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HOME > 설교와칼럼 > 수요예배/특별예배
2017년 8월 2일 수요예배
✦ 예수신경 21 ✦
예수신경으로 살아가기(3)
“예수께 항복하기”
(마가복음 8장 27~38절)
1. 예수와 복종
예수님의 제자는 항복의 백기를 높이 들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항복의 백기’라는 것이 뭔가 하면 바로 기도입니다. 항복이라는 것은 영어로 surrender, 즉 나를 내어드린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매일 들어 올리는 간단한 백기 기도가 있는데, 바로 ‘주기도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10)
예수신경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제자의 의무라고 가르쳐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이 어떤 일에 대해 제대로 판단하기가 힘들 때에만 다른 사람을 따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그것이 이어져서, 자기가 다 안다고 하며 마음대로 하다가 일이 안 될 때에만 주님께 나옵니다.
그런 경향을 가진 우리이지만, 예수님의 제자로서 입술의 기도를 통해 항복의 백기를 높이 들고 예수님께 길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면, 우리는 자신이 길을 잃어 방향 안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기도한다는 말은 주님께 항복한다는 말이고, 그 항복이라는 말은 ‘내가 잘 모릅니다. 주님이 인도해주셔야 합니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한마디로 말해, 예수님의 제자는 항복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 삶은 종종 마음에 아픔을 주기도 하지만, 제자는 예수님께 항복하는 데에서 오는 아픔이야말로 가장 좋은 종류의 아픔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바 아버지와 자신의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편안한 꽃길이 아니라 제자들을 위한 죽음의 길로 나아가도록 만들었습니다.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그들이 하나님과 예수님과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그 사랑하는 방법을 정해줍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34절)
이 말씀은 주님의 제자가 무엇인지, 제자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역사적 맥락으로 볼 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순교를 암시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해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와 비슷한 말씀을 하신 것을 주의 깊게 보면, 예수님은 삶의 방향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삶은 순교를 동반하든 동반하지 않든, 한마디로 ‘복종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이 복종의 삶은 역설적으로 복된 삶입니다. 복종하면 나를 옭아매고 불편하게 하는 게 아니라 복된 삶이 됩니다. 그런데 복된 삶인 동시에 유일하게 유익한 아픔을 주는 삶입니다.
불순종하는 삶을 살면 자유롭게 살 것 같지만 오히려 얽매이고 괴로운 삶을 살게 되고 상처를 계속 받게 됩니다. 하지만 복종하는 삶을 살면 아프긴 아픈데 유일하게 유익을 주는 아픔을 경험하는 복된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유명한 영국의 목회자이자 학자인 존 스토트(John Stott)는 그의 책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오직 섬김을 통해서만 자유를 경험할 수 있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려야만,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자기중심성에 대해 죽어야만 살 수 있다.”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막 12:29-31)
이 예수신경을 보시면 마음(heart)과 목숨(soul)과 뜻(mind)과 힘(strength)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전인격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전적인 복종, 곧 인격적 복종(마음과 목숨을 다해), 정신적 또는 지적인 복종(뜻을 다해), 육체적 복종(힘을 다해)을 명령하십니다. 우리 삶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명령하신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따라야 합니다.
2. 복종의 삶
1) 인격적(마음과 목숨)으로 복종하기
일단 복종은 마음(heart)과 목숨(soul)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복종시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그 사람의 진정한 자아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적인 자아는 마치 자동차 안에 있는 엔진처럼, 단순히 우리 존재의 일부가 아닙니다. 자동차에 엔진이 없으면 전혀 갈 수 없는 것처럼, 자아는 우리 존재의 핵심입니다. 내적 자아는 가장 고상하고 가장 인격적이며, 우리의 생명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과 목숨(자아)를 복종시킨다는 것을 오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화씨 100도가 넘는 습한 무더위 속에서 에어컨도 없이 솜털 옷을 입은 채, 사람만 한 크기의 모기들을 때려잡는 것이 복종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종은 그렇게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복종과는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복종은 모든 참된 사랑이 품고 있는 비밀이고, 예수님을 따르면서 우리의 마음과 목숨을 하나님께 복종시키는 것은 우리의 성품이 원래 계획하셨던 그런 성품이 되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첫 인류의 죄 이후에 우리는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셨던 삶이 아닌, 잘못된 삶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마음을 복종시키는 것은 그랬던 우리의 정체성이 변화되고 바로잡히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본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신실한 사람들이었던 요셉과 마리아를 통해 그 가정에서 자라면서 예수님은 복종이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성경은, 복종과 자기 정체성의 변화가 서로 관련되어 있다고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그러니까 복종을 할 때 우리의 삶이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불순종의 삶을 살 때는 변화가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은 한 번으로 끝나는 행동이 아니라, 평생에 걸친 사랑의 태도입니다.
<확신의 삶> 교재에 그것이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구원에는 3가지 단계가 있는데, 받은 구원(영), 받는 구원(혼/지정의), 받을 구원(몸)입니다. 사실은 단계라기보다는 세 가지가 모두 함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순간 우리는 즉시 구원을 받고(받은 구원) 영원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약속을 가진 사람이 됩니다(받을 구원). 그런데 이 두 가지는 모두 단번에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순간 우리의 영이 구원을 받았고,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또는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순간 우리의 몸이 변화를 받아 새로운 몸으로 천국에 들어갑니다.
반면, 그 중간 과정인 받는 구원은 우리의 혼의 구원이며, 즉 지정의의 구원인데, 이것은 과정입니다. 매일 주님과 동행하면서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을 예수님께서 강조하십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 9:23)
예수님의 제자는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 뜻대로만 하려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 아닌데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강력히 끝까지 고집하는 것이 ‘정욕’이라고 주일날 말씀드렸습니다. 제자는 바로 그런 정욕으로 사는 삶을 포기하고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니까 한 번 잘했으니까 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한 번 뜨겁게 은혜 받았다고 되는 게 아니라, 매일 매순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주님을 따르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입니다. 자기가 뭘 잘못해놓고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자기 십자가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의 뜻을 따르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자기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제대로 따르다 보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뭔가 하면, 주변 사람들 특히 사랑하는 사람들, 가까운 사람들, 특히 가족이 나를 잘 이해해주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주님을 그렇게 따르는 나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고난입니다. 열심히 하면 뭐라고 합니까? 적당히 하라고 합니다.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데 왜 유난을 떠느냐고 합니다.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까?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유난을 떠는 것입니까? 가정교회도 그런 오해를 많이 받았습니다. 믿는 사람은 안 맏고 안 믿는 사람만 받겠다는 게 아닌데, 오해를 받았습니다. 주님의 명령대로 정말 안 믿는 분들을 믿게 하는 데 초점을 맞추다 보니까 오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남들도 다 하는 식으로 적당히 하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최소한만 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제자가 아닙니다. 편안하게 안주하며 취미활동처럼 하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그렇게 살면 어떻게 된다고 합니까?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5절)
적용해보면, 자기 편한 대로 살고 자기 위주로 적당히 살면 목숨을 잃어버리고, 오히려 주님과 복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괴로운 삶을 살면 구원하리라는 것입니다. 사실 요즘 수많은 이 땅의 교인들이 자기를 부인하는 게 아니라 자기를 주장하며 삽니다.
주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머리로는 다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 가서 제자를 만들라는 것, 영혼 구원해서 제자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다 압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정욕으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로 넘친 교회가 고린도 교회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뭐라고 합니까?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고전 3:1-3)
고린도전서 1장을 보면 사실 고린도 교회는 엄청난 사람들로 가득한 교회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들 때문에 늘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으ᅟᅮᆫ 기독교 신앙에 대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변증을 너무 잘하고, 성경 지식도 많았습니다. 전도도 너무 잘해서 사람들을 주님께로 계속 데려왔습니다. 은사도 넘쳐서 오죽하면 12장, 14장을 은사장이라고 하겠습니까? 각종 방언과 통변과 예언과 치유와 능력과 지식과 지혜 등등, 은사가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그뿐입니까? 주님의 재림을 간절히 소망하며 기다리는 재림 신앙까지 강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정말 대단한 크리스천들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들을 향한 바울의 평가는 뭡니까? 어린 아이들이고 육신에 속한 자라는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그런 대단한 신앙인들에게 그렇게 말합니까? 그것은 바로 그들 속에 시기와 분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하면서 늘 갈라져서 싸우고 다투었습니다. 왜 싸웁니까? 자기 정욕대로 주장하니까 그렇습니다. 각 사람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주장하니 시기하고 갈라져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싸운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미성숙하다는 것입니다. 어른이 아니라 어린 아이이고, 성령 충만한 사람이 아니라 육신에 속한 자입니다. 바울이 안타깝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교회가 크고 사람이 많아도, 그런 사람들로만 가득하다면 정말 불행한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계속 싸움만 벌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큰 교회들이 많이 싸웁니다. 영적 어린아이들이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싸우는 게 교회생활이 됩니다. 실제로 그런 교회를 경험해보았고 또 많이 보았기 때문에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싸웁니까? 영적 어린아이들이 직분을 맡아서 다스리니까 그렇습니다. 아이들은 잘 싸웁니다. 영적으로 어린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 되고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추구하며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많은 교인들에게 한 가지 더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고난, 즉 자기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는 않고, 그저 편안한 신앙생활, 자기만족을 위한 교회생활을 주로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를 가면 가장 자기를 편안하게 해주며 편안하게 다닐 수 있는 교회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성장하지 못합니다. 그래서는 주님의 제자가 되지 못합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36-38절)
신앙생활을 적당히 하고 세상을 따라가면 온 천하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굉장히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고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아무리 성공했어도 안타까운 인생, 부끄러운 인생일 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중에도 혹시 어디로 이사를 가서 교회를 찾게 되면, 그 지역에서 가장 큰 교회를 찾아가지 마시고, 오히려 아주 작은 교회, 힘들지만 섬길 수 있는 교회를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설교가 좋으면 물론 좋지만, 설교가 좋으면 나 자신에게 더 부담이 됩니다. 설교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데, 그대로 안 살면 주님이 책임을 물으십니다. 아주 좋은 교회에서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했다면, 그 좋은 데서 얼마나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는지 주님이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훈련을 받으신 분이라면, 오히려 힘든 교회, 섬길 사람이 별로 없는 교회, 어려운 교회를 가서 섬기면 거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힘들고 고난을 당해도,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매순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그런 것이 진짜 신앙생활입니다.
2) 정신적(뜻)으로 복종하기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거룩한 사랑, 곧 온전한 사랑이며, 그 안에는 마음과 목숨뿐 아니라 뜻, 즉 생각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자기 마음을 복종시키는 일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31-32절)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한 것을 들으신 후, 메시아로서 예루살렘에 가서 죽으시고 또 분명히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이 돌아가신다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주님의 뜻은 죽고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그것이 베드로의 정욕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옆으로 끌고 가서 삿대질하며 막 야단을 쳤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의 핵심이 무슨 뜻인를 잘 보여줍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33절)
베드로가 사탄이라는 게 아니라, 베드로가 사탄의 꼬임에 넘어가 사탄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 즉 사탄이 좋아하는 일을 베드로가 주장하고 있다는 겁니다. 자기 정욕으로 예수님에게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종류의 뜻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시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지성을 사용해서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마음이고, 정신적으로 예수님께 복종하는 마음이며, 내가 정식적으로 다 알지 못하여 예수님을 의지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마음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비난했을 때 그가 몰랐던 것은,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더 나아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예수님의 십자가, 즉 죽임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러한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반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예수님께 정신적으로 복종하는 제자는 지성으로도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정신적으로 복종할 수 있습니까? 먼저, 우리가 자신의 마음으로 이루기를 바라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지혜’라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인데,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은 지혜에 집중합니다.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에 집중합니다. 그런데 지혜는 언제 시작됩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할 때 시작됩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지혜를 얻을 수 있는데, 잘 알려진 방법 중 하나는 하나님에 대해 배우고 그분의 음성을 듣겠다는 태도를 가지고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이 되는 또 다른 방법은 교회의 역사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성경과 더불어 교회사 책을 읽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1세기 말까지의 이야기이고, 그 후의 이야기는 역사를 봐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사회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신문이나 정기 간행물들을 읽고, 우리 시대의 정치적인 쟁점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현재 유행하는 견해가 무엇인지도 파악해보고, 너무 흥미 위주의 기사만 읽을 것이 아니라, 조금 어렵더라도 사상가들이나 학자들의 사설 또는 강의를 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정신적, 지적인 면에서의 복종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생각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나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지 못합니다. 이것도 역시 자기 부인입니다. 자기가 지식이 많다거나 경험이 많기 때문에 다 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겸손히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3) 육체적(힘)으로 복종하기
예수신경은 또한 우리가 “우리의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이 ‘힘’이라는 말은 육체적인 힘과 물리적인 자원 모두를 사용하는 것을 가리키는 유대인들의 표현법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육체적인 것의 의미를 분명히 압니다. 몸은 영적인 삶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표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이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몸과 영혼이 서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우리의 몸을 복종시켜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사람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서 그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힌다...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지,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뱃속으로 들어가서 뒤로 나가기 때문이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나쁜 생각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데, 곧 음행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의와 사기와 방탕과 악한 시선과 모독과 교만과 어리석음이다. 이런 악한 것이 모두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힌다.” (막 7:15-16, 19-23, 새)
인간은 영혼을 움직여 몸을 사용하지만, 이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내면을 잘 훈련하는 것이 외적인 면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자신을 온전히 복종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비타민이나 그 외에 좋다는 것들을 얼마나 많이 먹습니까? 몸에 좋다면 다 먹습니다. 우리가 건강을 위해서 먹기는 하지만, 사실 내면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안 죽으려고’ 먹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로장생에 대한 추구를 포기함으로써 우리의 몸을 복종시킵니다. 우리는 죽는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자꾸 안 죽으려고 애쓰지 말고, 주어진 시간을 잘 쓰라는 것입니다.
삶의 매순간 예수신경으로 사는 것을 배우면서 현대 문화의 젊음지상주의를 배격해야 합니다. 다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젊게 보이려고 얼마나 노력합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은 나이가 들었는데도 젊음을 유지하려고 하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와 물질을 쓸 게 아니라, 나는 죽는 존재이고 나의 인생은 유한하며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매 순간 어떻게 하면 내 인생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지를 생각하며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몸을 잘 돌보아야 합니다. 아무렇게나 몸을 굴리면 안 됩니다. 그런데 육체적인 건강을 돌보면서 그 목적을 잘 알아야 합니다. 건강의 목적은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헛된 것을 갈망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몸을 복종시킬 수 있습니다.
[나가는 말]
예수님께 인격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복종하라는 그분의 부르심은, 실제로 복종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온전한 표현인 것입니다. 복종은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복종을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매일 드리는 항복의 백기인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는, 매일 그분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삶 속에서 실천하겠다고 결단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헌신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은 이웃을 위해 내가 원하는 것, 아까운 것을 포기하거나 불편한 것이 아니라, 그것도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헌신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사는 사람을 너무나 기뻐하시며, 그런 사람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그러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 쓰임 받는 고귀한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