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HOME > 설교와칼럼 > 수요예배/특별예배
2017년 6월 28일 수요예배
✦ 예수신경 19 ✦
예수신경으로 살아가기(1)
“예수를 믿는다는 것”
(마가복음 7장 24~30절)
예수신경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1. 믿음은 관계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의 목표는 완벽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관계입니다.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s) 중 한 명이었고 우리에게는 100달러짜리 지폐의 인물로도 익숙한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바로 이 ‘완벽함’과 ‘관계’를 혼동한 대표적인 사람이기도 합니다.
프랭클린은 13가지 덕목을 선정한 다음, 일주일에 하나씩 자기 것으로 만들면 충분히 자기 자신을 통제하는 일이 가능할 것이고 완벽함에 가까워질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그 일을 시작했습니다. 프랭클린이 선정한 13가지 덕목은 이런 것들입니다.
- '절제, 침묵, 질서, 결단, 절약, 근면, 성실, 정의, 중용, 청결, 평정, 정절, 겸손'
그는 매일 저녁 일기장에 자기를 평가하면서, 그날의 과제를 실패하면 굵은 점을 찍어두었는데, 그 덕목을 이루기 위해 힘들게 노력한 끝에 마침내 결론적으로 이렇게 시인했습니다.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나 자신이 훨씬 더 단점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랐다.”
이처럼 완벽함을 향해 나아가는 도덕성의 과정을 공식으로 만들고 자신의 도덕적 삶을 도표에 점으로 표시한다면, 그것은 형식주의가 됩니다. 그리고 마치 야생의 사자를 길들이려는 것과 같이 헛된 시도가 되고 아주 위험합니다. 사실 인간의 마음 안에는 길들이는 것이 불가능한 죄를 범하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러한 성향은 길들일 수 있는 게 아니라, 혁신(renovation)이 필요합니다.
결국 우리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리 자신이 변해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제자도(Discipleship)는 완벽함에 관한 것이 아니라, 관계에 관한 것임을 깨닫고 그 관계를 추구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변하는 일입니다. 결국 선하고 도덕적인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은, 착하게 살려고 스스로 노력하고 수행이나 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관계라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무슨 도덕이나 윤리가 아니라,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제자가 되는 것이 관계와 함께 시작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보통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 훨씬 선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제자가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자기가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스스로 말하는 사람은 상당히 높은 삶의 기준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교회 다니는 사람이 왜 저러나?’ ‘예수 믿는 사람이 왜 저러나?’라고 하는 것은, 안 믿는 분들도 믿는 사람들에 대해 그런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동차에 물고기 표시를 붙여놓고 난폭운전을 하면 ‘저거, 저거, 예수 믿는 사람이 왜 저러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높은 도덕적 기준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겠지만, 사실 예수님은 그러한 생각에 동의하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부분은 ‘믿는 것’입니다. 그런 도덕적인 것은 주님의 눈으로 볼 때, 도덕군자라고 하는 사람이나 형편없는 사람이나 주님의 눈에는 거기서 거기입니다.
저 높은 빌딩에 올라가거나 비행기를 타고 올라가서 저 아래를 보면, 낮은 산이나 높은 산이나 위에서 보면 다 똑같습니다. 아래에서 보면 낮거나 높지만, 위에서 보면 다 똑같습니다. 주님이 보시면 아무리 착하거나 나쁘거나 거기서 거기로 똑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중요시하시는 것은 믿는 것입니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5)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이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최우선적으로 기대하시는 것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과 신뢰야말로 예수님이 원하신 것이며, 이 단어는 완벽함이 아니라 ‘나와 관계를 가지자’라고 하시는 예수님과의 관계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믿음을 이론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지만, 보이지 않는 믿음이 보이는 행동으로 삶 속에 나타날 때 믿음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이해를 시작하기에 아주 좋은 장면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수로보니게 여인을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24절)
예수님은 갈릴리 사람들을 위해 사역하시다가 그들의 요청에서 벗어나 일종의 ‘휴가’를 떠나셨습니다. 그래서 이방 지역인 두로로 가셨는데, 거기서도 사람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온전히 쉬실 수가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거기서 한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오는데, 자기 딸이 귀신에 들려서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가 마을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왔는데, 이것은 사실 예수님의 휴가를 방해한 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성경이 가르쳐주는 믿음으로 들어가는 문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처음에는 그녀를 피하셨습니다. 하지만 여인의 믿음은 결코 그곳에서 떠나려 하지 않았고, 예수님은 여인의 끈질긴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서 그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표현한다면, 이 여인 역시 예수님의 제자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믿는다는 것은 어떤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랑의 차원, 관계의 차원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과 신뢰는 항 같이 가는 것입니다. 예수신경은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을 신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신경은 벤저민 프랭클린이 사용했던 것과 같이 도덕 향상을 위한 리스트를 만드는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프랭클린이 말한 13가지 덕목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을 신뢰하면서 그분과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 관계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덕목대로 살기 시작합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13가지 덕목은 다 좋은 것들이고 주님이 기뻐하실 만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함으로 어떤 경지에 오르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가지며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제자라는 말씀입니다.
2. 믿음과 그 친구들
종종 학창시절에는 열심히 교회를 나가다가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믿음도 졸업했다고 하는 분들을 봅니다. 그러나 믿음에는 졸업이 없습니다. 믿음에는 끝이 없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현재 진행 중인 관계이고, 따라서 단거리경주가 아니라 마라톤과 같습니다. 그런데 관계에는 여러 가지 차원이 존재합니다. 두 사람이 교제를 시작하면 그들은 서로를 정신적, 감정적, 심리적, 영적, 육체적, 재정적으로 알기 시작하며, 그 목록은 계속 이어집니다.
제자와 예수님의 관계 역시 여러 가지 차원이 있으며, 그것을 가리켜 우리는 믿음의 ‘친구들’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믿음에는 적어도 세 가지 요소 혹은 세 명의 변함없는 친구가 있습니다. 세 가지 차원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들 각각은 관계 안에서 항상 존재합니다. 예수신경은 우리에게 전심으로, 모든 것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선포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휴가를 방해한 수로보니게 여인은, 바로 그렇게 모든 것을 다해, 특히 몸과 마음과 정신을 다해 예수님에게 응답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1) 정신: 천국의 진리를 확인하기
영적으로 고통 받고 있던 딸을 가진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에 관한 소문을 듣고는 그분이 자기 딸을 고쳐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5-26절)
이 여인은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예수님에 대해 잘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나 토라(율법)에 관해서도 그렇게 많이 알고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여인은 예수님이 자신의 딸을 고치실 수 있으며, 하나님이 그를 통해 위대한 일을 행하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만일 이 여인이 예수님에 관해 이러한 것들을 믿지 않았다면 왜 이곳에 왔겠습니까? 여기에 오지 않고 그냥 자기 집에 머물면서 딸을 돌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낫게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은 ‘지적인 믿음’을 보여줍니다. 즉 예수님은 자기 딸을 고치실 능력이 있으시다는 것과, 또한 저분은 하나님께서 보내셨고 자기를 도와주실 것이라는 확신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으며 고백하는 교리의 차원입니다. 교리라는 것은 성경에서 말씀해주시는 진리를 정리해놓은 것입니다. 믿음은 교리를 뛰어넘는 것이지만, 믿음은 교리를 분명히 포함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에는 뭘 믿는 것인지 그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진리를 믿는 것입니다. 가짜를 믿는 게 아니라 진리를 믿습니다. 곧 아바 아버지께서 성령의 능력을 통해 예수를 죽음에서 부활시키셨다는 진리를 믿습니다.
이 모든 내용을 수로보니게 여인이 상세하게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녀는 바른 방향을 잡았고, 그래서 예수님이 보내시는 능력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요즘 TV를 볼 때 인공위성을 통해서 볼 때 접시를 다는데, 보통 남쪽에 달라고 합니다. 그렇게 방향을 잘 잡아야 수신이 잘되어 전파가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그렇게 방향을 잘 잡아서 예수님의 신호를 잘 잡았습니다.
결국 이 여인은 하나님 나라가 이 예수 안에서, 그리고 예수를 통해 지금 역사하고 있음을 믿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이 보내시는 신호를 잘 잡지 못했지만 이 여인은 방향을 잘 잡아서 신호를 잡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예수님께 나아갔고, 다가갔고, 함께 시간을 보냈으며, 그분의 임재를 갈망했습니다.
예수님과 동시대 인물들 중 샴마이(Shammai)라는 이름의 위대한 랍비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유대교로 개종할 가능성이 있는 한 사람이 샴마이에게 찾아와, 자기가 한 발로 서 있을 동안 토라 전체를 요약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말이 안 되는 요구입니다. 이에 샴마이는 그 이방인에게 바로 퇴짜를 놓았습니다.
반면, 샴마이 학파와 쌍벽을 이루던 힐렐(Hillel) 학파의 수장인 랍비 힐렐은, 그를 불러서 그에게 요약된 교리를 가르침으로써 그를 유대교로 개종시켰습니다. 힐렐이 요약한 교리는 이것입니다. “네가 싫어하는 것을 네 이웃에게 행하지 말라.” 이것을 예수님은 소위 ‘황금률’(마 7:12)이라는 것에서 긍정적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그것이 율법 전체를 요약한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믿음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이 신앙고백은 우리가 예수신경을 암송하는 순간,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정해줍니다. 다시 말해, ‘나는 믿습니다’라고 하는 신앙고백의 대상인 예수님과 내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된 기독교 교리는 관계라는 것을 기억한다고 해서 ‘믿음의 친구들’ 중 하나인 지성(정신)의 중요성이 약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통 기독교 사상은 신약이 규정하는 믿음을 따라서 우리의 참된 복음을 지켜줍니다. 더 나아가, 건전한 지성은 예수님과 나누는 관계를 참된 인격적 관계로 만들어줍니다.
그렇습니다. 지성은 믿음 안에 항상 존재합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지성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은 정말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우리 기독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반지성주의입니다. 이단들이 나오는 게 다 반지성주의 때문입니다. 생각을 안 합니다.
앞에서 “믿습니까?”라고 하면 “아멘!”이라고 외치는데, 뭐에 대해 아멘을 하는 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아멘 합니다. 사람들을 죽 세워놓고 손을 흔들며 지나가니까 다 넘어지고, 이마를 탁탁 치니까 그대로 넘어집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인지 악령의 역사인지 구분하고 생각하면서 따라야 하는데, 현상이 대단하니까 별 생각 없이 그냥 따라갑니다. 지성을 잘 사용하는 것이 믿음을 가진 사람의 태도입니다.
2) 몸: 천국의 진리를 실행하기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의 증거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혼자 있고자 하셨지만, 여인은 몸으로 와서 그를 찾아냈습니다. 그녀는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의미로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을 위해 빌었습니다. 이 여인의 믿음은 그 생각 가운데 그저 머리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예수께서 내 딸을 고치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고 끝난 게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여인은 그것을 정말로 믿었기 때문에 행동했습니다. 다시 말해, 믿음이라는 것은 구체적 행위로 나타납니다. 진정한 믿음은 반드시 행동을 불러일으킵니다.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진짜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약 2:17-19)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야고보서에서는 강조합니다. 그런데 사실 ‘죽은 믿음’이라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행하지 않으면 믿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믿는데 어떻게 행동으로 나오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한 분이심을 믿는다’고 할 때, 그것이 유대인들의 쉐마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믿는 것은 잘하는 일이지만 귀신들도 그렇게 믿고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떤다는 것입니다. 귀신들이 참 믿음을 가진 것입니까? 당연히 아닙니다. 믿음이 없습니다. 그냥 머리로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머리로 아는 것에 머무는 믿음은 진짜 믿음이 아니라 가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할 크리스천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크리스천으로서 가장 기본인 주일예배를 빠집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믿음은 귀신들이 가진 믿음과 별로 다를 바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믿음은 진짜 믿음이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으면, 실제로 몸을 움직여 나와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안 중요하다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정말 믿는다면, 몸을 움직여 성경을 가져오고 펴서 읽고 묵상하며 기록해야 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를 안 해도 된다고 하는 크리스천은 없습니다. 기도가 중요하다고 다 말합니다. 그런데 몸을 움직여 기도하지 않는다면 진짜로 믿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예화가 있습니다. 실제로 오래 전 어떤 곡예사가 나이아가라 폭포 사이에 로프를 설치하여 그 외줄을 건넜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치며 대단하다고 외쳤습니다. 그때 그가 말했습니다. “내가 여러분 중 누군가를 등에 업고 여기를 건널 것을 믿습니까?” “예, 믿습니다! 당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여러분 중 누가 나와서 업히십시오.” 그랬더니 아무도 안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진짜로 믿은 게 아닙니다. 머리로는 믿지만 몸으로는 믿지 못한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머리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믿는 것입니다. 특히 사랑의 섬김에 대해서 그렇습니다. 사랑하면 섬겨야 한다는 것을 다 압니다. 그런데 정말 사랑하면 몸으로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몸을 통한 섬김이 나오지 않는 사랑은 진짜 사랑이 아닙니다.
조금 전 읽었던 야고보서 2장의 앞부분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것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십시오’ 하면서,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약 2:14-17, 새)
솔직히 제가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우리 목장의 VIP 교우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한 게 너무 찔렸습니다. 그래서 몸을 움직여 전화를 드렸습니다. 전에는 계속 찾아뵈었는데, 최근 들어 몇 주 동안 못 찾아뵈었습니다. 아프셔서 정말 마음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분들이 빨리 예수님을 믿으시면 좋겠습니다. 함께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그 생각이 확신하는 것을 몸으로 실행합니다. 이것을 꼭 기억해주십시오. 믿음은 머리로도 믿지만, 몸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3) 마음: 천국의 진리를 고집하기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은 그녀의 정신과 몸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인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뿌리내린 믿음은 인내를 통해 드러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이 자기 딸을 고치실 수 있다고 알 정도로 그분에 대해 충분히 알았기 때문에, 자기 딸을 위해 몸을 움직여 집을 떠나 와서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의 마음을 시험하시기 위해 두 가지 도전을 주셨습니다.
첫째 도전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여인을 쫓아 보내려 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보기에 이 여인은 주님을 귀찮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방인이고 여자였으며, 무엇보다 그녀의 딸은 귀신이 들린 부정한 집안입니다.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마 15: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첫 번째 도전을 이겨냅니다.
둘째 도전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의 차가운 말씀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7절)
이 정도 되면 ‘뭐요? 개라고요? 에이, 관두쇼. 퉤!’ 하고 침을 뱉으며 떠날 것입니다. 그런데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수수께끼 같은 말씀에서 예수님조차 부인할 수 없는 놀라운 반전을 이끌어냅니다.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8절)
이 여인은 어떻게 이런 대답을 할 수 있었습니까? ‘우리는 개다’라는 말이 아닙니까? 당시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유대인들의 용어가 ‘개’인데, 여인은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얻어먹는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것은 여인이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바로 알아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이런 뜻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먼저 천국의 식탁에서 먹게 할 것이다. 너는 네 차례가 돌아오기를 기다려라.” 여기 예수님이 분명히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먼저’가 있다는 것은 ‘나중’이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여인을 비롯한 이방인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개’라는 단어를 쓰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집에서 기르는 ‘애완용 개’를 뜻하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거기에서 이 여인이 탁 캐치한 겁니다. 그리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아, 이분이 지금 나를 무시하는 게 아니구나. 오히려 너의 차례가 올 것인데 그것을 기다릴 수 있느냐고 물으시는구나.’ 하고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예, 그럼요. 저는 제 차례를 기다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여 또 다시 시험을 통과한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능력을 베푸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29절)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쓴 마태복음에는 이방인인 이 여인을 칭찬하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 15:28)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응답하신 것은 그녀의 믿음이 마음을 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은 끈질긴 인내의 믿음이었으며, 설령 위대한 치유자에게 나아가는 길이 막히더라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단을 보여줍니다.
3. 믿음의 결과
그런데 예수님께서 귀신이 딸에게서 나갔으니까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아니,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같이 가주세요.’라고 할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녀는 그냥 혼자 집에 갑니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30절)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제 예수님과의 관계가 세워진 겁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을 만지고 나았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굳이 “누가 내 옷을 만졌느냐?”라고 물으시며 앞으로 나오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관계를 세워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냥 낫고만 가면 예수님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또 병에 걸리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과 관계가 세워지도록 나오라고 하시고, 세워주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라고 해주십니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세워졌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여인에게 도전을 통해서 의도하신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관계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이제 세워졌기 때문에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조를 필요도 없습니다. 그분을 신뢰하기에 이제 평안한 마음으로 집으로 갈 수 있는 겁니다. 가서 보니까 정말 말씀하신 대로 귀신이 나갔고 아이는 나아서 일어나 있습니다. 믿음의 결과입니다.
이 수로보니게 여인은 믿음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즉, 믿음은 관계, 곧 예수님과의 관계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관계에는 건전한 정신으로 하는 생각과, 몸으로 하는 행동과, 끈질긴 마음(인내)이 함께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입니다. 그분과의 사랑의 관계입니다. 믿음이 관계라는 뜻을 정리해보면 이런 겁니다.
우리는 신학의 체계와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습니다. 구원론이 우리를 죄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구세주 예수만이 구원하십니다. 교회론이 우리를 하나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하나로 만드십니다. 종말론이 죄로 오염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왕 중의 왕이시며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이 그 일을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많은 성경 지식을 가졌더라도, 그 지식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너무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그 외아들을 죽기까지 내어주셨습니다. 믿음이 관계인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매일매일 이 믿음의 관계, 사랑의 관계를 가지기를 원하십니다. 날마다 이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더 깊어지고 더 풍성해지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