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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15일 수요예배
✦ 예수신경 7 ✦
예수신경의 이야기 (1)
“세례 요한과 새로운 시작”
(누가복음 3장 1~14절)
[들어가는 말]
“자화상” (파리 오르셰 미술관 소장 / 제가 직접 찍은 사진입니다)
이 사람을 아십니까?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인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자신이 자란 기독교 목회자의 가정을 통해 배운 진리를 내버리고, 억압과 파멸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다행히도 고흐는 훗날 하나님의 은혜로 이 진리를 다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삶의 소망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 소망을 색으로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반 고흐의 삶 가운데서 가장 알려지지 않은 비밀은, 그가 발견한 진리가 그의 작품에서 노란색의 비중이 점차 늘어가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 PPT 2 >> "아를의 여인" (L’Arlesienne, 1888)
<< PPT 3 >> “낮잠” (La Meridienne, 1889-90) - 밀레의 그림을 보고 그린 그림
위의 그림들은 제가 직접 오르셰 미술관(Musee d'Orsay)에서 찍은 것들인데, 이 그림들에서 보듯이, 노랑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진리가 주는 소망과 따뜻함을 고흐에게 불러일으켰습니다. 특히 그가 우울증에 걸렸던 시기에 그렸고, 지금은 아주 유명해진 “별이 빛나는 밤(Starry Night)”에는 노란 태양과 함께 노랗게 소용돌이치는 별들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보십시오.
<< PPT 4 >> “별이 빛나는 밤에” (Starry Night, 1889)
반 고흐는 오직 자연 가운데서만 진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는데, 안타깝게도 이 그림에서 진리의 집이어야 할 교회가 높게 서 있기는 해도 아주 어둡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다른 데는 노랗고 환한데, 교회는 까맣고 어둡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노란색의 흔적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거의 유일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가 “나사로의 부활”을 그릴 무렵, 그의 삶은 자신에 관한 진실을 마주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습니다.
<< PPT 5 >> “나사로의 부활” (1889-90)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고 그렸다는 이 그림을 보면, 눈이 부실 정도로 온통 노란색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실제로 반 고흐는 자기 얼굴을 나사로에게 투영하여, 부활에 대한 그의 소망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진리로 인하여 우리가 삶을 완전히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반 고흐의 그림에 사용된 노란색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이 진짜 노란색이든 비유적인 노란색이든 상관없이, 우리의 삶을 새로운 시작이라는 소망으로 칠해나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고흐처럼 하나님을 향해 먼저 자기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실패로 인해 본궤도에서 벗어난 후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다시금 하나님의 회복의 영을 발견하기 위한 묵상과 휴식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인하여 아픔을 겪는 가운데, 남은 삶의 부분들을 하나로 붙이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직장에서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는 시간을 견디면서, 더욱 균형 잡힌 삶을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직장을 잃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음성을 듣고 싶어 합니다. 어떤 사람은 질병으로 머리가 빙빙 도는 현기증을 느낍니다. 또 다른 사람은 자녀들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살다 보면 반드시 자신의 삶을 완전히 새로 시작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완전히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 약속이라면, 우리는 ‘어떻게’를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요단강가로, 곧 예언자 세례 요한이 사람들에게 다시 시작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1. 요단 강가의 예언자
요단강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을 생각나게 해주는 곳입니다. 그 두 가지는 모두 새로운 시작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첫째, 출애굽 한 뒤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침내 그 강을 건넜을 때 그들은 이스라엘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백성이 요단 강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진을 떠날 때에,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백성 앞에서 나아갔다. 그 궤를 멘 사람들이 요단 강까지 왔을 때에는, 마침 추수기간이어서 제방까지 물이 가득 차 올랐다. 그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 물 가에 닿았을 때에, 위에서부터 흐르던 물이 멈추었다. 그리고 멀리 사르단 근처의 아담 성읍에 둑이 생겨, 아라바의 바다 곧 사해로 흘러가는 물줄기가 완전히 끊겼다. 그래서 백성들은 여리고 맞은쪽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수 3:14-16, 새)
둘째,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새로운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이스라엘 땅에서 살기 위해 요단강을 건너갔습니다. 요한이 어떻게 백성들에게 전혀 새로운 삶을 시작할 기회를 주었는지를 이해하려면,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자신들의 시대에 어떻게 활동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요한에게서 세 가지 모습을 배울 수 있습니다.
1) 제사장과 예언자(선지자)의 모습
요한의 아버지는 제사장이던 사가랴였고, 요한은 예언자였습니다. 제사장은 성전이라는 은밀한 공간에서 인간들의 죄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갑니다. 반면, 예언자는 마을 광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선포합니다.
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씻기고, 예언자는 백성 앞에서 그들의 죄를 지적하여 그들이 회개하도록 이끌어줍니다. 제사장들이 백성을 모아놓고 진리를 선포한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속죄하게 하기 위함이었던 반면, 예언자들이 백성을 모아놓고 진리를 선포한 이유는 그들로 다시 시작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 행동하는 모습
예언자들이 항상 말을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때때로 자신의 뜻을 행동으로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특히 구약의 예언자들이 자신의 메시지를 행동으로 전했다는 것을 성경에서 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자기 허리띠를 물가에 감추었습니다(렘 13:1-7). 에스겔은 포로가 될 것을 나타내는 상징으로서 바벨론으로 여행을 했습니다(겔 12). 심지어 이사야는 3년 동안 알몸으로 걸어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니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종 이사야가 삼 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며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징조와 예표가 되었느니라” (사 20:2-3)
이 모든 행동들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상징이었습니다. 제사장의 아들인 세례 요한은 요단강가에 한쪽 발을 고정하고서 자신의 메시지를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행동은 요단강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3) 선택한 지역
지역도 중요한 항목인데, 요한이 세례를 베푸는 장소로 택한 고은 요단강 건너편이었습니다.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이 일은 요한이 세례 베풀던 곳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 (요 1:26-28)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곳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 요단강을 건너려고 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복을 누리기 원한다면, 그들이 요단강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요한의 예언적인 행동은 그 땅에 들어가는 행동을 다시 보여주는 것입니다.
2. 진실의 고백과 함께 다시 시작되는 인생
요한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은, 요한이 삶이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백성들이 알기를 원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요단강에서 요한은 우리에게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줍니다.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3절)
요한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말은 ‘회개하라’입니다. 이것은 철저한 회개를 말합니다.
사실 회개하라는 말은 듣기 싫은 말입니다. 그래서 프레드릭 비크너(Frederick Buechner)라는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누구도 예언자를 자기 집 저녁 식사에 한 번 이상 초대하지 않는다.” 그런데 요한은 아마도 그 한 번마저 초대받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요한은 회개란 ‘자기 죄를 고백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에 새로운 시작의 비밀이 있습니다. 그 비밀은 반 고흐가 생애 말년에 겨우 발견하기 시작한 진리입니다. 고백한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께 진실을 말씀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것이 또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사람에게는 적어도 세 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 보이는 모습, 가족과 친한 친구를 포함해서 가까운 사람에게 보이는 모습, 그리고 자기 자신만 아는 모습이 있습니다. 고백한다는 것은 이 세 가지 모습을 다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예수신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사랑이 올바른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하나님께 진실을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아바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이며, 삶에서 새로운 시작을 만들어냅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 인류는 하나님으로부터 숨으려고 애써왔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에덴동산의 창조주께서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시며 우리를 당신의 동산으로 부르시는 일을 계속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숨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할 새로운 시작이 필요하며, 그 새로운 시작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요단강에서 진실을 말하는 순간 시작됩니다.
하나님께 진실을 말씀드리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정직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대는 형제나 자매를 비판합니까? 어찌하여 그대는 형제나 자매를 업신여깁니까?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각 자기 일을 하나님께 사실대로 아뢰어야 할 것입니다.” (롬 14:10, 12, 새)
헨리 나우웬(Henri Nouwen)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잔을 마셔야만 한다.” 자신의 잔을 마시는 것은, 진실이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곳을 꿰뚫고 우리를 깨우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진실을 말하는 것은 용서를 일깨워줍니다. 우리는 종종 잘못된 설교자나 성경 교사들로부터, 하나님이 우리의 머리 위에서 방망이를 들고 계시다가 우리가 사실을 말하는 순간 우리의 머리를 내리치시며 ‘야, 이 못난 죄인아!’라고 말씀하신다는 인상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바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신경의 약속은, 아바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도록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진실을 고하는 것은 우리 머리를 때릴 기회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아바의 마음이 우리를 용서해주시는 흥분으로 가득 차게 되는 기회를 드리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너무 꼭꼭 숨어 계셔서 우리가 그분을 찾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숨어 있을 때 나를 찾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이해할 때 우리의 신앙생활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진실을 고하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과 다시금 하나가 되게 해줍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분의 용서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고하지 않으면, 우리는 스스로 숨는 것과 같습니다. 아니면 나오더라도 옆으로 비스듬히 서서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과 같습니다.
진실을 고백하지 않고도 우리가 다시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면서 그 사람과 하나가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가 되려면 정직한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3. 진정성을 추구하는 진실 고백
세례 요한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것들에 관해 진실을 말하라고 명령합니다.
1) 우리의 신앙
세례 요한의 말을 듣던 사람들 중 어떤 종교 전문가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이기 때문에 물려받은 전통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렇지 못할 것이라고 통렬하게 선포합니다.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7-9절)
요한은 자신이 유대인인 것을 자랑스러워했지만, 신앙은 핏줄 이상의 것이라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요한의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모의 신앙 아래서 살고 있습니다. 특히 교회에 다니는 자녀들이 자신의 신앙이 아니라 부모의 신앙으로 교회를 다닙니다. 그러나 대학에 가고 성인이 되면 교회를 떠납니다. 자신의 신앙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신앙도, 배우자의 신앙도, 자기 자신을 하나님 나라에 들여보내주지 못합니다. 우리 각자가 진실을 고백하며 신앙의 배경을 뛰어넘을 때 우리 삶은 완전히 새롭게 시작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신앙에 대하여 진실을 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디에 닻을 내리고 있으며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까?
2) 우리의 소유
성경이 돈에 대해 자주 언급하는 것은, 우리가 돈을 통하여 선택의 자유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서구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힘든 일입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신앙에 깊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자기 욕심을 채우는 데에 이용합니다.
복음주의 신학자인 제임스 패커(James I. Packer)는 그런 신앙을 ‘온탕 종교(hot tub religion)’라고 불렀습니다. 더 많은 것, 더 큰 집, 더 멋진 자동차, 더 최신 유행의 옷을 추구하는 인간의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욕망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정반대로 나아가 소유를 포기했습니다. 아주 극단적인 경우도 있었지만, 성 프란시스 같은 사람이나 메노나이트 교도들은 검소한 생활을 했습니다. 적은 것으로 훨씬 풍성한 삶을 살도록 촉구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10-11절)
무리가 요한에게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물으니까 요한은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주라고 합니다. 요한은 요단강가에 서서 자기만을 위해 재물을 쌓지 말라는 경고를 큰소리로 외칩니다. 요한의 외침에 귀 기울이는 것은 새로운 시작으로 인도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우리 마음이 우리의 재물과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재물과 관련된 진실을 말씀드려야 합니다. 재물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3) 우리의 권력
요한은 다른 두 무리의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돌리는데, 그들을 보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말을 들으러 요단강가에 모여든 세리들의 얼굴을 봅니다. 요한은 그들이 탈세의 전문가들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갈취와 불법행위로 유명한 군인들도 거기 있음을 봅니다.
이 두 무리는 권력 남용이라는 이름으로 한 데 모여 있습니다. 요즘도 ‘권력 남용’으로 인하여 잘못된 사람들을 뉴스에서 많이 봅니다. 그러나 권력이란 그런 높은 사람들의 손에만 있는 것입니까?
권력 남용은 우리의 일상생활에도 많습니다. 추악한 행동으로 자기 자녀들의 마음을 뒤틀리게 만든 아버지와 어머니, 일방적이고 고압적인 명령으로 직원들의 마음을 파괴하는 상사, 밀실회의에서 중요 안건을 처리하여 회중들을 힘들게 만드는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서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특히 자녀나 배우자, 또한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기억에 잔인한 말을 깊게 남길 때, 권력은 파괴적으로 작용하며, 그것을 ‘권력 남용’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힘을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게 됩니다. 그렇게 살 때 우리의 삶은 새롭게 시작됩니다. 우리는 권력에 관하여 진실을 고백해야 합니다.
[나가는 말: 진실을 말하는 사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진실을 말씀드리고 우리의 현재의 모습과 과거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질 때, 우리는 용서와 능력을 베푸는 요단강, 곧 우리를 깨끗이 씻어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해주는 요단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강은 반 고흐가 칠한 노란색이 가득한 곳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과 영생을 얻은 사람들이지만, 매일 자신의 요단강 앞에 서서 하나님 앞에 진실을 고백하며 깨끗함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때 매일의 삶이 새로운 시작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아름다운 인생이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