나님이 내시는 길을 보라 10 (4/25/18) kpccoh 2018.04.26 4466
145 "새벽을 깨우며 기도하는 사람" (막 1:32-39) - 하나님이 내시는 길을 보라 9 (4/18/18) kpccoh 2018.04.19 1499
144 "십자가 주변에 있던 사람들" (눅 23:32-49) - 성금요일 메시지 (3/30/18) kpccoh 2018.03.31 1484
143 "지속적인 기도의 능력" (렘 29:11-14) - 하나님이 내시는 길을 보라 8 (3/21/18) kpccoh 2018.03.22 7071
142 "거룩함과 순결함으로 기도하라" (벧전 1:13-17) - 하나님이 내시는 길을 보라 7 (3/14/18) kpccoh 2018.03.15 2056
141 "기도의 영을 부어주소서" (스가랴 12장 10절) - 하나님이 내시는 길을 보라 6 (3/07/18) kpccoh 2018.03.08 3512
140 "고통을 낭비하지 않고 축복으로 만드는 비결" (시편 119편:65-88) - 하나님이 내시는 길을 보라 5 (2/28/18) kpccoh 2018.03.01 2073
139 말씀이신 메시아 예수 (요 1: 1-3, 2:11) - 일일선교집회 (2/21/18) kpccoh 2018.02.22 333


9480 S. Old State Rd, Lewis Center, OH 43035 / Tel: (614) 433-7155 / E-mail: kpccoh@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