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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eSB6iiZCfUM?t=3525

 

202067일 주일예배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13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창세기 201~18)

 

[들어가는 말]

 

어떤 실수를 반복해서 저지른 경험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했지? 다시 이런 일을 하나 봐라. 다시는 이런 실수를 안 해야지.’ 하고는 또 같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만약 그런 경험이 있으시다면, 왜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우연입니까? 아니면 어쩌다 보니까, 상황이 그렇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입니까?

 

사실은 그 부분이 자기 내면의 약점입니다. 어떤 이야기가 나오면 심장이 뛰고 어쩔 줄 모르는 부분, 굉장히 긴장되고 불안해지는 부분, 또 자기 삶에서 반복되는 실수를 저지르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어쩌다가 또 실수를 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그 부분에 대한 상처가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처가 아직 다 해결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몇 주 전부터 아브라함을 살펴보고 있는데, 그가 믿음의 조상이라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로부터 수많은 민족들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그런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고, 오히려 수많은 실수와 잘못을 저지르는 가운데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조금씩 믿음이 자라가고 성숙해진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도 역시 우리와 같이 많은 문제들과 어려움에 직면했지만, 그런 상황들을 그가 어떻게 헤쳐 나갔는지를 보면서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을 얻기 위하여 그의 삶을 살펴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전에 살펴보았던 12장에서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왔는데 거기 기근이 드니까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결국 애굽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 갔을 때 사람들이 사라로 인해 자기를 죽이고 빼앗을까봐 사라를 자신의 누이라고 부르기로 했는데, 오히려 애굽 왕 바로에게 사라를 빼앗겼던 경험을 했습니다. 그 당시 고대사회에서 남의 여자를 강탈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염려한 아브라함이 나름대로 수를 쓰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스스로 꾀를 냈다가 자기 꾀에 자기가 빠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셔서 아브라함을 위기에서 구하시고, 오히려 많은 재물과 짐승과 종들을 얻어서 애굽에서 나와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때로부터 25년이 흐른 시점인데, 25년이 지난 지금 아브라함은 또 다시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는 것을 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때 애굽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다는 말입니까? 사실 이것은 아브라함의 마음에 뭔가 문제가 남아 있었다는 것, 아직 상처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우리가 오늘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아브라함의 반복된 실수의 진짜 원인

 

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며” (1)

 

19장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한 다음, 아브라함은 원래 살던 중부 세겜 지역으로부터 남방으로 이사하는데, 남쪽 광야에 가까운 가데스와 술 사이에 있는 그랄로 갑니다. 나중에 이곳이 블레셋이고 상당히 남쪽 광야에 가까운 곳입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기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그 결과도 똑같습니다.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 (2)

 

그랄에 와서도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아비멜렉이 사라를 데려갑니다. 왜 이때도 또 누이라고 했습니까? 뒤의 11절에 보면 그가 그곳 사람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곳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혹시 자기를 해치지 않을까 두려워했습니다.

 

이제 아내 사라를 그랄 왕 아비멜렉이 데려가는데, 큰 위기에 빠진 겁니다. 애굽에 갔을 때는 아직 그 약속을 받지 않은 때인데, 바로 얼마 전에 하나님이 친히 나타나셔서 내년 이맘때쯤에 사라를 통해 아들을 낳을 것이며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내 사라를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빼앗깁니다. 그러면 이삭을 어떻게 낳습니까? 그러니까 엄청난 위기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위기일 뿐만 아니라,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후손이 나오도록 하는 하나님의 계획에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때 또 다시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 (3)

 

아브라함과 사라가 서로 오빠 동생이라니까, 그랄 왕 아비멜렉은 별 생각 없이 사라를 취하여 들이게 되는데, 그날 밤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셔서 너는 죽을 것이다. 왜냐하면 네가 남의 아내를 취했기 때문이다.’라고 하십니다. 이때 아비멜렉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그가 나에게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4-5)

 

아비멜렉이 사라를 아직 가까이 하지 않았는데, 주님은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사라를 자기 누이라고 했고 사라도 아브라함이 자기 오빠라고 했으니까, 아비멜렉은 그냥 순수하게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했다고 대답합니다.

 

아비멜렉의 이러한 말은 사실입니다. 아비멜렉이 잘못한 게 아닙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사라가 자기 누이라고 했을 때 왜 그것을 무조건 믿고 맞아들입니까? 나이가 90이 된 여인이 왜 지금껏 혼자인지 알아보지도 않습니까? 또한 아비멜렉은 이미 아내와 첩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왜 또 다른 여인, 그것도 나이가 많은 여인에 대해 욕심을 부립니까? 그러니까 아비멜렉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는 아브라함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이제 곧 약속의 후사를 낳을 사라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보호를 해주어야 하는데, 아직도 사라를 방패로 삼아서 자기가 보호를 받겠다는 것부터가 잘못입니다. 자기 누이동생이라고 해서 빼앗기는데, 애굽에서 그렇게 호된 경험을 하고도 아직 깨닫지 못한 것입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좀 이상합니다. 왜 또 아브라함이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지 사실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아무리 아브라함이 잘못 생각하더라도 25년 전에 그토록 호된 경험을 했는데 또 이러겠습니까? 정상적인 상태라면 아브라함이 똑같은 실수를 또 범할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마음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점이 그의 약점이고 콤플렉스였던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은 새로운 곳에 가거나 새로운 사람들에 둘러싸이게 되면 항상 이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죽이고 내 아내를 빼앗아 갈 것이다. 그래서 아내를 누이라고 하자. 그러면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 90세가 다 된 자기 아내를 누가 빼앗아 간다고 그렇게 생각을 합니까? 옛날에는 그렇게 생각해도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이제 사라는 정말 할머니(90)입니다. 그 당시 나이로도 적지 않은 나이입니다.

 

그런데 내 아내를 빼앗아갈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거의 병적 수준이고, 굉장한 강박 관념입니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이 왜 이런 병적일 정도의 강박 관념을 가지게 된 것입니까? 왜 그랬나를 정확히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자라면서 가정환경과 주변 환경에 따라 그렇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조금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아브라함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중에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자녀들 중에는 이곳에서 태어난 경우가 많지만 1세들 중에는 없습니다. 한국이나 중국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무리 미국 시민권을 가졌다고 해도 이방인이고, 심지어 이곳에서 태어나 날 때부터 시민인 우리 2세들도 온전한 미국인으로 취급받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완전히 영어권이고 한국말도 잘 못하지만 겉모습만 보고 미국 친구들이 악의 없이 “Where are you from?”이라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 이민자나 유학생으로 이 땅에 와서 겪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우리는 잘 알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보다 우리가 아브라함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한국에만 사는 사람들보다 우리가 아브라함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도 이민자였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부르실 때 믿음으로 순종하여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곳으로 갔는데, 그곳이 가나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새로운 땅에서의 삶은 불안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 불안정한 생활이 오래 지속되다 보니까 두려움이 쌓이게 된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도 물론 있었겠지만, 특히 가나안 생활을 통해 얼마나 불안하고 두려웠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의 이러한 증상이 굉장히 심합니다. 이전에 자기 조카 롯이 소돔에 살다가 그돌라오멜이라는 왕이 연합군을 이끌고 와서 소돔 사람들을 잡아갔을 때, 아브라함은 자기 집에서 기른 318명의 용사들을 데리고 가서 물리치고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용맹한 군사들이 300명 이상이나 있는데, 그렇다면 지금 누가 와서 감히 자기 아내를 빼앗아 가겠습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지나친 망상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애굽에 갔을 때도 그랬고 이제 그랄에 와서도 그렇고, 이집트에서의 경험 때문에 군사들을 길러서 이제는 강력한 군사력도 있는데,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고 사라를 빼앗아갈지 모른다는 불안과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여 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의 방랑과 나그네 생활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이민 온 지가 올해 가을이면 34년이 됩니다. 그러니까 미국에서 산 시간이 한국에서 살았던 것보다 훨씬 더 오래 되었습니다. 저보다 훨씬 오래 되신 분들이 우리 교회에 많이 계십니다. 그런데 제가 처음 미국에 와서 교회에 가보고 느낀 것 중 하나는, 이민교회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상당히 많이 바뀌고 발전도 많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제가 동남부 쪽에 있었는데, 교인들이 교회를 너무 자주 옮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번에 만났을 때는 이 교회 직분자였는데 1년 후에 만나니까 다른 교회의 직분자였고, 또 그 1년 후에 만나니까 또 다른 교회의 직분자가 되어 있는 겁니다. 그것이 너무 이상했습니다. 한국에서는 그런 것을 못 보았는데, 미국에서는 정말 사정이 있어서 옮기는 게 아니라 주로 다투고 싸우고 갈라지는 경우가 너무 많은 겁니다.

 

다투는 일도 정말 별 것 아닌 일이나 이슈가 될 수 없는 일로 열을 내며 싸우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나중에 보니까 한국에서 제가 몰랐던 것이지 한국에도 많았던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민교회에 그런 일이 더 많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제가 앞으로 나도 이민교회에서 목회를 하게 될 텐데, 이거 무서워서 하겠나?’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 와서 15년 이상 여러분과 함께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민교회에서 일어나는 그런 현상들에 대해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특히 미국생활에 끼지 못하는 열등감과 소외감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렇게 잘 살고 있지만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혹시 갑자기 잘못 되면 어떡하나?’ 하는 긴장과 불안이 항상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 나라가 아닌 남의 나라에 와서 사는 것은 항상 불안하고 피곤합니다. 이 사회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더라도 그 스트레스가 많습니다.

 

다 아시는 것처럼, 저번 주에 흑인인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라는 사람이 백인 경찰관에 의해서 목이 눌려 숨지는 사건이 일어나서 전국적으로 시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약탈과 폭동은 많이 잦아들고 평화로운 시위가 주를 이루고 있는데, 어제도 뉴스를 보니까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시위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뿌리가 깊습니다. 17세기부터 시작된 미국의 아프리카 노예 제도로 인해서 흑인들의 마음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의 상처가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가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부로 흑인은 이렇다.’라고 하거나 백인도 종류가 많기 때문에 백인은 이렇다.’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렇다.’라고 함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노예로 끌려와 산 것이 상처로 남아 있고, 불안과 두려움의 상처가 있습니다. 이게 쉽게 치유가 안 됩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을 붙들었는데, 흑인영가를 보십시오. 그 가사와 음정이 심금을 울립니다. 그런 것은 그냥 나온 음악이 아닙니다.

 

남의 나라에서 사는 사람은 언제 어떻게 쫓겨날지 모른다는 불안과 두려움이 늘 마음속에 있습니다. 지금 직장생활을 잘 하시는 분들도 코로나도 그렇고 실업자가 많은데 언제 내가 잘리는 게 아닌가하는 불안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구약시대 때부터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과 함께 나그네 즉 외국인을 돌보라고 계속해서 강조하셨습니다. 고아와 과부는 사회의 가장 밑바닥이고 전혀 보호를 받지 못하는 계층인데, 외국인을 그들과 똑같은 급으로 쳐주신 겁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희도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았던 것을 기억해라. 너희가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았는데, 그 아픔을 알면서 너희와 똑같은 고통을 당하는 너희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착취하면 안 된다. 돌봐주어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두려움의 상처란, 마음속에 부적절한 두려움이 자주 찾아오는 것으로, 그것 때문에 마음의 평안이 없어지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고통을 받는 마음입니다. 사실 어떤 일이 일어날 때 그렇게까지 놀라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데, 과거에 받았던 어떤 상처 때문에 그것이 두려움이라는 형태로 숨어서 자리 잡고 있다가 어떤 상황에서 부적절하게 감정이 튀어나오는 것이 두려움의 증상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이라는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이민자가 그렇습니다. 어릴 때 왔거나 2, 3세는 그렇지 않은데 1세들에게 상처가 많습니다. 특히 1.5세가 가장 그렇습니다. 12~14세쯤에 온 그들에게 상처가 많습니다.

 

결국 자신의 안전을 위협받거나 안정감을 잃어버리는 순간 갖게 되는 것이 두려움입니다. 과거의 어떤 경험들이 제대로 처리되지 못하고 마음속에 남아 있다가 부적절하게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면 문제가 해결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묵상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담대히 그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두려움의 상처를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내려놓지 않고 계속 내가 들고 가고 지고 가면, 언젠가는 그것이 눌리고 눌리고 눌리다가 뻥 터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하나님께 맡기는 겁니다. 하나님이 처리하시도록 맡기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개입과 해결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인 사라를 누이라고 하니까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데려가는데, 이때 아브라함의 마음을 생각해보십시오. ‘25년 만에 또 이런 상황이 생겼구나?’ 하며 얼마나 괴롭고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자기가 가장 피하고 싶은 상황이라 그렇게 한 게 아닙니까? 그런데 자기가 상상하던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사실 이렇게 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한 것인데, 오히려 그 반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불안하고 초조해서 방법을 썼는데 오히려 그것 때문에 아내 사라를 빼앗겼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가만히 있지 않으시고 바로 개입하십니다. 하나님이 놀라운 역사로 함께 해주십니다. 이 상황은 아브라함이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이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얼마나 간절히 울부짖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을 때,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시고 역사하셨습니다. 아비멜렉에게 병을 주시고 꿈에도 나타나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아비멜렉이 결백을 주장했습니다(4-5). 그런데 나중에 보면 알 수 있는 것이, 아비멜렉도 병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때 어떻게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자기가 모르고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사라가 자기 누이라고 했고, 또 사라도 아브라함을 자기 오빠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둘 다 거짓말을 했다는 겁니다. 그에 대해 하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니라” (6)

 

하나님은 아비멜렉이 순수한 마음으로 한 줄을 아십니다. 그래서 그를 막아 범죄하지 않도록 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아비멜렉이 어떻게 해야 살 수 있는지 말씀하십니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7)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가리켜 선지자라고 하시고 또 아비멜렉을 위해 기도해줄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아비멜렉은 지금 아브라함을 해칠 수도 있고 간단히 죽여버릴 수도 있으며 그냥 둘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아비멜렉과 그에게 속한 자가 다 죽을 것이라고 강력히 경고하시며 초강수로 나오십니다.

 

아비멜렉이 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모든 종들을 불러 그 모든 일을 말하여 들려주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였더라” (8)

 

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아비멜렉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신하들을 불러 간밤에

일어난 일을 말합니다. 그러자 모두 다 두려워합니다. 아비멜렉은 이제 장본인인 아브라함을 불러 왜 이렇게 행했느냐고 따지기 시작합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기에 네가 나와 내 나라가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하지 아니한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 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하였느냐” (9-10)

 

아비멜렉이 지적하는 것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에게 잘못하거나 죄를 범한 것도 없는데 자기들로 하여금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아주 정확한 지적입니다. 그래서 또 물으며 대답해보라고 하는데, 이때 아브라함의 대답은 참으로 구차하고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11)

 

그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 아내를 인하여 자기를 죽일까봐 그렇게 했다고 대답합니다.

 

조금 전 언급한 두려움의 증상들이 몇 가지 있는데, 첫째가 지나친 불안과 걱정입니다. 별 일도 없는데 불안감이 늘 떠나지를 않는 겁니다. 때로는 다 평안한데도 아무 이유도 없이 더 심하게 두려워집니다. 무엇인가 무너질 것 같은 격렬한 두려움이 생기기도 하고, 어떤 때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은근한 두려움까지, 여러 두려운 마음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는 중에 실제로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필요 이상으로 놀라고 두려워하게 됩니다. 사실은 그런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인데도,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거나 기정사실로 여기면서 절망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두려움의 상처가 있으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한 부부가 있는데 아내가 아이들을 위해 내일 싸주어야 것을 깜빡 사오지 않아서 그로서리에 가서 사오겠다고 하며 나갑니다. 저녁 8시쯤 나갔는데 9시가 되도록 안 들어옵니다. 아내의 입장에서는 이왕 나갔으니까 여기도 가서 사고 저기도 가보면서 끝날 시간까지 일을 보고 오려는 것인데, 남편은 20~30분이 지나니까 걱정이 됩니다. 9시가 되었는데도 안 들어오니까 상상을 하기 시작합니다.

 

나갔다가 차가 와서 꽝 받아 교통사고가 나고, 앰뷸런스가 와서 실려 가고, 응급실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거기서 죽고, 그러면 장례는 어떻게 하나? 우리 애들은 어떻게 하나? 그럼 나는 재혼을 해야 하는 건가, 안 해야 하는 건가?’ 그런데 그 순간 아내가 들어오는 겁니다. 쓸데없는 상상의 나래를 펴는데, 왜 그렇습니까? 두려움 때문입니다. 아내가 잠깐 나갔다 오는 것을 가지고 자기가 재혼하는 것까지 상상하고 있으니 말이 안 되는 건데, 이런 것이 실제로 우리 가운데 벌어지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딱 이겁니다. 아내로 인하여 사람들이 자기를 죽일까 생각했다는 것은 완전히 자기 혼자 생각입니다. 혼자만의 상상입니다. 지금 자기에게는 강력한 군사들도 있는데 아내를 어떻게 빼앗아가고 어떻게 자기를 죽입니까?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해 지나치게 불안해하며 걱정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의 또 다른 증상은 책임 전가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당신 잘못이다하고 책임 추궁을 당할 것이 두려워서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두려움의 상처를 가진 사람들의 여러 특징들 중 하나가 절대 잘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통 생각에 저 사람은 고집이 정말 세다.’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게 두려움이라는 상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두려움의 상처를 가진 사람은 그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잘못했다고 말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겁니다. 두려움 때문입니다.

 

여기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뭐라고 합니까?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라고 합니다. 책임 전가입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지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브라함 자신입니다. 아비멜렉이 아니고 그랄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내가 그랬다.’ 하고 책임 전가를 합니다. 두려움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언급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더 기가 막히고 황당합니다.

 

또 그는 정말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아내가 되었음이니라” (12)

 

실제로 사라는 자기 이복누이라는 점을 밝힙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합리화입니다. 아브라함이 사라를 누이로 생각하고 지금까지 같이 살았습니까? 그것이 사실이라도 사라는 누이로서 산 것이 아니라 아내로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 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13)

 

이걸 보면, 아브라함은 자신 안에 있는 그 두려움 때문에 강박 증세를 보이면서, 어디를 가든지 가는 곳마다 자기를 오라비로 부르라고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3절을 잘 보면, 하나님이 아버지 집을 떠나 두루 다니도록 하신 것에는 순종해서 갔습니다. 훌륭합니다. 그런데 가기는 갔지만, 가는 곳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다닌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또 다른 두려움의 상처의 증상인 제자리걸음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지속적인 신뢰가 늘 흔들리는 겁니다. 분명히 하나님을 믿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인 것도 알고 믿습니다. 때로는 아주 신실하게 잘 믿습니다. 그런데 어떤 상황이 생기면 믿음이 막 흔들리는 겁니다. 혹시 자기가 버림받거나 벌을 받아 무너지면 어떡하나 하는 염려와 불안이 항상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기는 하는데, 그것이 기쁨보다는 부담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적 성장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신앙의 기복이 심합니다. 좋을 때는 좋은데, 갑자기 뚝 떨어지거나 잠수를 탑니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게 심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느끼지 못해서 하나님을 생각할 때 두려우신 하나님, 나를 야단치고 벌을 주는 엄한 아버지 같은 하나님, 멀리 계신 분으로 여기게 됩니다.

 

이것은 또한 두려워하는 마음의 또 다른 증상인 집착과 중독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런 것을 내적치유에서 포로 된 상태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두려움에 의한 집착은 무너지지 않기 위한 집착입니다. 상처 중에 굶주림의 상처가 있는데, 항상 갈망하고 채워지지 않아서 늘 채우고자 하는 집착이 굶주림의 현상입니다. 그러나 두려움에 의한 집착은 안정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추구해도 근본적인 안정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대상을 향한 집착과 중독이 됩니다.

 

그래서 술, 도박, 마약, 게임 등에 중독되기도 하고, 물질이나 높은 학벌이나 성공에 지나친 집착을 보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바로 가족에게 집착하는 것입니다. 배우자에게 집착하고, 자녀에게 집착합니다. 이런 집착이 커지면서 피해 망상적인 감정에 시달리게 되는데, 건강이나 사고에 대한 지나친 염려가 그것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처럼 망상적인 생각, 지나친 생각을 하는 겁니다. 또 조금 전 그 어떤 사람처럼 상상을 하는 겁니다. 배우자가 나갔다 안 들어오면, 자녀가 나갔다 안 들어오면, 상상의 나래를 펴서 그 다음 계획까지 다 세워놓는 겁니다. 지나친 염려는 집착입니다.

 

아브라함이 딱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지나치게 염려하고, 또 사라를 보호하기 위해 집착합니다. 사실은 사라를 보호하려는 게 아니라, 자기가 두렵기 때문에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집착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분명히 사라에게 집착했는데, 자신이 집착하는 대상인 사라가 무너질까봐 깊이 염려하다가 그런 데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어쩌면 아브라함은 이전에 자기가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잘못했는데 그때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 땅을 떠났기 때문이었습다. 그런데 지금은 가나안 땅을 떠난 것이 아니고 남쪽에 걸쳐 있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을 수 있습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괜찮지가 않았습니다.

 

이번에 그랄로 간 그 자체는 불순종이 아니었을지 몰라도, 여전히 사라를 누이라고 한 방법이 잘못되었습니다. 왜 잘못입니까? 자신의 두려움에서 나온 집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으로 행동한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깊은 불안과 두려움이 아직도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자기를 보호하는 벽을 친 것이고, 오히려 그것 때문에 또 다시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우리 모습과 비슷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읽고 묵상하고, 기도도 하고, 예배도 합니다. 성경지식도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지하고 결단도 합니다. 그런데 막상 삶의 현장에서 어떤 일이 탁 벌어지면 그때는 다 알고 있어도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 내 나름대로의 생각과 방법으로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러니까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안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나아가면 안 될 것 같아서 나름대로 수를 써보지만, 오히려 더 안 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만 믿으면 되는데 그걸 못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원인은 불안과 해결되지 않은 두려움의 상처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말고 무조건 믿기만 하라는 것인가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가 최선을 다하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께 먼저 맡긴 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지, 맡기지 못한 채로 불안해하며 나름대로의 방법을 쓰는 것과는 다릅니다.

 

사실 오늘의 핵심은 두려워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인데 어떻게 두려움이 없습니까? 다 두려움이 있습니다. 바이러스가 얼마나 두렵습니까? 지금 시위가 벌어지고 폭동과 약탈이 벌어질 때 비즈니스를 거기서 하면 얼마나 두렵습니까?

 

그런데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질문하는 것은 네가 두려워하느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그럼 뭡니까? ‘너는 지금 누구를 두려워하느냐?’ 이것이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가, 아니면 사람을 두려워하는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가, 아니면 상황을 두려워하는가?’

 

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종들을 이끌어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의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내고,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네가 보기에 좋은 대로 거주하라 하고, 사라에게 이르되 내가 은 천 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 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가리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해결되었느니라” (14-16)

 

모든 것을 정리하면서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양과 소와 종들을 줍니다. 또 사라를 돌려보내고, 아브라함에게 이 땅을 좋은 대로 택하여 살라고 소위 영주권도 줍니다. 그리고 사라에게는 오라비”(16) 아브라함에게 은 천개를 주어서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풀었다고 하며 이제 다 선하게 해결되었음을 선언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십시오. 아비멜렉이 은근히 뒤끝이 있는 사람입니다. ‘네 남편 아브라함에게 줬다.’라고 하지 않고 네 오라비에게 줬다.’라고 합니다. 굉장히 뒤끝이 있습니다. 사실 그렇게 선언함으로써 이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 너희들 잘못이다.’라는 것을 확실하게 해두려고 하는 의도도 있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일로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닫으셨음이더라” (17-18)

 

그러니까 이때 여인들만 치료하신 것이 아니라 아비멜렉도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아비멜렉도 병이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비멜렉도 병이 들도록 하심으로 사라를 보호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분명히 아브라함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붙들어주십니다. 아브라함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셔서, 이렇게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개입하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아브라함이 잘못되지 않도록 또 사라가 잘못되지 않도록 보호해주십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하나님은 두려움의 상처를 갖고 있던 사람인 아브라함을 계속해서 빚어 나가십니다. 두려워할 때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해주시고, 위기에 빠질 때 개입하셔서 건져주십니다. 또 다시 아브라함이 두려워할 때 또 찾아오셔서 위로해주시며 그의 마음을 돌보아주십니다. 그렇게 하는 과정을 통해 마침내 아브라함이 진짜 믿음의 조상이 되도록 키워주신 것입니다.

 

결국 우리 안에도 있을 이 두려움의 상처가 치유 받고 해결되는 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 하나님을 나의 삶의 진짜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두려움의 상처를 치유 받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온 우주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영원하거나 안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야말로 두려운 마음에 대한 치유의 길입니다.

 

여러분, 지금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고 계십니까?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두려워하고 계십니까? 감염될까봐, 그래서 아플까봐 또는 죽을까봐 걱정이 되십니까? 또 지금 시위가 벌어지고 미국에 난리가 나서 두려움에 사로잡혀 계십니까?

 

그런데 진짜 두려움의 원인은 코로나바이러스나 그런 시위나 폭동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뭔가 내 안에 있는 다른 것, 내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다른 것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못하고 하나님과 제대로 동행하지 못하고 예배에도 소홀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맡기며 살지 않는 한, 평생 두려움은 우리를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두려움에서 벗어나 참으로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을 나의 삶의 진짜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내 방법대로 하거나 내가 알아서 나아갈 때 잘될 수도 있고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보십시오. 자기 마음대로 갔을 때도 많은 금은보화를 얻고 종들도 얻고 짐승들도 얻었습니다. 그러니까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평생 두려움에서 해방되지 못한 채 계속 살다가 인생이 끝나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매 순간 주인으로 모시고 순종하며 살아갈 때, ‘내 뜻대로 마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십시오.’라는 자세로 살아갈 때, 이 땅에 살면서도 하늘의 평화와 위로와 소망을 누리며 진짜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며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를 누리면서 그 복을 나누어주는 아름다운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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