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HOME > 설교와칼럼 > 수요예배/특별예배
2017년 1월 11일 수요예배
✦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교훈 5 ✦
“무한경쟁시대 속의 교회와 참 안식”
(요한복음 5장 1~9절)
1. 교회에 오면 더 지치는 이유
우리는 매주 예배를 드리는데, 1년으로 계산하면 몇 번을 예배드리는 것입니까? 주일예배만 매주 드려도 52번이고, 수요예배까지 참석하면 100번 이상이며, 토요일 새벽예배까지 매주 나오면 1년에 150번 이상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그렇게 예배를 많이 드리는데도 불구하고 예배로 인해 삶이 변화되는 경우는 참 드뭅니다. 하지만 제대로 드린 한 번의 예배가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참된 예배가 죽어 가는 생명을 살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인생을 변화시키고 생명을 살리는 힘이 있는 예배라면, 사람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는 것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온전한 예배는 바쁘게 살아가는 이 시대 사람들을 치유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예배가 힘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에 참석하면서도 평안을 얻지 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예배가 힘을 잃어 간다기보다는 예배자들이 힘을 잃어 가고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느끼는 것은, 교인들이 주일예배에 참석하면서도 예배를 통해 한 주 동안의 지친 삶이 다 풀어지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입니다. 예배가 우리의 피로를 다 풀어주지 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순서에 따라 진행되는 예배와 말씀을 통해 현실의 어려움에 대한 위로와 용기를 약간 얻을 수는 있지만, 지친 삶의 치유나 회복의 감격을 매주 얻는 것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게다가 교인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거나 교회 내의 분쟁과 같은 심각한 문제가 일어나게 되면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오히려 스트레스가 됩니다. 뉴스에 종종 등장하는 교회의 분쟁을 보면, 그 교회의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예배를 통해 과연 무엇을 얻고 있는지 궁금하기까지 합니다. 분명한 것은, 그런 경우 피곤한 삶을 회복하기가 더더욱 쉽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피곤한 몸과 마음으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그리고 교회와 신앙생활 때문에 더 피곤해지는 사람들이 주변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지쳐서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까? 한 주 동안의 일이 왜 이렇게 우리를 지치게 만듭니까?
옛날에는 이 정도까지 지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럼 이전 시대 사람들은 아무 노동도 안 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보다 더 힘든 농사와 노동으로 한 주를 보냈고, 요즘보다 육체적 노동을 훨씬 더 많이 했습니다. 그래도 요즘만큼 지쳐서 교회에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이 시대에 사람들이 지치는 이유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전과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는 경쟁 사회로 변해서 사람들이 이전보다 더 쉽게 지치는 것입니다.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이고 상담가이며 크리스천 작기였던 폴 투르니에(Paul Tournier)는 <현대인의 피로와 휴식>이라는 책에서 사람들의 관계를 잘 설명해줍니다. 그에 의하면, 우리가 많은 피로를 느끼는 이유는 몸의 힘을 많이 쓰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관계 속에서 정신적 에너지를 너무 많이 사용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경쟁이 사람과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많이 만나는 직업일수록 더 피곤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경쟁으로 인하여 지쳐 있는 교인들을 치유하며 진정한 평안과 쉼을 주고 있는가? 안타깝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혹시 교회에서 예배를 통해 새로운 용기를 얻었다고 해도, 대부분은 많이 속고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너무 지치고 피곤하니까 위로의 메시지만 전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아주 큰 대형 교회들 중 몇 경우들을 보면 위로와 긍정의 메시지만 전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속고 있는 겁니다.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는 전원 교회가 유행처럼 생겨났습니다. 대도시의 주변 외곽에 전원풍의 예배당을 짓고,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주일이면 그 외곽으로 나가 예배를 드립니다. 새로운 시도로 보이기도 하고, 아주 좋은 운동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종교심리학에 의하면, 이것은 도심에 있는 교회가 쉼을 주지 못해서 생기는 현상이라는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주 내내 시멘트 건물 속에 갇혀 숨 막히게 살았는데, 주일까지 도심 속에서 복잡하게 예배드리는 것이 싫은 겁니다.
그렇다면 시멘트의 딱딱한 환경이 전원으로 변하면 쉼을 얻을 수 있을까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교회가 교인들에게 참된 안식을 주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예배당이 시멘트로 지어졌거나 교회가 도시 한복판에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한 주 내내 경쟁 사회 속에서 지친 생활을 하다가 온 교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경쟁의 문제를 풀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그것을 온전히 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교회 스스로 이미 경쟁 구도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경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주 내내 경쟁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진정한 쉼을 얻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 와 보면 교회도 분주합니다. 봉사자 간에 경쟁하고, 모임 간에 경쟁하고, 부서 간에 경쟁하고, 목장이나 셀이나 구역끼리 경쟁하고, 작년 통계와 경쟁하고, 또 주변 교회들과 경쟁합니다. 우리는 삶의 방식이 경쟁이라 그런지, 신앙생활도 경쟁하듯 합니다. 그래서 참된 안식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살 때가 많습니다.
2. 경쟁에서 이기는 것은 복이 아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건은 요한복음에만 기록된 내용입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들과는 기록 목적이 조금 다릅니다. 예수님의 행동이 어떻게 구원을 보여주는지를 섬세하게 설명한 복음서가 요한복음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여기서도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를 어떻게 고쳐주시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2절)
예루살렘 성전에는 ‘양문(Sheep Gate)’이라고 불리는 문이 있었습니다. 성전 북쪽에 위치했던 문으로서, 아마도 제물로 쓰일 양들을 들여오는 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거기에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의 물이 가끔 움직였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연못의 물이 움직이는 것 때문에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3-5절)
이 베데스다 연못의 물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의 병이 낫는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소문이 생겼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어쨌든 그 말을 믿고 많은 환자들이 연못 옆에 있으면서 물이 움직일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환자들 중에는 38년 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이 말씀을 해석할 때는, 헛된 희망에 사로잡혀 엉뚱한 시도를 반복했으나 전혀 소용이 없었던 병자가 예수님을 만나 삶의 문제를 해결 받았다고 해석합니다. 안식일에 벌어진 기적이므로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보여주는 말씀이라는 해석을 덧붙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따로 있는데, 그것은 그 당시 모든 병자들이 서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심한 병인가, 얼마나 오래 동안 병을 앓아왔는가 하는 것과 상관없이, 오직 물이 움직일 때 빨리 달려 들어가는 딱 한 사람만 병이 나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나았는지 안 나았는지는 확인이 안 됩니다. 아마 안 나았을 겁니다. 그러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병자들이 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38년 된 병자로서는 정말 힘든 경쟁이었습니다. <새번역> 성경을 보면 그를 중풍병자라고 묘사하는데, 중풍에 걸린 사람을 보면 몸의 반이 마비되어 자기 마음대로 몸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경쟁에서 밀리고 또 밀린 시간이 38년이나 지난 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병들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병에 걸린 지 38년이나 되었는데, 지금부터 38년 전이면 도대체 몇 년도입니까? 그렇게 오랜 시간 병에 걸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들과의 경쟁에서 뒤쳐졌기 때문에 낫지 못한 것이라고 스스로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까지도 병들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6-7절)
이 사람은 원래도 아픈 사람인데, 경쟁 때문에 병이 더욱 악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몸이 병약한데다가 경쟁에서도 밀림으로 마음까지 병들어 버린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실 이 사람처럼 아파서 몸을 못 움직이고 누워 있는 병자들이 연못으로 먼저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한 것을 왜 모르겠습니까? 알면서도 게속 거기에 그냥 머무는 겁니다. 먼저 못 들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당연히 낫고 싶을 텐데 왜 물어보십니까? 그가 이것이 안 된다는 것을 알면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그냥 그 상태 그대로 있는 것이 너무 당연하게 된 그런 상태를 보시고, 그에게 새로운 초점을 맞추도록 도와주고 계십니다.
재작년 안식월 이스라엘 성지순례 때 이 베데스다 연못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이곳은 계단으로 두세 층 정도 내려가야 하는 구조로 되어 있었습니다(사진 참조).
사진에서 보듯, 죽 내려가야 물이 있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중풍에 걸려 누워 있는 사람이 이런 데를 어떻게 내려갈 수 있겠습니까? 그곳에서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는 병자들 중에는 이 사람처럼 누워 있는 사람도 있지만, 다리는 멀쩡한데 다른 곳이 아픈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물이 움직일 때 재빨리 뛰어 내려가 남들보다 먼저 연못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니 본문의 38년 된 병자처럼 누워 있는 몸으로는 다른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는 한, 다른 병자들을 이길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38년 된 이 병자를 고쳐주시는 것은 단순히 육신의 치유만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지금 몸만 낫는 것을 이야기하시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나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경쟁 속에 지쳐 있는 이 한 사람을 건져 주시는 의미가 포함된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8절)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신 말씀은 단지 “병이 나았으니 일어나서 걸어가라.” 하는 뜻만이 아닙니다. 물론 몸이 나아서 걸으라는 뜻도 있지만, 이 말씀에는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이 경쟁의 자리가 아니다.”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낫고 싶으냐고 하셨을 때 낫고 싶다고 하면 되는데 남 탓을 하고 있습니다. 남들이 먼저 들어가기 때문에 자기가 안 낫는다고 신세 한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네가 이 자리에 계속 있어서는 낫지 않는다. 네가 있을 곳은 이 경쟁의 자리가 아니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삶이 황폐해지는 원인을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경쟁 사회 속에서 남들을 누르고 이기기 위해 발버둥 치면서 살아가는 한 이 시대 사람들의 병은 결코 고쳐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며 아무리 이것을 위해 저것을 위해 기도를 해도, 주님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실 때 “주님, 저 사람이 더 잘해서 안 됩니다. 저 사람이 더 빨라서 안 됩니다.”라고 밖에 대답하지 못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이 사회 속에서 치열하게 살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사는 것도 힘든데, 그것도 남의 나라에 와서 일하거나 공부를 하니 얼마나 힘이 드십니까? 그런데도 우리가 이렇게 굶지 않고 넉넉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돈이 굴러 들어오는 게 아니라, 열심히 일해야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고생해서 번 돈으로 헌금도 하시니 다들 대단하십니다. 그런데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라고 고백했는데, 많은 사람들에게는 “내게 사는 것이 돈이니”입니다. 돈은 생명과도 같아서 ‘나의 피 같은 돈’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입니다.
이 사회에서 그렇게 돈을 벌고 어느 정도 잘 살기 위해서는 경쟁이 불가피합니다. 이 사회 자체가 경쟁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학생들도 치열하게 서로 경쟁하며 공부하지 않습니까? 경쟁에서 뒤처진 사람들이 나올 때 그런 사람들을 돌보는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는 나라가 선진국이고, 그런 사람들을 잘 돌보지 않고 무시하는 나라일수록 후진국입니다.
사실은 선진국도 무시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사회적 약자들을 무시하지 않고 돌보는 사람의 숫자가 선진국일수록 많습니다. 그런 사람이 적고 없을수록 후진국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배경의 나라일수록 약자를 잘 돌보고, 계급사회일수록 약자를 멸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국도 계급이 있었기 때문에 멸시하는 분위기가 있고, 인도는 지금도 계층이 있습니다.
한국은 오래 전부터 중간쯤에 올라와 있는 것 같은데, 좀처럼 최상위권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도 경쟁이 아주 치열합니다. 오늘 뉴스를 보니까 한국에서 작년 실업자가 사상 처음으로 100만 명을 넘었고, 15~29세 청년층의 실업률은 9.8%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국민 의식 수준은 점점 높아지고 과학기술도 점점 더 발달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더 경쟁이 치열하고 살기 힘든 사회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런 사회 안에 있는 교회들도 경쟁을 하고 있고, 또 그것을 당연시합니다. 더 잘하는 교회가 살아남을 것이라는 마인드가 강합니다. 또 한국 교회는 경쟁에서 이기는 것을 축복으로 생각합니다. 소위 경쟁에서 이긴 목회자를 성공한 목사라고 좋아하고, 그런 목사와 교회에 교인들이 몰립니다. 뭔가 들을 말이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경쟁에서 이기는 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 복을 받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큰 대형 교회로 교인들이 점점 더 몰리고, 작은 교회들은 점점 더 안 모이고 문을 닫고 있습니다. 경쟁해서 이겨야 하는 자신들의 삶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큰 교회의 웅장한 예배당에 들어가 앉아 있으면 자기도 그렇게 높은 수준이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도 분명히 있습니다.
사실 그런 분위기가 된 것에는 저를 비롯한 목회자들의 잘못이 큽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의 내용이, 경쟁에서 지쳐 있는 교인들에게 ‘다시 힘을 내어서 나아가 경쟁에서 이기라’는 말로 선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이길 힘을 하나님이 주심으로써 우리가 승리할 수 있다고 많은 경우 선포되었습니다.
물런 하나님은 그런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런 기적이 믿는 사람의 삶에서 실제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학생들도 하나님이 힘을 주셔서 시험을 잘보고 좋은 학교에 갈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의 경우 누군가가 하버드(Harvard)나 아이비리그(Ivy League) 학교에 갔다면 보통 ‘할렐루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아주 형편없는 2년제 학교에 들어갔을 때 ‘할렐루야!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사업도 하나님이 성공하게 해주시고, 직장에서도 하나님이 승진하게 해주시고, 잘 믿으면 몸도 건강하게 된다는 등, 그런 것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내용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그런 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왜 주시는지가 중요합니다.
지금은 많이 깨었지만, 목사들도 얼마 전까지 경쟁적으로 박사 학위를 따려고 애를 썼습니다. 심지어 제가 학교 다닐 때 한국에서 유학 온 30대 젊은 목사님은 솔직하게 저에게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여기서 공부해서 한국의 큰 교회에 가려고 박사를 하러 왔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다 잘 안 되면 가짜 학위를 하는 경우들도 나오는 겁니다. 자기가 경쟁에서 이렇게 승리하고 축복 받은 사람임을 드러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승진을 놓고 경쟁하는데 한 명이 아파서 쓰러지면 ‘아이고, 잘됐다. 경쟁자 한 명 제쳤네.’라고 생각하고 나는 열심히 해서 승진하면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복입니까?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데 가장 라이벌인 친구가 아파서 학교도 못 나오고 제대로 공부를 못하며 몇 달씩 쉬어야 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남들을 제치고 성공할 수 있는 환경의 복을 주신 것입니까? 오히려 아파서 쓰러진 동료에게 찾아가 위로를 전하는 것, 아픈 친구에게 병문안을 가서 격려해주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회도 그렇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교회들이 경쟁을 합니다. 아니, 사실은 목회자들이 경쟁을 합니다. 자기가 섬기는 교회가 수적으로 막 늘어나기를 원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열심히 해서 성장하자고 하는 데까지는 괜찮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옆에 있는 교회가 잘되면 은근히 배 아파하고 안 좋아합니다. 그러면서 내심 그 교회가 잘 안 되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 축하할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또 쓰러진 사람이나 아픈 친구에게 찾아가 위로하고 격려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그리스도인답게,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살려면, 이런 경쟁의식과 경쟁 구도에서 벗어나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3. 참된 안식
이 시대 사람들은 지금 병들어 있고, 그 곁에는 현대판 베데스다 연못이 있습니다. 그들은 베데스다 연못이 움직이기를 바라며, 그때 남들보다 먼저 연못에 들어가 치유를 받기를, 즉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남들이야 계속 아프든 말든, 나만 들어가서 성공하면 된다는 생각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안 믿고 있을 때 그러한 생각을 가졌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면, 그때부터는 연못의 물이 움직일 때 예수님이 빨리 나에게 달려갈 힘을 주시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경쟁을 더 잘하게 기도하는 겁니다. 내 몸에 그런 힘이 없으면 예수님이 직접 나를 들쳐 안고 베데스다 연못으로 데려가 주실 것을 원하며 기대합니다. 그것을 위해 주님께 아주 간절히 기도도 합니다. 새벽기도, 철야기도, 금식기도를 합니다.
지금까지 많은 경우 그런 것을 좋은 믿음이라고 여겨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잘 믿으면 그런 축복을 받게 되어 성공할 수 있게 된다고 지금도 여전히 외치고 있는 형편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예수를 잘 믿으면 정말로 이 세상에서 성공합니까? 예수 잘 믿으면 공부를 잘하고, 좋은 직장을 잡고, 사업에 성공하고, 몸도 건강해집니까? 예, 맞습니다. 정말로 예수를 잘 믿으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성공이 무엇인가’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를 그토록 잘 믿은 대표적인 사람들이 사도들인데, 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 고생만 하다가 순교했습니다. 목이 잘려 죽고, 톱에 켜서 죽고, 능지처참을 당해 죽고, 굉장히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그런 게 성공입니까? 그런 게 잘되는 겁니까? 예, 그렇습니다. 바로 그런 것이 성공입니다. 그런 것이 잘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인정받고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으면 그것은 재앙입니다. 물론 사람에게도 인정받고 하나님에게도 인정받으면 가장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니까,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면 사람에게 못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너희가 내 제자이기 때문에, 내가 구별해서 택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정을 받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시각을 가진 사람에게는 분명히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나 세상의 시각을 가진 사람에게는 인정을 못 받고 오히려 미움을 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정해주신다면, 다른 사람이 나를 미워하고 싫어해도 그것보다 좋은 게 어디 있겠습니까? 비록 사람에게 인정을 못 받는다 해도,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면 게임은 끝난 겁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인정을 받는데 하나님에게 인정을 못 받으면 큰일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사람에게 인정을 받아도 기껏해야 몇 십 년 정도 밖에는 못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 효력이 길어야 몇 십년입니다.
베데스다의 뜻은 ‘자비’ 또는 ‘자비를 얻은 자’입니다. 과연 무엇이 자비를 얻은 것입니까? 다른 사람들을 누르고 경쟁에서 이겨 성공하면 그것이 자비를 얻은 것이겠습니까? 주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자비는 그런 자비가 아닙니다. 그런 자비는 또 다른 사람에게는 분노와 고통과 상처와 한을 주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잘됨으로써 주변까지 잘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입니다. 그런데 내가 잘됨으로 다른 사람들이 고통 받고 상처 받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가 아닙니다. 그것은 저주입니다. 하나님이 절대 인정하시는 삶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요즘 뉴스에서 많이 보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자기는 잘되었는데 자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게 만들고 상처를 받게 만드는 겁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안타까워하시고 분노하시겠습니까?
주님의 자비는 예수님을 바로 알고 경쟁의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치열하게 경쟁의 삶을 살던 사람이 예수님 때문에 그 방법을 내려놓고 이웃을 돌아보며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비를 얻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우리에게는 지금 바로 그러한 주님의 진짜 자비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참된 베데스다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다시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경쟁 구도 속에 있으면 안 됩니다. 교회끼리도 그렇고, 크리스천이라면 서로 경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경쟁사회 속에서 열심히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최선은 다하되,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견제하고 밀어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경쟁의 자리에서 일어나라 하시며, 또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십니다. 그 자리에서 일어나 경쟁 구도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오래 된 병이 나음을 입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9절)
베데스다 사건이 기록된 오늘 본문은 이상하게 끝이 납니다. 그것은 문단이 바뀌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날은 안식일이니” 하고 10절 문장의 첫 문구로 들어가야 할 말이 9절 끝에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기록의 실수라기보다는 뭔가 의도가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안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요한복음의 강조라고 생각됩니다. “안식일이니”까지가 베데스다 병자의 사건이고 그 결론인 것입니다. 진짜 안식을 알려주고 싶으신 겁니다. 경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과 치유의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안식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계명을 억지로 지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한마디로 하면 사랑입니다. 그래서 참 안식은 사랑이고, 진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안식일이 주일인데, 안식일 정신을 가지고 주일을 지킵니다. 대개 주일에는 아주 바쁩니다. 예배드리랴, 봉사하랴, 얼마나 바쁩니까? 평소에 일하든지 공부하든지 바쁘고, 주일에 교회에 오면 또 이것저것 봉사하느라 바쁩니다. 그래서 안식을 못하지 않느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짜 안식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몸이 쉬는 게 안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몸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이 안식하셨다는 것은 몸이 쉬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진짜 안식은 참 평안, 참 사랑입니다. 서로 사랑을 주고받을 때 진짜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이 사람도 이때가 안식일이니까 예수님이 그 다음 날 와서 고쳐준다고 하실 수도 있었지만, 안식일인데도 평안이 없습니다. 이 사람은 안식일에 고침을 받았기 때문에 진짜 평안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그는 진짜 안식을 얻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기도제목을 점검해보십시오. 혹시 아직도 나의 기도제목이 ‘남들보다 성공하게 해주세요’, ‘우리 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좋은 학교에 가고 좋은 직장 잡게 해주세요’와 같은 것들입니까? 아직 베데스다 연못의 경쟁 구도를 벗어나지 못한 기도제목입니다.
우리의 기도제목이 바뀌어야 합니다. 물론 성공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공을 위해서 기도하더라도 ‘남들을 잘 섬기기 위해 성공하게 해주세요’, ‘우리 아이가 이 사회에서 남들을 섬기는 종이 되기 위해 그것에 맞는 좋은 학교와 직장이 되게 해주세요.’로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서 성공하고 그 도구로서 높은 위치에 올라가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경쟁에서 이겨 성공했는데 지옥 가고, 남들보다 돈을 엄청나게 잘 벌어서 갑부가 되었는데 지옥 간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정말 예수님을 만나 치유 받은 사람이라면, 경쟁의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가야 합니다. 그 자리를 벗어나야 합니다. 나음을 입었다면 할 일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 가서 바로 나에게 베푸신 주님의 자비를, 그 사랑을 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