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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2월 2일 주일예배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88 ✦
“난파와 구조”
(사도행전 27장 27~44절)
[들어가는 말]
교회에서 많이 불리는 노래 가운데 <축복의 통로>라는 곡이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축복의 통로
당신을 통하여서 열방이 주께 돌아오게 되리 (주께 예배하게 되리)
그런데 오래 전 이 곡을 가만히 보다가 ‘우리가 축복의 통로로 살아야 하는데 자칫 잘못하면 저주의 통로가 될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는 저주의 통로, 당신을 통하여서 열방이 멸망하게 되리’라고 되면 완전히 ‘저주의 통로’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은 이 세상을 향해 바로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나 때문에 이 세상이 살아나야 되지, 나는 살고 세상은 다 죽어버리면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 때문에 세상이 복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교회와 신자들이 세상의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은 아주 심합니다. 믿는 사람들의 안 좋은 모습이 많이 보이고 또 미디어에서는 그런 것만 많이 부각시키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런 모습을 보고 환멸을 느끼며 ‘저런 것이 교회라면 나가지 않겠다. 저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나가지 않겠다.’라고 거부하는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를 다니던 사람들까지도 이제는 교회를 ‘안나가’라고 하고, 그것을 거꾸로 써서 ‘가나안’ 교인이라는 이름까지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불러주신 이유는 우리만 구원받고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며 편안하게 살다가 천국에 오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아직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그들도 믿고 구원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천국을 누리며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혹시라도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교회에 나오기를 거부하고 주님을 거부하다가 멸망하게 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삶입니까? 그런데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주님을 만나고 살아난다면 그것은 정말 복된 삶입니다. 나 한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거기 있던 사람들이 다 구원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다면, 그 삶이야말로 축복의 통로요 복의 근원 된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이 바로 그런 삶이었습니다. 바울 한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와 함께 한 많은 사람들이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유라굴로 같은 광풍과 높은 파도 속에서 살아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인데, 이 모든 것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한 하나님의 소위 ‘빅 픽처(Big Picture)’를 이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과 함께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그가 세상의 복이 된 것처럼, 바울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과 함께 할 때 거기 같이 있는 사람들은 놀라운 복을 함께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바로 이런 하늘 복을 받고 또 주변에 나눠주는 삶, 내가 그 자리에 있기 때문에 주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을 경험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 확인하게 됩니다.
1. 모두가 함께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조언 (27~32절)
“열나흘째 되는 날 밤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서 이리 저리 쫓겨가다가 자정쯤 되어 사공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워지는 줄을 짐작하고, 물을 재어 보니 스무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라” (27-28절)
배가 그레데 섬의 미항을 떠난 지 2주가 지나서 14일째 되던 날 밤 거친 파도와 바람에 배가 계속 아드리아 해에서 이리저리 밀려다녔습니다. 그때 경험 많은 선원들은 육지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되었습니다.
배가 표류하던 지역으로 27절이 말하는 ‘아드리아 바다’는, 현재의 이탈리아와 발칸반도 사이의 바다인 아드리아 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 반도 남서쪽에 붙어 있는 시칠리아(Sicily) 섬과 그리스 남쪽에 위치한 그레데(크레타) 섬 사이 지역을 당시에는 ‘아드리아 바다’라고 했습니다. 지금의 지중해에서 이오니아 해 남부 지역을 말하는 표현입니다.
노련한 선원들은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파도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해안가 암벽 같은 것에 부딪혀 부서지는 소리를 듣고 육지에 가까운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물의 깊이를 재어보니 처음에는 스무 길이었고, 조금 후 다시 재어보니까 열다섯 길이었습니다.
스무 길이라는 것은, NIV 영어성경 각주를 보면, 약 38미터라고 나와 있습니다. 조금 후 다시 재어보니 열다섯 길 즉 약 27미터였는데, 바다가 급속히 얕아지고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배가 근처의 암초에 부딪혀 파선될 기능성이 높이지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암초에 걸릴까 하여 고물로 닻 넷을 내리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니라” (29절)
지금 사도 바울이 겪고 있는 이 풍랑 사건을 사도행전에서 누가가 아주 구체적으로 기록해서, 이것이 틀림없는 사실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배가 계속 육지 쪽으로 밀려가며 암초에 부딪쳐 파선되지 않도록 네 개의 닻을 고물 쪽에 내려 배를 정지시키는 안전조치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날이 밝기를 고대합니다.
평상시에는 보통 배의 앞쪽인 이물에 닻을 내리는데, 이때는 뒤쪽인 고물에 닻을 네 개나 내렸다는 것은, 이런 풍랑 속에서 배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오랜 경험에서 나온 뱃사람들의 전문적인 조치로 보입니다.
‘고대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간절히 기도하고 소원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29절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동시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때로는 이처럼 배가 당장 파선하고 난파할 위험한 상황인데도, 어떤 신앙인은 너무 뜨거워서(?) 기도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행동가는 ‘지금 기도가 중요하냐? 빨리 뭔가를 해야 한다.’라고 하며 뭔가를 하는 데에 치중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바른 믿음의 자세는, 인간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는 동시에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며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6세기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도 “모든 것이 나에게 달린 것처럼 최선을 다해 일하고, 또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린 것처럼 생명을 걸고 기도하라.” 하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바른 자세입니다.
그러나 여기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거친 바다, 폭풍이 부는 바다에서 밤이 지나기를 배 안에서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지금 쉬지 않고 파도가 몰아치며 계속 바람이 붑니다. 광풍이 없어진 게 아닙니다. 유라굴로 광풍은 계속 불고 있고 높은 파도가 몰려오고 있는데, 그 상황에서 이들은 굉장히 불안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뭔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확실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찾고 싶어서 그들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내리는 체하고 거룻배를 바다에 내려 놓거늘” (30절)
사공들은 고물(뒷부분) 쪽에 닻을 네 개나 내려놓았는데, 이물(앞부분)에는 닻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뱃머리에서 닻을 내리는 척하면서 선원들 중 일부가 상륙용 거룻배, 즉 지난 16절에서 바람에 부딪혀 깨질까 봐 끌어올려서 꽁꽁 묶어놓았던 거룻배를 바다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거룻배’가 단수로 되어 있는 것을 봐서는 다른 거룻배들은 깨졌든지 아니면 이때 한 대를 슬쩍 내린 것입니다.
지금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자기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인데, 땅이 가까우니까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이 자기들만 살겠다고 생각하며 작은 배를 타고 육지로 도망치려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이런 행동은, 첫째로, 그냥 보아도 ‘나만 살겠다’고 하는 아주 이기적인 행위입니다. 둘째로, 이것은 선원으로서의 직무유기입니다. 이들은 다 돈 받고 일한 사람들인데 도망을 가려 하니까 말이 안 됩니다. 셋째로는, 구조 전문가들이 볼 때 이런 상황에는 그냥 배에 남아 있는 것이 더 낫지, 작은 배를 타고 폭풍 속에 나가면 더 위험하다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자기들은 살겠다고 나가려 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죽는 길로 나아가는, 안전 불감증에 걸린 자살행위와 같습니다.
몇 년 전 세월호에 여러 학생들을 비롯해서 승객들 수백 명이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만 살겠다고 구명정에 먼저 올라탄 선장이 크게 지탄을 받고 재판도 받았습니다. 위험 앞에 선 죄인들은 하나님이 구해주시는 손길보다는, 자기들 생각에 이렇게 하면 된다는 길을 찾아 나서려 합니다. 그러나 이런 위태로운 상황에서 바울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구원의 길을 제시해줍니다.
“바울이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이에 군인들이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라” (31-32절)
바울이 이것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눈치 채고, 뱃사람들이 배에 있어야 우리가 다 살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미 22절에서 바울은 일어나서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라고 이야기한바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은 같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도 같이 있어야 살 수 있다는 것을 다시 말합니다.
놀랍게도 그 말을 들은 백부장은 병사들에게 명령하여 거룻배를 내리던 밧줄을 끊어버립니다. 그래서 선원들이 배 밖으로 나가 자신들의 방법으로 도망갈 길을 근본적으로 막아버렸습니다. 바울과 로마 군인들과 선원들이 살 수 있는 길도 이렇게 배에서 벗어나지 않고 배 안에 머무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살 길이지, 이때 도망가면 작은 배가 금방 뒤집어지고 오히려 죽음의 위험이 더 커질 뿐입니다.
우리도 가끔 신앙생활을 하다가 ‘지금 내가 이럴 때가 아니다. 교회에 나올 때가 아니라 이것을 빨리 처리해야 한다.’ 하며 급하게 나갈 때가 있습니다. ‘지금 당장 닥친 이 문제를 해결해야 살 수 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대부분의 경우 그럴 때 보면 그것이 살 길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라고 우리는 고백하는데, 나름대로 내가 방법을 찾아 나가고 당장은 그게 살 길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게 더 위험한 길인 경우가 인생 가운데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내 삶에 벌어질지라도, 내 삶에 이런 유라굴로 같은 광풍의 위기 상황이 닥치더라도,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신앙 공동체를 떠나지 않겠다.’라는 것을 미리 결단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미리 결단하지 않으면 위기 상황이 올 때 자꾸 자기 생각에 좋아 보이는 데로 가다가 오히려 위험해지는 일이 우리에게 벌어지게 됩니다.
2. 음식을 먹으라는 권면 (33~38절)
바울이 보인 믿음의 길은 단순히 배 안에 가만히 머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놀라운 믿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믿음은 항상 행동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날이 새어 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음식 먹기를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나흘인즉, 음식 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하고” (33-34절)
이때는 “날이 새어 가매”, 즉 아직 새벽 동이 트기 전 어두울 때였습니다. 바울은 22절에 나온 대로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불안함과 앞날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한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입니다. 그것은 먼저 사람들에게 음식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이 풍랑이 지금 얼마나 더 갈지도 모르고 또 내일 일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이때 한가하게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까? 지금 걱정근심으로 가득한 보통 사람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오히려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아끼고 비축해놓으며 버텨야 한다고 하는 것이 정상일 텐데, 그러니까 그렇게 마음 편히 먹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먹는 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다. 먹어야 산다.’라고 강조합니다.
거의 2주나 안 먹었으니까 얼마나 힘이 없겠습니까? 장사라도 2주 동안 안 먹었다면 굉장히 힘이 빠진 상태인데, 거기에다 풍랑과 싸워 나아가야 하는 상황이니, 지금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태였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때 ‘먹어라. 먹고 힘을 내라.’고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먹고 힘을 내야 헤엄을 쳐서 살 수 있습니다.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35절)
목사님들 중에 성찬식을 너무 좋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매주 성찬식을 하는데, 어떤 교회들도 매주 성찬식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찬식을 굉장히 좋아하는 학자들이 이것을 보고 ‘이거 봐라. 이런 위기 상황에서도 성찬식을 행했다.’라고 이야기하는데, 사실 그것은 무리한 해석입니다.
여기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안 믿는 사람들입니다. 비신자들이고 이교도들인데 그들과 무슨 성찬식을 여기서 하겠습니까? 지금 바람이 불고 배가 이리저리 계속 흔들리는 상황에서 무슨 성찬식을 하겠습니까? 그것은 무리한 성경읽기입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는 일단 먹고 힘을 내야 사니까, 구원의 과정으로 지금 먹으라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하는 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황량한 들판 가운데 어린아이로부터 얻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를 가져다 축사하고 떼어주셨을 때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었던 것과 더 의미가 통하는 상황입니다. 그 들판에서 그들은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데서 적은 것으로 엄청난 수의 사람들을 먹였습니다. 남자만 5천 명이니까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치면 최소 만 5천 명에서 2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그 적은 양으로 먹고도 남는 놀라운 기적을 그들이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적을 일으키시기 전에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감사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이 적은 것으로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이실 하나님의 기적을 바라보며 감사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이때 바울도 성찬식의 의미가 아니라, 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며 ‘이 상황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선포하면서 같이 먹은 것입니다.
“그들도 다 안심하고 받아먹으니,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명이더라” (36-37절)
이제 그리스도의 종이고 이방의 사도인 바울을 통해 그들은 엄청난 풍랑이 이는 바다라는 위기 상황 속에서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누가가 숫자를 세었던 것 같습니다. 이 상황에서 숫자를 셌다는 것도 참 놀랍습니다. 그 전까지 정확히 몇 명인지 몰랐는데, 같이 먹으면서 세어보니까 276명이었던 겁니다. 자기들까지 다 합쳐서 276명이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고 빵을 떼어서 먹음으로, 약속해주신 하나님의 구원을 앞으로 경험하고 곧 하나님이 주실 평안을 맛보게 될 텐데 그것이 조금 후 미래에 일어날 일이지만 그것을 지금으로 당겨 와서 누리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이 바로 그런 겁니다. 지금 일이 안 풀리고, 복잡하고, 어렵고, 진로의 문제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 우리는 걱정하고 염려하고 근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불안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믿음이란 무엇인가? 이제 곧 주실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곧 평안과 기쁨을 주시고 인도해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나아가는데, 그 약속이 언제 이루어질지도 모르는 막연한 약속이 아니라, 그 미래의 약속을 지금으로 끌고 와서 지금 평안을 누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허황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말씀을 믿고, 지금은 어렵지만 이제 곧 분명히 선한 길로 인도해주실 하나님 때문에, 상황이 어려운 것은 똑같아도 평안을 지금 누릴 수 있는 것, 미래에 누릴 평안을 지금 누릴 수 있는 것, 바로 그것이 믿음생활입니다.
“배부르게 먹고 밀을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하였더니” (38절)
여기서 사도 바울이 갑자기 빵을 먹으면서 거기에 무슨 능력을 불어넣어 살 수 있도록 해준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옛날에 그의 손수건에만 닿아도 사람들이 낫곤 했으니까, 여기서도 떡을 나누어주며 ‘능력을 받아라’라고 하여 능력을 받아 헤엄을 치며 나아간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냥 평범하게 같이 먹은 식사입니다. 간단히 빨리 먹었습니다.
이 상황에 제대로 된 식사를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급하게 있는 대로 먹은 겁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축사 즉 감사기도를 드렸다는 겁니다. 이 위기 속에서도 음식을 주시는 하나님, 그리고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시는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같이 있던 사람들이 보면서 ‘아니, 이 상황에서 무슨 감사기도를 하는가?’ 하며 놀라지 않았겠습니까? 이 상황은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상황인데, 너무 평안하게 하나님 앞에 감사기도를 드리는 겁니다. 특히 ‘구원해주실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했을 때 거기 있던 사람들은 큰 감동을 받았음에 틀림없습니다. ‘어떻게 저 사람은 이럴 수가 있는가?’ 그래서 사람들이 용기를 얻어 안심했습니다. 바울이 기도하는 모습과 먹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들도 안심하고 음식을 먹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삶은 이렇게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어서, 인생의 풍랑 속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이고, 풍랑 이는 세상 속에서 교회가 보여줘야 할 믿음의 삶의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로부터 시작된 믿음의 행동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보통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없는 놀라운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남아 있던 밀(곡식)을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했다는 점입니다(38).
지금 내일 일을 모르는 상황인데 앞으로 어떻게 될지 얼마나 불안한 상황입니까? 그래서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사실 사람들이 먹을 것과 쓸 것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붙들고 있습니다. 쌓아 놓으려고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절대 남에게 주면 안 되고 꽉 붙들고 있어야 된다.’라는 것이 보통 사는 방식 아닙니까? 그것이 믿음 없는 보통 사람들의 본능입니다.
그런데 자기들의 미래를 붙들어줄 수 있고 소망이 되는 식량을 버린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이 배가 로마의 식량 운송선으로 로마에 곡식을 가져가는 배인데, 이 배의 사명은 북아프리카의 곡물을 로마까지 안전하게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명을 저버리고 모두 다 바다에 버린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이것은 파도에 배가 마구 흔들리다가 배가 무거워서 바닥이 닿아 깨지거나 난파를 당하지 않기 위한 방법이었지만, 사실은 곡물을 버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모험을 감행하는 일이었습니다. 무사히 로마로 간다고 해도, 다 버렸으니까 그 처벌을 어떻게 면하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살기 위해서는 자기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던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생명보다 귀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란 것,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모험을 행하게 합니다. 모험 없이 안전하고 편안하게 안주하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때로는 모험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무턱대고 하라는 게 아니라, 말씀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하는 것입니다.
리더십에서도 리더(leader)를 ‘모험 감행자’(Risk Taker)라고 부릅니다. 위험을 감수하고 나아가는 사람이 리더입니다. 리더는 어떤 상황에서 이렇게 해야 하나 저렇게 해야 하나, 모험을 걸어야 하는 겁니다.
부활은 십자가에서 죽어야 가능한 것이고, 지금 풍랑 속에서 사는 길은 무거운 짐을 버려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야 배가 가벼워져서 부딪히지 않게 됩니다. 이런 것이 믿음의 행위이고, 믿음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들은 이제 바울의 말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바울의 말을 안 믿었는데, 이제는 믿고서 버리고 나아가는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게 될 때 삶의 방식이 바뀝니다. 삶에서 중요하게 여기던 것들이 바뀝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었다고 하는데도 삶에서 중요하게 여기던 것이 전혀 바뀌지 않았다면, 가치가 바뀌지 않았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일입니다. 우리가 한국에 살 때의 가치와 여기 미국에 살 때의 가치가 다릅니다. 한국에서 중요하게 여기던 것과 다른 것이 여기서는 중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살면서도 한국에서 중요한 것만 붙들고 산다면 이상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예수님의 이 말씀은,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지든 오늘 맘대로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루하루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복이 있고 하나님께서 오늘 행하라고 하시는 사명이 있습니다. 오늘 주신 복을 누리고, 또 오늘 주신 사명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아, 내일 어떻게 해야 되나?’ 하는 걱정에 휩싸여서 오늘 주신 복을 누리지도 못하고 오늘 하라고 주신 사명을 하지도 못하고 그러지 말고, 오늘 주신 복을 누리고 오늘 하라고 주신 사명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내일이 되면 내일 주신 복과 사명대로 살면 되는 겁니다.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 중에 ‘소확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을 말합니다. 엄청난 게 아니더라도 매일매일 주신 복을 누리고 또 매일 주신 사명을 행하는 삶이야말로, 작지만 분명한 행복의 길입니다.
3. 부서진 배에서 살아난 사람들 (39~44절)
사도 바울의 인도에 따라 배부르게 먹고 무거운 짐들을 버려 가볍게 한 결과, 엄청난 풍랑이 일고 있는 어두운 바다에 한줄기 빛이 비치기 시작합니다.
“날이 새매 어느 땅인지 알지 못하나 경사진 해안으로 된 항만이 눈에 띄거늘 배를 거기에 들여다 댈 수 있는가 의논한 후, 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는 동시에 키를 풀어 늦추고 돛을 달고 바람에 맞추어 해안을 향하여 들어가다가” (39-40절)
날이 새면서 경사진 해안에 배가 가까이 밀려갔습니다. 이렇게 보니까 어딘지는 몰라도 땅이 있는 것을 봅니다. 사실은 대륙이 아니라 섬이었습니다. 몰타 섬이었습니다. 그들은 배를 그곳까지 들여가 정박할 수 있는지 의논하며 두 번째 모험을 감행하기로 결정합니다.
40절이 무슨 말인가 하면, 배 뒤쪽에 닻을 내렸는데, 바람이 막 불어서 배가 너무 빨리 밀려가 부딪쳐 깨질 수 있으니까, 닻을 내려 조금이라도 천천히 가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내린 줄이 팽팽하게 되면 그것을 끊고 또 다른 닻을 다시 내리면서 땅을 향해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고고학자들이 이 지역을 봤을 때 닻이 끊어진 것을 발견했고, 맨 끝에는 파선한 배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있는 배가 땅으로 가는데 정박을 하지 못하고 다음 순간 배가 부서지고 맙니다.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을 만나 배를 걸매 이물은 부딪쳐 움직일 수 없이 붙고 고물은 큰 물결에 깨어져 가니” (41절)
닻을 끊어서 바다에 버리고 돛을 펼쳐서 들어가다가 두 물살이 만나서 급해지는 곳에 이르러 배를 바닥에 걸리게 하여 정박시키는 고도의 기술을 구시하려고 시도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다 속의 모래 언덕에 앞이 걸리고 뒤가 파도에 깨진 겁니다. 이것은 비행기가 비상시에 불시착하여 동체착륙을 하는 것과 같은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결국 이것을 통해 배가 깨지고 말았다는 겁니다.
이 장면을 보면, 마치 현장을 TV로 생중계하듯 긴장감 있게 그리고 생생하게 묘시하며 증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것의 역사성과 진실성이 너무나 실제적으로 와 닿습니다. 그런데 이제 모두 살 수 있게 되었지만,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합니다.
“군인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 하여 그들을 죽이는 것이 좋다 하였으나” (42절)
로마 군인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갈까 하여 죽이자고 합니다. 자기들끼리 의논한 겁니다. 왜냐하면 죄수를 맡았는데 죄수가 도망가면 자기가 죽어야 합니다. 16장에서도 빌립보 감옥의 간수가 지진이 나서 옥문이 다 열려 죄수들이 다 도망간 줄 알고 자살하려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다 감당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똑같습니다. 죄수가 도망가면 자기가 죽어야 하니까 그냥 죽이자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그들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조되니라” (43-44절)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고 군인들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라고 한 것입니다. 백부장은 바울이 죄수로 있지만 엄청나고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았고, 또 이 사건을 겪으면서 더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살리기 위해 죄수들을 죽이자는 의견을 막습니다.
바울이 아니었으면 이 죄수들은 다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때문에 죄수들이 살았습니다. 물론 이 죄수들은 로마로 가면 콜로세움에서 싸우다 죽을 사람들이긴 하지만, 이때 죄수들뿐 아니라 바다에 빠져서 죽을 수밖에 없던 사람들이 바울 때문에 다 살아난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인데, 단순히 기적이 일어났다는 차원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신실한 제자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인해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살아나는 축복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존재하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내 주변에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족도 있고, 친지도 있고, 친구도 있고, 이웃도 있고, 교회 지체들도 있고 아주 많습니다. 자, 나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복을 받습니까, 아니면 나 한 사람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고통을 겪습니까?
어떤 사람만 탁 나타나면 어두웠던 분위기가 밝아지고 절망의 분위기가 소망으로 바뀝니다. 그런 사람이 진짜 거룩한 사람이고 주님을 닮아가는 신실한 제자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탁 나타나면 그 전에는 분위기가 좋았는데 다들 쉬쉬 하고 조심하며, 말하기를 꺼려하면서 분위기가 차가워지고 어두워집니다. 그것은 가짜 거룩입니다.
그래서 제가 걱정(?)입니다. 왜냐하면 다들 잘 있다가도 제가 가면 조용해지고, 밥 먹을 때도 저와 같이 앉으려 하지 않습니다. 총목자모임 때도 보면 제 옆자리는 늘 비워놓고서 늦게 온 사람에게 앉도록 ‘벌을 내리는 자리’가 됩니다. 그래서 ‘내가 거룩하지 않은 사람이구나’ 하고 느끼게 됩니다. 심지어 ‘다이어트를 원하면 목사와 같이 밥을 먹어라.’라는 말도 있습니다. 밥맛이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물론 이것은 농담이지만, 우리는 항상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나타났을 때 밝아지는 분위기가 되는가, 아니면 나 때문에 어두워지는 분위기가 되는가?
백부장은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은 헤엄쳐서 육지로 나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널빤지나 배에 있던 물건들을 붙들고 나가게 해서, 결국 배에 탔던 모든 사람들(276명)이 다 구조되었습니다. 그래서 22절과 34절에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한 사람도 잃지 않고 모두가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놀라운 일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바울을 통해 유라굴로 광풍 속에서도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살게 되었듯, 우리의 존재로 인해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는 일이 일어나고 세상에 축복이 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바울은 죄가 없는데 그를 옥살이 시키고 로마 법정까지 호송해가는 로마 군인들은 폭풍과 풍랑 속에서 다 죽고, 죄수들도 다 죽고, 선량한 시민들과 바울 같은 사람은 살아났다고 하면 아주 좋은 스토리가 아닙니까? 권선징악을 주제로 하는 드라마들은 대부분 주인공이 착한데 어려움을 겪다가, 마지막에 악한 자들은 잘못되고 주인공은 잘된다는 결론이 아닙니까? 나쁜 자들은 천벌을 받아야 속이 시원한 게 아닙니까? 그런 식으로 전개되어야 영화나 드라마도 성공하고, 또 교회도 잘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런 것이 세상의 생각이라는 겁니다. 바로 그게 인간적인 생각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다음에 ‘잘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잘했다고 하니까 기고만장해졌는지, 조금 후 예수님이 자기가 고난당하고 죽고 부활할 것을 이야기하시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야단을 쳤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마 16:23-24, 새)
자기 생각으로 주님을 자기 뜻대로 하려고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람의 일’이고 사탄이 원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요즘 보면 참 안타까운 일들이 많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도 있고, 미국이나 한국이나 정치적으로 대립하며 나라가 갈라져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이 생각을 가진 분이 있고 저 생각을 가진 분도 있고, 서로 생각이 다를 겁니다. 그래서 정말 신실한 크리스천은 정치를 할 수 없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런데 어느 신문에서 아주 좋은 글을 봤는데, ‘원칙 있는 승리를 하거나 패배를 하는 것은 괜찮다.’ 하는 말이었습니다. 정말 좋은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원칙 없이 승리하면 별 소용이 없습니다. 이때는 이 말을 했다가 상황이 바뀌면 다른 말을 하는 것은 원칙이 없는 겁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이든 원칙을 지키다가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는데, 그것이 아주 훌륭한 일이라는 겁니다.
우리 크리스천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원칙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원칙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붙들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성경 말씀은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모든 사람이 죄인이고, 그래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아야 한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나는 살고, 착한 사람은 살고, 저 나쁜 놈들은 다 죽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인간적인 생각이고 사탄이 원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모든 사람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여러 가지 고난을 겪으면서도 이때까지 온 것입니다. 만약 바울이 자기만 살기를 원했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혼자 살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살아난다는 약속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끝까지 함께 했고, 그래서 바울 때문에 그들이 다 살아났습니다.
[나가는 말]
우리 이 시간 다시 한 번 자신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으니까 주님이 지켜주셔서 살아나고 세상에서 잘되며, 주변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니까 벌을 받아 마땅하고 그래서 망해서 죽는 것, 그런데 나는 이렇게 잘됐다고 할렐루야 하며 간증하고 찬양하는 것... 그런 것이 우리의 스토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존재가 주변 사람들에게 구원이 되고 축복이 되어야 합니다. 다 같이 살아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혹시 거기서 누군가 희생해야 한다면, 내가 희생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을 살리고 내가 희생하는 삶, 그것이 크리스천입니다.
나는 내 가족에게, 친척들에게, 이웃들에게, 직장 동료들에게, 사업체 손님들에게,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주변 사람들에게, 교회 성도들에게 축복이 되는가, 아니면 화가 되는가? 나는 그들에게 구원의 통로가 되는가, 아니면 심판의 통로가 되는가? 또 우리 교회도 이 지역사회에 축복이 되는가, 아니면 불편함과 원망과 조롱이 되는가?
이것을 깊이 생각하며, 우리 각자와 우리 교회가 우리 주변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소망과 하늘의 복을 전해주고 나눠주는 도구로 쓰임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