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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6 5 주일예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33

참된 위대함을 추구하는 인생

(마가복음 9 30-37)


 

[들어가는 ]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멸시를 받아 사람들은 노예 계급이었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1세기 당시의 로마 사회는 무려 5천만 명이 넘는 노예들을 부렸습니다. 세계를 정복하면서 식민지에서 잡아온 수많은 노예들을 통해 사회를 유지시켰던 것입니다. 그렇게 노예들이 반드시 필요했으면서도 로마는 노예들을 극도로 멸시하는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로마에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면서 종에 대한 개념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원래 ‘종’을 뜻하는 헬라어 단어가 있는데, 중에서도 개인의 자유가 박탈되고 무시된 그런 종을 나타내는 말이 ‘둘로스(doulos)’라는 단어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여러 편지들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마다 자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둘로스(노예)’라고 소개합니다. 그러한 바울 이후의 사역자들도 자기들 스스로를 주님의 종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근대 시대에는 국가의 지도자들을 종으로 인식하는 문화들이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에 끼친 가장 영향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러한 종의 정신, 봉사의 정신을 사회에 가르쳐준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섬김의 정신의 원조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종으로 섬기러 땅에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핵심 정신은 바로 섬김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일꾼들은 모두 자기가 종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한국 교회에서는 종의 정신이 점점 변질되다가, 급기야는 목사가 주의 종이며 주의 종을 섬겨야 복을 받는다는 말이 나왔는데, 사실 말은 잘못된 말입니다. 이것은 유교적 영향을 받은 한국 사회 구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디 목사만 주의 종입니까?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의 종입니다. 게다가 그런 잘못된 정신이 심해진 경우에 ‘주의 종님’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문법적으로도 맞지 않고, 정말 있을 없는 말입니다. ‘주님의 종’이어야지 무슨 ‘주의 종님’입니까? 종에 어떻게 ‘님’ 자가 붙을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지금 시대의 우리만 섬기는 종이 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예수님 당시 제자들도 그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종이 되어 섬긴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종이 되어 섬기는 것이야말로 참된 위대함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장애물을 극복하고 진정한 섬김의 정신을 실천할 있겠습니까?

 


1.   참된 위대함을 위해 극복해야 장애물들


1)  우월의식


우리가 정말로 섬기는 자가 되어 참된 위대함을 추구하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 극복해야 번째 장애물은 ‘우월의식’입니다.


예수님은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가셨을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해서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십니다”(8:29).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은 기뻐하시면서, 그때부터 자신이 메시야로서 많은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8:3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는 삶을 감당하려면 하늘의 영광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명의 제자들을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가셔서 변형되시며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9:2). 사건 이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다시 남쪽 갈릴리 지방의 가버나움으로 내려오시는데, 산에서 내려오시면서 계속 십자가를 묵상하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30-31)


그런데 이런 중요한 말씀을 하셨지만,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32)


주님은 자신이 져야 십자가를 바라보시고 묵상하시면서 길을 가고 계셨는데 제자들은 길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33-34)


예수님이 이것을 몰라서 물으신 아닙니다. 아셨습니다. 그들의 대화를 들으셨습니다. 그러나 확인하기 위해서, 그리고 본격적인 가르침을 주시기 위해서 물어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생각하며 묵묵히 길을 걷고 계셨는데, 제자들은 길에서 누가 크냐고 싸웠다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 이런 토론을 하게 되었는가? 아마도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 올라가서 변형되실 어쩌면 (베드로, 야고보, 요한) 데리고 올라가셨으니까 자만심이 높아진 명이 자기들을 특별한 존재라고 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나머지 아홉 명을 업신여겼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산을 내려와 보니까,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아이를 데려왔는데 아홉 명의 제자들이 고치고 있으니까 한심하다고 하며 도발을 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4복음서, 특히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이 유독 명의 제자들만 따로 데리시고 어디를 가시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5:37), 높은 산에 올라가서 변형되셨을 ( 9:2), 겟세마네 기도의 자리( 14:33)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명만 따로 데리고 다니신 것인가? 많은 분들이 이것을 보면서 편애를 하셨고, 특별히 좋아하는 제자들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열두 명을 똑같이 사랑하셨습니다. 누구나 사랑하셨습니다. 또는 일반적으로 명이 제자들 중에서 가장 핵심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볼 있습니다. 명은 열두 제자 중에서 가장 요주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명에게는 따로 특별 보충교육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요즘 말로 하면 소위 ‘공포의 삼인방’이었습니다. 명은 특히 분열을 일으킬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어디 가시고 이들을 나머지 제자들과 같이 두시는 것이 불안하게 느껴지셨을 수가 있습니다.


열두 제자 가장 문제 인물로 예수님을 가룟 유다를 생각할 있지만, 유다는 혼자서 조용히 음흉하게 사고를 치는 사람이었지, 분열을 일으키는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유다는 세리인 마태를 제치고 자기가 예수님 일행의 재정을 맡을 정도로 똑똑하고 수에 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도둑이었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유다는 공금횡령을 해서 부동산 투기를 했습니다. 돈을 빼돌려서 땅을 샀습니다. 유다는 그런 식으로 혼자 몰래 했지, 드러내놓고 싸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모두 교만하고 명예심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이에 대한 증거가 많이 나타납니다. 8장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해 위대한 신앙고백을 했지만 예수님께서 메시야가 무엇을 하는지 말씀하시자 예수님을 야단쳤습니다. 그러다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뒤로 물러가라” 하는 꾸지람까지 들었습니다.


우리는 이것만 봐도 베드로가 얼마나 나서기 좋아하는 사람인가를 있습니다. 베드로는 항상 먼저 나서는 사람이었고, 그것은 교만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감정대로 움직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 옆에 있으면 얼마나 조마조마 합니까? 베드로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참지를 못했습니다. 심지어 자신들의 선생이신 예수님조차 자기 마음에 들면 팔을 붙들고 흔들어대면서 함부로 입을 놀리고 위협하던 건방진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도 그랬지만, 야고보와 요한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형제입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인데,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베드로가 그들의 아버지 세베대로부터 배를 빌려서 어부를 하던 관계였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부잣집 도련님들입니다. 사장님 아들들입니다. 베드로는 사장님 밑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베드로보다 문제를 많이 일으켰습니다. 바로 다음 본문(9:38-39) 이들 형제의 교만한 모습이 나옵니다.


나중에 누가복음도 살펴볼 기회가 있겠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다고 하늘에서 불을 내려 죽여버릴까요 하고 나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아주 위험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따로 훈련을 시키신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공부 중에 <경건의 > 있는데, 주교재가 <영적 훈련과 성장>입니다. 리처드 포스터(Richard Foster) 분이 책인데 원제는 <Celebration of Discipline>입니다. 이분이 <기도>라는 책도 썼고, <, 섹스, 권력>이라는 책도 썼습니다.


책에 보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가 반드시 싸우고 극복해야 가지 유혹은 돈과 섹스와 권력의 유혹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지 중에서 가장 미묘한 , 어떤 의미에서 가장 강력한 , 사람들이 유혹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빨려드는 가장 강하고도 미묘한 유혹이 뭔가 하면, 바로 권력의 유혹이라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별로 마음에 닿지가 않았습니다. 사실 돈의 유혹, 성적인 유혹은 아주 강렬합니다. 신학교 다닐 때도 선배 목사님들로부터 목회자는 돈의 유혹과 성적인 유혹을 조심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권력의 유혹은 그에 비해 적게 들었던 같습니다.


그런데 지내다 보니까, 권력이라는 것이 정치권력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뉴스를 보면 국회의원들끼리 싸우는 장면들이 많이 나옵니다. 한국만 아니라, 일본, 유럽, 호주 사람들도 치고받고 싸웁니다. 그런데 권력의 갈등이 그런 데에만 있는 아닙니다. 가정에도 있습니다.


부부싸움의 본질이 바로 권력 다툼입니다. 누가 가정의 주도권을 잡느냐 때문에 부부싸움을 합니다. 가정 안에서 고부간의 갈등도 그렇고, 자식들이 자기들도 컸다고 부모에게 반항할 속상합니다. 자녀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어서도 그렇지만, 부모 중에서도 특히 아버지들은 ‘감히 아버지인 나에게 도전을 하다니’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밑에 깔려 있기에 갈등이 일어납니다.


가정만이 문제가 아니고, 직장이나 사업체도 그렇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모든 직분은 봉사의 자리입니다. 봉사하라고 받는 직분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 필요에 따라서 여러 직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직분조차 요즘은 계급화가 되어 있습니다. 떨어지거나 무엇을 하다가 그만둔다고 하면 괜히 섭섭하고 속상해 합니다. 권력에 대한 갈등구조가 우리 속에 얼마나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지를 있습니다.


서구보다 한국 사람들에게 이런 것이 강한 같습니다. 유교적인 영향이 큽니다. 유교에서 중요한 것은 출세하는 겁니다. 과거 급제해서 출세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과거에 급제하면 ‘감투를 쓴다’고 하는 말이 생겼습니다. 조상을 자랑할 ‘우리 조상님은 누구누구 집에서 노예로 살던 분이다’라는 자랑하지 않습니다. 조상님이 어느 고을의 사또를 했다, 영의정을 했다는 것을 자랑합니다.


지금도 집안에 총리가 나오거나 장관이 나오면 굉장히 가문의 영광이 아닙니까? 그러나 자리를 차지한 것으로 무슨 영광이겠습니까? ‘장관’을 영어로 minister라고 합니다. 목회자도 사역자라는 의미로 minister라는 말을 쓰는데, 봉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일을 하며 봉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장관이 되었는데 일을 못하고 비리를 저질러 잡히면 무슨 영광이겠습니까?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 있는 다른 문제가 서열의식입니다. 계급을 나누는 서열의식입니다. 처음 보는 사람끼리 만나면 가장 먼저 궁금해 하는 뭡니까? 나이입니다. 그래서 무슨 띠인지도 따지는 같습니다. 내가 살이라도 위면 괜히 형님이 같아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나이가 어리면 괜히 숙이고 들어갑니다. 그래서 학번도 따져봅니다. 이름이 비슷하면 촌수를 따져봅니다. 어린아이가 자기보다 높으면 기분이 좋고 그렇습니다. 그러나 한두 많고 촌수가 많아봐야 거기서 거기인데 그게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끊임없이 권력에의 갈구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한국의 초기 선교사들 언더우드 선교사님이 새로 도착한 후배 신참 선교사를 교육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한국은 모든 권력구조다. 그래서 윗자리, 아랫자리를 구분해야 한다. 한국 사람들은 방에 들어가도 일등석, 이등석, 삼등석이 있으니 봐야 한다. 그러자 후배 신참 선교사가 묻습니다. “그러면 한국 방에 들어가면 일등석, 이등석, 삼등석이라고 사인이 붙어 있습니까? “그런 표시는 없다. 눈치로 알아야 된다.”라고 교육했다고 합니다.


교회 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직분, 제직은 철저히 봉사 직분인데, 한국 교회에서는 유교와 결합을 해서 계급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한국에 가끔 보면 명함에 장로라고 써서 다니는 분들이 있는데, 그런 일은 한국에 밖에 없다는 겁니다. 장로는 교회 내에서 섬기는 직분으로서의 장로이지, 교회 밖에서 자신을 소개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잘못된 하나가 바로 ‘당회장’이라는 말의 사용입니다. 당회는 장로교회에 있는 것이고 침례교회 등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당회장을 굉장한 명예로 생각합니다. 조금 나아가서 노회장, 총회장은 더합니다. 원래 당회장은 당회의 사회를 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에 가보면 ‘담임목사실’이라고 되어 있지 않고 ‘당회장실’이라고 붙여 놓았는데, 아주 잘못된 겁니다. 당회가 매일 열리지도 않는데 무슨 당회장실입니까? ‘목사님’이라고 하면 되는데 ‘당회장님’이라고 부릅니다.


노회장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분들은 노회장을 굉장한 명예로 여기는데, 물론 봉사직이니까 감사한 일이긴 합니다. 하지만 노회장은 단지 1 동안 노회의 사회를 보고 이끌어 가는 사람입니다.


신앙 체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체험이 있는 사람은 굉장히 뭐가 같고, 체험이 없다고 주눅 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합니다. 믿음생활을 오래 분이 아닌데 그런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리더들이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것처럼, 너무 드러내며 하지 말고 방언을 조용히 하는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뒤로 돌면서 하는 말이 “방언도 못하는 주제에 말이 많아?”라고 합니다. 자기는 있는데 남은 없다고 무시하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방언을 주셨겠습니까? 기도하라고 주신 겁니다. 은사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주시는 겁니다. 교회를 위해 기도하라고 방언의 은사를 주셨고, 예언이나 신유의 은사도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위에 올라가서 예수님이 변화되시는 것을 체험한 명이 잡고 으스댔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런 체험했는데, 너희는 체험도 못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너희는 지금 귀신도 쫓아내고 이게 뭐냐? 그러나 예수님은 저번에 분명히 이것에 대해 부활하실 때까지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함부로 말할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체험이 있고 없고 하는 것을 자꾸 구별하고 계급을 나누는 구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나는 이게 있으니까 너보다 높다. 너는 나보다 밑이다.’라는 의식입니다. 이런 때문에 진정한 섬김이 가려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를 뽐내고 싶은 우월의식을 극복하는 길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렇게 권합니다. “너희 안에 마음을 품어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다. 말이 뭐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과 같은 분이시지만 하나님과 같은 영광을 취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종의 모습으로 인간이 되어 오셔서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돌아가신 분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바라보며 나아갈 우월의식이 극복될 있습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예수님의 종답게 봉사의 자리에 서서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2)  이기주의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김은 ‘섬김’입니다. 그런데 섬김이 순수하지 않게 때가 있는데 이유가 바로 이기심입니다. 섬기고 봉사하면서도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또는 자기가 드러나고자 하는 마음, 은근히 대접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깔려 있으니까 제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봉사를 하고 구제를 혹시 자칫 잘못하면 그렇게 수가 있습니다. 교회에 여러 사역이 있는데 보통 어떻게 자원하십니까? 교회에서도 자원하라고 광고가 나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내가 이거 하면 재미있겠다. 이거 하면 나에게 유익이 되겠다. 이거 하면 내가 뭔가 날릴 있겠다.’라는 기준으로 하진 않으실 압니다. 그런데 혹시 그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들 앞에 많이 보이는 사역은 많이들 자원하는데 뒤에서 보이는 사역에는 많이 자원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해야 유익이 되는데, 뒤에서 하면 폼이 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아직 차량 안내를 필요까진 없지만, 어떤 교회는 예배 때처럼 앞에서 보이는 것에는 자원들을 많이 하는데, 밖에 나가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차량 안내를 하는 것처럼 힘든 것은 자원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짜 봉사는 열심히 봉사하고 그것이 내게 유익인가 아닌가를 따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 육신을 입고 인간으로 오셔서 어떤 대우를 받으셨습니까?형편없는 대우를 받으시고 심지어 죽임까지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봉사를 열심히 순수하게 주님을 위하여 했는데도 욕을 먹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진짜 봉사가 아닌가 합니다. 예수님도 섬기시고 죽기까지 하셨는데, 비난을 받으시고 미움을 받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그런 대우를 받을 필요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니 뱉음을 당하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진정한 섬김이었습니다.

 


2.   참된 섬김과 참된 위대함


예수님은 제자들이 바로 이것을 배우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사람의 끝이 되며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35)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끝이 되어야 한다,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 섬기는 사람이 정말로 위대한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섬김의 표본, 섬김의 모델로서 눈으로 보이게 예를 들어 주십니다.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36-37)


어린아이 하나를 앞에 세우시고 아이를 안으시면서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그것이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하셨겠습니까? 예수님 당시는 요즘처럼 어린아이들이 우대받고 보호받던 때가 아닙니다. 사회의 낮은 계층입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고 무시당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런 아이를 영접한다면 어떻습니까? 내가 아이를 돕고 섬겼다면, 자기 자신은 기쁠 있지만 아무 이익이 없습니다. 오히려 핀잔을 들을 있습니다. ‘그럴 시간에 중요한 일을 하지. ‘뭐 애들하고 놀아? 만약 어떤 유명한 사람, 예수님이라든지, 랍비라든지, 회당장이라든지, 공회원을 집에 초청하여 대접했다면 으스댈 있고, 사람들도 나를 훌륭하다고 해줄 것입니다. 그런데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어린아이 하나를 섬겼을 예수님을 섬긴 것으로 인정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목사는 그래도 대접을 받습니다. ‘내가 목사를 대접했다.’라고 하면 기분도 좋고 칭찬도 받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대상보다는 알아주는 사람, 청년, 청소년, 대학생을 데려다 먹이면 티가 납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이 알아주시는 진짜 섬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변을 보시고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거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분들을 챙겨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단기선교도 가셨는데, Field Operation으로 전도하다가 분들도 계시고, 저처럼 선교지를 다녀온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것도 귀합니다. 구경만 하고 와도 귀합니다. 왜냐하면 가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하나님은 사람들도 사랑하시는구나. 갔다가 돌아오면 그들이 머리에 남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 그들도 구원하여 주옵소서. 그러면서 ‘이들을 섬길 이런 기쁨이 있구나. 하고 느끼게 됩니다.


거기까지 가고 여기서 봉사할 때도 사람들의 손길과 눈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봉사를 해보십시오. 목장에서도 가지를 맡아서 해보시고 교회에서도 해보십시오. 우리 교회에는 장애우들이 별로 없지만, 장애우 파킹을 정비하거나, 거기 세우는 것부터가 봉사의 시작입니다.


그렇게 섬길 우리가 이런 이기심을 극복할 있게 됩니다. 그러면서 남들을 위해 정말 살아갈 있는,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점점 가지게 됩니다. 그것이 정말로 섬기는 사람이고 참된 위대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뿌리박고 있는 이기심을 뛰어넘어 진정한 섬기는 사람이 되는 훈련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이기주의를 성령의 불로 태워주시고 이웃들을 향한 마음으로 열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나가는 ]


찰스 콜슨(Charles Colson) 예수님을 알기 닉슨 대통령의 보좌관으로 있다가 거듭난 교도소 전도자로 다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책에 미국 의회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순간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순간은 테레사 수녀가 미국 국회를 방문하여 연설했던 때라고 합니다.


미국 사람들은 대부분 연설 연설자에게 박수를 아끼지 않는데, 이상하게도 테레사 수녀가 연설을 마치자 누구도 박수를 치지 않고 오히려 침묵만이 감돌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막히는 감동과 전율이 그들의 가슴과 목을 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박수를 여유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이유는 마지막 테레사 수녀가 던진 한마디의 때문이었습니다. “섬길 아는 사람만이 다스릴 자격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섬길 있겠습니까?


프랑스의 빅토르 위고가 유명한 소설 <나인티 쓰리(93)>’라는 소설에 아주 인상 깊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 직후에 숲을 지나가던 병사들이 우연히 배고픔에 지친 어머니와 아이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병사들 상사가 덩이를 그들에게 던져주자, 어머니는 지체하지 않고 빵을 조각으로 똑같이 잘라 아이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광경을 옆에서 바라보던 젊은 병사가 빵을 주었던 상사에게 물었습니다. “저 여자는 배가 고프지 않은 모양이죠? 그러자 상사는 “그게 아냐, 배가 고프지 않은 것이 아니라 어머니이기 때문이지.


어머니의 사랑이 이기심을 극복하게 하여 희생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섬길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해서 말씀드립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섬길 있습니다.

그리고 섬길 아는 사람만이 다스릴 자격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예수님과 같은 종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바로 그런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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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막 9:1-13)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31 (5/22/2016) kpccoh 2016.05.22 3922
51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막 8:27-38)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30 (5/15/2016) kpccoh 2016.05.15 5958
50 열매를 맺는 세 가지 조건(요 14:30-15:12) 양형춘 원로목사 (5/08/2016) kpccoh 2016.05.08 1608
49 두 단계에 걸친 시력 회복 (막 8:22-26)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29 (5/1/2016) 이준원 2016.05.02 2930
48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막 8:11-21)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28 (4/24/2016) kpccoh 2016.04.24 5679
47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막 8:1-10)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27 (4/17/2016) 이준원 2016.04.19 2923
46 헌신 (막 14:3-9) - 송순종 선교사 (4/10/2016) 이준원 2016.04.12 1512
45 깊은 탄식과 에바다 (막 7:31-37)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26 (4/03/2016) kpccoh 2016.04.03 5112
44 세마포와 수건 (요 20:1-8) - 부활절 메시지 (3/27/2016) 이준원 2016.03.30 1781
43 포기하지 않는 믿음으로 나아가라 (막 7:24-30)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25 (3/20/2016) kpccoh 2016.03.20 4073
42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찾으시는 것 (막 7:1-23)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24 (3/13/2016) kpccoh 2016.03.13 3641
41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막 6:45-56)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23 (3/06/2016) kpccoh 2016.03.07 3697
40 우리의 계산을 뛰어넘는 주님의 방법 (막 6:30-44)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22 (2/28/2016) 이준원 2016.02.29 3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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