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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2 28 주일예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22

우리의 계산을 뛰어넘는 주님의 방법

(마가복음 6 30-44)

 

[들어가는 ]


요즘 알람시계가 잘 안 팔린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스마트폰이 많이 보급되면서 거기에 있는 알람 기능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스마트폰의 알람을 맞춰놓고 자는데, 가끔 밤 중에 ‘카톡’, ‘땡’, ‘부욱’ 소리가 나기도 합니다. 서부에 있는 분들이 시간을 착각하고 메시지를 보내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 미국에 온지 얼마 안 되었을 때에는 한국에서 시간을 잘 모르고 새벽에 전화가 온 적들도 있습니다.

 

그런 것이야 실수로 그랬으니까 이해가 가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오래 전 시애틀에서 청소년 사역을 하고 있었을 때, 한 가정이 한국에서 이민을 왔습니다. 그 가정에는 딸과 아들이 있었는데, 당시 둘 다 고등학생 나이였습니다. 그 중 남자아이가 미국에 와서 힘든 환경에서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나중에 중고등부 회장까지 되었습니다.

 

그때 하루는 밤 11시 반이 넘은 시간에 그 회장 아이가 제게 갑자기 전화를 했습니다. 이전에는 그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 무슨 큰 일이 났나 해서 왜 그러느냐 물어봤더니, 그저 Youth Group에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일에 대해서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급한 전화도 아닌데 밤늦게 전화한 것에 대해 약간 불쾌함을 느꼈지만 그 날은 그냥 그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몇 주 후에 그 회장 아이가 또다시 밤 11시가 넘어서 전화를 했습니다. 그때는 다음 날 새벽기도에 가야 하기 때문에 이미 잠자리에 들었는데 전화가 온 것입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이번에도 다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로 전화를 했습니다. 이번에는 그저 어느 대학생인 형의 전화번호를 가르쳐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찾아보면 되는데 저에게 전화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차분하게 타이르기를, 밤늦게 전화를 하면 실례가 되고, 다른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늦게 전화하면 부모님들이 싫어하시니까 좀 더 일찍 전화하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갑자기 어떤 일들이 일어나서 쉬는 시간이나 개인적인 시간을 방해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물론 중요한 일이나 아주 위급한 일이 발생해서 그렇게 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별로 중요하거나 위급하지 않은 일로 쉬는 데에 방해를 받는다면 마음이 언짢게 되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상황이었습니다. 



1.   참 목자이신 예수님 (30-34절)


6장 7-1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둘씩 짝 지어 전도여행을 보내셨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말씀을 전파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병자들도 고치는 일을 감당한 제자들은 흥분된 마음으로 예수님께 돌아와 이것에 대해 보고를 합니다.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0절)

 

그러나 돌아오자마자 제자들은 밥 먹을 겨를도 없을 정도로 바빠집니다. 전도여행으로 인해 무척 피곤했지만 쉬지도 못하고 계속 사역을 하는 제자들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안타까움을 느끼셨고, 그래서 제자들에게 자신과 함께 조용한 곳에 가서 좀 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31절)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제 무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배를 타고 사람들이 모를만한 조용한 곳을 향해 갑니다. 그런데 그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32-33절)

 

혹시 ‘사생팬’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어떤 유명한 연예인을 아주 극렬하게 좋아해서 쫓아다니는 팬을 말합니다. 몇 년 전에 어느 유명한 가수가 이사를 갔는데, 팬들이 그 집에 들어가서 변기까지 떼어가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극성으로 좋아하며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일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에게도 일어났습니다. 놀랍게도 사람들이 예수님 일행의 움직이는 것을 보고 해변을 돌아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는 곳으로 달려가 예수님 일행보다 더 먼저 도착하여 기다리는 겁니다. 이것은 아주 기가 막힐 일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꼭 필요한 휴식 시간을 방해하고, 이제는 아예 예수님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며 진을 치고 있습니다.

 

제가 만일 예수님이었다면, 그 많은 사람들이 염치도 없이 저를 좇아와서 제가 도착도 하기 전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볼 때에, 화부터 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34절)

 

“불쌍히 여기사.” 예수님은 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들의 그런 모습을 보시며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안타까워서 두 눈에는 눈물이 고인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십니까?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제가 이전에도 여러 번 이것을 말씀드렸지만, 양들은 아주 미련하고 이기적인 동물입니다. 목장을 지나갈 때마다 잘 보면, 겨울에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다른 양들 추우라고 그러는 겁니다. 또 여름에는 서로 바짝 붙어 있습니다. 다른 양들 더우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염소를 같이 키워 뿔로 받아서 흩어지게 하고, 개들도 같이 키우면서 양들을 이끌게 합니다.

 

양은 이렇게 미련하고 미욱한 동물이기 때문에, 만약 양에게 목자가 없다면 혼자 가다가 거의 대부분 맹수에게 물려가 밥이 되거나 아니면 골짜기에서 떨어져 죽게 됩니다. 저기에 맹수가 있는지, 골짜기가 있는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그저 먹을 풀만 있으면 달려갑니다. 또 넘어지면 일어나지도 못합니다.

 

예수님은 사역하실 때 그 우선순위가 결코 자신의 만족이나 편안함이 아니었습니다. 저도 이렇게 주일날 사역하고 나서 쉴 때는 편안하게 쉬고 싶고, 누군가의 방해를 받고 싶지 않은 마음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의 관심은 언제나 자신의 편안함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이었습니다. 목자 없는 양과도 같이 헤매는 사람들을 돌보아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중에서 지금 사역하며 섬기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장로, 권사, 안수집사, 서리집사 등의 직분자도 있고, 목자 목녀 목부도 있고, 또 전도, 선교, 부엌일, 교사, 찬양 팀, 성가대, 컴퓨터 등 많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사역도 귀하지만, 특히 아무도 안 보는 데서 하시는 사역이 참 귀합니다.

 

그 중 특히 주보 복사 사역이 있습니다. 아무도 없을 때 오셔서 주보를 복사하십니다. 두 팀이 한 달씩 번갈아 하십니다. 그분들의 수고를 생각하면서 주보를 여기에 그냥 버리고 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버리더라도 집에 가서 버리시거나, 교회 종이 리사이클 박스에 넣어주시기 바랍니다. ^^

 

어떤 일이든지 우리가 사역과 봉사의 일을 감당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어떤 기술이나 재주가 아닙니다. 사회적 지위나 학벌이나 돈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사람들이나 그러한 상황을 보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안타까움, 두 눈에 고이는 눈물,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뜨거운 마음, 바로 이러한 주님의 사랑의 마음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마음이 없이는 주님께서 맡겨주시는 그 어떤 사역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마음이 없이 일만 하게 될 때 문제가 생기고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항상 이 질문을 해야 되겠습니다. “내게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이 있는가? 내게 이러한 주님의 사랑이 있는가?”

 

 

2.   제자들의 계산 방법 (35-38절)

 

이러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신 주님과는 달리, 제자들은 무리들에 대해 짜증이 났습니다. 이제 시간은 해가 저물어 가는 저녁때였는데, 제자들이 가만히 보니까 예수님은 자기들에게 쉬라고 해놓고는, 이제는 무리를 보낼 생각이 전혀 없으신 것 같아 보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너무 지치고 배도 고파서 좀 쉬었으면 좋겠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말합니다.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날도 저물어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35-36절)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아주 의외였습니다. 뭐라고 하십니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37절)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에 제자들은 참고 있던 감정이 폭발하게 되고, 아주 불만 섞인 투로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서 빵 이백 데나리온 어치를 사다가 그들에게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제자들은 지금 이 정도 되는 무리를 먹이는데 필요한 돈을 어디에서 구하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이미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200 데나리온이라는 돈은, 그 당시 노동자가 8개월 정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숫자를 계산하는 데에 머리가 아주 빨리 돌아갑니다. 그들은 결코 바보가 아닙니다. 아주 계산이 빠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계산해보니까 200데나리온도 모자란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결론은, 이런 빈들에서 그만한 돈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필요한 돈의 액수에만 정신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다른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하시기에 앞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먼저 질문을 하십니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38절)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너희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너희에게 있는 것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알아보니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어서 가져옵니다. 그래도 가서 알아보고 가져온 것은 참 잘한 일입니다.

 

요한복음 6:9을 보면 이 떡들은 보리떡이었는데, 요즘처럼 제과점에서 잘 만들어진 맛있는 빵이 아니라 아주 작고 밋밋한 빵이어서 한 사람이 한 번에 여러 개를 금방 먹을 수 있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한 사람의 한 끼분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이가 가져온 것을 보면, 어린이가 한 끼 먹을 정도입니다.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면, 우리 믿는 사람들은 대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이 문제를 해결해주십시오.” 그런데 아무리 기도해도 상황이 별로 변하지 않고 여전히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오히려 악화되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마치 주님이 아무 해결도 안 해주면서 이렇게 대답하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즉, “네가 해결해라. 피하지 말아라.”라고 하시는 것 같고, 때론 아무 응답이 없습니다.

 

그러면 기도해도 별 응답이 없으니까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열심히 생각해보고, 머리를 굴려 보고, 온갖 방법을 다 연구해 보고, 계산도 해보다가, 해결할 방법이 도저히 없다고 생각되면 다시 아룁니다. “주님, 제가 이것을 어떻게 해결합니까? 아무리 해도 저는 도저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또 주님은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에게 무엇이 있느냐? 네가 가진 것이 무엇이 있는지, 가서 찾아봐라.”

 

우리가 어떤 어려움을 당할 때 가만히 보면, 대개 내가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가지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면서 낙심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있을 때는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이 상황에서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지금 가진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합니다.

 

문제에 직면했을 때는 그 문제에 집착하거나 그 수준에 머물러 있으면 해결이 안 됩니다. 그 위로 올라가서 그 문제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즉, 하나님의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하지 못한다는 것이나 없는 것이나 불가능하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지금 우리에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교육관을 지은 다음부터 지난 7년 동안 계속 재정 적자를 보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결산도 했지만, 매년 간신히 넘겨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2016년 예산을 작년에 세우면서 위원장님들이 기도를 하고 세웠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들었는데, 거기에 나오는 것처럼 기도하면서 예산을 세워보자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모인 결과, 청소년과 대학생 사역을 맡을 교역자를 모시자고 의견이 모아졌고 그렇게 예산을 세웠습니다.

 

사실 이것은 지금 형편에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지금도 적자인데 거기에 예산을 더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런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보니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라는 생각이 든 겁니다. 그래서 위원장들을 중심으로 한 안수집사님들의 기도가 시작되었고, 기도하면서 당회원들과 위원장들이 같이 예산을 세웠습니다.

 

지금도 계속 함께 기도하고 있는데, 기도를 하기 시작하니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한 번도 없던 일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갑자기 저번 주에 어떤 분이 이메일로 연락이 왔습니다. 자신은 신학교를 나온 전도사로서 이곳에 박사과정을 하러 오는데, 혹시 교회에서 사역을 할 수 있는지 여부를 물어온 것입니다. 아직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최소한 우리가 기도하니까 이전에 전혀 없던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가서 아무리 찾아봐도 자기가 가진 것은 별 것 아니라고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가진 것이 너무 보잘것없고, 힘이 너무 미약하다고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자신이 가진 것으로는 될 수 없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포기하거나 관두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됩니다. ‘집어 치우자. 요까짓 것을 가지고 뭘 할 수 있겠나?’ 바로 그것이 안드레의 마음이었습니다. 그 떡과 물고기를 찾아서 가져온 사람이 안드레인데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에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는 한 아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요 6:9, 새)

 

“주님, 제게 있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그런데 겨우 요까짓 것 가지고 어디에 쓰겠습니까? 겨우 이것을 가지고 어떻게 큰 문제가 해결이 되겠습니까?”라고 한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 눈에 아무리 작게 보일지라도, 우리가 생각하기에 아무리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계산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현실이 다가 아닙니다.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우리의 눈과 주님이 보시는 눈은 다릅니다. 내가 가진 것이 별 게 없더라도,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일단 그것이 주님의 손에 들어가기만 하면, 주님이 사용하시기만 하면, 우리의 상식과 계산을 초월하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가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보기에는 그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겨우 요까짓 것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도, 그것을 드리기만 한다면 주님께서는 수만 명을 먹이고도 충분할 만큼 엄청난 헌신으로 봐주십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내가 미리 판단해버리고 내 것을 드리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미리 자기 나름대로 다 재어 보고 계산해보고서는 이것은 될 수가 없다고 성급한 판단을 내립니다. 그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렇게 하면 괜찮고 저렇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내가 미리 판단하거나, 요까짓 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겠나 하면서 미리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주님 앞에 내가 가진 것을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저 주님 손에 그것이 들어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내 재능이든 시간이든 물질이든, 무엇이든지 한 번 드려보십시오. 그리고 어떻게 되나 보십시오.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상관없이, 아무리 작아 보이는 것이라도 내가 작다고 미리 판단하지 말고 내게 있는 것을 그저 주님께 드리며 헌신할 때, 주님이 사용하시도록 할 때, 놀라운 주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질문은 이것입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더라도 주님께 드리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계속 머리를 돌리며 현실적으로 계산하기를 원하는가?’

 

가서 보고 찾아서 주님 앞에 가져오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합니다. 우리 상식으로 계산하고 머리를 돌리는 것을 중단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저 주님을 신뢰하고 보잘것없어도 드리는 믿음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때 주님의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3.   예수님의 계산 방법 (39-44절)

 

이제 제자들이 찾아서 가져온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신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에게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떼로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앉은지라,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 (39-44절)

 

남자만 오천 명이었으니까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한다면 훨씬 더 많은 수(최소 2만 명)가 먹은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이 사람들은 굶주린 상태입니다. 그때 음식이 나누어집니다. 그럼 딱 일인분만 받았겠습니까? 받아서 이쪽에 넣고 저쪽에 넣고 한 다음에 받아서 먹었을 겁니다. 그렇게 따지면 이 음식의 양이 정말 얼마나 엄청났겠습니까? 그러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았습니다.

 

성경 퀴즈에 잘 나오는 문제가 있습니다. “사복음서들에서 단 한 개의 기적 사건만이 모든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사건이 무엇이겠습니까?” 예, 바로 우리가 읽은 이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이 그것입니다. 그만큼 이 사건은 제자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로부터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입니다.

 

이 기적으로 모든 사람이 다 배불리 먹었을 뿐 아니라(42),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43). 그러니까 원래 가져온 음식의 양보다, 기적이 일어나서 다 먹고도 남은 음식의 양이 더 많았습니다. 그 전에는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였는데, 다 먹고 나서는 12 바구니가 남았습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의 상식을 깨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6장을 보면, 한 소년이 드린 한 끼분 음식을 통해 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아이는 주님을 위해 자기 도시락을 드렸고, 그것이 놀라운 기적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자기가 가져온 떡과 물고기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 소년이 그것들이 필요가 없어서 드렸습니까? 아닙니다. 자기에게 필요했지만 드렸습니다. 거기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아마 도시락을 싸온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지만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드렸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만약 그 아이가 가지고 온 음식을 그냥 자기만 먹었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저 배가 부를까 말까 했을만한 적은 양이었고, 자기가 먹으면 그냥 끝납니다. 그런데 그것을 주님께 드렸더니, 자기도 배불리 먹고 또 그곳에 모인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모두 배가 부르게 먹고도 열두 바구니나 남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을 본 이 아이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이 다 배불리 먹었습니다. 모두가 다 기뻐하고 감격해 합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거기에 있던 그 누구보다도 큰 기쁨과 감격을 누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바로 그것이 헌신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기쁨과 감격의 비밀입니다.

 

이 이야기는 읽으면 읽을수록 더 큰 위로와 은혜가 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통해 받으신 그 아이의 음식을 가지고 기적을 일으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것도 없는 데서도 얼마든지 이 무리보다 더 많은 숫자를 먹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분이십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 그 자체이신 주님께서 무엇을 못 하시겠습니까? 그런데 그 보잘것없는 소년, 이름도 안 나오는 한 작은 아이가 드린 정말 보잘것없는 음식을 기쁘게 받으시고, 그것으로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이셨습니다.

 

주님이 받지 못하실 만큼 형편없는 것은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받으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손에 들려질 때 귀하게 사용되지 않을 것 역시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의 손에 들려지기만 하면 다 귀한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주님께 무엇을 드리고 있습니까? ‘이런 걸 드려봐야 어디에 쓰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안 드리는 경우도 있겠지만, 아까운 마음이 들어서 안 드리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유명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손에 잡아두려고 했더니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다. 그런데 하나님의 손에 드렸더니 나는 그것을 아직도 소유하게 되었다.”

 

그냥 가지고 있다가 나 자신만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것은 내게서 그대로 끝나버립니다. 더 이상의 진전이 없습니다. 내 주위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그냥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부끄럽지만 그래도 주님께 드려서 사용하시도록 하면, 내게도 유익이 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유익이 됩니다. 그것도, 드린 것보다 더 엄청나게 크게 쓰임을 받게 됩니다. 그것이 주님의 계산 방법입니다.


 

[나가는 말]

 

주님께서 너무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시는데 있어서 우리와 같은 연약한 사람들을 사용해 주십니다. 우리가 드리는 적은 정성을 기쁘게 받아주시고 사용해 주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정말 놀라운 특권입니다.

 

그런데 주님께 나의 것을 드린다고 해서 당장 무슨 새로운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기만 하면, 하나님의 손에 들어가기만 하면, 모든 상황이 똑같은데도 거기에서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19세기 초 이탈리아의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자 니콜로 파가니니(Nicolo Paganini)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한 거지가 길에서 낡고 고장 난 바이올린을 켜며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고장 난 바이올린에서는 불협화음이 울려 퍼졌습니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그 거지는 계속 불협화음으로 음산한 노래를 연주했습니다. 이 때 한 신사가 지나가다가 그 거지에게 바이올린을 달라고 하고 여기저기 만지며 조율을 하더니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맑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왔습니다. 그 아름다운 멜로디를 따라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들 중 누군가가 그 신사를 알아보고 외칩니다. “아, 이분은 바이올린의 거장 파가니니다!”

 

이처럼 주님의 손에 들려지기만 하면, 그 손에 붙들리기만 하면, 우리는 새롭게 조율되어 이전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선율을 내게 될 것입니다. 이전까지 내가 어떠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가가 정말로 중요합니다.

 

필립스 브룩스(Philips Brooks, 19세기의 유명한 설교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위대한 일을 이루는 데 필요한 사람들은 위대한 사람들이 아니다. 헌신된 사람들이 필요하다.” 정말 맞는 말입니다.

 

주님은 지금 이 순간,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헌신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위대한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아니라, 단지 위대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자신을 드리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자신의 머리를 굴리며 나름대로의 계산법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비록 이해할 수 없어도 신뢰하고 순종하며 주님의 방법을 의지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렇게 자신의 방법이 아니라 주님의 방법으로 사는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 복 있는 사람입니다.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가, 바로 그렇게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들, 주님의 손에 들려진 사람들이 되어 주님의 목적을 위해 쓰임 받는 고귀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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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이혼, 어떻게 볼 것인가 (막 10:1-12)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35 (7/10/2016) kpccoh 2016.07.10 3405
58 천국에 쌓아 둔 소망 (행 1:8, 2:17) - 전 구 선교사 (7/03/2016) kpccoh 2016.07.03 1022
57 성령과 킹덤 드림 (행 1:8, 2:17) - 고엘리사 선교사 (6/26/2016) kpccoh 2016.06.29 1139
56 지옥, 그 불편한 진실 (막 9:38-50)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34 (6/19/2016) kpccoh 2016.06.19 3393
55 "긍정의 공동체" (시편 27편 1-14절) - 김현철 목사 kpccoh 2016.06.13 1487
54 참된 위대함을 추구하는 인생 (막 9:30-37)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33 (6/05/2016) kpccoh 2016.06.06 2694
53 믿는 자에게는 불가능이 없다 (막 9:14-29)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32 (5/29/2016) kpccoh 2016.06.01 4747
52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막 9:1-13)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31 (5/22/2016) kpccoh 2016.05.22 3922
51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막 8:27-38)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30 (5/15/2016) kpccoh 2016.05.15 5958
50 열매를 맺는 세 가지 조건(요 14:30-15:12) 양형춘 원로목사 (5/08/2016) kpccoh 2016.05.08 1608
49 두 단계에 걸친 시력 회복 (막 8:22-26)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29 (5/1/2016) 이준원 2016.05.02 2930
48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막 8:11-21)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28 (4/24/2016) kpccoh 2016.04.24 5681
47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막 8:1-10)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27 (4/17/2016) 이준원 2016.04.19 2923
46 헌신 (막 14:3-9) - 송순종 선교사 (4/10/2016) 이준원 2016.04.12 1512
45 깊은 탄식과 에바다 (막 7:31-37)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26 (4/03/2016) kpccoh 2016.04.03 5112
44 세마포와 수건 (요 20:1-8) - 부활절 메시지 (3/27/2016) 이준원 2016.03.30 1781
43 포기하지 않는 믿음으로 나아가라 (막 7:24-30)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25 (3/20/2016) kpccoh 2016.03.20 4073
42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찾으시는 것 (막 7:1-23)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24 (3/13/2016) kpccoh 2016.03.13 3641
41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막 6:45-56)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23 (3/06/2016) kpccoh 2016.03.07 3697
» 우리의 계산을 뛰어넘는 주님의 방법 (막 6:30-44)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22 (2/28/2016) 이준원 2016.02.29 3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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