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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창 22:1-14) -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17 (7/05/2020)

 

설교 동영상: https://youtu.be/_PlPjYeYuMg?t=3761

 

 

202075일 주일예배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17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창세기 221~14)

 

[들어가는 말]

 

2017년 가을에 수요예배 때 다룬 <팀 켈러의 내가 만든 신>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굉장히 훌륭한 책이니까, 안 읽어보신 분들은 꼭 읽어보시고 읽어보신 분들도 다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애나(Anna)라는 여성이 있었는데, 독신일 때부터 간절히 자녀를 갖고 싶어 했습니다. 애나는 자녀를 낳아 아주 훌륭한 아이로 길러서 행복을 누리고 싶었고, 결국 소원대로 늦은 나이에 결혼하여 두 아이들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원했던 꿈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자녀에게 완벽한 삶을 살게 해주고자 하는 의욕이 너무 지나쳐서, 정작 행복을 제대로 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두려움과 불안에서 나온 과잉보호와 자녀의 삶을 자기가 시시콜콜 다 통제하려는 욕구가 애나의 가정을 불행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애나의 큰 아이는 학교생활에 적응을 잘하지 못하며 심각한 정서적 문제를 보였고, 둘째 아이는 늘 분노를 보였습니다. 자녀에게 완벽한 삶을 주고자 했던 애나의 욕심이 오히려 자녀를 망친 것입니다. 마음속의 자신의 간절한 소원을 이루는 것이 오히려 인생에 독이 되었습니다.

 

애나는 자기 자녀들이 완벽한 삶을 살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오히려 그 노력이 그들의 삶을 망쳤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녀는 자기가 아이들을 너무 많이 사랑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자녀와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너무 적게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그 결과 자신의 우상이 되어 버린 두 자녀는 엄마의 지나친 기대에 짓눌려서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속의 아주 절실한 꿈을 이루기 위해 평생을 바칩니다. 그렇게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고 그 자체는 잘못된 게 아닙니다. 우리는 갈망하는 바를 얻기 위해 끝없이 애씁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웬만한 것은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속 깊은 곳의 간절한 소원, 그토록 바라던 평생소원을 이루는 것이 오히려 자신에게 최악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대부분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합니다.

 

바로 그러한 일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벌어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것을 해결해주시기 위해 움직이시는 것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아브라함이 자신에게 닥친 엄청난 위기를 믿음으로 잘 극복하고 하나님께 인정받은 이 사건을 통해, 주님의 위로와 소망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과 이해할 수 없는 아브라함의 순종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1-2)

 

아브라함아하고 부르셨을 때만 해도 , 하나님, 웬일이십니까?’라는 정도였을 것입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라고 하실 때에도 좋았습니다. ‘, 등산을 하라고 그러시나?’ 그런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십니다.

 

번제로 드리라는 것은, 아브라함이 직접 자기 아들을 칼로 찔러 죽이거나 목을 따서 죽이고 배를 가른 다음에 다 꺼내고 칼로 살과 뼈를 바르고 각을 떠서 불에 태워 바치라는 것입니다. 보통 아버지가 아들에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아버지로서 자기 아들에게 도저히 행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삭이 아브라함의 사랑하는 독자라는 것을 말씀하시면서도 어떻게 이런 잔인한 일을 하라고 명령을 하신다는 말입니까? 이게 말이 됩니까? 이런 말도 안 되는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입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믿음이라는 것은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냉혈인간이나 사이코패스 같은 사람만 가질 수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있어 가장 유명한 사건입니다. 저도 어릴 때부터 수없이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아브라함에게 행하라고 명령하시는지 그것을 잘 봐야겠습니다. 1절을 다시 보시면 여기에 실마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시험이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아브라함을 시험, 즉 테스트(test)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테스트는 이처럼 이해가 가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테스트하실 때 반드시 거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테스트가 오더라도 괜찮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테스트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믿음의 사람에게 그 인생에서 불투명한 부분이나 혼동되는 부분이 있을 때, 테스트를 통해서 확실히 정리하시고 그 후에 복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결코 무너뜨리시려는 게 아닙니다.

 

지금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분명하게 되어야 할 부분, 그가 혼동되고 있는 부분이 무엇입니까? , 이삭입니다. 100세에 이삭을 얻게 되자 아브라함은 그를 깊이 사랑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조금 늦었어도 귀할 텐데 100세에 얻었으니 얼마나 귀했겠습니까? 86세에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얻었을 때도 기뻤지만, 이삭을 얻었을 때는 훨씬 더 기뻐했습니다. 너무 좋았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는 표현이 그에게 어울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자신에게 이삭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계속 주겠다고 하시다 주셨는데, 이삭이 태어나고 보니까 주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정작 하나님의 선물인 이삭에게만 푹 빠져서 살면 이삭이 뭐가 되어 버리는 겁니까? 우상이 되고 맙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우상 숭배하는 사람도 벌하시고 우상들도 다 찍어 쪼개 없애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상 숭배를 너무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십계명의 제1계명은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이고, 2계명이 우상을 만들지도 섬기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토록 우상을 싫어하십니까? 왜 그토록 우상을 만들지도 섬기지도 말라고 하시나? 왜냐하면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 외아들까지 내어주실 정도로 사랑하시는 우리 인생이 망가지기 때문입니다. 우상을 섬기면 인생이 망가집니다. 그래서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삭이 아브라함의 우상이 되면, 우상숭배자인 아브라함도 다치고 또 우상인 이삭도 그 인생이 망가진다는 것입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기 자녀를 우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부모 자신도 인생이 꼬이고 자녀의 인생도 망가지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런 경우들을 너무나 많이 봅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이삭 문제를 분명히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복의 근원이 될 수 없습니다. 이삭을 우상으로 숭배하게 되면 모든 민족에게 복을 전달해주는 복의 근원, 복의 통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정결하게 하시고 확실히 하시기 위해 테스트 하시는데, 이 테스트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닙니다. 정말 너무너무 어려운 시험입니다. 그런데 이 힘든 테스트를 받는 아브라함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3)

 

이 말도 안 되는 명령에, 아브라함은 한 마디 불평도 없이 순종하면서 묵묵히 길을 떠납니다. 하나님의 너무나 황당한 명령에 대해 아브라함도 너무나 황당한 순종을 하고 있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런 명령에 어떻게 순종할 수가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인간이란 말입니까? 하나님이 바치라고 하시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 알겠습니다. , 여기 싱싱한 이삭이 있습니다. 제가 이제 금방 죽여서 바쳐 올리겠습니다.’라고 하는 겁니까?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이라도 이런 식으로 자기 아들을 바칠 만큼 무정하고 잔인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삭을 바치려 하는 것입니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두 가지 경우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미친 경우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가 정말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경우입니다. 둘 중 하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미치지 않았습니다. 제정신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정말로 믿은 것입니다. 75세에 자기를 부르신 이후 하나님께서 여러 번 자기에게 나타나셔서, 하늘의 별이나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자손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21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이삭을 주시고 이삭을 통해서 많은 자손을 주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그럼 이삭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 약속이 안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말이 안 되는 건데, 아브라함은 왜 지금 하나님께서 이런 말도 안 되는 황당한 명령을 하시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합니다. 또 지금 이삭을 죽이면 당연히 그 약속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인데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건지도 정확히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해주신 말씀을 분명히 알았고 그 약속을 끝까지 믿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삭은 죽을 수가 없다. 이삭에게서 후손이 나와서 그를 통해 수많은 후손들로 될 텐데, 그래야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텐데, 그렇다면 이삭은 죽을 수가 없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히브리서 11장에서 너무나 잘 설명해줍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바쳤습니다. 더구나 약속을 받은 그가 그의 외아들을 기꺼이 바치려 했던 것입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삭에게서 네 자손이라 불릴 자손들이 태어날 것이다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되살리실 수 있다고 아브라함은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유하자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되받은 것입니다.” (11:17-19, 새번역)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이삭을 죽여서 바치라고 하셨는데 이삭을 통해 후손이 나와야 하니까 이삭이 죽더라도 하나님께서 분명히 그를 부활시키실 것이라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지금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자신을 부르시고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위험한 환경 속에서도 항상 보호하시고 인도해주신 하나님, 자신의 실수와 잘못에도 불구하고 항상 개입하시고 역사하신 하나님, 약속대로 100세에 아들을 주신 기적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또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그 모든 믿음의 사건들과 경험들을 통해 그가 경험한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믿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인정하신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테스트는 꼭 잘못을 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옵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는데 시험이 올 수 있습니다. 기도를 안 하는 것도 아니고 말씀을 안 읽는 것도 아닙니다. 예배도 열심히 드리고, 최선을 다해 섬기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일들이 우리 삶 속에 일어납니다. 그렇게 되면 실망스럽기도 하고, 낙심도 되고, 그러다 하나님이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무엇이 다릅니까?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똑같은 상황이라도 보는 눈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해석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해석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지금 이 상황을 볼 수 있는 것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쳤을 때 이 어려움을 주신 데에는 분명히 선한 목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찾아보자.’

 

지금 당하는 고통이 하나님의 테스트라는 것을 모르면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알면 견딜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이 올 때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시험인가? 하나님의 테스트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믿음으로 대처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이고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로 그런 사람을 아주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테스트에는 분명한 특징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언제나 그 초점이 어디에 맞춰져 있는가 하면, 내가 하나님만 신뢰하고 있는가, 하나님만 사랑하고 있는가, 하나님만 경외하고 있는가를 점검하기 위한 목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생각해보십시오. 나 자신이 염려하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가? 나를 불안하게 하고 불편하게 하는 문제가 무엇인가? 엄청나게 큰 문제일 수도 있지만 작은 문제일 수도 있는데, 내 마음을 편하지 못하게 하는 문제일 수 있습니다. , 가정, 자녀, 직장, 사업, 학위, 진로, 건강, 신분 문제 등, 나를 불안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6장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지만, 하나님은 이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모르시는 게 아닙니다. 다 알고 계십니다. 또 우리에게 그런 것들이 해결되지 않으면 힘들다는 것도 다 아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가 하나님께 하나님, 저는 이거 없으면 안 됩니다. 이거 꼭 되어야 합니다. 안 되면 죽습니다.’라고 하는 바로 그것을 가지고 우리를 테스트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상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상을 섬기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이게 없으면 내가 죽을지 모르겠다.’라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사실 잘 생각해보면 그런 여러 가지 것들 중에 그게 없다고 해서 내가 죽고 생명에 지장이 있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그냥 내가 그렇게 느낄 뿐입니다. 내가 그렇게 해석할 뿐입니다. 그런 것들이 없어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세상에 많습니다. 그럼 뭐가 문제입니까? 해석의 문제입니다. 결국 어느 눈으로 볼 것인가, 입니다. 내 눈으로 볼 것인가, 하나님의 눈으로 볼 것인가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수 있도록 우리가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것보다 나를 더 믿고 따르고 사랑할 수 있느냐? 그것이 없어도 나를 계속 믿고 따르겠느냐? 나를 따라올 때 오히려 그것을 잃게 되어도 나를 따라오겠느냐?’ 사실 이것이 욥기에서 우리에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없어도 너는 나를 믿고 따르겠느냐? 이런 것 때문에 나를 믿는 것이냐? 그게 없어도 나를 따르겠느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도 당연히 질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에 걸릴 수 있습니다. 사고로 죽을 수도 있습니다. 사업이 망할 수도 있습니다. 직장에서 실패하거나 해고될 수도 있습니다. 가정에 어려움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자녀가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세상에서의 성공이나 실패가 우리의 최대 관심사입니까? 그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혹시 세상에서 성공했다고 해도, 그것이 죽음 이후에 우리와 함께 해주지 못합니다. 실패했다고 해서 그것이 죽음 이후까지 우리를 따라오는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최대 관심, 이 세상에서의 최대 목적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도 우리와 함께 해주시는 하나님을 붙들 때 사실 우리는 모든 것을 붙드는 것이 됩니다.

 

크게 보면 우리에게 닥치는 시험은 두 종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테스트(test)가 있고 마귀의 유혹(temptation)이 있습니다. 마귀의 유혹(temptation)은 당연히 우리 인생이 무너지고 망가지고 깨지는 것이 목적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테스트는 우리 삶에 우상이 될 만한 것들을 제거하고 결국에 가서는 우리를 세워주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더 귀한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복을 주셔도 그것을 누릴 수 없기 때문에, 밭을 갈아엎는 것처럼 준비시키셔서 복을 주시려는 것이 테스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시험을 당하고 있다면 어떤 시험인지를 먼저 잘 분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테스트라는 확신이 온다면, 혹시라도 지금 내 삶에서 하나님보다 더 앞세우는 것은 없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이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보다 자기 몸을 사리면서 반대편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보다, 내가 원하는 것을 먼저 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나쁜 것으로 오지 않습니다. 대개는 좋은 것으로 옵니다. 결국은 어디에 우선순위를 두는가의 문제입니다. 다른 것은 다 포기해도 이것만은 안 된다고 하며 끝까지 고민하는 것이 바로 우상이 됩니다.

 

요즘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네 달이 되어 갑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어디를 갈 수도 없고, 마음껏 이전처럼 돌아다닐 수도 없고, 여행을 갈 수도 없고, 샤핑도 갈 수 없고, 친구나 이웃을 만날 수도 없는 이 상황에, 지난 4개월 동안 내가 주로 뭘 하며 이 시간을 보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일하는 시간 외에 내가 주로 뭘 하면서 보냈나를 생각해보십시오. 어딜 가지도 못하고 뭘 하지도 못하니까 평소보다는 시간이 더 많이 주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주로 나는 뭘 하며 지냈는가? 내 마음의 관심이 주로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해보십시오. 바로 그런 것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빨리 그것을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보다 그런 것을 더 우선시하기를 멈추고, 하나님을 가장 앞에 놓을 때 우리 삶이 잘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다 따라옵니다. 그런 것들을 먼저 하면 삶이 자꾸 복잡해지는데, 하나님을 우선순위에 두면 그런 것들이 다 따라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약속입니다(6:33).

 

 

2.   모든 방해거리를 철저히 차단하는 믿음

 

이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모리아 땅을 향해 떠나가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서 갑니다(3).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나귀에 안장을 지웁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말씀을 들은 다음에 알겠다고 하며 두 다리 뻗고 실컷 잘 잘겠습니까? 한숨도 못 잤을 것이 분명합니다. 얼마나 고민이 되고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오랜 만에 하나님 음성을 듣다 보니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이런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명령일 수가 있겠는가? 이것은 어쩌면 마귀의 유혹일지 모른다.’ 이런 식으로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겠습니까? 또 어떻게든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순종하지 않을 방법이 없는지 그 이유를 찾아서 합리화하기 위해 얼마나 머리를 쥐어짰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는 길로도 고통스러운 밤을 보낸 다음에, 결국은 순종하겠다고 결심하고 날이 새자마자 스스로 나귀에 안장을 얹습니다. 또한 집을 떠날 때 번제에 쓸 나무까지도 쪼개어 가지고 떠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거기에 만약 번제로 태울 나무가 없으면 아유, 하나님, 제가 번제를 드리려고 했는데 나무가 없어서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핑계를 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닥쳤을 때 당연히 기도해야 하는데, 가끔 보면 신앙인들에게 기도가 악용되는 경우가 있는 것을 봅니다. 안타까운 일이기도 하고 신기한 일이기도 합니다. 기도는 당연히 해야 하는 필수적인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때로는 잘못된 기도를 너무 오래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명령이 너무 분명해서 자기도 솔직히 그것을 압니다. 하나님이 뭘 원하시는지 잘 압니다. 그런데 조금 더 기도해보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게 있기 때문에 그게 될 때까지 기도해보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자기도 느끼는데 그게 하기 싫어서 기도해보겠다고 합니다.

 

정답을 다 알고 있지만 그 정답대로 하기 싫어서 밤을 새우거나 금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어떤 사역을 함께 해보자고 제안이 들어오면 순종하기보다는 하나님이 내가 이것을 하기를 원하시는 것 같다.’라는 마음이 들면서도 하겠습니다.’보다는 기도해보겠습니다.’라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은 하기 싫다는 말입니다.

 

당연히 기도해보고 사역을 해야 합니다. 교회 사역이든, 가정 일이든, 직장이나 사업 일이든 기도하면서 해야 하지만, 그 기도가 핑계로 전락할 때가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니까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 솔직히 나는 압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그때 우리는 아브라함을 생각해야겠습니다. 아브라함도 지금 온갖 핑계를 댈 수 있는 상황입니다. 늦게 일어나든지, 늑장을 부리든지, 나무를 안 해가든지...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나귀에 안장을 얹고 나무를 싣고 길을 떠납니다.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4-5)

 

아브라함이 산에 올라가면서 왜 두 종에게 여기서 기다리라했겠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겠다고 칼을 드는 순간에 이삭도 문제이지만 두 종이 따라오면 문제입니다. ‘아이고, 왜 그러십니까?’ 하고 붙들며 혹시 아브라함이 노망들었나보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막으려고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데 있어서 어떠한 방해의 가능성도 다 없애버리고 이삭과 단 둘이 함께 산으로 올라갑니다. 우리도 혹시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면서 핑계를 대는 것은 없는지 늘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지금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린 지 오늘이 17주째인데, 처음에는 우리가 다 긴장하면서 했습니다. 그런데 날씨가 점점 더워지면서 마음이 풀리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사실은 예배당에 나와서 하면 집중하기가 쉽습니다. 분위기도 이미 되어 있고 집중하며 나아가기 쉬운데, 집에서 컴퓨터나 티브이나 폰으로 보면서 한다는 것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사실 여러분이 라이브영상예배 드리는 게 대단한 겁니다. 집중해서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가 정말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예배에 집중하려고 노력하는지 잘 점검을 해야겠습니다. 특히 시간을 정확히 지켜서 잘하고 계십니까? 자녀가 있는 분들은 자녀를 잘 준비시켜서 잘 하도록 도와주십니까? 요즘 보니까 실시간 접속하는 숫자가 왔다 갔다 합니다. 약간 줄어들었습니다. 물론 떠나신 분들도 있어서 그렇지만, 슬슬 빠지는 분들이 있다는 겁니다.

 

어떨 때는 숫자가 몇 분 있으면 줄었다 또 몇 분 있으면 늘었다 하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꾸준히 예배하는 게 아니라 중간에 왔다 갔다 한다는 말이 됩니다. 물론 중간에 어린이를 돌봐주어야 하는 부모님들도 있고 YouthYoung Adults도 있지만, 그래서 제가 느끼는 게 , 이게 정말 테스트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우리 믿음의 테스트입니다. ‘내가 이런 상황 속에서도 집중해서 정신 차리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방향으로 나아가는가?’ 어쩌면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그렇게 테스트하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누구나 몇 번 실수를 할 수는 있지만, 자꾸 핑계를 대면서 이래서 못하고 저래서 못한다라고 한다면 영적으로 문제가 생겼다는 뜻입니다. 핑계가 아니라 회개를 해야 합니다. 핑계거리들을 미리 제거하고 우리가 제대로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에게 유익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 제대로 집중해서 드리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들이 있다면, 특히 집에서 예배드리시는 분들은 지금 뭔가 방해거리가 있다면, 미리 그것을 다 제거하고 예배드리실 필요가 있습니다. 새벽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들,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들, 주일에 예배를 제대로 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들을 미리 제거하여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핑계가 될 만한 것들을 미리 막아서 온전히 순종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도 믿음입니다.

 

 

3.   가장 귀한 것을 주신 하나님께 가장 귀한 것을 드려 예배하는 믿음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6-7)

 

아브라함이 번제 나무를 이삭에게 지우고 함께 산을 올라가는데, 그때 이삭이 질문합니다. 아버지, 불과 장작은 여기에 있지만,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요?” 때 아브라함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래도 그는 이삭에게 대답합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8)

 

마침내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에 이르게 됩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단을 쌓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결박하여 단 위에 놓습니다. 이때 아브라함과 이삭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을까? 성경은 전혀 기록하고 있지 않아서 알 수는 없지만, 별 대화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눈빛으로 통했을 것 같습니다.

 

아들아, 이것은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이다.’ 했을 때 이삭도 알겠습니다, 아버지.’ 하며 받아들이는 겁니다. 사실 이삭이 십대 소년인데 110세가 넘은 노인인 아브라함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순순히 결박당하여 눕지 않습니까? 이것이 이삭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9-10)

 

이제 아브라함이 정말로 칼로써 아들을 잡으려 하는 급박한 순간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 급하게 아브라함의 이름을 두 번 부르며 외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1-12)

 

정말 극적인 장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이렇게 경외하는 줄을 하나님께서 정말로 이제야 아셨다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3)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삭은 죽어야 했지만 죽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삭 대신에 한 숫양이 잡혀서 죽임을 당하고 번제로 바쳐집니다. 비록 자기 아들인 이삭이 죽지 않았지만, 아브라함에게는 이 희생이야말로 마치 자기 아들을 직접 드린 것과도 같은 번제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사실 이삭의 죽음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하나님만 신뢰하고 하나님만 경외하며 하나님께만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말이 안 되더라도 순종하는 믿음을 원하셨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하셨습니까? 그래야 우상숭배로 나가는 것을 차단하고 복의 근원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이 망가지면 복의 근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정리해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가장 포기하기 힘들었던 것은 당연히 어떤 물건이 아니라 100세에 얻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었습니다. 그렇게 소중한 이삭을 지금까지 어떻게 하며 살았습니까? 꽉 움켜쥐고 내 아들! 내 거다!’ 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며 포기하고 드렸더니, 도로 받았을 뿐 아니라 이제 알고 보니 이삭이 내 것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내 것이 아니고 내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돌려받았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제야 아브라함이 당신을 경외하는 줄 아신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을 통해 아브라함이 확실한 믿음과 순종의 체험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믿음의 차원을 한 단계 높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하나뿐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직접 잡아 죽여 번제로 드려야 했던 아브라함의 마음이, 바로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찢겨 죽도록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천국의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을 텐데,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그 심정을 잘 아는 사람이 또 누가 있었겠습니까?

 

이처럼 우리를 위해 가장 귀한 자신의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 그리고 그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면서 자기의 가장 귀한 것을 아끼지 않고 드리며 나아가는 인간의 만남,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는 주일에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인터넷으로 한다고 아무렇게나 편안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가장 귀한 외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나를 위해 희생하신 하나님의 그 사랑을 가슴에 품고, 나도 가장 귀한 것을 드리며 나아가는 것이 예배입니다. 내 마음의 중심을 찢으며,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나의 이삭을 향해 칼을 들 때, 오히려 하나님은 나의 이삭을 변화시켜서 내게 돌려주시며 내 이삭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삭이 되도록 해주시는 것입니다.

 

 

4.   여호와이레 -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이제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보니까 한 숫양이 수풀에 뿔이 걸린 것을 발견하는데, 원래 모리아 산이 이렇게 양이 쉽게 잡히는 데가 아닙니다. 숫양은커녕 전혀 얻을 것이 없는 황무한 땅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아브라함이 번제를 드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준비해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십니다. 그리고 완벽한 때를 아셔서 그 시간에 맞춰 공급해주십니다.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14)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그렇다면 여러분, 나에게는 지금 여호와의 산이 어디입니까? 너무 힘들고 앞이 보이지 않아 괴로워하고 있는 곳, 바로 그곳이 여호와의 산입니다.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불안해하고 있습니까? 무엇이 우리를 실망하게 하고 있습니까?

 

어떤 문제가 닥쳤든지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은, 바로 그곳이 여호와의 산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거기서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 주십니다. 바로 그곳이 축복의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산은 인생의 깊은 고민과 답답함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주님은 우리를 만져주시고, 변화시키시고,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가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나의 인생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순종하면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받습니다. 내가 움켜쥐고 있어야 안전할 것 같지만, 오히려 하나님께 드릴 때 안전합니다. 움켜쥐면 오히려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의외의 방식으로 인도해주실지 모릅니다. 지금 코로나 사태가 어떻게 될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정말 알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의외의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 삶이 힘들다고 도망가지 마시고, 괴롭다고 돌아가지 마시고, 오직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면서 더욱 하나님을 사모하고 간절히 하나님을 찾으며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 모두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을 풍성하게 체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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