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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다" (창 25:19-26) -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18 (7/12/2020)
설교 동영상: https://youtu.be/jeEl_aWOSNk?t=3328
2020년 7월 12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18 ✦
“마침내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다”
(창세기 25장 19~26절)
[들어가는 말]
혹시 우리 중에 ‘나는 태어날 때 이 부모, 이 동네, 이 도시, 이 나라를 꼭 집어서 여기 태어났다.’라고 하는 분이 계십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중에 자기가 어떤 집안, 어느 도시, 어느 나라에서 태어나겠다고 선택해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가정이든지, 어느 도시든지, 어느 나라든지, 자기가 결정하고 태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냥 태어나고 보니까 부모님이 이런 분이고, 집안이 이런 집안이고, 동네가 이런 동네이고, 도시가 여기고, 나라가 여기인 겁니다.
심지어 우리 중에 ‘나는 꼭 태어나고 싶다.’ 하고 태어난 사람도 없습니다. 그냥 태어난 겁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으로 태어났지만, 부모님에 의해서 태어났습니다. 내가 한국 시민으로 태어나느냐, 중국 시민으로 태어나느냐, 미국 시민으로 태어나느냐, 북한에서 태어나느냐, 남자로 태어나느냐 여자로 태어나느냐 하는 것들도 자기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결정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선천적인 병을 가지고 태어나거나, 원래부터 약하게 태어나거나, 장애를 가진 채 태어나는 경우도 있는데, 자기가 원해서 그렇게 태어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부모를 잘못 만나서 내가 이렇게 힘든 삶을 살고 있다’고 한탄하는 분이 계십니까? 혹시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내가 힘들게 살고 있다’고 원망하는 분이 계십니까?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십시오. 더 안 좋은 부모를 만날 수도 있었습니다. 훨씬 더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태어날 수도 있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내가 왜 한국에서 태어나거나, 중국에서 태어나거나, 미국에서 태어나거나, 또 왜 여자 또는 남자로 태어났는지, 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는지, 왜 약하게 태어났는지, 아무리 우리가 원망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환경 자체를 바꿀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실을 인정하고, 분명히 여기에도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다는 것을 신뢰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삭의 두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의 출생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들이 태중에 있을 때부터 이미 하나님은 그들에 대해 각기 다른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이 부분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입니다. 이 아이들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아무 일도 한 것이 없는데도, 하나님은 이 아이들에 대해 각기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우리도 왜 내가 이렇게 태어났는지, 왜 거기 태어났는지, 또 어떤 사람은 왜 재벌의 자녀로 태어나고 아주 높은 위치의 집안에 태어나는데,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1. 리브가의 불임 문제 (19~21절)
이삭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어 얻은 상속자이며 믿음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75세에 부르셔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도록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던 바로 그 약속의 아들이 이삭입니다.
24장을 보면 상당히 길지만, 그 내용은 이삭이 어떻게 리브가와 결혼하게 되었는지가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이삭은 결코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원하는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자기 늙은 종을 고향으로 보냅니다. 그 종의 이름은 안 나와 있지만 이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이 원래 자기 모든 것을 상속하게 하겠다고 했던 다메섹 출신 엘리에셀일 것이라고 학자들이 추측합니다.
이 종을 자기 고향으로 보내서 이삭을 위해 자기 집안에서 아내를 구해오라고 했을 때, 하나님이 인도해주셔서 리브가를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때 리브가를 데려옵니다. 그때 둘 다 서로 보고 결혼한 것이 아닌데, 이삭은 전혀 묻지도 따지지 않고 리브가를 아내로 맞이하여 사랑했습니다(24:67).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 (19-20절)
여기서 리브가의 출신 배경을 자세히 설명하는데,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아주 귀한 집안의 딸이라는 뜻입니다. 24장 내용을 조금 살펴보면, 아브라함의 늙은 종(엘리에셀)이 이삭의 아내 될 여인을 찾아오라는 주인 아브라함의 명령을 받고 아브라함의 고향까지 먼 길을 떠납니다.
그가 목적지에 도착해서 우물가에 갔을 때 리브가를 만나는데, 그 전에 이미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이러이러한 아가씨를 만나면 내 주인의 아들의 짝이 될 사람인 것을 알겠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자기가 물을 달라 했을 때 마시게 해주고, 말을 안 했는데도 낙타에게까지 물을 마시게 하는 여자를 놓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종이 리브가를 보고 물을 달라고 하자 그에게 물을 제공하여 마시게 해줍니다. 게다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낙타들을 위해서도 물을 길어 마시게 해줍니다. 그때는 저녁이라(24:11) 어둡기 전에 서둘러 물을 길어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낙타 한 마리가 보통 75리터에서 120리터의 물을 마신다고 합니다. 굉장히 많이 마십니다. 엄청난 양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종이 끌고 온 낙타가 열 마리이고 다른 종들도 왔는데, 낙타 열 마리에게 리브가가 물을 떠서 마시게 해준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리브가가 그렇게 한 것으로 볼 때, 리브가는 참 마음이 따뜻하고, 노인을 공경할 줄도 알고, 게다가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섬길 줄 아는 여인인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믿음의 상속자인 이삭은 아주 조용한 성품이었고 끈기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이삭은 마음이 따뜻한 여인이며 귀한 집안의 딸인 리브가와 결혼해서 그 당시 고대사회의 최고의 커플이 되었습니다. 선남선녀가 만난 겁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21절)
이 아름다운 커플에게 아기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보면 이삭이 40세에 결혼해서 60세에 아기를 낳았으니까, 무려 20년 동안 그랬다는 것입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결혼을 했다면 이해가 갑니다. 불순종으로 인해 벌을 받아서 그렇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결혼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복을 내리신 결혼이었습니다.
아마도 이삭과 리브가가 처음에는 ‘시간이 좀 지나면 아기가 생기겠지.’라고 생각했을 텐데, 결혼한 지 20년이 다 되어 가도록 아기가 생기지 않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인도해주셔서 이루어진 결혼인데도 불구하고, 이토록 오랫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은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입니다.
이때까지 이삭이 배운 것은, 하나님께서 삶의 모든 부분을 인도해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다는 것을 생생하게 체험한 사람입니다.
특히 모리아 산에서 자기가 아버지의 손에 의해 죽을 뻔했을 때,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니까 ‘알겠습니다.’ 하고 죽을 각오를 한 채 누워있는데, 천사가 나타나 말리고 숫양을 공급하여 대신 제사를 드리게 해주신 ‘여호와 이레’(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의 신앙을 이론이 아니라 아주 생생하게 배운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다 준비해주신다는 사실을 배운 것입니다.
그래서 후사가 없는 문제도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주실 것을 믿고 기다렸는데, 무려 20년이 다 되도록 리브가가 임신하지 못하는 겁니다. 이렇게 힘든 순간에 이삭은 무엇을 합니까? 이삭은 아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기도를 했습니다.
우리가 계속 성경에서 확인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으며 순종한다고, 또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고 삶의 문제가 안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이해가 안 갈 때는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도 문제가 일어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누가 봐도 인간적으로 최상의 조건에 있는 사람에게도 문제는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거기에 어떻게 대처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그 방법을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말로는 하나님을 믿으며 맡긴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방식대로 해결해보려고 애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는 노력을 했는데도 잘 안 되면, 그냥 포기하면서 ‘에이, 될 대로 되라.’ 하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아예 자기 방식대로 하든지, ‘에라, 모르겠다.’ 하며 아예 포기하든지 하는 겁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할 때가 아니라 잘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삶에 문제가 발생하거나 내가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 하나님은 과연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신실하게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며 나아가는데도, 기도하며 말씀을 붙들며 예배하며 나아가는데도 일이 잘 안 풀린다면, 하나님이 뭘 하기를 원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 문제를 놓고 간절히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대충 기도하거나 형식적으로 기도하는 게 아니라 간절히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지금 내게 중요한 문제가 있는데도 하나님이 빨리 해결을 안 해주실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잔뜩 긴장해서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한 번 해결해보겠다고 애를 써보지만 그게 잘 안 되고 길이 안 보여 걱정이 되십니까? 그렇다면 일단 긴장을 푸는 게 필요합니다. 운동을 할 때도 힘을 빼라고 합니다. 힘을 빼고 긴장을 풀고 하라고 합니다. 그래야 잘된다는 겁니다.
영적으로도 똑같습니다. 일단 긴장을 풀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기도의 시간을 정하여 규칙적으로 기도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아주 걱정되고 긴장될 때 가장 좋은 기도의 방법은 새벽기도입니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인 새벽에 먼저 기도하며 시작하면 긴장이 풀리고 여유가 생깁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진짜로 그런가요?’ 하는 분이 계시다면 안 해본 분입니다. 새벽기도를 해보십시오. 정말 긴장이 풀리고, 상황은 똑같은데 이상하게 걱정이 되지 않습니다.
아니면 노력을 했는데도 잘 안 되니까 막연히 ‘어떻게 되겠지’ 하고 생각하거나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 하는 식으로 포기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주님 앞에서 간절함을 회복하고 간절한 기도로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 가장 좋은 기도의 방법이 바로 금식기도입니다. 사람이 안 먹으면 간절해집니다. 한 번 금식기도를 해보십시오.
아브라함의 경우 이삭을 늦게 주신 것은, 믿음의 아들이 자연발생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온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뿐 아니라 이삭도 자녀를 오래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같은 아들이라도, 심지어 쌍둥이라고 해도 하나님은 각 사람을 향해 다른 계획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준비하시고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내게 문제가 있어도 하나님이 왜 이렇게 오랫동안 해결을 안 해주시는가? 그것은 결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거나 별로 나에게 관심이 없으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나에게 가르쳐주실 아주 귀한 영적 교훈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금 간절히 바라는 일이 있는데 잘 안 되고 있습니까? 싱글 청년이라면 짝을 만나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결혼한 부부는 임신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건강이 약한 분은 건강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또 진로의 문제나 비자 문제나 학업이 잘 풀리기를 바라고, 또 직장이나 사업의 문제나 가정의 문제가 잘 풀리면 좋겠는데 잘 안 되고 있습니까? 그것도 내가 엉망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애쓰고 있고 이웃 사랑도 실천하며 나아가는데 일이 잘 안 풀리고 있습니까?
그럴 때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으신다고 결론을 빨리 짓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내가 하나님을 열심히 붙드는데도 잘 안 되고 있다면 틀림없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복을 주시려고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하시나?’ 정말입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을 잘 섬기는데도 상황이 잘 안 풀리고 있다면, 이렇게 생각할 때 틀림없습니다. ‘얼마나 큰 복을 주시려고 지금 이렇게 훈련을 시키시고 이렇게 기다리게 하시는가?’ 이런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보시기 바랍니다. 틀림없이 새로운 길을 조만간 보여주실 것입니다.
2. 또 다른 문제의 발생 (22~23절)
하나님께서 이삭의 간구를 들으셔서 리브가가 드디어 임신하게 됩니다(21). 19년 동안 임신이 안 되던 리브가가 아이를 가지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나 ‘산 너머 산이다.’라는 말처럼, 임신하고 나니까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22절)
쌍둥이를 가진 것 자체만으론 문제가 아니지만, 그 둘이 태 안에서 치열하게 싸웁니다. 가만히 있어도 힘들 텐데, 싸우니까 리브가가 너무 괴롭고 고통스러웠습니다. 리브가가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는 말은, ‘이러면 내가 도대체 어떻게 살 수 있는가?’라는 말입니다. <새번역> 성경에서는 “이렇게 괴로워서야, 내가 어떻게 견디겠는가?”라고 번역했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뱃속에서 엄청난 요동이 일어나니까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몸도 힘들지만 너무 걱정이 되어서 견딜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아기를 낳아본 다른 여자들한테 물어보지 않았겠습니까? ‘임신하면 아이가 뱃속에서 이런 게 정상인 거죠?’ 하고 물어보니까 ‘아닌데, 나는 전혀 안 그랬는데.’라고 대답하는 겁니다. 아주 조용했다는 겁니다. 또 어떤 여자는 ‘나는 정말 힘들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까 자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비정상인 겁니다. 그래서 리브가가 아픈 것도 괴롭지만, 얼마나 겁이 낫겠습니까? ‘이거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다른 여자들은 안 그런데 나만 그러니 잘못된 게 아닌가?’ 대개 여성들은 아기를 가졌을 때 ‘내 아이가 정상적으로 건강하게 잘 태어나야 되는데...’ 하는 불안감이 약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뱃속에서 요동이 굉장히 심하니까 어떻게 걱정이 안 되겠습니까? ‘이러다 잘못되는 게 아닌가? 이상한 아이가 나오는 게 아닌가? 무슨 괴물이 나오는 게 아닌가?’ 리브가는 지금 몸은 몸대로 힘들고, 마음은 마음대로 힘듭니다. 아주 걱정이 되는 상황입니다. 바로 그때 리브가가 무엇을 합니까?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리브가는 엄청나게 괴롭고 힘든 이 순간에 하나님께로 나아가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하고 여쭤봅니다. 그것도 따로 떨어진 장소로 나아가서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리브가는 뱃속에서 아기들이 요동치는 것을 보며 이것은 심상치 않은 일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나아갑니다. 다른 데로 가지 않고 주님께 나아가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삭도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리브가도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그들의 문제 해결 방식이 중요합니다. 우리도 문제가 심각하여 몸과 마음이 괴로울 때 똑같은 심정이 아닙니까? 우리도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묻습니다. 거기까지는 참 좋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묻고 나서는 엉뚱한 데로 가거나 엉뚱한 짓을 한다는 겁니다.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점쟁이에게 물으니라.’ 뭔가 잘못된 겁니다.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믿음을 떠나서 더 이상 예배에 안 나오니라.’ 뭔가 잘못된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에 대한 정답은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입니다. 괴로울 때는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리브가가 이 시대에 살았다면 당연히 이럴 때 병원에 찾아가서 검사를 받았을 것입니다. 초음파 검사(ultra sound)도 하고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대 시대에 살았던 리브가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방법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결코 쉬운 게 아닙니다. 그 당시 비슷한 경우에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리브가는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리브가가 주님께 나아가 여쭤보니까, 주님께서는 놀라운 사실을 리브가에게 알려주십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23절)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리브가의 태중에 두 민족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즉, 쌍둥이라는 겁니다. 리브가는 이때까지 혹시 자기가 무슨 죽을병에 걸려서 이런 것이 아닌가,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고 심히 걱정됐는데, 주님의 말씀을 통해 자기가 지금 쌍둥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쌍둥이들이 기를 쓰고 뱃속에서 싸우기 때문에 이렇게 힘들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쌍둥이들은 왜 이렇게 태어나기 전 엄마 뱃속에서부터 싸웁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쌍둥이가 서로 나뉘고 하나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싸운다고 하십니다. 보통 쌍둥이가 태어나면 둘이 하나가 되어 살아갑니다.
제 친구 중에 쌍둥이가 있는데, 어릴 때는 별로 안 좋다고 합니다. 다른 아이들은 자기 같이 생긴 아이가 하나인데 자기는 자기와 똑같은 아이가 또 있으니까 아주 밉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이란성이었던 친구가 있었고 자기 쌍둥이가 여자였는데도 왜 자기는 쌍둥이인지 그게 아주 싫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점점 커가면서 어른이 되면서는 그게 바뀐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인데 우리는 둘이다. 얼마나 감사한가?’ 하면서 애틋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들이 나중에 나뉘는 것이 아니라 태 안에서부터 두 민족으로 나뉠 것이라고 하시고, 한 족속이 다른 족속보다 강할 거라고 알려주십니다. 그것도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싸웠는지 알 수가 없지만 뱃속에서 굉장히 요동쳤던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뱃속에서부터 싸우는 이 쌍둥이를 통해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단순히 자신의 선행이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따라서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아주 잘 설명해줍니다.
“그뿐만 아니라, 리브가도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에게서 쌍둥이 아들을 수태하였는데,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택하심이라는 원리를 따라 세우신 하나님의 계획이 살아 있게 하시려고, 또 이러한 일이 사람의 행위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시는 분께 달려 있음을 나타내시려고,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말씀하시기를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 하셨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하였다’ 한 것과 같습니다.” (롬 9:10~13, 새번역)
기독교, 특별히 우리 장로교에는 유명한 예정론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많은 오해가 있습니다. ‘예정’이라는 말 때문에 오해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예정론이라고 하면 듣자마자 반발합니다. 다 정해졌으면 왜 착하게 살아야 하느냐고 따집니다. 누구는 믿고 천국 가고 누구는 지옥 가는 게 다 정해져 있으면 뭐 하러 전도해야 하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다는 것은 아주 감사할 일입니다. 예정론의 핵심은 누구는 천국에 가고 누구는 지옥에 가기로 다 결정됐다는 데 있는 게 아닙니다. 사실 예정론이 나오게 된 배경은, 종교개혁자 존 칼빈(John Calvin)이 믿는 사람들은 천국에 갈 것이 확실하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서에 근거해서 믿는 사람은 확실히 천국에 가도록 예정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말한 것이지, 천국과 지옥에 가는 게 다 정해져 있다는 차원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선택하셨다는 것이 정해져 있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입니다. 믿으면 천국에 가기로 정해져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그게 정해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믿는데도 천국이 확실하지 않다면 우리는 항상 불안하고 떨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감사하며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땅의 누구도 하나님께 택함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한 명도 없습니다.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라고 성경이 말씀합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위대한 왕 다윗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 51:5)
다윗은 죄악 중에 자신이 잉태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아기를 가지는 자체가 죄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잉태될 때부터 죄 가운데 있었고,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자격이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그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아무도 하나님께 올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아들을 보내셔서, 그 아들을 붙들면 천국에 올 수 있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에서나, 육정에서나, 사람의 뜻에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서 났다.” (요 1:12-13, 새)
그러니까 ‘혈통’, 즉 집안이 좋거나 믿는 집안이라서가 아니고, ‘육정’ 즉 자기의 노력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사람의 뜻’ 즉 남이 해줘서 되는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삭의 쌍둥이 아들들은 처음에 태중에서 잉태될 때부터 둘 다 하나님의 백성이 될 자격이 없었습니다. 둘 다 없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다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중 하나를 택하여 평생 말씀으로 찾아오시고 은혜로 설득하시고 키워주시고 변화시키셔서, 결국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은혜이며, 이것은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왜 둘 다 택하지 않으시고 하나만 택하셨습니까? 이건 불공평한 게 아닙니까? 그러나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로마서 9장을 죽 읽어보면 그것에 대해 나와 있습니다. 사실 야곱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정말 비열한 삶을 산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이 기회를 주셨을 때 그가 그것을 붙드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그런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하나님이 에서를 미워하시고 야곱만 사랑하신 게 아니라, 사실은 둘 다 똑같이 기회(은혜)가 주어졌는데 그 은혜를 야곱은 비열한 사람이었음에도 붙들었고 에서는 그 은혜를 그냥 내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의무도 이유도 전혀 없으십니다. 여러분, ‘그래도 나는 좀 괜찮은 사람이니까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됐지.’라고 혹시 생각하십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구원해주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이고 은혜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버리시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을 때 그것을 붙들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적은 겁니다. 바로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우리가 은혜를 입었을 때 감사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사실 야곱의 인생을 보면 정말 형편없습니다. 그의 행동을 봐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하나님을 붙잡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믿음의 조상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변화시켜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하나하나를 그렇게 붙들어주지 않으셨다면 우리 중에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예배의 시간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런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감사를 표현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3. 에서와 야곱의 출생 (24~26절)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둥이가 있었는데,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24~25절)
하나님이 말씀해주신 대로 리브가가 쌍둥이를 낳습니다. 둘 다 아들입니다. 형은 살결이 붉고 온 몸이 털로 되어 있어서 이름을 ‘에서’라고 짓는데 ‘털’이라는 뜻입니다. 나중에 에서의 후손이 에돔 민족인데 ‘에돔’은 ‘붉다’라는 뜻입니다. 반면 이어서 태어난 동생은 어떻습니까?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26절)
이 둘이 많은 시간의 차이가 있게 나온 게 아니라, 하나가 나오고 바로 이어서 발꿈치를 잡고 둘째가 나온 겁니다. 둘째는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왔기 때문에 ‘야곱’이라고 짓습니다. ‘발뒤꿈치를 잡다’ 또는 '속이다'를 뜻하는 단어 ‘야아케브’에서 나온 말입니다. 두 아이 모두 태어날 때부터 범상치가 않습니다. 아기인데도 서로 싸우며 나왔습니다. 장차 커서 자기 민족의 우두머리가 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어떻게 아기가 나올 때부터 털이 많습니까? 이들은 이란성이었음에 분명합니다. 하나는 성향이 짐승같이 막 덤벼들고 우직하게 무조건 힘으로 하려는 아이입니다. 또 하나는 약삭빠르게 도망가고 피합니다. 사기꾼 기질이 충만(?)합니다. 마치 곰과 사기꾼 같은 두 아이가 싸웠으니 엄마 배가 편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우리 안에 그럴 만한 가능성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사실 우리도 둘 중 하나가 아닙니까? 날뛰는 짐승이거나, 속이는 사기꾼입니다. 혹시 이 말이 지나치다고 생각되십니까? 그러나 잘 생각해보십시오. 사실은 내 안에 두 모습이 다 있습니다. 어떤 때는 날뛰는 짐승처럼 분노하고 다른 사람을 향해 덤벼들기도 합니다. 마구 독설을 퍼붓습니다. 또 어떤 때는 슬쩍슬쩍 거짓말을 하거나 눈가림으로 남을 속일 때도 있습니다.
둘 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에는 자격 미달입니다. 전혀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아주 오래 전, 영원 전부터 당신의 자녀로 삼기로 결정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주님의 결정이야말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런 것을 ‘은혜’라고 부릅니다. 이 은혜를 받아들일 때 인생이 변화되며, 주님의 자녀가 되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 혹시 아직도 하나님과 숨바꼭질을 하고 계십니까? 그것을 멈추고 이 은혜를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또는 이 은혜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그 후에 계속해서 하나님과 숨바꼭질을 하는 상황입니까? 이 은혜를 붙드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그리고 놀라운 복을 계승하는 복의 근원으로 삼으시고 놀랍게 사용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이 놀라운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의 목적을 위해 귀하게 쓰임 받는 놀라운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