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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21일 수요예배
✦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교훈 2 ✦
“힘의 논리와 메시아 비밀”
(마태복음 20장 20~28절)
1. 복음을 홍보하는 시대
1980-90년대부터 교회의 이름이 소위 브랜드화하면서 교회도 브랜드 파워가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개 교회 자체가 가진 내면적 신앙이나 선포되는 말씀의 힘보다는, 교회의 이름에서 나오는 힘이 더 큰 것 같습니다. 무슨 무슨 교회라고 하면 다 아는 그런 교회의 이름이 브랜드라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들에서 부교역자들이 파송되거나 나와서 개척할 때 그 교회 이름에 동네 이름을 붙여서 교회를 시작하곤 합니다. 그런 게 브랜드 파워입니다.
몇 년 전부터 미국 교회에서 새로운 트렌드로 유행하게 된 교회의 형태는 ‘멀티사이트 처치(multi-site church)’입니다. 이전 시대의 트렌드였던 메가 처치에서 멀티사이트 교회로 빠르게 변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멀티사이트 교회란, 교회가 없는 지역에 새로운 교회를 시작할 때 독립적인 교회로서가 아니라 본부가 될 수 있는 교회에 속한 지부 개념으로 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교회가 많이 있는 지역에도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교회 개척(church planting)’과는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한국에도 몇몇 대형교회에서 이미 몇 년 전부터 이런 형태의 교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나타난 멀티사이트 교회의 특징은 메가 처치가 아닌 지역 교회들도 새로운 교회를 새척할 때 지부의 개념을 도입한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중소형 교회들까지도 멀티사이트 교회를 지향하는 이유는 장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배경의 공동체에 복음을 전하는 데에 효과적이며, 하나의 개 교회에서보다 더 많은 프로그램을 제공해줄 수 있고 교회 봉사자들도 양성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합니다.
이미 미국 교회에서는 ‘캠퍼스’라는 이름으로 멀티사이트 교회가 보편화되어 가고 있고, 한국에도 곧 도입될 것으로 보입니다. 꼭 대형교회가 아니더라도 여기저기에 목회자 한 명이 담임목사가 되는 교회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미국 교회의 트렌드를 마구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디까지 홍보를 해야 하며, 양적 성장과 교인 관리를 위해 경영학의 원리를 어디까지 사용해야 하는 겁니까? 교회가 기업화하면서 교회의 운영과 관리가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고 한다면, 그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대형 교회들은 비서실, 기획실, 홍보실을 두고 있고, 교회의 성장을 바라는 교회들도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데, 이런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오래 전 한국에 교환학생으로 갔을 때 서울 온누리교회에서 협력전도사를 했습니다. 그때 작년 안식월 때 설교목사로 오셨던 김제은 목사님이 돌아가신 하용조 목사님과 동갑이시지만 늦게 신학을 하셔서 부목사로 일하셨는데 부목사 중에서도 ‘수석 부목사’로 섬기셨습니다. 그 후에 한국 교회에서 목회 비서라는 자리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작년 여름 안식월 때 한국에서 옛날 교회 선배가 담임목사인 한 대형교회 수요예배 때 설교 초청을 받아서 설교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 저와의 연락을 담당한 부목사님이 있었는데, 지하철역에서 만나 교회당 안으로 들어가서 사무실까지 데려가더니 거기서 인사를 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분을 못 봤습니다. 거기서 목회비서인 부목사님이 저를 맞이해주었고, 그 날 예배 인도는 수석 부목사님이 한다고 해서 또 만났습니다. 예배 후에 그분은 가시고 다시 목회비서가 저를 데리고 점심식사 자리로 가기 위해 차를 타는데, 보니까 운전 담당 전도사님이 있었습니다. 목회비서 목사님은 저를 데리고 식당으로 들어가 담임목사님이 오니까 바로 자리를 떴습니다. 저에게는 아주 생소한 경험이었는데, 한국의 대형교회들은 대체로 그런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21세기 사회를 고도의 정보사회라고 합니다. 각종 매체들을 통해 매일 쏟아져 나오는 다양한 정보들을 소화해야 하는 과제는 이제 사람들에게 필수가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언론이 차지하는 비중도 그만큼 중요해졌습니다. 전통적으로 입법, 사법, 행정으로 국가의 권력을 나누어 생각하던 구도에서, 이제는 매스컴의 자리를 빼놓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언론 권력’이라는 말도 생겨났습니다. 실제로 영국의 비평가인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은 오래 전부터 매스컴을 가리켜 ‘제4의 권력’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현실을 감안할 때, 이 시대에 한 개인이나 단체의 승패가 언론 매체를 통한 자기 홍보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실제로 텔레비전이나 신문, 그리고 인터넷이나 SNS에서 효과적으로 광고하는 것을 일반 기업뿐 아니라 정부나 공공 단체, 심지어 교회 같은 종교 기관까지 중요한 사업으로 생각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몇 년 전부터 교회 웹사이트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도 Facebook이나 Twitter 등을 중요한 생활의 일부로 생각합니다. 요즘 많은 분들이 쓰는 카톡도 맨 앞 페이지에 간단한 자기 심정을 남길 수 있는데 그것을 자주 바꾸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최근의 선교신학자들은 이 시대의 선교가 단순히 복음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상황의 차원에서 이루어져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선교학자들에 의하면, 복음도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핵심을 잃어버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문화를 통해 인간 사회에 전달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제는 언론을 포함한 여러 가지 문화적 수단들을 통해서 복음 알리기를 극대화해야 하며, 그것이 이 시대 선교의 한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선교를 사업으로 해야 한다는 방법론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소위 BAM이라고 하는데 Business As Missions, 즉 선교로서의 사업을 말합니다. 그러면 홍보의 중요성이 선교에 있어서 더욱 커지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매스컴과 홍보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2. 언제나 세상과 반대가 되는 하나님의 방법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다니며 복음을 전하실 때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것은 기적이 일어났다는 말이고, 그런 기적은 세상에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을 홍보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습니다. 잘만 이용하면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만들 수 있고, 그에 따라 세를 키워서 힘을 얻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신 다음에는 항상 그들에게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부탁을 하셨습니다.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 (막 1:44)
이것은 한 나병환자를 고치신 다음에 하신 말씀입니다.
또 죽었던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다음에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막 5:43)
이런 사건들을 보면 예수님은 홍보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으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따져보면 지금의 시각으로 볼 때 아기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도 언론 매체를 통한 홍보를 효과적으로 못하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온 세상에 알려져야 할 구세주 메시아의 탄생이 형편없이 초라했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는 매스컴이 발달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예수님이 인류의 구원자로서 너무 비밀스럽고 조용하게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고작 동방에서 별을 보고 온 박사들(실제로는 이방의 점성술사들), 들에서 양을 치던 몇 명의 목자들(비천한 계층)이 탄생 소식을 들은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온 세상에 모두 알려야 하는 상황과, 그것을 최소화해 비밀로 하여 감추시는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법칙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감추어야 드러나고 은폐해야 멀리 간다는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사람들은 될 수 있는 대로 드러내야 알려지고, 될 수 있는 대로 나타내야 멀리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은 그와 다릅니다. 이것을 가리켜 ‘메시아 비밀’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은 비밀스럽지만, 결국 가장 빠르게 세상으로 전파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방법을 나타내는 말이 메시아 비밀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법칙을 확실히 정리하고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감추어져야 알려지고, 낮아져야 높아지고, 가난해져야 부요해지고, 약해져야 강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세상의 기준과는 모두 다릅니다. 하나님의 가치관은 세상의 가치관과 겹치는 부분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탄생부터 죽음까지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왕궁이 아니라 지극히 작은 시골 마을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것, 방이 없어서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것, 누울 곳이 없어 말구유(더러운 여물통)에 누우신 것, 머리 두실 곳이 없어 사역하시는 내내 떠돌아다니신 것,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 등, 이런 것들은 세상에서 볼 때 너무나 형편없는 모습이고 비천함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것이 하나님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생명과 평화를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모습은, 위대하고 화려한 모습이 아니라 아주 비천하고 낮은 모습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수많은 분쟁과 전쟁과 테러 공격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그뿐입니까? 수많은 부패와 비리와 권력 남용과 사기로 인하여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을 정도입니다. 계속되는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단체인 IS의 테러와 학살, 그들에게 영향을 받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유럽에서의 테러 공격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은 여전히 어렵고, 시리아 내전도 몇 년째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과 러시아와 중국을 비롯한 몇몇 강대국들은 세계 질서를 바로잡아 평화를 되찾겠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자기 나라가 세계의 질서를 바로잡는 경찰국가라고 하는데,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남보다 강한 힘이 있으니까 질서를 잡고 평화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입니다. 세상의 방법이나 힘의 행사로는 결코 질서를 잡을 수 없고 평화를 가져올 수도 없습니다. 힘으로 질서를 잡고 평화를 가져오겠다고 했지만 오히려 더 큰 혼란과 분열과 피의 복수를 부른 것을 역사를 통해 또 최근의 사태들을 통해 분명히 확인하지 않습니까?
왜 강력한 경제적, 물리적, 군사적 힘이 평화를 가져오거나 질서를 잡지 못합니까? 너무 단순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언제나 그것과 반대였습니다. 말 여물통에 누우신 예수님의 비천함과 낮아짐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너무나 무기력하게 체포되어 그 참혹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의 희생이야말로 우리에게 평화와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아무 힘이 없고 무능해 보이는 희생과 낮아짐으로 생명과 구원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이 땅에 참된 질서와 평화를 주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메시아 비밀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마리아의 노래’인데, 언젠가 그 주제를 가지고도 말씀을 나눌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3. 교회를 오염시킨 세상의 논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도 하고, ‘그리스도인’이나 ‘그리스도의 제자’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아버지의 성품이 그 안에 있고 아버지를 닮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삶 속에서 실천하며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바로 메시아 비밀입니다.
메시아 비밀이 우리에게 있을 때 우리 안에 참 평화와 기쁨이 생깁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 복음이 퍼져 나가며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방법만이 유일하게 평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메시아 비밀을 간직하지 않은 채 아무리 오래 신앙생활을 해도 평화와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이 메시아 비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질문해 보십시오.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는 평화가 있는가? 우리 교회에는 평화가 있는가? 내가 다니는 직장 또는 경영하는 사업체에 참된 질서가 있는가? 내 가정에 참된 평화가 있는가? 만약 평화와 질서가 없다고 생각되면, 그 이유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메시아 비밀을 가지고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지 않고 세상의 방식과 힘으로 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세상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5절)
바로 이런 것이 세상의 원리입니다. 높아지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절대 손해 보지 않고, 자기가 잘못해도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높아져서 힘을 가지고 위에서 내리 누르며 그 권세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철저히 세상의 방법과 반대입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6-27절)
하나님의 방법은 높아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낮아지는 것입니다. 남들의 종이 되고 겸손히 섬기는 것입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희생하고 손해 보면서라도 생명을 전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방법이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자녀 된 우리에게 바로 그러한 삶을 요구하십니다. 바로 예수님이 그것 때문에 이 땅에 오셨고 그 목적을 위해 사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28절)
주님은 우리도 바로 그 길을 가라고 하십니다. 어떻습니까? 이 길을 가시겠습니까? 죽음의 길인데 가시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기준과 행동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저를 포함해서 우리에게는 아직도 너무나 많은 세상의 논리, 즉 힘의 논리가 있습니다. 목회자와 교인 간에, 교인과 교인 간에, 교회와 교회 간에 힘의 논리가 작용합니다.
우리 교단 한인목회자 컨퍼런스에 가보면 수많은 목사님들이 당회 시작 전에는 초긴장 상태이고 당회가 끝나면 초죽음이 된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는 당회가 쉬운 모임 중 하나라고 하면 다들 부러워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교회 장로님들께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초긴장, 초죽음 현상이 벌어집니까? 힘의 논리가 작용해서 그렇습니다. 마치 예수님을 따르던 세베대의 두 아들들의 어머니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그 힘을 얻기를 원해서 예수님을 따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20-21절)
목회자는 그 힘을 부러워하며 목회를 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교회마다 큰 교회가 되려고 애쓰는 것은, 정말로 한 영혼이 귀해서 그 영혼을 구원하여 주님의 제자로 만들려는 시도에서가 아니라, 세를 키우기 위해서 그럴지도 모릅니다. 모두가 세상에서 인정하는 강한 힘을 얻으려고 예수님을 따르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으면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는 이 문제에 있어 이미 심각하게 오염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미 십여 년 전에 외국의 신학자가 한국 교회를 살피고 나서 “한국 교회는 돈과 권력에 이미 먹혀 버렸다.”라고 내린 진단이 아프지만 정확하다고 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교회 안에 세상의 힘과 가치관이 너무 많이 들어와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서울대에 가고 KAIST에 가고 Harvard, Yale, Princeton에 가고 의대에 가고 법대에 가는 것이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그럼 그런 데 붙으면 복 받은 것이고 떨어지면 저주를 받은 것입니까? 사회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연봉이 높으면 성공한 것이고, 잡일 정도를 하면서 그럭저럭 먹고 살 정도라면 실패한 인생입니까? 꼭 그런 것이 아니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물론 좋은 학교에 간다는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 심각하게 내가 살아가는 기준이 과연 무엇인지를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세상의 힘을 얻기 위한 도구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닙니까? 그래서 더 커지고 더 강해지고 더 높아져서 세상의 힘을 얻으려 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을 얻은 다음에는 뭐가 있는 건지를 보십시오. 서울대 가고 하버드 가고 의사 되고 검사 되면, 그 다음은 무엇입니까? 보십시오. 가긴 갔는데, 높은 위치에 올라가긴 올라갔는데, 높아진 그 자리에서 타락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요즘 그런 사람들이 뉴스에 많이 나오는데, 참 안타까운 것은 그들 중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그것도 직분자들이 많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정말 하나님이 주신 복이었는지를 심각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가 본질을 잃어버리면 아무리 예배당이 커도, 아무리 세상의 힘을 가진 사람이 교인 중에 많아도, 아무리 교인 수가 많고 예산이 많아도, 그것은 더 이상 주님의 교회일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교회로 가장한 인간의 욕망의 집단일 뿐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지금 교회는 비본질적인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방법과는 거리가 먼 행동들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4. 메시아 비밀과 마리아의 노래
하나님은 우리에게 힘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 힘을 얻는 방법은 세상의 방법이나 세상의 기준과는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힘은 바로 메시아 비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22-23절)
메시아 비밀은 예수님이 마신 고난의 잔을 마시는 것이고,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이고,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 삶에 있을 때 비로소 힘이 생기고, 그 힘으로 참 평화와 질서가 우리를 통해 이 땅에 임하게 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마음이 내 구주 하나님을 좋아함은, 그가 이 여종의 비천함을 보살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할 것입니다. 힘센 분이 나에게 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의 자비하심은,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대대로 있을 것입니다. 그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그는 자비를 기억하셔서, 자기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토록 있을 것입니다.” (눅 1:46-55, 새)
이것은 마리아가 천사로부터 메시아의 어머니가 될 것을 들은 후 엘리사벳에게 갔을 때 부른 노래입니다. 소위 ‘마리아의 노래’ 또는 ‘마리아의 찬가(Magnificat)’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은 스스로 높은 자를 낮추시고 비천한 자를 들어 높이신다.’는 내용입니다. 이 주제가 성경 전체에 걸쳐 흐릅니다. 그리고 이 ‘마리아의 노래’가 바로 ‘메시야 비밀’과 일맥상통합니다. 사무엘상의 한나의 노래도 바로 이것과 같습니다(삼상 2:1-10).
믿음의 조상들 중 다수가 수년 동안의 불임 끝에 아들을 낳은 경우가 많은데, 바로 그것도 ‘마리아의 노래’와 같은 주제입니다. 사라가 그랬는데,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이삭을 낳았습니다. 또 이삭의 부인 리브가도 20년 동안 아이를 낳지 못하다 에서와 야곱을 낳았습니다. 라헬도 레아는 아이를 낳는 동안 자기는 못 낳다가 나중에 요셉과 베냐민을 낳았습니다. 마노아의 아내도 아기가 없다가 삼손을 낳았고, 한나도 그랬으며, 마리아의 친족 엘리사벳도 늦은 나이에 세례 요한을 낳았습니다.
또 장자가 아닌 둘째나 막내가 장자의 역할을 하는 경우도 마리아의 노래 또는 메시아 비밀 신학과 같습니다. 장자인 가인이 아닌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또 장자인 에서가 아닌 야곱이 쓰임을 받았습니다. 야곱의 12 아들 중에서도 11번째 아들인 요셉이 장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요셉의 두 아들 중 장자인 므낫세가 아닌 에브라임이 더 크게 되었고, 열두 지파에도 요셉이 아니라 그의 아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들어갔습니다. 실제 장자가 요셉이었고 장자는 두 배를 받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그 외에도 형인 아론이 아닌 모세나, 아들 8명 중 막내인 다윗이 쓰임 받은 것도 그렇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신 것 역시 마리아의 노래 및 메시아 비밀의 신학입니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신 7:6-7)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는 수가 많고 강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적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변의 쟁쟁한 강대국인 이집트나 앗시리아나 바벨론을 다 놔두고 조그마한 이스라엘을 택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더구나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노예였지 않습니까? 노예를 택하셨습니다. 물론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이루신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 다섯 여인들이 있는데, 모두 과거가 복잡하고 기구한 여인들입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마 13:3-6, 16)
이 다섯 여인들을 보십시오. 다 정상적이 아닙니다. 다말은 청상과부로 시아버지 유다를 통해서 아들을 낳은 여자입니다. 정말 비정상적입니다. 라합은 여리고의 기생이었는데 실제로 창녀였습니다. 룻은 모압 즉 이방 여인이며 청상과부였습니다. 우리아의 아내는 이름도 안 나오는데, 밧세바 역시 말할 필요도 없이 기구한 여인입니다. 마리아는 십대 소녀로서 나사렛 최대 스캔들의 주인공입니다. 13세로 보기도 하고, 기껏해야 고등학생 나이의 어린 소녀였습니다.
게다가 무엇보다 십자가를 구원의 도구로 쓰신 것이 마리아의 노래와 메시아 비밀의 신학입니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마리아 노래의 신학을 보여주시며 메시아 비밀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낮추고 또 낮추고 또 낮추셔서 마침내 하나님께서 높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따라가는 우리의 신앙생활 역시 바로 메시아 비밀이며 마리아의 노래의 신학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고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메시아 비밀과 마리아의 노래의 방법으로 살아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