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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917일 주일예배

제자의 삶 산상수훈 24

비판하는 것의 위험성

(마태복음 71~6)

 

[들어가는 말]

 

코로나 상황이 좋아지던 작년부터 시작해서 올해도 많은 사람이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우리 교인 가운데도 많은 분들이 올해, 특히 여름에 많이 다녀왔고 지금도 방문 중인 분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저처럼 한국에 별로 가지 않는 사람조차 작년 가을에 한국을 방문했으니까, 많은 사람이 나간 게 맞는 것 같습니다. 한국에 가보니까 많은 것이 변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바뀐 것은 택시 잡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길거리에서 택시!” 하고 손을 흔들어 택시 잡는 시대는 끝났고, 미리 스마트폰 앱을 사용하여 택시를 부르도록 바뀌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전이나 지금이나 한국에서 바뀌지 않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대학입시 열풍입니다. 물론 제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대에 비하면 입시 제도가 굉장히 복잡해져서 저는 뭐가 뭔지 잘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뜨거운 열기는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심해진 것 같습니다.

 

한국은 입시철만 되면 여전히 나라 전체가 전쟁을 치르는 것 같은 분위기가 됩니다. 심지어 경찰차가 수험생을 태워 데려다주기도 하고, 수험생이 탄 차를 다들 비켜주기도 합니다. 집안에 고3 학생이 있으면 1년 동안 가족 전체가 숨죽이고 살아갑니다. 미국도 원하는 대학에 가기 위해서 학생들이 열심히 애쓰지만, 한국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어쨌든 열심히 공부해서 원하는 학교에 합격한 학생이 있는 반면에, 떨어져서 재수하는 학생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노력해서 자기기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면 다 끝난 것입니까? 학교에 다니면서 성적을 잘 받기 위해 계속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특히 미국 대학들은 공부하러 가는 곳이기 때문에 고등학교 때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합니다. 또 졸업하면 취업이나 대학원 진학을 준비해야 합니다. 직장도 자기가 원하는 곳, 연봉이 높은 곳을 잡기 위해 애써야 하고, 직장에 들어간다고 끝이 아니라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자기가 맡은 일을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보통의 경우에는 결혼 문제가 있고, 결혼하면 자녀 출산과 육아가 있고, 아이가 점점 커 가면서 내가 걸어간 길과 비슷하게 대학입시가 있고, 취업 문제가 있고, 결혼 문제가 있고, 또 자녀가 자녀를 낳는 문제가 있습니다. 인생에는 문제가 끝이 없습니다. 그것이 몇 번 반복되면 결국 인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우리에게 계속 알려주는 것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최후의 심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은 최후에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모든 행위에 대해서 심판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 , 생각까지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게 됩니다.

 

성경에서는 두 종류의 심판을 말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냐 아니냐, 예수님을 믿었느냐 아니냐에 따라 영원한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어지는 심판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 중에서도 자기가 한 행동에 따라서 하나님이 어떤 상을 주실지, 그 상을 다르게 주시는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사는 것을 마치 수험생이 시험을 치르고 나서 최종적인 결과가 나와봐야 자기가 합격했는지 불합격했는지 알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십니다. 자기가 스스로 생각하는 예상 결과와 실제로 나온 결과가 항상 같은 것은 아닙니다. 같을 때도 있지만 다를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특히 최후의 심판 자리에서 더욱 심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이 그렇습니다. 누가 봐도 저 사람은 천국에 갔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천국에 가보니까 없을 수 있고, 누가 봐도 저 사람은 지옥에 갔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천국에 가 있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의 모든 삶을 다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또한 자기는 너무나 부족하고 형편없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최후의 심판 자리에서 놀랍게도 큰 상을 받는 사람이 있고, 반면 자기는 너무나 멋진 인생을 살았고 훌륭하게 살았고 하나님을 위해서도 많은 일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최후의 심판대에서는 보잘것없고 형편없는 결과를 받는 사람도 분명히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최후의 심판의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특히 다른 형제자매들을 향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여섯 절밖에 안 되지만, 첫 다섯 절은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다른 형제자매에 대한 태도에 대해 다루고, 6절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태도에 대해 다룹니다.

 

 

1.   형제자매에 대한 태도 (1~5)

 

1)  형제자매를 비판하지 말라

 

지난번에 예수님은 물질 문제, 삶의 문제에 있어서는 염려하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과의 관계, 특히 믿는 형제자매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비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1)

 

이 말씀을 오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여기 비판하지 말라 그러셨으니까 그리스도인은 절대 아무런 비판도, 판단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을 주어진 대로 받아들여야 하고 심지어 다른 사람에게 속더라도 그 사람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지금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쭉 말씀하시다가 특히 끝부분에서 제자의 분별력을 아주 중요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무엇인가를 제대로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뭔가를 분별한다는 것은 이미 판단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비판이라는 말은 심판, 곧 판단하지 말라는 이야기인데, 이미 우리는 매일 판단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중에 6절을 보면 개와 돼지를 이야기하시는데, 어떤 사람은 개로, 어떤 사람은 돼지로 구분한다는 것이 벌써 판단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절대로 판단하거나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겁니다.

 

또 어떤 경우에 크리스천은 다른 사람과 절대 다투면 안 되고 끝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하면서, 결코 비판하면 안 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상대방이 아무리 못된 짓을 해도 넓은 아량으로 인내하며 용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용서하고 용납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무조건 그렇게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가정이나 일터나 교회에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나빠질 때, 비판하지 말랬으니까 무조건 내 탓이라고 하며 넘어가기가 쉬운데,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그와 반대로 무조건 남의 탓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무조건 남을 탓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무조건 자기 탓이라고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잘못한 게

없는데 무조건 이 말씀 때문에 숙이고 들어간다면 그것은 성경을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제대로 분별해야 합니다. 이 세상을 잘 분별해야 하고, 어떤 것은 또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 잘못하는 경우, 잘못된 이단 사상을 퍼뜨리는 경우에는 비판하지 말랬으니까 그냥 가만히 있으면 오히려 잘못하는 겁니다. 그런 것은 막아야 합니다. 진리가 아닌 것을 전하는 사람에게는 반박도 해야 하고, 비판도 해야 하고, 또 때로는 징계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라는 이 말씀의 뜻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누구에게 비판받지 않는 것을 생각하라는 의미입니까? 보통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비판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를 비판하는 대상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비판하지 말라는 것은 심판하지 말라’, ‘판단하지 말라’, 그러니까 남을 함부로 정죄하고 판단하지 말라는 뜻인데,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를 나의 주로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써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 믿고 구원받았으니 끝난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때가 시작입니다. 그래서 시험을 치르는 수험생처럼, 시험만 보면 다 끝난 게 아니고, 대학만 가면 다 끝난 게 아니라 계속 그 삶이 이어지는 것처럼, 예수님 믿고 천국 백성이 되더라도 그 후에 우리는 천국에 완전히 들어갈 때까지 계속해서 삶이 이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신앙이라는 것이 별 움직임이 없는 정적인 것이 아니라, 굉장히 역동적인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너무 조용하게 아무것도 안 하면서 가만히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코로나 시대를 지나면서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최소한만 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나는 예수님 믿고 구원받았으니까 그냥 조용하게 지내면 된다.’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무엇 때문에 구원을 받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이 예수 믿는 목적이라면, 우리는 믿자마자 죽었어야 했는데 지금도 계속 살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있다는 겁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셨습니까? 구원받고 천국 가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믿고 구원받자마자 바로 죽어서 천국에 가야 했는데 지금도 계속 살고 있다는 것은, 구원의 목적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무조건 천국만 가는 게 구원의 목적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굳이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고 죽으셨습니까? 그것은 단순히 우리가 행복하게 살라고 그러신 게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예수 천당’, 즉 천국만 가라는 게 아닙니다. 지옥에 가지 않고 영원한 천국에서 복을 누리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 믿는 사람은 영원한 천국에 분명히 들어간다고 약속하시지만, 그게 구원의 목적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천국 백성이 되어 이제 죽어도 천국을 갈 수 있게 해 주신 것이 구원의 목적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몸을, 우리의 인생을 사용해서 하나님이 주신 그 뜻, 그 사명을 이루라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주신 것이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가장 큰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로 함께 모여서 영혼을 구원하여 제자를 만들라는 명령을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또 우리가 힘을 합쳐서 함께 영혼을 구원하고 제자 만드는 일을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입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라고 그것을 주신 것입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면, 우리가 크리스천으로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마치 배우가 무대에서 연기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운동선수가 나가서 시합을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요즘 풋볼 시즌도 시작되었고, 특히 유럽 같은 데는 축구 리그가 한창입니다. 배우가 준비를 위해 연기 학원도 다니고 코칭도 받으면서 돈도 많이 쓰고 시간도 많이 들이고 엄청나게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캐스팅되어서 어떤 연극 무대에 오르게 됩니다. 아니면 영화에서 단역이지만 드디어 출연합니다. 아주 보잘것없는 배역이지만 출연했고 데뷔했다는 그 자체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그런데 배우가 된 목적이 엑스트라 같은 역할로 데뷔하는 것입니까? 자기가 데뷔한 후 열심히 연기하여 좋은 배우가 되는 것, 유명하게 성공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겠습니까?

축구선수가 열심히 노력해서 드디어 프로 팀에 뽑혔다면, 뽑히는 게 목적입니까? 아닙니다. 경기에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경기에 잠깐 1, 2분 정도 교체 선수로 들어가서 간신히 뛰었다고 이제 다 됐다.’라고 하는 선수가 어디 있습니까? 일단 뛰었으면 그다음에 또 조금 더 출전 시간을 늘리고, 더 열심히 하고 잘해서 좋은 선수가 되어 팀에 꼭 필요한 선수가 되고 유명한 선수가 되고 실력을 인정받으며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나서 , 나는 이제 됐다. 구원받았다. 천국에 간다.’라고 하며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와 굉장히 비슷합니다. 일단 예수 믿고 구원받았으면 그게 목적이 아닙니다. 구원해주신 목적은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과 목적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어떤 사람을 성공했다고, 또 복 받았다고 평가합니까? 보통은 돈이 많은

사람, 사회에서 높은 지위에 올라간 사람을 성공했다고 할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데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얼마나 높으냐, 돈이 얼마나 많으냐 하는 데는 관심이 없으십니다. 우리가 돈이 얼마나 많으냐, 얼마나 이 땅에서 성공했느냐 하는 데에 하나님이 뭐 그렇게 감명을 받으시겠습니까? 학벌이 얼마나 좋으냐, 어느 학교를 나왔냐 하는 것에 하나님이 무슨 깊은 감명을 받으시겠습니까? 사실 돈은 열심히 노력하고 악착같이 모으면 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중요시하시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그렇게 주어진 것들을 사용해서 뭘 어떻게 하고 사느냐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며 사느냐? 내가 준 사명을 네가 이루고 있느냐?’ 여기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인생을 살았느냐 하는 것으로 최후의 심판 때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상으로 갚아 주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학생이 시험을 치르는데 성적 발표가 나지 않았고 합격자 발표도 나지가 않았다면 아직 안심할 처지는 아닙니다. 물론 자기가 잘했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 발표가 날 때까지는 안심할 수 없습니다. 우리 각자는 다 자기에게 주어진 처지에서 최선을 다하여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 특히 믿는 형제자매를 비판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이미 시험이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너무 시험이 쉬워서 자기가 합격한 게 틀림없고 우수한 성적을 거둘 게 틀림없기에,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기준을 오해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 기준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어떤 업적을 이루거나 무슨 종교적 열심을 가지고 행동한 것으로 자기는 다 되었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자꾸 비판하게 되는 겁니다. 기도하는 것이나 말씀을 읽는 것이나 또 예수 믿은 신앙생활의 연륜이 쌓이면서 이제 나는 이미 어떤 경지에 올랐다. 이제 이 정도면 괜찮다. 이 정도면 됐다.’라고 생각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오해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죽음으로 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또는 예수님이 오시는 그날까지는 자기의 이러한 싸움을 마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우리가 계속해서 나아가는 겁니다. 신앙생활에는 졸업이란 게 없고 끝나는 게 없습니다. 계속 영적 싸움을 싸워 나가는 겁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이고 그것이 성화의 과정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은 예수 믿고 끝난 게 아닙니다. ‘예수, 천당. .’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천국 백성이 되었다면 천국 백성답게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또 함께 형제자매들과 힘을 모아서 영혼 구원하여 제자를 만드는 삶을 계속 살아 나가는 것이 우리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제 천국 가니까 됐고, 이제는 적당히 그냥 이 정도로 살면 됐다.’라고 생각한다면 구원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는 것만 구원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을 계속 닮아가는 과정이 바로 성화의 과정, ‘받는 구원의 과정입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판단을 받게 됩니다.

 

 

2)  형제자매를 비판하는 것은 위험하다

 

먼저 우리가 생각할 것은, 어떤 사건에 대해서 우리는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판하지 말라고 그랬다고 비판을 전혀 안 하는 게 아니라, 비판을 하는데 사람을 비판하는 게 아니고 어떤 일에 대해서 비판하고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악한 행동을 하는데도 비판하지 말고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비판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을 놓고 판단하지 말고 그 사람의 어떤 행동을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거짓말을 했는데도 비판하지 말랬으니까 가만히 있어야겠다고 하면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거짓말한 것을 보니까 당신은 인격이 틀렸어. 당신은 형편없는 사람이요.’ 하고 그 사람의 인격을 매도하며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말한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 사람 자체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인격은 건드리지 않고 그 사람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사실 굉장히 어렵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못되게 굴면 그 사람을 싫어하게 되지, 그 사람이 한 그 행동만 어떻게 따로 보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에 살짝 왔다 가는 게 아니라, 자꾸 어울리고 부대껴야 합니다. 특히 목장에서 가깝게 지내다 보면 허물이 보입니다. 또 다른 식구가 나에게 이상한 소리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견뎌내고 잘 대할 수 있는 훈련을 해나가야 합니다. 그 사람의 인격을 짓밟고 공격하는 데로 나가지 않고, 그 사람의 잘못된 행동이나 말에 대해서만 함께 고쳐주고 함께 바로잡아주는 방향으로 나가는 훈련을 하는 곳이 바로 목장이고 교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른 사람을 비판할 때 보면 사실 행동이나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을 비판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소위 신앙이 좋다고 하는 사람, 믿음 생활을 오래 한 사람에게 그런 경우가 더 많습니다. 사실 저도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 다니기 시작한 사람이니까 얼마나 오래 다녔습니까? 여기에도 지금 몇십 년, 아니 평생 교회에 다니신 분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럴수록 조심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판할 때,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인격을 그냥 싸잡아서 비판하는 경우로 나갈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반드시 그 점에 대해 심판받는다는 것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남을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나는 더 이상 변화할 필요가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축구 시합을 할 때 경기에 뛰는 선수들을 잘 보십시오. 축구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면, 패스를 기가 막히게 해서 툭 건드리면 골이 되는데, 골대 바로 앞에서 완전히 잘못 차서 그냥 톡 차도 들어가는 것이 엉뚱한 데로 가거나 빗나가거나 아니면 골키퍼 정면으로 가는 경우가 종종 나옵니다. 그러면 그 실수한 선수는 머리를 잡으면서 괴로워하고, 패스를 준 선수나 다른 동료 선수들도 크게 아쉬워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실수를 한 번 했다고 와서 멱살을 잡고 너 내가 다 떠 먹여줬는데 그것도 못 넣어?’라고 하면서 막 치고받고 싸우는 선수들을 보셨습니까? 물론 가끔 자기편끼리 싸우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사실은 그것 때문이 아니라 평소에 사이가 안 좋다가 그것을 계기로 감정이 격해지면서 자기 팀끼리 언쟁을 벌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그렇게 실수했을 경우 괜찮다고 등을 두드려주고 다음에 꼭 넣으라고 격려해줍니다. 실수한 선수도 패스해준 선수한테 고맙다고, 내가 잘못했다고 사인을 보냅니다. 거기서 자기들끼리 막 싸우고 있으면 얼마나 추합니까? 그런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아직 경기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해봐야 아는 겁니다. 그렇게 실수했지만 격려받은 선수가 결국 골을 넣어서 이기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끝까지 해봐야 합니다. 그런데 마치 자기는 다 됐다는 것처럼 실수한 선수를 욕하고 가서 멱살 잡고 싸운다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사실

관중입니다. 관중들은 선수가 실패하면 , 그것도 못 넣냐? 밥 먹고 축구만 하는 것들이 저것도 못 넣냐?’라고 하는데, 자기가 해보십시오, 되나. 안 되는데도 엄청나게 비판하고 막 욕을 퍼부어 댑니다. 관중이니까 그렇습니다. 같은 선수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같은 입장에 처한 선수끼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데, 우리가 같은 길을 가는 형제자매라면 그렇게 서로 비판하고 판단하고 정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죄하고 비판한다면 관중처럼 행동하는 것이 됩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5)

 

예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외식입니다. 그래서 가족 외식을 안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외식이 아닙니다. 이것은 위선을 말합니다. 이번 컨퍼런스에 가서 배운 것인데, 우리는 예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을 목장 식구와 또 VIP와 자주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외식입니다. 물론 그 외식은 밖에 나가서 먹는 것이고, 오늘 본문의 이 외식은 위선을 떠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위선을 싫어하십니다.

 

그런데 죽는 날까지 완벽하게 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다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부흥회 참석하고 기도원에 가고 엄청나게 성령 충만하고 뜨거워져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이 또 올라와서 하나님이 싫어하실 만한 모습으로 다시 바뀌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는 끊임없이 움직여야 합니다. 신앙적으로 움직여야 하고 변해야 합니다. 그냥 변하는 게 아니라 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변하도록 애쓰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입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새로워져야 합니다.

 

신앙에는 다음에 해야지’, ‘그동안 충분히 했으니까 이제 그만해야지.’라는 게 없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별로 변할 게 없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여기서 지적하시는 외식하는 자, 즉 위선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위선자는 무슨 엄청난 잘못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이제 됐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적당히 해도 된다.’라고 하는 사람이 위선자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에는 충분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충분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처음 신앙생활을 하면 뭔가를 배워야 합니다. 또 대개는 배우고 싶어 합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까?’라고 해서 <생명의 삶> 공부도 하고, 그러면서 , 이렇게 해야 하는구나.’ 하며 나름대로 변하는 삶을 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이제 어느 정도 수준이 올라가게 되면 자기가 바뀌지 않고 자꾸 다른 사람을 바꾸려고 합니다.

 

목장에서 나눔의 시간을 할 때 원칙 중에서도 가장 하지 말라는 게 뭡니까? 남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싫어하는데 끼어드는 것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저에게 지금 이런 어려움이 있습니다.’라고 나누면 그건 이렇게 하세요. 저렇게 하세요.’라고 할 때, 그렇게 말한다고 잘되는 것이 아닐뿐더러, 그렇게 말한다는 것은 내가 더 우위에 있는 사람이다라는 교만을 드러내는 것이 됩니다. 또한 그것은 나는 변할 필요가 없고 너는 변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인데, 그것은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종교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늘 매 순간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게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전거를 타는 것처럼 해야 합니다. 자전거를 타는데 멈추면 어떻게 됩니까? ‘이 정도면 열심히 탔다. 이제 그만해야지. 이 정도면 충분해.’라고 하며 멈추는 순간 넘어집니다. 자전거는 끊임없이 달려야 합니다. 그래야 계속 갈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쉰다는 것은 없습니다. ‘제가 그동안 너무 오래 해서 이제 쉬겠습니다.’라고 하는 순간 바로 넘어집니다. 그래서 이것을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3)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기준을 기억하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최후 심판의 기준이 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실 때 똑같은 기준으로 하시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2)

 

여기서 중요한 말은 헤아림이라는 말인데, 이 말은 어떤 기준 또는 잣대를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내 나름대로의 기준입니다. 나의 기준대로 나도 헤아림을 받고 비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각 사람마다 기준이 다 다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기준에 맞춰서 각자를 판단하신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가 잘 몰라서 아무 데서나 막 볼일을 본다면, 어리니까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 아이를 보게 되면 여기는 그렇게 하는 데가 아니야. 화장실에서 해야 돼.’라고 하며 아이를 데리고 가서 화장실에서 하도록 그렇게 잘 타이를 것입니다. 근데 40, 50대 어른으로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사람이 아무 데서나 막 볼일을 본다면, 이것은 경범죄에 걸리고 잡히는 일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법을 어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이야 잘 모르니까 그렇지만, 어른은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이처럼 나이에 따라서 세상 법도 다르게 판단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우리를 그렇게 판단하십니다.

 

가끔 <생명의 삶> 공부에서 이전에 나는 학교를 많이 못 다녀서 제가 성경 요약 숙제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라고 하는 분들이 가끔 있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그냥 읽으셔도 된다고 했고, 조금 쓸 줄 아신다면 거기서 본인이 제일 마음에 와닿는 구절을 그대로 적으시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대학뿐 아니라 대학원도 나오고 박사까지 받으신 분이 나는 글을 못 읽어서 못합니다.’라고 하면 말이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각 사람은 자기 수준대로 하는 겁니다.

 

초등학생 아이가 밤에 자고 나서 아침에 일어나야 하는데 늦잠을 자서 늦게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늦게 갔는데,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지각했으니까 벌을 받는데, 그 벌이 무슨 벌입니까? 법정에 고소를 해서 아이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겠습니까? 아닙니다. 학교에서 그냥 다음에는 그러지 말라고 살짝 경고하는 식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만약 대통령, 국회의원, 국무총리 같은 사람이 늦잠을 자서 중요한 회의에 지각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늦게 와서는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어떻습니까? 초등학생 아이가 지각해도 봐주는데 저도 좀 봐주셔야죠.’라고 똑같은 기준을 갖다 대면 이게 말이 되겠습니까? 맡은 책임이 다르기 때문에 잘못할 때 묻는 책임도 다릅니다.

 

하나님은 학교를 많이 못 다니고 지식이 별로 없는 사람과, 엄청난 지식이 있는 사람을 똑같은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그 사람에 맞는 기준으로 판단하십니다. 또 돈이 별로 없어서 정말 하루하루 먹고사는 게 힘든 사람과, 엄청난 재산이 있어서 쌓아놓고 호의호식하며 여행도 잘 다니는 사람에 대한 심판 기준이 다르십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합니다.

 

부모님이 믿는 것을 반대하는 집안에서 자라면서도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 또 결혼했는데 배우자가 교회에 나가는 것을 싫어하고 못 나가게 하는 핍박 가운데 그래도 나와서 예배할 뿐만 아니라 잠깐 30분이라도 봉사하고 가는 사람과, 아무 문제 없이 신앙생활을 얼마든지 잘할 수 있는 집안에서 자라고 얼마든지 잘할 수 있는 환경에서 교회에 나와 1시간 정도 봉사하는 것을 똑같이 보지 않으십니다.

 

두려운 게 바로 이겁니다. 여기 직분자들도 많이 있으시지만, 직분을 맡았다는 것은 두려워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 직분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떤 것을 맡았다면 그 맡은 것에 대한 책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특히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은 저를 포함해서 신앙 연륜이 길수록 더더욱 무거운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몸이 아파 나올 수도 없고 누워 있어야 하는 형편인데 너는 오래 신앙생활 했는데 왜 봉사를 안 하느냐? 왜 예배를 안 하느냐?’라고 하나님이 그러시겠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할 수 있고 충분히 아는데도 안 하는 사람을 이제 갓 믿었기에 잘 몰라서 못하는 사람과 결코 똑같이 취급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워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우리는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이 나를 판단하시는 기준이 내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받을 것이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판단하시는 기준은 내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바로 그 기준입니다.

 

가끔 그런 일이 있습니다. 티브이 프로그램을 보다가 어떤 연예인이 나왔는데 조금 인물이 떨어지는 사람이 나오면 저 사람 왜 이렇게 못생겼어?’라고 합니다. 그럴 때 옆에 있는 사람이 나를 쓱 보며 말합니다. ‘자기보다 훨씬 잘 생겼구먼.’ 못생겼다고 말하는 자기의 그 기준 그대로 판단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자기가 아는 것으로 남을 판단하고 자기가 생각하는 기준으로 남을 정죄합니다. 그렇게 잘 알면서도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 다른 사람의 상황을 다 알지 못합니다. 그냥 내 생각으로 볼 때 내 기준에 맞지 않으니까 비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판단이 옳겠습니까? 그런 헤아림이 옳겠습니까?

 

지금 혹시라도 , 나는 세상에서 실패하고, 성공도 못하고, 높이 올라가지도 못하고, 그냥 이 정도로 살고 끝나나?’ 하며 낙심이 되는 분이 계시다면 결코 낙심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런 상황에서는 조금만 잘해도 엄청난 상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계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엄청난 삶을 누리고 있고, 신앙적으로도 그렇고, 재물도 많고 학벌도 좋은데 주님이 기뻐하실 만한 일을 하는 게 없습니까? 그럼 두려워야 합니다. 정말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상이 없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이나 알아주는 사람과, 마지막 심판 날에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는 사람이 완전히 다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저 사람은 상을 받겠다고 생각했는데 못 받을 수 있고, 저 사람은 못 받겠다고 생각했는데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모든 사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놀라게 되지만, 하나님께는 전혀 놀라실 만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정확하게 심판해주십니다. 세상에서는 법정, 심지어 대법원의 판결이 나와도 억울하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대에서는 억울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모든 증거를 다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품었던 생각까지, 내가 잊어버렸던 것까지도 다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억울할 수가 없습니다.

 

 

4)  들보를 가진 사람이 티를 가진 사람을 비판할 수 없다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3-4)

 

이것은 사실 과장법입니다. ‘예수님의 유머라는 책도 있지만, 예수님이 여기서 많이 사용하시는 방법이 과장법입니다. 20여 년 전에 나온 미국 CBS<Jesus>라는 미니시리즈가 있었습니다. 거기 보면 예수님이 굉장히 잘 웃으시고 아주 쾌활하십니다. 거기서 예수님이 바로 이것을 설명하시면서 큰 막대기를 갖고 와서 눈에다가 막 집어넣는 시늉을 하시며 이런 게 눈에 들어 있는 사람이 요만큼 작아서 보이지도 않는 티끌이 있는 사람을 막 욕하고 그러면 말이 되느냐?”라고 하시니까 거기 아이들과 사람들이 웃는 그런 장면이 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처럼 엄청나게 큰 막대기를 눈에 넣고 다니는 사람이 그것에 대해 전혀 불편함을 못 느낀다는 점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겁니다. 그런 사람이 조그만 티가 눈에 들어간 다른 사람에게서 그 티를 빼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들보라는 것은 당시 사람들이 갖고 있던 종교적 편견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은 어떤 종교적인 규칙만 일정하게 지키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의 일정한 기도 시간에 기도하고, 일정한 시간에 구약성경을 읽고, 규정된 의무를 다하고, 또 안식일을 지키고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런 종교 훈련과 경건 생활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종교적인 행위가 신앙의 전부는 아닙니다. 마음이 중요한데 하나님께로 마음은 전혀 없으면서 겉으로만 하는 척하는 것을 여기서 예수님이 계속해서 지적하고 계십니다.

 

나는 하기 싫어도 하나님이 원하시니까 하고, 또 나는 하고 싶은데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시니까 안 하며, 그렇게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훈련이 우리에게 필요한데, 그 훈련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바로 그것을 우리가 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2.   돼지에 대한 태도 (6)

 

형제자매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대해서 말씀하신 예수님은 이제 개와 돼지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말씀하십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6)

 

여기서 진짜 개와 돼지를 이야기하시는 게 아니라, 개와 돼지 같은 사람들, 즉 진리를 가지고 상대할 수 없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정치인들이 뭣도 모르고 잘 따라오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소위 개돼지라는 식으로 아주 잘못된 표현을 씁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그렇게 사람들을 폄훼하는 표현은 아니지만 너무나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개에게 거룩한 것을 주면 개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돼지에게 비싼 진주를 준다고 돼지가 좋아하겠습니까? 오히려 이상한 것을 준다고 화를 내면서 달려들어 물어뜯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개와 돼지는 누구이고, 거룩한 것이나 진주는 무엇입니까? 결국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 이 정도면 됐다고 하는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보통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가리켜 라고 또 돼지라고 하며 무시했는데, 여기서 예수님은 그런 이방인들을 가리키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고집을 부리며 자기 기준만 옳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을 가리키십니다. 완고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개나 돼지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가장 귀한 것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더럽고 추한 것으로 만족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날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에게 차고 넘쳐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나아가기보다, 하나님 나라의 진리와 가치인 사랑의 관계보다는 그냥 저급하고 추하고 더러운 것에 만족하면서 그 이상 찾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 개나 돼지의 습성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런 종교적인 만족이 끝난 후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도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철저히 위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은 일주일 동안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했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뭐 하다가 여기 나왔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잠깐 예배 시간을 떼운 다음에 또 어떤 생활로 돌아갈지를 다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런 더러운 생활을 벗겨 버려야 하는데, 계속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 살아가는 모습, 철저히 자기가 주인인 삶을 살아가는 바로 그러한 모습을 가리켜 돼지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나가는 말]

 

우리가 오늘 꼭 기억할 것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고 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시작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자리에서부터 하나님의 뜻이 뭘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사랑할까? 어떻게 하면 이웃을 사랑할까? 어떻게 하면 형제자매가 같이 모여 주님을 모르는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 또 주님의 제자로 만들어 갈까? 그 가운데 어떻게 내가 주님의 제자로 자라갈까?’ 이런 것을 함께 계속해서 해나가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마침내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정말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라면 천국 지옥을 걱정할 게 없습니다. 천국에 갑니다. 그러나 천국에 갔을 때 하나님 앞에 잘했다고,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신실한 종이라고 칭찬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비록 불완전하지만, 이 땅에서 끊임없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애쓰며 나아간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잘했다고 칭찬받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될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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