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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8일 수요예배
✦ 예수신경 6 ✦
“이웃을 위한 신경”
(누가복음 10장 25~37절)
1. 잘못된 질문과 올바른 질문
예수님은 사람들의 상식을 깨고 당황스럽게 만드는 말씀을 많이 들려주셨습니다. 그 중 아주 좋은 예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25) 그러자 예수님은 직접적인 대답을 안 하시고 오히려 질문을 하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26) 아마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예수님이 가르치신 예수신경에 대해 전해 들었을 것이 분명한 그 율법교사는 대답을 합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7절)
그러자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해라. 그러면 살 것이다.”라고 하십니다(28). 이 말은 “네 대답이 아주 훌륭하다. 점수로 하면 A+다!”라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에게 인정을 받은 이 율법학자는 우쭐한 마음이 들었는지 재차 묻습니다.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29절)
이 질문을 잘 보십시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가 됩니다. 예수신경의 첫 번째가 ‘네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두 번째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율법교사는 자기가 사랑할 수 있는 이웃이 누구냐고 질문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누가 우리의 참 이웃인가?’를 묻지 않고, ‘내가 섬길만하게 성결하거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 누구인가?’를 물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질문은 사람에 대해서 등급을 매기고 구분을 짓는 질문입니다. 즉, ‘누가 성결한가?’라는 질문은 ‘누가 나에게 사랑받을 만한 자격을 가진 사람인가?’라는 질문이 됩니다. 예수님은 그가 한 질문의 뒤에 바로 그런 더 큰 관심사가 숨어 있음을 아시고, 이 율법교사가 당황할 만한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시는데, 바로 그것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0절)
이 이야기의 배경으로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이런 이야기는 실제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여행을 가다가 강도들의 공격을 받아서 폭행을 당한 뒤 겨우 목숨만 붙어 있은 채 쓰러져 있는 상황입니다. 그때 마침 두 사람이 지나갑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1-32절)
한 제사장과 성전에서 일하는 레위인이 그곳을 지나가다가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견하는데, 혹시라도 그가 죽은 시체이면 그를 만져서 부정하게 될까봐 두려워 옆으로 피해서 갑니다. 그들은 분명히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았고, 피했고, 그대로 지나쳐 갔습니다. 이것은 결코 그들이 나쁜 사람들이라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합니다. 오히려 그들은 토라(율법)를 따라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11 어느 누구의 주검이든, 사람의 주검에 몸이 닿은 사람은 이레 동안 부정하다. 13 누구든지 주검, 곧 죽은 사람의 몸에 닿고도 스스로 정결하게 하지 않은 사람은, 주의 성막을 더럽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반드시 이스라엘에서 끊어져야 한다. 정결하게 하는 물을 그 몸에 뿌리지 아니하여 자신의 부정을 씻지 못하였으므로, 그의 부정이 여전히 그에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16 들판에 있다가 칼에 맞아 죽은 사람이나, 그냥 죽은 사람이나, 그 죽은 사람의 뼈나, 아니면 그 무덤에라도 몸이 닿은 사람은, 누구나 이레 동안 부정하다.” (민 19:11, 13, 16, 새)
이 말씀을 보면, 사람의 시체를 만진 사람은 부정하게 되고, 길에서 죽어 쓰러져 있는 시체와 닿아도 부정해집니다. 이것은 스스로 정결하게 하지 않으면 13절에서 “반드시 이스라엘에서 끊어져야 한다”고 할 정도로 굉장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또 레위기 21장에서는 제사장에 대해 나오는데, 제사장은 직계 가족을 제외하고는 부정한 시체와 접촉하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시체에 다가가 자신의 그림자가 그 시체 위에 드리우게 되어도 그 사람은 부정해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이 쓰러져 있는 사람을 피하여 옆으로 돌아가서 지나간 것이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진짜 죽었으면 자기 그림자가 시체에 닿으면 부정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매정하고 못된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율법에 순종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배운 대로 실천한 것입니다.
그 순간 예수님의 비유를 들은 사람들 가운데 그 제사장과 레위인이 율법에서 규정하지 않은 잘못된 행동을 했다고 생각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과 레위인이 율법에 순종하기 위해서 율법의 근본정신인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에 불순종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올바른 일을 행한 사람은 유대인들이 경멸하던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2)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3-35절)
이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도전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도 도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고 예수신경인데,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유대교의 쉐마)과, 예수님을 따름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예수님의 쉐마 = 예수신경)이 서로 충돌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따라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바리새인들이 지키던 유대교의 쉐마를 따르고 예수님의 쉐마를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이런 경우와 비슷합니다. 차를 타고 주일예배를 드리러 교회당으로 가는데, 가다가 보니까 교인 중 한 명의 차가 고장 나서 길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나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경건하게 예배를 드리러 가는 길이기 때문에, 거기 서면 거룩하게 예배드리는 데에 늦게 됩니다. 그래서 그냥 갑니다. 이런 경우 과연 어떤 것을 하나님이 더 기뻐하시겠습니까? 실제로 그런 상황이 되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언제라도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돌보아주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그렇게 사랑하며 돌본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2. 율법 사랑인가, 사랑의 율법인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부정함을 피하라는 율법을 따랐지만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돌보는 일에는 실패한 사람들을 꾸짖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가장 큰 계명이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수십 번 들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율법을 반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오해합니다. 율법을 반해서 행동하셨다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율법을 완전하게 하러 오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 5:17)
예수님은 율법을 없애러 오신 게 아니라 완전하게 하러 오셨습니다. 안식일 문제만 해도, 예수님은 꼭 일부러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 전날이나 다음 날에 고치셔도 되는데 그러셨습니다. 단순히 병자를 안 고치는 게 안식일을 지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병자를 고쳐주는 게 안식일을 지키는 것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이 아니라, 율법의 근본정신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빠진 채로 율법을 지키는 것을 반대하십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은 바로 이 부분에서 늘 부딪쳤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정신보다도 문자를 지키는 데 신경을 썼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율법을 어기는 자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자기들이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음을 예수님께서 여러 번 드러내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게 됩니다.
오늘 비유에 등장하는 제사장과 레위인도 율법의 문자는 따랐지만, 그 정신을 따르는 데는 실패했다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의 문자는 따랐지만, 그 말씀을 왜 주셨는지를 놓쳐버렸습니다.
예수님께 질문을 한 율법교사는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냥 보면 평범한 질문 같은데 이것을 잘 파악해야 합니다. 내가 사랑할 만한 대상이 누구냐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 없는 행동으로 율법을 문자 그대로 따르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의미로, 사람을 구분하고 차별하게 되는 그 질문을 다른 질문으로 바꾸셨습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36-37절)
이 사람은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당연히 “자비를 베푼 자” 즉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자신이 부정해질까봐 쓰러져 있는 사람을 그냥 지나쳐 갔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사랑하고 섬길 이웃을 내가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다고 되어 있습니다(33). 그를 보고 제사장과 레위인은 피하여 지나갔고, 이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를 보았을 때 ‘괜히 잘못 만졌다가 내가 부정해진다’는 것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자기가 부정해질까봐, 쓰러진 사람이 진짜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 확인도 안 한 채 그냥 피해서 간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섬기고 사랑할 이웃을 내가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가 부정해질 것을 생각한 게 아니라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나’를 생각했고, 사마리아 사람은 쓰러져 있는 사람을, 즉 상대방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정성을 다해 그를 도왔습니다. 잘 보니까 살아 있었습니다. 사실 죽지도 않았는데 시체인 줄 알고 피해서 갔다는 것은 지나친 일입니다.
이렇게 자기가 이웃을 선택하지 않고, 오히려 지금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고 외면하지 않고 도와준 것, 이것이 진정한 이웃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강도를 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이 살아 있지 않고 죽었다면 그를 괜히 만졌다가 부정해지기 때문에, 제사장과 레위인은 아예 알아보지도 않고 그냥 멀리 피해서 간 것입니다. 혹시 그가 살아 있다면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을 그들도 알았겠지만, 그것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냥 내가 부정해지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초점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이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이웃이 누구인지를 자기가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할 사람을 내가 골라서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의 이웃이 누군지 선택하지 않고 그냥 도왔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이웃 사랑입니다.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것은 율법 사랑, 즉 율법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율법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율법을 문자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주신 원래 의도와 거기에 담긴 사랑을 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오늘 비유에 나오는 제사장과 레위인을 비난하기가 쉽지만, 우리 역시 사랑의 율법이 아니라 그 반대로 율법을 사랑하는 일에 사로잡힐 때가 많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스스로 가지고 있는 ‘안전한’ 이웃 사랑, 자기중심적인 이웃 사랑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이웃 사랑은 너무나 안전하고 편안하고 자기편리 위주라고 하십니다. 내가 사랑할 이웃을 내가 선택합니다. 내가 섬길 사람을 내가 고릅니다. 섬기고 싶은 사람은 섬기고, 섬기기 싫은 사람은 섬기지 않습니다. 사랑하고 싶은 사람은 사랑하고, 사랑하기 싫은 사람은 사랑하지 않습니다.
조금 막연합니까? 그럼 이런 예를 들면 되겠습니다. 집에 식사를 초대할 때, 내가 초대하고 싶은 사람만 초대하고, 별로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나 불편한 사람은 초대하지 않습니다. 아닙니까? 밖에서 다른 지체와 만나 식사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만나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이나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보다는, 나에게 편한 사람이나 내가 만나면 즐거운 사람, 나와 말이 통하는 사람만 만납니다.
솔직히 저도 그것을 잘 압니다. 저도 그게 훨씬 더 편합니다. 사실 편한 사람을 만나는 게 좋지 불편한 사람을 만나는 게 뭐가 좋습니까? 그래서 목회자들이 실수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이런 겁니다. 심방을 할 때 내가 편한 사람에게는 자주 가고 불편한 사람에게는 안 가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이웃 사랑이 아닌 것 역시 잘 압니다.
<경건의 삶>의 “섬김의 훈련” 시간에 바로 이 점을 다룹니다. 교재인 <영적 훈련과 성장>에서 저자인 리처드 포스터(Richard Foster)가 이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의의 섬김은 누구를 섬길지 그 대상을 선택한다. 때로는 높은 지위에 있고 권세를 가진 사람만 섬긴다. 그렇게 할 때 이득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때로는 낮은 사람이나 어려운 사람을 섬기기도 한다. 그렇게 할 때 자신의 겸손을 내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섬김은 차별을 두지 않는다. 진정한 섬김은 ‘모든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막 9:35)는 예수님의 명령을 청종한다.” (p. 209)
여러분, 우리는 작은 일부터 실천해야겠습니다. 내가 편한 사람만 자꾸 만나거나 초청하다 보면, 반드시 문제가 일어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진짜 이웃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편할 때 하고 편한 사람에게만 한다는 말은, 내가 불편한 사람과 불편한 때에는 안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랑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웃 사랑일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목장이 우리에게 참 유익이 됩니다. 목자, 목녀, 목부를 안 하시는 분들은 꼭 해보시라는 게 바로 그겁니다. 내가 책임을 맡았기 때문에 힘들고 불편하고 하기 싫을 때도 해야 합니다. 책임이 없으면 도망갈 텐데 도망갈 수가 없습니다. 싫어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때 그것은 위선이 아니라, 나는 싫지만 주님의 명령이기에 하다 보면 그것이 쌓여서 점점 예수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모습으로 변해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택사항(option)이 아니라 꼭 해야 하는 주님의 명령으로 받을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내가 선택하지 말고 이웃이 필요한 사람에게 나아가 그에게 이웃이 되어 주고 진정한 이웃 사랑을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예수신경입니다. 여기 사마리아 사람이 쓰러진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도와주었는데 그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시간이 지체되었습니다. 또 자기의 물품이 들어갔고, 돈까지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진짜 이웃 사랑, 예수신경을 실천하려면 그냥 되지 않습니다. 내 시간이 들어가고 돈이 들어갑니다. 그렇게 안 하고 슬쩍슬쩍 하게 되면 그것은 진짜 이웃 사랑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예수신경대로 살라고 그거을 주기만 하신 게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특히 자신을 배신한 제자들과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조차 다 용서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3. 눈을 옆으로 돌려 이웃을 보고 사랑을 실천하는 삶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눈을 옆으로 돌려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보라고 명령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사마리아 사람이 행한 일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옆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진짜 옆을 말한다기보다, 자세하게 들여다보는 것을 말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다가 눈을 옆으로 돌렸기 때문에 상처를 입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볼 수 있었고 도울 수 있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도 분명히 쓰러진 사람을 보았는데,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자신의 앞만 바라보았기 때문에, 자기가 갈 거룩한 길만 바라보았기 때문에, 자기가 가는 길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특히 율법대로 사는 자신에게 해가 되기 때문에, 그냥 피해서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해가 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시체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냥 갔습니다. 하지만 이웃 사랑은 옆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1) 가정에서 시작되는 이웃 사랑
예수님의 삶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장면들 중 하나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어머니를 요한에게 맡기면서 어머니와 요한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요 19:26-27)
예수님은 가족에 대한 책임을 확실하게 강조하고 계십니다. 안타깝게도,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밖에서 다른 사람에게는 사랑을 베풀면서도, 정작 자기 가족은 사랑에 굶주리도록 내버려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가정 역시 이웃 안에 포함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병원에 찾아가 에이즈(AIDS) 환자에게 긍휼을 베풀고, 재난을 당한 사람들에게 성금이나 헌금을 모아 보내는 것은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일입니다. 남들 눈에 잘 보입니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 내 아내, 내 남편, 내 딸, 내 아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고, 또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일은 사람들의 관심을 별로 끌지 못합니다. 안 보입니다. 가정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보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사랑을 보이는 것이 더 쉽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바로 이 부분에서 잘못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사랑이라는 것이 가장 비현실적인 장소에서만, 가장 예외적인 시간에만, 또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처럼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웃 사랑이 가정에서 시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가정에서 사랑이 보이지 않는다면, 대중 앞에서의 사랑은 가짜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정에서 이웃 사랑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간단한 것부터 하면 됩니다. 아침에 가족을 위해 기도하면서 식구들 하나, 하나를 놓고 이런 질문을 하는 겁니다. ‘나는 OO(남편, 아내, 아들, 딸, 아버지, 어머니)를 위해 오늘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하면 가족을 위한 우리의 기도는 은밀한 사랑의 기도이면서 그날 행해질 이웃 사랑의 계획이 될 것입니다.
2) 언제나 사랑하고 어디서나 사랑하는 이웃 사랑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할 때에는 언제 어디서나 긍휼을 품고 행동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여행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긍휼을 베풀기 위해 자신을 더럽히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나아가 죽음의 문턱에서 사경을 헤매는 사람을 만나는 것 역시 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부정한 시신을 피해서 간 그 사람은, 바로 사마리아 사람이 불쌍히 여기며 긍휼로 감싸준 사람이었습니다. 똑같이 갑작스럽게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견했지만,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냥 피해서 지나가고, 사마리아 사람만 멈추어 그를 도와주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신경의 두 번째 부르심이 언제 들릴지 미리 예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언제든지 필요한 때에 맞추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신경은 언제 어디서나 이웃을 사랑하라는 신경입니다. 그리고 예수신경은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는 것처럼, 이웃을 향한 거룩한 사랑으로도 우리를 부릅니다.
3) 이웃 사랑을 향한 부르심
지금 이 시대에 사회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단어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관용(tolerance)’입니다. 관용 하면 ‘똘레랑스’의 프랑스가 생각납니다. 이 관용이 강조되면서, 미국에서도 여성의 선택을 존중하여 낙태금지법이 없어졌고, 다른 종교 사람들을 존중하여 공립학교에서 성경이나 기도가 사라졌으며, 성적 경향도 사람마다 다름을 인정하여 동성애자들도 정상이라고 판정되었으며 결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사회가 관용을 최고의 미덕으로 올려 세웠기 때문에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많은 혼란이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들도 관용을 최고의 덕목으로 치켜세웁니다. 우리 미국장로교를 비롯하여 많은 주류 교단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에는 서로에게 나이스한 것을 가장 중시합니다. 마음에 부담을 주는 말은 절대 하면 안 되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말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관용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랑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관용은 친절을 베풀지만, 사랑은 상대방의 진정한 필요를 채워줍니다.
관용은 상대방이 원하는 것에 대해서는 터치하지 않고 친절하게 미소를 지어줍니다. 설사 잘못된 결정을 해서 죽음의 길로 간다고 해도 자신의 결정이므로 존중해 줍니다. 하지만 사랑은 상대방이 죽음의 길로 가려고 할 때, 자신이 욕을 먹고 손해를 보고 심지어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고 해도 그것을 막아주려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관용과 사랑을 혼동합니다. 다른 사람의 선택과 행동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내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사랑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말씀 때문에 오해를 하는 겁니다.
“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 너희가 남을 심판하는 그 심판으로 하나님께서 너희를 심판하실 것이요,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그 되로 너희에게 되어서 주실 것이다.” (마 7:1-2, 새)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보면서, 예수님은 다른 사람에 대해 도덕적 심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의 사랑을 가르치셨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항상 도덕적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항상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아바 아버지의 거룩한 사랑과 아바를 향한 우리의 거룩한 사랑에 바탕을 둔 것으로서, 다른 사람에 대한 인격적인 응답입니다.
예수님께서 수정하신 하나님 사랑은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첫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거룩한 쉐마에다 한 구절을 추가하셨습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 19:18)
예수님은 사랑이 뭐라고 직접 정의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사랑에 대한 의미를 잘 정의해주고 있습니다. 예수신경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통로가 되라는 부르심입니다.
예수신경을 다른 말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살아가는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통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의 핵심을 예수님은 ‘새 계명’으로 주셨습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요 13:34-35, 새)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 사람들 앞에서 들고 있으라고 주신 표지가 바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증거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우리의 하나 됨입니다. 이 표지를 통해서만 이 세상은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람들이고,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 세상의 구주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서로 뜨겁게 사랑하며 하나 됨을 이루기 원합니다. 내가 섬길 사람이나 사랑할 사람을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필요가 내 앞에 보이도록 하나님이 인도해주실 때, 그를 섬기며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바로 이렇게 진정한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나아갈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