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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31일 수요예배
✦ 예수신경 16 ✦
예수신경의 공동체(4)
“회복의 공동체”
(마태복음 8장 1~4절, 9장 20~22절)
1. 예수님의 기적의 의미
기적은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은 더욱 그렇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기적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저부터가 그렇습니다. 저와 같은 사람이 목사가 되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교회에서 리더로 사역한다는 자체가 기적입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그러한 기적의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생명의 삶> 공부의 첫 시간에 등장하는 인물이 있는데, 영국의 언론인이었던 프랭크 모리슨(Frank Morison)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필명이고 본명은 알버트 헨리 로스(Albert Henry Ross)입니다. 그는 예수의 부활이 신화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연구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복음서들을 샅샅이 뒤진 결과 자신에게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하는데, 그 연구의 결론으로 쓴 <Who Moved the Stone?>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생각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느리지만 아주 분명하게, 인류의 역사에서 그 잊을 수 없는 몇 주의 드라마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기이하고 심오한 것이라는 확신이 점점 자라갔다.”
모리슨은 부활이 허구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연구를 했는데 오히려 부활의 증거가 분명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질문합니다. “누가 그 돌을 옮겼을까?” 모리슨은 하나님이 돌을 옮기셨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것은 기적이었습니다. 사도신경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에 깊고 심오한 역사적 근거가 있다는 사실,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다는 기적적인 사실은 모리슨에게 확신을 주었습니다. 그 기적은 그를 믿음의 길로 인도했으며, 그는 이것이 참되다고 믿게 되자 자신의 아내도 예수님께로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활과 같이 큰 기적을 생각하든 혹은 병 고침과 같은 작은 기적을 생각하든, 하나님은 과시하거나 설득하려는 목적으로 기적을 일으키신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기적은 하나님이나 예수님에 대한 진리를 보여주기 위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 기적들은 예수님에 관하여 많은 것들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적의 본래 의도는 종종 그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기적에 있어서 핵심은, 기적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뭔가를 알려준다는 것 이상의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 기적에 포함된 일반적인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것은 쉽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많은 기적들을 조금만 훑어봐도 그것이 일반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는데, 그것은 기적들이 사람들을 회복시켰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사랑의 마음 때문에 기적을 일으키셨고, 그래서 기적을 통해 사람들을 하나님에게 회복시키고 이웃에게 회복시키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기적의 핵심은 사랑이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예수신경을 통한 회복입니다.
2. 사람들의 분류병
많은 크리스천들이 기적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는 주된 이유는, 기적이 사회에 미치는 의미를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 점에 대해 혼란스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선 사람과 그 사람의 건강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알려준 율법의 내용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들은 신명기 28장을 잘 알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이스라엘이 순종할 때 일어날 일들과 불순종할 때 일어날 일들이 아주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쉐마와 토라의 테두리 밖에서 살 때 질병과 고통을 겪고 포로가 되어 잡혀갔습니다. 반면, 욥기는 질병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벌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시험이라고 알려줍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중병에 걸리면 그 병의 원인을 그 둘 중 하나로 보았습니다. 즉, 자신이 죄를 지어서 그에 대한 벌로 병에 걸렸거나, 아니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시험하고 계시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이 벌을 받아서 병에 걸린 죄인 또는 시험을 받느라 병에 걸린 성인으로 분류할 수 있었습니다. 벌을 받으면 죄인이고, 시험을 받으면 성인인 겁니다. 이런 식의 분류에 대한 좋은 예가 요한복음 9장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가시다가,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요 9:1-3, 새)
제자들은 누구의 죄인가를 따지면서 이 사람과 그 부모를 죄인으로 취급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사람의 모든 처지를 알고 계셨고, 그를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다시 사회로 복귀시켜주시기 위해, 그의 시력을 회복시키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의 기적 덕분에, 이 사람은 사회의 부정한 그룹에 속했다가 이제는 건강한 그룹에 속하게 되어 새롭게 분류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 사회는 굉장한 분파주의 사회였습니다. 제사장들 사이에도 계급이 있어서, 가장 높은 대제사장(high priest), 제사장들의 우두머리인 수석 제사장(chief priest), 또 일반 제사장과 레위인으로 분류되었습니다. 보통 유대인들에게도 분파가 있었는데, 율법 준수파, 비준수파, 차디크, 에세네파, 바리새파, 사두개파, 젤롯당, 암 하아레츠, 개종자, 경건한 이방인(God-fearer) 등 많았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여성은 남성과 구분되었고, 어른은 아이와, 노인은 젊은이와, 병든 사람은 건강한 사람과, 성전은 보통 땅과 구분되었습니다. 성전에도 여러 개의 구역이 있어서 이방인들을 위한 곳, 유대인 여자들을 위한 곳, 유대인 남자들을 위한 곳, 제사장을 위한 곳, 그리고 대제사장만 들어가는 곳이 따로 있었습니다. 인간은 정결한 사람과 부정한 사람으로, 곧 성전에 합당한 사람과 합당치 못한 사람으로 분류되었습니다. 동물들 역시 정결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로 분류되었습니다.
2년 전 안식월에 이스라엘에 갔을 때 예루살렘 성전 터의 통곡의 벽에 가보니까, 실제로 지금도 남자와 여자가 들어가는 곳이 따로 있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도 오래 전에 아주 보수적인 교회들에서는 가운데에 칸막이를 쳐서 남자와 여자가 따로 앉게 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보기에 이런 식의 분류는 그 자체로 병적입니다. 그 병을 소위 ‘분류병’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사실 분류하는 그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남자와 여자가 다르고, 건강한 자와 병자는 구분해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병적인 증상은 모든 것에 서열을 매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되었습니다.
요즘에는 그것이 ‘갑질’로 나타납니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지금 나를 뭘로 보고 그러는 거야?’ ‘네가 감히 나한테...’ ‘나보다 어린 것이...’ ‘새파랗게 젊은 게 어디서 눈을 똑바로 뜨고 대들어?’ 이런 게 다 병입니다. 그런 말을 한다면 자신이 병에 걸렸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고, 그런 말을 듣는다면 그렇게 말한 사람은 병자라고 이해해줘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분류하는 것을 토라의 규정,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분류가 지나치고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제동을 거셨습니다. 분류한 자체는 잘못이 아니지만, 분류를 해놓고는 자기가 더 우월하다고 하며 편을 갈랐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사장을 구분해서 세우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백성들을 대표하여 그들의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백성들보다 우월하다는 식이 되어 버린 겁니다.
그런 식으로 사람들의 구분은 기능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보다 우월하다는 식으로 변질되었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여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하다고 했고, 어른과 아이를 구분하여 아이들을 깔보았고, 건강한 자와 병든 자를 구분하여 병자들은 저주받은 자들이라고 멸시했습니다.
3. 무너지는 벽
예수님은 이런 분류의 벽들이 무너져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런 식의 잘못된 분류에 빠지지 않고 사회 안으로 회복해 들어오도록 사람들을 치유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벽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그들을 치유하셨습니다. 예수신경이 무너뜨린 벽들 중에서 오늘은 두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혈루증에서 고침 받은 여인 (마 9:20-22)
먼저, 12년 동안 하혈을 한 여인이 나오는데, 이 사건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나옵니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이 여인은 병을 고치기 위해 의사들에게 재산을 다 털어주었지만 오히려 병이 더 악화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에 대해 소문을 듣고, 그분에게 몰래 다가가 옷자락에 손을 댑니다. 그때 예수님에게서 치유의 능력이 흘러나와 여인은 치유를 받고 무거운 짐에서 벗어납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20-21절)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무엇 때문에 기적이 필요한 것인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그 여성의 사회적 위치를 알려줍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인 것(하혈)이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아주 공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즉시 분류로 이어졌습니다.
“여자가 몸에서 피를 흘릴 때에, 그것이 그 여자의 몸에서 흐르는 월경이면, 그 여자는 이레 동안 불결하다. 그 여자에게 닿는 남자는 모두 저녁때까지 부정하다. 그 여자가 불결한 기간에 눕는 자리는 모두 부정하다. 그 여자가 앉았던 모든 자리도 부정하다. 어떤 여자가 자기 몸이 월경 기간이 아닌데도, 여러 날 동안 줄곧 피를 흘리거나, 월경 기간이 끝났는데도, 줄곧 피를 흘리면, 피가 흐르는 그 기간 동안 그 여자는 부정하다. 몸이 불결한 때와 같이, 이 기간에도 그 여자는 부정하다.” (레 15:19-20, 25, 새)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월경 중인 여성은 ‘니다(niddah)’로 분류되고, 정상적인 주기에서 벗어나 하혈을 하는 여성은 ‘자바(zavah)’로 분류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자는 자바입니다. 그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여인의 상태를 하나님의 저주와 징계로 보았을 것입니다. 결혼을 안 한 처녀였다면 결혼할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없었을 것이고, 결혼을 했다면 얼마 못 가서 남편에게 이혼 당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사회적 통념이 그녀의 정체성을 정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사회적 통념에 의해 사람의 정체성이 정해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역시 사회적으로 가난했고, 많은 사람들에 의해 간음한 여자로 간주되었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사생아로 취급받았습니다.
본문의 여인은 사회적 통념에 의해 ‘자바’로 불렸는데, 예수님을 만날 때까지만 그랬습니다. 절망에 빠져 있던 여인은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고침을 받게 된다면 이 여인은 회복이 되어 공동체와 결혼생활과 일상의 삶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녀의 가장 큰 관심사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치유와 회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여인을 고쳐주십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22절)
마태복음에는 아주 간단히 되어 있는데,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수많은 무리 가운데 이 여인이 자신의 옷에 손을 댄 줄 아시고 그녀를 찾으십니다. 그때 여인이 두려워 떨면서 나아와 사실대로 다 말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선포하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 (막 5:34, 새)
이것을 보면 예수님이 여인을 회복시키신 것은 삶을 변화시키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병만 고쳐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 여인의 믿음을 일으켜주셨습니다. 믿음이 있을 때 진정한 회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 끄트머리를 만졌는데 그 순간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이 여인에게 흘러갔습니다. 하혈이 즉시 멈췄고 여인의 부정함도 끝을 맺었습니다. 여인은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인간을 구분하고 분류하던 벽 하나가 무너진 것입니다.
2) 회복된 나병환자 (마 8:1-4)
마태에 의하면, 예수님이 그 유명한 산상설교를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수많은 무리가 따랐고, 바로 그때 한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습니다.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2절)
이 사람은 나병환자였고 예수님에게 절하며 자신을 깨끗하게 해달라고, 즉 사회에 복귀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바로 이 순간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경악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니, 여기가 어디라고 저런 더러운 놈이 왔어?’ ‘감히 저런 부정한 놈이 여기 오다니.’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사실 그것은 그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당연한 통념에 의해서입니다. 율법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나병 환자라 부정하니 제사장이 그를 확실히 부정하다고 할 것은 그 환부가 그 머리에 있음이니라.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레 13:44-46)
부정하다고 분류된 이 나병환자와 깨끗한 모든 사람 사이에는 높은 벽이 존재합니다. 나병환자는 보통 사람들이 사는 성 안에 절대로 들어와서는 안 됩니다. 혹시 들어오게 되면 사람들이 돌로 쳐서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나병환자라는 분류는 의학적인 진단에 따른 것이 아니라 정결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정한 나병환자는 철저히 사회에서 격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부정하고 더럽고 비천한 나병환자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3절)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이 나병환자를 고치셨고, 따라서 그는 더 이상 부정한 나병환자가 아니라 새로운 사람이 되어 재분류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혈루병 여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의 병을 고쳐주신 것으로 끝내지 않으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4절)
예수님은 그가 나병에서 깨끗함을 받았다는 증거로서, 율법에 나온 그대로 제사장에게 가서 예물을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레위기 14장). 예수님은 자신이 그에게 행하신 것을 종교지도자들인 제사장들에게 보여주시고, 유대교의 성결제도의 중심인 성전에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4. 정결함을 전염시키시는 예수
우리는 이 두 개의 벽들을 무너뜨리는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을 보며, 그분이 기적을 일으키신 진짜 이유를 발견합니다. 그분은 사회의 변두리에 있는 자들을 사회의 중심으로 회복시키시고, 그들을 재분류하여 정결하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신경이 삶을 변화시키는 공동체이며, 삶을 변화시키는 한 가지 방법은 기적을 행함으로써 인간을 하나님과 이웃에게로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그러한 공동체는 바로 예수님을 통해 임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주님이신 것입니다.
당시 모든 유대인들은 부정이 전염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부정은 그것과 접촉하는 모든 것에 퍼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회를 정결함과 부정함으로 분류하고 격리한 것입니다. 안 그러면 멀쩡한 사람도 부정한 사람이나 물건과 접촉함으로 부정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와는 반대로 정결은 전염이 되지 않았습니다. 정결한 사람과 접촉한다고, 대제사장의 손을 만진다고 정결해지지는 않습니다. 이처럼 정결은 전염되지 않았습니다. 단,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만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최초로 정결을 전염시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사셨고 우리를 위해 부정하게 되셨습니다. 우리가 당해야 했던 천벌을 우리 대신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만지심으로써 우리에게 당신의 정결과 거룩함을 전염시키셨습니다.
혈루증 여인이 꼭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져야만 고침을 받을 수 있는 겁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다 알고 계셨고, 말씀만으로도 그 여인을 고칠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그것을 몰랐기 때문에, 혹시라도 부정한 자신의 터치로 인해 예수님이 부정해지실까봐 몰래 와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살짝 만졌는데 나음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시고 그녀의 믿음을 회복시켜주시기 위해 부르셨는데, 여인은 그것을 잘 몰라서 두려워하며 떨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부정함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부정해지시도록 했을까봐 두려워한 겁니다. 그러나 그 터치를 통해 예수님이 부정해지신 것이 아니라 여인이 정결해졌습니다.
나병환자 역시 예수님이 꼭 그를 만져야만 고칠 수 있으셨습니까? 아닙니다. 말씀만 하셔도 낫게 할 수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더러운 몸을 만지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부정한 나병환자의 부정함을 옮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 자신의 정결함과 거룩함을 그 나병환자에게 전염시키신 것입니다. 그를 깨끗하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독특한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부정한 접촉을 흡수하시고 그것을 변화시키셔서 부정한 사람에게 자신의 정결함을 전염시켜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정결하게 해주심으로써 그 사람을 공동체 안으로 회복시키시고 그 사람이 자신의 식탁에 앉도록 안내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식탁에는 어느 누구라도 다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식탁에는 평범한 유대인들도 있지만, 나병환자, 이방인, 창녀, 세리, 죄인들도 다 섞여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는 마치 예수님이 요리하시는 천국의 냄비 안에 뒤섞여서 진국이 우러나올 때까지 보글보글 함께 끓고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공동체야말로 아바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사회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그런 모습이 천국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또 모든 사람이 치유와 회복이 이루어지는 새로운 공동체에 오는 것을 환영하십니다. 그러한 예수신경을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서로를 하나님과 이웃에게 회복시키는 사역에 헌신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회복의 사랑과 은혜를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 그 영혼들에게 가서 그들을 하나님께 회복시키고 이웃에게 회복시키는 사역에 헌신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자꾸 구분하고 나누고 그러지는 않습니까? 그러진 않을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구분하고 분류하며 ‘나는 너보다 우월하다. 너는 나보다 못하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꾸 파벌을 조장하며 좋아하는 사람과만 같이 하고 안 좋아하는 사람과는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가 바로 그러한 치유와 회복과 사랑과 믿음의 공동체, 서로서로 회복시켜주고 세워주는 공동체가 되어 하나님께 칭찬받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