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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75일 수요예배

예수신경 20

예수신경으로 살아가기(2)

예수 안에 거하기

(누가복음 1038~42)

 

 

1.   주님이 원하시는 올바른 자세

 

예수님은 요한복음 14:6에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로서 진리를 추구하며 삽니다. 그런데 때로는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충격을 주기도 합니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예수님께서 그 충격을 주실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실 때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기도 하셨습니다. 굉장히 충격적인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 보면 아주 가까운 친구였던 마르다가 큰 충격을 받게 만드셨습니다. 왜냐하면 마르다에게는 그 충격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괜히 충격을 주시며 무너지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잠자고 있거나 뭔가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충격을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마르다는 예수님이 자기 집 안방에 앉아 동생 마리아를 가르치시는 동안, 자기는 부엌에서 고생만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자신의 불만을 이야기합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40)

 

이것을 보면, 마르다가 굉장히 마음이 불편하고 표정도 좋지 못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르다는 사방에서 들려오는 요청과 불평 때문에 해야 할 일이 많아졌고 마음이 분주해졌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도 숟가락을 놓아주는 정도의 도움은 줄 수 있다는 것을 예수님에게 호소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은 놀라운 지혜의 말씀으로, 또 아주 충격적인 말씀으로 마르다에게 응답하십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41-42)

 

예수님이 여기서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라고 하신 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그들이 있던 자리의 차이가 아니라, 그들의 자세의 차이를 가리킵니다. 마르다는 머릿속에 많은 것들을 생각한 채 부엌을 이리저리 뛰어다닙니다. 날아다닌다는 표현이 더 나을지 모릅니다. 손이 엄청나게 빨리 움직입니다. ‘내가 이걸 어떻게 해야 되나? 저건 어떻게 해야 되나?’ 생각이 아주 많습니다. 마르다가 그러고 있을 때 동생 마리아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39)

 

마르다가 부엌에서 일을 하며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대부분은 자신에 관한 것들이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오직 그분에게만 생각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마리아의 그런 자세가 중요합니다. ‘새번역성경으로 보면 그 의미가 더 분명합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41-42, )

 

마르다가 일을 한 게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을 대접하는 게 왜 잘못된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마르다는 예수님과 그 일행을 대접하겠다고 했습니다.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38)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 잘못입니까? 사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런데 열심히 일을 하는 가운데, 너무 일이 많아지면서 그로 인해 염려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마음이 들떠 있었습니다. 마음이 집중되지 않고 산만하게 퍼지며,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면서 염려를 하게 되고 다른 생각만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모든 생각이 자기 자신이 하는 일에만 집중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대접하겠다고 모셔 놓고는 주님에 대한 생각은 못하고 주님의 말씀에 대한 생각도 못한 채 자기 일에 대한 생각 밖에 못하고 있던 것, 그래서 마음이 분산되고 산만해져 있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주님을 대접하려고 일한 게 잘못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오히려 주님을 생각하지 못하고 다른 많은 것들만 생각하며 염려하고 산만했던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자세는 학생의 자세,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귀 기울여 듣고자 하는 사람의 자세, 저녁식사도 뒤로 밀고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사실상 예수님에게 완전히 마음을 사로잡히고 집중이 되어서 아예 저녁식사 같은 것은 생각도 없는 상태입니다.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전혀 안 듭니다.

 

우리도 말씀을 읽다가 정말 말씀이 꿀처럼 달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배가 고픈 것이 전혀 생각이 안 납니다. 다른 것이 전혀 생각이 안 납니다. 그런데 집중하지 못하면 예배 끝나고 뭘 해야 하는지만 생각하게 됩니다. 몸은 예배의 자리에 있지만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생각만 하는 겁니다. 그런 것이 마르다의 문제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랍비들의 제자들은, 지금 우리가 하는 것처럼 의자에 앉아서 토라의 핵심을 스크린에 띄워 놓고 강대상 뒤에서 강의하는 선생님의 말씀을 들은 것이 아닙니다. 그 시대의 랍비들은 통상적으로 집에서 가르쳤습니다. 그때마다 제자들은 유치원 학생이 선생님 앞에 둥글게 모여 마음을 활짝 열고 배우는 것처럼, 또한 마치 둥지에 있는 새끼 새들이 먹을 것을 기다리며 어미가 먹이를 물어다주면 입을 크게 벌리는 것과 같이, 랍비의 발 앞에 앉아서 말씀을 열심히 들었습니다. 그 자세가 제자들의 관행이었기 때문에, 누군가의 발 앞에 앉는 것은 그 사람의 제자가 되었다는 표현이 되었습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22:3)

 

여기서 가말리엘의 문하라고 한 것이 바로 가말리엘의 발 앞에 앉았다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마리아는 자신의 랍비인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았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들으며 평안했던 것으로 느껴집니다. 마르다는 굉장히 분주하고 산만하게 느껴집니다. 마리아의 평안함은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한 데서 온 것이며,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라는 표현은 마리아의 자세를 한마디로 요약해주는 말입니다. 주님의 발 앞에 앉아 말씀에 집중하고 들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라는 말씀은, 한 사람의 영적 상태는 마르다가 한 것처럼 예수님을 위해 어떤 일을 얼마나 많이 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가 배운 것처럼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예수님의 말씀에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에서 예배나 사역을 열심히 하면서 영적인 것으로 보이는 일들을 많이 합니다. 찬양 사역, 교사 사역, 설교 사역 등이 다 영적인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일을 하더라도 예수님과 아무 관계가 세워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아무 관계가 없이 job으로서 하는 게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악한 자들을 쫓아내라고 하셨더니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능력도 행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이 악을 행하는 자들아!’라고 하시며 내쫓으라고 하셨습니다. 영적으로 보이는 일들을 많이 했는데도 주님과 관계없이 자기만족을 위해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지금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러면 그 열심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관계가 있는가 입니다. 예수님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에 집중하며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마르다는 일만 열심히 했고 마리아는 말씀만 열심히 들었으니까, 그렇게 일하는 것은 쓸데없고 오직 주님의 말씀을 듣기에 힘써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일을 하느냐 안 하느냐, 어떤 일을 하느냐, 또는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이 일을 통해 지금 주님과의 관계가 세워지고 있는가? 아니 그 전에, 주님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인가? 그리고 이 일을 하면서 주님과의 관계가 더 좋아지고 있는가? 그렇게 주님의 말씀에 집중하며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반대도 있어서 잘못 은혜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르다는 잘못되었고 마리아는 칭찬을 받았으니까 봉사는 안 하고 말씀만 듣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기적인 것입니다. 여기서의 핵심은, 마리아는 일을 안 하고 말씀만 들었다는 게 아니라, 마리아는 말씀을 들으며 모든 생각이 주님께 집중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일을 한 게 잘못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아닌 자기에게 모든 생각이 집중된 것이 문제입니다.

 

혹시 이런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AOL (America Online). 인터넷이 처음 나올 때만 해도 인터넷에 접속한다는 말이 곧 ‘AOL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가 1990년대 후반이었는데, 그때는 인터넷으로 연결하려면 전화를 걸어야 했습니다. 속도도 엄청나게 느립니다. 그래도 좋다고 하며 했습니다. 하다가 끊어지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렇게 인터넷을 하고 있으면 집전화가 불통이 되었습니다.

 

그 후 더 빠른 인터넷(DSL)이 나오게 되었고, 그 다음에는 초고속(high speed) 인터넷이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는 아예 wi-fi라고 무선으로 접속하는 것이 상용화되었습니다. 무선 인터넷 덕분에 iPad 같은 것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안식월 때 다닐 때도 그렇고 요즘도 보니까 사람들이 호텔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 wireless internet의 여부입니다. 무선 인터넷이 없으면 사람들이 잘 안 갑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마치 무선 접속과도 같아서, 언제 어디서나 항상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어디나 계시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과 접속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발 앞에 앉은 채 주님께 주목하면서, 우리를 위한 그분의 삶과 사랑을 받아들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2.   예수님께 주목하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예수님께 주목하면서 그분에게 항상 접속할 수 있겠습니까? 크게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1)  말씀 안에서 주님께 주목하기

 

예수신경에 따라 우리의 삶을 형성하는 가장 일반적인 훈련 가운데 하나는, 성경을 읽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정기적으로 그분의 임재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기에는 크게 정보 찾기식성경 읽기가 있고, ‘영적 성장식성경 읽기가 있습니다. 두 가지의 차이점은 성경을 읽는 방법과 이유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정보를 찾기 위해, 즉 더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 성경을 읽거나, 영적 성장을 위해, 즉 삶이 변화되기 위해 성경을 읽습니다.

 

정보 찾기식 성경 읽기 (성경 통독)

영적 성장식 성경 읽기 (말씀묵상, 큐티)

가능한 한 많은 분량을 읽는다.

필요한 분량을 읽는다.

죽죽 읽어 내려간다.

깊이 있게 읽고, 때로 한 단어에 주목한다.

본문을 정복하겠다는 목표를 갖는다.

본문에 의해 정복당하겠다는 목표를 갖는다.

본문을 대상으로 본다.

나 자신을 본문의 대상으로 본다.

분석적으로 읽는다.

수용적으로 읽는다.

문제를 해결한다.

하나님의 신비에 자신을 오픈한다.

 

우리에게는 둘 다 필요합니다. 그런데 영적 성장식 성경 읽기가 너무나 중요합니다. 영적 성장을 위해 성경을 읽으면, ‘알고자하는 열망(사실은 부담)에서 벗어나, ‘되고자하는 열망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영적 성장을 위한 성경 읽기(말씀 묵상)는 천국의 변화에 기꺼이 동참하는 것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천국이 예수신경을 통해 삶이 변화된 사람들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2)  예배 안에서 주님께 주목하기

 

마리아가 분명히 보여준 것처럼, 영적 성장에 집중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주목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경을 읽을 때 배우고 또 듣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고 있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는 겁니다. 예수님에게 주목하는 일은 그분이 경배를 받으시도록 하는 데로 이끌어갑니다.

 

모든 형태의 예배 의식은, 잘 조직된 것이든 즉흥적인 것이든, 예수님과 영적이면서도 신체적인 만남을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함께 기도하고, 예배 의식을 따르고, 기도하면서 건물 주위를 걷는 등의 방법으로 우리는 예수님에게 주목할 수 있습니다.

 

모든 예배에는 형식이 있고 순서가 있습니다. 아무리 자유롭게 현대식 찬양만 하는 예배라도, 거기에는 일정한 순서가 있습니다. 그러한 형식은 본질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방법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하더라도, 전혀 기도하지 않고 찬양하지 않고 말씀을 듣지 않고 헌금을 하지 않고 예배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나타낼 수가 없습니다. 속에 들어 있는 것을 겉으로 표현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속에 없으면서 있는 척하는 형식주의가 문제이지, 형식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라는 구체적 행동 가운데 주님께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표현합니다.

 

 

3)  교제 가운데 주님께 주목하기

 

예수님은 깜짝 놀랄 만한 말씀들을 많이 하셨는데, 그 중에서도 이 말씀은 최상위 그룹에 속할 것이 분명합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18:20)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도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다른 제자들과 교제할 때면 늘 예수님의 임재 가운데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말한 교제는 주님의 임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 사이의 모든 연결을 말합니다. 그들은 함께 있으면서 교제합니다. 함께 하지 않으면서 교제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성도들의 모임은 그분의 임재를 보여주고 그분의 향기를 맡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 교제할 때 실제로 예수님께 주목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예수님께 주목하기 때문에 서로 함께 모여 교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주목하지 않는 사람은 함께 교제하기를 싫어합니다.

 

예수님께 주목하는 이 세 가지 방법, 즉 성경 읽기, 함께 예배하기, 함께 교제하기는 믿음의 선배들과 영적 고전들이 가르쳐주는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예수신경으로 부르셨고, 그것은 곧 그분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사랑에 필요한 한 가지는 예수님께 주목하는 것이며, 그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그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3.   예수님 안에 거하는(머물러 있는)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에 제자들과 마지막 밤을 보내며 나누신 대화의 중심 주제는 거하는 것입니다. 거하는 것이야말로 마리아가 가졌던 이 좋은 편”, 꼭 필요한 한 가지에 대한 설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15:1, 4)

 

가지가 나무에서 성자에 필요한 생명의 수액을 빨아들이듯,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에게서 영적 생명을 빨아들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생명을 빨아들이는 방식은 아주 단순합니다. 포도나무이신 주님에게 붙어 있는 것, 그리고 그분 안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그분의 말씀에 마음을 열고 말씀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머물러 있는) 것은 기도 훈련이며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그 방식을 어디서 우연히 만나거나 그냥 살다 보면 그런 방식이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그 방식을 의식적인 삶의 틀로 만들어야 합니다.

 

만약 기도가 우리의 변함없는 삶의 방식이 되기 원한다면, 우리는 변함없는 기도로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을 연습해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아주 잘 알려준 사람이 있는데, 바로 중세의 로렌스 형제입니다.

 

로렌스 형제는 수도원에 살면서도 공식적인 기도문을 의미 있게 암송하려고 몸부림치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하나님과 끊임없는 대화를 연습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기도 훈련을 실시한 장소는 놀랍게도 수도원의 주방이었습니다. 그는 15년 동안 주방에서 일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매일 소박한 대화를 나누며 하나님께 끊임없이 접속할 수 있었습니다. 로렌스 형제는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사랑의 통로로 만들었습니다.

 

기도를 위한 로렌스 형제의 지혜는 세 가지 항목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아주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기도에 대해 조금이라도 제대로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작은 내적 예배 행동을 하루 종일 반복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은 없다.”라고 합니다. 셋째, 우리의 마음을 기도의 장소로 만들 수 있고, 우리는 일상에서 조용히 물러나 이곳에서 하나님과 부드럽고 허심탄회하게, 그리고 사랑이 넘치는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로렌스 형제는 이러한 말도 했습니다. “나의 관심을 오직 하나님께만 고정하고 온 종일 사랑의 마음으로 그분을 의식하며 순수하게 이 일을 했다.” “정해진 기도 시간에 내가 하는 일이라곤, 이 동일한 연습을 반복하는 것뿐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예수신경의 삶으로 부르십니다.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고 부르십니다.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는 법을 배운다면, 우리는 영적 성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할 때 우리의 삶에는 예수신경이 가르치는 위대한 핵심인 사랑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안에 거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을 약속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포도나무이신 그분께 붙어 있는 가지만이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그 열매는 우리에게 능력을 불어넣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 붙어 있음으로 인하여, 그분 안에 거함으로 인하여 맺는 우리의 열매는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삶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생명은 항상 포도나무(예수님)를 통해 가지(제자들)에게 전달됩니다. 그래서 이 생명이 가지에 도달할 때 생명이 사랑의 열매를 맺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15:9-10, )

 

예수님 안에 거하는(머물러 있는) 일이 사랑을 만들어낸다면, 그 사랑은 다시 다른 사람을 위한 자기희생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5:12-13, )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신경으로, 곧 예수님을 따름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신앙생활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거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신 내용은 예수신경의 사랑이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분의 사랑은 아들이신 예수님에게 흐르며, 우리가 그 아들 안에 거함으로써, 즉 그분 안에 머물러 있음으로써, 그분을 따름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다시 그 사랑을 이웃에게 흐르도록 할 수가 있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의 아름다운 삶입니다. 바로 이렇게 아름다운 삶, 예수님의 제자다운 삶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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