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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223일 주일예배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90

드디어 로마에 도착하다

(사도행전 2811~22)

 

[들어가는 말]

 

몇 년 전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 사에서 나온 세계지도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지도는 지금까지 보던 세계지도와는 조금 달랐습니다. 지도의 가운데에는 아프리카와 유럽이 있고, 지도의 왼쪽에는 북미와 중미와 남미, 그리고 지도 오른쪽 제일 끝에 아시아, 특히 한국과 일본이 조그맣게 그려져 있었습니다.

 

지도는 보통 자기 나라 중심으로 그립니다. 아시아에서 가장 큰 땅을 가진 중국인들은 자기 나라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해서 중국(中國)이라고 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호주 원주민들은 에이어즈 락(Ayers Rock) 지역의 사막 한 가운데 불쑥 솟아올라 있는 평평한 고원처럼 보이는 붉은 바위산인 울루루(UIuru)를 세상의 중심으로 여긴다고 합니다. 일본 영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라는 영화 포스터로 잘 알려진 그곳을 호주 원주민들은 지구의 배꼽이라고도 부른다고 합니다.

 

그럼 사도행전 당시 유대인들은 어디를 세상의 중심이라고 여겼겠습니까? 그들은 당연히 이스라엘, 그것도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이 이어져서 나중에 그리스 정교회는 예수님 무덤교회의 카톨리콘을 세상의 중심 혹은 아담의 배꼽이라고 불렀습니다.

 

반면 1세기 당시 로마제국에서는 사람들이 어디를 세상의 중심으로 여겼겠습니까? 당연히 로마를 세상의 중심으로 여겼습니다. 정치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그곳이 가장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소아시아의 상업 중심지이며 거대한 항구도시인 에베소에서 귀한 결과를 얻고 어느 정도 선교적인 일들을 마무리한 다음, 예루살렘에 들렀습니다. 그리고 로마에도 꼭 가봐야겠다는 마음의 소원을 품게 되었습니다(19:21). 왜냐하면 로마가 그 당시 세계의 가장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사도 바울이 세상의 중심에 서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외치고 싶었던 곳,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귀히 여기셔서 그렇게 해주겠다고 약속해주셨던 곳, 그 당시 세상의 중심이었던 곳, 그 로마에 드디어 도착해서 그 비전을 이루게 된 이야기가 바로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1.   로마에 도착한 바울 (11~16)

 

석 달 후에 우리가 그 섬에서 겨울을 난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떠나니 그 배의 머리 장식은 디오스구로라” (11)

 

그 섬즉 멜리데(몰타) 섬에서 석 달을 머물고 항해에 위험한 겨울이 지난 다음에 봄이 왔습니다. 저번에 학자들이 계산했다고 했을 때, 위험한 바람이 불어온 그 시기가 AD 60년경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지금 3개월이 지난 이때는 AD 613월 중순 경으로 추정됩니다. 지중해에서 다시 항해가 재개되던 시점이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그 전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배에 타고 가다 좌초했는데, 또 다시 몰타 섬에서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온 다른 배를 타고 갑니다. 그 배를 타고 로마를 향해 떠나갑니다. 276명 모두 이 배에 타고 가는 겁니다. 그 배도 지중해의 겨울 폭풍 때문에 멜리데 섬에서 겨울을 난 배였습니다.

 

그런데 이 배의 머리 장식이 디오스구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있는 주를 보시면 제우스의 쌍둥이 아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디오스구로는 선원들이 수호신으로 여기던 제우스의 쌍둥이 아들 카스토르(Castor)와 폴룩스(Pollux)였습니다. 그들의 별자리를 쌍둥이자리라고 부르는데, 이 쌍둥이자리가 우리 동네에 있습니다. 저쪽 Costco 앞길이 제미나이 플레이스’(Gemini Pl)인데, 그 제미나이가 게미니’(Gemini) 즉 쌍둥이자리입니다.

 

폭풍 가운데 혹은 한밤중에 선원들은 그 별자리를 행운의 징표처럼 여겼고, 그래서 디오스구로 장식을 배 앞에 달고 수호신처럼 여기며 항해한 것입니다. 디오스구로 숭배는 특히 이집트에서 유행했었기 때문에, 북아프리카 해안에 위치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배라면 대부분 그 장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수라구사에 대고 사흘을 있다가, 거기서 둘러가서 레기온에 이르러 하루를 지낸 후 남풍이 일어나므로 이튿날 보디올에 이르러” (12-13)

 

여기에 보면 수라구사’, ‘레기온’, ‘보디올이라는 지명이 나옵니다. 구글 맵에서 한글로 치면 안 나오지만 영어로 치면 나옵니다. ‘수라구사가 시라큐스(Syracuse)인데, 검색하면 뉴욕 주에 있는 시라큐스도 나오지만,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에 있는 항구도시가 나옵니다. 바로 그곳입니다.

 

지금 바울을 호송하는 로마 병사들이 탄 배가 이탈리아 남부 시실리 섬 동쪽 바다의 큰 항구도시인 수라구사에 정박하여 사흘을 머물다가, 거기서 떠나 그 맞은편에 있으며 장화 같이 생긴 이탈리아 반도의 엄지발가락에 해당되는 곳에 있는 레기온이라는 항구에 도착합니다. 거기서 하루 더 정박했다고 나옵니다.

 

수라구사는 로마인이나 그리스인들에게는 BC 5세기에 스파르타와 아테네를 중심의 델로스 동맹 사이에 벌어진 그 유명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된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미국에서는 그런 것보다는 뉴욕 주에 있는 시라큐스(Syracuse)로 더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지명들을 보면, 사도행전을 막 쓴 게 아니라 정말로 정확한 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썼다는 것을 여기서 보게 됩니다.

 

레기온은 시실리 섬 동부 해안 항구 수라구사 맞은편에 있는 항구입니다. 정확히는 레기움(Rhegium)인데, 지금은 이곳이 레지오 칼라브리아(Reggio Calabria)라는 항구도시입니다.

 

그런데 2715절에서도 언급된 순풍이며 그토록 기대했던 남풍이 드디어 불어오니까, 다음 날 그들은 항해하여 하루 만에 보디올(Puteoli)에 도착합니다. 보디올은 영어로 Puteoli라고 되어 있는데, 컴퓨터에 이것을 영어로 치면 지금의 나폴리 지역이 나옵니다. 나폴리의 서쪽 항구인 포쭈올리(Pozzuoli)라는 곳입니다. 그 당시 이탈리아의 밀 무역의 주요 항구였고 여러 섬으로 나가는 관문 도시였습니다.

 

보디올에 도착한 것을 특별히 언급한 이유는, 이제 위험한 항해는 다 끝났다는 겁니다. 배를 타고 가는 여행은 다 끝났고, 이제 육로로 로마에 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보디올은 로마에서 남쪽으로 125마일 정도의 거리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건장한 청년이라면 거기서 아피아 가도를 띠라 닷새를 걸어가면 로마에 갈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거기서 형제들을 만나 그들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함께 머무니라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이 로마로 가니라” (14)

 

바울은 닷새간의 도보 여행을 앞두고 놀랍게도 그리스도인 형제들을 만납니다. 보디올(지금의 나폴리 지역)에서 만났다는 말인데, 이들이 로마에서 마중 나온 신자들인지, 아니면 보디올 지역 교회의 성도들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이들을 만나 보디올에서 일주일을 같이 지낸 다음에 같이 로마로 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이 로마로 가니라라고 하는데, ‘그래서라고 번역된 이 한마디에는 로마를 향한 여정 속에서 지금까지 바울이 겪어왔던 온갖 고난과 어려움과 박해가 다 들어 있습니다. 여기 오기까지 얼마나 고생을 했습니까? 드디어 바울은 로마를 향한 마지막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죄수 신분으로 로마까지 호송되는 사람인데, 14절을 보면 마치 바울이 자유인처럼 행동하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그를 호송할 책임이 있던 로마 아구스도대, 즉 아우구스트 근위대의 백부장인 율리오(27:1)는 풍랑의 위기 속에서 바울의 특별한 능력을 보았습니다.

 

그가 미리 내다보는 능력도 보았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가다가 유라굴로 폭풍을 만나 죽을 뻔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또 담대히 일어나 주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메시지를 선포하는 모습, 그의 인격과 영성과 기적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특히 멜리데 섬에 갔을 때, 거기서 사람들을 많이 고치는 능력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통해 율리오는 바울에게 굉장히 호의를 베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2311절에서 바울이 로마에 가서 증언하도록 하겠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여러 가지 방해와 고난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성취되어서 바울이 이제 로마에 도착했다고 쓰면 되는데도, 14절에서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우리는 이와 같이 로마로 갔다고 하며 우리라고 쓴다는 것입니다. , 교회 공동체가 같이 로마에 도착한 것으로 쓰고 있습니다. 바울 개인이 혼자 잘나서 그렇게 했다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같이 했다는 것을 여기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을 중심으로 한 복음 공동체가 같이 로마에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세계 복음화에 있어서, 사도행전 18절의 약속,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라고 하신 그 약속의 성취와 같은 것을 모두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라는 위대한 영웅 혼자 다했다고 하는 개인의 영웅담으로 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신앙생활도 공동체로 하는 것이고, 특히 전도와 선교는 공동체로 같이 하는 것입니다. 혼자 전도를 잘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가끔 보면 별명으로 전도왕 아무개 장로(권사, 집사)’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전도를 열심히 잘한다는 의미로 별명을 붙인 겁니다.

 

그러나 혼자 하는 전도는 사실 없습니다. 혼자 복음을 전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해서 전도가 된 게 아니라,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거쳐 갔던 겁니다. 친절을 베푼 사람, 사랑을 베푼 사람, 사랑을 베푼 사람, 복음을 전한 사람... 그때는 무시했다가 나중에 다른 데서 마음이 열려 받아들이는 등,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한 것이지 결코 개인이 혼자 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이 무엇이겠습니까? 가끔 보면 어떤 사람이 신앙생활을 아주 잘하고 잘 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어떤 유명한 목사님들을 보면 아주 존경스럽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은데 도가 지나쳐서 영웅시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저분이 우리 교회에서 사라지면 절대 안 된다.’ 하면서 잘못 가는 경우들이 가끔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어떤 위대한 영웅적 한 개인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정확히 가르쳐주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한 어떤 위대한 영웅이 주님의 일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주님의 일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다 같이 하는 것입니다. ‘나는 부족하니까 안 하고, 열심히 하는 저 사람이 하면 되지.’라고 할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같이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어떤 한 사람을 띄워주고 영웅시하며 잘하는 사람만 내세우고자 하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사도행전을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과정으로 보기보다는, 위대한 어떤 개인 사도의 행전, 즉 위인전이나 영웅담처럼 읽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를 기초로 한 성경의 이해에, 다른 세상 역사의 관점을 성경에 끌고 들어오는 잘못된 관점입니다.

 

세상에서는 항상 영웅을 띄워주는 것을 강조합니다. 드라마나 영화나 그 원작이 되는 소설을 보십시오. 아주 뛰어나고 훌륭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러나 사실 한 개인이 그렇게 훌륭하기만 한 경우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공동체로 하는 것이지, 결코 한 사람이 잘나서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1장부터 마지막 장인 28장까지 제대로 읽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사도행전을 어떤 한 개인의 또는 몇몇 소수의 영웅담에서 시작하여 특히 베드로 같은 사람의 영웅담에서 시작하여, 사도 바울의 위대한 선교로 마무리된다고 보지 않게 됩니다. 제대로 읽으면 그렇게 보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그들을 통해 주님께서 어떻게 복음을 증거하시고 교회를 세워가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갔는지를 보게 됩니다. 28장에도 그것이 나와 있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핵심 메시지를 놓치고 사도행전을 단순히 베드로나 바울 같이 유명한 사람 중심으로 보게 된다면 잘못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제대로 읽는 습관을 들여야겠습니다.

 

그 곳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15)

 

여기서 한 가지 또 생각할 것은, 바울이 로마도 보아야겠다고 했는데, 2311절에서 주님은 바울에게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말씀을 통해 우리는 , 바울이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한 첫 번째 전도자이고 선교사구나.’라고 잘못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14, 15절을 보면 분명히 로마에는 이미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고 공동체 즉 교회가 있었습니다.

 

로마교회는 사도 바울 일행이 로마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까지 마중을 나왔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증언하러 로마에 가기 전에도 그곳에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이미 있었다는 사실은 로마서를 통해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로마서 18절을 보면, 비록 이방 세속 문화의 핵심에 있는 로마였지만, 로마교회 교인들의 믿음은 세상에 소문이 나 있을 정도로 훌륭했다고 바울이 칭찬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111절에서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했다라고 말합니다. ‘내가 지금껏 로마서를 쓸 때까지 만나지 못했는데 형제자매님들을 꼭 만나보고 싶습니다.’라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 만나기 원하는가 하면, 만나서 서로의 믿음을 통해 서로 위안을 얻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1:12).

 

로마서 16장을 보면 바울이 로마교회의 여러 사역자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이름을 죽 거론하면서 그들에게 문안하라고 합니다. 특히 163, 5절을 보면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라고 합니다.

 

브리스가, 즉 브리스길라는 아내이고 아굴라는 남편입니다. 이 사람들을 바울이 어디서 만났습니까? 2차 전도여행 때 고린도에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로마서를 쓸 당시에는 이들이 로마에 가 있었다는 겁니다. 이전에 유대인들은 로마에서 나가라는 추방령 때문에 로마에서 쫓겨나서 떠났는데, 도로 그리로 돌아가 자기 집에서 가정교회로 모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고 로마서에서 쓰고 있습니다(16:5).

 

바로 그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가 우리의 목장처럼 가정교회로 모이는 것에 대해 신약학자인 로버트 뱅크스(Robert Banks)가 자신의 연구와 상상력을 동원해서 책 두 권을 썼습니다. 아주 얇고 간단합니다. 각각 100페이지도 안 되는 아주 작고 짧은 책들이며 도서실에도 있습니다.

 

<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에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에 푸블리우스라는 가상의 인물(로마 시민)이 초대를 받습니다. 목장에 VIP가 초대를 받은 겁니다. 그가 가서 보니까 신기합니다. 노예가 리더이고 주인이 그 밑에 있어서 충격을 받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것을 간단히 써놓은 책입니다.

 

그 후속편으로 낸 것이 <1세기 그리스도인의 하루 이야기>입니다. 여기서는 이 사람이 그 사이에 믿었고(물론 소설이지만) 로마의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당시 하루를 어떻게 평범하게 살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너무나 생생합니다. 상상으로만 쓴 게 아니라, 신약학자가 연구를 해서 그것을 바탕으로 거기에 상상력을 가미하여 썼기 때문에 거의 정확합니다. “그들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는 말씀이 그 당시 진짜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고린도전서 1619절에 보면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라고 바울이 썼습니다. 고린도전서는 고린도 교회에게 쓴 편지입니다. 언제 썼나 하면, 바울의 3차 전도여행 때 3년 동안 에베소에서 머물 때, 고린도 교회에서 신앙생활에 대하여 이러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는 질문들을 대표단을 통해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바울이 거기에 대해 답을 해서 보낸 것이 고린도전서입니다.

 

에베소에 있으며 썼을 때는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가 에베소에서 같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2차 전도여행 때 고린도에 있다가 바울과 같이 건너와서 바울이 그들을 에베소에 남겨두고 그 사이에 예루살렘과 안디옥에 갔다가, 3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로 와서 다시 만나 같이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같이 그 편지(고린도전서)를 쓰면서 내 옆에 있는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도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라고 썼습니다.

 

그 후 바울은 거기를 떠나서 죽 돌아 그리스 남부의 고린도로 가 로마서를 썼습니다. 거기서 로마로 보내는 편지를 썼을 때는 거기 당신들 로마교회에 있는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해주십시오.’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마게도냐를 돌아서 남부 아가야의 고린도로 갔을 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다시 로마로 갔다는 겁니다. 가서 사역을 다시 시작하며 기반을 닦고 있었습니다.

 

진 에드워즈라는 분이 쓴 소설을 보면, 이분도 연구와 상상력을 동원해서 썼는데, 그 장면들이 아주 생생하게 잘 나와 있습니다. 전략적으로 그들을 먼저 로마로 보내 터를 닦게 하고, 이미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사역을 같이 하게 하면서, 그 사이 바울은 빙 돌아 결국은 로마로 와서 이때 그들을 다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복음의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여러 번 박해와 투옥과 풍랑과 파선 등 온갖 고초를 겪었으면서도, 그토록 로마에 가서 외치고 싶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외쳐야 할 로마, 유대인들이 그 당시 땅 끝이라고 여기던 로마, 그러나 세상으로는 그 당시 중심이었던 로마에 이르자, 하나님은 위로하시듯, 두 팔을 벌려 환영하시듯, 로마교회 형제들을 바울에게 보내어 환영을 받게 해주셨습니다.

 

비록 그들이 만난 적은 없었지만, 그 사이에 소식과 편지를 주고받았으니, 이때 얼마나 마음이 기뻤겠습니까? 로마의 형제들을 만난 것은 비울에게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격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이 사람들을 보기 위해 내가 그 동안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가?’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었습니다(15). 그런 사연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보았을 때 하나님께 감사했고, 또 복음을 전하기 위한 담대한 마음을 얻었습니다. 2311절에서 주님이 담대하라고 하셨던 그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용기를 얻게 된 것, 이것이 진정한 성도의 교제인 코이노니아의 파워인 것입니다.

 

이때 로마교회 성도들 가운데 두 그룹이 마중을 나왔습니다. 멀리 나온 사람들은 로마로부터 남쪽으로 40마일 이상 떨어진 압비오(아피아) 광장까지 나왔습니다. 옛날 한국식으로 계산하면 170리 길입니다. 또 한 그룹은 로마에서 30마일 이상 떨어진 트레이스 타베르네’, 즉 아피아 가도(Via Appia) 상의 요지인 ‘Three Taverns’(세 개의 여관)으로 나왔습니다. 옛날 우리가 쓰던 개역한글 성경에는 삼관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두 번째 그룹은 거기까지 마중을 나왔습니다.

 

이것도 120리 길이 되는 먼 길을 마중 나온 것이니까, 얼마나 반가운 마음으로 로마교회 성도들이 맞으러 나왔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이 로마교회 형제들은 지금까지 편지로만 듣고 교제하던 바울을 이 먼 곳까지 나와 맞이하며 로마까지 수행합니다. 너무나 감격적인 장면입니다.

 

이제 드디어 바울이 로마에 들어섰습니다. 그것은 이미 여러 번 언급했듯, 1921절에서 바울이 보여주었던 헌신의 성취였고, 2511절에서 들었던 주님의 약속에 대한 순종과 또 그에 대한 성취였습니다. 이렇게 약속의 말씀과 함께 주님은 바울과 동행해주셨고, 그래서 마침내 바울이 이런 감격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보지만 우리가라고 했고 이 형제자매들이 나왔기 때문에, 바울은 결코 혼자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때 결코 외롭지 않았을 겁니다.

 

여러분, 바로 이런 사람들이 우리 인생에도 필요합니다. 한 번 스스로 물어보십시오. ‘나의 인생에는 과연 누가 나와 동행해줄 것인가? 이런 어려운 순간이 올 때 누가 나와 동행해줄 것인가?’ 그런 믿음의 친구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삶입니다.

 

그런데 이 로마교회 성도들 이야기는 여기서 그냥 끝납니다. 이들은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이제 사도행전의 관심은 바울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이야기에만 집중됩니다.

 

이처럼 누군가 우리와 동행해주는 것은 감사하고 기쁜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동행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들의 상황이 바뀌어서, 또는 어떤 일이 생겨서 더 이상 우리와 함께 할 수 없을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가족이라도 죽음을 통해 헤어지게 됩니다. 또 사랑하는 자녀들이 다른 데로 학교를 가거나 멀리 직장을 잡아 가기도 합니다. 아무리 서로 사랑하고 가족이고 친해도 언젠가는 헤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또 다시 세상에 나 홀로 서야 할 때가 옵니다.

 

그러나 나 혼자 있다고 느껴질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외로워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주십니다. 마태복음 2820절을 보면,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기 얼마 전에 가서 제자 만들어라하신 그 유명한 대 사명을 주신 다음에, 그냥 너희들은 가서 열심히 해라하신 게 아니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혹시 내 옆에 다른 사람은 없다 해도 주님은 함께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울에게 그 말씀대로 동행해주셨고, 이후에도 계속 그렇게 해주셨습니다. 우리도 그 말씀을 확신하면서, 매일매일 믿음의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16)

 

우리즉 바울 일행이 로마에 도착했을 때 로마군인들은 죄수로 호송되어 온 바울에게 많은 자유를 허락해줍니다. 비록 지키는 군인을 한 명 붙였다고 되어 있지만, 이것은 감옥에 감금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상태입니다. 물론 쇠사슬로 묶어서, 마치 형사가 범죄자에게 수갑을 채워 자기 손목에 매서 도망가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했지만, 또 일종의 가택연금 상태로 볼 수도 있지만, 얼마간의 제한된 자유 생활이 주어집니다.

 

나중에 20절에서 바울이 자신의 상태를 묘사할 때 쇠사슬에 매여 있다고 한 것이 그것입니다. 일정 부분 제한은 있었지만, 나름대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모든 상황을 인도해주신 것입니다.

 

 

2.   로마의 유대인들에게 전도하는 바울 (17~22)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그들이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준 바 되었으니” (17)

 

그 당시 세상의 중심이라고 여겨지던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자신이 그곳에 보내진 사명을 잊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거대한 도시에 와 있어도, 지금 자기가 여기 와 있는 것은 다른 일로 온 것이 아니라 복음의 증인으로서 세상의 땅 끝까지 온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로마서에 그런 표현이 나오지만,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땅 끝이라고 하는 로마에 왔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땅 끝인 스페인까지 가야겠다는 마음을 이미 품고 있는 겁니다. 그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래서 바로 복음 사역을 또 시작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 로마에 살고 있던 유대인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BC 1세기경 로마에는 여러 회당에 나오는 유대인들만 거의 5만 명이었다는 역사 기록이 있습니다. 이미 티베리우스나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유대인들을 추방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2차 전도여행 때 로마로부터 추방되어 온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고린도에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한 명도 남김없이 전부 다 내쫓은 것이 아니고 또 그 사이 다시 돌아온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1세기에도 많은 유대인들이 여전히 로마에 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유대인 사회의 유지들을 만나서 자기의 입장을 밝히고 또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소개하려고 한 것입니다.

 

먼저 바울은 이들을 여러분 형제들아라고 형제라며 친근하게 부릅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자기도 유대인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자기가 로마황제 가이사에게 상소하여 이곳 로마까지 어떻게 포로로 오게 되었는지 그 상황을 말합니다. 자기는 유대교에 반하는 어떤 잘못된 일을 한 것이 없다는 점을 말하고, 예수님께서 당하셨듯이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자신을 이방인인 로마인의 손에 범죄지로 넘겨주게 되었다고 지적합니다.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석방하려 하였으나,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함이요 내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18-19)

 

로마 당국은 조사 결과(24-25) 로마법을 위반한 것이 아니라 무죄라는 것이 밝혀져 석방하려고 했다(25:25)는 사실을 밝힙니다. 바울은 이 점을 로마의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분명히 알려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동시에 바울은 19절처럼 이 사실 뒤에 숨겨져 있는 유대인들의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대한 거부감을 지적하려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조사 결과 무죄인데도 죄수 취급을 받고 죽이려고 한 것이 원통해서 로마 황제에게 자기 민족을 고발하려고 상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까지 자기가 이곳 로마까지 왔는지, 바울은 그 사실을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을 만나자고 초청한 이유였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고, 근본적으로는 이스라엘에 대한 소망 때문이라고 바울이 선언합니다.

 

이러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으니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20)

 

사실 자기가 원해서 쇠사슬에 매이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왜 자기가 이렇게 자원하는 것처럼 쇠사슬에 매인 몸, 감옥에 갇힌 몸이 되었는가? 그것은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스라엘의 소망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2820절과 뒤의 23절과 28절을 보면, 바울이 로마에 가려고 했고 주님이 바울을 로마로 보내셔서 증언하라고 하신 본질적 이유와 목적을 아주 잘 보여줍니다. 로마에 복음이 전해진 적이 없어서 바울이 지금 최초의 선교사로 온 것은 아닙니다. 이미 복음이 전해져서 교회도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말(지금의 구약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주는 소망을,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계획을 전함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위해 자기는 보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쇠사슬에 매인이유, 즉 죄수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 이유가 바로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소망에 대해 바울은 로마로 오기 전 이미 로마서에서 쓴 바 있습니다. 로마서 9~11장에서 자세히 썼습니다. 이때를 미리 대비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바울은 236절에서 이스라엘의 소망은 죽은 자들의 부활임을 밝힌 바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그로 인한 이스라엘의 소망이 그가 전한 복음의 핵심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 ‘메시아이신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소식을 세계의 땅 끝에 사는 여러분에게까지 내가 알리기 위해서 왔다.’ 하는 겁니다. 그것을 위해 자기는 기꺼이 쇠사슬에 묶인 몸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거대하고 위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전하고 우리의 참된 소망이 무엇인지를 전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고 또 보내심을 받습니다. 그러나 부르심이나 보내심이라고 해서 거창한 것만이 아닙니다. 선교사님들과 같은 것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모든 크리스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는 사명이 있습니다. 사명이 없는 소명(부르심)은 없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님을 통해 부르셨는데, 그 부르심(소명)은 사명 없이 부르신 것은 없다는 겁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을 때 다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다 사명을 받습니다. 사명 없는 구원이 없고, 또 목적 없는 부르심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 하나님의 자녀들, 그리스도인들, 예수님의 제자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기로 결단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자기가 겪는 모든 환난의 이유와 목적을 알고, 그러면서도 믿음으로 나아가기를 결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삶에 좋은 일이 있을 수도 있고 나쁜 일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좋다 나쁘다를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십니까? 옆에 있는 어떤 형제자매에게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다고 할 때, 좋다 나쁘다를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습니까? 세상의 안 믿는 사람과 똑같은 눈으로 병 걸렸으니까 안 됐네. 잘못됐네.’라고 보고 있습니까? 또는 복권 대박이 터지면 아유, 좋겠네라고 하고 있습니까? 그 눈이 하나님의 눈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누구나 봐도 , 좋다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좋은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 봐도 , 이건 정말 나쁜 일이다. 저주 받았다.’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통해 무엇을 이루고자 하시는가를 찾을 때 우리는 제대로 보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쇠사슬에 묶였지만 이건 나쁜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주 좋은 일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기를 복음 전하는 일을 위해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바울의 말에 대해 로마에 살던 유대인 사회 지도자들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전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알기 때문이라 하더라” (21-22)

 

놀랍게도 로마의 유대인 사회는 예루살렘이나 소아시아나 그리스의 유대인 시회로부터 바울에 대한 어떤 부정적 의견도 받은 적이 없다고 밝힙니다. 그래도 22절에서 약간 힌트를 주는 것처럼, 바울 일행이 전하는 기독교 복음에 대한 소문을 그들도 들어서 알고는 있었습니다. 아무리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땅 끝인 이 먼 곳 로마에 살고 있었지만,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은 물론 소아시아와 또 그리스의 유대인 사회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아왔다는 것은 그들도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바울이 왜 예루살렘 당국자들의 눈 밖에 났는지 당연히 궁금해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대해 직접 한 번 들어보고 판단하자는 열린 자세를 보여주었습니다. 다른 데 있는 유대인들과는 아주 달랐습니다. 마치 2차 전도여행 때 마게도냐의 베뢰아에 있던 유대인들이 보였던 태도와 비슷합니다. 직접 들어보고 판단하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진짜인지 말씀을 직접 보고 연구했던 베뢰아 사람들처럼 직접 들어보겠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만 듣고 판단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아주 귀한 마음입니다.

 

이것은 22절에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이 파라고 부르는 것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유대교의 한 종파가 아닌가 하고 여겨주는 관용과 열린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바울의 가르침을 들어보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고, 그 결과, 비록 여기 온 모든 사람은 아니지만, 24절에 보면 믿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 이렇게 복음을 듣고 받아들인 사람들도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제 마음을 쳤습니다. 지금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들어보겠다는 열린 마음, 관용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른 데 있는 유대인들이나 이스라엘 땅에 있는 유대 종교지도자들과는 굉장히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나 필요한 태도입니다. 사실은 누구보다도 우리가 이런 태도를 보여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와 다른 사람들,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 나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에 대해 이런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몇 년 전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 중부의 플라토 주에서 이슬람 유목민들과 기독교 농민 충돌한 적이 있습니다. 나이지리아 플라토에서 농업을 하는 기독교인 베롬 족과, 유목생활을 하는 이슬람교도 풀라니 족 간의 분쟁이 일어나 그것이 지족됐습니다. 부족이 번성하며 인구는 증가하고 땅은 줄어들게 되니까, 농경민인 크리스천들이 수백 년간 무슬림 유목민들이 사용하던 토지를 점유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 종교적 갈등까지 발생해서 2018년 전반기에만 수백 명이 죽었습니다.

 

그 후 6월에 중무기로 무장한 풀라니 족의 무슬림 300여 명에 의해 이웃 마을에 살던 기독교인들이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때 살아남은 262명의 기독교인들이 공격을 피해서 도망갔는데, 하필 도망간 곳이 이슬람교의 예배당인 모스크였습니다. 그곳에 무슬림들이 총을 들고 쫓아와서 이슬람 성직자인 이맘에게 그 안에 숨어 있는 기독교인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렇게 안 하면 모스크와 집들을 모조리 태워버리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왜냐하면 크리스천 여성들은 집안에 숨기고, 남성들은 모스크에 숨겼기 때문입니다.

 

그때 이슬람 지도자인 이맘이 바닥에 엎드려서 무슬림 폭도들에게 그만 떠나주십시오.” 하고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그러자 무장 세력은 인근 교회 두 곳에 불을 지르고 떠나갔습니다. 이렇게 이슬람교 지도자가 크리스천 난민들의 목숨을 구한 것입니다.

 

그때 영국 BBC 방송에 의하면, 이슬람 이맘이 죽을 고비에서 크리스천들을 구해준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는 겁니다. “그 지역 기독교인들이 40여 년 전 우리 무슬림들에게 모스크를 짓도록 허락해주었고, 또 이슬람교도 마을에 땅도 준사실을 기억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오래 전 아무 사심 없이 베풀었던 사랑이 자기들을 보호하게 된 것입니다.

 

목숨을 건진 크리스천들을 대표하여 베롬족 족장은 무슬림 지도자의 용기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다 죽었을 것이라고 하며, 그 이맘은 모스크 안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고, 우리에게 떠나라고 하거나 이슬람교 식으로 기도하라고 요구한 적이 전혀 없었다.”라고 하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고 합니다물론 나이지리아 무슬림 가운데는 보코하람 같은 악명 높은 테러리스트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건에서 본 이슬람교 지도자와 같은 선한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은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에 온통 거기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지만,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리아 난민을 받느냐 안 받느냐 하는 문제가 심각했습니다물론 난민들 가운데도 굉장히 위험한 사람들이 섞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다 테러리스트로 여겨서 친절을 베풀면 안 되고 추방해야 한다는 생각이 정말 성경적인 것인지,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지를 잘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지금 막 폭우가 쏟아지는데 하나님의 은혜의 우산을 너는 종교가 다르지?’ 하며 싹 가져가버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집단에 가두어서 보면 안 되고 한 개인으로 봐줄 필요가 있습니다. 말을 할 때도 그렇습니다. ‘당신은 틀렸어당신은 잘못된 사람이야가 아니라, ‘당신이 하신 이 일에는 제가 동의할 수 없습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과 일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뭘 잘못하면 저 사람은 잘못된 사람이다가 아니라, ‘저 사람이 한 그 행동은 잘못됐다. 그러나 저 사람이 또 좋은 행동을 할 수도 있다.’ 또는 실제로 했다.’라고 하며 따로 봐주는 눈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시각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을 비롯해서 아시아에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가 점점 더 확산되고 있습니다. 요즘 세상이 복잡해지며 새로 발생하는 모든 문제 역시 굉장히 복잡합니다. 성경은 그에 대한 단순한 답을 다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문제에 대한 판단의 기준을 성경이 우리에게 제공해주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판단하는 기준이 정말 성경인가, 아니면 그냥 내 감정이나 내 생각인가를 항상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판단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그래서 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함으로, 매일 삶 속에서 모든 결정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내릴 수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계속해서 함께 자라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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