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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25일 주일예배
✦ 제자의 삶 – 산상수훈 13 ✦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에 관하여”
(마태복음 5장 27~32절)
[들어가는 말]
제가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낸 교회 친구가 세 명 있는데, 지금도 계속 연락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 한국에 가면 만납니다. 저와 다른 친구는 미국에 살고, 다른 두 친구는 한국에 삽니다. 미국에 사는 다른 친구는 교수를 하기에 여름 학기를 한국에서 가르칠 때가 많아 한국에 자주 갑니다. 그래서 세 명은 자주 만납니다.
1980년 중반 당시 대학에 들어가서 보니 성적으로 많이 문란하다는 것을 느꼈는데, 그래서인지 우리끼리 그런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제 처녀총각 중에 숫처녀는 천연기념물이고 숫총각은 멸종동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멸종동물로 남아서 천연기념물과 만나 결혼하자.” 이렇게 우리끼리 나름대로 맹세했던 기억이 납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사회는 음행을 권하는 사회가 된 것 같습니다. 직장인들이 일터에서 경험하는 세계가 굉장히 위험합니다. 특히 잘생긴 남자, 예쁜 여자는 위험한 지뢰밭에 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 생긴 것과 상관없이 아주 좋은 직장을 다니거나 사회적으로 존경받을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은 성적인 유혹을 더 많이 받습니다.
드라마, 영화, 소설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륜을 미화하고 죄를 합리화하며, 또 요즘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을 통해 온갖 음란한 영상이 무차별적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이 시대에 사람들은 언제 그 유혹에 넘어가 죄에 빠질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1990년대인 30년 전부터 40-50대 기혼 남성들에게 여자친구가 없으면 바보라는 말이 있었고, 점점 여자들도 그렇게 되어 갔습니다. 결혼했어도 바람을 피우는 것은 예사로 여겨졌습니다. 특히 1990년대 중반부터 불륜 드라마가 많이 나왔는데, 부부끼리 앉아 있을 때는 음악과 배경이 어둡게 나오고, 불륜커플이 나올 때는 아주 아름답게 나왔습니다.
어린이, 청소년, 대학생, 청년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성의 아름다움을 결혼제도 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알기도 전에 왜곡된 성 지식에 먼저 노출됩니다. 여기는 자기가 찾아야 발견하는데, 한국은 길거리만 다녀도 선정적인 것들이 아주 많습니다.
최근 뉴스에 보면 한국 초등학생 10명 중 4명이 음란물(소위 야동)을 본 경험이 있다는 겁니다. 중고등학생도 아니고 초등학생이 그러니, 중고생이나 대학생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요즘은 서로 사귀면 으레 성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생각하고, 정말 좋으면 동거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정상으로 여기는 세상입니다.
또 이 시대에 이혼 문제도 심각합니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결혼한 부부 중 두 쌍에 한 쌍은 이혼한다고 합니다. 제 친구 중에도 이혼한 친구가 있고, 친척 중에도 있고, 심지어 제가 아는 목사님 중에도 이혼한 분이 있습니다. 각자 다 아픔이 있고 나름대로 다 사정이 있습니다. 이혼했다고 다 정죄하는 게 아니라, 현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천들도 이혼율이 안 믿는 사람들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 간음과 이혼에 대한 말씀은 아주 불편한 말씀입니다. 저도 불편하고 들으시는 여러분도 불편하실 겁니다. 개방된 성 개념을 가지고 사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환영받기 힘든 내용입니다. 또 이혼에 대해서도 복잡한 상황이 있는데 쉽게 다루기가 어려운 주제가 아닙니까?
그러나 세상 풍조가 그렇고 다들 그렇게 산다고 해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는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성경적 가치를 포기하거나 타협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진리이기 때문에 불편하더라도 들어야 하고 또 힘들어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주님이 말씀하신 뜻이 뭔지를 모르고 대충 따르면 안 되고,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고 따라야겠습니다.
1. 간음에 관하여
예수님은 기존 유대인 학자들의 율법 해석을 말씀하시면서 거기에 자신의 해석을 대립적으로 제시하십니다. “너희는 OOO라고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27-28, 31-32)라고 하시면서 율법을 재해석해주십니다. 사람들이 율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제대로 해석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지난번 ‘살인과 분노’에 대한 말씀에 이어서, 두 번째와 세 번째로 대립되는 개념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두 개 중 첫 번째는 간음에 대한 말씀입니다.
“27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7-28절)
이 말씀에 대해 ‘아멘!’ 하고 좋아하면서 응답할 분이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다들 뜨끔할 것 같습니다. 십계명에서 “간음하지 말라.”라는 계명은 제7계명입니다(출 20:14; 신 5:18). 그러나 간음은 곧 “도둑질하지 말라”는 제8계명과, 이웃의 아내를 포함하여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하신 제10계명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간음하게 되면 제7계명뿐 아니라, 제8계명과 제10계명까지 모두 세 개의 계명을 범하는 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살인보다 간음이 더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 계명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 어렵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 어려움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습니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28)라고 하시는데,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당시에는 주로 남자들을 향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직접 살인 행위뿐 아니라 마음으로 미워해도 살인과 같다고 하셨는데, 간음도 마음의 문제라고 하십니다. 간음이라는 행동을 직접 한 것뿐 아니라 마음에 품는 것도 똑같다는 것입니다. 몸의 간음 이전에 마음의 간음이 먼저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행위로 볼 때 바리새인들은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아주 잘 지키고 있었습니다. 내놓고 간음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특히 바리새파나 서기관이나 종교 지도자들은 그렇게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랑을 한 겁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드실 때 바리새인이 자랑하는 것 중 “나는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않습니다.”라고 자랑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한국에는 간통죄가 있다가 몇 년 전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기독교 윤리는 사회법보다 더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이라면 더 높은 도덕성을 갖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의 선한 행실로 빛을 비추라”고 하셨습니다.
성적인 문제에서 우리는 몸의 거룩함을 유지할 뿐 아니라 마음의 성결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먼저 중요합니다. 성결함이 이 문제에서 최우선의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행동 이전에 항상 마음을 문제시하십니다.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이 나온다는 겁니다.
살인이 분노에서 시작되는 것처럼 간음은 마음속의 음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죄는 겉으로 드러난 행동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세상법은 행동한 것에 대해서만 처벌합니다. 성폭행을 했다면 그 행동을 가지고 기소하고 재판에 붙여 형을 선고합니다. 그런 마음을 품는다고 벌을 내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음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그와 같다고 하십니다. 마음의 문제가 먼저입니다. 사실 음욕이 없는데 간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이어지는 겁니다.
본문에서 ‘간음하다’라는 단어가 헬라어 원어로 혼인 관계 이외의 간통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여자’도 일반적으로 아름다운 젊은 여성을 뜻하는 단어가 아니고, 성숙한 여인이나 결혼한 여자를 의미하는 ‘귀네’라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하신 말씀 중에 어머니를 향하여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요한을 가리키며 말씀하셨는데, ‘여자’라는 단어가 바로 ‘귀네’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단어도 바로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이 계명은 일반적인 모든 여성을 가리킨다기보다는, 다른 남자와 결혼한 여자에 대해서 그런 마음을 품거나 행동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열 번째 계명이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인데 거기에는 이웃의 아내도 포함됩니다. 그러니까 제7계명 “간음하지 말라”를 더 명확히 풀이해주신 것입니다. 간음한다는 것은 이웃의 아내를 탐냈기 때문에 그런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제8계명 “도둑질하지 말라”는 것에도 걸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조심해야 할 것은, 시대적인 통념과 지금 나의 상식과 지식과 가치관으로 보면 잘못 해석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사회가 어땠는지를 알고 왜 예수님이 그 상황에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를 알아야 성경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던 1세기 유대 사회는 철저히 남성 중심의 남성 우월주의 사회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여성은 숫자를 셀 때 들어가지도 않았고, 법정에서 재판할 때 증인으로 채택될 수도 없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아내는 남편의 소유였기 때문에, 다른 남자와 간음한다는 것은 그녀의 남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게 됩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간음 자체가 나빠서 사형에 처한 게 아니라, 다른 남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형에 처한 것입니다.
율법을 보면 의외의 내용들이 있는데, 결혼하지 않은 처녀에 대해서 성범죄를 저지른 것에 대해서는 약간 느슨한 면이 있고 재량이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허락하셔서 그런 게 아니라, 사람들이 사회를 그렇게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그런 고대사회 상황 속에서 처녀도 보호해주어야 하지만 특히 다른 사람의 아내에 대해 그런 일을 저지르는 것은 엄청난 범죄이기에 더욱 심하게 다룬 것입니다.
예수님이 문제 삼고 계시는 것은 간음 행위 이전에 마음의 문제입니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것조차 안 된다는 겁니다. 음욕을 품고 다른 남자의 아내를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내 배우자가 아닌 이성에 대해서 쳐다보는 것에 있어 결혼한 여자는 그렇게 보면 안 되고 결혼하지 않은 처녀는 그렇게 봐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결혼 여부와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인류 타락 이후에 인간의 마음에 깊이 파고든 잘못된 욕망을 문제 삼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겉으로 안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 마음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음행’이나 ‘음란’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헬라어로 ‘포르네이아’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포르노’가 나온 겁니다. 이 단어는 원래 결혼 외의 성관계를 의미하는 간음, 간통, 사통을 포함해서 모든 종류의 성적 왜곡과 악을 포괄하는 단어입니다. 요즘 이런 것들이 얼마나 넘쳐납니까? 여러 도색잡지, 영상 매체, 인터넷, 스마트폰, 이메일, 유튜브 등에 넘쳐납니다. 요즘 위험한 것은, 어떤 정상적인 웹사이트 주소를 타이핑할 때 한 글자만 잘못 쳐도 이상한 데로 갈 수 있다는 겁니다. IT기술이 발달할 때 가정 먼저 이런 것들이 들어갑니다.
이런 매체가 넘쳐나다 보니까 괜찮다고 여기는지 성희롱, 성적 농담, 성추행, 성폭행, 성 착취 동영상 N번방, 변태적인 내용, 성 중독, 성매매 등 잘못된 것들이 가득합니다. 그런 여행을 부추기는 나라들도 있고, 음지에서는 성행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동시에 이른 음란함과 음행을 부추기는 사회가 된 것 같습니다. 자기 스스로 결정한다는 이름 아래,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성적 접촉을 권장하는 사회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그렇습니다.
한국에서 간통죄가 폐지되고 나니까 이제는 쌍방의 동의만 있으면 배우자 이외의 사람과의 성적 관계가 아무 일도 아닌 시대가 되었습니다. 간통죄가 더 이상 없으니까 불륜과 외도를 저질러놓고도 뻔뻔하게 구는 경우가 많아졌고, 오히려 증거를 잡겠다고 쫓아오면 증거를 잡는 행위가 불법이라고 해서 잡으려던 사람이 벌을 받는 경우도 생깁니다. 너무도 이상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하나님이 주신 성은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인데, 무슨 놀이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미국에서 복음주의 크리스천들이 종종 하는 말이 있습니다. 몇 년 전 노회에서 가나 출신 목사님과 만나서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미국장로교 내에서 동성애 문제로 논쟁을 벌이던 때 저와 그 목사님은 보수적이고 복음주의적이어서 같이 대화할 때 그분이 이렇게 말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Eve)를 만드셨지 아담과 스티브(Steve)를 만드신 게 아닌데 참 안타깝습니다.”
성이라는 것은 원래 인격적인 깊은 교제와 서로 간의 친밀한 교제를 위해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교제 가운데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주신 것이 성입니다. 그래서 결혼 안에서 유지하고 누려야 우리가 행복해집니다.
그런데 보통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랑하면 성관계를 할 수 있지 않은가?’ 사랑하면 친밀함을 원하는데, 남녀 간의 성관계가 친밀함을 가장 잘 표현하는 방식인 것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보는 게 어떻습니까? 그 사람과 사귀며 성관계를 하고 동거하다 결혼했다면 그래도 행복하지 않고, 그 사람과 결혼하는 경우는 사실 굉장히 적습니다. 신혼여행까지 갔다가 헤어진 사람들도 봤습니다. 그 사람과 결혼할지 누구와 결혼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결혼이라는 아름다운 선물을 주셨는데, 결혼을 통해 나의 배우자를 기쁘게 하고 함께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 속에서 가정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내 배우자에게 전폭적으로 주어야 할 것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다 주었다는 관점으로 생각해보십시오.
남자로서 이 여자에게도 주고 저 여자에게도 주고 아내와 결혼했다면, 여자로서 이 남자에게도 주고 저 남자에게도 주다가 남편과 결혼했다면, 배우자와 100% 사랑의 관계가 되겠습니까? 여기도 주고 저기도 주었으니 100%가 될 수 없습니다. 이론적으로는 별로 동의하지 않을 수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살아보면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결혼 관계 안에서 되어야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꼰대’라고 하고, 고리타분하고, 옛날 사람이고, 답답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결혼과 무관하게 사랑하니까 같이 잘 수 있다고 하고, 합의하에 성관계를 가졌다고 하고, 심지어 놀이로서의 성으로 타락했습니다. 이런 것들을 합법화하거나 정당화하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간음과 간통 이전에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를 이야기하십니다. 이런 사람은 성적 의도를 가지고 상대방 여자를 자신의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본다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간음은 단순히 성적 관계를 가졌다는 것만 아니라, 나의 성적 욕구를 위해서 다른 남자의 아내를 자기가 취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십니다.
지금 상대방 여자는 어떤지, 그 여자의 남편이 어떤지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직 나의 만족을 위해서라면 상대방에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욕망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랑이라고 이야기해도 사실은 욕정입니다. 성적 욕구일 뿐입니다. 이런 욕구를 품고 자꾸 보다 보면 결국 행동으로 나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상대방 여자를 주야로 묵상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음으로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상대방의 행복에 대해서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나의 욕구를 푸는 데에만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음욕을 품는다는 말은 갈망과 열망을 가지고 상대방을 본다는 말입니다. 십계명의 제10계명에서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하셨는데, 성적인 영역에서 이웃의 것을 탐내는 것이 됩니다.
제1계명에서는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하셨고 제10계명에서는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하셨는데, 이 두 가지가 십계명 전체 해석의 열쇠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마음, 이웃에 대한 마음을 말합니다. 1~4계명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5~10계명은 이웃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를 말씀하는데, 제1계명과 제10계명이 그것을 해석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결국 하나님이든 이웃이든 또는 물질이든, 마음의 동기가 가장 중요하다는 겁니다. 내가 왜 이렇게 하려고 하는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5계명 “부모를 공경하라”, 6계명 “살인하지 말라”, 7계명 “간음하지 말라”, 8계명 “도둑질하지 말라”, 9계명 “이웃을 해하려고 거짓 증거하지 말라”와 같은 것은 다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마음으로 그렇게 불법적인 성관계에 대한 열망이 일어나서 상대방을 지배하려 한다면, 이미 간음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갈라디아서 5장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라고 말씀합니다. 정욕과 탐심이 우리 몸을 움직이는 힘인데, 이런 것들이 강하게 나오면 육신은 그것을 따라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6장에 보면 우리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고전 6:19)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안 되는데 우리가 성전이라고 합니다. 특히 음행을 피하라고 하면서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고전 6:18)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거짓말을 했을 때 내가 말로 한 것이 밖으로 나아가고 밖에서 벌어집니다. 그러나 성적인 범죄는 몸으로 짓는 것이기 때문에 몸에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이런 죄를 피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가장 좋은 예가 요셉입니다. 창세기 39장에 보면, 형들의 미움으로 요셉이 이집트로 가는 상인들에게 팔려 노예가 됩니다. 그때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이집트의 높은 관리인 보디발 장군에게 팔려 가는데, 아주 열심히 일해서 장군의 눈에 들어 그 집안의 총지배인이 됩니다.
그런데 젊고 잘 생기니까 보디발의 아내가 추파를 던지다가 하루는 아무도 없을 때 자기와 동침하자고 옷을 붙들자 요셉이 뿌리치고 나갑니다. 옷을 붙들면 그게 증거가 될 수 있지만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간음을 피하는 가장 좋은 길은 도망가는 겁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맞서겠다고 하다가는 넘어가게 됩니다.
그때 요셉이 놀라운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 39:9). 하나님은 눈에 안 보입니다. 그리고 이곳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집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자기와 함께하시며 보디발의 아내와 자기의 사이를 다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고 계신데 어떻게 내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악을 행하겠습니까?’ 하며 도망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죄를 범하면 끔찍한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29-30절)
얼마나 끔찍한 말씀입니까? 뽑아버리고 잘라 버리라고 하십니다. 오른쪽 눈이나 손은 백체 중 일부인데, 오른쪽이라는 것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 중요한 신체의 일부가 나를 유익하게 하지 못하고 실족하게(범죄하게) 한다면 본래 목적대로 쓰이는 게 아닙니다. 욕망을 따라서 살라고 하나님이 건강한 몸을 주신 게 아닙니다.
우리가 건강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습니까? 아프면 회복되도록, 평소에 별 문제가 없으면 계속 건강하도록 기도합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건강을 위해 기도할 수 있고 기도해야 합니다. 특히 아프신 분들을 위해서는 믿음의 공동체가 같이 기도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건강을 위해 기도할 때 꼭 생각할 게 있습니다. ‘건강해서 뭐 할래?’입니다. 몸이 건강해져서 이상한 데 가고 이상한 짓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건강하게 해주셨으면 몸을 좋은 데 사용해야 하는데 이상한 짓을 하며 사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대로 유익하게 사용하라고 건강한 몸을 주신 것입니다.
몸이 욕망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욕망을 풀라고 몸을 주신 게 아닙니다. 그것도 상대방을 짓밟으면서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라고 몸을 주신 게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오른눈, 오른손과 같이 소중한 것이 죄의 원인이 된다면 그것을 과감하게 제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진짜로 눈을 뽑고 손을 자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일종의 과장법, 충격요법입니다. 그만큼 철저히 죄를 단절하고 아니오라고 말하는 용기를 내라는 것입니다.
29절에서 오른눈과 오른손을 말씀하시면서 그것을 제거하는 것이 성한 몸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지옥’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니까 지옥은 분명히 있습니다. 지옥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지옥에 갈 것인가, 천국에 갈 것인가? 천국에 갈 수 있다면 눈을 빼고 손을 절단하더라도 그게 낫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가치는 그 무엇보다 귀하기 때문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장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경험할 수 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그 삶이 천국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며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어 내 뜻대로 살겠다고 하면 하나님이 안 계시기 때문에 지옥이 됩니다.
자기의 욕구를 고집하면서 자기 신체의 일부를 잘못된 정욕을 위해 사용하게 되면 그 삶 자체가 지옥이라는 겁니다. 물론 실제 지옥이 있지만, 그런 삶 자체도 지옥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니 기쁨이 없고 평안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면 아무리 어려움이 있어도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 하나님이 함께하시며 기쁨과 평안이 넘치는 곳, 은혜가 넘치는 곳입니다. 그만큼 천국이 중요하고 지옥은 끔찍합니다.
어떤 분이 이전에 이런 말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뉴욕은 재미있는 지옥이고, 콜럼버스는 재미없는 천국이다.” 완전히 오해하신 겁니다. 재미있는 지옥은 없습니다. 지옥은 재미없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끔찍합니다. 그리고 재미없는 천국은 없습니다. 천국에 가면 이 땅에서 어떤 재미를 누린 것보다 더 재미있습니다. 착각하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신체의 중요한 일부분을 잃더라도 천국에 가야지, 지옥에 가면 안 된다는 겁니다. 천국은 눈보다 손보다 더 귀합니다. 아니, 목숨보다 귀합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냐?”(마 16:26)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천국도 지옥도 확실히 존재하며, 천국에 가지 못하는 자들이 가는 곳이 지옥입니다. 몸과 영혼이 멸망당하는 무서운 곳이라고 예수님이 나중에 10장에서 말씀하십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인간)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하나님)를 두려워하라” (마 10:28)
몸과 영혼이 멸망하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판단 기준은 이 땅에서만이 아니라 이후의 세계를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여기서만 다 결판나는 게 아닙니다. 죽은 후의 세계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노후대책’은 세우는데 ‘사후 대책’은 별로 세우지 않습니다. 노후대책을 위해 얼마나 투자를 많이 합니까? 주식 투자도 하고, 코인 투자도 하고, 401K도 하고, 연금도 붓습니다. 그런데 사후 대책은 세우고 계십니까? 천국에 얼마나 쌓아놓고 계십니까? 천국은 이 세상에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가야 하는 곳입니다. 또 이 땅에서도 반드시 누려야 하는 곳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눈과 손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눈과 손이 죄가 들어오는 통로가 아닙니까? 나중에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는 문제에 대해 18장에서 손과 발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따 먹고 죄를 범했습니다. 그 열매를 보니까 어땠습니까?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창 3:6)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을 제대로 지키려면 먼저 눈으로 무엇을 보는가를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눈을 뽑고 손을 자르라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진짜 그렇게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아주 유명한 교부 중 오리겐(Origen)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간음죄를 짓지 않겠다고 스스로 거세했습니다. 한국교회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신체의 일부를 절단하는 게 아니라 주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결단입니다. 절단이 중요한 게 아니라 결단이 중요합니다. 신체의 일부를 절단한다고 정욕이 없어집니까? 도박하는 사람 중 이제 도박을 끊겠다고 손을 자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발가락으로 했습니다.
뭘 자른다고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마음으로 그런 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의 성결이 중요합니다. 마음이 다스려지면 몸은 따라가게 됩니다. 유혹이 올 때 욕심을 통제하고 제어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먼저 보는 것을 주의해야 하고, 마치 손이 없는 것처럼 죄를 향해 손을 내밀지 말고, 발이 없는 것처럼 죄를 저지를 만한 곳에 가지 않는 겁니다. 미리 차단해야 합니다. 일이 벌어진 다음에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미리 예방하는 게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미국의 저널리스트 중 베스트셀러 여러 권을 쓴 토마스 프리드먼(Thomas Friedman)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20년 전에 특파원 생활을 토대로 쓴 <베이루트에서 예루살렘까지>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한 베두인 사람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어느 날 누군가가 그 집의 칠면조를 훔쳐 갔습니다. 그래서 그집 아버지가 아들들을 불러서 “당장 칠면조를 찾아와라!” 하고 호통쳤습니다. 그러나 아들들은 그까짓 칠면조 한 마리 때문에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찾겠느냐고 불평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낙타가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낙타를 찾아오라고 하지 않고 아버지는 또다시 칠면조를 찾아오라고 했습니다. 아들들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아니, 낙타가 없어졌는데 왜 낙타가 아니라 전에 잃어버린 칠면조를 찾아오라고 하시나?’ 그런데 그 후에는 또 말이 없어졌고, 그 집안 딸이 강간당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이 바로 칠면조였다는 겁니다. 도둑이 칠면조를 훔쳐 가고 보니까 칠면조를 찾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 요거 괜찮구나.’ 하면서 낙타를 훔쳐 가고, 말을 훔쳐 가고, 심지어 성범죄를 저지르는 데까지 나갔다는 겁니다. 예방 조치를 취했다면 방지되었을 텐데, 그냥 놓아두니까 점점 더 안 좋은 일들이 생겼다는 겁니다.
우리가 마음에 어떤 음욕이 일어날 때 예방 조치를 하면 되는데 그냥 놓아두면 점점 더 심각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겁니다.
2. 이혼에 관하여
두 번째로 예수님은 이혼에 관하여 말씀하시는데, 내용이 길어질 수 있지만 간단히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31-23절)
이것은 십계명에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이혼과 재혼에 대한 율법의 내용인데 십계명에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것을 일부러 이 이야기를 하십니다. 앞에서 다룬 마음의 문제를 보면, 분노, 멸시, 음욕을 다루었는데, 이런 것들이 이혼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겁니다. 신명기 24장에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주신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 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신 24:1)
이혼할 수 있는 예외적 사유로서 ‘수치 되는 일’을 했다는 것이 발견되면 이혼 증서를 써서 내보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 양대 학파가 있었는데 힐렐 학파와 샴마이 학파입니다. 사도 바울은 원래 힐렐 학파에 속한 가말리엘이라는 사람 문하에 있었습니다. 힐렐 학파는 진보적인 쪽이고, 샴마이 학파는 보수적인 입장이었습니다.
힐렐 학파는 ‘수치 되는 일’을 ‘남편이 기뻐하지 않는 일’이라고 넓게 해석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 사유든 그냥 이혼당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보수적인 샴마이 학파는 간음한 경우에만 이혼할 수 있다고 해석했습니다.
예수님은 이혼 증서를 써주라는 모세의 율법이 원래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말씀하십니다. 여기뿐 아니라 나중에 마태복음 19장에서도 이혼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이것도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안 됩니다.
요즘은 이혼이 흔하니까 그렇게 볼 게 아니라, 예수님 당시 이혼은 여성에게 사회적 지위가 다 없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남편이 자기 마음대로 아내를 착취하고, 별일도 아닌데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이혼 증서를 써서 마구 내보내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원래 이혼 증서를 써주라는 것은 막 내보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였습니다. 구약 시대에 여자가 그냥 집에서 쫓겨 나가게 되면 사회적 지위가 전혀 없고 보호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이혼 증서를 써서 내보냄으로써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철저히 상대방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라는 것이지, 착취하고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해 하라는 게 아닙니다. 당시 고대사회의 약자인 여성들을 배려하고 보호하기 위해서 이혼 증서를 써주라고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것을 악용했습니다. 남자들이 자기 아내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으로 악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의 완악함 때문에 불가피하게 하나님이 그런 말씀을 주신 것이다.”라고 설명하십니다.
결국 예수님은 그런 이혼을 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의 완악함 때문에 하나님이 허락해주셨을지는 몰라도, 천국의 제자 된 사람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결국 이혼한 아내를 간음하게 만들고 버림받은 여인에게 장가 들어도 간음하게 만드는 일이 된다고 하십니다. 결국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할 것이냐, 아니면 관계 속에서 자기의 욕구가 최우선이 될 것이냐를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이혼 문제는 요즘 아주 어려운 문제입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목사님인데 30대에 이혼하신 분이 있습니다. 30년쯤 전 일인데, 그때 그분을 만나게 되어 괜찮으시냐고 위로했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혼은 종이 두 장을 풀로 붙인 다음 다 마른 후에 다시 떼어내는 것과 같다.”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그 정도로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혼은 죄이고 안 된다는 차원이 아니라, 그 아픔과 상처를 경험한 지체들이 교회 안에도 있는데,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아가는 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당사자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게 뭔지를 기도하고 생각하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지금의 눈으로 무조건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싱글 청년들은 결혼 적령기가 언제입니까? 요즘 한국에서는 30대 중반이라고 합니다. 또는 “죽고 못 사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요.”라고 대답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상대가 누구이든 변함없이 평생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을 때가 결혼 적령기입니다. 왜냐하면 감정은 금방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의지적인 것입니다. 성숙한 인격은 의지로 나아가기 때문에 결혼생활이 지속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너무나 확실합니다. 모든 생각과 판단의 중심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고 또 상대방을 사랑하며 배려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냐, 아니면 내가 원하니까 내 마음 대로 하겠다고 나아갈 것이냐? 지금 이 문제를 예수님은 지적하십니다. 유대인들은 겉으로만 안 하면 된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다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지적하십니다.
그래서 간음의 문제이든 이혼의 문제이든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내가 사랑하면 상대방을 내 마음대로 이용하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상대방을 위해서 내가 헌신하고 섬기게 됩니다.
지금 교회 내에도 점점 이혼하고 재혼하는 가정이 많아지는 이 시대에 이미 벌어진 일을 어떻게 되돌리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원리에 따라 우리가 지금이라도 회개할 것이 있다면 회개하고, 고칠 것이 있다면 고치며, 무엇보다 사랑의 기준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가정과 결혼을 통해 마음의 성결을 추구하며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만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마음의 성결을 추구하며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원리로 살아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 크리스천, 성도, 예수님의 제자인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