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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9일 주일예배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84

다시 한 번 나누는 회심 및 사명 간증

(사도행전 2613~23)

 

[들어가는 말]

 

오늘은 올해의 마지막 주일이며, 한국에서는 송년주일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러니까 다음 주일이 되면 새해가 되어서 새해 첫 주일이며 신년주일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이틀만 지나면 2019년은 영영 과거로 사라지게 됩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은 사람들이 대부분 하는 공통적인 말이 있습니다. ‘내 인생이 너무 길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인생이 정말 눈 깜빡하는 순간에, 순식간에 끝나 버렸다.’라고 한탄합니다. 특히 연세가 드신 분들은 지난날을 돌아볼 때 언제 이렇게 세월이 빨리 지났나 하고 느끼실 것입니다.

 

시대와 문화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인생무상을 말하며 한탄합니다. 하루하루 쌓을수록 하루가 길어지기는커녕 이상하게 점점 짧게 느껴지다가, 결국 한순간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과거로 영영 사라져버리는 그런 인생이라면, 얼마나 덧없고도 허무한 인생입니까? 오죽하면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20대는 20마일로 달리고, 30마일로 달리고... 70대는 70마일로 달린다. 점점 빨라진다.’라는 말까지 나왔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인생을 위해 구태여 애쓰고 힘쓸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또한 어떻습니까? 정말 인생이 그렇게 덧없고 허무하기만 한 것입니까? 지난 세월을 무의미하게 사라져버린 과거로만 느끼는 사람에게 인생은 덧없고 허무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니라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 본질적인 일이 아니라 비본질적인 일, 급할 수는 있지만 정말 본질적이거나 중요하지 않은 일만 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다면, 정말 덧없고 허무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산 사람은 그렇게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현재는 과거의 결과입니다. 매일 매일이 쌓여서 현재가 되는 것이고 또 미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연장선상에서 현재를 보면서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기 위한 발판으로 현재를 잘 만들어가는 사람에게는, 지나간 과거의 시간들이 현재를 거쳐 미래 속에서 새로운 의미로 되살아납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딱딱 끊어지고 단절된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의 삶이 같이 어우러져서 지나간 모든 삶의 시간들이 지혜로서, 또 의미 있는 인생으로서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시각이 하나님의 시각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과거와 지금 벌어지는 일 밖에 못 보는데, 또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도 다 봅니까? 내 눈앞에 벌어지는 일, 내가 들은 일, 뉴스에 나오는 일 정도 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내가 다 알지 못합니다. 미래는 더더욱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보실 때 과거, 현재, 미래를 한꺼번에 보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인도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시각으로 인생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인생은 결코 짧거나 덧없거나 허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의 과거는 그냥 사라지는 게 아니라 분명히 현재와 미래에 의미가 있는 것이고, 또 언제나 현재를 거쳐 미래 속에서 새로운 의미로 계속 되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런 인생을 살아야겠는데, 그렇게 인생을 산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1.   회심 사건과 사도의 사명 위임 (13~18)

 

1)  올바른 열심으로 섬기는 것이 중요하다

 

바울은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사도행전 26장에서 아그립바 왕의 요청으로 베스도 총독이 개최한 청문회장에서 자기변호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바울에게 자기를 변호한다는 것은 변명하기에 급급한 게 아니라 주님을 증언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청년 때 사울이라고 불리던 시절에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그분의 교회를 짓밟는 데 앞장을 섰던 사람입니다. 그렇게 했던 것은 당시의 유대교인들이 다 그렇게 했기 때문이고, 유대교에서 뛰어난 청년 엘리트로서 남들보다 더욱 열심을 다한 결과였습니다


그러므로 청년 사울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받기는커녕, 도리어 자부심을 느끼면서 저 나사렛 도당을 다 잡아 없애야 한다.’라고 생각하며 날뛰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살던 청년 사울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는지를 보여줍니다.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13-14)

 

사울이 회심한 사건이 9장에 나오고, 자기 말로 설명한 것이 22장에 나오며, 여기 26장에서 한 번 더 나옵니다. 바울은 나사렛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이 이단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들을 잡아 가두고 죽이는 데 아주 열심을 냈습니다. 일곱 집사 중 한 명인 스데반이 설교를 한 후에 그를 죽이는 데에도 앞장섰던 사람이고, 그가 죽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심지어 예루살렘으로부터 130마일 이상 떨어진 다메섹(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까지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갔습니다. 그것도 자기는 바리새파이고 성전의 제사장들은 사두개파인데, 자기 바리새파와 대적 관계에 있는 사두개파인 대제사장에게 가서 체포할 수 있는 권한(요즘 말로 하면 체포영장)을 받아서 저 130마일 이상 떨어진 다마스쿠스까지 잡으러 갔다는 겁니다. 얼마나 열심 있는 사람입니까? 남들은 하지 않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이렇게 열심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리로 가던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바울이 여기서 처음으로 밝히는 몇 가지 사실들이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는 하늘에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때가 정오(12)였는데, 중동의 햇빛은 아주 밝고 열기가 뜨겁습니다. 지금 여기는 겨울이라 그렇게 밝지 않지만 여름에는 선글라스를 써야 할 정도로 햇빛이 강합니다. 캘리포니아에 가면 햇빛이 굉장히 강하고 밝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밝은 해보다 더 강한 빛이 나타났다니, 이것이 얼마나 강한 빛입니까.

 

또 하나는 주님께서 바울에게 히브리 말로 사울아 사울아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의 터키 중남부 지역인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이기 때문에 헬라파(해외파) 유대인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예루살렘으로 와서 유명한 선생인 가말리엘 밑에서 바리새파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히브리파 유대인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3장에서 그는 자신을 가리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어가 모국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에게는 원래 제1 언어가 히브리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미있게도 바울의 제1 언어로 이야기해주신 것입니다. 헬라어로 하실 수도 있고 라틴어로 하실 수도 있었는데, 그가 제일 잘 알아들을 수 있는 히브리어로 해주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실 때 우리 한국 사람에게는 한국말로 주십니다. 갑자기 히브리어로 하시면 누가 알아듣겠습니까? 예수님이 갑자기 환상 중에 우리에게 헬라어로 하시거나 라틴어로 하신다면, 심지어 영어로 하셔도 솔직히 잘 알아듣지 못합니다. 영어권에게는 영어로, 불어권에게는 불어로, 독일어권에게는 독일어로, 한국어 권에게는 한국어로, 일본 사람에게는 일본어로, 중국 사람에게는 중국어로 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multilingual이시기 때문에 각 사람에게 맞는 언어로 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어예배도 하고 자신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신앙 교육을 교회에서 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마다 약간 다른 철학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어떤 교회는 우리가 한국 사람이니까 한국어를 잊어버리면 안 되고, 그래서 자녀들에게도 한국어로 성경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이 나쁜 게 아닙니다. 나름대로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영어를 주로 하는 우리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그것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어로 열심히 가르쳐주려고 하는 마음은 좋지만, 정작 신앙적으로 하나도 못 알아들으면 문제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가 한국 사람인 것을 먼저 따지기 전에, 가장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가 무엇인가를 잘 살펴서 그 언어로 복음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성경적인 일입니다. 예수님도 바울이 가장 잘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해주셨습니다. 구약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언자들이 가장 잘 알아들을 수 있는 히브리어로 다 이야기해주신 겁니다. 그리고 다른 외국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 외국어로 해주셨습니다.

 

또 한 가지는, 이전에 나오지 않던 가시채를 뒷발질한다’(14)는 말이 나온다는 점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 고전 문학에서 사용되던 표현입니다. “가시채"라는 것은 끝부분에 뾰쪽한 금속이나 뼈를 붙인 소몰이용 막대기를 의미합니다. 소를 몰 때 막대기로 모는데, 그 끝에 짐승 뼈나 쇳조각을 붙여서 소가 말을 듣지 않을 때 주인은 그 막대기로 치면서 소를 이끌어 갑니다.

 

그래도 소가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뒷발질을 하면서 반항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할수록 소는 더 심한 매를 맞습니다. 그래서 고통이 더 커지기만 합니다. 괜히 반항하면 더 맞고 더 괴로워진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소용없는 반항을 하여 상처만 받는다는 것이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다.’라는 말의 뜻입니다.

 

예수님은 청년 사울에게 당시에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말씀과 함께, “네가 나에게 반항하면 할수록 너 자신의 고통만 더 심해질 뿐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네가 교회를 박해하는 것이 나를 박해하는 것인데, 사실은 그것이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너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이 표현을 통해 바울이 하고 싶었던 말은, 자기가 유대 종교에 대해 대단한 열심을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는데, 그것이 사실은 성자 하나님인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을 통해 새 일을 하시는 하나님을 들이받았던 쓸 데 없는 헛고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오히려 더 괴로웠다는 것입니다.

 

청년 사울에게 주님의 그 말씀은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자기가 그 동안 그토록 부정하고 반대했던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로 그 메시아이셨다는 것도 충격이었지만, 자기가 그 동안 박해한 대상이 나사렛 도당 이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것, 성자 하나님이었다는 사실이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자기는 그 동안 예수가 당연히 사람이고 죽었으며 괜히 헛소리하던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자기 앞에 나타나신 주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는 자기가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쪽이 틀린 줄 알았는데 자기가 틀렸습니다. 그러니까 이 충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냥 나는 옳다라고 한 정도가 아니라 잡아 죽이기까지 했는데 자기가 틀렸다니, 그렇다면 자기가 이전에 핍박하며 잡아 죽이던 것은 완전히 살인이 아닙니까?

 

사실 사울은 예수님을 직접 박해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는 이 땅에서 예수님을 직접 뵌 적도 없었습니다. 그의 박해 대상은, 단지 예수를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나사렛 도당)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서야, ‘, 내가 예수님을 박해했구나. 예수가 정말 그리스도가 맞구나. 그런데 내가 그분을 박해했구나.’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굉장히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이왕 신앙생활을 하려면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자기 열심, 지혜가 없고 분별력이 없는 종교적 열심이나 충성심이라면 그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해가 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과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무지한 열심의 결과가 오히려 주님을 박해하고 해를 끼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렇다고 열심을 내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올바른 열정, 올바른 열심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신앙생활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원하시는 것이 무슨 엄청난 일을 하거나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됩니다. 그런 게 아니라, 올바른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이 땅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한국에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욕먹는 주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안 믿는 분들도 성경의 가르침,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 사랑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을 보면 자기들끼리 머리 터지게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니 말이 통하겠습니까? ‘사랑하라, 사랑하라하면서 자기들끼리는 뭘 하나 보니까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말이 통하겠습니까?

 

또 교회당에서 자기들끼리만 싸우는 게 아니라 나와서 하는 것을 봐도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대개 기대하는 게 뭡니까? 크리스천은 정직하고 선하고 의로울 것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교회를 안 다니고 믿지 않는 자기보다 더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이고 슬쩍슬쩍 속이고 거짓말을 하고 그러니, 뭐 하러 교회에 가겠습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시대의 믿는 사람들의 위기는 교회에 안 모이는 게 아니라(물론 안 모이는 것도 약간은 위기이지만), 모이기는 모이는데, 예배를 하기는 하는데, 성경을 읽기는 읽고 기도를 하기는 하는데, 그 믿는 바대로 살지 못한다는 게 가장 큰 위기입니다. 특히 나가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다는 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슨 엄청난 것이게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당에서 함께 예배할 때는 거룩하게 보이지만 나가서는 그렇지 않은 삶이 아니라, 세상 어디에 있든지, 즉 우리가 가정에 있든지, 직장생활을 하든지, 사업체에서 사업을 하든지, 학교에서 공부를 하든지, 길거리에 있든지, 운전을 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간에, 예수 믿는 사람답게, 정말로 온 인류의 구주이시며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답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정직하고 의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아이가 잘못하면 보통 누가 욕을 먹습니까? 부모가 욕을 먹습니다. ‘어유, 저거 누구 집 아인데 저래?’ 하며 부모를 봅니다. ‘제대로 교육을 못 시켰구먼.’ 우리가 나가서 엉망으로 살면, 믿는 바대로 살지 않고 엉뚱하게 살면, ‘저 어느 집안사람이야? 예수 믿는 사람이네. 에이, 틀렸어.’라고 되는 겁니다.

 

너무 간단합니다. 예수 안 믿는 분들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보이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 믿음이 우리 삶에서 그냥 나오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말로 나옵니다. 행동으로 나옵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는데 나가서는 막 욕을 하고 비난하고 험담하고 음담패설을 하고 그런다면, 둘이 맞지가 않습니다. 야고보서에서 야고보가 한 입에서 찬양도 하고 나쁜 말도 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런 정직하고 의로운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지, 무슨 엄청난 것을 세상에서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뭔가를 이루면 그것도 감사한 일이지만, 정직하고 의롭게 살며 사랑을 실천하고 섬기며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부르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듯,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하는 삶입니다.

 

 

2)  사명대로 사는 인생이 아름답다

 

지금 9장과 22장에 이어서 세 번째로 바울의 회심 사건을 26장에서 보고 있는데, 바울이 같은 이야기를 아그립바 앞에서 다시 하는 것은 그 당시 초자연적 사건이 일어난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뭔가를 자세히 증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땅에 엎드러졌는데 바울만 엎드러진 것인지 혹은 다른 사람들도 쓰러진 것인지도 초점이 아닙니다. 왜 모두가 그 빛을 보았는데 왜 바울만 눈이 멀게 되었는지, 왜 바울만 그 말씀을 알아들었는지도 관심사가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신학교 때 사도행전 과목을 들으면서 과제로 한 가지를 잡아서 쓰라고 할 때 바로 이것을 썼습니다. 9장과 22장과 26장에 바울의 회심 사건이 나오는데 그 차이점이 뭔가를 썼습니다. 이때는 넘어지고, 이때는 소리를 듣고, 바울이 눈이 멀었고, 이때는 바울만 보았고, 또 바울만 들었고... 등등을 썼는데, 그래서 A를 못 받았습니다. 그게 핵심이 아닌데 핵심이 아닌 것을 가지고 써서 B를 받았습니다.

 

여기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바울을 향한 부르심입니다. 앞의 두 간증에 비해서 이 회심 간증은 결론이 나오지 않고, 바울이 사도로서의 사명을 주님으로부터 위임받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썼으면 제가 A를 받았을 텐데, 그 당시에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15-16)

 

바로 앞 14절에서 회심 전의 청년 사울은 기독교인들을 핍박한 것이 자신을 박해한 것이라는 이상한 하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15절에 바울은 도대체 누구십니까?”라고 물으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라는 14절의 말씀을 확증시켜주는 청천벽력 같이 엄청난 충격적인 말씀을 듣게 됩니다. 이로써 사울이 기독교인들을 핍박한 것은 자기가 그토록 열심히 섬기려던 하나님을 핍박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나사렛 도당 이단이 아니라 성자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는 말이고, 그리스도인들을 고발하고 잡아가두고 처형했던 것은 이전에 자신이 했던 잘못처럼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자리에 있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향해서도 지금 당신들에게 고발당하여 옥살이하고 있는 나 바울은 누구입니까? 바로 그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런 사명을 주신 하나님의 종이며 보냄을 받은 사람, 즉 사도입니다.’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때 너무 두려워서 땅에 엎드러져 있는데 주님께서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하시는 명령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는 말씀이 구약에서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부르실 때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똑같습니다.

 

특히 대표적으로 에스겔을 부르실 때 그러셨습니다. 에스겔 21절에 보면,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한 준비로서 엎어져 있지 말고 일어나서 들으라는 것입니다. 똑같은 표현을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쓰셨습니다.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그러니까 구약에서 하나님이 에스겔을 예언자로 부르신 것처럼, 지금 여기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청년 사울을 사도로 부르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사명을 감당하는 사도로서 부르심을 받았는데,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종 사도로서 위임을 받은 것입니다.

 

보통 소명사명을 구분 없이 쓰기도 하는데, 크게 상관은 없습니다. 하지만 정확히 구분을 하면 소명은 calling(부르심)이고 사명은 mission(삶에서 이루어야 할 목적)입니다. 그런데 소명(부르심)은 반드시 사명을 동반합니다. 부르셨는데 사명을 안 주시는 경우는 없습니다. 바울에게 주신 사명이 뭔가 하면, 16절에 나오는 것처럼, ‘성자 하나님을 본 일과 앞으로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보이시고 명하실 환상을 증언하는 증인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이라는 것은, 9장에서 회심 이후, 예를 들어 189절 이하에서 한밤중 환상 기운데 나타나셔서 두려워하지 말고 고린도에서 16개월을 머물며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라는 지시, 2217절 이하에서는 성전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환상으로 나타나 예루살렘에서 네가 이방인의 사도가 되라는 것, 2511절에서 보듯 한밤중에 바울 곁에 서셔서 로마에 가서도 나의 일을 증언하리라하고 말씀하신 것, 이것들이 다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을 말합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삶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종과 증인으로 심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한국 초기 기독교에서 처음 복음을 전할 때의 핵심 메시지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지금 예수님을 믿으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천당에 가기 위함입니까? 예수 믿고 천당 가는 게 나의 신앙생활의 목적이라면,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왜 안 죽었습니까? 그것이 목적이면 예수 믿는 순간에 바로 죽어서 천국에 갔어야 합니다. 그런데 안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니까 잘못된 게 아닙니까? 그러니까 예수 믿는 목적이 천당 가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어떤 장소라고 생각할 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내가 예수 믿고 죽어서 천국 가는 게 예수 믿는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직 안 죽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물론 예수를 믿으면 이 세상을 떠날 때 분명히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아직 안 죽고 이 땅에 살아 있다는 것은, 이 땅에서 천국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천국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 자녀로 삼아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들어주시는 목적은 단순히 예수 믿고 죽어서 천국 가는 게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동안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나의 사명이 뭔지 알고 계십니까? 지금 나를 안 죽게 하시고, 천국으로 안 데려가시고 여기에 살려두신 목적이 뭔지 알고 계십니까? 만약 안다면 그것을 이루고 계십니까? 그것을 모르고 있다면 큰 문제입니다. 분명히 나를 지금 살려두신 목적이 있어서 우리가 아직 살고 있는 것인데, 그것을 모른 채 아무렇게나 살고 있다면 굉장한 문제가 아닙니까?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달란트의 비유에 세 명의 종이 나옵니다. 주인이 한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 다른 종에게는 두 달란트, 또 다른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것은 차별이 아니라 각자의 능력에 맞게 준 것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주인이 돌아왔습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종들은 주인이 떠나자마자 바로 나가서 열심히 비즈니스를 하여 두 배로 이익을 남겨 왔습니다. 그래서 각각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더 남겨서, 열 개와 네 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땅에 숨겨 놓고 있다가, 주인이 돌아온 다음에 무서워서 숨겨 놓았다가 도로 가져왔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주인은 사명을 주고 간 것입니다. ‘너희에게 이것을 맡기니까 이것을 가지고 나를 위해서 한 번 일해 봐라.’ 만약 다섯 개 받은 종과 두 개 받은 종이 나가서 열심히 일했지만 일이 잘 안 풀리고 경기가 안 좋아서 다 잃어버렸더라도 주인은 칭찬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네가 나를 위해 열심히 일했으니 나는 좋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개 받은 종은 무엇을 했습니까? 주인을 위해서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그럼 그 오랜 시간 동안 뭘 했습니까? 자기 일만 한 겁니다. 주인이 , 이제 가서 이것을 갖고 나의 일을 해라.’ 하며 사명을 주고 떠났는데 땅에 묻어놓고 뭘 했습니까? 자기 일만 했습니다. 당시 종에게는 자기 일이 없습니다. 주인의 일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망각하고 자기 일을 하다가 주인이 돌아올 때 다시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앞의 두 종은 착하고 신실한 종이고, 한 개 받은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인 것입니다. 자기가 종으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언젠가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설 텐데, 둘 중 하나입니다. 착하고 신실한 종이 되는가, 아니면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는가? 지금 하나님이 아직도 우리를 살려두신 이유, 지금도 우리가 살아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을 하고 있는가에 따라 착하고 신실한 종이 되는지,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는지가 갈라집니다. 이것은 굉장히 심각한 이야기입니다. 과연 나에게 주신 사명대로 내가 살고 있는지 빨리 점검해야 합니다. 그 사명이 뭔지를 먼저 찾고, 사명을 발견해서 그것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명은 고정되지 않습니다. 이럴 때 이 사명을 주셔서 열심히 하면 또 다른 사명을 주십니다. 또 열심히 하면 또 다른 사명을 주십니다. 작은 것에 충성한 사람에게 큰 것을 맡긴다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상관없이 묻어 두고 가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게 되면, 결국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서는 날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착하고 신실한 종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래서 지금 나를 아직도 살려두신 목적을 빨리 찾아서 지금 뭘 하기를 원하시는지, 그 사명을 다하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사도로서의 사명대로 살았던 바울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17-18)

 

사도 바울에게 주어진 사명의 두 번째는 17절에 나온 것처럼, 유대인들은 물론이고 이방인의 사도로 보내질 것이란 사실입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라고 우리가 보통 알고 있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계속 보았듯이, 어디를 가든 그는 먼저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서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도 물론 잊지 않고 나가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전했고, 유대인들이 거부할 때 또 이방인들에게 전했습니다.

 

게다가 18절에 의하면, 바울은 자신이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보냄을 받아, 그 양쪽 모두의 눈을 뜨게 해서 지금 있는 어둠의 세계에서, 시탄의 세계에서, 죄인들의 무리에서 이제 예수를 믿어 빛의 나라, 하나님 나라, 죄 사함을 받은 무리, 거룩하게 된 무리, 즉 성도가 되도록 하는 사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7-18절의 말은 우리에게는 익숙한 말이라 자연스럽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 그 당시 거기 있던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이 들을 때는 황당한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을 이방인들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구하겠다고 하셨다니, 그렇다면 그들이 느끼는 것은 그럼 우리도 저 이방인들처럼 악한 사람들이란 말인가?’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427-28절에서 이미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라고 예루살렘 교회가 함께 기도할 때, ‘이방인과 이스라엘이 합세하여 예수님을 거슬렀다고 이미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이 여기서 다른 방식으로 바울에 의해 다시 한 번 강조되는 것입니다.

 

물론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이것을 여전히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뿐 아니라 이것은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말이었고, ‘바울은 정말 이단의 괴수가 맞다.’라고 그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이전에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생각했던 것과 똑같이 그들도 생각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방인들을 거룩한 무리 즉 성도라고 하고, 이방인을 이스라엘 백성처럼 되게 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기업을 같이 상속받아 잇게 한다는 것은 유대인들로서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의 말의 핵심은,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서 이전에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그렇게 박해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예수님을 만나 3일 동안 눈이 멀었는데, 진짜 눈이 먼 것뿐 아니라 그때까지는 영적 맹인의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난 후 잠시 그 표시로서 눈이 멀었다가 다시 은혜로 뜨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보냄을 받아서 자기처럼 무지하고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여 영적 맹인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 자기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둠의 세상 즉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이라고 여기서 선포하고 있습니다구약의 여러 선지자들도 이런 사명을 받았고, 특히 에스겔 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사명을 받은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뿐 아니라 이사야 42장 말씀까지 언급하며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맹인들을 그들이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이 일지 못하는 지름길로 인도하며, 임혹이 그 앞에서 광명이 되게 하며, 굽은 데를 곧게 할 것이라. 내가 이 일을 행하여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니” (42:16)

 

바로 이 말씀이 18절에서 바울의 말의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사야서에서도 마지막 부분은 이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눈이 먼 사람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하시겠다는 것이 최종 목적으로 제시되는데, 18절의 표현으로는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는것이 이사야 42장 말씀과 통한다는 바울의 설명입니다.

 

 

2.   아그립바 앞에서 선포한 복음 (19~23)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 (19-20)

 

바울은 자기가 겪은 일이 단순히 어떤 개인의 일이 아니라 하늘에서 보이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것을 자신은 거스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대로 자신이 주님을 만난 다메섹은 물론, 18절의 말씀처럼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의 이방인들에게까지 주님의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으로 볼 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에는 먼저 회개가 필요합니다. 또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는 변화된 삶으로 증명이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내가 정말 예수님을 믿는지 안 믿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물론 믿으면 마음으로 어느 정도 압니다. ‘내가 정말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구나.’ 하고 느끼며 감사하고, 기도에 응답해주시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그것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사랑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랑이 구원의 증거입니다. 여러분, 내 삶에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이 있습니까? 물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입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입었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것, 심지어 원수도 사랑하는 것, 특히 믿는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이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증거가 된다고,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에서 설명합니다. 바로 그런 것이 회개에 합당한 일입니다.

 

여러분, 내가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와 주인으로 영접했고 정말 믿었다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회개에 합당한 일이 내 삶 속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것이 변화된 삶이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삶입니다.

 

내가 예수 믿는다고 하는데 사랑이 없다면, 전혀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기만 하고 찬바람이 쌩쌩 분다면, 의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정말 예수를 믿는 것인가?’ 이 안에 예수가 있는 사람은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사랑 그 자체이신데 어떻게 찬바람이 쌩쌩 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예배 참석이나 겉으로 보이는 종교생활이 아니라, 정말 사랑이 실천되는 삶이야말로 예수를 믿는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런데 이런 복음을 바울이 전했을 때, 사람들이 그것을 듣고 좋아했을까요?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21-22)


하나님의 뜻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대로 전하는 종은 사실 환영을 받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오히려 없애려고 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지금도 선교지에서 선교사님들이 생명의 복음을 전하지만, 거부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님들을 잡아서 핍박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세례 요한도 헤롯에게 잡혀 죽임을 당했고, 예수님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지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동일한 복음을 전하는 바울도 그 결과 유대인들이 집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주님께서 미리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세상이 주님을 모르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과 사도들도 세상이 예수님을 죽인 것처럼 죽이고 핍박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고, 안전과 축복만 선포해주는 거짓 선지자들을 따르는 것이 성경에서 예언된 그대로입니다.

 

우리가 받은 사명대로 살 때 사실 결코 편안한 길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명대로 살면 일이 술술 풀리고 삶이 만사형통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주님의 뜻대로 살고 주신 사명대로 순종해서 나아가는데 일이 꼬입니다. 이상한 공격도 들어오고, 오해도 받고, 억울한 일도 당하고, 육체적인 박해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명이 잘못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복음을 순수하게 전할 때는 반대에 부딪칠 수 있다는 것을 미리 말씀하셨고, 바울의 삶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23)

 

결국 부활이 핵심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냥 죽고 끝났다면 지금의 우리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냥 죽으신 게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나님 우편에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부활 전에 반드시 고난과 죽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가운데 먼저 다시 살아나셔서, 고린도전서 15(부활장)의 표현으로는 잠자는 지들의 첫 열매가 되셔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모두에게 이 진리의 빛이 옳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을 따라 바울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며 나아간 것입니다.

 

바울뿐 아니라 다른 모든 사도들, 그리고 초대교회 즉 1세기 당시 교회의 핵심 메시지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예수는 부활하셨다. 우리가 그 증인이다.’ 단순히 예수 천당이 아닙니다. ‘예수는 죽으셨지만 부활하셨고 우리가 보았다. 우리가 증인이다.’ 이것이 그들의 메시지의 핵심이었습니다. 부활이 핵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들도 마지막 날 결국 부활할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사명을 다하다가 끔찍한 처형을 당하고 죽임을 당해도 그렇게 순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가는 말]

 

지난주는 다 아시다시피 성탄절이었습니다. 우리는 성탄절 이브에 모여서 아주 귀한 축제의 시간, 참 아름다운 시간을 가졌고, 하나님이 주신 재능과 은사를 사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선물을 드렸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에게 주신 재능을 드리면서 주님께 영광을 돌려서 참 감사했습니다.

 

부활절이나 성탄절이 되면 티브이에서 크리스천 영화들을 많이 하는데, 이번에 보니까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하는 복면가왕프로그램을 따와서 비슷한 것이나 Fox 방송국에서 방영했지,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 영화 3(왕의 귀환 The Return of the King)을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너무 감동적이어서 볼 때마다 눈물이 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대부분 이 영화를 보셨을 줄 압니다. 원래 소설을 기반으로 한 그 영화에 여러 족속들이 나오는데, 그 중 호빗(Hobbits)이라는 난장이족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의 반 정도의 크기인 난장이족인데, 그 호빗의 젊은이 네 사람이 마법의 반지를 깨뜨리는 팀에 들어가 같이 갑니다.

 

그들 중 프로도(Frodo)라는 주인공이 그 반지를 맡아서 악의 대장 사우론(Sauron)이 버티고 있는 모르도르(Mordor)의 불 속에 집어넣어 파괴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가는데, 중간에 잡히기도 하고, 몸도 다치고, 큰 거미에게 거의 잡아먹힐 뻔도 하고, 여러 가지 엄청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사이 친구와의 갈등도 있고, 친구를 오해해서 돌려보내기도 하고, 골룸(Gollum)이라는 괴물에 의해 속임을 당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습니다. 다른 장면에서는 그 팀에 있는 인간들이 악한 세력과 전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결국은 난장이족인 호빗의 프로도가 마침내 불 속에 반지를 집어넣어 사명을 다하게 됩니다. 그래서 반지가 파괴되고 악의 세력이 다 무너지며 이제는 평화가 옵니다.

 

그 후 다시 인간 왕이 나오게 되는데, 아라곤(Aragorn)이라는 다른 주인공이 왕이 됩니다. 그가 왕이 되는 장면에서 모든 백성들이 축하하며 그에게 고개 숙여 경배를 합니다. 그의 약혼녀가 와서 결혼도 합니다. 거기에 네 명의 난장이족 호빗들도 서 있습니다. 이제 왕에게 절하려고 합니다. 그랬을 때 왕이 이렇게 말합니다. “, , ! 너희들은 이제 누구에게도 절하지 말라.” 그러면서 왕과 모든 백성들이 그 네 명의 난장이족에게 절을 합니다.

 

저는 그 장면을 여러 번 봤는데도 볼 때마다 눈물이 납니다. 이 장면이 바로 우리가 천국에서 받을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별 것 아니고 남들이 알아주는 사람도 아니지만, 우리에게 맡겨주신 그 사명을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했을 때, 그리고 천국에 갔을 때, 놀랍게도 우리를 향해 잘했다고 하시며 신실한 종이라고 하시는 그 칭찬을 우리는 듣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날을 바라보며 이 해를 마감하고, 이제 새로 오는 2020년에는 주님이 주신 사명을 위해 최선을 다해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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