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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10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9 ✦
“애굽에서 만난 위기”
(창세기 12장 10~20절)
[들어가는 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영적으로 풍성함과 충만함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래 가지 못하고 얼마 못 되어 정 반대로 바닥을 치기도 합니다. 그러면 스스로 이상하다 여기면서 불안함도 느낍니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얼마 전만 해도 이렇게 좋았는데 지금은 밑바닥을 치니 어떻게 된 건가?’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전혀 이상하거나 새로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잘되고 있을 때, 특히 영적으로 충만할 때 어떤 어려움이 온다면, 그 어려움은 우리를 위한 믿음의 시험일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단련시키기 위해서 주시는 믿음의 테스트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꿔주시기 전의 원래 이름이 아브람이었습니다. 12장 앞부분에 보면,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그냥 떠나서 가나안 땅에 도착했습니다.
그 본문을 보면 아브람은 아주 신실한 믿음의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부르심을 받고 즉시 떠났습니다. 자기 아버지와 친척들을 다 놓아두고 그냥 떠났습니다. 사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요즘도 먼 타국으로 이사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그 당시에 이렇게 떠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지금 있는 곳을 떠나 하나님이 보여주실 땅으로 가라고 하셨을 때,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자기가 그 동안 누리고 있던 모든 것, 즉 편안함과 안락함과 안전 등을 다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게다가 가나안에 도착한 후에 거기서 그를 반겨주며 환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거칠고 적대적이었으며 그를 경계했습니다. 창세기를 죽 읽어보면 그곳에 살던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아주 경계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 아브람은 하나님을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가 처한 상황은 부르심을 받기 이전보다 좋아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나빠집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이 새로운 땅으로 이사를 왔지만, 그곳은 그가 기대하던 아름다운 땅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에게 줄 땅으로 가라.’ 하셨으면 당연히 ‘그곳은 지금 사는 곳보다 훨씬 더 좋은 땅인가 보다.’라고 생각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막상 가보니까 그곳은 오히려 아주 거칠고 황량한 땅이었습니다.
이제 아브람은 헷갈리기 시작할 만합니다. 왜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지, 왜 하나님은 이런 땅을 주겠다고 약속을 하셨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처음 도착한 세겜에서 하나님이 ‘바로 여기다’ 하셨을 때 일단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립니다(7-8).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곳은 약속의 땅처럼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상황에 따라 점점 남쪽으로 이동하게 됩니다(9).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 바로 앞까지의 이야기입니다.
1. 기근 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가다 (10절)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깨닫는 첫 번째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났다고 해서, 또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엄청난 약속을 받았다고 해서, 곧 탄탄대로만 걷거나 만사형통의 삶을 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가나안으로 오면서 어땠겠습니까? 분명히 많은 기대를 품고 왔을 것입니다. 아브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는지 그 자세한 이야기는 성경이 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브람은 온 우주를 만드신 창조주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 창조주께서 자기에게 오셔서 부르시고 ‘내가 너를 모든 민족에게 복이 되게 해주겠다. 내가 이제 네게 보여주는 땅으로 가라.’ 하셨을 때, ‘야, 이제 대단한 인생이 되겠구나.’ 하고 기대하며 왔을 것입니다.
여호수아서를 보면, 그의 아버지 데라는 갈대아 땅에서 우상을 만들어 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집안 출신이었는데, 이제 살아 계신 하나님, 유일한 참 신이신 하나님을 만나서, 이제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들뜬 마음으로 이 약속의 땅을 향해 피곤한 줄도 모르고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 땅에 도착해 보니까 그가 만나게 된 것은 축복과 풍성함이 아니라 아주 혹독한 기근이었습니다.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10절)
이때 기근(흉년)이 든 것은 지금의 기근과는 다릅니다. 지금은 기근이 들어도 식량을 미리 비축해놓고, 요즘 먹거리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그 당시는 기근이 들었다 하면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심한 기근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이전에 풍요로운 도시였던 갈대아 우르 출신인데, 나중에 하란으로 갔고 거기서도 기근을 경험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는 더욱 헷갈리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이전에 좋은 것들을 다 떠나왔고, 또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셔서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7) 하고 확인까지 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떠나라고 해서 떠났고, 가니까 여기라고 하셔서 예배도 드렸다면, 각본상(?) 다음 순서는 뭐가 되어야 합니까? 당연히 이 약속의 땅에서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성공과 번영을 누리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와는 반대로 성공이 아니라 혹독한 가뭄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은 이해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아니, 왜 기근이 드는 땅으로 가라고 하신 겁니까?
그래서 이때 아브람은 하나님께 이렇게 외쳤을 지도 모릅니다. ‘주님, 제가 주님께 순종해서 아버지 집을 떠나 이곳까지 오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먼 길을 왔는데 고작 주시는 것이 이 기근입니까? 축복의 땅인 줄 알고 왔는데 기근이라뇨? 약속이 틀립니다. 이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그도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복을 받을 줄 알고 그와 함께 따라온 사람들이 뭐라고 불평을 늘어놓았겠습니까? ‘그러게 이 땅으로 간다고 하셨을 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것이 그 하나님에게 순종한 결과라는 말입니까? 이러려고 여기까지 왔습니까? 기껏 왔더니 굶어죽게 생겼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따를 수 있겠습니까?’
아브람 일행이 여행하는 장면을 상상해보십시오. 그의 아내 사래가 있고, 동생이 죽어서 그의 아들인 조카 롯을 데려왔습니다. 또 그와 함께 한 많은 사람들과 낙타들과 짐승들의 행렬이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려면 당연히 물과 식량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제 심한 기근을 만났습니다. 그러니 큰일입니다. 이제 꼼짝없이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복을 약속해주시고 바로 여기라고 하신 그 땅에 와서 죽게 된 것입니다. 그냥 하란에 있었으면 이렇게 죽지 않았을 텐데, 하나님께 순종해서 왔더니 죽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사실 이것은 아브람의 문제만이 아니라,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라가려 하는데,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잘하며 살려고 하는데, 복을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엄청나게 나쁘고 힘든 일들이 생깁니다. 왜 그런지는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에도 어려움이 없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아주 심한 기근이 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보겠다고 결단하며 나아갈 때는 어떻습니까? ‘아, 이제 내가 하나님을 잘 믿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잘 섬기고, 기도와 말씀을 열심히 하고, 예배도 열심히 하니까, 하나님이 뭔가 좋은 것을 주시겠지?’ 하고 기대합니다. 그런 기대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현실은,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기대와 정 반대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 삶을 맡기며 살려고 하는데도 아주 안 좋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잘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당하기도 하고, 사업이 실패하기도 하고, 이번과 같은 전염병이 돌아서 그것 때문에 직장에서 쉬라고 하기도 하고,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자녀가 잘될 줄 알았는데 실패하는 등의 일이 생깁니다.
이런 어려움들을 당하게 되면 우리는 당황하게 됩니다. ‘아니, 하나님이 잘해주실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되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가 고작 이런 것이란 말인가?’ 하고 생각하며 실망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버리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안 되겠다. 위험하다. 이제는 내가 알아서 그냥 내 방식대로 살아야겠다.’ 하는 마음이 듭니다.
바로 그것이 아브람의 마음이었습니다. 주님의 약속을 붙들고 이곳까지 왔는데 오히려 큰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그래서 그가 기근을 피해서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결국 애굽까지 내려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렇게 어려운 상황이 올 때, 특히 우리가 믿음생활을 잘하고 하나님을 잘 따르는데도 어려움이 올 때, 슬쩍 타협하면서 다시 옛날 방식으로 내가 알아서 하는 식으로 가면, 지금 당하는 기근보다 더 큰 어려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에게 삶의 어려운 문제들이 닥치는지 우리가 정확히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따르며 순종하는 경우에도 어려운 일이 반드시 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이 올 때 ‘왜 이런 일이 내게 왔는가?’하며 실망하고 낙심하고 분노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우리가 그때 할 일이 뭔가 하면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주님이 여기서 원하시는 게 무엇인가? 이것의 좋은 점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찾는 것입니다.
비록 힘들지만, 우리가 영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언제입니까? 바로 어려움을 통해서입니다. 풍요롭고 잘 먹고 잘 살 때 성장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너무 연약해서, 잘되면 성장하는 게 아니라 타락합니다. 참 이상합니다. 가난하고 어렵고 힘들 때 신앙생활을 잘하던 사람이 풍요로워지고 돈 잘 벌고 성공하면 믿음을 떠나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그 반대는 제가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하고 하나님을 잘 따르는데도 어려움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믿음의 시련입니다. 그런 어려움을 통해 우리를 빚으셔서 더 귀하게 사용하려고 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귀하게 쓰임 받는 그릇은 더 정교하고 단단하게 다듬습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서 심한 기근을 만나게 된 아브람은 남쪽으로 또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결국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을 선택합니다(10). 그러나 이때 아브람은 애굽으로 가는 대신 사실은 하나님께 여쭤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 여기가 맞습니까?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러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곳이 이곳이 맞는다면, 하나님이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셨다면 분명히 나를 굶어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이다.’라고 하며 나아갔어야 했습니다.
그때 만약 한 종이 와서 이렇게 말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아브람 주인님, 이제 하루 분 식량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이것마저 없어지면 더 이상은 먹을 게 없습니다. 짐승들과 우리들 모두 다 굶어죽게 될 겁니다.’
그럴 때 아브람은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겠습니까? ‘그것을 다 주어서 먹도록 하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공급해주실 것이네.’ 바로 이런 믿음이 하나님께서 아브람이 배우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그렇게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그냥 자기 생각과 판단 아래 약속의 땅을 떠나게 됩니다.
우리가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아브람이 가진 정말 문제가 무엇이었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기근으로 인해 굶어죽는 것으로부터 가족과 함께 한 사람들과 가축들을 구하겠다는 것이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그게 왜 문제이겠습니까.
그의 진짜 문제는 그가 자기를 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주신 하나님과 이 문제에 대해 상의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냥 상황을 보고 자신의 판단과 생각에 의해 독단적으로 결정하고 행동했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그의 진짜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결정을 한 것이 그의 진짜 문제입니다.
우리도 아브람처럼 어떤 문제에 닥쳤을 때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기보다는 자기 생각에 옳게 보이는 결정을 내릴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러나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여러 정의가 있겠지만, ‘내 생각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게 있습니까?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합니다. 특히 환경은 시대에 따라 계속해서 변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이란 변하는 환경을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도 변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따라가는 게 아닙니다. 환경을 따라가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나중에 오히려 더 큰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비록 당장은 이해가 가지 않더라도, 심한 기근이 있더라도, 절망할 만한 상황이더라도, 앞길이 다 막힌 것 같더라도, 분명히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말씀을 붙들고 따라가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2. 애굽에서 더 큰 어려움을 만나다 (11~16절)
하나님의 뜻을 그렇게 알고 따라갔으면 좋겠지만, 그것을 잊어버리고 자기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나아가면 어떻게 되는지를 아브람이 잘 보여줍니다. 그렇게 하면 특히 불안함이 찾아옵니다. 아브람이 위기에 닥쳐서 타협하고 애굽으로 갔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11-12절)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자기 판단대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했을 때,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문제를 가져오게 됩니다.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애굽에 가까이 갈수록 그의 불안함이 점점 더 커집니다. 마음이 불안해지면 어떤 현상이 생깁니까? 평범한 일을 이상하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보통 일이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이전에는 자기 아내 사래가 아름답고 예쁜 여인인 것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마음이 불안한 가운데 자기 아내를 보니까 이상한 생각이 드는 겁니다. ‘다른 남자들이 사래를 탐낼 것 같다. 그리고 아내를 데려가기 위해서 나를 죽일 것 같다.’라는 불길한 상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학자들이 연구해보니까, 사람이 염려할 때 그 중 90% 이상은 이미 과거에 끝났거나 미래에 전혀 일어날 가능성이 없는 일이라고 합니다. 이미 과거에 끝난 것을 계속 후회하고 또 미래에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대해 염려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아브람이 꼭 그렇습니다. 지금 쓸 데 없는 일로 걱정하고 있습니다. 실제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마음속으로부터 미리 걱정하고 미리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그렇게 하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자기 혼자 막 상상을 하는 겁니다.
미래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은 미래에 분명히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을 믿고 나아가고, 반면 믿음이 없는 사람은 미래가 불안합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일을 진행하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일이 잘 풀린 게 아니라 마음에 불안이 찾아왔습니다. 혹시 일이 잘 풀려도 마음은 불안합니다. ‘이러다가 또 무슨 일이 있지 않을까?’
더 안 좋은 것은, 바로 그 불안 때문에 비정상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멀쩡하다 갑자기 자기 안전에 위협을 느끼게 됩니다. 점점 더 불안해집니다. 그래서 엉뚱한 수단과 방법을 찾게 됩니다.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13절)
이것은 물론 사실에 근거한 생각입니다. 사래가 아브람의 이복누이였습니다(20:12). 그래서 이것은 아주 그럴 듯한 생각이고 기발한 아이디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반쪽 진리입니다. 지금은 분명히 자기의 아내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자기 아내이지 무슨 누이입니까?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믿기는 믿는데 비슷하게(비스무레하게) 믿는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믿지 못하고 적당히 믿는 것이 문제입니다. 혹시 이런 생각을 하십니까? ‘믿음을 가지는 것은 좋은데 너무 빠지진 말아야지. 적당히 거리를 두고 믿어야지.’ 그런데 적당히 믿고 비슷하게 믿으면 좋을 것 같지만, 오히려 더 어려워집니다.
아무리 아브람이 핑계를 대더라도 거짓은 거짓입니다.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자기 판단으로 애굽으로 내려온 것도 잘못이지만, 이제 거기에 거짓말까지 더해서 사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까지도 그 거짓말에 관련되도록 만들어버립니다. 아브람 일행이 지금 애굽으로 들어오자 문제가 해결이 됩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더 복잡하게 꼬입니다. 바로의 신하들이 사래에 대해 바로에게 보고하게 된 것입니다.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14-15절)
물론 사래는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가 75세였고 아내 사래는 65세였습니다. 물론 그 당시는 지금보다 더 오래 살았지만, 그래도 그 정도 나이가 되었으면 아주 젊은 여인처럼 예쁘지는 않았을 텐데 너무 예쁘기 때문에 걱정을 했다는 겁니다.
사실 사래는 미모가 뛰어난 여성이기도 했지만,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더 눈길을 끌었다는 말입니다. 역사의 기록에도, 이집트 남자들은 이집트 여자들보다도 외국 여자들을 더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람은 바로 그런 것 때문에, 실제로 자기 아내가 예쁘기도 했지만 이제는 노년에 들어가는 나이인데도 예뻐서 불안했다는 것은, 사실 외국 여자였기 때문에 불안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마음이 불안해서 나름대로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더 안 좋았습니다. 애굽에 오기 전에는 ‘사래가 나를 보호해줄 방편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했던 사래를 아예 바로에게 빼앗겨 버렸습니다. 자기를 막아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빼앗겨 버렸습니다.
가만히 있었으면 괜찮았을 텐데 누가 와서 ‘안녕하세요?’ 할 때마다 괜히 자꾸 ‘이 사람은 내 누이입니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괜히 누이라고 했습니다. 요즘 말로 ‘안물안궁’이라는 말이 있는데 아십니까? ‘안 물어봤고 안 궁금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먼저 ‘내 누이입니다. 내 누이입니다.’라고 떠들고 다니니까, 바로의 신하들이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은 왕의 후처가 되어야 한다고 추천한 것입니다. 아브람은 지금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갔습니다.
이때 아브람이 겪었을 충격과 두려움을 생각해보십시오. 사실 아브람은 사래 때문에 바로 왕으로부터 많은 것들을 받게 됩니다.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16절)
여기 보면 양과 소와 노비들과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습니다. 나중에 이스마엘을 낳게 되는 하갈도 이때 얻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브람이 이때 ‘야, 내가 아내는 잃었지만, 대신 이렇게 많은 선물을 받았으니 이게 웬 횡재인가? 이걸로 가서 다른 여자를 알아봐야지.’라고 생각하며 너무 행복해 했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너무 불행하고 너무 괴로웠습니다. 그는 심히 괴로웠습니다. 이전에 불안하고 걱정했던 것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두려움이 그를 덮었습니다.
이처럼 어려움을 당했을 때 그것을 직면하고 뚫기보다 피하는 길을 택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떠나 애굽으로 왔을 때, 아브람의 믿음은 완전히 밑바닥을 치게 되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8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인생의 가장 큰 실패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자기 맘대로 갔을 때 그렇게 되었습니다.
기근이 왔더라도 하나님께서 ‘이곳이 바로 그 땅이다.’라고 하셨으면 거기 머물러 있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그가 굶어 죽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인도해주십니다. 그러므로 거기서 그냥 버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내려갔다가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3. 하나님이 개입하시다 (17~20절)
이제 아브람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비참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자기 힘으로 지금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브람은 이때 ‘아, 내가 괜히 아내를 누이라고 했다가 이제는 아내를 빼앗기게 되었다.’ 하고 괴로워하며 울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그때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십니다. 아브람이 인생의 비참한 실패를 경험하고 있을 그때, 하나님은 멀리 계신 게 아니라 바로 그의 곁에 계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17절)
아브람이 애굽으로 내려온 이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전혀 안 계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말이 전혀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상황에 대해 전혀 모르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아브람과 동행하시면서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셨습니다.
바로가 사래를 자기 궁으로 데리고 들어왔을 때 하나님이 큰 재앙을 내리십니다. 여기서 그게 어떤 재앙이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때 개입하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특히 두 가지가 중요합니다.
첫째, 아브람이 믿음 없는 사람처럼 살 때 다른 사람들에게 저주가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18-20절)
여기 보면,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막 야단을 칩니다. 하나님이 바로의 집에 어떤 재앙을 내리셨는지, 사래가 아브람의 아내인 것을 바로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여기서 말씀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여기서 핵심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은 아브람이고 이집트 왕 바로(파라오)는 결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또 거기 있었기 때문에 바로와 그 집에 해가 미쳤다는 사실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3절)
아브람을 축복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아브람을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저주를 내리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람은 이미 축복과 저주를 가져올 수 있는 능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믿음으로 행동하지 않고 엉뚱한 짓을 하니까 실제로 저주가 임하는데, 그 저주가 잘못한 아브람에게 임한 것이 아니라 멀쩡한 다른 사람들, 이집트 사람들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아브람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복을 주는 복의 근원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도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정말 다른 사람들에게 복의 근원으로 살려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순종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하면 우리 주변 사람들, 우리 주변에 있는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불순종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을 때, 그 저주가 혹시 나에게 임하지 않더라도 내 주변 사람들에게 고통이 임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 얼마나 안 좋은 일들이 많습니까? 혹시 우리가 제대로 살지 않음으로 인해 이 사회가 고통을 겪는 것은 아닙니까? 혹시 우리가 믿음으로 살지 않기 때문에 주변의 이웃에게 해가 가는 일은 없습니까?
지금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우리가 제대로 못 살아서 벌어졌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 외에 작아 보이는 일에도, 내가 주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함으로 인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해가 가는 일은 없는지 돌아봐야겠습니다.
둘째로, 여기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아브람이 그의 불순종과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믿음으로 나아갔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주신 약속을 지키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믿음의 순종을 깨고 못 했는데, 하나님은 지켜주겠다고 하신 약속을 지키고 계십니다. 아브람은 깨고 하나님은 지키십니다. 아브람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고 계십니다.
아브람이 자신의 판단으로 애굽으로 내려갔고, 쓸 데 없는 불안과 초조 가운데 거짓말을 해서 위기를 자초했을 때, 하나님은 그런 아브람을 보시며 ‘얘도 이젠 안 되겠다. 내가 다른 사람을 써야겠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를 끝까지 붙들어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지만, 원래부터 믿음이 엄청나게 좋은 사람이라 하나님이 부르신 게 아니라, 부르셔서 만들어가신 사람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인물들이 다 그렇습니다. 원래 좋았던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셔서 빚어나가신 사람들, 그런데 그것을 잘 견디고 따라온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아브람을 붙드시고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해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브람이 착한 사람이거나 잘나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 때문입니다. 앞으로 사래의 몸을 통해서 이삭이 태어나는데, 사실은 멀리 보면 사래의 몸을 통해 태어날 그 아이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메시야)가 태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의 실수도, 바로의 권력도, 하나님의 계획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적당히 살고, 대충 살고, 신앙생활도 대충 하는데도, 아무 문제도 없고 잘 살고 있다면, 이렇게 코로나바이러스가 도는 사태에도 건강하고 안전하게 잘 지내고 있다면, ‘내가 괜찮은 사람인가보다. 내가 잘나서 그런가보다.’라고 생각하면 완전히 착각입니다.
오히려 정확히 계산해서 잘한 것에는 복을 주시고 잘못한 것에는 벌을 주신다면, 우리 인생은 벌써 끝이 났어도 몇 번은 끝났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우리는 멀쩡히 잘 살고 있습니까? 그것도 이런 바이러스 사태 가운데도 안전하고 건강하게 잘 살고 있습니까?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나서 붙들어주시는 게 아닙니다. 단순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주십니다. 자녀는 아무리 잘못해도 부모님이 잘 돌봐주지 않습니까?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음의 고백을 하고 나온 자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믿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주님의 말씀을 지키시기 위해 그렇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벌어질 때 우리가 초점을 맞출 것은 주변 환경이나 사람이 아니라, 또 의지해야 할 것이 자신의 능력이나 생각이 아니라, 오직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변함이 없습니다. 이 세상도 지나가고 이 세상의 모든 것도 지나가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의 삶에 개입하십니다. 특히 이런 위급한 상황에 꼭 인도해주십니다. 우리의 실수와 잘못과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에 개입하셔서 모든 것을 바로잡아 주십니다. 바로 그것이 복의 근원으로 살기로 결단하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에게 임하는 복입니다. 우리의 불성실과 우리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신실하십니다. 그리고 약속을 지키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보호해주시고 인도해주시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하나님의 사람, 믿음의 사람도 때로는 유혹에 넘어가고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 불순종의 길로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그런 것이지, 우리가 영원히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좋아서 일이 잘 풀리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이끌어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가 완전히 휩쓸려 망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보지 않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미 주신 약속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엄청난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결정을 내릴 것이 많은데, 어떤 결정을 내리고 어떤 삶을 살든지 하나님은 분명히 신실하게 인도해주십니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우리가 악용해서 잘못된 길로 나아가면 안 되겠습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그런데 그 대가가 뭔가 하면, 아무리 일이 잘 풀려도 마음의 불안함입니다. 또 주변 사람들에게 임하는 고통입니다.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야단을 맞고 수치를 당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어려움이 찾아올 때 믿음의 사람으로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나나?’가 아니라, ‘아, 내가 지금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영적 도약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주셨구나.’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 이번엔 또 어떤 놀라운 일들을 행하려고 하십니까? 제가 깨닫게 해주십시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편안하고 쉬운 길이 아닙니다. 너무 쉽거나 편안하면 자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들려주셔서 우리의 영적 근육을 키워주기 원하십니다.
왜 선물을 많이 주셔도 우리가 별로 들고 가지 못합니까? 하나님이 복을 안 주시는 게 아닙니다. 엄청나게 주시는데, 그것을 들고 갈 영적 근육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약하니까 다 들고 갈 수가 없습니다. 엄청나게 선물을 주셨는데 못 들고 갑니다.
그래서 영적 근육을 키워야 합니다. 그런데 그 근육은 이런 어려운 일들을 믿음으로 극복할 때 키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어려움이 저주가 아니라 복이 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바로 이 신실하신 하나님과 매일 동행하며 매일 쏟아 부어주시는 은혜의 선물을 충만하게 맛보는 가운데, 복의 근원으로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