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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1일 주일예배
✦ 제자의 삶 – 산상수훈 25 ✦
“좋은 것으로 주시는 하늘 아버지”
(마태복음 7장 7~12절)
[들어가는 말]
오래전 제가 한국에서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교회에서는 중등부에서 고등부로 올라왔으니까 결심하고 성경을 많이 읽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성경을 정말 열심히 읽었습니다. 고등부에 올라가서 좋은 선배들을 만났고, 친구들과 같이 아주 재미있게 교회 생활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고등부 전도사님이 계셨는데, 몇 년 후 선교사로 나가셨고, 한참 세월이 지난 후에 보니까 한국 선교계의 거물급 인사가 되어 있으신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교회에서 일어났던 사건이 하나 있는데,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그 전도사님이 제 1년 선배인 당시 고2들에게 상당히 화가 나셨습니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2학년 선배들이 신앙생활에는 별 관심이 없어서 당시 전도사님이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던 고등부 프로그램에는 제대로 참여하지도 않고, 주로 재미 위주의 교회 생활만을 했기 때문입니다. 회장 형을 빼고는 임원들도 그런 식이었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주일 오후 고등부 모임 때 전도사님이 선배들에게 야단을 쳤는데, 안타까워하며 말씀하셨습니다. “얘들아, 너희는 왜 그렇게 신앙에 관심이 없니? 너희들 교회 다닌다고 하면서 성경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나 있니?” 실제로 1년 선배들 다수는 성경을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었습니다. 회장 선배는 나중에 한국에서 어느 교회라고 하면 다 알 수 있는 초대형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는데, 그 형 빼고는 전부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말만 많고 전도사님이 하시는 방향에 자꾸 반대만 하니까 화가 나셔서 질문을 퍼부으셨습니다.
“얘들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말씀이 어디 있는지나 아냐?” 그때 저는 성경을 정말 열심히 읽고 있었던 때였는데, 그 구절을 바로 며칠 전에 읽었고 하필 그 시간 제가 거기 있었습니다. 선배들은 전혀 모르니까 아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저는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아는 것이니까 대답했습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인데요.”
그러자 당연히 모를 거라고 생각하셨던 전도사님은 당황하셨고, 선배들 얼굴은 밝아졌습니다. “그럼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는 어디 나오는지 아냐?” 그 구절은 마침 제가 그 전날 읽고 외운 구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체하지 않고 “마태복음 7장 7절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날 눈치 없이(?) 대답을 척척 해대는 저 때문에 전도사님은 제대로 안 하는 선배들을 혼내려다 실패하셨고, 선배들은 성경을 전혀 모르면서 제 덕분에 의기양양할 수 있었습니다. “그거 보세요. 우리도 다 알아요.” 사실은 자기들은 모르면서 후배 덕을 본 겁니다. 오늘 본문만 보면 그날 생각이 납니다. 시간이 상당히 흘렀는데도 그때 기억이 생생합니다.
1.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7~8절)
지난번 본문(1-6절)에서는 형제자매와의 관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반면, 오늘 본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두 본문을 연결하면 ‘형제자매를 비판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라.’라는 것입니다. 지난번 본문의 마지막 절이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6절)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거룩한 것과 진주같이 값진 것을 주려고 하시는데, 개와 돼지 같은 사람들은 당장 자기에게 좋아 보이는 것만 구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려고 하시는 것의 가치를 모릅니다. 그래서 그것을 버리고 오히려 화를 낸다는 겁니다. 그렇게 땅의 것만 찾고 하늘의 것을 찾지 않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가치관으로 사는 사람은 오히려 해롭기까지 합니다.
그렇게 귀한 것을 주는데도 그 가치를 모르는 자들 때문에 너무 마음 쓰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귀한 것의 가치를 제대로 깨닫고 그것을 추구하며 살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영적 눈을 열어주시고 성령 충만하게 하셔서 귀한 것을 분별하여 그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7절)
이것은 성도들이 아주 좋아하는 구절 아닙니까?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다 된다.’ 마치 그렇게만 하면 다 된다고 하시는 것 같은 말씀입니다. 여기 세 가지 동사가 나오는데, ‘구하다’, ‘찾다’, ‘문을 두드리다’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이 쓰인 헬라어 원어로 보면, 여기 사용된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라는 단어들이 전부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구하는 게 아니고 ‘계속해서 구하라. 구하고, 구하고, 또 구하라. 그러면 너에게 주실 것이다. 계속 찾고 또 찾고 또 찾아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 계속 문을 두드리고 또 두드려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조금 전 말했던 고등부 때 전도사님이 그것도 물어보셨습니다. “야, 그러면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가 어디 있냐?”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인데, 제가 그때 너무 잘 아는 구절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선배들 역시 그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는 것을 여기서 예수님이 요구하십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숨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뭔가 내가 구하는 것이 있을 때는 끝까지, 응답 될 때까지 하나님께 끊임없이 구하라는 의미입니다.
가끔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전지하신데, 즉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신데, 그럼 내 마음도 다 아시는데 굳이 기도해야 합니까? 그냥 하나님 아시죠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다 아시니까 그냥 알아서 좀 나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왜 자꾸 구하라, 찾으라, 두드려라 하고 귀찮게 하시냐? 그냥 주시면 안 되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사실은 구하는 것만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저번에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즉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할 때 그것은 기도의 내용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이 기도의 방식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어떤 방식으로 기도할 것인지, 그러니까 “구하라, 찾아라, 두드려라”, 즉 지속적으로 기도하라는 겁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은 각각 다른 게 아니라 어쨌든지 계속 간구하라는 것인데, 사실은 점점 그 강도도 세집니다. 먼저 말로 구하다가, 직접 발로 찾으러 다니고, 그다음에 손까지 이용해서 두드리는 겁니다. 그렇게 점점 강해지는 기도의 방식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리고 비슷한 말씀을 여기서 두 번 계속해서 하시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8절)
7절이나 8절이나 사실은 같은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무엇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지, 그게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구하고 무엇을 찾습니까? 또 무슨 문을 두드리라는 겁니까? 그것은 이제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입니다. ‘구할 것은 너희가 정하되, 그 대신 지속적인 방식으로 기도하라’ 하십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무엇을 구하고 무엇을 찾고 무슨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까? 보통 건강, 성공, 물질 등을 우리가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을 구하는 것은 잘못된 게 아닙니다. 싱글들은 앞으로 배우자를 잘 만날 수 있도록, 직장을 찾는 사람은 직장을 위해서, 사업을 하기 원하는 사람은 사업을 위해서, 가정을 위해서, 학생은 진로를 위해서 또 앞으로 취업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것을 지속적으로 구하는 게 필요하다는 겁니다. 일단 말로 구하고, 또 직접 두 발로 찾아 나서고, 그다음에 손을 들어 문을 두드리기까지 하는 간절함, 그러한 열정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했으면 믿음으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라는 것은 그냥 말로만 ‘하나님, 이거 해주세요.’ 하고 가서 딴짓하는 게 아니라, 그 기도에 맞는 내용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 과정이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는 구체적으로 해야 하고, 지속적으로 해야 하며 또 적극적으로 해야 합니다. 기도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굉장히 능동적인 것이고, 또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적극적인 행위입니다.
7절과 8절은 사실 같은 내용인데 주체가 다릅니다. 7절에서는 수동태를 사용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신적인 단어를 썼습니다. 그래서 구할 때 주시는 분, 찾을 때 찾게 해주시는 분, 또 문을 두드릴 때 열어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암시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8절에서는 구하고 찾고 두드림으로써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하시면서,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이렇게 구하는 것을 받고 찾고 또 문이 열릴 것이라는 약속을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가 구할 때 주시고, 우리가 찾을 때 찾게 하시고, 또 우리가 문을 두드릴 때 열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은, 이것이 무조건적인 약속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구하기만 하면 다 주시고 찾기만 하면 다 찾고 또 문을 두드리면 그냥 막 열리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지속적으로 그렇게 할 때 이것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기도해야 합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다 아십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도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왜 이렇게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게 하시는가 하면, 바로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그러한 기도의 행위를 통하여 우리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게 되고, 그때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고 더 든든히 세워집니다. 그래서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은 구할 때 주시고, 또 찾을 때 찾게 해주시고, 문을 두드릴 때 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거꾸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문을 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일을 하면 되고, 그럴 때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실 일을 해주십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에 대해서 우리는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 곳곳에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다 주려고 준비하고 계십니다.
어린 자녀가 자기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뭔가 기대하지 않습니까? ‘이번에 무슨 선물을 받을까?’ 부모는 어떻습니까? 부모는 아무것도 준비를 안 하고 있다가 그때 ‘내 선물 어디 있어? 나 선물 줘.’ 하면 ‘아유, 잊어버렸네.’ 하고 그때 나가서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니, 그런 부모가 종종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수고, 대부분은 미리 다 준비해 놓지 않습니까? 포장까지 다 해놓고 기다리다가 때가 되면 내놓습니다. 자녀가 구하기도 전에 이미 부모들은 다 준비해 놓습니다. 부모도 그런데, 하나님은 다 갖고 계십니다.
<생명의 삶> 큐티 매거진 본문이 9월에 히브리서였는데, 11장에 보면 여러 믿음의 사람들, 믿음의 선진들이 많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을 비롯해서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이야기를 보면서 ‘하나님은 옛날에나 이러셨지, 지금은 안 그러신다.’라고 생각하면 완전히 오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동일하십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일하십니다.
아브라함이 대략 BC 2,000년 정도 살았던 사람인데, BC 2천 년이면 지금으로부터 4천 년 전입니다. 그 4천 년 전에만 하나님이 역사하신 게 아닙니다. 지금 21세기를 사는 바로 나의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역사하고 계십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에게 베풀어주기를 원하십니다. 좋은 것을 주기를 지금 원하시고, 또 주실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다. 그래도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미 다 갖고 계시지만,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주지 않으십니다. 원하는 사람, 필요한 사람에게 주십니다. 물론 원하는 것이 잘못되었을 때는 바꿔서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제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바쳐라.’ 하셨을 때 하나님은 제사로 쓸 숫양을 이미 준비해 놓고 계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지금 거의 아들 이삭을 놓고 우상숭배 수준으로 가니까 그것을 정리하게 하시기 위해서 시험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 ‘여호와 이레’ 즉 공급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며 아브라함이 예배했습니다.
공급하시는 하나님으로서 우리의 필요를 다 채워 주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도를 안 하면 하나님이 안 주셔서 아니라 기도를 함으로써 정말 하나님이 나에게 공급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사랑의 아버지이신 것을 깨닫게 되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세워져 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데, 먼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관계를 더욱 세워 갈 수 있도록 그렇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가면서 기도할 때 응답받고 또 기도할 때 응답받는 삶으로 계속 살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내용이 어떤 것들입니까? ‘이거 되게 해주세요. 어느 학교에 가게 해주세요. 어느 직장에 가게 해주세요. 결혼할 배우자 만나게 해주세요. 결혼해서 아기 잘 낳고, 또 애가 잘 크고, 우리가 건강하고 부모님이 건강하시고 아이도 건강하고, 또 사업 잘되고 성공하고 돈 잘 벌게 해주세요.’ 등등 인생의 그런 중요한 일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지만, 기도가 그저 그런 것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뭔가가 필요할 때만 구하고 해결되면 안 구하고 하는, 그런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하시는 겁니다. 내가 어떤 필요가 있을 때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게 아니라, 평소에 계속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속에서 살라는 것이 예수님이 의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뷔페(buffet)에 가서 밥을 엄청나게 많이 먹을 때가 있습니다. 특히 남이 사 주는 거라면 대충 먹는데, 내 돈을 내고 먹는 뷔페라면 엄청 먹습니다. 그런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자기가 돈을 내지 않고 얻어먹는 뷔페에서는 조금 적게 먹는데, 자기 돈 내고 먹는 뷔페에는 엄청나게 먹는다는 겁니다. 많이 안 먹으면 손해라고 느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엄청나게 배가 터질 정도로 먹으면 한 달 정도는 안 먹어도 되겠다고 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음 날이면 또 먹습니다. 계속 먹어야 합니다. 기도와 기도 응답도 같습니다. 우리가 한 번 기도해서 응답받았다고 ‘이 정도면 충분해. 내가 40일 작정 기도를 했으니까 이제 좀 쉬어도 돼.’라고 하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을 여기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고, 기도하고 또 응답해 주시고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시는 이유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뭔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처음에는 잘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잘못된 것인데도 그걸 모르고 그냥 ‘하나님, 이것을 주세요. 이것이 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직장을 주세요.’라고 기도해서 그 직장이 됐는데, 거기가 되면 오히려 내가 안 좋아질 것을 하나님은 아실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되어서 오히려 위험에 빠지고 아주 안 좋아지며 신앙의 길을 떠나게 된다면, 하나님은 그 길을 막으십니다. 그런데 나의 입장에서는 ‘하나님, 이것을 내가 원하는데 왜 안 주세요?’ 하며 삐지고 괴로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어도 소용없다. 기도해도 소용없다.’라는 식으로 나올 수 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기도를 정말로 하는 사람은 그렇게 삐지지 않습니다. 기도를 정말 하다 보면 기도하면서 뭔가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게 있습니다. 기도하는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이것이 정말 나에게 유익한 길일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게 나에게 유익한 길이 아닐 수도 있다.’라는 생각이 갑자기 기도 중에 드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기도 시간을 마친 다음에 가서 조금 더 자세히 그 직장에 대해서 알아보았더니, 내가 알지 못했던 다른 뭔가가 있는 겁니다.
그런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기도하다가 하나님이 알려 주시는 것을 깨닫고서 다른 길로 바꾸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실 기도를 통해 내가 무엇을 얻느냐,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느냐 못 얻느냐 하는 데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 기도를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초점이 있습니다. 기도는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가 핵심입니다. 기도를 통해 내가 얻느냐 못 얻느냐는 그다음 문제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점점 변화되어 가는 것이 기도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 아시면서도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친구를 잘 사귀라고 하지 않습니까? 착한 친구들을 사귀면 그래도 거기에 영향을 받아서 착해지고, 못된 친구들을 만나 사귀면 못된 길로 자꾸 나가게 되니까, 친구를 잘 사귀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한 존재가 누굽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과 계속 교제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영향을 받고 자꾸 하나님을 닮아가는 방향으로 바뀌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엉뚱한 데 가서 자꾸 헤매고 있으면 자꾸 그쪽과 비슷하게 흘러가는 겁니다.
처음 초보적인 단계에서는 우리가 이렇게 끈질기게 기도하는 데에 주로 초점을 맞추고 나아가지만, 결국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아, 하나님이 나에게 이것을 구하게 하셨구나. 이것을 찾도록 하나님이 이끌어 주셨구나. 문을 두드리라고 내 앞에 문을 두셨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나는 그냥 나가는데, 하나님은 이미 나를 향해서 다 준비하고 계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2.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는 하나님 (9~11절)
사실은 간구하는 사람의 끈질긴 기도의 노력이 응답을 받아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한 응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뭔가 쟁취하는 게 아니라, 주시는 분이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좋은 응답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9~11절 말씀입니다.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9-11절)
저는 이것을 읽을 때마다 스스로 ‘나쁜 아빠였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제 아들이 어릴 때 제가 장난을 잘 쳤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원하지 않는 것을 갑자기 탁 주어서 아이가 놀라고 막 당황하면, 저는 재밌다고 하는 경우가 가끔 있었습니다. 그런 것은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진짜로 나쁘게 하지는 않습니다.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주는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뱀을 줬다가 물려서 죽으면 어떡합니까?
여기서 예수님은 기도 응답의 확실성을 말씀하시면서 아버지와 아들의 비유를 드십니다. 여기서 기도의 본질을 잘 보여줍니다. 기도는 인격이 만나는 관계라는 겁니다. 나의 인격과 하나님의 인격이 만나는 기도, 내가 하나님과 만나는 관계인 기도는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비유에서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과 기도하는 사람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로, 친구와 친구로, 또 재판관과 과부로 비유하여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여기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설명하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것은 상하관계를 말하는 게 아니라 친밀한 관계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제가 심각한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한번 속으로 대답을 해보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생각하실 때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은 나의 아저씨’이십니까? 의외로 너무나 많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 아저씨로 믿고 있습니다.
아저씨의 특징은 뭡니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친밀한 관계, 가족 관계, 같이 사는 관계, 같이 먹고 자고 같은 집에서 생활하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아저씨와 조카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아니면 친척이 아니라 그냥 아저씨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어서, 아저씨도 두 종류입니다. 하나님을 친척 아저씨로 믿는 사람이 있고, 그냥 동네 아저씨로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저씨는 친밀한 관계가 아니어도 됩니다. 그런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을 하나님 아저씨로 믿고 있습니다. 내가 뭔가 필요하면 ‘아저씨, 이거 좀 주세요. 아저씨, 이거 해주세요.’ 이런 식의 관계로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공급해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를 마치 아저씨처럼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지, 하나님의 조카가 아닙니다. 무슨 동네 꼬마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받는 자녀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계속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표현도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실제로 그렇습니다. ‘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아들, 내 딸. 목숨도 내어줄 수 있는 내 아들, 내 딸.’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혁명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계속 예수님을 신성모독이라고 하며 걸고넘어졌습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에게는 정말로 하나님이 아버지이신데,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불러야지 그럼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아야겠습니까? 그것은 진실이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무엇이든 구할 수 있습니다. ‘나, 이거 좀 주세요. 떡 좀 주세요. 생선 좀 주세요.’ 악한 사람은 떡 대신 돌을 줄 수도 있고 생선 대신 뱀을 줘서 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자기 자식에게는 그렇게 해가 될 만한 것을 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게 아버지의 본능입니다.
어머니는 더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를 예로 드셔서 그런 것이지, 우리가 여기 왜 어머니는 없고 딸은 없냐고 하면 안 됩니다. 지금 우리의 21세기 시각을 가지고 1세기에 쓰인 성경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잘못된 방향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성경이 쓰인 그 당시의 문화와 상황 속에서 이것을 해석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안 들어가고 딸이 안 들어갔다고 무시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어쨌든 여기서 진정한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생선을 구할 때 구하는 것을 주시는 것은 물론이고 그 이상의 것까지도 주기를 원하신다는 겁니다.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좋은 것으로 주십니다.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의 성품을 알 때 우리가 이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정말 은혜가 되는 말씀이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11) 하는 것입니다. 왜 이게 은혜가 됩니까?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구하는 것만 주신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좋은 것으로 주신다.’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실 무엇이 진짜 나에게 좋은 것인지 잘 모를 수가 있습니다. ‘성공하게 해주세요. 돈 많이 벌게 해주세요.’라고 하는 게 좋은 것 같은데, 실제로 성공하고 돈을 많이 벌어서 신앙을 떠난 사람이 굉장히 많습니다. 이것이 나에게 좋은 건 줄 알았는데 사실은 안 좋은 겁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우리가 얼마나 조심해서 구해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놀랍게도 내가 구한 대로 주시는 게 아니라 나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이 은혜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심하고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혹시 기도해서 좀 틀렸더라도, 잘못된 것을 구했더라도 좋은 것, 즉 나에게 필요한 것을 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아이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저 돌을 갖고 싶다고 주장하고 저 뱀을 갖고 싶다고 주장하면 아버지가 그것을 주겠습니까? 대신 떡과 생선을 주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구한 것을 주시는 게 아니라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은혜로운 구절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주실 능력도 있으시고 또 그런 사랑의 마음도 있으십니다.
3. 황금률 (12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12절)
제가 고등부에 올라가서 성경을 열심히 읽을 때 신약성경 작은 것을 하나 가지고 읽었는데, 거기에 이 설명이 쓰여 있었습니다 – ‘황금률’. 이 7장 12절은 ‘황금률’(The Golden Rule)이라고 불립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 말은 이것이 성경 전체의 의미라는 뜻입니다.
‘네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은 게 있느냐? 그러면 네가 그렇게 그 사람에게 대접해보아라.’ 이렇게 적극적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다른 사람도 좋아할 것이니 그런 식으로 해주고, 내가 싫어하는 것은 다른 사람도 싫어할 테니까 그것을 강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향한 이런 마음, 이런 정신은 성경이 가르치고자 하는 이 교훈(율법과 선지자)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뭐가 붙어 있습니까? 12절에 “그러므로”가 붙어 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이겠습니까? 7절부터 11절까지 기도에 대해서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 하는 것을 이야기하시며 또 좋은 것으로 주신다고 하시다가, 12절 즉 황금률의 내용은 그것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 같은 내용 아닙니까?
그런데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이 말씀이 ‘그러므로’로 연결되었다는 말은 앞의 내용과 이것이 연결된다는 말이 됩니다. 즉,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기도와 이 황금률이 연결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 응답하신다는 말씀을 바탕으로 우리는 황금률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중보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나를 위해서 이것을 기도해주었으면.’이라고 하는 게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 지체하거나 주저하지 마시고 기도 카드를 써 내시기 바랍니다. 우리 중보기도 헌신자들이 비밀을 지키며 열심히 함께 기도해 줍니다. 위기에 빠졌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 나 혼자 힘이 없을 때 기도를 부탁하면 같이 기도하게 됩니다. 목장에서도 같이 기도하고, 주변의 아는 사람들에게 기도를 부탁해서 같이 기도를 합니다.
이처럼 다른 지체들과의 관계 속에서 12절 말씀인 황금률을 적용해 보면 바로 이런 겁니다. ‘다른 사람이 너를 위해서 기도해 주기를 원하는가? 그러면 네가 먼저 다른 사람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라.’
이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어떻습니까?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하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너의 기도를 듣고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하실 것을 기대하느냐? 그럼 너도 기도할 때 하나님이 너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생각해 보라.’ 무조건 ‘하나님, 나 이것을 주세요.’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삶을 바라보실 때 무엇을 원하실까를 생각하고 기도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 생각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 ‘그러므로’가 붙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주시는 게 아니라 정말 필요한 것, 좋은 것을 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정말 기뻐하시는지, 그것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오직 내 욕심과 내가 원하는 것과 이기적인 것을 위해 간구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서 구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므로’가 여기 붙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내가 먼저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 응답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겁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하면서 먼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겁니다. 이처럼 황금률을 기도에 적용하면 기도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더 잘 알게 됩니다.
혹시 기도를 해봤는데 기도 응답을 못 받아서 실망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청년 중에 ‘내가 이것이 꼭 됐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하나님, 이것을 꼭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기도도 부탁했는데 그게 안 된 겁니다. 그러면 굉장히 실망이 되지 않습니까?
그럴 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마음을 점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하나님 입장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내가 생각하며 기도했는가, 아니면 그저 내가 원하는 것만 이루어 달라고 욕심으로 기도했는가? 그것을 먼저 점검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더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좋은 자녀가 되기를 원하셔서 하나님은 먼저 우리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먼저 하나님을 대접해 드리는 마음으로 무엇을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릴 때 ‘이것이 과연 하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일까’를 먼저 생각해보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가 살겠습니다. 어떤 결과로 인도해 주셔도 저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나아가겠습니다.’라고 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으로 기도 응답을 받으며, 하나님을 정말로 기쁘시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